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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정보교환 종친 카페
 
 
 
카페 게시글
평창공파(수-윤-희증) 스크랩 부산 삼절사의 남원양씨
양희출(천산) 추천 0 조회 161 15.04.03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김포의 선영

부산 삼절사 문중의 남원양씨는 병부공후 문양공의 자손이며 선영은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이다.

문양공 양성지는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공조판서, 중추원사, 춘추관사를 지내시고 숭정대부에 책록되시고 남원군에 봉해지셨다. 그 자손들은 김포의 통진에 세거하였는데 부산 삼절사 문중의 남원양씨는 문양공의 2子 정선공 양수의 자손이다.


첫째 아들 양원은 양지현감을 지내시고 종친부에서 활동하신 후 이조참의에 증직되셨다. 손자 양치는 한성판관을 지내시고 석성현감을 지내시고 금성현령을 지내시고 삭녕군수를 지내시고 군기시제조를 지내시고 원종공신이 되셨고 손자 양제는 해군판관을 지내시고 신창현감을 지내시고 의빈부경력을 지내셨고 손서 송질은 영의정을 지내시고 여원군(礪原君)에 봉해지셨다


둘째 아들 양수는 충익부 도사를 지내시고 낭천현감을 지내신 후 통정대부에 책록되시고 정선군수를 지내셨다. 손자 양윤은 맹산현감을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책록 되셨다.

 

셋째 아들 양찬은 삼척부사를 지내시고 웅천부사를 지내시고 제주목사를 지내신 후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시고 영해부사를 지내시고 수원도호부사를 지내시고 포도장을 역임하셨다. 손자 양형은 숙척도호부사를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책록되셨고 손자 양숙은 양근군수를 지내시고 이천부사를 지내시고 정주목사를 지내시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셨다.

 

넷째 아들 양호는 증산현감을 지내시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셨다. 손자 양결은 호군을 지내셨고 손자 양활은 오위도총부 사과를 지내셨고 손자 양연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시고 홍문관 대제학을 지내시고 춘추관사를 지내시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내시고 이조판서를 지내시고 병조판서를 지내시고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시고 판의금부사를 지내셨고 손자 양담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시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셨다.


1-1. 문양공 양성지와 원주변씨의 묘




1-2. 정선공 양수와 반남박씨의 묘




1-3. 맹산공 양윤과 광주이씨의 묘




문양공께서는 부모 생전에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해 오다가 벼슬과 명망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조정에 청하여 맏아들 양원은 양지 현감이 되게 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받들게 하였고 둘째 아들 양수는 횡성 현감이 되게 하여 어머니의 묘소를 받들게 하였다. 정선공 양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6년 동안 지방관으로 나아가서 조모의 묘소를 받들었으며 효를 실천하였다. 배위 반남박씨와의 사이에서 1子 양윤을 두었으나 이후 자손들은 혼맥으로 인해 사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인연으로 세거지를 이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맹산현감을 지낸 양윤의 배위는 예조판서 이세좌의 셋째 따님이신데 장인이신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가 사사될 때 형방 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역을 전하였다. 연산군이 생모의 원한으로 갑자사화를 일으킬 때 연산군은 이세자의 형제와 아들과 사위 모두에게 장을 때려서 외딴 곳에 유배를 보냈으며 사면할 기회가 있더라도 놓아주지 말라고 하였다. 양윤은 평안도로 귀양을 갔으며 유배되어 안치되는 날 박천군수가 쌀 15두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박천군수 이명필은 형벌을 받았다. 물론 중종반정 이후에 양윤은 신원을 회복하였지만 이후에도 그 자손들은 사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중종의 장자는 인종이며 인종의 외숙은 윤임으로 대윤파라 하였고 중종의 차자는 명종이며 명종의 외숙은 윤원형으로 소윤파라 하였다. 인종의 외숙과 명종의 외숙은 파평윤씨 일가이었지만 인종이 일찍 승하하자 명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소윤파는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대윤파를 제거하였다. 문양공의 자손들은 인종의 인척으로 양윤의 종질 양윤신과 양윤온은 을사사화의 화를 당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양윤의 외조부 박병중은 인종 정비의 재종조부이었고 양윤의 종형제 양숙의 외손이 인종의 후비이었다. 또한 양윤의 종질 양윤온이 대윤파의 사돈이었다.

