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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권위가 일상적 공간으로 확장됨
B. 공적 영역에서의 대규모 치유 (1:32–34)
예수의 능력이 공적으로 폭발하지만, 정체성은 통제됨
C. 중심 전환점: 기도 (1:35)
능력의 근원이 기도에 있음을 강조
D. 사역 방향의 선언 (1:36–39)
예수 사역의 우선순위 명확화
E. 경계 밖 존재의 회복 (1:40–45)
정결의 전이: 부정이 예수에게 오지 않고, 정결이 환자에게 감
3. 대칭적(신학적) 구조로 보면
A – B – C – B′ – A′ 구조로도 볼 수 있음
| 구분 | 내용 | 핵심 주제 |
| A (29–31) | 개인 치유 | 섬김으로 회복 |
| B (32–34) | 다수 치유 | 능력의 확장 |
| C (35) | 기도 | 사역의 근원 |
| B′ (36–39) | 전도 확장 | 사명 선언 |
| A′ (40–45) | 한 사람(나병환자) | 사회적 회복 |
→ 기도(1:35) 가 구조적·신학적 중심
4. 신학적 핵심 요약
예수님은 왜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셨을까?
본문 : 막1:29–45
여러분은 사람들이 나를 많이 찾고, 인기가 생기면 기분이 어떨 것 같나요?
“필요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을 것 같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바로 그런 상황에 계셨습니다.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신 후, 베드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 집 안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평범한 집 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병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장모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나요?
예수님을 섬깁니다.
은혜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해가 지자
온 동네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집 앞이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능력은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더더욱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바쁠 때, 기도로 나아가신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뜻밖의 장면이 나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때,
해야 할 일도 많고, 기대도 클 때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더 들어가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기도로 방향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도 바쁘고, 선택이 많고, 압박이 클수록
기도는 나중으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를 선택하지 않고 사명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모두가 주를 찾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여기에 계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머무는 것이 쉬웠지만,
떠나는 길이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가장 소외된 한 사람에게 향한다
이후 예수님 앞에 한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당시 나병은 병이기도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는 삶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대십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깨끗해지고,
사람들 가운데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은 더 이상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계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능력으로 인기를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붙드시고,
사명을 따라
다음 자리로,
더 낮은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박수를 따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신 분입니다.
병을 치료하시는 메시야
본문 : 막1:29-45
요즘 병원은 종합병원 체계로 되어 있어 환자들이 자기 병과 관계되는 담당 의사를 찾아가야 하고 또 유명한 의사의 진료를 받으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 병원은 주로 동네 병원이 중심이었고 밤에 환자가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의사는 가방을 챙겨 직접 환자를 찾아가는 구조였습니다. 예전의 의사는 개인적 만남을 통해 환자를 치료했고 그래서 의사는 어느 누구에게나 ‘선생님’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고 찾아와 아픈 부분을 치료해 주는 의사야말로 천사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끔 군대에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전투 경찰들이 데모를 진압하느라고 많이 부상을 당하게 되면, 어느 날 대통령이 병원을 찾아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서 격려하고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다가 다친 군인들에게 큰 격려가 될 뿐 아니라 다른 군인들의 마음속에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다치는 것은 굉장히 값진 것이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 아버지가 외국에 돈을 벌러 가서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돈도 부치지 않고 연락도 없는 동안 부인과 아이들은 굶어가면서 또 장사하면서 엄청나게 고생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남편이 드디어 돈을 벌어 돌아와서 부인의 손을 잡아 주고 병든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 그동안 고생하면서 얼어붙었던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다 녹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동안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들의 아픈 부분을 어루만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돌아온 것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1. 왜 메시아는 병을 치료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정치적 일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즉 백성을 모으고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해서 다른 나라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한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메시아는 그런 정치적 일을 하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길은 육체적 고통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어떤 부분이 아파서 많은 고통을 받다가 어느 날 병원에서 치료받거나 수술을 받아 그 고통이 깨끗이 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육체적 병 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병은 육체의 어딘가 잘못되어 몸이 아픈 것입니다. 즉 몸의 어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은 이상 병은 생기지 않습니다. 병은 적극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병은 가만히 둔다고 해서 저절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병은 적극적으로 치료받아야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셔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모아 인간의 힘으로 어떤 큰일을 할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려는 것은 우리 안에 잘못 되어 아픈 부분을 고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정상적인 상태는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백퍼센트 성령과 능력이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동안 영적으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대신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육체적으로도 병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적으로 병든 것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육체가 아픈 것만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성령을 채워 주는 장본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는 열쇠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만나지 않고는 진정한 축복을 받을 수 없고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의 질병보다 더 심한 병들을 고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너무 메말라 있어 영적인 병은 느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먼저 육체의 질병을 고쳐 주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마음 문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에서 ‘은혜의 해’가 왔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여기서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에 복된 제도가 하나 있었는데, 누구든지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팔려 갔으면 희년이 되었을 때 아무런 돈을 내지 않고도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 다. 