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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1839)와 순교자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을 선택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봉헌한다.
기해박해(1839) - 103위성인 중 70위성인, 124위복자 중 18위복자.
1. 기해박해(1839년)
1) 원인
*정치적 측면: 외척 세력 간의 갈등 표출- 안동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김조순 : 조만영)
순조의 장인 김조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장인 조만영
1827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1830년 효명세자 별세
김조순(1765-1832), 김유근 - 조만영 중심의 세도정치
1834년 순조 붕어 -헌종 즉위(8세) 순원왕후 김씨 섭정
안동김씨: 천주교에 우호적: 김유근 - 유진길의 권유로 1839년 세례
풍양조씨: 천주교에 적대: 조만명, 아들 조병구, 조득영, 아들 조병현
우의정 이지연, 형조판서 조병현의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조처
* 사회적 측면: 농민반란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로 민란 발생)
* 프랑스 선교자들에 대한 밀고: 김 순성(여상)의 고발과 교우 유린
2) 과정 : * 1838년 12월 2일(양 1839년1월 16일) 서울에서 조 프란치스코,
권득인 베드로 체포로 시작. 강원도 원주에서 최해성 요한 체포
2월 경기도 광주 구산의 김성우 안토니오와 동생 만집, 문집 체포 -석방
서울과 지방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 체포 순교
남명혁 다미아노,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가족 체포
여교우들의 자수: 허계임 막달레나와 딸들 등
최병문 야고보 가족과 박희순 루치아, 전경협 아가다 체포
* 4월 18일 순원왕후 김씨 <사학토치령> 반포: 우의정 이지연의 천주교 격멸 청원
* 체포 교우들의 재산 탈취 금지: 형조판서- 조병현→박기수→홍경모
적극적인 수색과 체포를 하지 않는 원인.
* 배교자 김순성(? - 1862, 충청도 온양 태생):
- 수리산 최경환 가족과 마을 교우들 체포, 정하상 가족 및 앵베르 주교 밀고.
- 정하상 바오로는 배교, 고발자로 알지 못하고 교회 앞일을 부탁하기도 함.
- 1862년 경원군 이하전(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의 13세손)을 중심으로 한 역모 의 주도자로 체포 문초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 받음(7월26일)
* 교회 지도자들 체포 순교 -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 앵베르 범 주교,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 - 자수, 순교(새남터, 군문효수)
* 충청도 홍병주 홍영주 형제들 체포 및 순교
* 12월 23일 <척사윤음> 반포: 우의정 조인영 지음
3) 결과 : * 성직자 없는 교회 다시 시작. 회장 지도자들의 순교. 복음 전파의 힘.
* 《상재상서》《기해일기》
* 1857년9월23일 가경자 선포, 1925년 7월 5일 시복, 1984년 5월6일 시성
2. 순교자들
1). 성 남명혁 다미아노(1802-1839.5.29)와
성 이연희 마리아(1804-1839.9.3) 부부 순교자
여항덕(유방제) 빠치피코 신부로부터 세례. 외교인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교리연구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데 열성을 보임. 병자 방문과 이웃을 자신의 가정과 같이 돌봄 "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가?"
"천주를 위하여 순교한 성의회(聖衣會)의 다미아노라고 불러 주면 원이 없겠네"
아내에게 권고
"교우는 어린양과 같이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지마오"
“저희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 분들의 일입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이 늘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하여 죽으시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오,"
2). 성 이광헌 아우구스띠노(1787-1839.5.24.) 성녀 권희 발바라(1794-1839.9.3.)
이 아가다((1796-1840.1.9.) 성녀, 이광렬 요한(1795-1839.7.20.) 성인.
17세 딸 아가다, 8세 아들, 80 노모. 1801년 여러 순교자를 낸 경주이씨 집안의 후예.
성격은 온화하였으나 쾌락을 좋아하였다. 젊을 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30여세에 입교하여 회심의 날을 지내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언행을 삼가며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서 살아갔다. 회장으로서의 직분도 잘 이행하였다.
3). 자수하여 순교까지 이른 여섯 명의 여성 순교 성녀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1776-1839.9.26.), 성녀 이정희 발바라(1799-1839.9.3.)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1809-1839.7.20.), 성녀 이매임 데레사(1788-1839.7.20.)
성녀 김성임 마르타(1790-1839.7.20.), 성녀 김 루시아(1769-1839.9 )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한 집(여항덕 신부 집)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며 지내고 박해가 일어나자 스스로 관가에 나아가 신자임을 밝히며 순교의 열망으로 자수함.
이정희 발바라는 외교인에게 혼인하기를 거부하여 절름발이 행세를 하여 피하기도 함.
이영희 막달레나는 혼인을 피하여 호환(虎患)을 꾸미며 고모댁으로 피하여 숨은 생활.
어머니 허 막달레나도 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함께 지냄.
김 루시아: 천진한 태도와 고문을 받는 중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포장의 주의를 끌음.
“포장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희들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주십시오.”
4). 성녀 전경협 아가다(1787-1839.9.26.)
박희순 루시아(1801-1839.5.24.) 성녀,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1786-1839.9.3.)
궁인으로서 성격이 점잖고 강직하며 뛰어나게 영리하였었다. 천주교를 자세히 배웠는데 대궐에서는 교를 믿을 수가 없음을 알고 궁에서 집으로 돌아와 있으려 하였다. 집안의 강경한 반대와 궁의 화려한 생활을 피하여 여교우 집으로 피신.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덕행에 전심. 상냥함과 겸손한 태도로 모든 신자들이 마음 뿐 아니라 많은 외교인들의 마음까지 감동시켜 이들을 입교시켰다.
전경협 아가다와 박희순 루시아는 "이는 천주의 성의(聖意)다."
전경협 아가다는 무서운 박해 중에서도 또 다른 박해를 받았는데 외교인이면서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오라버니가 누이로 인해서 관직을 잃고 망신을 당할까봐 옥중에서 죽기를 바래 독이든 음식을 들이기도 하고 옥리들에게 태형을 가해 죽도록 애썼다. 그러나 그는 참수를 통해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5). 장성집 요셉 성인(1786-1839.5.26. 옥사)
서울태생으로 호조에 예속된 광흥창(廣興倉)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두 번 혼인하였으나 상모두 상처하고 약국의 일꾼으로 생계룰 유지하였다. 30세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득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의심이 들어 갈등하다가 천주교를 버리고 다만 재산을 모으고 생을 향락하는 일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교우의 명쾌한 설명으로 의심을 풀고 열심을 되찾아 회개의 삶을 살고 기도와 묵상으로 두문불출하였다. 기해년 5월18일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순교하였다.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제가 넉넉한 살림을 해 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 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9.12.),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1.31.)
김 막달레나 증언(27차) “인정이 많아 한번은 길을 가다가 한 늙은 할미가 떡을 많이 놓고 쉬어서 팔지 못하여 애를 쓰매 프란치스코가 돈을 내어 먹을 수 없는 것을 샀다하고 또 한 번은 빚 갚으라고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 돈으로 빚을 갚아 주어 화목하게 하였다.”
유 바르바라(기해년 옥에 같이 있었음) 증언(제42차):
“하루는 포교들이 사사로이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불러 옥 마당 연못가에서 《사말론》을 주며 보라 하거늘 프란치스코가 앉아서 여러 장을 보는 것을 친히 보며 들었사오며, 또한 주교의 관과 제의를 내어 프란치스코에게 입으라 하되 종내 입지 아니하니 죄수 중 한 놈을 입히니 그놈이 뒷짐을 지고 다니며 왈 ‘내가 네 선생이니 절하라.’ 한데 절하지 아니하였삽고, 또 포교 하나가 고상을 들고 절하라 하니 프란치스코가 공송히 절하매 왈 ‘누구에게 절하였느냐?’ 답왈 ‘고상대전에 하였습니다.’하니 포교가 분노하여 고상으로 면상을 치려고 겨누다가 그만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97차
이 베드로 증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성패(聖牌), 성물(聖物)은 다 수장(收藏)하고 성서(聖書)만 내어 놓고 볼새 그 조차 최요한이 보고, ‘남은 이런 풍파에 다 감추거늘 왜 내어 두시오?’ 답왈 ‘너나 잘 간수하였거든 말을 마라 성물은 악인들이 천답(踐踏)하겠기에 간직하였거니와 서책이야 성물이냐. 군사가 난시(亂時)에 병서(兵書)응 아니 읽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열심히 더욱 감발하더니...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01차
최 베드로 증언(최경환 성인의 아들, 정해생(1827), 당시60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죄인의 부친이라 그 사정을 자세히 아옵니다. 태생은 홍주 다래골(현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요, 어느 때 문교한지 잊었으나 홍주 살 때부터 수계하고 이성례 마리아와 혼배한지 수삼년 후에 서울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로 이사하기는 재물도 있고 외인 친척이 번다(繁多)하여 수계함에 조당됨이 많아 사주구령하기를 위함이요. 강원도 김성(현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일대와 북한에 속한 금화군 지역) 땅에서도 살고 부평으로 이사하였다가 외인을 피하려고 과천 수리산 교우촌(현 경기 안양시 안산구 안양9동)으로 죄인 12살 되던 해에 들어갔는지라....”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 "저의 아버지는 교육은 별로 받지 못하셨으나 자주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우리 교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으셨습니다."
"천주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그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과 그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들이다."
