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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盈德)과 영해(寧海)지역 유적답사 자료집
대구 출발(07:20) → 무안박씨 무의공 종택(9:40~10:00)→ 신돌석장군 유적(10:10~10:30) → 괴시리 목은 출생지와 선비마을(10:40∼11:00) → 도해단(蹈海壇, 11:10~11:40)→점심(칠보산휴게소 뷔페음식12:00∼13:00)→ 안동권씨 송천자(松川子)와 칠우정(七友亭, 13:10~13:40) → 인량리 재령 이씨, 안동 권씨종택(13:50∼15:40) → 원구리 영양 남씨, 무안 박씨 경수당(15:40~17:30)→ 대구도착(19:30)
1. 무안(務安) 박씨(朴氏)
1) 무안박씨 영해 세거
무안박씨의 시조 진승(進昇)은 신라 박혁거세왕의 30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大君)중 제 6자인 완산대군(完山大君)에 봉군된 언화(彦華)의 9세손이다. 공은 고려 현종때 국학전주(國學典酒)를 지냈고 국자감(國子監)에서 오륜을 가르쳤으며 공로로 전라도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이에 득관(得貫)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무안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의 13세손인 해(解)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중 수양대군의 단종왕위찬탈을 겪고 경기도 여주로 퇴거하였다. 해의 아들 박지몽(朴之蒙, 1445~?)이 백부 박이(朴頤, 1393~1478)의 부임지인 영해에 함께 내려왔다가 이 곳 영해의 산수와 지세를 보고 인량리에 터전을 잡고 토성(土姓)으로 함길도 도사(都事)인 영덕 박씨 박종문(朴宗文 ?~1467)의 사위가 되면서 정착하게 된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은 영해와 순흥지역에 세거하며 영남사족과 인척관계를 맺고 명문가로 자리잡게 된다.
무안박씨 영해파(寧海派)는 입향 이래 문과 7명, 무과 16명 등 대과(大科) 23명과 많은 소과(小科)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학맥연원은 퇴계(退溪), 학봉(鶴峯), 서애(西厓), 경당(敬堂), 존재(存齋) 갈암(葛庵)형제, 밀암(密庵) 등에 이어지고 있다. 영해 입향조의 덕화유풍(德化遺風)으로 문풍(門風)이 순후(淳厚), 의협(義俠)하여 국란이 있을 때마다 명장(名將), 충신(忠臣)을 배출하였다.
혹자는 무안박씨 영해파를 무변(武弁)집이라고 하니, 이는 무과 급제자가 많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용면을 살피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이 뛰어나고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 사마, 문과 급제자가 많았으며 홍유(鴻儒), 석학(碩學)이 대대로 연면하였으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가문이라 표현함이 타당하다.
2) 무의공(武毅公) 종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4호. 임진왜란때 큰 무공을 세워 선무훈(宣武勳) 일등공신에 훈록(勳錄)된 무의공 박의장(朴毅長)의 넷째아들 박선(朴璿)이 큰형 박유(朴瑜)를 위하여 지어준 살림집이다. 대문간채, 안채, 사당채가 일곽을 이루고 있다. 종택은 가마골(陶谷) 북방 야산을 배산(背山)하고 안들을 대려다 보는 바리를 차지하였다. 1644년경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1942년에 대문간채를 다시 세웠고 1978∼80년. 1993년도에 국비로 중수하였다.
소슬대문이 있는 대문간채는 정면6칸 측면 단간통(單間通)인데 문간방이 부엌, 마구간, 곳간과 측간이 시설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반듯한 마당이 나온다. 남향한 안채 우측으로 번듯한 사랑채가 독립된 듯이 구조되어 있다. 안채의 평면은 이로 인하여 ㅁ자형에 날개가 달린 모습이 되었다. 사랑채는 당호가 청신구택(淸慎舊宅)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겹집이다. 사랑방이 남북2칸을 차지 하고 나머지 4칸이 사랑대청이다. 사랑방 뒤로 곳간채 3칸이 있고, 사랑방 좌측으로 책방과 부엌이 연속되면서 중문에 이른다. 중문 우측에 작은사랑용 부엌과 2칸의 사랑방. 이어 꺾이면서 고방이다. 정침은 정면7칸 측면2칸이다. 듬직한 집으로 좌측에 부엌, 이어 안방, 6칸 대청이고 다음에 2칸의 건넌방이 있다. 산에서 돌을 떠다 기단도 쌓고 주초석도 놓았다. 5량집이다. 사당은 무의공을 모시는 불천의 가묘이다. 건물 구석구석의 구조와 처리에 고급스러운 솜씨가 발휘되어 있다.
