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4회 ― 모델이 도망갔다
1978년 봄.
K예술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실습실은 아침부터 전쟁터였다.
천 조각이 날아다니고, 재봉틀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드르륵― 드르륵―
가위질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싹둑.
싹둑.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박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큰일 났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윤이 다시 외쳤다.
"정말 큰일 났다고!"
윤소희가 재봉틀을 돌리며 말했다.
"도윤 씨가 조용해지면 그때 알려 주세요. 그게 진짜 큰일이니까."
학생들이 웃었다.
도윤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윤소희 씨."
"왜요?"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를 이렇게 정확히 아십니까?"
소희는 재봉틀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시끄러운 사람은 하루면 충분해요."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강인은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자를 대고 선을 긋고, 다시 치수를 확인했다.
도윤이 그의 앞에 섰다.
"강인아."
"왜."
"큰일 났어."
"응."
"모델이 안 왔어."
"응."
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듣고 있어."
"모델이 안 왔다고!"
"그런데?"
도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라니? 오늘 첫 패션쇼 연습이잖아!"
그제야 강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도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송강인. 너는 불이 나도 '그래서?'라고 할 사람이구나."
강인이 다시 패턴으로 시선을 내렸다.
"불이 나면 끄면 되지."
"봐! 이럴 줄 알았어!"
그때 실습실 문이 열렸다.
김태석 교수가 들어왔다.
학생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도윤도 입을 다물었다.
김태석 교수는 실습실을 둘러보았다.
"준비됐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묻지. 준비됐나?"
최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모델 한 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도윤이 손을 들었다.
"도망갔습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도윤을 바라보았다.
교수도 그를 바라보았다.
"도망가?"
"정확히는 연락도 없이 안 왔으니 도망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도윤."
"네."
"자네는 경찰인가?"
"아닙니다."
"그럼 추정하지 말게."
"네."
도윤은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강인에게 속삭였다.
"역시 무섭다."
강인이 대답했다.
"조용히 해."
"너도 무섭다."
김태석 교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십 분 주겠네. 대체 모델을 구해."
실습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학생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도윤의 시선이 천천히 강인에게 향했다.
강인은 모른 척했다.
도윤은 강인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키 183센티미터.
넓은 어깨.
긴 다리.
도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강인이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왜 그렇게 봐?"
도윤이 말했다.
"강인아."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네 표정이 말했다."
도윤은 강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입어."
강인의 눈이 커졌다.
"내가?"
"그래."
"왜?"
"키도 크잖아."
"너도 크잖아."
도윤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얼굴이 너무 화려해."
강인이 대답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소희가 옆에서 말했다.
"강인 씨 말이 맞아요."
도윤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윤소희 씨. 우리는 언제쯤 친해질 수 있을까요?"
"도윤 씨가 조용해지는 날요."
"그럼 다음 생에 뵙겠습니다."
소희가 웃었다.
그때 미송이 강인 앞으로 다가왔다.
"한번 해 봐요."
강인이 미송을 바라보았다.
"제가요?"
"네."
"못 합니다."
"아직 해 보지도 않았잖아요."
"안 해 봐서 압니다."
미송은 웃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옷은 잘 보일 것 같은데."
도윤이 즉시 끼어들었다.
"맞아. 문제는 움직일 때야."
강인이 도윤을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 편이야?"
"항상 네 편이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결국 강인은 떠밀리듯 탈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탈의실 문이 열렸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강인은 짙은 감색 재킷과 넓은 바지를 입고 서 있었다.
도윤의 입이 벌어졌다.
소희도 놀랐다.
최현우는 팔짱을 낀 채 강인을 바라보았다.
오세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옷을 살폈다.
그리고 미송.
미송은 잠시 강인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어색하고 무뚝뚝한 모습과 달랐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 반듯한 얼굴이 의상과 잘 어울렸다.
도윤이 감탄했다.
"야."
강인이 긴장했다.
"왜?"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멋있다."
"……."
"평생 움직이지 마."
강인이 주먹을 들었다.
도윤은 얼른 소희 뒤로 숨었다.
"폭력 반대!"
미송이 웃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강인의 주먹이 멈췄다.
"정말입니까?"
"네."
도윤이 소희에게 속삭였다.
"봤어요?"
"뭘요?"
"내가 칭찬했을 때는 주먹을 들었는데 미송 선배가 칭찬하니까 목소리까지 부드러워졌어요."
강인이 말했다.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말이야."
첫 패션쇼 연습이 시작됐다.
김태석 교수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학생들이 차례로 런웨이를 걸었다.
드디어 강인의 차례였다.
도윤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긴장하지 마."
"안 해."
"얼굴이 하얀데?"
"원래 하얘."
"손 떨리는데?"
"추워서 그래."
