오늘날 국제법의 정립과 운영에 있어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법주체 이외의 또 다른 실체들이 다방면에 걸친 활약을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미 법주체로 자리잡고 있는 국제기구가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NGO, 다국적 기업, 개인, 국제테러조직은 물론 국가내 하위기관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국제무대에 직접 나서고 있다.
특히 근래의 세계화 및 정보화의 물결은 국제관계에서 주권국가의 역할을 크게 변화시켰다. 과거 국가는 국경과 국적을 통해 자신만의 배타적 관할권의 대상을 확정하고, 이에 대한 통제력을 전제로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국가 이외의 행위자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국제법 질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 사적 주체의 국제적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의 내부 통제력에도 차츰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통신기술 혁명으로 촉발된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국가간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상공간을 등장시켰다. 이를 통해 국경이나 국적에 구애받지 않고 공통의 가치와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적 집단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과거 어느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의 생각, 자본, 정보가 국경을 자유롭고 신속하고 대규모로 넘나들지 못했다. 이들의 활동은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제 공적, 정치적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국제적 의제(agenda)를 직접 제기하며, 국제법의 형성과 이행 확보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종래 국가들이 독접했던 영역들이 점차 비국가 행위자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바야흐로 주권국가로부터 이들 비국가 행위자에게로 국제법상의 권력이동이 일정부분 현실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국가 중심의 전통적 국제법 주체론만을 바탕으로 해서는 오늘날의 국제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웨스트팔리아 체제의 종언이 다가오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국제법 질서 속에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아직도 국가가 갖고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별국가의 협조가 없다면 현실세계에서 국제법의 이행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비국가 행위자들의 역할이 어디까지 발전하고, 이는 국제법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분석하는 일이다. 국제법이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여러 관여자(stakeholder)들을 법적으로 적절히 소화하지 못하고 국제법의 외곽에만 방치할 경우, 국제법은 현실의 국제사회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법질서로 외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