"형제들, 용기를 내시오. 주의 천사가 손에 금으로 된 자를 쥐고 당신들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세고 하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세고 하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오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보호하고 친애하며 친척집에 각각 데려다 두고 지내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희 형이 나오면 자연히 안배할 것이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7). 유진길 아우구스띠누스(1791-1839.9.22.), 유대철 베드로 성인(1827-1839.10.31.)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부친 유학기(劉學基), 조부 유익해(劉益海)이며, 외조부는 안세완(安世完)으로 서울 남부 조동계(棗洞契)에서 태어나 동부 입정동(笠井洞)에서 자랐다. 역과에 등과하여 역관으로 북경을 넘나들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과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집이 부유하고 20세 전에 벌써 학문으로 이름이 났지만 세상의 명예와 재물에 대한 관심보다 진리를 탐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0여년 세월동안 불교서적과 다른 사상적 서적들을 깊이 탐독하여 그의 가슴에 만 여권의 책이 있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깊은 조예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천주교와의 만남은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이 흔연히 죽어갔다는 말을 듣고 “혹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에 관해 알고자 하였었다. 어느 날 장롱에 붙여진 한서 글자들을 들여다보다가 생혼, 각혼, 영혼에 관한 내용에 호기심이 동하여 그 종이를 뜯어 맞추어 그것이 《천주실의》 임을 알고 읽었다. 그 후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고자 동분서주하다가 1823년 신자(홍 암브로시오)를 만나게 되어 교리를 듣고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영세와 견진을 받았다.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조선 교우들이 성사와 미사전례를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하상 바오로와 상의하여 북경 천주당에 가서 신부요청을 하게 되었다. 1825년 겨울에서 남당에서 피레스 주교님을 통하여 교황님께 올리는 서간을 보내어 그 편지가 조선교구 설정과 초대교구장 브릐기에르 주교님의 파견을 보게 되었다.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추국청 공술에서 “제가 한일은 부귀공명을 탐내어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고 서양인들을 입국시켰다면 반역할 마음으로 했다고 해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14년 동안 꾸민 일이라고는 대여섯 사람(정하상, 조신철, 남이관, 이광렬 등)들과 북경 천주당에 드나들었던 것에 불과하고, 죽음을 무릎 쓰고 이일을 했으니 저는 주모자이며 우두머리입니다. 만일 탄로 나면 모두 죽임을 당할 줄 알고 했으나 남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였습니다.”
“만약 반역을 꾀할 마음을 가졌다면 천주교의 도(道)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금령을 어긴 죄는 만 번 죽어도 애석하게 여길 점이 없습니다.”
추국청 심문관은 보고하기를 “죄인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의 경우 그들의 몸은 이미 천주교에 물들었으며 성품 또한 흉포함을 숨기고 있습니다. 매를 참으며 입을 다문 꼴은 전적으로 서양 놈들에게 배운 모양이며, 패거리를 보호하고 자취를 숨긴 행동은 모두 물여우처럼 음흉한 짓거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진길 놈은 우두머리로 자처했는데, 말씨가 굳세고 사나왔으며, 정하상 놈은 본디 천주교 무리의 자손인데 진술이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했습니다. 조신철의 경우는 지극히 미천한데도 오히려 고집을 피웠으며 매질하며 심문하는 마당에서도 굳세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습니다.”(1839년 8월 9일 추국청)
아래 내용은 포도청 심문에서 답변한 내용이다.
"서양학자들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오직 천주의 영광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천주십계를 지킴으로써 그 분을 공경하고 자기들의 영혼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뿐입니다. 이 교리를 가르쳐서, 그 분들은 죽음 뒤에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천국에 올라가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들이 먼저 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 지혜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분들은 오랫동안 덕을 닦는 훈련을 하여 많은 진보를 한 뒤에야 외국에 복음을 전하러 떠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분들이 명예와 재물과 육신의 쾌락을 찾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의 조국이며 훌륭하고 풍요한 나라인 서양을 떠났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십중팔구는 틀림없이 죽는 그런 위험을 무릎 쓰고 9만리나 떨어진 여기로 오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참된 사제직을 가지고 있으면 그보다 더 높은 어떤 지위를 탐낼 수 있겠습니까. 그 분들에게 필요한 돈은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오는데, 어떻게 우리의 재물을 엿본다고 말하겠습니까. 성직에 오르기 전에 그 분들은 죽을 때까지 몸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순결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허원을 발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육신의 쾌락을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진길 아우구스띠누스는 처형장에 가는 동안 묵상에 잠겨 벌써 이 세상 사물은 아주 잊어버린 것같이 보였다.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 증언록 78차:
김프란치스코 증언- 우연히 장롱 바른 휴지 조각 떨어진 데에 생혼(生魂)각혼(覺魂)영혼(靈魂)이라는 말이 있거늘 이는 전에 듣지 못한 말이라 하고 물을 축여 바른 것을 온전히 떼어 본즉 성교서 몇 장이라 다 보아 외우기까지 하나 실사(實事) 알 길이 없으매 교우를 만나기를 원하여 양근 마재 정(丁)승지 아들 집이 본래 성교로 소문난 집이라 찾아가 물은 즉 정 유산(酉山,다산 장약용의 큰아들 학연)이 의심하여 떼치거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그러면 알만한 데를 지시하여 달라”하니 남문 밖 사는 홍(洪) 암브로시오를 지시하매 즉시 돌아와 찾아가 바로 말하니 암브로시오가 도리를 강론하며 서책을 주어 보매 활연(豁然)히 깨달아 문교(聞敎)한지라.
역관으로 있어 길을 차려 북경 주당(主堂)에 들어가 영세하고 돌아와 열심히 수계하는지라 그 후부터 수차를 연행하여 하상 바오로와 한가지로 상의하고 조선으로 주교. 신부 영접하기를 위하여 진심갈력(盡心竭力)하고 모든 교우에 유공(有功)하며 착한 표양이 많더라.
연행 때 조신철 가롤로를 마두(馬頭)로 데리고 가려 하나 외인이라 비편(非便)한 고로 정 바오로와 의논하여 성교 말을 통한 즉 가롤로가 깨달아 문교(聞敎)하여 독실 수계한지라. 외인 김정희 와 김황산(유근)을 권화(勸化)시키고 가인(家人)도 힘써 권하나 아내와 딸은 종내 듣지 아니하고 아들 형제만 가르쳐 독실히 수계하더라. 두 형이 다 외인이요 아내와 딸이 수계 아니하므로 조당(阻擋)이 많으나 조금도 성교구규에는 결함이 없더라. 그때 모든 교우들이 극진히 찬양하고 일컫는 말도 듣고 죄인도 항상 만나보고 친하며 한번은 북경까지 한가지로 내왕한 고로 그 사정을 아옵니다.”
유대철 베드로 성인(1827-1839, 9. 15. 13세로 교수형)
유진길의 아들의 신앙과 열심과 충성은 신자와 외교인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와 반대로 아무리 하여도 그 아내와 맏딸에게는 천주교를 봉행하도록 인도할 수가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이들은 교우들을 끊임없이 욕하며 심지어 집안 식구 중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괴롭혔다.
8). 성 남이관 세바스띠아노(1780-1839.9.26.), 조증이 발바라 성녀(1782-1839.12.29.)
1801년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처남이었던 그의 부친 남필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참수당할 때 자신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1832년 사면령이 내린 후 회개하여 수계생활을 하다가 유방제 신부님을 모셔와 신부님을 보필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셨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키다가 형장으로 가는 중에 부인에게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언약을 했었는데 그렇게 되질 않으니 적어도 둘이 다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는 말을 일러 보냈다.
부인 조증이 바르바라는 조동섬 유스띠노의 집안이며 정하상 바오로는 외가쪽으로 인척 관계였다. 남편의 성직자 영입활동을 도와주고 협조하였다.
9) 복자 최해성 요한(1811-1893.10.6. 참수형), 복자 최 비르짓다(1783-1839.12.8.)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7촌 조카로 충청도 청양 태생의 복자 최해성 요한은 조부의 유배지에 따라가 살다가 조부 선종 후 부모와 가족들이 강원도 신읍리(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의 고모 복자 최 비르짓다는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겼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간 유씨의 부인으로 남편의 유배지를 따라갔다. 배소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남편에게 대세를 주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기해박해로 조카 최해성 요한이 수감되자 조카를 만나러 원주 감영에 갔다가 갔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교하셨다.
* 《사학징의》에 유씨성을 가진 유배자 명단은 충주에서 경산(慶山)으로 유배간 유국인(劉國仁)
홍주에서 초계(草溪)로 유배간 유공이(劉公伊), 덕산에서 통천(通川)으로 유배된 유한징(兪漢徵)
공주에서 간성(杆城)으로 유배된 유명찬(兪明燦)으로 4명이다.
“네가 사교(邪敎)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 “저는 사교를 알지 못하고 천주교를 봉행합니다.”
“원주 고을을 통째로 주신다 하여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제 몸에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면 제 영혼이 영원히 죽겠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감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의(義)를 위하여 죽기를 거부하겠습니까?”
-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은 복자 최해성 요한!
10). 유 조이 세실리아(1761-1839.11.23.),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9.22.)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12.29.)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상처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만나 영세 입교하였다. 본래 정약종은 재혼하려 하지 않았으나 교우들과 공동체의 권면으로 체칠리아와 혼인하여 분원리에서 큰딸과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을 삼남매를 두었다.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가롤로가 순교하고 재산까지 몰수 되었다. 마재 시댁으로 살길을 찾아 갔으나 천주교로 인해 화를 당한 시댁 식구들의 냉대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큰딸과 철상의 아내 그리고 손자가 세상을 뜨고, 모전자녀습으로 남매에게 신앙을 가르쳤던 체칠리아는 아들 하상이 친정 사촌 오라버니인 조동섬 유스티노의 유배지인 함경도 무산에 가서 학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무산에서 돌아와 서울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의 협조로 성직자 영입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아들이 성직자들을 모시게 되고 자신의 집이 주교관이 되었을 때 노구의 몸으로 봉사할 수는 없으나 기도와 성사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자 아들, 딸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와 심문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옥사하였다.