 

맹산현감 양윤은 연산군 때 사화의 피해를 입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신원을 회복하였으나 중종의 아들인 인종의 인척이었으므로 그 자손들은 인종과 명종 시대에 사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인해 도성과 먼 지역으로 이른 시기에 세거지를 이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양윤의 장자는 평창군수를 지낸 양희증이며 차자는 사포서 사포를 지낸 양희삼인데 부산 삼절사 문중의 밀양 입향조 양사원은 양희증의 아들이다. 양사원은 주공(周公)의 청대무왕(請代武王)을 논하여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유방(劉邦)의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논하여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였을 만큼 학문이 깊었다고 진해지고 있지만 사화의 시대를 피해서 밀양의 무안지역으로 이거하셨다.



2. 평창공 양희증의 사적

평창공 양희증 지단

소재지 : 안동시 풍천면 구호리 산3번지

의성군 신평면 청운리와 접하는 행정구역으로

청운리에 세거한 큰아들 양사우의 자손이 세웠다.

숭모사 : 평창공 양희증 봉향

소재지 : 보은군 회남면 산수리

보은군 회남면 산수리는 평창공의 둘째 아들 양사필이 세거하였고 그 자손이 세웠다.


평창공 양희증은 선대 외조부의 집안이 사화의 영향을 가장 깊게 받았고 그로인해 아버지는 귀양까지 가게 되었으며 인종의 인척으로 혈족들이 을사사화의 화를 입게 되자 그 자손들은 충청 이남 지역으로 세거지를 이거하였다. 아들 양사원은 밀양의 무안지역으로 세거지를 이거하였는데 무안지역은 임진왜란의 충신을 배출한 고장이었다. 손자 양조한과 함께 순절한 동래향교의 교수 노개방이 무안지역 출신이었고 승병으로 큰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의 생가가 무안지역이었다.


3. 진사공 양사원의 장자손 제단(진성단 : 금정구 체육공원로399번길 197)


부산시 노포동 대룡마을에는 양부하의 묘하에 양사원과 그 자손의 제단이 설치된 진성단이 있다. 양사원은 1子 양겸을 낳았는데 밀양 대안마을에서 부산 동래 부곡으로 이거하였다. 양겸은 3子를 낳았는데 양조한, 양근한, 양통한이다. 큰 아들 양조한은 노포동으로 이거하였고 1子 양홍을 두었다. 둘째 아들 양근한은 양정동으로 이거하였다. 셋째 아들 양통한은 2子 양의와 양숙을 두었고 양의의 아들 양취일이 반송동으로 입향하였다. 그 인연으로 반송동에 삼절사를 건립하였다. 양조한과 양통한이 삼절사에 배향된 임진왜란의 충신이다. 


3-1. 양부하와 경주이씨의 묘



3-2. 양태수 묘하 재실 사모재(밀양시 무안면 덕암리)



4. 정랑공 양조한


양조한은 밀양 무안 덕암마을로 입향하신 양사원의 장손이며 아버지 양겸께서 동래부 부곡리로 이거하시어 양조한은 젊어서 동래향교에 입거하였고 문덕겸과는 친한 사이이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동래로 쳐들어왔을 때 양조한과 문덕겸은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의 위패를 동래읍성 안으로 옮긴 후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과 함께 동래부사 송상현을 따라 순절하였다. 양조한은 1子 양홍을 낳았는데 동래성 전투에서 양조한의 아들 양홍도 함께 전사하였다. 양홍은 2子를 낳았는데 양부하와 양태수이다. 양부하는 임진왜란 때 할아버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이 순절하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일본으로 끌려갔고 동생 양태수는 증조부 양사원의 입향지인 밀양 무안 덕암마을로 피난을 갔고 그 인연으로 자손 세거지가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양부하는 이후에 중국사신 심유경과 도모하여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독살하였고 그로인해 왜란의 종결되었다. 이 사실은 염헌집 연려실기술 성호사설 등에 실려있다. 양조한의 동생 양통한은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양부하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양부하는 경주이씨 이종택의 따님과 결혼을 하고 부산 노포동 대룡마을에서 천수를 누렸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양조한의 충절을 지역 사림이 흠모하여 반송 삼절사, 복천 송공단, 안락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4-1. 송공단