이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오는데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년이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희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이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종에서 해방되고 빚에서 해방되고 인질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먼 자만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자가 일어서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빚만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질병까지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나 헤매고 방황하느라 지치고 상하고 병든 우리의 육체를 치료해 주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이것은 병들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대개 이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육체의 고통 때문에 많은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의사들이 와서 병원을 세우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치료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신 것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이 치료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희년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희년은 오십 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충만한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열쇠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든 것이 정상이 아니듯이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든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완전한 건강을 원하듯이 마음속에도 백퍼센트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육체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여러 사람의 병을 치료하심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온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개역개정 :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29-30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병은 결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환자가 있을 때 그 집 식구 전체가 그 병에 달라붙여야하고 다른 일은 거의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 병으로 입원해 있으면 가족은 거의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번갈아 가면서 병실을 지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병수발을 해야 할 정도로 병은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 그 집 분위기 전체가 침통해지고 활기가 없어지며 집안 꼴이 형편없어질 정도로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책임감 때문에 아무리 병을 이기고 싶어도 병이 의지보다 더 강한데 어떻게 합니까?
아마 베드로의 집에 장모도 같이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장모가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집안 꼴은 엉망이었고 예수님이 그 집에 찾아오셨지만 예수님을 대접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 이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그들은 회당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문제에 적용시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말씀드리는 것을 아주 좋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아주 잘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는데 이 열병은 빨리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예전 어른들은 한국 전쟁 때 많은 사람이 장티푸스로 열이 나면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열이 심한지 병에 걸린 사람들은 혼수 상태에 빠지고 온몸이 새카맣게 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건강이 많이 좋아져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중국과 홍콩에서 시작되었던 ‘사스’나 ‘코로나’라는 질병도 고열이 나면서 사람이 죽게 되는 열병에 속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열병이 걸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그의 손을 잡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환자들의 손을 잡아 줄 때가 많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 손을 잡아 주면 아주 좋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아 주심으로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주심으로 그 열병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 뜨거운 열을 받으시면서 ‘내가 목마르다!’고 소리를 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병이 낫고 은혜를 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만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채찍질당하신 것과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담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음을 입고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냥 환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완치가 되었습니다. 조금도 어지럽거나 비틀거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1절)”
평소에 베드로의 장모는 손님을 대접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 한번 손을 잡아 주심으로 베드로의 장모는 병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정상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평소보다 더 원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때 예수님의 능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열이 떠난 후에도 베드로의 장모는 어지럽다거나를 쉬어 원기를 회복해야 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정모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열을 떠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새로운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병을 치료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병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수단이지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병은 인간이 자꾸 연구하면서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예수님이 병을 고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저녁에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32-33절)”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해가 지면서 시작되고 해가 지면서 마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해가 질 때를 기다렸다가 그 동네에 있는 환자란 환자는 다 데리고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을 구별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병은 두 종류였습니다. 하나는 모든 육체의 질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으로 귀신이 들려 미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34절)”
예수님은 다양한 병에 걸려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다 없애 주셨습니다. 즉 그들의 병을 예수님이 다 가져가신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병을 가져갈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병을 모두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미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무너지고 몰락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마음이 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정신적 거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귀신 들린 것은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완전히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귀신 들린 사람을 사탄의 세력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시 이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죽으신 후에나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병들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은 모두 정상적이지 못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이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주로 헛소리나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정상인데, 예수님을 알아보고 제대로 된 소리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영적 세계에 대해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있는가 해서 귀가 솔깃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 외에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사탄의 세력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해야 할 일은 빨리 사람들에게서 떠나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귀신의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하는 헛소리를 일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점쟁이나 무당들이 하는 말 가운데 맞는 말이 있다 해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영들은 이미 저주받은 영들이기 때문입니다.