유조이 치칠리아 성녀 꿈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나는 천국에 방이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소. 그 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로 있소. 비참한 생활을 잘 참아 견디고 무엇보다도 우리 있는 데로 오는 것을 잊지 마오."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1795년 분원리에서 탄생하여 7살 때 신유박해를 당하여 부모와 함께 일가족이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부친과 형님의 순교, 가산적몰을 당하고 모친과 함께 출옥하여 마재 친척집에 의지해 살면서 성장하였다. 20세 이전에 모친을 떠나 서울 교우집에 살면서 사제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 함경도 무산의 조동섬을 찾아가 교리공부와 글공부를 하면서 조선교회의 재건에 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하여 북경 밀사로 성직자 영입을 위한 길을 시작하였다. 성 정하상은 북경에 갈 때 쇄마구인(刷馬驅人)의 신분으로 자신의 신분을 내려 놓고 길을 오갔다. 그러다가 1823년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를 만나 함께하고 이어 조신철 가롤로를 입교시켜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할 때 황사영의 모반죄목의 실행으로 형문하는 추핵관의 심문에 반역의 뜻은 전혀 없고 또한 황사영은 자신도 반역자로 안다고 답변하면서 자신은 오로지 천주교의 칠성사와 전례를 위하여 서양 선교사들을 모셔왔고, 세 소년을 서양에 보낸 것은 우리나라의 천주교를 이한 일이기 때문에 행하였노라고 강변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님의 영입과 그후의 모방, 샤스탕신부와 앵베르 주교님을 모시는데 중심역할을 하였고, 그분들이 오신 이후로는 자신의 집에 성직자를 모시고 복사로서 봉사하였다. 앵베르 주교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교리교육과 라틴어, 신학교육을 받았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님을 피신시키고 자신은 모친과 누이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체포되기 전 미리 써 놓은 《상재상서》를 제출하여 천주교 신자들도 조선의 백성이고, 그 백성들이 믿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아래 천주교의 박해 종식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정혜 엘리사벳은 역경(逆境)이라는 학교에서 키워진 강인한 여인이었다.
주교, 신부의 일을 보살펴 드리는 모친과 오라버니를 따라가, 자기를 은총의 샘에 가까이 있어 성사 받기를 쉽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옥중에서 기도와 갇힌 이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우들에게 당부하기를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세요.”라고 하였다.
11) 성 최창흡 베드로(1787-1839.12.29.),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1801-1840.1.3.)
성 조신철 가롤로(1795-1839.9.26.), 성녀 최영이 발바라(1818-1840.2.1.)
성 최창흡 베드로는 한국 최초의 총회장이면서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 필사하여 보급한 복자 최창현 요한의 동생이다. 신유박해 때 13세였다. 신유박해 이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멀리하다가 1821년 전염병이 창궐할 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부인 손소벽 박달레나와의 사이에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잃고 맏딸 최영이 발바라와 두 살짜리 막내딸만이 살았었다. 기해년 5월 맏딸 최영이와 외손녀, 부인과 막내딸이 같이 잡혔으나 외손녀와 막내 딸을 친척에게 맡기고 수감되었다. 순교의 형장으로 가면서 부인에게
"나는 좋은 데로 가니 내 가족들에게 어김없이 나를 따라 오라고 일러주십시오."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는 신유박해 때 부친이 유배 가서 죽고 17살에 최창흡과 혼인하였다.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맏딸을 조신철 가롤로와 혼인시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막내딸과 맏딸 최영이 발바라의 아들을 친척에게 맏기고 투옥되어 형문을 당하고 딸보다 하루 앞서서 순교자가 되었다.
성 조신철 가롤로는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위고 5살 때부터 동자승으로 지내다가 우연히 사신일행 중 마부로 북경을 다니게 되었다. 당시 밀사로써 활약하면서 동반자를 구하고 있던 정하상, 유진길 성인에게 권유 받아 신앙을 받아들이고 북경 밀사 삼인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성인의 활동으로 당시 조선 교우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성직자들을 영입하였고, 서적과 성물들을 가져와 보급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 가족들이 체포되어 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 갔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있던 교회서적과 성물들을 압수당하였다.
조신철 가롤로 성인은 평소에도 항상 “나는 목숨을 버리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겠다.” 하면서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 놓을 각오를 하고 살았다. 체포될 무렵 신체험 가운데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내려주마”하시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갖은 형벌과 문초에 굽히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여 형리들이 최경환과 조신철을 꺾을 수 없다고 혀를 찰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부인 최영희 바르바라는 두 살짜리 어린 아들과 함께 체포 되게 되었는데, 모정으로 인하여 약해질까 우려하여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조신철 가롤로와 최영희 바르바라의 혼인에 있어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신철 가롤로 성인은 마부의 천한 신분이면서도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함께 여항덕 빠치피코 신부님과 성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님을 모셔왔다하여 대역죄인으로 분류되어 의금부에서 추국을 당하고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동료 교우들과 함께 참수 치명 하셨다. 당시 추국관은 조신철 성인을 향하여 천한 신분에 의금부 추국에 들어오게 된 조신철 성인으로 하여 추국의 위엄이 떨어졌다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12) 복자 홍재영 쁘로따시오(1780-1840.1.4.), 복자 심 바르바라(1813-1839.11.11.)
성 홍병주 베드로(1798-1840.1.31.), 성 홍영주 바오로(1801-1840.2.1.)
홍재영 쁘로따시오는 홍낙민 루까의 셋째 아들,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과 동서지간
신유박해 때 전라도 광주로 유배, 부인도 유배지로 가서 아들 홍봉주 토마스를 낳고 생활.
유배지에서 신앙생활을 지속.
1832년 대사면령에 의해 석방의 기회가 있었으나 마다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기해박해가 일자 교우들의 거처를 제공하고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의로운 사람들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착한 성질과 큰 덕은 도대체 무슨 소용에 닿는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홍병주 베드로 등 형장: 《일성록》 1839.12.27.(음) - 당고개
秋曹以邪學罪人朴宗源等正刑啓
該曹啓言邪學罪人朴宗源孫女小碧李女仁德權女珍伊李女聖禮李女璟伊 洪秉周等當日沙場處斬
최소사 발바라 순교자 :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
13). 성녀 현경련 베네딕다(1794-1839.12.29.)
1801순교한 현계흠의 딸이며,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한 현석문 가롤로의 누이이면서 최창현 요한의 며느리. 여성회장. 앵베르 주교님이 체포되어 순교 하시게 되자 박해 지를 이어쓰고 성녀가 순교하게 되자 그의 동생 현석문 가롤로가 정리하여 마쳤다. 《기해일기》
14). 이문우 요한 성인(1809-1840.2.1.):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외증손
“열심으로 독서를 하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적당한 시간을 골라 묵상에 전념하고 그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마음속에 예수님의 오상을 새겨 두십시오”
“천주님께 사랑으로 사랑을 갚고 목숨으로 목숨을 갚으십시오.”
순교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외증손으로 이천에서 태어났다. 5세 때 부모를 잃고 오 바르바라에게 양자로 들어가 자랐다. 하느님을 위하여 독신으로 살려고 원했으나 양모의 권유로 혼인하였다. 상처한 후에 재혼하지 않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중에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주는 일을 하면서 교회일을 도왔다. 박해 말 체포되어 옥중에 수감되어 있는 동료교우들에게 용기를 주어 함께 순교의 길을 가도록 하였다. 천주가사 〈옥중제성〉을 지어 부르게 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양친께 올린 옥중서간이 전한다.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제80차
김 프란치스코 증언: “요한이 치명한 후에 교우들이 그 시체를 찾아 쌍룡정이(현 서울 마포구 염리동 일대)에 장사 지낸 말도 듣고 3,4년 후에 한 번 다른 교우와 같이 그 무덤에 가서 친히 보았으나 지금 산소자리를 분명히 모르옵니다.”
15). 삐에르 필립 모방 신부(1804.9.24 - 1839. 9.21 프랑스 베시 출. 새남터. 군문효수)
1804년 9월23일 프랑스 베시(Vassy)자벙애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 저는 지식을넓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다음에는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1829년 5월13일 사제 서품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3년 뒤 중국 사천성으로 파견되어 가던 도중 조선교구장 브릐기에르 주교님을 만나 조선 상황을 듣고 동행하기를 희망하여 허락을 받았다. 중국황제의 허락없이 북경까지 들어갔던 모방 신부님은 브릐기에르 주교님이 마가자에서 병사하자 그곳에서 장례를 모시고 주교님을 기다리던 조선 밀사들을 만나 1836년 1월 12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인 사제로서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사제가 되었고 브릐기에르 주교님의 총대리로 직책을 수행하였다.
모방 신부님이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제가 조선에 들어간다는 것이 제게는 몹시 불안스러운 묵상거리가 된다는 것을 자백합니다......프랑스를 떠나기 전에도 떠난 후에도 여러 번 저는 이런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 하였습니다. ‘너는 그렇게도 고상하고 그렇게도 어려운 직무를 다할 자격이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그러나 제가 자격 없음과 능력 없음을 늘 자인했으면서도 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같이 생각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로 따로 저와 조선 포교지를 위하여 서원 미사 여섯 대씩을 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1) 삼위일체 2) 천주성령 3)예수수난 4)동정성모 5)수호천사 6)포교서원 미사
모방 신부님의 사목 활동: 감격적인 미사성제
- 공소방문 성사집전과 미사성제 거행
- 1836년 12월 말 통계: 교우촌 순방 16,7곳. 세례 213명. 고해성사 6백명 이상
회장 임명 및 승인 : 주일, 축일에 공동기도. 〈회장규조〉
교리문답, 복음성경, 성인전기 읽고 묵상
- 1837년 사목활동: 영세자 1237명, 고해자 2,078명, 영성체자 1,950명
- 조선말을 배워 ‘조만과’를 번역하여 모든 교우로 알기 쉽게 하시매 다 좋아하고 기쁘게 따르 더라
- 성교 규칙과 법규를 만들어 지키게 하였다: 고해 때 신부와 신자 사이를 막고, 여교우들을 공소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심.
