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다물(多物)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다물의 졸업생 스크랩 윤이상
내사랑내곁에 추천 0 조회 28 08.08.16 17: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윤이상   ( 1917 - 1995 )

 

그의 삶과 음악* - 김용환






 1. 머리말
2. 윤이상의 삶과 음악
3. 음악을 매개체로 남북 화해에 앞장선 윤이상
4. 한국에서의 윤이상 연구의 당위성
5. 윤이상 연보
6. 윤이상의 작품목록
각주
참고문헌



1. 머 리 말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 지난 1995년 11월 4일 독일 베를린에서 78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작곡가로서의 그가 쌓은 업적과 명성은 문자 그대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에 걸맞는 것이었다. 윤이상에 대한 유럽 악단의 인식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음악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 또는 그의 음악은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적”이라는 평가로 요약될 수 있다. 40세가 넘어 유럽 창작음악계에 등단한 윤이상은 쇤베르크의 ‘빈악파’(Wiener Schule)를 이어 메시앙, 리게티, 펜데레츠키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자신만의 “고유 언어”를 구사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1980년에 들어서서 유럽 연주회의 기본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으며, 특히 그의 목관작품들은 세계적 주요 음악콩쿨의 과제곡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은 독일에서 출간된 ‘20세기의 중요작곡가 56인’1),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그리고 1995년 5월에는 독일의 자아르브뤼켄 (Saarbrücken) 방송에 의해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수상경력으로는 ‘킬(Kiel)문화상’,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함부르크 아케데미의 ‘플라케테’상,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 및 ‘괴테메달’을 들 수 있다. 윤이상은 사망전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전세계를 통틀어 10명도 안되는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77년에는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이라는 제목으로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자서전적 책이 독일어판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책은 이후 일본과 한국의 여러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출시되었다. 1987년에는 그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베토벤, 슈만, 바그너,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알반 베르크, 올리비아 메시앙 등 세계적인 작곡가의 작품과 예술관을 조망하는 일련의 시리즈를 출판하는 독일의 「Text + Kritik」 출판사가 『작곡가 윤이상』(Der Komponist Isang Yun)이라는 제목1)으로 그의 작품에 관한 논문 모음집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세계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인물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새긴 윤이상의 음악은 하지만 불행하게도 유일하게 그의 조국인 남한에서만 그 가치가 등한시되었었다. 한국에서의 윤이상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연구는(연주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외면된 채, 대부분의 경우 예술인 윤이상이 아닌 ‘동백림 사건의 윤이상’으로 각인되었다. 즉 학문의 연구대상이 아니라, 북한을 넘나드는 친북인사 또는 공산주의자 윤이상으로만 시비의 대상이 되면서 언론 매체의 주요관심사 및 가십거리로만 부각되었던 것이다. 혹은 “윤이상 세계악단에서 정말로 유명한 작곡가입니까?” 하고 그의 음악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감동적으로 설명해 가는 독일 음악학자와 연주가들에게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질문을 해대는 것이 고작이었다.2) 그들은 한국의 음악인들이 윤이상 같은 작곡가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는 대신에 종종 이와같은 질문을 해대는 것에 의아심을 갖다못해 이제는 비아양거리기조차 한다.

 반면에 북한에서 「윤이상 음악제」와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통해서 그의 음악이 집중적으로 연주되고 연구되었다. 자연 윤이상은 북한을 수십차례 방문하였으며,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한다’는 그의 사고 및 이에 따른 그의 행보는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라는 본인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실정법을 어긴 용공주의자 또는 “그는 한국을 「동백림 사건」을 통해서만, 북한은 김일성이 보여주는 대로만 보아왔다”3)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조국의 굴절된 역사속에서 민족주의 예술인으로서 그 삶을 살아온 윤이상은 자연 한 인간으로서는 매우 파란만장하며 고통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평생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윤이상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그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가 지향하는 음악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경향적 예술 (=참여예술)의 구분은 위험하며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4) 이러한 그의 음악관 내지는 인생관을 몸소 실천했던 윤이상은 26년간 이국을 떠돌면서 끊임없이 조국통일에 대한 열정, 나아가서는 폭력과 불의에 고통당하는 인류, 자연을 파괴하는 인류에 대한 경고 등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인류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음악으로 토해내야만 했다.

베를린 자택의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놓고 조국을 그리워하고, 누군가가 가져다준 통영 멸치를 보며 감개무량해하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윤이상, 말년의 일본 방문시에는 통영의 앞바다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하여 배를 타고 남해안 근처까지 오기도 했다는 윤이상은 “생을 마치기 전에 고향땅을 한번 밟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라는 한스런 유언을 남긴 채 멀리 이국 땅에서 외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이념과 이념, 문화와 문화의 접점에 서서 두 이질적 이념과 문화가 서로 배반하고 화해하는 변증의 역사를 지켜본 ‘경계인’이었다. 이제 그는 베를린 시당국이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을 위해 조성한 가토우 지역의 특별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윤이상 세계학회」가 발족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를 ‘올해의 예술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하고 그의 음악과 그의 실천적 행위를 기리는 ‘윤이상 기념사업회’가 추진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 후학들 역시 그의 음악과 그 실천적 행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우리 음악사에서 정립하는 것만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각오이다.



2. 윤이상의 삶과 음악

윤이상은 1917년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선비출신인 윤기현(尹基鉉)6)과 부인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7) 통영에서 서당을 3년간 다닌 윤이상은 여덟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여기에서 오르간 소리를 접하게 되고 집 근처의 교회에서 찬송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웃마을의 한 젊은 사람에게서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기도 한다. 윤이상의 음악적 감수성은 매우 뛰어났으며, 일찌기 작곡적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현재 충무시내 대부분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의 교가가 이 시절 윤이상의 작곡에 의한 것이라는 언급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8) 통영국민학교를 22회로 졸업한 윤이상은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상업학원(협성 상업강습소)에 진학한다.

하지만 윤이상은 열일곱살에 서울로 상경한다. 당시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를 거역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2년간 머무르는 동안 윤이상은 당주동의 어느 상점직원으로 일을 하면서9) 한국에 최초로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의 제자로서, 동 군악대출신의 한 음악인10)에게서 화성학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국립도서관을 방문해 가며 서양의 고전음악과 쉬트라우스(R. Strauss), 힌데미트(Hindemith)의 음악을 익힌다. 1935년에는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작곡하여 홍난파에게 보내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11) 이 해에 고향으로 돌아간 윤이상은 마침내 ‘상업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배운다’는 아버지의 조건부 허락을 얻어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음악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2년간 작곡·음악이론·첼로 등을 배운다.

귀국 후(1937년)에는 화양학원(보통학교 과정)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윤이상은 1939년에 다시 일본의 동경으로 건너간다. 불란서 유학을 마치고 와서 명성을 떨치던 이케노우치 도모히로에게서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윤이상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4년에는 반일활동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두달간 옥고를 치루며 폐결핵에 걸리기도 하였다.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중에 해방을 맞이한 윤이상은 통영으로 내려간다. 통영에는 당시 시단에서 이미 발판을 굳힌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이 「통영문화협회」를 창설하고 있었다. 윤이상은 이 협회에 가입하여 국민학교 동창인 정윤주와 함께 이 협회의 음악부문을 주도해 갔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은 문학에도 상당한 재질이 있어 당시 부산 「국제신보」에 단편소설 ‘탈출’을 연재하기도 하였으며 기획력과 그 기획의 추진력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것으로 그와 활동을 같이 했던 이들은 회상하고 있다.12) 하지만 문화협회는 전반적인 혼란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윤이상은 부산으로 가서 그곳 고아원에 취직한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일본에서 매일같이 도착하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47년에는 탁혁수(제1바이올린), 최모(제2바이올린), 최기영 (비올라)와 함께 「통영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첼로주자로 활동한 바있고13), 이후 통영여자고등학교(1948-49)와 부산사범학교와 고등학교 (1949-52)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이 때 윤이상은 결핵으로 인한 심한 각혈과 함께 쓰러진다. 그러나 약 3주간의 병원생활과 3개월 동안의 치료와 요양끝에 건강을 회복한 윤이상은 다시 학교로 복직하며, 이때 같은 학교(부산 사범학교)의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이수자와 결혼하여 (1950년) 첫딸(정)을 낳는다. 6·25전쟁시에는 ‘전시작곡가협회’를 조직하고 ‘한국작곡가 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4년에는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한국 작곡가 협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리고 1950년에 그동안 작곡한 가곡(고풍의상:1948년, 달무리:1948년, 그네:1947년, 편지:1941년, 나그네:1948년)들을 모아 가곡집 『달무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14) 1952년에는 이은상 작시 「낙동강」15)에 곡을 붙여 전쟁속의 젊은이들에게 조국수호의 의지를 심어주는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첼로소나타와 가곡 및 실내악곡을 발표하였다. 휴전협정이 끝난 직후 1954년에 윤이상은 「악계구상의 제문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당시 우리의 악단이 처한 여러가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이 글은 민족전통음악의 바탕위에 세계음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윤이상의 사고를 이미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윤이상을 조망하는 데 있어서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후에 아들 우경을 얻은 윤이상은 195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곡으로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문화예술인의 최고영예인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윤이상은 유럽으로의 유학을 결심한다. 그곳에서 유럽의 현대음악, 특히 쇤베르크·베베른·베르크의 악파, 세칭 ‘빈악파’의 12음기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자신이 그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유럽음악에 대해 배운 것은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인식과,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요셉 루퍼(Josep Rufer)가 지은 「12음 작곡법」의 일본어 번역본을 접한 것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곡기술이 결함투성이라는 자각”도 한 몫을 했다.

1956년 6월, 40세가 거의 다 된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간 윤이상은 새로운 학업을 시작하였다. ‘제2의 수업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오뱅(Tony Aubin)에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Pierre Revel)에게서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1957년 8월에는 독일의 (서)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전학하여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에게서 대위법과 푸가를, 보리스 블라허 (Boris Blacher)에게 작곡을, 그리고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요셉 루퍼(Josep Rufe)에게서 12음기법을 배웠다.

1958년에는 처음으로 서독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개최된 현대음악 하기강습회에 참가하여 쉬톡하우젠·노노·마데르나·케이지 등을 알게 된다. 1959년 7월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한 윤이상은 한국으로의 귀국을 준비하던 중, 그 해 9월에 네델란드의 빌토벤(Billthoven)과 독일의 다름쉬타트(Darmstadt) 현대음악제에서 그의 쇤베르크 12음기법에 토대를 둔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소품」(1959년)과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1959년)이 프란시스 트라비스(Francis Travis)의 지휘로 성공적으로 초연되자 이에 용기를 얻어 독일에 체류하게 된다. 특히 「일곱악기...」는 12음기법을 차용하면서도 그 2악장에서는 동양의 음양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시도(첼로의 글리산도)가, 3악장에서는 훗날의 윤이상 음악언어의 토대이자 작곡방식의 일반적 원칙을 나타내는 ‘주요음향기법’(Hauptklngtechnik)이 서유럽의 12음기법과 융합되는 모습이 최초로 시도된다.16) 윤이상이 12음기법에서 수용한 것은 음열들이 순식간에 음계 전체를 포함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부분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부분이 있다’는 동양의 도교사상과 상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12음들에 부여되는 엄격한 균등성과 음들간에 주어지는 서열의 해체 등은 그에게 거리감을 주는 내용이었다.17) 말하자면 윤이상은 12음기법에 입각하여 만든 곡에서조차 모든 극단적인 규칙들을 거부하고 음열들에 변칙과 전위를 허용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반복을 통해 소리의 그룹들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18) 이에 관하여 윤이상은 - 1963년에 만든 ‘가사’(Gasa)와 ‘가락’(Garak)에 사용한 작곡기법을 언급하면서 -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당시에 쇤베르크가 가르친 것처럼 각 작품에 음렬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음렬에 음계의 12음을 여러가지로 변화시켜 정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언제나 하나의 뼈대에 불과했을 뿐이고, 나는 그것을 이따금씩 이용하곤 했다. 나에게 음향적 환타지가 아주 강렬하게 떠오를 경우, 나는 그것을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였다. 자유롭게라고 말하지만, 물론 엄격하고 고유한 법칙에 따르면서였다.19)

1960년에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한 윤이상은 독일의 여러방송국에서 중국과 한국음악에 대한 강연활동을 벌인다. 1961년에는 그의 부인이 독일로 왔고 이들 부부는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에서 잠시 거주한다. 윤이상 부부는 - 이제까지의 생활도 그러했지만 - 이 당시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간다. 작곡가로서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연주가 이루어진다해도 큰 수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윤이상은 모든 일을 열심히 했고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당시 만들어진 곡으로는 관현악곡 「바라」(1960),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정경」(1960),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 (1961년), 실내앙상블을 위한 「낙양」(1962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1963년),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년)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 「낙양」20)은 경제난으로 인해 상금을 타기 위하여 독일 쵸코렛회사인 ‘슈프렝엘’이 주최한 콩쿨의 응모를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이 작품이 당선되지 않았고 그 이후의 다른 작곡콩쿨에서도 고배를 마셨지만, 후에 1963년 하노버의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1964년, 윤이상은 포드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베를린에 정착하게 된다.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안정되면서 창작생활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해에 한국에 있던 두 자녀들이 독일로 건너온다.

1965년에는 전 5악장으로 구성되고 불경번역을 텍스트로 한 그의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Om mani padme hum)가 독일 하노버에서 초연되면서 유럽악단의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되며, 이어서 1966년 10월 독일의 도나우슁엔(Donauschingen) 현대음악제에서는 그의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Reak)이 에르네스트 부어(Ernest Bour)의 지휘하에 ‘남서독일방송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어 윤이상은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윤이상의 「예악」이 유럽악단의 주목을 받게된 이유는 그때까지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자신의 작곡어법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극히 섬세하게 처리된 점에서 찾아진다. 그 작곡어법이란 다름 아닌 앞에서 언급한 ‘주요음기법’(Haupttontechnik), 또는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21)으로서, 각 음들이 모여서 이루는 하나의 음렬이 작품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의 음 내지는 음군이 그 주변의 음들로 장식되면서 작품의 핵심을 이루게 하는 기법이다. 이때 윤이상은 앞꾸밈음, 전타음, 진동, 글리산도를 사용하고 음색을 변화시켜 넓게 구획된 스펙트럼을 그때마다의 주요음들을 장식하게끔 하며, 작품전체내의 기능면에 있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음고는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작곡기법에 관하여 윤이상은 유럽의 - 전통적인 - 음악기법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럽의 음악에서는 음이 연결되면서 비로소 그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때 각 개별음은 비교적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에서는 각 개별음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한국음악에서의 이러한 음들을 연필로 그려진(경직된) 선과 대비시켜 붓으로 그린 운필과 비교하곤 한다. 각 음은 그것이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변화를 하게 된다. 즉 앞꾸밈음, 전타음(前打音),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다이나믹의 변화로 장식된다는 말이다. 특히 각 음의 자연적인 비브라토는 형상화의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고(音高)에 있어서 한 음의 변화는 멜로디를 만드는 음정이 아니라, 장식적 변화에 있어서 하나의 동일한 음의 표현목록의 부분들로서 인식되는 것이다.22)

이러한 윤이상의 언급은 우리에게 그의 음악을 이해하게끔 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 즉 윤이상음악에 있어서 개별음(=주요음) 또는 음복합체(Tonkompex)를 준비하고 꾸미는 장식음이 지니는 커다란 역할과 주요음의 기능이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윤이상 오페라의 대본작가이자 윤이상음악에 정통한 쿤즈(Harald Kunz)는 윤이상이 이 ‘주요음’(Hauptton)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주요음은 고유의 특성이 있다. 윤이상은 이 음들을 나열한다. 이 음들이 때때로 비슷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이 음들은 휴식을 통해 분리되기도 하고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가는 음에서 발전되어 나오기도 한다. 몇초동안 지속되는 오보에 음이 주요음이 되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번번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절단되고 찢겨진 소리직물, 즉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서로 뒤엉켜진 현악기의 음들로 짜인 음향양탄자 (Klangteppich)와 같은 구성물이 주요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윤이상 음악에 있어서 주요음의 판단기준은 이 고립성과 경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개별음이 주요음일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는 하나의 화성이 주요음이 되는데, 이 화음은 때로는 동시에 시작하여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불분명하게 형체가 없는 것에서 점차 형성되어 형상을 띄다가 다시금 갈라지면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것, 식별할 수 없는 것으로 함몰해 버리기도 한다.23)

이러한 주요음기법은 한국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고대 중국의 음악을 특징짓는 표지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윤이상은 이러한 한국의 전통음악 내지는 고대중국음악의 그러한 특징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즉 아시아의 음악은 유럽음악이 가지는 다성음악(Mehrstimmigkeit)이 아닌 단성부적이며 장식적 선율이 수반될 때 우연적인 다성부인 헤테로포니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전에 조직된 유럽의 폴리포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음악적 짜임새이다. 그런데 윤이상은 이러한 동아시아적 특징인 헤테로포니를 유럽적인 폴리포니로 확대시키는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비록 서양음악의 전통에 근거한 주제적·모방적 의미는 아닐지라도 의식적으로 형상화하고 통제된 다중리듬적 형태의 다성음악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개별음을 장식하고 그것의 음색을 변화시키는 윤이상의 방식은 단순히 효과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유한 표현적 질을 나타낸다.24)
이러한 윤이상의 작곡방식이 주목을 받게된 것은 당시 유럽창작계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1955년이후 유럽의 창작계에서는 ‘점묘적 음렬주의’(Punktuelle Serialismus)가 주도권을 상실하고 음악표현의 다원성이 등장하게 된다. 현대음악의 메카 다름쉬타트에서 1957년에 개최된 하기강습회에서는 슈톡하우젠(K. Stockhausen)이 ‘우연성’의 요소를 도입한 「피아노곡 11번」을 발표하였고, 블레즈(P. Boulez)는 ‘우연’(Alea)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우연성 음악’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윤이상이 처음 참가했던 1958년의 同 강습회에서는 존 케이지(John Cage)가 전통적인 작곡체계를 탈피한 ‘우연성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음열주의의 아성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25) 이때 세계 유수의 작곡가들은 음악표현의 다양성을 위하여 이국적인, 특히 (동)아시아의 음악(소재)에 눈을 돌리게 된다.26) 메시앙(O. Messian)과 쉬톡하우젠 (K. Stockhausen)은 인도의 전통의 리듬과 형식에서 영향을 받게되며 케이지는 유전(流轉)의 책인 중국의 『역경』에 직접적 토대를 두는 음악적 처리 방식을 선보인다. 펠트만(M. Feldmann)은 음악적 명상[禪]을 자신의 음악에 차용하였다. 윤이상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충격과 매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야말로 어떤 전(前) 시기보다도 작곡가가 제한을 받지않고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폭넓은 개방성이 부여된 시기였다. 나는 두 조류의 음악이 양극을 이루는 혼돈된 상황속에서 - 즉 한편에서는 작품의 객관성을 보장해 줄 음악적 재료의 철저한 결정주의 내지 규정화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연성 원칙’에 근거하여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비결정주의 - 내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찾는데 고심했었다.