   



송공단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공 229-78번지에 소재하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단이며 7개의 단에 15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송공단에는 중앙에 송상현 부사의 비가 있고 왼쪽에 조영규, 노개방의 비가 있다. 오른쪽에 김희수, 송봉수, 양조한, 문덕겸의 비가 있고, 그 옆에 한 단을 낮추어 김상, 송백, 신여로의 비가 있으며, 그 옆으로 한 단을 더 낮추어 동시사란민인위(同時死亂民人位) 비석이 있으며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고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4-2. 충렬사




충렬사는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충렬대로345)에 소재하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92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며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2월과 8월 중정일에는 안락서원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5월25일에는 부산광역시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5. 군자감정 양통한

양통한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양조한의 동생으로 2子를 두었는데 양의와 양숙이며 3부자가 모두 임란의병에 참여하였다. 큰 형님 양조한과 장조카 양홍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양통한 3부자가 임란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양조한의 장손 양부하가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독살하니 임진왜란 제1의 충절의 가문으로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양통한은 형님과 장조카가 순절하고 동래성이 무너지자 스스로 일어나서 의병이 되었으며 북상하는 왜적을 ?았다. 임진왜란 당해년도 6월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비밀리에 통문을 받아든 양통한은 경주의 문천 강가인 반월성 남쪽에서 경주성의 탈환을 위한 결사항쟁의 맹서를 다지게 된다. 이 맹세가 문천회맹인데 12개 고을의 132명의 의병이 모여 짐승의 피를 마시고 서약을 지키자고 의지를 표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혈맹이다. 이후 7월에 영천 복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을 탈환하였고 8월에 서천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9월에 경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문천회맹이 위대한 것은 이후에 다른 회맹을 맺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양통한은 경주 임난 의사 추모회가 주관하여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경주성을 회복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임란창의공원에 추향하였다. 문천회맹 당시에는 양통한의 아들들은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보여지며 4년이 지난 후 팔공산 회맹에서는 큰아들 양의와 함께 참여하였다. 1596년 3월에 팔공산에서 영남의 의병장이 모여서 결성한 팔공산 회맹에는 양통한과 양의가 참여하였는데 양통한의 큰 아들 양의 또한 의병장이 되었던 것이다. 양통한과 양의가 영남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대구 망우공원에 조성된 임란 호국영남 충의단에 두 부자를 함께 추향하였다. 1597년 정유래란이 일어났을 때는 두 아들 양의와 양숙을 데리고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화왕산성 동고록에는 큰아들 양의와 함께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양통한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부하가 형 양조한의 손자인 것을 알아보고 재산과 노비를 주고 장가를 보내서 대를 잇도록 하였으며 그로인해 구족이 번성하게 되었다.


5-1. 임란 창의공원




5-2.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5-3. 의병장 양통한 장군을 추모하며



6. 삼절사

삼절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지, 양조한, 양통한 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양지는 경기도 장단 사람으로 양조한과 양통한의 족숙이며 모두 문양공의 후손이다. 양지는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왕의 경호부대인 겸사복으로 출사하였고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적성현감이었다. 경기도 관군이 무너졌을 때는 적성현에서 병사를 정비하였고 한양수복의 명이 떨어지자 경기도 첨절제사가 되셨고 삭령군에 관군이 결집할 때 삭령군수가 되셨다. 적의 야습을 받은 후 경기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종사관 모두가 전사하실 때 함께 순절하셨다. 그 충절을 숭상하기 위해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삭령의 표절사에 배향하였다. 삼절사는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이 건립하였고 동래부 사림의 제의로 삼절사라고 칭하게 되었고 1840년 사림의 요청으로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일문 삼절의 합사를 조정으로 부터 윤허받았다. 제반 비용은 동래부에서 제공하였고 제향은 향내 유림이 주관하였다. 사당의 강당인 세한당은 절도사로 부터 목재 일체의 사용권을 허락받고 완공하였다. 삼절사는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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