도윤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귀랑 손만 추운 날이구나."
강인은 도윤을 노려보고 런웨이 입구에 섰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든 시선이 강인에게 향했다.
강인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첫발을 내디뎠다.
왼발.
다시.
왼발.
또다시.
왼발.
학생들이 눈을 깜빡였다.
도윤이 중얼거렸다.
"잠깐만."
소희가 물었다.
"왜요?"
"쟤 오른발 어디 갔어요?"
결국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웃음은 순식간에 번졌다.
강인은 긴장한 나머지 자신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왼발.
왼발.
또 왼발.
상체는 꼿꼿했다.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은 심각했다.
마치 런웨이 끝에 적군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윤은 배를 잡았다.
"야! 송강인! 오른발도 네 거야!"
학생들이 폭소했다.
미송도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강인은 더 긴장했다.
그 결과 걸음은 더욱 이상해졌다.
김태석 교수가 손을 들었다.
음악이 멈췄다.
강인도 멈췄다.
교수가 말했다.
"송강인."
"네."
"자네는 지금 어디 가나?"
강인은 잠시 생각했다.
"런웨이 끝까지 갑니다."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내가 보기에는 입대하는 것 같네."
실습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도윤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김태석 교수가 덧붙였다.
"자네는 런웨이가 아니라 군대 행진이군."
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수가 물었다.
"군대 다녀왔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벌써 행군하나?"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강인은 생각했다.
'아버지. 서울은 참 무서운 곳입니다.'
그때 미송이 다가왔다.
"제가 알려 드릴게요."
강인이 바라보았다.
"걷는 걸요?"
"네."
"저 스무 살입니다."
"알아요."
"스무 살 동안 계속 걸었습니다."
미송이 웃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걷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강인은 할 말을 잃었다.
도윤이 멀리서 외쳤다.
"선배님, 정확합니다!"
"박도윤!"
미송은 강인의 앞에 섰다.
"저만 보세요."
강인의 표정이 굳었다.
"네?"
"다른 사람 보지 말고 저만 보고 걸어와요."
실습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도윤의 눈이 반짝였다.
소희가 그를 노려보았다.
"입 다물어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할 것 같아서요."
미송은 런웨이 끝에 섰다.
"자, 와요."
강인은 미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이번에는 오른발이었다.
다음은 왼발.
다시 오른발.
조금 어색했지만 제대로 걷고 있었다.
도윤이 감탄했다.
"기적이다."
소희가 그의 팔을 때렸다.
"조용히 해요."
강인은 계속 걸었다.
그의 시선은 미송에게만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덜 긴장됐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시작됐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하지만 발은 제대로 움직였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리고 마침내 미송 앞에 도착했다.
미송이 웃었다.
"잘했어요."
강인이 대답했다.
"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너무 똑바로 쳐다보셨어요."
"보라고 하셨잖습니까."
미송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우리 강인이는 시키면 정말 그것만 합니다!"
실습실이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모두가 돌아보았다.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큰 키.
긴 다리.
당당한 눈빛.
검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넘긴 화려한 외모.
장혜린이었다.
패션모델.
그녀는 늦게 도착한 것을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런웨이 위에 서 있는 강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강인만 바라보았다.
"저 사람 누구예요?"
도윤이 대답했다.
"송강인이요."
혜린은 강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델이에요?"
도윤이 웃었다.
"아뇨."
"그럼?"
"원래 디자이너인데 오늘 잠깐 군인입니다."
또 웃음이 터졌다.
강인은 눈을 감았다.
혜린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네?"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어요. 움직이면 재미있습니다."
강인이 런웨이에서 내려왔다.
"박도윤."
도윤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나는 사실만 말했어."
그날 첫 패션쇼 연습은 엉망이었다.
모델은 늦었고,
도윤은 시끄러웠고,
강인은 런웨이에서 행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많이 웃었다.
그리고 강인은 처음 알았다.
옷을 만드는 사람은 런웨이 뒤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만든 옷이 누군가의 몸 위에서 움직이는 순간,
그 옷은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을.
그날 저녁.
미송은 실습실에 혼자 남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넓은 어깨.
긴 다리.
심각한 얼굴.
그런데 발을 그리던 미송의 손이 멈췄다.
왼발.
왼발.
또 왼발.
미송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그림을 지우지 않았다.
한편, 학교를 나서던 장혜린은 친구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
"누구?"
"송강인."
"왜?"
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냥."
그리고 덧붙였다.
"조금 궁금해서."
1978년 봄.
강인은 아직 몰랐다.
자신의 엉망진창 첫 런웨이가 한 여자에게는 웃음을 남겼고,
또 다른 여자에게는 호기심을 남겼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 사랑은,
첫눈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왼발, 왼발, 또 왼발로 엉뚱하게 걸어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