음열음악이 이처럼 퇴조하게 된 이유는 체계적으로 배정된 음열구조와 그에 어울리게 짜여진 음색구조를 적절히 배합함에 있어서 그 한계성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헝가리 출신의 리게티(G. Ligeti)와 폴란드 출신의 펜데레츠키(K. Penderecki)가 이제까지 작곡의 부차적 영역으로 간주했던 음색을 비중있게 취급한, 말하자면 ‘음색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소위 ‘음색작곡’(Klangfarbenkomposition) 또는 ‘음향면 작곡’(Klangflächenkomposition)이라는 새로운 작곡방식을 개발해 내면서 극복된다.27) 바야흐로 음색(Klangfarbe)은 작곡물의 본질적 측면으로 부각되었다.

작곡가들은 음향재료의 확장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며 토론하였다. 이때 비유럽권에서 유입된 악기들 - 특히 타악기 - 은 음악에 질적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와 더불어 소음이라는 현상이 관현악음향에서 가지는 의미가 증폭된다. 리게티는 이러한 류의 작품으로 「환영」(Apparitions:1959년), 「분위기」(Atmosphäres: 1961)를 펜데레츠키는 「폴리모르피아」(Polymorphia:1961년)를 발표한다. 이 와중에서 음향자료의 확장가능성을 동아시아적 음악경험과 사상을 유럽적·무조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하던 윤이상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염두에 두면서 그 토대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나갔다. 즉, 예를 들어 리게티의 경우 개별음에 대하여 거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각기 상이한 밀도와 구조를 지닌 이러한 개별음들로 음악적 짜임(Texture)을 구성하였고, 펜데레츠키는 개별음을 잡음에 가까운 음다발(Tonecluster) 형성의 구조인자로 작용시킨 것에 반하여, 윤이상은 음향경험과 음향구성을 항상 개별음(=주요음)에서 출발시키면서 동아시아의 헤테로포니 원칙에 영향을 받아서 내부적으로 개별적인 움직임을 꾀하는 ‘음향면’(Klangfläche)을 형성하고 핵심에 있어서는 동일한 모델들이 다성적이면서도 동시적인 ‘장식적인 우회’(Umspielung)를 이루는 작업방식을 취한 것이다. 부언하자면, 윤이상의 작곡방식은 내부적 움직임으로 가득찬 음복합체(Tonkomplex)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 복합체에는 잠재적으로, 혹은실제로 고정된 핵심(=주요음)이 있고 이 핵심음이 주로 장식적인(Melisma) 음운동을 통해 변화 및 변조(Modulation)되는 것이다.28) 이렇게 해서 형성된 음복합체를 가지고 작곡하는 방식은 한국의 전통음악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음악에서는 악기들이 경직되게 고정된 음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개의 음은 장식을 동반하며 울리며(=헤테로포니) 그 중심음은 4도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비브라토(떨림주법:농현), 15 종류가 넘는 다양한 방식의 글리산도, 크고작은 음고운동, 음색과 음의 셈여림에서 나타나는 농담효과 등을 통해서 살아움직이며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장식음을 통해 형상화 되는 것이다. 이때 장식음들은 연주하는 각 연주자들에게 위임되어 있지만, 음형성체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작용을 한다.29) 작곡가 자신은 이러한 음향 복합체들이 자기 음악에 어느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알아볼 수 있는 동아시아적 치장을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다.30) 윤이상은 이러한 독특한 작곡방식의 토대를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종교·철학적 가르침인 노장사상의 본질적 요소가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즉 윤이상 음악의 핵심을 나타내는 개별음(=주요음)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사라질 때까지 도교적 의미의 유전(流轉)과정이라 일컬을 수 있는 변화원칙에 따르며, 여기에서는 음과 양이라는 두 근본원리가 대립하면서 상호보충물로서 공동 작용한다는 것이다.31)

이로써 윤이상은 1960년대 초반의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의 뒤를 이어 거의 단절없이 현대음악의 일반적 발전방향에 동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음악학자 Christian Martin Schmidt가 “윤이상이 1956년에 - 그보다 10년전이 아닌 - 유럽으로 건너온 것은 하나의 세계음악사적 행운”32)이었다는 언급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윤이상이 위와 같은 세계음악사적 흐름에 영합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관 및 음악기법의 토대를 이루는 동아시아의 도교사상과 한국의 전통음악에 접근할 수 있게끔하는 단초가 바로 그의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서술에서는 윤이상의 음악수업이 서양음악수업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윤이상은 어릴 적에 유학자(儒學者)였던 부친의 슬하에서 그리고 3년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공자나 장자의 중국고전을 접할 수 있었던 것에서 훗날 어른이 된 윤이상이 노장사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발판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어린 윤이상이 당시에는 중국의 고전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앵무새처럼 외우기만 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윤이상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 통영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통영은 오늘날까지 아악과 민속악을 주관하는 ‘신청’(神廳:악공주합)이 존재하는 전통음악의 寶庫중의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33) 이곳에서 어린 시절(17세까지 그리고 1948-49년에는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을 보내면서 경험한 음악들은 자연스럽게 감수성이 풍부한 윤이상에게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아버지와 저녁 산책길에 들은 ‘남도창’, 어머니가 주위 이웃들과 우물가에서 부른 민요, 미륵산의 사월초파일 행사,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 한밤중에 그물을 끌어올리며 부르는 어부들의 노래소리, 야외극장에서의 가면극 ‘통영 오광대’, 동네의 굿판에서 경험한 무속의 소리, 무당들의 각 동작과 화려한 옷, 부유한 외가 친척집의 연회에서 들은 전통음악(몽고악기 호궁, 거문고의 연주) 등을 그의 소중한(시각적) 음향적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본래 예술가란 자기민족의 전통속에서 발전하기 마련이지요, 다만 한국음악 그대로는 서양사회에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우므로 한국음악의 알맹이, 그 철학적·미학적·음향적 요소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애썼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또 고향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국적인 것의 본질을 되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지요. 한국적인 것의 핵심은 이 우주의 위대한 질서 그 흐름자체가 곧 음악이라는 것입니다.34)

이와같은 고향에서의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윤이상은 1960년 전후의 유럽악단의 상황에 직면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어법과 사상을 동아시아의 노장사상과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소리경험은 윤이상의 훗날의 여러작품에서 현대음악기법의 옷을 입고 재생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작곡가로서의 유럽(독일)에서의 윤이상의 위치는 지금까지 서술한 것처럼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1961년에 작곡된 「교착적 음향」(Colloide Sonore)의 발표시에는 무대연습때부터 연주불가능을 이유로 첼로주자를 비롯한 단원들의 거부반응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공연에 올려진 그 작품은 청중들의 야유를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역시 1961년 다름쉬타트에서의 「교향악적 정경」에서였다. 청중들은 곡이 끝나기도 전에 야유의 휘파람을 불어댔던 것이다. 윤이상은 - 이 음악회에 참석한 메시앙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음향관념에 너무 사로잡혀 연주기술을 너무 배려하지 못한 시절”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윤이상의 추후 작품에서 연주자들을 염두에 두며 그다지 어렵게 쓰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끔 하였다 (하지만 윤이상의 작품 대부분은 상당한 수준의 혹은 고도의 연주기량을 요구하고 있다). 훗날의 회고에서도 베를린 대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보리스 블라허의 “곡을 좀 더 간결하게 쓰라”는 지적을 언급하며 이러한 당시의 각오를 여러차례 피력하였다.

1967년 윤이상은 향후 그의 음악과 생애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경험을 하게된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독일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위한 활동과 1963년에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남한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른바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부인과 함께 기소되었으며 북한을 위하여 간첩활동을 했다는 조작된 죄명으로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제2·3심에서는 각각 15년, 10년으로 감형된다. 부인은 7년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남한정부는 세계의 비판적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다. 쿤쯔·리게티·헨쩨·슈톡하우젠·스트라빈스키·카라얀·클렘페러 등 161명에 달하는 세계적 예술인들은 항의 서명을 남한정부에 전달하였으며,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서울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하였다. 독일정부와 세계적 예술인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연주회를 열고 기금을 모았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당시 서울예고 교장이며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겸하고 있던 임원식만이, ‘비록 실정법은 어겼을지라도 윤이상의 진심은 순수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국내 음악인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변론에 나서게 된다. 임원식은 당시 변호의 내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공산사회에서는 인민대중과 유리된 작품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윤이상은 12음기법을 비롯한 서구 모더니즘의 첨단기법들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음악은 공산사회에서는 숙청감이다. 그의 법 위반은 순수한 창작적 동기35)와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한국적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확신한다...유럽음악계에서는 나 임원식을 위시해 한국음악가 2,3백명을 묶어놓은 것보다 이 한사람의 비중이 더 크다.”36)

수감생활중 심한 고문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윤이상은 이러한 그의 동료 음악인 및 세계 각국의 전폭적인 외교적 압력 그리고 독일정부의 조력으로 1969년 2월 말 독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사이에 윤이상이 수감생활 중에 완성한 희가극 「나비의 미망인」37)은 1969년 2월 13일 뉘른베르크 공연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으며, 윤이상은 이 오페라외에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Riul für Klarinette und Klavier: 1968년)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밀스대학에서 의뢰받은 「영상」 (Image für Flöte, Oboe, Violine und Violoncello)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969년 2월 말, 독일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이미 수감중에서 함부르크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던 윤이상에게 독일 하노버 음대는 그에게 작곡과 강의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윤이상은 1971년 7월 20일에 옥중에서 독일 킬(Kiel) 市로부터 의뢰받은 자신의 세번째 오페라 「유령의 사랑」(Geisterliebe)이 성공적으로 초연되어 「킬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72년은 윤이상의 그때까지의 생애중 최고의 해로 기록될 만한 해이다.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명예교수(1977년 이후 정교수 발령)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의뢰받은 오페라 「심청」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윤이상과 한국에 올림픽 우승 트로피가 수여되었다”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공연되면서 그의 국제적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음악은 유럽외에 미국의 여러 음악제 등에서도 집중적으로 연주되었고, 한국정부는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오페라 「심청」의 공연계획과 작곡가의 초청을 추진하기도 한다. 참으로 격세지감이었다. 비록 여러가지 음악외적인 문제38)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1975/76년을 고비로 윤이상의 작품세계에는 일대 전환점이 이루어지게 된다. ‘동백림사건’의 아픔을 “분노가 서린” 약 10년간의 세월에 걸쳐 극복한 윤이상은 세계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즉, 그 이전의 작품이 구체적인 청중이나 특정계층이 아닌 자신에게 근엄한 척도를 마련해주는 제2의 자아를 위해 쓰여졌다면, 이제부터는 일반적인 이해를 수반하는 대중에게로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작곡의 동기와 소재는 인류가 처한 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찾아졌으며 폭력과 불평등을 거부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렬한 메세지를 담게 된다. 세계의 대중을 향한 음악이었던 만큼 보다 쉽게 쓰려는 노력도 기울여졌다. 윤이상 자신도 “1960년대초 이래 개발해온 자신의 ‘주요음기법’을 70년대 후반부터 점차 수정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기 쉽게하고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추구하였다”39)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윤이상음악의 본질적 구성법칙으로서의 ‘주요음기법’ 또는 ‘주요음향기법’이 포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기법은 70·80년대를 거쳐 윤이상의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전의 엄격하고 복잡한 음악구조가 차츰 완화되어 그 직조과정에서 개별음들의 화성관계가 보다 부드럽고 명료하게 처리되고 있으며, 이전의 정태적이고 구조적인 양상으로부터 벗어나 각 요소들의 과정들을 더욱 첨예하게 표출해 간다는 점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40) 이러한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계의 인류를 대상으로한 메세지의 전달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윤이상의 이러한 의도는 우선 자서전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첼로 협주곡 (1975/76년)을 비롯한 일련의 기악협주곡에서 나타난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윤이상의 제2창작기로 평가되며, 10편에 이르는 협주곡과 성악곡에 처음으로 서유럽의 문화권에서 텍스트를 취하여 작곡하면서 인간주의적 관심을 표현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윤이상은 유럽의 전통적 기악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향곡을 비롯한 관현악 작품에 도전하면서 더욱 뚜렷하게 자신이 살고있는 시대의 문제들을 음악을 통하여 표현하려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된다. 즉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화 투쟁과 이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기념하는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1981년)에서는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격렬한 표현을 통하여 인류전체에 폭력의 비애를 경고한다. 이때 ‘광주’는 이러한 메세지를 담은 하나의 표본(Exemplum)이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1987년까지 총 다섯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다. 윤이상은 총 5편의 교향곡을 자신의 “생애에서 이룬 음악의 집대성이며 1960년대에 토대를 굳힌 기법적, 미학적 민족의식에서 꾸준히 전향(前向)하여 동양의 ‘지역성’에서 ‘세계로의 확대’를 의미한다”41)고 밝힌 바 있다. 이 곡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작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이클(연작)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곡들은 각기 상이한 형식토대하에42) 작곡되었지만, 다섯 곡 모두 인류에게 보내는 구체적인 메세지, 즉 인류적·정치적 전령으로서의 공통적인 요구를 통해서 하나의 통일체로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제1번은 원자폭탄에 의한 파괴에 대한 강력한 경고, 제2번에서는 모든 인류적 문제를 외부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세계속의 ‘나’에게로 관심을 돌리고 제3번에서는 유태계 독일 여류시인, 넬리 작스(Nelly Sachs)의 시를 텍스트로 하여 과거의 극복, 애도, 평화를 주제로 하면서 인간이 자만심을 가지고 자연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경고, 제4번에서는 작곡가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동양의 모든 불행한 여인을 위해 썼으며, 어두운 이 세상이지만 - 비록 의혹에 가득찬 희망이지만 - 희망을 잃지말고 노래하자 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 곡은 루이제 린저의 일기장 제목인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Im Dunkeln Singen)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크고 5악장으로 구성된 제5번에서는 역시 넬리 작스의 시를 텍스트로 하며 폭정과 주위의 무관심에 대한 질타, 무기대신에 농기구를 들자면서 과거의 극복과 애도의 작업을 통해 화해하고 평화를 실현하자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75세의 생일을 맞이하던 해에 윤이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작곡이란, 비밀을 찾고 발견하려는 실험의 나라이다. 60년대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서너개의 작품안에 안주한 적이 없었으며 지속적으로 찾고 탐구하였다. 나는 이제 더욱 더 근본적인 것에 나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는데, 이는 더 많은 평화, 더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순수와 온정을 이 세상으로 지어나르기 위함이다.”43)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음악학자 Christian Martin Schmidt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윤이상의 특성’을 한마디로 “다원적 세계주의자”(Pluralistischer Kosmopolit)44)라고 명명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와 현대 음악기법을 익힌, 즉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어법을 창출해 내기까지 이러한 비도그마적인 다원성이 있으며,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을 통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법칙을 제시하며 민중의 소리를 전 인류에게 고했듯이 윤이상은 세계의 인류를 대상으로 사랑과 평화를 기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고와 느낌에 있어서는 동아시아의 자신의 조국에 뿌리를 두면서 다른 음악전통과 국가들의 음악종류를 서로간에 결합시키는 “세계음악”을 지향한 것이다.