성소자 발굴과 양성을 위한 노력: 최방제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스, 김대건 안드레아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어 신학교육을 받게 함(1836년12월2일)
모방 신부의 순교
1839년 9월 6일(양력) 충청도 홍주 계두리(鷄頭里)에서 샤쓰탕 신부님과 함께 자수: 장상에 대한 순명정신 - 앵베르 주교님의 자수 명령에 순명.
선교사로서의 죽음을 넘어선 하느님 사랑의 열정
16). 성 로랑 마리 죠셉 앵베르 주교 순교자(1797 - 1839. 9. 21 새남터 순교)
1793년3월 23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속한 액스(Aix)교구의 마리냔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812년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 사제성소의 길을 키웠다.
1818년 10월 8일 선교의 뜻을 두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1819년 12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중국 사천(四川)대목구 선교사제로 임명되어 1825년 3월 사천성에 도착하여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였다.
포교성성으로부터 브르기에르 주교의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초대교구장의 병사로 인하여 1835년 5월 14일 주교로 서품되고 조선의 2대 대목구장이 되었다.
1837년 8월 16일 사천성을 떠나 1837년 12월 16일 변문에서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 조신철 가롤로를 만나 1837년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 수원지역에 피신해 있다가 그곳에서 자수하여 체포
21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이라는 3년도 채 안된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셨다.
* 성덕
-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그것을 넘어선 삶의 지혜를 가진 분
너무나 가난한 가정으로 인해 학교도 갈 수 없어 글을 배우지 못한 어린이
이웃집 할머니의 도움으로 글을 배우다 입학한 학교
심학공부를 하면서 신심활동으로서의 묵주제작이 자신의 학비조달과 부친의 생활비 보조까지.
가난한 이들을 이해하며 관심을 가진 사목자로서의 삶: 고아들에 대한 대세
* 한문과 중국말과 중국 문화를 잘 아는 사목자
12년이라는 중국 선교활동으로 중국문화를 잘 알고, 중국말을 잘하였으며 한자를 잘 하였다.
중국문화에 대하여 잘 알고 그 문화에 적응하고 이해하였다.
조선에 입국하여 중국문화와 비슷한 점을 고려하여 조선 문화 적응에도 적극적이었다.
외교인 어린아이들을 위한 사목자의 자세: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세를 주는 운동과 확산. 교우들과 회장들에게 이 사업의 중요성 깨우쳐 줌. 8개월 동안 세를 받은 외교인이 192명 그리고 154명이 하느님 품에 안김.
* 사제성소에 대한 관심과 열의:
중국 사천대복구에서 “목평신학교”를 설립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힘썼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방인사제 발굴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주님께 동정서원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과 상처한 사람 등을 사제직을 위한 양성교육을 함: 정하상 바오로, 이문우 요한, 최형 베드로, 이재의 토마스
* 역동적이고 쉼 없는 사목활동:
순회사목 : 교우촌 방문 사목: 한 교우촌에서 이틀을 넘기지 않음.
새벽 2시 반 기상. 3시 기도, 3시 반 성무집행시작(성세,견진)
미사성제, 감사기도, 낮 : 고해성사, 정오에 점심 겸 아침 먹고
어른 신학생들에게 신학교육. 밤9시 취침.
일본 선교에도 끊임없는 관심: 프랑스에서 《일본역사》 읽고 조선을 일본선교의 교두보로 삼고자함
* 체포, 투옥과 심문, 순교
배교자 김순성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성 정화경 안드레아가 김순성을 인도하여 주교님 피신처 수원근처 상귀(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로 안내하여 주교님은 8월11일 피신처인 수원 상귀 지역에서 자수하여 연행 구금, 문초를 당한 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
17). 쟉그 오노레 샤스땅 신부(1803.10. 7 -1839. 9.21. 새남터에서 순교)
1804년 10월 7일 프랑스 마르쿠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23년 신학교 입학하여 3년 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사의 길을 반대하는 모친의 만류를 마다하고 중국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아들의 확고한 결심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선교를 떠나는 아들을 향해
“그래라 아들아, 천주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떠나 가거라. 그리고 모든 천신들이 네 길을 인도하시기를 바란다.”라고 강복하며 떠나보냈다.
브릐기에르 주교의 요청으로 중국선교의 길을 바꾸어 조선 선교지로 주교와 동행하기로 하고 국경 근처에서 주교를 기다리며 입국의 날을 기다렸다. 1836년 겨울 정하상, 조싱철, 이광렬 등의 밀사들을 만나 조선(1837년 1월 15일) 에 들어오게 된 샤스탕 신부님은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요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쁨니다. 오직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도합니다.” 라고 하였고 또한 “나는 수만리 밖에서 기도 중에 묵상한 순교와, 그것을 당할지도 모를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전날 생각해 보는 순교는 아주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입국 후에 자신의 마음을 피력하였다.
샤스탕 신부님의 체포와 순교
모방 베드로 신부님과 함께 주교님의 명에 따라 자수하여 문초를 받고 같은 날 새남터에서 순교.
* 세 분 순교자들의 시신 매장
기해박해 때 박순집 베드로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로 봉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교우들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기로 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에 9월 21일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지키는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새남터 백사장에서 시신을 꺼내올 수 있었다.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낸 바오로는 머리 셋은 입으로 물고, 시신 한구는 업고, 나머지 두 구는 양팔에 하나씩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에 안장하였다.(박바오로는 1866년 10월 체포되어 순교 -박순집 증언록에서)
* 성화: 절두산 성지 소장 성화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장의 성화.
3. 서간들
1). 김대건 신부님의 페레올 주교님께 보낸 편지 (1845년 4월 6일 한양에서)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서 계셨고, 또 신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셨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 두려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인 유다스에 의해서 넘겨졌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해 가셨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시어 죽으러 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시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당긴 양들을 위하여 자의로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의로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겼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사제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또 그들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들은 당신들이 죽은 다음에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고, 목자 없는 양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장차 이리와 늑대들이 주님의 양 떼를 잡아먹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죽음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몰려와 모두가 슬픔에 젖어 목자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고아로 남겨 놓고 죽음의 길로 떠나지 마시라고 간청했습니다. 신부님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였고, 자기들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타일렀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만류할 수 없게 되자 적어도 자기들도 신부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하였으나, 그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당신들은 그리스도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집에서나 길에서나, 외인들 편에서나 신자들 편에서나, 박해자들로 부터나, 거짓 형제들로 부터나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또한 목마름, 굶주림, 헐벗음, 가난, 그 밖의 여러 가지 비참 또한 고문과 죽음까지도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은 얼마나 복되십니까!
천상의 군대 중에 개선하시어 찬란한 왕관을 쓰셨고, 천사들과 모든 선민들과 함께 연년세세에 다스리십니다. 이 눈물의 골짜기에 갇혀 있고 사방으로부터 적들한테서 공격을 받고 있는 비참한 우리를 자비로운 눈길로 굽어보소서.
당신들은 얼마나 큰 사랑으로 당신들의 선교지를 사랑하시고 모든 영혼을 구원하기를 열망하셨습니까!
이제 당신들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 곁에서 권능을 가진 분들이니 이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 주십시오.
하느님께 처음부터 지금까지 흘린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 주시도록 청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이 여기십시오.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눈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입고 쓰러져 있습니다.
갑자기 늑대들이 달려와서 당신의 양들을 둘러싸고 덤벼들어 주님의 양 떼가 큰 상처를 입고 흩어졌습니다.
사나운 개들이 양 떼를 추격하여 양들을 깊은 웅덩이에서 꺼내어 양 우리에 모아들이며 상처를 치료해 줄 목자를 보내 주시도록 당신들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저의 탄식과 영혼의 고통을 고려하시고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저의 기도가 부당하오나 당신들의 공로에 호소합니다.
이루어지소서! 이루어지소서.
2). 성 이문우 요한의 양친에게 보낸 옥중 편지(1839년 12월 22일)
(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발췌)
저는 형조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서 남녀 교우 10여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저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거기 갇혀 있으면서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와 같이 이렇게 서로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된 일이며 이런 은혜를 어떻게 넉넉히 천주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관원이 아무 신문도 하지 않은 채 2,3개월이 지나므로 저는 슬프고 불안했습니다. 순전히 악의로 천주의 마음을 그렇게도 자주 상해 드린 제 평생의 죄의 수가 마치 산더미 같이 제 앞에 나타나므로 저는 혼자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 그렇지만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12월 10일에 형관 앞에 출두하여 기막힌 곤장을 맞았습니다. 제 힘만 가지고는 어떻게 그것을 견디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의 힘과 성모 마리아와 천신 성인들과 우리 모든 순교자들의 전구하심으로 지탱되어 거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은혜를 도저히 갚을 길이 없고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 행동이 극히 불규칙적이고 제 힘이라고는 아주 없으므로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천주 앞에서 왜 불안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는 그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사람이 되신 천주 성자는 33년 동안 수많은 괴로움을 당하시고 세세만대에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일생동안에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에게 감사드릴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천주를 위하여 털끝만한 덕행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보다도 변덕을 따라 천주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그분을 배반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허송세월만 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다지도 어리석고 배은망덕할 수가 있었는지요.