3.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후에 갑자기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그 동네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았고 귀신이 나갔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예 아침 일찍부터 베드로의 집에 몰려들어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딴 곳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새벽 오히려(개역개정:아직도) 미명에(개역개정:밝기 전에) 예수 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온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5-37절)”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인기는 더 높아졌습니다.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일인지 기도로 물어보셨습니다.
“아버지, 저를 통해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으려고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 저에게 가장 원하시는 일인가요?”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38-39절)”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근본 목적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복음에 그들의 마음 문을 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근본 목적은 전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육체적으로 병이 낫고 정신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 앞에 몰려들기 시작하는데도 예수님은 야속하게 그들을 떨쳐 버리고 다른 마을로 가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참 야속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를 치료할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중단하고 다른 마을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는 것이 모두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데 비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 모두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던 사람들의 마음은 돌짝밭과 같이 단단하고 강퍅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병이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면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모든 육체의 병도 치료되고 정신의 병이나 우울중도 치료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받고 난 후에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한 나병 환자를 만나셨습니다. “한 문둥병자가(개역개정: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끓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우리는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끓어엎드려 고쳐 주기를 간구한 것을 쉽게 생각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막상 우리가 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 사람처럼 예수께 나아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일단 그 당시나 그 후에도 많은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나병 환자들은 이 병이 하나님이 저주하신 병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 앞에 나올 생각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나병을 가진 사람이 정상인 앞에 오면 돌로 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이 이 병에 한 번 걸리면 낫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에 나병 환자를 돌보던 사람이 저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한센 환자들이 있는 동네마다 다니면서 약을 받으러 나오라고 마이크로 아무리 떠들어도 한 명도 나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거저 약을 주는데 왜 안 나오는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병이 나아 무엇을 하느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병이 낫는다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 후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이 모든 미래를 포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감히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일단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절망이고 자포자기입니다. 이 사람은 절망을 이기고 자포자기를 이기고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끓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이 사람은 자기 병이 낫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감히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자기의 병을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원하시면 이 무서운 병도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람의 믿음이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 필요 없고 오직 주님의 결심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오케이’ 하시면 이 병은 낫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민망히(개역개정: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41절)”
예수님은 이 사람의 처지를 보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나병 환자의 마음과 같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여기에 나오기까지 마음속에서 싸웠던 갈등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절망과 자포자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거절당했을 때 당할 수치와 절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의 눈초리와 멸시의 시선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나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병든 손에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가져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 ‘내가 원하노니’라는 말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물론’이란 뜻입니다. ‘물론! 당연히!’ 영어로는 ‘absolutely, Surely’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너무나도 그가 이 병에서 놓여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 사람의 마음과 똑같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 하셨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사람은 그 즉시 문둥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둥병을 모두 자신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십 자가 위에서 다 태워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개역개정:입증하라) 하셨더니(44절)”
예수님은 이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예수님은 더 이상 동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인기나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치료받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간사하게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육체의 병이 나은 감사를 잊어버리고 예전과 똑같은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을 원하시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백퍼센트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병의 치료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 영혼은 거의 죽기 일초 전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치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의 병을 치료해 주심으로 영적인 병까지 고쳐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 문을 활짝 열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속사람을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 주시도록 간구드립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멋진 삶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