3. 음악을 매개체로 남북화해에 앞장선 윤이상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를 연주하는 북한의 국립교향악단



윤이상의 삶을 개괄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은 조국통일을 기원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윤이상이다. 분단의 현실과 이로 인한 굴절된 역사속에서 그 아픔을 몸소 체험한 윤이상은 “이데올로기는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지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영원하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음악(「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 칸타타 「나의 땅, 나의 조국」 등)을 통하여 조국통일을 기원했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은 남북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행동인’으로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즉 “한 예술가로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가”45) 1988년 7월 1일 동경의 한 기자회견에서 ‘남북음악제전’ 개최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안을 필두로 그 이후에도 음악을 매개체로 한 남북화해의 길을 다방면으로 모색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분단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민족의 화해를 도모하고 음악을 공통분모로하여 조국통일의 토대를 기원하는 윤이상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문이며 왜곡됨 없이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1988년 윤이상의 ‘남북음악제전’ 제안의 주요골자는, 연주는 남북한에서 각각 교향악단원을 선발하여 혼성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그외 합창단, 독창자 역시 남북에서 각기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윤이상은 그밖에 음악회의 성격상 무대는 휴전선의 어느 한지점이어야 하며 청중은 남북이산가족을 위주로 하자는 견해를 밝혔다. 이 계획은 1989년에 들어서서 남한의 「예총」이 적극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보다 구체성을 띠게된다. 예총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을 민족공동체의 한부분으로 인정하고 북한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한다”는 이른바 「7·7 선언」이 나온 뒤 20일이 채 안된 뒤에 발표되었다. 그후 1989년말에는 예총의 회장 전봉초가 1주일간 윤이상이 활동중인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남북음악제전」의 개최문제를 합의하였다. 전봉초는 윤이상과의 합의하에 대회 명칭을 「민족음악축전」으로 정하고 개최일자를 1989년 5월 내지 9월의 편리한 하루를 택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축전에는 인원 남북한 양측에서 교향악단, 합창단 각각 200명씩 모두 400명이 참가하며, 장소는 판문점으로 하는 매머드 음악제 추진안이었다.46) 명칭이 바뀐 이유는 「남북 합동..」으로 할 경우 북한측이 「북남합동..」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는 가정때문이었다. 참가인원은 이후 약간 수정된다. 남북에서 교향악단과 합창단을 합해 1백 50명씩 파견하는 것으로 다시 조정된 것이다. 공연은 낮에 1회만 가지고 연주될 곡목은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남과 북의 작곡가 작품 1곡씩과 윤이상의 교향곡 「나의 땅, 나의 조국」 등 3곡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이 ‘축전’이 열리기 전에 그 전단계로 3월 말경에 4일간 공연을 예정으로 「윤이상 작품의 밤」이 추진되었다. 이 공연에서는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교향악단이, ‘호암아트홀’에서 실내악단이 연주할 계획이었다. 예총과 윤이상은 세부적인 연주회 프로그램까지 잠정 합의하였으며, 이들 작품의 연주자와 협연자 일부는 윤이상이 직접 추천하고, 오케스트라는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 그리고 국내의 유명 실내악단을 교섭하기로 하였다.47)

그러나 이 계획은 몇번의 우여곡절이 있은 후 결국 불발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윤이상은 이후,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회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서 “사상과 정견·신앙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곧 이어 서울에서 개최된 「‘90년 송년 통일음악제」에의 참가를 주저하는 북한측을 설득시켜 음악제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에 - 비록 제3국에서지만 - 남북한의 합동공연에 물꼬가 트였고 이로써 남북한간의 예술적 갈등이 상당부분 긍정적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48)
1991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교향악단의 남북한 상호교환 연주회가 추진되었다. 1991년 5월에 보도된 이 계획은 북한의 「윤이상 연구소」의 초청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6월중 북한을 방문, 평양, 원산 등 북한의 주요도시를 순회연주하며 상호교류원칙에 따라 「평양국립교향악단」이 7월중에 남한을 방문하여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순회연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공연은 남한측 책임자 임원식(당시 인천시향 음악감독)과 윤이상의 오랜 우정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일원의 승인도 받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교향악단의 지휘는 남한측에서는 임원식이, 북한측에서는 김일진 (평양 만수대예술단 지휘자)이 맡으며, 연주곡목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을 비롯하여 정치성이 없는 순수음악으로 국한하기로 합의하였다.49)

그 밖에 1992년에는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정트리오’ (정명화·정경화·정명훈)의 북한공연이 극비리에 추진된 바 있다. 그 추진배경에는 정트리오가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지만, 여기에 북한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윤이상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50)

이와같이 개괄적으로 살펴본 이 제안들의 대부분의 경우에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에 우선적으로 북한측이 주저함없이 적극적으로 동의를 했던 점 역시 윤이상이 차지하고 있는 북한에서의 위치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세칭 ‘동백림 사건’부터 비롯된 상당수의 세인들의 편협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결코 윤이상의 사상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와 오랜 우정을 쌓아온 임원식 등의 원로 음악인들의 애정어린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음악을 기리기 위하여 1984년에 「윤이상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연구작업과 더불어 매년 「윤이상 음악회」가 개최되어 왔다. 물론 이 일련의 음악회에서는 윤이상의 작품이 소개될 뿐만 아니라 시벨리우스·차이코프스키·슈베르트·베토벤 등 서양의 역사적 인물들의 작품도 연주되고 있다. 서양음악의 북한창구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남한에서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그의 작품과 예술관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1982년에 개최된 제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는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개최되어 그의 작품이 소개된 적은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윤이상의 작품이 지니는 그 가치를 알려는 것보다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그의 사상성과 “예술과 사회를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예술관에 기초한 그의 사회참여 의식만이 항상 시비의 촛점이 되곤 했다. 그의 앙가쥬망(Engagement)이 남한의 3공화국 이후의 정권에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반면 윤이상에 대한 북한의 정권적 차원의 후원은 남한에서 그를 친북·용공 인사로 인식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윤이상에 대한 남한에서의 인식은 제7공화국에 들어서서 약간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82년 대한민국음악제에서의 공연 후 출판금지 등의 조치를 당하기도 했던 윤이상의 작품은 작년(1994년)에 민간공연단체인 「예음문화재단」의 주관으로 「윤이상 음악축제」가 개최되면서 새로운 분위기 조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축제를 계기로 그의 오페라와, 바이올린협주곡, 교향곡 등이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축제는 9월 8일부터 17일까지 10일간 서울, 광주, 부산에서 9번의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개인연주회 차원에서도 심심찮게 윤이상의 작품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이 타계한 후에는 - 독일문화원 주최지만 - 윤이상 추도음악회 및 강연회가 곧 바로 개최되었으며, 국내 최초의 국제콩쿨인 「동아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윤이상의 작품(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Fünf Stücke für Klavier)이 제2차 예선곡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윤이상과 그의 작품에 대한 남북한의 수용자세가 이제는 그 발판이 마련되어졌다고 한다면, 윤이상의 음악작품을 공통분모로 하여 남북한이 합동 또는 교환공연의 형식으로 교류를 추진 할 경우 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금년 (1996년) 9월 중순에 ‘윤이상 추모제’의 일환으로 영국 「바비칸 센터」에서 ‘한국은 하나, 세계는 하나’라는 슬로건의 예술제의 추진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 공연에 황병기, 성동춘 등의 남북예술인들이 함께 출연하며 남북한의 국악, 양악 및 무용 등이 공연될 예정이기 때문이다.51) 이 예술제는 비록 제3국에서 개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추후 전체적인 남북한의 상황이 화해의 국면에 접어들 경우 북한에서 윤이상이 이제껏 차지했던 위치52)와 정권적 차원에서 개최하고 있는 ‘윤이상 음악회’를 염두에 두면 가칭 ‘윤이상음악 남북한 합동축제’에 대한 남한측의 제안이 있을 경우 북한의 거절 명분도 약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남북교류에 이렇듯 중요한 중개역을 맡아온 윤이상의 뜻을 기리고, 이러한 세계적 음악가를 배출한 한국인의 긍지를 과시하기 위하여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충무)을 무대로 「윤이상 세계음악제」를 개최하면서 북한측의 참가도 유도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고인의 별세를 계기로 독일에서는 「국제 윤이상 협회」, 일본에서는 「윤이상 기념사업회」, 북한에서는 「윤이상 음악연구소」 및 「윤이상 박물관」 그리고 남한에서는 「윤이상 추모사업회」가 발족되어 ‘윤이상 콩쿨개최, 음악연구, 음악회 개최, 실황녹음 및 친필악보(Autograph) 관리 등 나름대로의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이들 기관과 연계하며 고인의 고향이 충무가 주무대가 되어 ’음악제‘를 개최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충무는 세계 유수의 음악제 개최지 못지않은 최상의 입지조건과 교통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즉 주지하다시피 이 지역은 우리나라 제1의 해상관광지역으로서 한산도를 비롯한 4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충무 마리나 리조트도 완공되어 있다. 그리고 김해 공항에서도 차편으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아직까지 음악전용홀은 없지만 부득이한 경우에 가까운 부산의 음악홀을 이용할 수도 있다. 충무에서는 세미나 혹은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말이다. 윤이상을 내세우면서 세계적 연주가와 음악학자와 북한의 음악인들을 초빙할 경우 그들의 전폭적 호응이 있을 것이며 이 기회에 한국의 현대 창작음악까지 가미시킨다면, 분단된 남북화해에 음악을 매개체로 평생을 살아온 고인의 뜻을 기리는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매개로 하여 남북한 양악부문의 예술교류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나아가서는 세계적 음악페스티발로 발전시키면서 한국의 창작음악의 발전 및 지방문화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4. 한국에서의 윤이상 연구의 당위성

윤이상은 유럽의 아방가르드 음악계내에서 서양문화권 태생이 아닌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말년에는 “20세기의 살아있는 마지막 거장”이라는 극찬까지 받았었다. 이러한 윤이상에 대한 평가는 이제까지 유럽의 연주가 및 독일어권의 음악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립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우선적으로 윤이상이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가 공부한 후 독일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그의 작품이 유럽 내지는 세계 창작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윤이상의 음악을 세계 음악사의 흐름에 자리매김 해 놓은 기존의 상당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의 음악학자들은 윤이상에 대한 연구가 이제 시작단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 연구는 더욱 활성화 될 조짐이다.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Internationale Gesellschaft für Isang Yun」 (윤이상 국제학회)가 금년 2월에 발족되었으며 5월에는 창립총회를 가질 예정으로 되어 있다. 이에 즈음하여 세계적 음악학자들이 연구한 윤이상 음악에 대한 연구논문집이 또 다시 발간될 예정이다.

반면에 윤이상의 음악은 그의 조국인 한국에서는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했거나 등한시되어 왔다. 한국에서의 윤이상은 그의 현실비판적이고 사회참여에 대한 사상성에 대해서만 시비의 대상으로 언급되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극소수의 음악인 및 음악학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음악이 가지는 역사적, 학문적 가치에 대하여 해명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말이다.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우리 음악인 스스로가 짊어져야 한다. 한국에서의 음악학이 일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국내 음악학자들이 윤이상을 비롯한 한국작곡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학문적 작업에 얼마나 많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나 자문해보면 그 반성의 근거가 충분할 것이다. 작년 말에 윤이상의 별세를 기화로 국내에서도 그의 추모음악회 및 기념사업회가 발족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윤이상의 음악을 세계 음악사의 역사적 흐름의 반열에 올려놓은 독일어권의 음악학자들은 윤이상 음악이 가지는 음악적 특성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하여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작곡가 자신이 밝힌 그의 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동아시아의 철학, 특히 도교사상이 그의 음악에 어떻게 용해되고 표현되었는지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고, 윤이상이 구사한 한국의 전통음악기법과 서양의 아방가르드 기법의 결합에서 창출되는 독특함에 대하여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음악학자들은 작곡가 자신이 언급한 동아시아의 사상과, 한국전통음악, 특히 궁중음악에 대한 내용들을 반복하여 인용하고 있다. 물론 이 작곡가 자신의 진술은 윤이상 음악을 조명하는데 있어서 1차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윤이상 자신이 언급한 음악관이나 철학관 또는 작품해설 등은 앞으로 수십년 또는 수백년동안 윤이상 연구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반복인용될 것이다. 모차르트의 편지, 베토벤의 대화록과 스케치, 슈만의 일기장과 비평문, 브람스 서신 등의 1차자료가 후세 음악학자들의 긍정적· 비판적 입장 또는 학문적 검증의 자료로서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듯이 말이다.

문제는 윤이상의 음악에 용해되어 있는 극동 아시아(한국)의 정서 및 음악적 이디엄, 기법 그리고 사상적 배경에의 접근이 유럽학자들의 연구에서는 거의 작곡가의 진술을 토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윤이상 작품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점에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존 연구물의 단점을 보완하며 보다 충실한 연구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윤이상의 음악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음악에 일가견이 있어야하고 서양의 아방가르드 작곡기법은 물론, 그때까지의 서양음악의 각 장르별·기법적 역사적 음악 흐름에 정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이상에 대한 연구가 우리의 손으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작품이 철저하게 연구됨으로써 한국의 현대음악사의 한 뿌리가 조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직까지는 학문적 히포테제(Hypothese)에 불과하다. 국내의 중견 작곡가들에 대한 연구작업 역시 현재 극히 초보단계에 불과하고, 윤이상 음악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여부가 아직까지는 확실한 연구물이 나오지 않은 채로 피상적 또는 심증으로만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을 검증과정을 거쳐 사실로 확인하는 연구와 이와 더불어서 윤이상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았다고 추정되는 기존의 일부 중요 작품가들의 연구가 병행될 때 한국의 「근·현대 음악사」는 올바르게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음악학자들의 몫이자 의무이다.

기존의 한국에서 발간된 윤이상 관계 학술작업들에서 윤이상의 음악관 내지는 기법 등에 대한 총괄적 설명이 제시되었다면, 이제는 그의 전체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한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관점에서 분석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장르별 연구도 이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양식의 같음과 다름에 따른 시기적 구분, 윤이상 음악의 수용(Rezeption) 그리고 윤이상의 음악을 비판하는 입장에서의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껏 역사적 음악가들의 평가 작업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5. 윤이상 연보

