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곡종중회>-
-<초등부 이야기 경시대회 예상문제>-
내 고장 출신의 의병장들 (경기도 양평)
서기 I865년(乙未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서 시해되자 거기에 대한 민족적
복수의 폭발로 의병들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거기에 대한 보수적 이론을
들고 나서기도 했거니와 그것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상인즉 정의에 입각한 조국의
주권수호 그것 때문이었다.
내 고장 출신 의병장 안승우(安承禹) 선생의 자는
계현(啓賢)이요, 호는 하사(下沙)이며 순흥안씨(順
興安氏) 안종응(安鍾應)의 아들로 1865년에 태어
나셨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과거 보는 글을
배워 20여 세가 되자 고을 안의 도학 있는 선비의 문하
에서만 놀았으며 이 금계라는 분한테 수학하다 후에는
의병장 유인석의 종숙되는, 성재(省齊) 류중교(柳重敎)
문하(門下)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부친의 만류로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이 을미사변(1895년)때 제자 홍사구(洪思九)와
함께 제천 북쪽에 있는 감악산 속의 백련암에서 피서
하고 있는데,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들어서서 옛 제도
를 모조리 개혁하고 임금의 머리를 깎는 화(禍 : 뜻밖
의 변고를 당하여 겪는 괴로움이나 해)가 급박하게 되
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고 이범직 둥과 죽음
을 무릅쓰고 주선하였다.
경암 서상렬의 선산으로 의별을 고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기다렸다 거사하려다가 같은 고장
사람인 이춘영(李春永) 선생이 내 고장에서 방금 의
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와 그날로
의거를 내걸었다. 이 날이 11월 28일이다.
의병장 이춘영(李春永) 선생의 자는 우삼(友三)이요,
호는 괴은(塊隱)이며 이조 때 영상을 지낸 이 고장
출신 택당의 후손으로 본판은 덕수(德水)다.
선생은 커가면서 기개가 우뚝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성안의 큰 도를 즐겨
들으며 활달하여 포용심이 있고 군자와 같았다고 한다.
병서와 경제 서적을 즐겨 읽으며 한말 밥을 먹으며
용력이 절등(絶等 : 투철하게 띄어남)하였다.
선생은 친근한 포수들과 모여 자기 뜻을 바르게 하고
지평 포군장인 김 백선을 찾아가 뜻한 바를 말하자
김 백선은 쾌히 승낙하고 군사 사백을 이 지방과 접경의
원주 땅 안창으로 모이게 하여 안 승우(安承禹)와 만나
거사를 한 것이었다.
후에 김 백선은 선봉장으로 공을 많이 세우나 칼을
뽑아들고 상관에게 대어들다 군율에 의해 총살당했다
고 한다.
의명대가 원주로 들어가니 군수 이 명화가 몸을
피하자 제천으로 옮겼다 . 제천 군수 김 의진 역시
도망을 갔다.
제천서 서 상렬 공으로 군에 대한 스승을 삼고
이 필희 공으로 장군을 삼고 자신은 중군이 되어
선창한 자기 공을 내세우는 뜻이 전혀 없었다.
의병대는 진을 단양으로 옮겼다. 영월에 모여
의암 선생의 군세가 흩어져 간다는 소문을 듣고
대장단에 의암 선생을 추대하고 중군장에 이 춘영,
안 승우, 신 지수 등은 장수의 소임을 맡았다.
그렇게 하니 도망을 가고 군세가 약하던 군사들이
뭉쳐 사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의병대는 제천에서
적당 권숙, 서상기를 죽이고 충주성을 깨뜨리고
기를 성문에 세웠으며 왜적을 치서 백여 명을 죽였
다.
이 춘영 선생은 의암 선생께 고하여 수안보참을
무찌르고 한부대로 조령을 지키게 하여 적진의
허리를 끊기로 하고 수안보참에 이르러 왜적 수
십명을 쏘아 죽이고 적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순사했으니 그날이 바로 바로 1896년 1월 15일
이었다.
군졸들은 낙심하고 맥이 풀려 군사가 싸우지 뭇하고
흩어졌으며 오직 곁에 있던 몇 사람의 졸병이 시체를
구출하여 선생의 조카가 치상하여 오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담을 쌓듯이 늘어서고 곡성이 수 백리를 줄
대었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한창인 28세에 최후를 마치었던 것이다.
이 춘영 선생이 전사하고 중군에 사람이 없어 사무가
쌓였고 미쳐 왜적을 막지 못하자 왜병이 그 틈을 타서
심복들을 둘여 보내어 대포를 성내에 터드리고 인가를
불태워 소란을 피워 장졸들이 낙심하고 몸이 풀어졌을
때 안 승우 선생이 나가 “나는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며 행동이 자약하자 상하가 의뢰하여 정신을 진정하
게 되었다.
제천으로 환군하여 안 승우 선생이 중군장이 되어
군사를 수습하고 군량을 적취하니 군의 형세가 다시
떨쳤다.
선생은 부하의 배반으로 인해 왜놈의 앞잡이인
장 기렴이 군사를 이끌고 육박하얘 큰 싸움이
떨어졌는데 적세가 조금 꺾여 달아나려 하는
무렵에 거센 바람과 소낙비가 갑자기 와 화약이
날아 흩어지니 우리 군사는 포를 터뜨릴 수가
없게 되고 적병은 기계가 기교하여 비바람 속
이라도 펑상시와 같아 중과부적으로 피하게 되
었다.
선생은 어찌할 수 없게됨을 알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적에게 죽고자 하는데 수종하던 군졸들은
다 흩어졌는데도 유독 홍 사구만이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붙어 있다.
칼을 뽑아 적괴의 머리를 치려고 하자 석병들이
미쳐 총을 쏘지 못하고 총으로 내리쳐서 눈알이
튀어나오고 얼굴이 터지며 배가 갈라져서 죽었으
며 선생은 다리에 탄환을 맞고 잡혀서도 적괴를
크게 꾸짖다 살해됐다. 그 날이 1896년 4월 13일
이니 그때 선생의 나이 32세요 홍사구의 나이 19
세였다.
선생의 산소는 제천 화산동에 있으며 이 춘영
선생의 묘소는 양평군 양동면 석곧리에 있다.
우리는 선생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애국심을
이어받아 티끌만큼도 욕됨이 없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시험 문제>-
(1) 이 글에서 지은이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400자 내지 500자
내외로 원고지에 쓰고
(3) 본 이야기 경시대회에 출전하시는 미래 종회원
님 여러분께서는 이 이야기 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교훈적인 내용으
로 또는 설득력 있는 화법으로 청중을 감동시
킬 수 있는 이야기로 말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