이 세상 생명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육신은 아주 허무한 물건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난 다음 10일쯤 지났을 때에 그 시체를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고 애처로운 물건입니까. 코는 그 썩은 냄새를 견딜 수가 없고 눈, 귀, 코, 입을 구별할 수가 없게 되며, 온 육체가 분해되는 과정에 있어 뼈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찔해 집니다. 아 아! 그런데도 이런 육체를 무슨 짓을 해서든지 잘 먹이고 곱게 입히려고 하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정욕과 옳지 못한 경향을 어루만져 주고 야심과 재산과 안락과 쾌락에 대한 그 욕망을 모두 좇아갑니다. 육신을 위하여는 기쁜 마음으로 마귀의 종이 되고 참다운 고향의 영원한 행복을 잊어버리며, 온 마음과 온힘을 기울여 버러지의 밥이 될 이 물건을 떠받치고 죽지 않는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에 타게 된다는 생각에도 떨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짐승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도 짐승은 구해야 할 영혼이 없지만 영혼이 있는 인간이 이렇게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떻게 뒤에 따라올 무서운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습니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니, 이 생명이 다한 뒤에는 무서운 후회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미친 듯한 마음으로 천당을 하직하고 슬픔을 한 아름 안고 지옥으로 내려갈 때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무슨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살려 달라고 하겠습니까. 보기 흉한 마귀의 종이 되어 집어삼킬 듯한 불 속에 끊임없이 있게 되니 얼마나 무서운 처지입니까. 저는 제가 지은 죄로 인하여 오래 전부터 이 영원한 벌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하여 주신 이상, 저는 죄를 미워하여 사하심을 얻도록 할 생각입니다.
올해의 박해는 일찍이 이 나라에 있었던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천주를 증명하고 천주교의 영광을 높이 드러낸 분들의 수효가 어떻게나 많은지 성교회가 틀림없이 보존은 되겠지만 남아 있는 교우들의 신앙은 얼마나 약화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기운은 다하고 마치 힘이 꺾인 것 같아 흔들리고 배교하고 쓰러집니다. 이제는 아무 약도 없다고 그들은 말하며, 냉담과 심약으로 밀려나가 도로 외교인이 될 지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천주교인이라고 말했으며, 무슨 희망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같은 이교 나라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까.
그러니 제발 노력을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서 육신, 세속, 마귀 이 세 가지 원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 육신입니다. 열심히 독서를 하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적당한 시간을 골라 묵상에 전념하고 그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성로신공에 취미를 붙이십시오. 매처(每處)에 열심히 묵상하시면 거기에서 크나큰 영신적 이익을 얻으실 것입니다. 사람은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모든 욕정과 애정과 악습과 습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알지 못하면 지옥의 영원한 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눈을 흐리게 함과 동시에 영혼의 힘을 결박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일이 너무 많다. 지금은 나와 남 사이에 말썽이 있다. 또한 성사 받을 것을 멀리 하게 하는 다른 여러 가지 핑계를 생각해 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미루다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까. 제발 조심하시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특히 우리의 말을 모두 합쳐도 그 가없는 덕을 찬양할 수 없는 동정 성모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여, 당신은 천주 성자의 어머니이십니다. 모든 복과 모든 덕을 갖추어 가지고 계시어 성모는 비할 데 없는 광채로 빛나시며, 하늘과 땅의 모후이시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두 알으시고 그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관계되는 것은 아무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십니다. 고래로 얼마나 많은 성인 성녀들이 성모를 공경함으로써 천국을 얻었습니까. 그러니 끊임없이 성모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구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만의 한 사람이라도 거절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벌써 너무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 마음은 초조하고 몸이 떨려, 드리고 싶은 말씀을 다 할 수가 없고 또 드리는 말씀도 두서가 없고 대단히 정확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교우가 몇 분이나 남아 있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늘 조심하도록 힘쓰시고 모여서 힘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래서 성령께 애덕의 불꽃을 얻게 되시면 양친께는 어려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위험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의 소원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예수의 도우심으로 이 삶의 거친 바다를 다행히 건너가 우리가 모두 함께 무궁세에 영원한 기쁨을 누릴 하늘나라 선창가에 배를 댈 수 있으실 것입니다.
데레사와 아가다에게는 따로 편지를 쓰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과 인연을 끊었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가다는 외교인들과 같이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는 그 괴팍스러운 성격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에 예수의 오상을 깊이 새겨 두십시오. 천주님께 사랑으로 사랑을 갚고 목숨으로 목숨을 갚으십시오. 그렇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께서 의무를 다 하셨다고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천 가지 괴로움과 천 가지 고난을 기꺼이 받으신 까닭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은 수없이 많사오나 모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글월은 제 손이 이 세상에서 쓸 수 있을 마지막 글줄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읽으시고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기해년 12월 22일
4. 《상재상서,上宰相書》
저자: 정하상 바오로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제80차
김 프란치스코 증언: “정하상 바오로가 잡히기 전에 관전에 바칠 원전(原典, 상재상서)를 지어 바친 줄 아오나 친필 문서가 어디 있는 줄 모르옵고,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친필 진서(眞書)로 지은 것을 죄인이 귀히 여겨 두었더니 군난에 잃었습니다.”
구성
1) 저술동기
2) 천주교 교리해설-천주존재 증명(만물, 양지, 성경), 천주께 나아가는 길, 영혼과 내세,
천주교의 특징
3) 호교론 - 대군대부이신 천주님, 천주교의 성윤리
4) 신앙자유에 대한 호소 -무해정도(無害正道)의 교인 천주교, 박해철회 호소
5) 부록 -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
본문
무릇 백성이 원통한 일이 있으면 그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대강 그 사정을 아뢰오니 자세히 통촉하시기 바라나이다. 옛적에 맹자(孟子) 같으신 이도 양묵(楊墨)의 그릇된 도(道)를 벽파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 해가 장차 백성에게 미칠까 염려하심이요, 한유(韓愈) 같으신 분도 불로(佛老)는 널리 물리치신 것은 그 어지러운 해(害)가 백성에게 미칠까 염려함이나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현군자들이 법을 세워 금할 일과 금하지 아니할 일을 마련할 때에 먼저 그 의리(義理)가 어떠하며 그것이 장래에 해됨이 어떠할 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세밀히 궁구하여 마땅히 금할 것은 금하고 금하지 아니할 것은 금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만일,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일이 있으면 깊이 생각하고 널리 물어서 도리에 과연 합당하고 사리에 당연한지를 비단 박학하고 덕망 있는 선비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비록 시골에 사는 농부와 꼴꾼의 말이라도 의리에 맞는 것은 믿고, 그대로 시행하였나이다. 이 일로 미루어 볼진대, 옛날 군자들이 일을 모른 것도 아니요, 짐짓 그릇되게 하여 후세로 하여금 해롭게 하고자 한 것도 아니오이다. 오직 도리라 하는 것은 잘난 사람의 지면에도 있지 아니하고 또 꾸미는 데도 있지 아니하나이다. 아무리 못난 사람의 말이라도 도리에만 맞는다면 그 사람됨을 보지 아니하고 오직 그 바른 도리만을 주장하고 따랐기 때문이나이다.
그러하온데, 슬프도다. 우리나라에서 천주 성교를 금하는 까닭은 그 뜻이 어찌된 일이오리까? 처음부터 그 도리가 어떠한가 애당초 묻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지극히 원통한 말로 애매하게 사도(邪道)로 만들어 버리었나이다. 그리하여 신유년 전후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적지아니하였건만, 하나도 그 뿌리와 줄기를 알고 밝히자고 한 일도 없이, 무고한 인명을 헛되이 죽이오니, 이 어찌 슬프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응당 우리나라에도 성현군자들이 많으련만, 이 일에 대하여서는 왜 이렇게 적막하고 이렇게 박절하오이까? 사람의 죽고 삶이란 세상에서 제일 큰일이라 늙고 병든이와 어리고 철모르는 아이들이라도 죽는다고 하면 무서워하고 놀라와하나이다. 불쌍하도다. 이 성교하는 사람들이여! 이들도 다 같이 죽기를 싫어하는 목숨이라 어찌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리오마는 알고서도 아니하지 못할 천주 성교를 봉행하다가 나라의 명을 거스른다 하여, 원통한 말을 아뢸 곳도 없이 원통하게 죽어 가나이다. 백성은 다 일반이라. 어느 백성이 국명을 범하고자 하오리까?
관장(官長)은 백성의 부모이신지라 겹겹이 억울한 마음이 엄연히 높으신 존전을 생각지 못하고 성교가 그렇지 아니하온 몇 가지 말씀을 대략 아뢰오니 통촉하시기를 천만 바라나이다. 우리 성교하는 사람이 인의예지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없사와 착하지 아니한 생각과 착하지 아니한 행실이 없으며, 효제(孝悌) 충신(忠信)과 오륜(五倫)삼강(三綱)에 벗어나지 아니하오니, 유도(儒道)와 백성에게 해될 일이 없사오니 어찌 나라와 백성에게 털끝만큼이라도 해가 되오며 염려가 되오리까?
이 도가 다른 도가 아니오라 천자와 백성이 날마다 행하는 일이며 우리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 위에 스스로 계신 대주재신(大主宰神)이나이다. 참 주재자이심을 세 가지로 미루어 생각하자면 하나는 가로되 만물(萬物)이요, 둘은 가로되 양지(良知)요, 셋은 가로되 성경(聖經)이오이다. 어떻게 만물을 증명하는가 하면 가령 방과 집에 비유할만하오이다. 저 방과 집이 기둥과 주추와 들보와 서까래가 있고, 문과 벽이 있으며 간새와 틈이 있는데, 한 치 한 푼을 어기지 않고 모난 것 둥근 것이 각각 규격이 맞아야 집이 되나이다.