1917 - 9월 17일에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출생. 3살 이후에 통영 (지금의 충무)에서 성장.
1923-25 통영의 서당에서 교육을 받음.
1925-31 통영 보통학교에서 교육을 받음 (22회로 졸업).
1931 -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상인이 되기 위해서 통영에서 상업학원(「협성 상업강습소」)에 입학.
1934 - 35 -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 프란츠 에케르트가 창설한 서양식 군악대원 출신의 한 한국인 음악가에게서 화성학 교육을 받음.
- 「국립도서관」을 방문하며 독학으로 서양의 고전음악과 슈트라우스, 힌데미트의 음악을 공부.
1935 -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작곡하며 홍난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
1935 - 36 - “상업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배운다”는 아버지의 조건부 허락을 얻어 일본으로 건너감. 오사카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 음악이론, 첼로를 배움.
1937 - 39 - 통영 부근 「화양학원」 (보통학교 과정)의 선생으로 재직. 윤이상 동요가곡집 발표
1939 - 41 -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토지모로 이케노우치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움.
1941 - 태평양전쟁 발발. 윤이상은 전쟁직전에 귀국.
1941 - 43 - 통영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로 부역을 종용 받음.
1944 - 반일 활동으로 체포되어 2개월간 수감됨.
1945 - 결핵으로 인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며 여기에서 해방을 맞이함. - 「통영문화협회」 회원으로 활동. 부산 「국제신보」에 단편소설 ‘탈출’연재
1946 - 47 - 부산 시립 고아원 원장으로 재직.
1947 - 「통영현악 사중주단」을 조직하여 첼로주자로 활동
1948 - 49 - 통영의 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1949 - 52 - 부산 사범학교와 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
1950 - 부산 사범학교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첫딸 ‘정’ 출생. 한국 전쟁 발발.
- 부산교육대학에서 서양음악사 강의. 「전시작곡가협회」를 조직한 후 「한국작곡가협회」의 회원으로 활동.
- 부산에서 그동안 작곡한 가곡(편지:1941, 그네:1947, 고풍의상:1948, 달무리:1948,
나그네:1948)을 모아 가곡집 「달무리」로 출간.
1952 - 이은상 작시 「낙동강」에 곡을 붙인 전시가요 작곡
1953 -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은 서울로 이주. 서울대학과 덕성여대 출강 가곡, 실내악곡
등을 발표.
1954 -「한국작곡가 협회」의 사무국장 역임. 아들 ‘우경’이 출생.
-「악계구상의 제문제」를 『문예』 신춘호 제5권 제1호에 발표.
1955 - 「현악 사중주곡 1번」과 「피아노 삼중주곡」으로 작곡가로는 최초로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6 - 6월에 파리 음악원으로 유학. 피에르 르벨 (Pierre Revel)에게서 음악이론을, 토니오빈 (Tony Aubin)에게서 작곡을 배움.
1957 - 8월에 독일의 (서)베를린으로 건너가 베를린 음악대학에 입학, 라인하르트쉬바 르츠 쉴링 (Reinhard Schwarz-Schilling)에게서 음악이론을, 요셉 루퍼(Josep Rufer)에게서 12음 기법을 그리고 보리스 블라혀 (Boris Blacher)에게서 작곡을 배움.
1958 - 서독의 다름쉬타트(Darmstadt)에서 개최된 현대음악 하기강습회에 처음으로 참가. 여기에서 슈톡하우젠, 노노, 블레즈, 마르데나, 케이지 등과 교분을 가짐.
1959 - 7월에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 9월에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5 Stücke für Klavier: 1958)이 네덜란드의 빌토벤(Bilthoven)에서,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Musik für 7 Instrumente: 1959)이 다름쉬타트에서 프란시스 트라비스(Francis Travis)의 지휘로 초연되면서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음.
1960 - 프라이부르크로 이주. 여러 방송국에서 중국과 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강연. -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됨.
1961 - 부인이 독일에 건너와 합류함. 박정희 장군이 권력을 장악.
1962 - 오케스트라 작품 「바라」(Bara: 1960)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 F. Travis).
1963 - Köln으로 이주. 북한을 방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Gasa),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Garak)을 발표.
1964 - 포드재단의 장학생으로 Berlin-Schmargendorf로 이주. 한국에 있던 자식들이 독일로 건너와 합류.
1965 - 오라토리오 “Om mani padme bum”(1964)이 하노버에서 초연 (지휘: F. Travis).
1966 - 여름에 두달간 수학 및 강연차 도미.
·Tanglewood/Mass, Aspen/Col., San Francisco, Los Angeles, Chicago, New York 등지를 방문.
- 10월에 서독 도나우슁엔 (Donaueschingen)에서 ‘예악’ (Reak: 1966)이 에른스트 부어(E. Bour)가 지휘한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에 의해 초연.
· 이 연주의 성공으로 윤이상은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게됨.
1967 - 6월 17일 한국의 정보요원에 의하여 서울로 납치됨. 이른바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부인과 함께 기소되어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그의 부인은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 윤이상은 1968년 3월 13일의 제2심에서 15년으로, 1969년 1월의 제3심에서는 10년으로 감형.
1968 - 1967년 10월에 작곡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윤이상은 오페라 ‘나비부인’(1967/68)을 2월 5일에 완성. 건강이 악화된 윤이상은 병원으로 이송됨. 이곳에서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Riul’과 플륫과 오보에를 위한 ‘Image’를 작곡. 5월에 독일의 「함부르크 자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대됨.
1969 - 쿤쯔, 리게티, 헨쩨, 슈톡하우젠,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클렘퍼러등 161명에 달하는 세계적 예술가 및 그의 동료 그리고 독일정부의 항의 및 노력으로 윤이상은
석방되고, 2월 말에 서베를린으로 돌아옴. 2월 23일에는 그의 이중 오페라 ‘꿈’ (리우퉁의 꿈: 1965) & 나비부인: 1967/68)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됨.
1969 - 70 - 하노버 음대의 작곡과 강사로 재직.
1971 - 6월 20일에 오페라 ‘유령의 사랑’ (1969/70)이 킬에서 초연됨 (지휘: H.Zender).
- 「킬 문화상」수상. 독일 국적 취득.
1972 -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 8월 1일에, 오페라 ‘심청’(1971/72)이 뮌헨에서 개최된 올림픽 경기의 문화 행사의 하나로 초연됨 (지휘: W. Sawallisch; 연출: Günther Rennert).
1973 - 1973년부터 윤이상은 한국인 망명단체와 함께 한국의 민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활동을 열렬하게 옹호.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 (Aspen)음악제에 참가.
· 여기에서 그의 많은 작품들이 연주됨.
1974 - (서)베를린 자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대됨.
1976 - 3월 25일에 “Konzert für Violoncello und Orchester” (1975/76)가 프랑스 로양(Royan)에서 초연 (첼로: S. Palm, 지휘: F Cerha).
1977 -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의 대담을 엮은 「Der verwundete Drache: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이 Fischer출판사에서 간행됨
1977 - 87 - 베를린 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재직.
1979 - 80 - 박정희 대통령 사망, 전두환 장군 정권장악, 광주 민주화운동.
1981 - 독일 쾰른에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가 「서부독일 라디오 방송교향악단」의 (지휘 히로시 와카스키)연주로 초연됨. 윤이상과 루이제린저의 대담을 엮은 「Der verwundete Drache: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이 이또오 나리히꼬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 출간됨.
1982 -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공연됨(9월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교향곡의 밤에서 프란시스트라비스의 지휘와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서주와 추억」, 「무악」. 「예악」, 오보에와 하아프,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등이 연주되고, 9월 2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실내악의 밤에서는 하인쯔 홀리거 부부 등이 「낙양」, 「피리」, 「오보에와 하아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함).
1983 - 1983년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 윤이상의 작품들이 비정기적으로 연주됨.
1983 - 87 - 매년 교향곡 한편씩을 발표 (총 5곡)
1984 - 5월 15일에 베를린 필하모닉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윤이상의 제1번 교향곡(1982/83)이 초연 (지휘: Reinhardt Peter).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설립됨.
·이 연구소 주관으로 ‘윤이상 음악연구토론회’가 열리고 ‘국립교향악단’이 중심이 되어 「윤이상 음악회」가 개최됨.
1985 -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음.
1986 - 10월 - 11월에 일본과 중공에서 작곡 강습회를 개최함.
1987년 - 윤이상의 70회 생일기념으로 뮌헨의‘Test+Kritik’출판사가 ‘작곡가 윤이상’(Der Komponist Isang Yun)이란 제목으로 윤이상 작품에 관한 논문 모음집을 발간.
- 베를린 7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교향곡 5번」이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독창과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윤이상의 70회 생일인 9월 17일에 초연됨 (지휘: 한스 젠더). 칸타타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 발표.
1988 - 「독일 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리햐르트 폰 바이체커 (Richard von Weizäcker)로부터 수여받음. 서베를린이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윤이상의 작품이 공연됨. 7월 1일 동경에서 ‘민족 합동음악축전’을 남북한 정부에 제의함. 서울의 한울출판사가 루이제린저와 윤이상의 대담을 엮은 「Derverwundete Drache」를 「상처받은 용」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번역: 홍종도). IGNM (Internationale Gesellschaft für Neue Musik)53)의 명예회원으로 추대
1989 - 평양의 『윤이상 음악연구소』에서 「윤이상 음악연구 논문집 I」을 간행.
1990 - 베를린에서 발족된 「조국통일 범민족 연합」해외본부 의장으로 임명.
- 제1회 「범민족 통일 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연주가들을 초청.
· 10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이 음악제에 황병기를 단장으로 하는‘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참가. 제9차 「윤이상 음악회」가 평양에서 개최됨.54) 12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90년 송년 통일음악제」에 참가를 주저하던 북한측을 설득하여 음악제를 성사시킴.
1991 -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번역)가 한길사에서 간행됨
- 3월, 평양에 「윤이상 음악당」 착공
1992 - 75회 생일을 맞아 유럽각지에서 기념연주. 11월 9일과 13일에는 일본에서 실내악, 관현악 연주 및 강연회 등으로 ‘윤이상 75회 생일 기념 페스티발’이 개최됨.오길남 사건에 대한 항의 성명 발표 함부르크 아카데미의 ‘플라케테’(Plakete)상 수상
1993 - 3월, 평양 중심부 연평거리에 연건평 1만 7천여 제곱미터, 15층 규모의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됨. 2개의 연주홀과 총 200개의 방으로 구성. 5월, 스위스 「모짜르테움」 음악원에서 자신의 “철학, 미학, 음향언어 및 작곡기법”에 대한 공개강좌 (이 내용은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 이라는 제목으로 정교철·양인정 번역으로 도서출판 ‘HICE’에서 1994년에 간행됨)
- 10월, 서울에서 열린 「한국페스티발 앙상블」주최 ‘20세기 음악축제 기간’중에 윤이상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소개됨. 범민련 의장직 반납
1994 - 9월, 「윤이상 음악축제」가 ‘예음재단’주최로 서울, 광주, 부산에서 개최
-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 (윤이상/볼프강 슈파러 著)이 정교철·양인정 번역으로 도서출판 ‘HICE’에서 간행됨.
1995 - 2월, 「독일 문화원」 본부가 선정한 ‘쾨테메달’ 수상자로 선정.
- 5월, 일본 동경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가 초연됨. 5월, 중국에서 윤이상의 음악에 관한 박사학위논문 (「主要音作曲法透視」)이 발표됨. 11월 4일 오전 0시 45분 (한국시간) 베를린의 발트병원에서 향년78세로 별세. 베를린시 가토우지역 공동묘지 특별지역에 안장
- 11월, 독일 문화원 주최로 ‘윤이상 추모 음악제 및 강연회’ 개최 12월, 김용환 편저로 「윤이상 연구 I」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편)이 간행됨.
- 12월, 「한국예술평론가 협의회」의 ‘올해의 예술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 한겨레 신문사 통일문화재단 주최 ‘윤이상 추모음악제’개최. 「윤이상 추모사업회」 결성준비모임 발족
1996년 - 1월, 평양에 「윤이상 박물관」이 건립됨. 2월 17일,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윤이상협회」 발족. 5월, 「국제 윤이상협회」 창립총회

0. 그외에
- 미국, 홍콩, 중국, 일본, 북한 및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작곡 강습회 개최 그의 작품은 현재 EMI, 카메라타, 아카디아 등의 유명레이블로 약 70여종의 음반이 출시되어 있음. 1958년 이후 작곡된 그의 모든 작품은 독일의 「Bote & Bock」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음.


6. 윤이상 작품목록

1. 독 주 곡


-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소품」: 1958년, (Fünf Sücke für Klavier), 초연: 1959. 9. 6, 빌토벤
(Bilthoven, 네덜란드), 연주시간: 7분
- 쳄발로를 위한 「小陽陰」: 1966년, (Shao Yang Yin für Cembalo), 초연: 1968. 1. 12, 프라이부
르크(Freiburg, 서독), 연주시간: 8분
-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 1967년, (Tuyaux sonores für Orgel), 초연: 1967. 3. 11, 함부르크-벨
링스뷔텔(Hamburg-Wellingsbüttel, 독일), 연주시간: 12분
- 첼로 독주를 위한 「활주」: 1970년, (Glissées für Violoncello solo), 초연: 1971. 5. 8, 자그레브
(Zagreb, 유고슬라비아), 연주시간: 12분
-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 1971년, (Piri für Oboe solo), 초연: 1971. 10. 25, 밤베르크
(Bamberg, 독일), 연주시간: 11분
- 플루트 독주를 위한 「연습곡」: 1974년, (Etüden für Flöte(n) solo), 초연: 1974. 7. 18, 교토
(Kyoto, 일본), 연주시간: 23분
- 오르간을 위한 「단편」: 1975년, (Fragment für Orgel), 초연: 1975. 5. 17, 함부르크-벨링스뷔텔
(Hamburg-Wellingsbüttel), 연주시간: 6분
-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 1976년, (Königliches Thema für Violine solo), 초연:
1977. 4. 1, 뒤셀도르프-벤라트(Düsseldorf-Benrath), 연주시간: 8분
- 알토 플루트(또는 플루트)를 위한 「솔로몬」: 1977/78년, (Salomo für Altflöte), 초연: 1979. 4.
30,킬(Kiel, 독일), 연주시간: 7분
- 피아노를 위한 「간주곡 A」: 1982년, (Interludium A für Klavier), 초연: 1982. 5. 6, 도쿄,
Tokyo, 일본), 연주시간: 11분
-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독백」: 1983년, (Monolog für Baßklarinette), 초연: 1983. 4. 9,멜버른
(Melbourne, 오스트레일리아), 연주시간: 11분
- 바순 독주를 위한 「독백」: 1983/84년, (Monolog für Fagott), 초연: 1985, 니짜(Nizza, 이탈리
아), 연주시간: 11분
- 「리나가 정원에서」: 바이올린을 위한 다섯개의 소품: 1984/85년, (Li-Na im Garten. Fünf
Stücke für Violine), 초연: 1986. 11. 28, 베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18분
- 하아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년, (In Balance für Harfe solo), 초연: 1987. 4. 8,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11분
- 「대비」(對比):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두 개의 소품: 1987년, (Kontraste.Zwei Stücke für Violine
solo), 초연: 1987. 4. 10,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16분
- 플루트 독주를 위한 「소리」(Sori für Flöte solo): 1988년, 초연: 1988. 9. 7, 뉴욕(New York,
미국), 연주시간: 14분
- 첼로를 위한 7개의 「연습곡」(Sieben Etüden für Violoncello solo): 1993년, 연주시간: 29분
- 플루트(또는 리코더)독주를 위한 「중국의 그림」: 1993년, (Chinesische Bilder für (Block-)Flöte
solo, 초연: 1993, 스타빙거(Stavanger, 노르웨이), 연주시간: 18분

2. 실내악곡

- 「현악사중주 3번」: 1959/61년, Streichquartette Nr. 3, 초연: 1960. 6. 15, 쾰른(Köln, 독일), 연주
시간: 16분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1963년, Gasa für Violine und Klavier, 초연: 1963. 10. 2,
프라하(Prag, 체코), 연주시간: 11분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년, Garak für Flöte und Klavier, 초연: 1964. 9. 11, 베
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10분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 1964년, Nore für Violoncello und Klavier-Cantabile, 초연:
1968. 5. 3, 브레멘(Bremen, 독일), 연주시간: 8분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 1968년, Riul für Klarinett und Klavier, 초연: 1968. 7.
26, 에르랑겐(Erlangen, 독일), 연주시간: 13분
-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 1968년, Images für Flöte, Oboe, Violine
und Violoncello, 초연: 1969. 3. 24, 오클랜드/캘리포니아(Oakland/Califonia, 미국), 연주시간:
20분
-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 1972/73년, Trio für Flöte(Altflöte), Oboe und
Violine, 초연: 1973. 10. 18, 만하임(Mannheim, 독일), 연주시간: 12분
-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1972/75년, Trio für Violoncello und Klavier, 초연
(제1부): 1973. 2. 23, 베를린(Berlin/West), 초연(전체): 1976. 5. 13, 만하임(Mannheim, 독일)
연주시간: 11분
-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 1974년, Memory für drei Stimmen und Schlaginstrumente.,
초연 : 1974. 5. 3, 로마(Rom, 이탈리아), 연주시간 : 12분
- 관악기, 하아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 1974년, Harmonia für Bläser-Picc., 2Fl., 2Ob., E.H.,
3Klar. (auch baßkl.), 3Fag.; 4Hr.-, Harfe (oder Klavier) und Schlagzeug, 초연 : 1976. 1. 22,
헤어포드(Herford, 독일)
-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 1975년, Rondell für Oboe, Klarinette und Fagott, 초
연: 1975. 9. 30, 바이로이트(Bayreuth, 독일), 연주시간: 14분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 1976년, Duo für Viola und Klavier, 초연: 1977. 5. 3, 로
마(Rom, 이탈리아), 연주시간: 12분
- 클라리넷, 바순, 호른, 현악 오중주를 위한 「팔중주」: 1978년,Oktett (Klar. /Baßkl., Fag., Hr.,
Streichquintett), 초연: 1978. 4. 10, 파리(Paris, 프랑스), 연주시간: 16분
- 오보에, 하아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979년, Sonata für Oboe(Oboe d'amore ad,libitum),
Harfe und Viola oder Violoncello, 초연: 1979. 7. 6, 자아르브뤼겐(Saarbrücken, 독일), 연주시
간: 29분
- 플루트와 하아프를 위한 「노벨레테」: 1980년, Novellette für Flöte(Altflöte) und Harfe, ad
libitum mit Violine und Violoncello (oder Viola) -Streicher auch chorisch, 초연: 1981. 2. 5, 브
레멘(Bremen, 독일), 연주시간: 14분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나」: 1983년, Sonatina für zwei Violinen, 초연: 1983. 12.
15, 도쿄(Tokyo, 일본), 연주시간: 12분
- 아코디언과 현악4중주를 위한 콘체르티노: 1983년, Concertino für Akkordeon und
Streichquartett, 초연: 1983, 11. 6, 트로싱엔(Trossingen, 독일),
- 두 대의 오보에를 위한 「인벤션」: 1983년, Inventionen für zwei Oboen, 초연: 1984. 4. 29, 뷔
텐(Witten, 독일), 연주시간: 18분
- 첼로와 하아프를 위한 「이중주」: 1984년, Duo für Violonecello und Harfe (in drei Sätzen), 초
연 : 1984. 5. 27, 잉겔하임(Ingelheim, 독일), 연주시간 : 13분
- 클라리넷과 현악사중주를 위한 「오중주」: 1984년, Quintett für Klarinette und Streichquartett
초연 : 1984. 8. 24, 쿠사츠(Kusatsu, 일본), 연주시간 : 11분
-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無窮動): 1986년, Mugung-Dong. Invocation für
Bläser, Schlagzeug und Kontrabässe, 초연 : 1986. 6. 22,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
12분
- 클라리넷, 하아프, 첼로를 위한 「재회」: 1986년, Renoconter für Klarinette, Harfe und
Violoncello, 초연 : 1986. 8. 2, 히차커(Hizacker, 독일), 연주시간 : 13분
- 「플루트사중주」: 1986년, Quartett für Flöte, 초연: 1986년, 8.27, 서베를린(West Berlin, 독일)
연주시간 : 14분
- 플루트와 현악사중주를 위한「오중주」: 1986년, Quintett für Flöte und Streichquartett, 초연 :
1987. 1. 17, 파리(Paris, 프랑스), 연주시간 : 24분
- 현악기를 위한 「융단」: 1987년, Tapis pour cordes (chorisch oder Streichquintett), 초연 : 1987.
11. 20, 만하임(Mannheim, 독일), 연주시간 : 9분
-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한 「인벤션」: 1988년, Invention für zwei Flöten, 초연 : 1988, 힐버즘
(Hilversum, 네덜란드), 연주시간 : 18분
-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적 단편」: 1988년, Pezzo fantasiso per due strunmenti con
basso ad libitum, 초연 : 1988. 7. 10, 키우지(Chiusi, 이탈리아), 연주시간 : 12분
・첼로와 아코디온을 위한 「간주곡」: 1988년, Intermezzo für Violoncello und Akkordeon, 초연 :
1988년. 아비뇽(Avignon, 프랑스), 연주시간 : 7분
-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사중주」: 1988년, Quartett für Flöte, Violine,
Violoncello und Klavier, 초연 : 1988. 5. 26, 뮌스터(Münster, 독일), 연주시간 : 15분
- 「현악사중주 4번」: 1988년, Streichquartett Nr.4 in zwei Sätzen, 초연 : 1988. 10, 오스나브뤽
(Osnabrück, 독일), 연주시간 : 22분
- 두 대의 비올라를 위한 「내성」: 1988년, Contemplation für zwei Violen, 초연 : 1988. 10. 9,
베를린(West Berlin,독일), 연주시간 : 11분
- 목관 오중주를 위한 「축제 무곡」: 1988년, Festlicher Tanz für Bläserquintett, 초연 : 1989. 비
텐(Witten, 독일), 연주시간 : 7분
- 오보에와 하아프를 위한 「외침」: 1989년, Rufe für Oboe und Harfe, 초연 : 1989, 라벤스부르
크(Ravensburg, 독일), 연주시간 : 13분
+-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투게더」: 1990년, Together für Violine und Kontrabaß
초연 : 1990, 아르후스(Arhus, 덴마크), 연주시간 : 11분
- 「현악사중주 5번」: 1990년, Steichquartett Nr. 5 (in einem Satz), 초연 : 1991, 이젤슈타인
(Isselstein, 네덜란드), 연주시간 : 16분
- 「목관오중주」: 1991년, Bläserquintett(in zwei Sätzen), 초연 : 1991, 알텐호프(Altehof, 독일)
연주시간 : 17분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91년, Sonate für Violine und Klavier, 초연 : 1991, 프
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독일), 연주시간 : 17분
- 「현악사중주 6번」: 1992년, Streichquartett Nr.6, 초연 : 1992, 바젤(Basel, 스위스), 연주시간 :
26분
- 호른, 트럼펫, 트럼본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사중주」: 1992년, Quartett für Horn, Trompete,
Posaune und Klavier, 초연 : 1992, 베를린(Berlin, 독일), 연주시간 : 8분
- 클라리넷, 바순 그리고 호른을 위한 「삼중주」: 1992년, Trio für Klarinetett, Fagott und Horn
초연: 1992, 하노버(Hanover, 독일), 연주시간 : 9분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공간Ⅰ」: 1992년, Espace Ⅰ für Violoncello und Klavier, 초연 : 1992,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 11분
- 콘트라베이스의 즉흥연주가 곁들여진 8중주: 1993년, 초연: 1995년,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독일),
- 첼로, 하아프 그리고 오보에를 위한 「공간 Ⅱ」: 1993년, Espace Ⅱ fürVioloncello, Harfe und
Oboe, 초연 : 1993, 성브라시엔(St. Blasien, 독일), 연주시간 : 13분
- 두 대의 오보에, 두 대의 클라리넷, 두 대의 호른, 두 대의 바순을 위한 「목관팔중주」:1994,
Bläseroktett für zwei Oboen, zwei Klarinetten, Hörner und zwei Fagotte mit Kontrabaßad lib.,
초연 : 1994,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독일), 연주시간 : 18분
-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I,II: 1993년, Ost-West-Miniaturen für Oboe und
Violoncello I,II, 초연 : I - 1994, 투린(Turin), II - 1994, 베를린(Berlin, 독일), 연주시간 : 10분
- 오보에와 현악3중주를 위한 4중주: 1994년, Quartett für Oboe und Streichtrio, 초연: 1995, 9.
26, 베를린 (Berlin, 독일),

