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머리말
새로 내는 『문장강화』에 부쳐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원래 1939년 2월 그가 주관하던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되다가 9회로 그치고 이듬해 문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반백 년이 흘러간 지금에 이 해묵은 책을 신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글을 우리 문자로 쓰게 된 것은 실상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금세기로 들어와서 신문학 운동의 발전과 함께 비로소 국문이 민족의 표현수단으로 확정이 되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과 고심, 그런 경험의 축적은 오로지 한문으로 해왔을 뿐, 국문을 구사하는 문제는 별로 고려해본 바 있지 않았었다. 지금 돌아보건대 한문에 토를 단 식의 애국계몽기 문체로부터 1930년대의 썩 세련되고 발랄하고 현대적 의사를 담은 문장으로 비약한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이런 표현 능력은 작가의 특수한 기술에 속하였으며, 국민 일반이야 말할 나위 없고 유식층 사이에도 거의 파급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데는 달리 까닭이 있다. 국어교육을 괄시하고 끝내 ‘조선어 말살’까지 획책한 식민지적 제약이 작용했던 것이다.
『문장강화』는 곧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주제를 내걸고 거기에 관해 장절을 나누어 진하고 진지하게 강론한 내용이다. 소위 문화적 암흑기라고 규정된 상황에서 민족교양에 이바지하는 뜻을 지녔음과 아울러 민족어를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노력에 값하자는 것이었다.
이 책은 한우충동(汗牛充棟)으로 쌓인 책더미 속에서 결코 흔히 만나기 어려운 미덕을 지니고 있다. 글은 이렇게 쓰느니라고 논설을 펴기보다는 우리의 눈앞에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쪽이다. 동원된 예문이 적절하고 예문의 앞뒤로 들어간 설명 또한 간결하고 명료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집결해 놓았다 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론과 행동이 둘이 아니듯, 자기의 삶을 어떻게 하고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역시 하나로 통합되는 문제다. 그렇기에 문장이란 소홀해도 괜찮을 일이 아니요,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와 연관해서 고통해야 하고 그 공부에 정련까지 요망되는 것이다.
오늘날 국어교육에서 누구나 언필칭 글짓기를 강조한다. 대학의 교양과정에도 작문이 필수의 교과로 들어가 있다. 과연 작문교육이 어떤 실효를 거두고 있는가? 여기에 관해서 책은 숱하지만 쓸 책을 찾자면 귀한 것 같다. 극히 형식적·고식적 아니면 수사학적 지식을 긴치 않게 나열한 따위들이 걸거칠 뿐이다. 이 『문장강화』는 시대적 갈구에 응해서 나온 것으로 이미 고전적 노작이 되었거니와, 현재적으로도 아직 빛이 바래지 않고 쌕쌕하다.
무릇 어느 사물이고 다 그렇지만, 이 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안목이 일정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저서의 구석구석에까지 미친 작자의 문장관은 안목이 높고 건실하다. 그런데 스타일리스트적인 편향이 엿보인다. 문체의 폭넓고 힘차며 생동하고, 천태만상을 포용하는 변화를 감당하려 않는다. 정제·우아의 아름다움에 조야·골계의 미는 가려져 있다. 우리의 고전 문장에 애정 어린 관심이 베풀어져 있는 것은 곧 건전한 양식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춘향전』 등이 가지고 있는 문체의 민중적 역동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 점은 당시 학계의 인식수준의 한계지만 저자 자신의 문장관에도 문제는 없지 않다.
지은이 이태준에 대해서, 그의 작품들이 독자들로부터 오랫동안 차단되어 있었다 해도 여기에 소개하는 말을 붙인다면 부질없이 될 듯싶다. 당시 소설가로서의 이태준의 작가적 명성은 시인으로서의 정지용(鄭芝溶)과 쌍벽을 이루었다. 시인 정지용은 그의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태준(泰俊)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 권은 된다.
이번 신판은 1947년 박문출판사에서 펴낸 증정판(增訂版)을 대본으로 삼았다. 원래의 체제와 내용을 그대로 살렸다. 다만, 종서체를 횡서체로 개조하고 표기법을 현실화했으며, 노출된 한자를 죽이고 필요한 경우에 한정해서 괄호 안에 집어넣었다. 명백히 오자로 판정되는 것은 바로잡았고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인용문은 다른 선본과 비교했다. 그러나 원저에 조금이나마 손상이 가는 손질은 가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여러 인용문들의 작자에 대한 간단한 인명 해설을 끝에 붙여서 독자의 참고가 되도록 했다.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의 고전적 노작에 내가 해제를 얹는 것은 실로 외람된 노릇이다. 나는 이태준 소설의 애독자다. 더욱이 이 『문장강화』는 나 자신 글쓰기에 유의하던 젊은 시절에 흥미롭게 읽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낸 책이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이 책을 교양문고의 하나로 간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의해와서 나는 즉각 좋은 뜻이라고 찬성하고 기뻐했다. 그래서 이렇게 해제의 고역을 떠맡게 된 셈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사적인 부채를 이토록 거친 말로 갚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이다.
1988년 11월 임형택
2025.3.9.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