만일 저 집이 절로 되고 사람의 힘이 없이 스스로 서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진실로 미친 사람의 말이요, 도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니, 지각 있는 사람이야 어찌 곧이들으며, 어찌 옳다고 하겠나이까? 사리가 이러한즉 어찌 집만 그러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만듦을 받지 아니하고 제 스스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 세상 사람의 집과 살림에 쓰이는 여러 가지 세간도 다 절로 되는 것이 없거든 하물며 높고 넓은 천지이며, 날고 기는 새, 짐승이며 갖가지 벌레나 숱한 물고기이며, 모든 초목 백과의 갖가지 기기묘묘한 형상에 어찌 만듦 받음이 없이 절로 되었으며, 주재하여 만드는 이가 없이 저절로 되었겠나이까? 만일, 절로 되고 주장하는 이가 없다 하면 저 일월성신이 어찌 항상 자리를 바꾸지 아니하고, 춘하추동이 어찌 그 때를 잃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보면 그것을 내신이가 정녕 있음을 넉넉히 알 것이니이다. 밤은 밤이 되고 낮은 낮이 되어, 사시사철 바뀌지 아니하고 절후도 어기지 않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주장하는 이가 계신 줄을 분명히 알 것이나이다. 만물의 성하고 쇠하는 것을 보고 바람이 알맞추 불고 비가 적당히 매려서 시절이 풍년이 드는 것과 우박과 서리의 재해를 입어 흉년이 드는 것을 보면, 자연히 주재하는 임자가 계신 것을 분명히 알 것이 아니리까? 어찌 사람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 귀로 역력히 듣건만, 그것을 그저 보고 듣기만 할 뿐 그 이치와 그렇게 되는 까닭은 생각하고 마련하는 이가 없으오이까?
슬프다! 사람이 제 입으로 먹는 음식은 먹을 때에 그것을 장만하여 준 이가 있어서 된 것을 알고, 몸에 입는 옷을 입을 때에 그것을 길쌈하고 바느질한 이가 있어서 된 것을 생각하면서도 그 음식의 감과 옷의 재료가 생겨나는 뿌리와 근본은 생각지도 못하니, 한심하고 가련한 일이 아니오니까?
만물의 좋음과 쓰기에 요긴한 줄은 사람마다 다 알건마는 이 만물의 근본과 그것을 만드신 임자는 알려고 생각지도 아니하오니, 참으로 애닮다 할 일이 아니오니까? 이 만물의 주재자는 하늘 위에 있으면서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이 엄연히 숨어 계시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마치 어두운 굴속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그 신묘하고 오묘한 오리는 알지 못하고 그저 저절로 생긴 것으로 올려 보내어, 생각도 아니하오니, 이는 마치 아비 죽은 유복자가 제 눈으로 그 아비를 보지 못하였으니 나에게 아비가 있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하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요? 아무리 제 눈으로 제 아비는 보지 못하였기로서니, 어찌 제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사오리까? 그와 마찬가지로 만물을 내신 천주를 내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이 만물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 내신 천주가 계신 것을 어찌 믿지 못하겠나이까? 한심하고 가련한 일이나이다. 세상 사람이 만일 한편의 신통한 글과 훌륭한 한 폭의 그림을 보면 이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이것이 어떤 사람의 솜씨인고 하고 칭찬함을 마지아니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재주도 좋고 글도 용하도다. 이 사람의 이름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고?"하고 결코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건만 어찌 천지 만물의 임림총총(林林叢叢)한 것이 한편의 글과 한 폭의 그림에 비하겠나이까? 그런데도, 예로부터 이제에 이르기까지 이일에는 캄캄하고 잠잠하여 한 사람도 묻고 알려고 하는 이가 없나이다. 우리 조정에도 응당 이런 지식과 덕망있는 이가 많을 것이며, 향읍에도 유명한 재사와 슬기로운 선비가 많건마는 천주성교라고 하면 애당초부터 그른 것으로만 알고 생각도 아니하오니, 우리 예의의 나라에 큰 흠집이 되지 않으오리까?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공경할 줄은 알되, '천주'라 하면 이상한 말로 알고 고약하게 말을 하니 무식한 사람은 이상할 것 없다치더라도 글을 아는 사람도 이러하니, 어찌된 일이오니까? 하느님을 한자로 쓰자 하면 무슨 글자로 쓰겠나이까? 반드시 하늘 천(天)자와 임금 주(主)자를 쓸 것이오니, 이 두 글자를 하나로 붙이면 곧 '천주'가 되나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나서 차차 자라면 마음도 또한 사람을 따라 자라므로 어린 아이가 커갈수록 아는 것도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절로 제 양심에 따라 제 어미와 아비를 알며, 철이 나고 장성하게 되면, 부모의 가르침과 스승의 교훈이 없을지라도 제 스스로 귀하고 천함을 구별하고, 제 스스로 무섭고 겁남을 깨닫고, 제 스스로 공이 되고 죄가 되는 것을 알아서, 제 양심을 속이지 아니하는 이는 평소의 행동이 착할 것이요, 제 양심을 속여 사욕에 방종한 이는 평생 동안 행위가 그를 것이니, 만일, 옳고 그름을 몰라서 분간하지 못한다는 사람은 온전히 제 바른 양심을 속이는 말이니, 어찌 믿을 수가 있으리요? 또 제 양심을 천주 대주재가 계신 줄을 알 이도 있으니, 깊이 생각하옵소서. 무릇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만일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어나며 뇌성과 벽력이 일어나면, 비록 어린 아이들이라도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발을 굴러 조그마한 제 한 몸둥이를 둘 곳이 없어 어쩔줄을 모르나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제 본 양심과 양지로서 능히 착한 것을 상주고, 악한 것을 벌주시는 한 대주재가 계신 줄을 분명히 알고 그것이 마음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오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사옵고, 또 여염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만일 창황(愴惶)하고 다급한 일을 당하면 반드시 '하느님을 찾고 사람이 병에 들면 처음에는 약도 쓰고 점도 치다가 마침내 죽을 지경에 이르면, 이것저것 다 버리고 결국 하느님을 찾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오이까? 사람이 제 본 양심으로 천주 대주재께서 살리고 죽이는 대권을 잡고 계신 줄을 안다는 증거가 분명하나이다.
왜, 또 말하기를, 성경으로써 천주가 계신 줄을 안다고 하는고? 성경은 거룩한 책이오이다.
우리 세속사람도 만일 제 조상의 내력을 알고자 하면, 책에 기록한 것이 없으면 어떻게 알며, 각 나라의 일도 만일 사기에 기록한 것이 없으면 옛적 요순우탕(堯舜禹湯) 문무(文武)주공(周孔) 같은 이도 만일 성전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떤 임금이며 어떤 사람인 줄을 어떻게 알겠나이까? 경전에 뚜렷이 실려 있기 때문에 지금 천년이 지났어도 직접 보고 듣는 것과 같이 의심없이 믿는 것이나이다. 우리 천주 성교회의 일도 세속의 사리와 같을 뿐 아니라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연대와 내력이 바르고 분명하여, 털끝만큼도 어그러짐이 없으므로, 천지를 창조하던 처음 일과 신과 마귀가 구별이 있은 일과, 만물을 창조한 일과 사람을 만들고 인류가 어울려서 서로 싸우니 일들이 성경과 사기에 역력히 실려 있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나이다. 세속 사기에 천황씨 지황씨 하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은 모르고 한 말이며 반고씨가 시작하여 말한 것도 인류의 시작을 모르기 때문이나이다.
유교의 연대와 내력이 잘못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 도리를 모르는 듯하오나 성교 사기를 살펴보니, 그릇됨이 분명하므로 대강 말씀하오니, 통촉하시기 바라나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성교에 대한 말이 중국사기(中國史記)에 보이지 아니하므로 혹시 의심하는 일이 있사오나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이향상제(以享上帝)라 하였으니 이향상제의 상제는 곧 성교인이 공경하여 일컫는 천주이시니, 세속 사람이 부르는 하느님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뜻은 한뜻이옵나이다. 또,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소사상제(所事上帝)라 하였고 서전(書傳)에는 인우상제(禋于上帝)라 하였으며 공자 같으신 이도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죄를 얻으면 다시 빌 곳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에 순종하고 하늘을 받든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만 빈 하늘과 공중을 공경하고 두려워하고 순종하고 받든다고 하였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참 임자를 생각하고 한 말이오니, 이 임자는 곧 천주이시나이다. 사실이 이러하온데 어찌 유교 책에 없다 하오며 중국 책에 없다하리오? 이전에 서양 사기가 중국에도 많이 있었사오나 상고 때 요(堯) 임금 때의 홍수와 진(秦)나라에서 책을 불살랐을 때에 남은 것이 다 소멸하였나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손(孫)오(吳) 적(赤)오(烏) 연간에 쇠십자가를 얻었으며, 당나라 정관(貞觀) 8년에 성교가 크게 퍼져서 조정에서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성교를 존중하는 비석을 세웠고 위징과 방현령 같은 명신들도 의심없이 독실하게 성교를 믿었으며, 명나라 만력 연간에 서양 선비들이 많이 와서 교를 펴고 지은 책도 많아서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오고 있사오니, 이것은 중국의 사기를 살펴보면 잘 알 일이옵나이다.
우리나라에도 다행히 성교가 들어 온지 불과 백년이 못되오나 성경으로 천주 계심을 증명함이 아주 분명하나이다. 이제 문헌의 증거를 보면 천주가 계신 것을 분명히 알 것이요, 천주가 계시는 사실을 분명히 알진대, 만물이 다 천주가 내신 것임을 알 것이오이다. 하늘로 덮으시고 땅으로 실으시고 일월성신으로 비치시고, 온갖 초목과 오고백과와 물고기와 새 짐승과 금은동철 등의 가지가지를 사람에게 주시어 이롭게 하고 계시나이다. 우리 사람이 만물을 먹고 쓰지 않는 이가 없건마는 이렇게 지극히 크고 넓으신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생각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천주를 공경하는 성교인을 애매하게 사도로 몰아 억울하게 죽이오니 주를 위하여 죽는 이는 제 본분을 다 하거니와 백성의 부모이신 관장들은 왜 허물을 무릅쓰라고 하나이까?