3. 실내합주곡

-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 1959년,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바이올린, 첼로),
Musik für sieben Instrumente(Fl.,Ob.,Klar.,Fag.,Hr.,Vl.,Vlc.), 초연: 1959. 9. 4, 다름슈타트
(Darmstadt, 독일),
- 실내앙상블을 위한 「낙양」(洛陽): 1962년, Loyang für Kammerensemble(in drei Sätzen), 초연:
1964. 1. 23, 하노버(Hannover, 독일), 연주시간: 15분
- 관악기와 현악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 1988년, Distanzen für Bläser-und Streichquintett, 초
연 : 1988. 10. 9, 베를린(West Berlin, 독일), 연주시간 : 16분
- 「실내협주곡 1번」: 1990년, Kammerkonzert Nr. 1, 초연 : 1990, 암스테르담(Amsterdam, 네덜란
드), 연주시간 : 18분
- 「실내협주곡 2번」: 1990년, Kammerkonzert Nr. 2, 초연 : 1990, 베를린(Berlin, 독일), 연주시간
: 13분

4. 협주곡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75/76년, Konzert für Violoncello und Orchester, 초연 :
1976, 3. 25, 로양(Royan, 프랑스), 연주시간 : 29분
- 플루트와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77년, Konzert für Flöte und kleines Orchester
초연 : 1977. 7. 30, 히차커(Hizacker, 독일), 연주시간 : 22분
- 「견우와 직녀 이야기」: 오보에, 하아프,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이중 협주곡: 1977년,
Doppelkonzert f-ür Oboe und Harfe mit kleinem Orchester, 초연 : 1977. 9. 26, 서베를린(West
Berlin, 독일), 연주시간 : 34분
- 클라리넷과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81년, Konzert für Klarinette und kleines
Orchester, 초연 : 1982. 1. 29, 뮌헨(München, 독일), 연주시간 : 21분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981년, 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Nr. 1, 부분초연 : 1982. 4.
29,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독일), 연주시간 : 38분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1983/86년, Konzert für Violine und Orchester Nr. 2, 작품전체의 초연
: 1987. 1. 20,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독일), 연주시간 : 약 33분
- 하아프와 현악합주를 위한 「공후」: 1984년, Gong-Hu für Harfe und Streicher(chorisch oder
Streichquintett), 초연 : 1985. 8. 22, 루체른(Luzern, 스위스), 연주시간 : 20분
・오보에, 첼로, 현악기를 위한 「이중 협주곡」, Duette concertante für Oboe (Englich-Horn),
Violoncello und Streicher, 초연 : 1987. 11. 8, 로트바일(Rottweil, 독일), 연주시간 : 18분
- 오보에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90년, Konzert für Oboe (Oboe d'amore) und Orchester
in einem Satz, 초연 : 1991, 베를린(Berlin, 독일), 연주시간 : 22분
-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992년, Konzert Nr. 3 für Violine und kleines Orchester (in einem
Satz), 초연 : 1992, 암스테르담(Amsterdam, 네덜란드), 연주시간 : 24분

5. 관현악곡

- 관현악곡 「바라」: 1960년, Orchesterstück Bara, 초연 : 1962. 1. 19, 베를린(Berlin, 독일), 연주
시간 : 11분
- 대편성 교향곡을 위한 「교향적 정경」: 1960년, Symphonische Szene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 1961. 9. 7, 다름슈타트(Darmstadt, 독일), 연주시간 : 14분
-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 1961년, Colloïdes sonores für Streichorchester, 초연 :
1961. 12. 12,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 16분
-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 1964년, Fluktuationen für Orchester, 초연 : 1965. 2. 10, 베를린
(Berlin/West), 연주시간 : 14분
-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예악」(禮樂): 1966년, Réak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 1966. 10. 23,
도나우에싱겐(Donaueschingen, 독일), 연주시간 : 13분
-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차원」: 1971년, Dimension für großes Orchester mit Orgel, 초연: 1971,
10. 22, 뉘른베르크(Nürnberg,독일),
- 소편성을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유형들」: 1972년, Konzertante Figuren für kleines Orchester
초연 : 1973. 11. 30,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 20분
-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서곡」: 1973년, Ouverture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 1973. 10. 4, 베
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 12분
-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단편」: 1976년, Piéce concertante für Kammerensemble oder
kleines Orchester, 초연 : 1976. 6. 15, 함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 15분
- 「무악」: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 1978년, Muak. Tänzerische Fantasie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 1978. 11. 9, 묀헨글라트바흐(Mönchengladbach, 독일), 연주시간 : 17분
-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 1979년, Fanfare & Memorial für Orchester mit Harfe, 초연 :
1979. 9. 18, 뮌스터(Münster, 독일), 연주시간 : 18분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1981년, Exemplum in memoriam Kwangju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1981. 5. 8, 쾰른(Köln, 독일), 연주시간 : 22분,
- 교향곡 1번: 1982/83년, Symphonie Nr. 1 für großes Orchester in vier Sätzen, 초연 : 1984. 5.
15, 베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 45분
- 교향곡 2번: 1984년, Symphonie Nr. 2 für Orchester in drei Sätzen, 초연 : 1984. 12. 9, 베를
린(Berlin/West), 연주시간 : 32분
- 교향곡 3번: 1985년, Symphonie Nr. 3 für Orchester in einem Satz, 초연 : 1985. 9. 26, 베를린
(Berlin/West), 연주시간 : 24분
- 교향곡 4번: 어둠속에서 노래하다: 1986년, Symphonie Nr. 4:Im Dunkeln Singen für großes
Orchester in zwei Sätzen., 초연 : 1986. 11. 13, 도쿄(Tokyo, 일본), 연주시간 : 33분
-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인상」(印象): 1986년, Impression für kleines Orchester, 초연 : 1987. 2.
9, 프랑크푸르트(Frankfurt/Main, 독일), 연주시간 : 12분
-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5번」: 1987년, Symphonie Nr. 5 für großes
Orchester Bariton solo nach Gedichten von Nelly Sachs, 초연 : 1987. 9. 17, 베를린(West
Berlin, 독일), 연주시간 : 60분
- 「실내교향악 1번」: 1987년, Kammersinfonie Nr. für zwei Oboen, zwei Hörner und Streicher
초연 : 1988. 2. 18, 귀터슬로(Gütersloh, 독일), 연주시간 : 24분
- 실내교향곡 「자유의 희생자들에게」: 1989년, Kammersinfonie Nr. 2: Den Opfern der Freiheit
für kleines Orchester (in drei Sätzen), 초연 : 1989,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독일)
연주시간 : 33분
-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선」(線): 1990년, Konturen für großes Orchester, 초연 : 1990, 브라운
슈바이츠(Braunschweig, 독일), 연주시간 : 23분
- 관현악을 위한 전설 「신라」: 1992년, Silla. Legende für Orchester, 초연 : 1992, 하노버
(Hannover, 독일), 연주시간 : 15분

6. 독창곡

- 목동의 노래: 1935년, 윤이상 동요작곡집: 1937년(?) 초기가곡집 『달무리』(1950년: 부산), 고풍의상 (조지운 작사), 달무리 (박목월 작사), 그네 (김상옥 작사), 편지 (김상옥 작사), 나그네 (박목월) 작사, 낙동강 (이은상 작사): 1952년,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 1971년, Namo für drei Soprano und Orchester (소프라노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판도있음, 1975), 초연 : 1971. 5. 4, 베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 20분, 기타와 타악기, 목소리를 위한 「가곡」: 1972년, Gagok für Gitarre, Schlagzeug und Stimme 초연: 1972, 10. 25,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 알토 독창과 실내 관현악을 위한 「무당의 노래」. 오페라 「요정의 사랑」중에서, Schamangesäge aus der Oper Geisterliebe nach Texten von Harald Kunz., 대본 : 하랄드 쿤츠 독창곡으로 편곡 : 에어뷘 코흐-라파엘(Erwin Koch-Raphael), 1977, 초연 : 1977. 12. 16, 베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 8분
- 「밤이여 나뉘어라」: 소프라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넬리 작스의 시 3편: 1980년, Teile dich
Nacht. Drei Gedichte von Nelly Sachs für Sopran und Kammerensemble, 초연: 1981. 4. 26, 비
텐(Witten, 독일), 연주시간: 12분
- 화염속의 휩싸인 천사: 소프라노 독창과 여성3중창 그리고 5악기를 위한 에필로그: 1994년
초연: 1995, 5.9 동경 (일본)

7. 교성곡 및 합창곡

-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 연꽃속의 진주여!」: 1964년, Om mani padme hum: Zyklus für
Soli (Sopran, Bariton), Chor und Orchester, 텍스트, 불경 번역: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편성: 로고스키(Wolf D. Rogosky), 초연: 1965. 1. 30, 하노버(Hannover, 독일), 연
주시간: 26분
-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 1968년, Ein Schmetterlingstraum für gemischten Chor
und Schlagzeug., 대본: 중국 14세기의 마치원(馬致遠 : Ma Chi-Yaun), 초연: 1969. 5. 8, 함
부르크(Hamburg, 독일), 연주시간: 8분
- 혼성합창곡 「도(道)에서」: 1972/82년, Vom Tao, Chöre aus Oper Sim Tjong nach Texten von
Harald Kunz für gemischtenChor, Schlagzeug und Orgel, 초연: 1976. 5. 21, 함부르크
(Hamburg, 독일), 연주시간: 8분
- 「사선(死線)에서」 : 바리톤, 여성합창, 오르간, 기타 악기들을 위한 교성곡: 1975년, An der
Schwelle. Kantate zu Sonette von Albrecht Haushofer sowie Verse des Jesaja für Bariton,
Frauenchor, Orgel und andere Instrumente (Flöte, Oboe, Trompete, Posaune und Schlagzeug)
초연: 1975. 4. 5, 카셀(Kassel, 독일), 연주시간: 17분
- 「현자」: 바리톤, 혼성합창,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교성곡: 1977년, Der weise Mann. Kantate
nach Texten des Predigers Salomo und Laotses für Bariton gemischten Chor und kleines
Orchester, 대본: 발터 뵈트허(Walter Böttcher)가 뽑은 구약의 「전도서」와 노자의 「도덕경」,
초연: 1977. 6. 9, 베를린(Berlin/West), 연주시간: 26분
-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오 빛이여···」: 1981년, O Licht···· Chor mit Solo-Violine und
Schlagzeug, 텍스트: 불경과 넬리 작스의 시, 초연: 1981. 6. 21, 뉘른베르크(Nürnberg, 독일),
연주시간: 18분
- 혼성 합창곡 「주는 나의 목자시니」: 1981년, Der Herr ist mein Hirte. Chor mit Solo-Posaune
텍스트: 구약 시편 23장과 넬리 작스(Nelly Sachs)의 시, 초연: 1982. 11. 14, 슈투트가르트
(Stuttgart, 독일), 연주시간 : 19분
-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86/87년, Naui Dang, Naui Minjokiyo! (Mein Land, mein
Volk!) für Soil, Chor und großes Orchester nachsüdkoreanischen Gedichten, 초연: 1987. 10, 평
양(북한), 연주시간: 45분

8. 오페라

- 오페라 「유동의 꿈」: 1965년, Der Traum des Liu-Tung, Libletto: 한스 루델스베르거(Hans
Rudelsberger), 오페라 각색: 뷘프리트 바우어른파인트(Winfried Bauermfeind), 초연: 1965. 9.
25, 서베를린(West Berlin, 독일), 연주시간: 55분
-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1967/68년, Die Witwe des Schmetterlings. Oper in drei Bildern(einem
Akt), Libretto: 하랄드 쿤츠(Harald Kunz), 초연: 1969. 2. 23, 뉘른베르크(Nürnberg, 독일), 연
주시간: 60분
- 오페라 「요정의 사랑」: 1969/70년, Geisterliebe. Oper in zwei Akten von Harald Kunz, Libretto:
하랄드 쿤츠, 초연: 1971. 6. 20, 킬(Kiel, 독일), 연주시간: 약 1시간 30분
- 오페라 「심청」: 1971/72년, Sim Tjong. Koreanische Legende in zwei Akten mit Vor-und
Zwischenspiel, Libretto: 하랄드 쿤츠, 초연: 1972. 8. 1, 뮌헨(München, 독일)



각주

* 이 글은 필자가 작년에 발표한 김용환 편저, 『윤이상 연구 I』 (서울 : 한국예술연구소, 1995)에 수록되어 있는 「다원적 세계주의자 윤이상의 삶과 음악」을 보완한 것이다.
1) Josep Häusler, Musik im 20. Jahrhundert von Schönberg zu Penderecki, Bremen 1972 (2.Auflage).
2) Hanns-Werner Heister/Walter-Wolfgang Sparrer편찬, 『Der Komponist Isang Yun』, München 1987.
3) Walther-Wolfgang Sparrer, “Unser größter Meister...”: Zum Tode von Isang Yun, in: Neue Zeitschrift für Muisk, 1/1996, S. 46.
4) 강인선, 「조국을 등진 윤이상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한국을 ‘동백림 사건’을 통해서만, 북한은 “김일성이 보여주는 대로”만 보아왔다. 『월간조선』, 1994년 9월호, 254쪽 이하.
5) 최성만·홍은미 옮김, “민족문화와 세계여론”, 『윤이상의 음악세계』 (서울 : 한길사 1991), 53쪽 이하, 여기에서는 64쪽.
6) 이 단락에서 윤이상의 삶과 자취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윤이상의 자서전적 이야기, 「Der verwundetet Drache」.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S. Fischer 1977)과 윤이상&발터-볼프강-슈파러 공저인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정교철·양인정 옮김, 도서출판 Hice 1994)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그밖의 내용은 각주를 달아 출처를 제시하였다.
7) 전성환, 「윤이상. 바다 바라보며 용꿈 키우던 소년·청년시절의 발자취를 찾아서」, 『음악동아』 1989년 3월호, 50쪽 이하 ; 윤이상의 부친 윤기현은 통영(오늘날의 충무)에서 알아주던 선비였으나, 학문에만 열중했을 뿐 경제적인 능력은 없었다. 그의 처 추부규(秋富圭)는 통영 장롱을 잘 만드는 목수집안 출신이었다. 그래서 윤기현은 장롱만드는 기술을 익혔지만,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어느날 그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고자 산청군 덕산면으로 간다. 3년 후 그가 당시 인구 4만의 통영읍으로 돌아왔을 때는 세살먹은 어린아이와 李씨 성의 여인과 함께였다. 이 아이가 바로 윤이상이다. 이씨 여인은 물론 윤이상의 생모였다. 윤기현은 윤이상의 양모(養母) 추부규 (秋富圭) 사이에서 홍선, 두례의 두 딸을 낳고 이씨 부인사이에서 이상, 길상, 명애, 경애, 동화 등의 5남매를 낳아 총 7남매를 두었으나, 막내인 동화를 제외하곤 현재 모두 작고하였다. 동화는 ‘윤이상의 부친은 음악공부를 하는 윤이상을 몹시 싫어했지만 그의 양모가 무척이나 잘 돌보아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성환, 위의 글, 53쪽).
8) 전성환, 같은 글, 50쪽.
9) 전성환, 같은 글, 52쪽.
10) 전성환, 같은 글, 52쪽.
11) 윤이상은 그 음악인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못하고 있지만, 이상만은 최근에 그의 글 「인간 윤이상. 그의 인간으로서의 理想」 (『윤이상 음악축제』 (프로그램 노트 1994), 16쪽에서 시위대 군악대대원으로서 화성학을 가르킬 수 있는 사람으로서 백우용(白禹鎔)이나 정사인(鄭士仁), 또는 바이올린도 연주했던 최호영(崔虎永)을 추정하고 있다.
12) 최인식, 「윤이상 그 인간과 음악」(부산사범대학 음악학과 하기강습교재, 1976), 1-2쪽. 여기에서는 양성남, 「전통성을 계승한 한국창작음악의 분석연구-윤이상을 중심으로」, (경성대학교 석논, 1992), 30쪽에서 재인용.
13) 전성환, 같은 글, 53쪽.
14) 정연수, 「윤이상의 생애. 음의 도교주의자」, 『윤이상 음악축제』 (프로그램 노트 1994), 21쪽.
15) 노동은, 「한국생활기의 윤이상 음악세계」, 한국악회 주최 <’94 대전 현대음악제>(1994년 9월 28일 발제문), 5쪽.
16) 이 작품은 금수현 편의 『남녀중학교용 새음악교본』 3학년용 58-59쪽에 게재된 바 있는데, 1994년에 작곡가 김대성이 제공하여 노동은의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년대 글과 노래”, 『민족음악의 이해 3』(서울:민족음악연구회, 1994), 340-341쪽에 수록되어 있다.
17) 정교철·양인정 역 (발터-볼프강 슈파러), “윤이상-이 시대의 작곡가”,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도서출판 Hice 1994), 74쪽.
18) 위의 곳.
19) 위의 곳.
20) Luise Rinser & Isang Yun, 같은 글, 92쪽 이하.
21) 이 작품의 이름은 국악 ‘낙양춘’에서 딴 것이만, 음악적으로는 「낙양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오히려 「영산회상」이나 「상영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2) 독일의 음악학자 Christian Martibn Schmidt는 그의 논문 「유럽음악과 유럽밖의 음악」(최성만 역), 『윤이상의 음악세계』, 229쪽 이하. 원제 : 「Europäische und außereuropäische Musik-Isang Yun」, in:『Brennpunkt der Neuen Musik. Historisches-Systematisches zu Wesentlichen Aspekten』, Köin 1977)에서 ‘주요음’ 또는 ‘주요음향’이라는 용어 대신에 ‘음복합체’(Tonkomplex), ‘음향복합체’(Klangkomplex)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위의 글, 245쪽 이하 참고.
23) Gespräch mit Isang Yun, ln: Berin Confrontation, herausgegeben von der Ford Foundation, Berlin 1965, S. 65.
24) Josep Häuser, Musik im 20. Jahrhundert von Schönberg zu Penderecki, Bremen 1972(2. Auflage), S. 432 ff.(요셉 호이슬러, 「유럽음악과 한국적 전통」, 『윤이상의 음악세계』, 270쪽 이하.
25) 위의 곳. 274쪽.
26) 슈미트, “유럽음악과 유럽 밖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세계』, 233 쪽.
27) 유럽음악에서 비유럽권의 음악을 소재로 삼은 것은 18세기까지 소급된다. 즉 당시에는 터어키 군악 (Janitscharenmusik)이 주목을 끌었고, 19세기에는 동유럽지역 등에서 민속음악의 리듬과 선율 등이 유입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것은 1889년 파리의 세계박람회에서 선보인 자바의 가멜란관현악단 (Gamelan-Orchester)이었다. 타악기가 주종을 이루는 이 악단이 만들어낸 독특한 음향세계는 불란서 작곡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놓았으며, 그 이듬해(1990)에 다시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를 통해 그 인상은 더욱 증대된다.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 작곡가로는 드뷔시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그의 피아노곡 「파고다」에서 자바음악의 슬렌드로 오음계(Slendro-Skala)를 사용하면서 이국적 음향을 만들어낸 것이다.
28) 한스 외쉬, “도의 정신에서 나온 음악”, 『윤이상의 작품세계』, 언급한 곳, 332쪽.
29) 슈미트, “유럽 음악과 유럽 밖의 음악”, 언급된 곳, 242쪽.
30) 위의 곳.
31) Gespräch mit Isang Yun, in: Berlin Confrontation Künstler in Berlin, herausgegeben von Ford Foundation, Berlin 1965, S. 69.
32) 윤이상, “정중동,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 『윤이상의 음악세계』, 언급된 곳, 44 쪽.
33) Christian Martin Schmidt, Fluktuationen(1964), in: 『Der Komponist Isang Yun』, herausgegeben von Hans-Werner Heister & Walther-Wolfgang Sparrer, München 1987, S. 210.
34) 노동은, “통영, 그 섬에 가고 싶다”(노동은의 ‘그것이 알고 싶다’ 5), 『음악과 민족』 제9호, (부산:민족음악연구소 1995), 133쪽.
35) 이한숙,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이념의 벽에 가리워진 천재 음악가”, 『음악사랑』, 1994년 10월호, 52쪽.
36) 윤이상은 복사본으로만 본 적이 있는 고구려의 강서고분 벽화를 직접보기 위하여 북한행을 결심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태고적의 왕릉에 대한 인상은 1960년에 작곡한 교향적 정경」(Symphonische Szene)에서 이미 작곡가에게 영감을 준적이 있으며, 북한 여행 뒤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플루트·오보에·바이올린·첼로를 위한 「영상」’(Image für Flöte, Oboe, Violine und Violoncello)의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작곡가 자신의 철학(도교)적 배경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로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37) 조회창, “지휘자 임원식이 말하는 윤이상”(한국음악가 2,3백명을 묶어도 윤이상 한사람을 당할 수 없다), 『객석』 1995년 12월호 부록, 20쪽.
38) 이 작품은 윤이상의 첫번째 오페라 「리우퉁의 꿈」이 1965년 베를린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이후에 그 작품의 보충물로 고안된 것이었다. 희극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의 오페라 대본은 1966년 가을과 겨울사이에 쓰여졌으며, 윤이상은 이 대본에 1967년 초에 곡을 붙이기 시작하여 1968년 2월 수감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39) 윤이상은 재독 한국대사관의 신변보호 보증과 함께 조국방문 초청을 수락한다. 하지만 교섭중에 돌발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하여 윤이상은 그 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40) 윤이상, “정중동 :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 『윤이상의 음악세계』, 44쪽. 이 글은 윤이상이 1985년 독일 튀빙엔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내용이다.
41) 홍은미, “윤이상의 음악세계:전 인류를 향한 민족주의 음악가의 외침”, 『윤이상 음악축제』 (프로그램 노트 1994), 28쪽.
42)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음악동아』 1993년 3월호, 36쪽.
43) 제1번은 4악장, 제2번은 3악장, 제3번은 단악장, 제4번은 2악장 그리고 제5번은 총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44) 슈파르,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7쪽.
45) Christian Martin Schmidt, Isang Yun: 2. Symphonie, in: Melos: Vierteljahresschrift für Musik, 1988/2, S. 78.
46) 윤이상, “나의 삶, 나의 음악, 나의 민족”, 『윤이상의 음악세계』, 98쪽.
47) “판문점 南北음악축전”, 『경향신문』 1988년 7월 27일자.
48) “남북음악축전 이뤄질까”, 『동아일보』 1989년 1월 6일자.
49)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필자가 공동저술한 “남북교류 공연분석 및 통일지향적 공연 구성안 연구” (한국예술연구소 편, 1995) 참고.
50) “남북교향악단 교환연주”, 『경향신문』 1991년 5월 31일자.
51) 이에 관해서는 필자가 공동저술한 “남북교류 공연분석 및 통일지향적 공연 구성안 연구”, 언급된 곳, 136쪽 참고.
52) 백성현, “이국 땅에 묻힌 한국최고의 ‘문화유산”, 『객석』, 1996년 4월호, 51쪽.
53) 김정일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권적 지지는 여전히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이상의 타계 이후에도 북한에서는 윤이상의 생애에 대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한 길이었으며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한 생”이었다고 소개한 후, “윤이상 선생의 심장은 비록 고동을 멈추었으나 조국과 민족앞에 남긴 고귀한 업적은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모하였다 (『내외통신』 주간판 제978호, 1995년 11월 9일자). 뿐만 아니라 금년 1월에 평양에 건립된 「윤이상 박물관」도 북한에서의 윤이상의 위치를 가늠해주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54) ‘IGNM’은 ‘ISCM’ (=International Society for Comtemporary Music)의 독일식 표기약어임.
55) 평양에서의 「윤이상 음악회」는 매년 한차례씩 열리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제1회 음악회가 1982년 열렸는지 혹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A. 논문 및 저서

김용환 외, 「남북교류공연 분석 및 통일지향적 공연구성안 연구」, 『한국예술연구소』편, 1995.
김용환 (편저), 「윤이상 연구 I」,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펴냄, 서울 1995.
노동은,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년대의 글과 노래」, 『민족음악의 이해』(민족음악 3), 민족음악연구회편, 서울 1994.
문연경, 「윤이상의 Reak에 대한 고찰」, 숙명여대 석사학위 논문 1992년.
발터-볼프강 슈파러/ 윤이상, 「윤이상 - 이 시대의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정교철·양인정 공역)중에서, 서울 1994년, wolfgang
Sparrer), “Unser größter Meister...”: Zum Tode von Isang Yun, in: Neue Zeitschrift für Muisk,1/1996.
양성남, 「전통성을 계승한 한국창작음악의 분석연구: 윤이상을 중심으로」, 경성대 석사학위 논문, 1992년.
이희경, 「윤이상 연구의 현황과 과제」, 『낭만음악』 1994년 겨울호.
윤이상, 「악계구상의 제문제」, 『문예』 신춘호, 제5권 제1호, 문예사, 서울 1954.
------,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승만·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 「정중동.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 「드뷔시와 나」,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 「나의 음악에 관하여」 (철학, 미학. 음향언어), 『윤이상의 음악미학과 철학: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정교철·양인정 공역)중에서, 서울 1994.
요셉 호이슬러, 「유럽음악과 한국적 전통」,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크리스티안 마틴 쉬미트, 「유럽음악과 유럽 밖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 ·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Christian Martin Schmidt), 「Isang Yun: 2. Symphonie」, in: 『Melos: Vierteljahresschrift für Musik』, 1988/2, S. 77 ff.
한스 외쉬, 「도의 정신에서 나온 음악」, 『윤이상의 음악세계』 (최성만·홍은미 편역) 중에서, 서울, 1991, 319쪽 이하.
Hanns-Werner Heister & Walter-Wolfgang Sparrer(공동 편찬), 『Der Komponist Isang Yun』, München, 1987.
Hans Vogt, Neue Musik seit 1945, Stuttgart 1982.
Josep Häusler, Musik im 20. Jahrhunert von Schönberg zu Penderecki, Bremen 1972(2. Auflage).
Luise Rinser & Isang Yun, Der verwundete Drache.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 Nördlingenm 1977 (홍종도 역,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 서울 1988년).

B. 윤이상 관련 잡지 글

강인선, 그는 한국을 「동백림 사건」을 통해서만, 북한의 「김일성이 보여주는 대로」만 보아왔다 (「조국을 등진 윤이상을 어떻게 볼것인가」). 『월간조선』 1994년 9월호.
노동은, 「윤이상 한국생활기의 음악세계」. 계간 『민족예술』 1994년 겨울호.
---------, 「통영, 그 섬에 가고싶다」 (노동은의 ‘그것이 알고싶다’ 5), 『음악과 민족』 제9호, 부산, 1995, 127쪽..
박용구, 「윤이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공간』 1989년 5월호..
윤정모, 「윤이상, 고통으로 승화된 예술가여!」, 월간 『말』, 1995년 12월호.
이건용, 「전통에서 길어올린 ‘창조’의 소리」, 『시사저널』 1994년 9월 15일자.
이상만, 「인간 윤이상. 그의 인간으로서의 이상」, 『윤이상 음악축제』 프로그램 노트, 1994년.
이한숙,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이념의 벽에 가리워진 천재 음악가」, 『음악사랑』 1994년..
정연수, 「윤이상의 생애: 음의 도교주의자」, 『윤이상 음악축제』 프로그램 노트, 1994년.

C. 특집기사

『객석』 1984년 3월호: 베를린의 윤이상. 그 인간과 음악,
정연수, 「인간 윤이상. 음의 도교주의자」
윤이상 인터뷰, 「여기는 서울입니다」
김정길, 「윤이상의 음악세계. 실헙정신에 불타는 작곡가」
임원식, 「내가 만난 윤이상. 퉁소가락처럼 은은한 만남」
박동욱, 「내가 만난 윤이상. 귀중한 음향과의 만남」, 『음악동아』, 1989년 3월호: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디터 아이케마이어, 「그의 작품은 얼마나 한국적인가」
김정양, 「동양사상, 어떻게 음악으로 나타냈나」
전성환, 「바다 바라보며, ‘용꿈’키우던 소년. 청년시잘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정길, 「나의 스승 윤이상」,

객석』 1993년 12월호:
박성향, 「베를린 현지 인터뷰. 음악은 내 생명의 원천, 삶의 전부입니다」
노동은, 「우리가 찾아야할 윤이상. 조국과 세계에 우뚝 선 예술가」
박정민, 「윤이상의 생애. ‘상처받은 용’의 삶」
김정길, 「나의 스승 윤이상.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 쉼없는 음악에의 열정」
로만 한케 & 클라우스 가이텔, 「영원한 경계선상에 서 있는 음악인」
홍은미, 「윤이상의 음악세계. 전 인류를 향한 민족주의 음악가의 외침」
조회창, 「윤이상의 음반과 명연주자. 윤이상의 가치를 단적으로 입증시켜주는 부분」

『객석』 1994년 8월호:
윤이상, 「내가 알고 또 모르는 많은 벗들에게 - 나의 음악제를 앞두고」
우광혁, 「음악은 진실하게 살려는 처절한 노력의 표현」
조회창, 「현대 음악세계를 보게 해주는 창문같은 존재」(제자 김정길이 본 윤이상의 음악세계와 음반
장광열, 「실내악에서 오페라까지 폭넓은 레퍼토리 선정」 (윤이상 음악축제 이렇게 열린다)

『시사저널』 1994년 8월호
김현숙, 「38년간의 오딧세이」
--------, 인터뷰: 「평화의 지혜 속삭이고 싶다/조국이 나를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그것으로 충분」
성우제, 「한국이 연주하는 ‘위대한 음악’」

『객석』 1994년 10월호
조회창, 「윤이상 음악축제 - 그의 빈자리, 그를 바라는 자리」
강석희, 「순수예술정신은 윤이상 음악의 본질」

『한겨례 21』 1995년 12월호
송현순, 「아, 윤이상!: 조국에 대한 좌절과 상처로 점철된 세계적 음악가의 생애」
노동은, 「예술의 위기 돌파했다. 민족문화의 위대함 일깨운 윤이상의 음악세계」

『객석』 1995년 12월호 부록
루이제린저 특별추도사: “상처입은 용은 반드시 지리산 정상을 오르고 말것입니다”
베를린 현지 객석 단독취재: “어떻게하면 좋겠는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광혁, 「39년간의 오디세이, 인간 윤이상의 통한」
조회창, 「지휘자 임원식이 말하는 윤이상: “한국음악가 2,3백명을 묶어도 윤이상 한 사람을 당할 수 없다」
발터 볼프강 슈파러, 「멀리 떠나야만 보이는 윤이상의 비범성」
홍은미, 「하나의 음에 우주를 담는 ‘주요음 기법’」
울리히 에크하르트, 「“나의 음악은 물결치며 흘러가야 합니다”」
귄터 프로이덴 베르크, 「음악적 공통언어를 꿈꾸었던 사람」
강동석, 「음악의 상업적 타협을 거부하는 꼿꼿함」
김정길, 「나의 스승 윤이상을 추모하며」
황병기, 「천지의 물아! 백록담 물아! 원한의 분계선을 가셔다오」
김현민, 「음반으로 듣는 윤이상의 음악: 서양악기에 실은 ‘한국의 소리’, 그 한의 음악들」

『객석』 1996년 4월호
백성현, 「이국 땅에 묻힌 한국최고의 ‘문화유산’

 

 

윤이상 (尹伊桑, 1917 - 1995 )  

                   윤이상 (尹伊桑)
 윤이상은 현재까지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은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은 그의 개인적 생활에 비극적 흔적을 남겼다.