모태에서 태어나서부터 죽기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의 많은 은혜가 천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거늘 어찌 이 은혜를 만분지일이나마 갚기를 생각지 아니하리이까? 가령, 세상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에 집과 논밭이며 종들과 세간을 많이 주어 그 자식으로 하여금 넉넉히 쓰고 먹게 하였는데, 만일, 그 자식이 그 부모의 덕을 모른다면, 효자라고 하겠나이까? 효자 아니라고 하겠나이까? 우리 사람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데 있어, 천주는 부모이시고 우리는 자식이오라 오만가지 일이 천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사와, 그 은혜에 젖고 그 은혜에 잠겼으니, 천주를 공경하다가 비록 목숨이 죽을지언정 어찌 아깝다 하고 원통하다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우리 성교하는 사람들이 감히 목숨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오이다.
이 천주를 받들어 섬기는 도는 높고 넓어서 행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 아니오이다. 오직 허물을 고쳐 새로워지기 위하여 천주께서 명하신 십계명이 있사옵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이 무엇인고 하니,
1. 천주를 공경하여 만유의 위에 높이고,
2.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며,
3. 주일을 지키고,
4.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경하며,
5. 사람을 죽이지 말고,
6, 사음을 행하지 말며,
7. 도둑질을 말고,
8, 망령된 증참을 말고,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고,
10. 남의 재물을 넘보지 말라.
하오니, 이 열 가지 계명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돌아가나이다. 곧 천주를 만유위에 사랑함과 사람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함이라. 이 열 가지 계명 중에 위로부터 세 가지 계명은 천주를 받들어 공경함이요, 그 다음 계명 일곱 가지는 몸으로 닦는 공부이오이다.
안(顔)씨의 네 가지 금한 것(사금(四禁))과 공자(孔子)의 아홉 가지 생각(구사九思)라 한 것은 족히 비길 것이 못 되고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다 이 열 가지 계명에 들어 있사오니, 어찌 한 터럭만큼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리까? 그러므로 한 집에서 이 도를 행하면 한 집안이 가히 평안할 것이요, 한 나라에서 행하면 한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며, 한 천하에서 하면 온 천하가 가히 평안하리이다.
이 열 가지 계명 중에서 한 가지도 범하지 못할 것이니, 비단 사람이 몸으로 행하여 범하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여 범하는 것까지 엄히 금하는 것이오이다. 무릇, 사람의 허물이라 한 것이 처음에는 마음에서 시작하나, 나중에는 그 일을 해롭게 하는 것인데, 세상의 법은 그 일만을 다스리고 그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천주의 명은 그 일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까지도 다스리는 것이오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더욱 도에 희미하여 잠깐 사이에 죄를 범하여, 사욕편정이 나를 백가지로 유인할 새, 교만으로써 하며, 질투로써 하며, 사리로써 하며, 미색으로써 하여, 사람을 반드시 영원히 죽이는 지경에 빠지게 하나이다. 만일, 밤낮으로 물리치지 아니하면, 이 일곱 가지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 때인들 방심할 수가 있으리요?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죽을 때까지 정욕과 싸워 싸움에 이기면 공을 세워 천당에 가고, 이기지 못하면, 죄에 이르러 지옥으로 떨어지오이다. 이 공과 죄의 판단이 내리는 날은 곧 사람이 죽는 날이오이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번되시어 작은 선도 갚아 주지 않음이 없으며, 지극히 의로우셔서 작은 악도 벌하지 아니함이 없나이다. 만일, 사람이 죽은 뒤에 혼도 따라 없어진다면, 상과 벌이 쓸데가 없어지겠지만은 사람마다 죽지 않는 영혼이 있어서 세상에서 행한 선악대로 또한 없어지지 않은 상과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여 생각지 않으리까? 또한 혼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대략 말씀드리리이다. 혼이라는 것이 셋이 있으니, 생혼, 각혼, 영혼이외다. 생혼은 사는 혼이요, 각혼은 깨닫는 혼이요, 영혼은 신령한 혼이오이다. 영혼은 생혼과 각혼의 능을 겸하여 능히 살고 능히 깨닫고, 능히 도리를 추론하여 천지 만물 중에서 가장 슬기로운지라, 중용에서 이른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한 것이 곧 이 영혼이오이다. 어머니 뱃속에 잉태가 되면, 곧 이 영혼이 같이 붙어 생기는 것이니, 이렇게 신명한 체(體)가 어찌 초목금수와 같이 썩어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리이까? 옛 군자들도 혼이 셋이 있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영지불멸(靈之不滅)이라 하였나이다. 영지불멸이라는 말이 삼혼중의 영혼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이요, 삼혼누산(三魂屢散)이라하였고, 또 삼혼구백(三魂九魄), 혼승백강(魂升魄降)이라 하였으니, 그 혼이 셋이 있는 것과 혼이 죽지 아니하는 것을 반드시 알 것이옵나이다. 이제 영혼이 죽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한다면, 궁극적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착한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느니, 이 받는바 복과 고통은 영원히 사라자지 못하는 것이오이다. 만일, 사람이 말하기를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하늘과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이까? 백 가지 일들이 다 이치에 맞는 것은 내 눈으로 보지 못하였어도 믿어야 하고,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것은 비록 내 눈으로 보았다 하더라도 믿어서는 아니 되오이다. 그러므로 일의 미쁘냐 미쁘지 않느냐는 보고 안본 데 달려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치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달여 있나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이치에 맞는다면 천년 뒤에라도 그대로 되는 것이오이다. 어찌 반드시 내가 꼭 친히 보아야 한단 말이오이까? 주가 계셔야 옳겠기로 친히 뵈옵는 듯 의심할 여지가 없사온데, 만일 사람이 천주가 계신 것을 모르겠나 하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고, 천당과 지옥이 잇고 없음을 의심한다면, 이는 미련한 자가 아니면 철모르는 사람이나이다. 대개, 한 나라에도 상벌이 분명하여, 공이 있는 이는 들어 올려 상을 주고, 금백도 주며, 죄 있는 사람은 옥에 가두어 때리기도 하고 귀양도 보내며, 혹은 죽이기까지도 하나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는 대군 대부모가 어찌 상벌의 법도가 없겠나이까?
천주께서 주시는 상벌은 세상 임금의 상벌과 크게 다르옵나이다. 세상의 상벌은 한이 있으되, 천주의 상벌은 영원히 한정이 없나이다. 그 한정이 없는 까닭은 천주는 시종이 없으시고, 영혼은 죽지 아니한즉, 그 받는 복과 벌도 또한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게 마련하신 것이오이다. 또 천당의 복됨과 지옥의 괴로움도 만일 참된 복이 없어지게 마련한 것이라면 천복이 한이 있을 터이므로 복을 받는 영혼이 몇 해 후에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걱정이 될 것이고, 지옥의 괴로움도 또한 그리하여 만일 괴로움이 없어지기로 마련하였을 터이면, 지옥의 영혼이 괴로움 중에서도 이후 없어질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즐거움이 될 것이니 어찌 참 복과 참 괴로움이 되리이까? 그러므로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세복은 천복의 그림자요, 세고는 지옥고의 그림자이니라."고 하였으니, 가히 그 참되고 진실됨을 알 것이오이다. 또 천당은 우리의 본고향이고,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곳이오이다. 세상 선비가 말하기를, 역려(逆旅)건곤(乾坤)이라하련마는, 이 글 뜻은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슬프고 가련하다. 세상 사람이 한번 죽음이 있는 줄을 알고 세월이 유수 같아서 허황하고 맹랑한 줄을 알건마는 이욕(利慾)에 골몰하여, 진작 그른 말과 그른 일과 그른 행실을 하다가 예고 없는 죽음에 이르면 피하지를 못하여 영고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이렇게 마음이 어둡고 사리에 캄캄하리이까? 만일 천당과 지옥이 없다면 우리 사람들이 이 세상을 거리낌 없이 살아 보려니와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이 분명한 이만큼 우리 성교하는 사람은 잠깐 동안의 세상 고통을 생각지 아니하고 후세를 생각하여 비록 부월이 앞에 있고 정확이 뒤에 있어 베고 삶는 형벌이 아무리 무섭고 두렵건만, 이 잠깐의 목숨임을 알 것 같으면 천지의 대부모를 배반하고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면할 길이 없사와, 눈앞의 막힌 운수에 구애하지 아니하오니, 이는 큰 의지가 있으므로 이러하거늘, 세상의 무식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천주학을 하는 놈들은 죽기를 좋아한다." 하여 모욕함이 무수하오니 이는 도리를 모르는 사람의 말이오이다. 여간한 변명의 말이 쓸데없사오나,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인지상정인데, 인정이 어찌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하리오리까?