그는 통영(지금의 충무)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이후 일본(오사카, 도쿄)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2년에는 통영과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52-56년까지는 부산과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가곡집  『달무리』(1949. 8.)에는 「고풍의상」, 「달무리」, 「추천」, 「충무가」, 「편지」, 「나그네」가 실려 있다. 「고풍의상」이나 「추천」 등은 60년대에 한국에서 많이 불린 가곡에 속한다. 5음계를 조금 넘어서는 노래로서 간단한 장식음을 섞어서 나름대로의 한국풍을 의도한 음악으로 보인다. 반주는 음계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 화성을 만든다. 그는 다른 음악들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유럽에 건너간 후 한국에서 쓴 모든 작품들을 파기한다.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가 빠리 음악원에서 오뱅(Tony Aubin)에게, 이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블라허(Boris Blacher)와 루퍼(Josef Rufer),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에게 작곡을 공부한다. 그후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서 참여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독일에 정착한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간다. 1967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치르는데, 이 사건이 그에게 남긴 후유증은 그의 평생 내내 남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정부의 간섭으로 2년 후 석방되어 독일로 되돌아간다. 1969-70년에는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강사로, 1972년부터는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명예교수로, 1977-8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유럽에서 작곡된 윤이상의 음악은 대단히 많은 요소들을 혼합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12음 기법처럼 모든 12음들을 한 번씩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뿐만 아니라 음향적으로 사고하는 "음향 돗자리"(Klnagflache)를 깔아 작곡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래픽적으로 작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적 방향 없이 작곡한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이라는 말과도 어울린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음악에 대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한국음악 관련성은 한국음악의 조성이나 리듬 등 금방 알아챌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음향적으로> 그리고 <선율형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악 중 민속악보다는 궁중음악과 관련된 부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음향적으로> 착상된 그의 한국음악관련성은 우선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한국의 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여 소리내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에 한국적인 제목이나 음악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Reak-禮樂,  Bara-바라, Gasa-가사歌詞 등등).

윤이상 음악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이 <중심음>(도. Hauptton, 해당 항목 참조) 기법이다. 이는 하나의 선율만 있는 음악에서는 한 음이 중심에 있고, 그 주위의 다양한 주변음들로 장식된다. 그리고 여러 음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음악에서는 <중심음들>(Haupttone)이 몇 개의 음으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주변음들은 오선보 상에서 흔히 장식음으로 나타난다. 중심은들은 미끄러지면서 다른 음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심하게 떨거나 가볍게 떨기도 한다. 중심음(들)의 생성과 사라짐을 섬세하게 펼치는 것이 그의 음악이 가진 특징이다. 생성과 사라짐은 셈여림 기호에 의해 드러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음악은 음향음악 또는 클러스터 음악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또한 생성과 사라짐을 음양(陰陽)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음양적 성격을 도교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이런 음악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음악에 음은 붓글씨의 필체와 비교할 수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 여운까지 모든 음은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장식이나 선취음,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강세의 변화로 장식되어있다. 모든 음의 자연스러운 변형은 음고의 관점에서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Intervall)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장식적 기능으로 그리고 동일한 음의 부분으로 이해된다." 이는 한국음악의 "시김새"(해당 항목 참조)를 설명한 것이다. 이 시김새는 사실 윤이상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고, 한국의 여러 양악가들의 작품에서도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김새 현상은 "오음음계"와 "삼박자"가 한국음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것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던 초기의 한국양악가들과는 다른, 더 발전된 단계의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이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시김새는 특히 윤이상처럼 12음을 기본으로, 그리고 여타의 미분음까지 사용하는 윤이상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도구를 제공한 것이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실내악곡 『낙양』(洛陽 Loyang), 관현악곡 『예악』(禮樂 1966), 오페라 『류퉁의 꿈』(Der Traum des Liu-Tung 1965), 『유령의 사랑』(Geisterliebe 1970),  『심청』(1972), 3개의 교향곡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는 다작의 작곡가로서 현대음악가로서는 대단히 많은 양의 곡을 썼다.

윤이상과의 마지막 대화

발터-볼프강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 차호성 편역

화염에 싸인 천사 (Engel in Flammen 소프라노, 여성합창 그리고 5 대의 악기를 위한 Epilog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1994)

윤이상은 원래 이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의 초연에 부쳐 자신의 생각을 일본어로 작성하여 발표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는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건강을 잃게 되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베를린의 음악학자인 발터-볼프강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와의 짧은 대담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담은 그가 운명하기 7 개월 전인 1995년 4월 5일에 베를린의 클라도우(Berlin-Kladow)에 위치한 윤이상의 자택에서 이루어 졌으며, 이 대담은 그가 남기는 마지막 글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Engel in Flammen)"에서의 그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대담의 말미에 슈파러는 "화염에 싸인 천사"에 대한 짧막한 분석을 곁들이고 있어 간략하게나마 작품의 대강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본 대담에서 슈파러가 윤이상에게 던졌던 질문들은 너무 간단하였기 때문에 역자가 질문자의 본 의도와 전체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각색하고 보충하였다. 윤이상의 대답은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옮겨 놓았으며, 이름은 편의상 삭제하였다. 참고로 이 대담은 아직도 발표되지 않은 글임을 밝힌다.

1994년에 윤이상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시를 머나 먼 이국땅인 독일의 베를린에서 작곡하였다. 그는 이 교향시의 제목을 "화염에 싸인 천사(Engel in Flammen)"라고 정하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화염에 싸인 천사 size=3>라는 제목에서의 천사는 기독교적이거나 어떤 종교적인 의도에서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 천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실재의 인간이며, 이 실재의 인간은 순수하거나 사심이 없으며 사회적이거나 도덕적 또는 종교적으로 연관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을 일컫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천사라는 단어에 부가되어 있는 화염에 싸인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태운다는 의미보다 여기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사건에 연관되어 일어난 분신(焚身)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나는 현실에서 이미 여러번 일어났던 하나의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채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이 충격적인 사건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그는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여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되며, 이 곡에 "교향시"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음악에서 이 장면을 현실화하였는가, 그리고 그 뒷 배경에는 어떤 확실한 계획이 있었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 곡을 '교향시'라 명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그러한 사건은 갑작스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역사적인 발전과 사회적 상황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태우 정권의 말기인 1991년 초 나는 한국에서 대부분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시위를 하고 그 시위는 무력으로 무참히 제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과격한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신으로 자살을 시도한 이 젊은이들은 그 어떤 정치적 집단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용사도 아니었으며, 단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사회가 파멸되는 것과 개개인의 무력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하였고, 사회에 하나의 충격을 주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의 몸을 불 살랐습니다. 그들은 사회가 의식을 찾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표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한 개인의 운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2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수하고 티없이 그들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새 출발을 권유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서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이 젊은이들의 행동을 인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으며, 분명히 개인적인 확신에서 이루어 졌던 행위에 대하여 다르게 보려는 노력도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의 생각을 굳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행위들을 나의 음악을 통해서 하나의 기념으로써 되새기며,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이 그들 사회의 희생자가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윤이상은 이미 1981년에 이러한 그의 생각을 하나의 작품에서 강하게 나타낸 적이 있었다. 그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향곡을 비롯한 관현악 작품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들을 음악을 통하여 표현하려는 이상을 펼치게 된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비극적 민주화 투쟁을 주제로 하여 작곡하였던 관현악곡인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1981)에서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표현을 통하여 인류전체에 폭력의 비애를 경고하고 있는데 size=3>1), 이와 비교해서 이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도 부제로 광주여 영원히 II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 되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 고려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제목 '화염에 싸인 천사'는 더 이상 바꾸지 않을 것이며, 이 제목은 바로 위에서 말한 것들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적절하다고 봅니다."

「광주여 영원히!」는 다분히 정치성이 짙은 작품이다. 1980년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윤이상은 그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이 작품을 통하여 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face=굴림,신명조 광주여 영원히 II  라고 까지 불려질 수 있는 "화염에 싸인 천사"에서도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내 보이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혀 아닙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어떤 정치적 영향이나 선동적 입장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지 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작곡가로서 이 작품을 다루었습니다. 이 "화염에 싸인 천사"는 내가 나의 민족을 위해 작곡한 마지막 관현악 작품입니다. 나는 분신으로 죽어 간 젊은이들을 영웅으로 추켜 세우려는 것이 아닐 뿐 더러 그들 중의 그 누구도 성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천성과 자신들의 순수한 영혼의 열정과 걸맞게 행동하였던,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사실을 우리는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밝혔듯이, 그는 이 작품을 만들며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분신이라는 사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건을 주제로 하여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윤이상은 이 곡을 단지 분신으로 죽어간 한국의 젊은이들만을 위하여 작곡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분신이라는 행위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나의 일상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종식된 후에 전 아시아에서의 힘의 관계는 강대국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한국, 중국 - 이 모든 국가들은 수 십년동안 정치적·사회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밑에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분할도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개인이나 그들의 가족 그리고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뼈아픈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책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국가들은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공통적인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나의 작품 '화염에 싸인 천사'는 한국 하나만을 위한 경고가 아니라 정치적 상황이 비슷한 처지에 처해있는 전 아시아, 전 국가들을 위한 경고입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동정이나 동감이며, 단순한 기억뿐만 아니라 책임감을 가진 기억이며 역사적으로 공통되게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자각 그리고 민중의 단결심입니다.

원래 나는 이 분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떤 하나의 진혼곡을 작곡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훗날 때가 오면 지금은 사회에서 희생자로서 인정받지 못 하고 있는 이 순수한 사람들을 위하여 공식적인 추도회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작품이 그 추도회에서 울려 퍼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위의 말은 평소 그가 주장하던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추구하는 인도정신" face=굴림,신명조 color=black size=3>2) size=3>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윤이상은 이 "화염에 싸인 천사"를 일본에서 개최될 음악회의 초연을 위하여 작곡을 시작하였고, 이 작품의 관현악 총보는 그의 77번째 생일인 1994년 9월 17일에 완성되었으며, Epilog는 나중에 작곡하였다. 그리고 그는 1995년 9월 초에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인 『윤이상 음악축제』에 즈음하여 한국에 오기를 원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입국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다음에서 윤이상은 이 "화염에 싸인 천사"를 작곡할 때의 심정과, 어째서 하필이면 일본에서 초연할 생각이었는지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나는 이제 늙었고, 앞으로 오래 살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을 악보에 옮기는데 서둘렀던 것입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병석에 있었고 내 힘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몰랐습니다. 이러한 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이 작품을 끝내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전에 이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작품이 연주되는 것은 그 내용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군요. 그런데 우연히 일본으로부터 부탁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음악회들은 '아시아의 소리와 사상' 또는 그 비슷한 취지하에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의 의도와 맞았고, 또한 일본사회는 훨씬 자유스럽고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유스럽고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사회와 비교하여 한국사회에 대하여서도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아직도 집권층에 군사독재시절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잊으려 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시위와 민주화의 열망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윤이상은 마지막으로 "화염에 싸인 천사"를 작곡하는 과정에서의 작품에 대한 생각과 구상, 그리고 이
작품의 내면적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화염에 싸인 천사'는 지성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능한 한 폭 넓은 대중을 위하여, 역사가 있고 발전을 이끌어 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해하기 쉽게 쓴 설명입니다. 분신이라는 생각 자체는 어떤 커다란 심리적 또는 안으로부터의 움직임을 전제로 하며, 또한 어떤 하나의 동기를 전제로 합니다. 나는 이 곡에서 어떻게 한 젊고 순수한 사람이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하는 사회에서 분신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게서 이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는 가를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는 내면과 외부세계를 방황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타락하지 않고 조용한 정서를 지닌,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으로 의식을 가진 젊고 자유스러운 생활입니다. 그것이 지나가고 이러한 행동의 결심에 이르게 될 때 사람들은 상승경향 즉 커다란 감정적 격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불타는 것을 악보에서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소란스러우며 극적이고 거의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모습과 그 다음의 충격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본 관중들의 경악. 장면에서의 이러한 무언의 충격만이 그 다음에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작곡한 Epilog의 당위성과 거기서 의도한 면들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아무런 맥락없이 끝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Epilog를 작곡하였고, 그것은 계속되야만 했었습니다. Epilog는 교향시와는 완전히 다른 음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교향시와 같은 감정이 내포된 음악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중립적인 간청입니다. 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영혼들이 다른 세상에 갈 때, 그 영혼들은 아마도 Epilog에서와 같이 울리는 다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며, 그것은 이상하게 울리는 음세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음향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개념이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도 않으며 종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위해서 작용되는 것이 아니며, 그 언어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 또는 이상하게 들리는 공간의 소리입니다. 그것들은 또한 낙원이나 천국에서의 소리도 아니며, 신화나 전설로 만들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Epilog에서 이러한 감정이 배제되었으며 특정한 가사나 선율이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 소프라노는 20명 가량의 여성합창단보다 낮게 연주되어야 합니다. 이 여성 독창자는 아마도 그 희생자의 어머니일 것이며, 그녀의 음악에 나는 어느 정도 인간적인 감정을 개입시켰습니다. 첼레스타와 네 대의 독주악기들은 합창이 순수하고 감정이입이 없이 연주되는 동안 그 공간에서 또는 그 우주에 항상 흐르고 있는 어떤 새로운 음향적 측면을 보조해 주어야 합니다."

윤이상의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

발터-볼프강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

사회적 사건들 그리고 힘의 혼잡과 소용돌이 속에서 이끌어 내어진 "순수한" 청년에 대한 생각을 윤이상은 약 16분이 소요되는 관현악 작품 "화염에 싸인 천사"의 첫 번째 부분에서 대조적이지만 거의 막힘없이 흐르는 연속선상에서 표현해 내고 있다. 어둡고 촘촘하게 메워진 낮은 성부의 마디그룹에서의 음색에 대하여 높은 성부에서는 조용한 가운데 밝고 여린 선율들에 의한 음색이 응답하고 있다.

윤이상이 그의 교향곡 1번(Symphonie I, 1982/83)의 시작부분을 위하여 "경고하는"음 을 호른의 유니즌을 위해서 선택한 반면에, 이 곡에서 그는 B 부터 Ab으로의 하강진행을 낮은 성부의 현악기들이 글리산도의 기법을 이용하여 유니즌으로 연주하게 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대선율을 현악기들이 고음을 이용하여 연주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금관악기의 무거운 화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 현악기들을 잠잠하게 하고 있다. 마라카스와 팀파니에 의해 앞뒤로 둘러 싸여진 금관악기들은 진동하며 동시에 요동치는 화성속에 그가 교향곡 5번(1987)의 제 1악장(그는 5번 교향곡의 제 1악장에서 독재하의 지난날에 대한 회상을 주제로 선택하였다)의 시작에서 보여 주었던 부분을 그대로 따라 가고 있다. 금관악기들의 음향에 대해 바이올린 파트는 고음부에서 트레몰로로 연주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윤이상은 금관악기의 경직되어 울려 퍼지는 화음과 목관악기들의 외치는듯한 음향을 조화시키고 있다. 마지막에서 목관악기의 트릴로 연주되며 지속되는 음들은 차츰 스러져 가고 있다.

  악기의 편성과 매번의 다양한 악기그룹들에 의해 대변되는 의미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데, 윤이상은 이러한 방황속에 무수한 갈등과 사건들을 의미하는 음색들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음색들은 그 절정에서 급작스런 고요함으로 변하고 있다. 솔로의 형식을 빌어 연주되는 악기의 선율을 가지고 윤이상은 느리게 진행되는 중간 부분에서 "천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 사건에 선행되는 사고(思考)에 대하여 스스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교향시의 세 번째 부분은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28 + 20 + 18마디). 여기서는 분신을 실행하였던 "천사"를 의미하는 악기로 하프가 사용되는데, 이 하프는 처음으로 주역으로서 점차적으로 늘어가는 극적 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다. 라체(Ratsche), 마라카스, 우드블럭 그리고 심벌즈가 "화염에 싸인 천사"가 추락하는 분신의 장면인 클라이맥스(비교적 짧지만)에서 울려대고 있다. 계속되는 과정에서 희생자를 의미하고 있는 하프는 단지 몇 개의 음들만 연주함으로써 관중의 감정을 반향하고 있다. 극적으로 흥분된 합주가 끝나며 정적과 고요함이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 윤이상은 "슬프지만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조용하게"라는 악상을 요구하며 독주자들(제 1, 제 2바이올린, 첼로)의 상상에 영감을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울리고 있는 경악에 대하여 마지막 튜티는 고통에 찬 분노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다.