성교의 참됨을 증명하는 일이 있나이다. 다른 것이 아니오라, 죽어도 결코 성교는 배반치 아니하고, 천주를 위하여 의연히 굴하지 아니하는 일이 증거이옵나이다. 자고로 성교를 받드는 명현군자네가 가히 억만을 셀 길이 없사오니, 이것으로 보아도 족히 성교가 참된 도리임의 바른 증거가 되지 아니하오리이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도가 대성하오나, 만일 국령이 내려 절들을 헐어 버리고 중을 죽이려 하여, 한 도에서 하나씩 목을 베든지 처형하여 정배를 보내면 팔도의 불도가 씨가 없어질 것이옵나이다. 그러하오나 우리 성교하는 사람들은 죽일수록 그 수가 없어지지 아니하옵고, 점점 더 성하여 가오니, 이 도가 바르지 아니하오면 어찌 이러하오리까? 일언이폐지하고, 천주성교는 지극히 거룩하고 공번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고, 지극히 하나이요 둘이 없는 도리이옵나이다. 어찌하여 지극히 거룩하다 하는고? 이 천주교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오라 예로부터 대성대현들이 계계승승하여 그 도리를 드러내고 그 규구를 정하여 죽음으로써 증거하오니, 가히 극히 거룩한 교이오이다. 또 어찌 지극히 공번되다 하는고? 이 도는 다만 지식 있는 이 만이 할 도리가 아니오라 남녀노소와 동서남북인이 다 마땅히 할 도리이오니, 지극히 공번된 도가 아니고 무엇이리이까? 또 어찌하여 바르다고 하느냐? 이 도는 광대하고 명백하며, 탕탕평평하여 털끝만큼도 편벽되지 아니하오니, 지극히 바른 도이나이다. 또 어찌하여 지극히 참된 도라고 하느뇨? 천하의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도가 없는 나라가 없사오나 참되지 않은 도가 많나이다. 노자와 장자는 허무함에 빠지고 선불은 허망함에 빠졌으며 이 밖에 백가지 방술들이 많으나 말할 만한 것이 못되나이다. 그런데 우리 성교 도리는 거짓됨이 없어 영원히 어긋남이 없사오니, 가히 지극히 참되다 할 것이옵나이다. 어찌하여 또 이르기를 지극히 온전하다고 하는고? 초목으로써 비유한다면, 다른 교는 혹 줄기는 있으나 가지가 없고, 혹 잎은 있으나 꽂이 없고, 꽃은 있으나 열매가 없어 수미가 상련하지 못하고 종시가 서로 접촉하지를 못하되, 오직 성교는 줄기도 있고 가지도 있으며, 잎새도 있고 꽃도 있으며, 열매도 있어 천지만물의 시종과 사람의 시말이 역력히 드러나고 과거와 미래의 일이 뚜렷이 벌여졌으니, 가히 지극히 온전하다고 하겠나이다.
슬프고 한심하도다! 세상 사람이 옳은 일도 그르다고 한다면 하릴없는 일이지만, 우리 성교를 그르다고 하면, 마치 옥을 가리켜 기왓장이라고 하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요? 애당초 교의 옳고 그름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옳은 도를 그르다고 하니, 신민지도에 하소하여 아뢰올 곳이 없사오니, 생각하면은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몇 마디 말씀을 대강 아뢰오니, 통촉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언제나 대현군자를 만나, 이왕에 모르고 그르다고 하던 천주 성교의 억울함을 밝혀 우리 주상 전하께 나아가 아뢰어, 조정과 백성이 그 즐거움을 함께 하게 되어, 나라가 만세까지 태평하게 될 것이옵나이까? 또 말하기를 임금도 아비도 모르는 학이라 하오니, 이는 성교의 도리를 온전히 모르는 말이옵나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라."하였으니, 이는 충과 효가 하나로 겸한 말이라 봉교는 사람이 어찌 삼가고 조심하지 아니하리요? 예절에 힘쓰고 정성을 극진히 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할새, 비록 끓는 물과 타는 불이라도 오히려 피하지 아니하옵나이다. 어찌 이러한 옳은 도리를 모르고 임금도 부모도 무르는 학이라고 하옵나이까?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오라, 생각건대 나라의 금령을 범한다 하여 이렇게 말하는 듯하오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또한 있사오니, 다시 말씀드리리이다.
세상의 도리에 높고 낮음과 일의 가볍고 무거운 사정이 있사옵나이다. 한 집안에서 중한 이는 아비만한 이가 없사오나, 아비보다 더 높은 이는 나라 임금이시고, 임금보다 더 중한 이는 천지대군이신 천주이시나이다. 아비 말을 듣고 임금의 영을 듣지 아니하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따라서 임금의 명을 듣고 천지 대부모의 명을 듣지 아니하오면, 그 죄가 더욱 중대할 것이옵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는 것은 명을 짐짓 거스리고자 한 것이 아니오라, 마지못해 하는 일이거늘, 어찌 이것으로써 임금도 부모도 몰라본다고 하나이까?
또 말하기를 통화색(通貨色)한다 하는데, 재물을 통용하는 법은 예로부터 각국에 없지 못할 일이옵나이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변통하지 아니하오면 사람이 어찌 살며, 임금과 백성이 무엇으로 의지 삼아 쓰오리까? 또 색으로 통한다는 말은 금수도 오히려 못하는 일이어늘, 하물며 성교를 받드는 사람이오리까. 십계 중 제 구계에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하였으니, 제 육계는 몸으로 범하는 것을 금함이요, 제구계는 마음으로 범하는 것을 금한 것이온데, 도리어 통화색이라는 말로 원통하게 욕하나이까? 도의 참되고 거짓됨과 일의 굽고 곧음을 가리지 아니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고약한 말로써 정도를 욕되게 하나이까? 또 외국의 도라 하여 금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다시 비유로써 말씀드리나이다. 금이라 하는 것이 아무리 훌륭한 보배라도 그것이 있는 땅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곳에서 났든지 금이면 보배로 치나이다. 도라 하는 것도 지방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도이든지 도만 바르면 참 도가 되는 것이옵나이다. 어찌 참된 도가 나라와 지방을 가리겠나이까? 또 우리나라에서 불도를 숭상하오나, 이 불도도 근본은 다른 나라의 도가 아니오이까? 팔도에서 절과 부처로 허비하는 재물이 적지 않건만, 이는 외국에서 왔음을 꺼려하지 않으니 사리에 맞지 아니하오며, 그 까닭이 어찌된 것이오이까? 이 불도라 하는 것이 성교의 문자와 법을 도둑질 하여 도리를 어지럽히고 윤기도 끊어지게 하오니, 이는 옛적에 이른바 붉은 것이 붉은 것을 어지럽히고 싹이 싹을 어지럽히는 일이옵나이다. 어리석은 백성과 철모르는 부녀자들을 미혹케 하오니, 마땅히 금하여야 할 것이 아니오이까? 또 무당, 판수, 관상, 점장이 따위가 부녀자들과 어리석은 백성을 곤혹케 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아 내는 것은 예사로 알고, 홀로 성교만을 그른 줄로 알고 죄 없는 백성을 원통하게 죽이오니, 가히 통곡할 일이 아니오이까? 어떤 사람이든지 그 행실과 심성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어떠함과 그 행하는 도의 어떠함을 능히 알 것이오이다. 우리 성교하는 사람들이 일찍이 모반에 걸린 이가 없으며, 간음이나 도둑질하는 죄를 범한 일이 없으며, 사람을 다치거나 물건을 해치는 일을 멋대로 한 일이 없나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법외의 형벌을 많이 받고, 천지 대부모를 욕하고 배반하라 하오니, 어찌 자식이 아비를 욕하고, 백성이 임금을 배반하오리이까? 사람으로서는 천만 못할 일이오이다. 어찌 영혼을 결합한 사람이 차마 할 일이오이까? 슬프도다! 지금 우리 착하고 거룩하신 주상 전하께옵서 백성을 적자와 같이 아끼시건만, 저 성교하는 백성들만은 우리 임금의 적자가 아니란 말이오이까? 슬프도다! 이 사람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조금도 불쌍히 여기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옥중에서 쓰러지고 문 앞에서 목 벰을 당하는 일이 뒤를 이어 끊임이 없사오며, 눈물과 피가 도랑을 이루고 울움소리가 하늘에 넘쳐, 아비는 그 자식을 부르고, 형은 그 아우를 부르며, 어찌할 줄을 모르옵나이다. 맑고 밝은 세상에 이것이 무슨 광경이옵나이까?
대저,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성교가 진실된 가르침임을 증명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옵나이다. 죽음에 임하여 용감히 말해야 할 때에 한번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 보지도 못하고, 말없이 죽으면, 쌓이고 쌓인 회포를 백년 뒤에까지 밝힐 길이 없사오니, 엎디어 빌건대, 밝히 굽어 살피사,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그르고 바름을 가리시옵소서. 그리한 뒤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도리를 일변하시옵기를 바라나이다. 그리하여 국금을 늦추시고 잡아들이는 일을 그만 두시는 동시에, 옥에 갇힌 억울한 죄인들을 놓아 주시어, 온 나라의 백성이 평안히 생업을 즐기고,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하시옵기를 천만 바라나이다.
우 사(又辭)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바치고, 제사지내는 일을 천주교에서는 금하고 있나이다. 살아생전의 영혼도 술이나 밥을 받아먹지 못하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어찌 그 영혼을 먹이리요? 음식이라 하는 것은 육신을 먹이는 것이요, 영혼의 양식은 도덕이라, 아무리 지극한 효자라도 좋은 음식은 잠든 부모에게는 드리지 못하나이다. 잠자는 때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죽어서 크게 자는 때는 무엇을 먹사오리까? 채소와 죽과 같은 것을 죽은 부모에게 드리는 것은 헛일이 아니면 거짓 일이니, 어찌 사람의 자식이 되어, 헛되고 거짓된 예로써 아무리 죽은 이에게 일지라도 가히 할 일이오니까? 또 사대부의 신주를 말씀하와도, 또한 성교회의 금하는 일이옵나이다. 이미 혈기와 혈맥이 서로 전함이 없고, 살지 못하는 한 낱 나무 조각이니, 어찌 감히 부모라 하리요? 부모라 하는 말이 소중한 말이거늘, 어찌 장인(匠人)이 붓과 먹으로 만든 한 낱 나무를 감히 참 아비, 참 어미라고 공경할 수 있으리요? 이는 올바른 도리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허황된 일이오이다. 아무리 마음을 궁글리어 생각하여 보아도 바른 마음에 걸리므로 신주와 제사를 상관하지 아니하오니, 이 일로 해서 사대부에게는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 성교에는 죄를 짓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정씨 약용 상재상서 성교논설 작이라 임인년 원월 이십일- 등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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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양근성지, 양근관아, 한양조씨 세거지(도곡리 능말)
일 시 : 8월 23일 넷째 주일
경의, 중앙선 양평역에서 10시 만남(10시30분, 양평성당 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