  약 6분 가량 연주되는 Epilog에서 이미 전체적으로 축소되었지만 소프라노 독창, 여성합창 그리고 5 대의 악기로 구성된 새로운 편성은 분위기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거기에 금속성의 음색을 내는 첼레스타가 포함되는데, 이 첼레스타는 이탈리아어의 어원에 따라 직역하면 "하늘에 있는 듯" 하다는 뜻이다. 윤이상은 여기서 아주 간단한 요소들로부터 천구(天球)의 화음적 거리감을 조성하고 있다: 2도, 4도 그리고 5도는 수평적 차원에서 변하고 있으며, 단음들이나 3도 간격의 음들은 수직적이며 화성적 차원에서 변하고 있다. 4 대의 독주 악기들은 - 플륫, 오보에,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 소프라노 독창자를 보조하고 있는데, 이 소프라노 독창자는 "사 우 아 예 사 예(sa u a ye sa ye)" 또는 "소 라 아 가 야(so ra a ga ya)"라는 음절들로 이루어진 "어쩌면" "어느 정도" 탄식하는 듯한 3 절로 된 노래를 부르고 있다. 3 성부로 나뉘어지는 여성 합창의 음의 고리는 음악적인 과정에서 객관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www.um-ak.co.kr/  

 

세계가 높이 평가한 그였건만 조국에선 음악조차 '감옥' 살았다 -     김언호 기자    



▲ 1988년 독일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선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정치 이데올로기란 계절에 따라 무성하다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란 창공처럼 푸르고 엄숙하고 영원합니다."

1988년 10월 6일 베를린 자택으로 방문한 나에게 윤이상 선생은 말했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조상들이 살았고, 위대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 엄혹한 80년대에 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은 감동적이었고 선생의 정정한 목소리는 나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세계가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는데, 막상 그의 조국에서는 연주도 되지 않고 논의하고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 나, 서로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다

▲ 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에 실린 윤이상 선생의 자필편지ⓒ 한길사
마침 윤이상 선생은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음악제를 열자는 안을 내놓았다.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하자고 남과 북에 제의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출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전문 출판사 또는 음반회사들이 그걸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지만, 음반도 사실은 또 다른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출판사가 음반을 기획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윤 선생을 만나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실은 윤 선생도 나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놀라워하셨다. 한국의 이런저런 언론들이 선생의 동정에 대해 보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 보도들은 선생의 생각과 행동을 늘 왜곡하곤 했다. 선생은 사실은 한국의 미디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음악전집을 펴내겠다는 나의 제안은 여러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나는 다소 긴장했다. 1956년 6월 유럽으로 유학 간 지(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적인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 숲 속에 있는 자택의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맞아주었고, 집안의 풍경은 한국의 여느 곳과 같았다. 이웃집에 들러 즐겁게 환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에겐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를 고향의 후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젊은 시절 통영의 풍경을 떠올리는 듯, 고향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꿈꾸는 소년 같았다.

나는 윤이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또 다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는 연속으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는데 선생의 초대로 그 음악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회가 열릴 때는 주최 측이 선생을 오게 함으로써 관객들의 열띤 갈채를 받게 되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음악회가 끝난 후엔 연주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윤이상 선생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출판인인데, 나의 음악전집을 기획하기 위해 왔다'고. 나는 그때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하이츠 홀리거와 하프 연주자 우어줄라 홀리거 부부와 마주 앉아 저녁을 같이 했다.

10월 10일 나는 하루 종일 선생과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은 동베를린 사건을 비롯해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나는 선생의 뜨거운 예술정신과 민족애에 감동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나의 첫 베를린 방문의 절정이었다.(인터뷰 내용은 이어지는 2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윤이상 선집>에서 <윤이상 음악전집>으로

나의 윤이상 선생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게재됐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관·민족관에 대해서 한국신문으로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사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 88년 10월호에 윤이상·송두율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세계와 민족관'을 게재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내야 되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기획된 기사였다. 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행되었는데, 송두율 교수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언급을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참으로 격조 있는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사상을 최초이자 체계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윤이상 선집> 정도로 구상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는 <윤이상 음악전집>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아내 박관순도 동행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어야할 작품해설도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씨(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씨(현 이화여대 독문학 교수), 홍은미씨(음악학) 등이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홍은미씨는 나중에 윤이상 선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1주일 동안 출근하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 댁에 모여 구성을 짜고 어떤 해설을 어떻게 붙일까를 토론했다. 물론 윤이상 선생과 함께였다. 기왕에 발표된 '윤이상 연구'를 조사했다.

하루를 할애해 윤이상 선생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선생은 대단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갖고 계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사진을 살펴보고 사진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들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 사진설명을 척척 해내는 문장가였다.

하루는 선생의 안내로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시키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선생은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베를린예술대학은 윤 선생의 아카이브를 설립해서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비롯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갖고 귀국했다. 윤 선생이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CD도 함께였다.

▲ 1972년 오페라 <심청> 초연 후 축하연에서. 왼쪽부터 다우메 올림픽 준비위원장, 윤이상, 심청을 맡은 수키스, 바이에른 주지사.

  
윤이상 오리지널 음반 김포공항에 6개월간 억류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확보해준 오리지널 CD 등을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하고 말았다. 김포공항 당국은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음반도 펴낼 수 없는 시대였다. 문공부에 이야기를 해보았자 소용없었다. 결국 '윤이상음악'은 김포공항에 6개월 이상 유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오리지널 음반은 윤이상 선생의 운명처럼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최성만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독일로 돌아가는 편에 그것을 찾아서 윤이상 선생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민족의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작품은 6개월 동안 '감옥'을 살았던 셈이다.

나는 정치 또는 정치상황과는 당초부터 무관했다. 어떻게 보면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공안정국'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한 출판인으로서 내고 싶은 책, 펴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했다.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연주·연구하는 윤이상의 음악을, 다른 전문가들이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국은 나에 대해 '심각한 대책'을 준비했다고 했다. 금기시된 윤이상을 만나러 다니고 그의 사상과 예술관을 소개하고 있었으니, 공안정국을 만드는 공안당국자들로서는 내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 존재였겠는가.

내가 윤이상 선생을 만나 음악전집을 준비하고 있을 그때 중앙일보사는 윤이상 선생의 귀국과 윤이상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 사진자료까지 음악회 준비를 위해 전달했다. 선생 자신도 이제는 귀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시대가 이미 '문민'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8년 10월에 윤이상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선생의 귀국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윤이상선생 귀국준비위원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예총의 전봉초 회장과 서울대 이강숙 교수를 만나 귀국하는 윤이상 선생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의논드린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사상> 89년 4월호에 윤이상 선생의 '정중동(靜中動):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을 실어 윤이상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도모시켰다. 이 글은 1985년 윤이상 선생이 튀빙겐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이었다. 이 연설은 윤이상 선생의 음악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정치상황은 공안정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한길사의 <윤이상전집>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연주되어 녹음되어 수집 가능한 곡들을 모으면 LP판 15매 정도는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레코드 재킷에 실릴 해설과 정보를 번역하는 작업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최성만·홍은미씨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레코드 재킷의 그림은 판화가 이철수씨에 의해 시안이 제작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에 대한 음악적 해석과 각 곡들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 그리고 윤이상 선생 자신의 해설들이 번역되거나 새로 씌어졌다. 자세한 연보작업도 진행되었다. 아직 국내에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한 내용들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귀국'도 무산, '음악전집'도 무산

그러나 결국 윤이상 선생의 '음악전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윤이상 선생의 귀국도 무산되고 음악회도 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다. 선생은 그때 귀국이 성사될 것으로 본다면서 흥분해 있었다. 통영 그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자기가 태어난 지리산 산청의 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지리산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그 지리산에서 선생은 태어났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1년 6개월 동안 출국정지당해야 했다. 왜 출국정지를 당해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1991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의 음악세계>
우리는 결국 레코드 출판을 위해 준비한 원고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으로 나온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그것이었다. 634쪽이나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윤이상 선생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나는 선생과의 인터뷰를 200자 원고지 80여 매로 정리해 이 책에 수록했다.

선생의 귀국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선생이 참석하는 음악회가 계속 시도되었지만, 한참 후에 주인공 없는 음악회가 가능했을 뿐이었다. 나는 선생과 전화는 가끔 했다.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책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우리 출판사가 펴낸 책들을 보내드렸다. 우리 책을 보면서 고향을 더 그리워했을까.

선생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일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배를 타고 대마도 쪽까지 왔다고 했다. 일본의 한 방송국 취재진들과 동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바다에서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참으로 고단한 생애

베를린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계속 고향 이야기를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정말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선생의 그 간절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1995년 11월 3일 이국땅 베를린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세계로부터 권위 있는 상들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선생의 삶과 정신은 참으로 고단했다.

이제 윤이상에 대한 '편견'은 해소되어가고 있고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나는 윤이상 선생의 예술정신과 민족 사상을 기리기 위해 한 출판인으로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자 하고 있다. 2005년에는 윤신향 박사의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을 펴냈다. 앞으로도 윤이상 음악연구에 대한 책을 계속 기획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윤이상 연구자들에게도 집필을 부탁하고 있다.


▲ 2005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2005년에 이어 2006년에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기획한 윤이상음악회가 열렸다. 나는 지난 1994년부터 헤이리 프로젝트를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과 손잡고 진행하고 있는데, 이 헤이리에서 윤이상 선생의 음악회가 열리게 됨은 아마도 윤이상 선생과의 그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족분단의 그 경계지대에 존재하는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우리는 민족이 낳은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예술사상·평화사상을 더욱 소중하게 펼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야말로 평화를 구현하는 힘이다. 윤이상 선생은 나에게 문화와 예술의 힘을 일깨워주고 있다.

올해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14일에는 90주년기념사업을 후원하는 음악회모임도 있었다.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민족의 큰 음악가 윤이상을 갖고 있다. 오늘도 선생의 정정한 말씀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1988년 10월 10일 윤이상 선생과의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 1988년 10월 27일자에 전면으로 게재됐다. 세계가 연주하고 연구하는 그의 음악예술이 막상 조국에서 왜곡되고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사랑하는 민족에게 그의 음악예술을 소개하고자 찾아간 한 출판인에게 선생은 민족과 예술에의 열정과 신념을 말씀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내 음악이 바뀌었다"

▲ 1967년 동베를린 사건 당시의 윤이상 선생
- 1956년에 선생님이 유럽에 오신 이후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작곡활동을 시작해서 이제 세계정상을 지키고 계신데, 선생님의 음악이 최근에 들면서 구조가 단순해진다 할까 어떤 격렬함으로부터 조용해진다 할까, 더욱 동양적인 것으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연주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작곡하신 작품은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이는 선생님의 음악세계 또는 사상의 어떤 변화라고 할 수 있나요?

"1968년의 동베를린사건은 나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동베를린사건을 소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70년대 초반의 작품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 시기의 내 음악에는 격렬한 정신이 표출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침으로써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통일적인 정신과 논리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요. 나이가 차차 들면서 더욱 나의 음악언어가 간소화되고 직설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는 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나타납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하겠습니다."

-동베를린사건이라는 분단 민족만이 겪을 수 있는 체험을 통해 선생님의 음악 또는 선생님의 삶에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까?

"동베를린사건 이전에는 나는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정신, 동양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심미적 작품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해방 전에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고 해방 직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바 있습니다. 나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동베를린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문제·분단문제를 더욱 구조적이고도 깊이, 온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작품으로 그것을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나의 음악예술이 도교사상 또는 동양정신에 토대를 둔다는 것,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정신적 유산 또는 토대는 오늘의 세계와 인류, 조국과 민족이 당면하는 문제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 예술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문화권·정치권과 운명적으로 연계되어 있겠습니다만, 동베를린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는 그 극악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작품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나비의 꿈', 클라리넷 독주곡 '율'(律)과 낙랑고분의 사신도를 주제로 한 '영상'(이마주)을 만들었지요.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물 사발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손을 불어가면서 음보를 적어나갔지요.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신적 위안은 '음악'을 생각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아내고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 꿈과 이상의 화합을 추구했습니다."


"나의 예술 나의 삶은 정의에 바탕을 둔다"

-선생님의 음악을 창출해내는 힘이랄까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만, 어디 예술이 개인의 것입니까, 이 우주의 흐름이지요. 나는 우리 조상들의 이 같은 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내가 오늘 국제적으로 이름난 작곡가가 되었지만, 이것은 내가 민족의 뛰어난 예술적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예술적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양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통할한 도교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음악은 이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고, 바로 이 전통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오늘의 내 음악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꿈'이 성황리에 연주가 되었고 본에서는 연주에 모여든 사람들이 연주가 끝나고 윤이상 석방하라면서 횃불행진까지 했다고 해요. 예술가의 책임이랄까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내 나이 이제 일흔 하나입니다. 나는 일제를 체험하고 해방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근·현대사와 세계의 돌아감도 보고 있습니다. 또 남과 북도 잘 아는 편입니다.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남과 이북을 똑같이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북과 이남은 똑같은 나의 조국입니다. 북쪽에도 남쪽에도 똑같은 민족의 피가 흐릅니다."

-선생님의 예술은 평화의 예술, 정의의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선생님의 민족에 대한 관심, 통일운동에의 헌신도 바로 이와 같은 평화와 정의의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삶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나의 삶과 정신, 나의 예술은 정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류에의 신뢰가 바로 평화이고 이 평화는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향곡을 다섯 개 썼는데 지난해 베를린 시 750주년기념 위촉작품인 '교향곡 5번'을 사람들이 '평화의 교향곡'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나의 작품들에서 시종 흐르는 것은 바로 정의와 평화정신입니다. 가난한 조국에서 태어난 한 예술가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고 분단된 국토와 조국을 통일하는 일에 나서는 것은 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특히 제3세계의 수난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도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예술이란 진실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진실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술만이 창조적이고 남이 모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럽의 수많은 음악예술가들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를 던졌습니다. 쇼팽이 그러했고 바그너와 베르디가 그러했습니다."

▲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윤이상 음악회를 열 때의 기자회견 모습. 부인 이수자 여사와 함께 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 선생님이 제안하신 남북음악제도 민족과 조국에 대한 열정,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한 예술가로서 신념의 표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통일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선생님의 휴전선에서의 남북음악제 제안은 참으로 신선한 지혜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음악예술가로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바로 이 같은 구상을 하게 된 겁니다. 잠재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생각이 늘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는 3년 전부터입니다. 휴전선은 민족분단의 실체일 뿐 아니라 분단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정치적 대결뿐 아니라 무력대결의 첨예한 현장입니다. 바로 그 대치의 현장에서 남과 북이 만나자는 것입니다."

- 선생님의 남북음악제는 그 진전에 따라서 대단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음악과 음악가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흔히 정치에 비해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예술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깨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관현악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으로 하여금 민족독립운동의 혼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체코의 스메타나가 지은 '나의 조국'은 체코 민중들을 순결한 애국심으로 불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휴전선에서 민족의 음악, 민족의 소리를 울리게 해서 민족화해의 광장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한반도의 휴전선이란 우리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 것일 뿐 아니라 평화를 위협하는 인류공동의 문제입니다."

-잠자고 있는 민족의 영혼을 깨우치려는 이 음악제에 대비해 어떤 곡을 만드셨습니까?

"나는 이 음악제를 위해 지난해에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45분가량 되는 이 교성곡은 남한의 양심적인 민족시인들의 작품이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의 영원함을 노래하면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적인 혼이 담겨 있습니다."

- 선생님은 유럽에 계시지만 한국의 상황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작곡까지 하셨습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진압 소식을 접한 나는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비극이 내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습니다. 민족에게 새로운 정의와 평화가 도래할 것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 선생님은 철저한 사형폐지론자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술사상으로 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까? 지상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은 참으로 큰 죄악입니다. 폭력범·살인범이라도 활동을 못하게 하면 되지 죽이면 안 됩니다. 고깃대가리를 자르는 것이나 황소머리에 징을 박는 것과 똑같은 짓을 어떻게 인간에게 합니까? 사형제도는 눈에는 눈 식으로 하는 야만시대의 보복행위입니다. 법과 국가는 국민들의 보호자여야 합니다. 보복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검색
댓글
  • 12.05.30 17:38

    첫댓글 안방에서 팬티노출 아줌마와 섯다의 짜릿함!

    http://kkt98.net

    승부사들의 진정한 한판 승부! “ 화투 “

    회원가입만 하셔도 5000원의 무료머니를 드립니다

    귀찮은 다운로드 이제그만,웹에서 바로 즐기는 화투!

    http://kkt98.net

    국내 최다 회원보유 고객만족도1위!!!

    화투의 짜릿한 손맛을 즐겨보세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