무의공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영기(榮基)이고, 아버지는 현감 세렴(世廉)이며,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시준(時俊)의 딸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며,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해 주부(主簿)가 되고,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다. 이 때 소속군사를 이끌고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각이 퇴각하자 그의 비겁함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같은 해 7월에 이각이 처형되고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장기군수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박진을 도와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 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 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에서 왜적 2,000여 명과 맞서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5월에도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50여 명을 베는 등 크게 이겼다. 그러한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다. 7월에는 초산군(剿山郡)의 적을 쳐서 남문에서 전멸시켰다. 8월에는 왜병이 안강(安康)에 주둔한 명나라의 군사를 급습해 200명을 죽이자 병사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적을 추격해 무찔렀다.
1594년 2월 양산의 적을 무찔렀고, 3월에는 임랑포(林浪浦)의 적이 언양현에 진입해 노략질하자 이를 급습해 무찔렀다. 이 때 적에게 잡혀 있던 백성 370명을 구해냈으며 우마 32필도 노획하였다. 5월에는 기장(機張)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베었다. 1595년에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찔렀다. 이 때 1,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명군 5만 명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적군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치자 창고에 있던 곡식 400여 석을 거두었다.
1598년 박도산(薄島山)의 적을 쳐서 전승을 올려,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말이 하사되었다.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두루 지내다가, 1602년 다시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가 되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3) 경수당(慶壽堂) 종가
1997년 9월 29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박응대가 소유하고 있다. 무안박씨 영해파(寧海派)의 대표적인 종택으로, 경수당 박세순(朴世淳)이 1570년(선조 3) 99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현판 글씨는 퇴계(退溪) 친필이다. 박세순은 1599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668년(현종 9) 화재로 건물이 소실된 뒤 박세순의 장증손인 박문약(朴文約)이 소복을 입고 3일 동안 통곡한 뒤 재건에 힘써 1713년(숙종 39) 지금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원구리 안쪽 평지에 북동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 정면으로 정침(正寢)이 있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있다. 대청 전면에 일각문이 있고, 대청의 후원에는 사당과 서당이 있었으나 철거되었으며, 사랑채 후원에는 가로 6.3m, 세로 5.5m, 길이 1.5m의 방형연당(方形蓮塘)이 있으며, 창건주 박세순이 심은 수령 약 730년으로 추정되는 울릉도 원산의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뿌리둘레 4.72m, 흉고 3m, 수관(樹冠) 8.9m, 수고(樹高) 6m의 노거수이다. 수령은 묘목수령(苗木樹齡) 300년, 이식수령(移植樹齡) 430년으로 추정한다.
정침은 ‘口’자형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6칸이고, 대량 위에 키가 큰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여를 받게 한 간결한 구조의 3량가이다. 중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도장, 마구간을 두고 오른쪽으로 안사랑방, 대청 2칸, 감실(龕室)을 연이어 배치하였는데, 마루의 우측칸과 감실은 우익사에서 돌출되어 편날개집을 이룬다. 중문 내 3칸 너비의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대청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왼쪽에 도장방, 안방, 부엌을 연결하는 좌익사가 있고, 오른쪽에 귀방, 통래간, 광, 문간, 중방을 연결하는 우익사가 있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좌측 앞뒤로 2칸의 대청방을 두고 오른쪽은 모두 마루방으로 꾸몄다. 대청과 대청방 사이에는 3분합과 2분합의 맹장지를 설치하였다. 대청의 3면에는 모두 궁널띠살문을, 대청방의 3면에는 띠살문을 사용하였으며, 주상은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5량가 구조이며, 종도리받침의 중대공은 포대공이고 종량 위의 마룻대공은 파련형이다. 측면 상부는 충량을 대들보에 걸치고 충량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2. 신돌석(申乭石) 장군 유적
신돌석(1878-1908) 장군은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평민 출신 의병장군이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다음 해인 1906년부터 의병을 일으켜 영해․영덕․평해에서부터 삼척․영양․춘양․원주․안동 등 경북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까지 신출귀몰하게 왜군에게 저항하였던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있던 그의 옛 부하이자 외가로 동생뻘되는 김상렬․상태․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하다가, 일본군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씨 형제들에게 독주를 먹고 잠이 깊이 빠진 사이에 도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30세였다. 1971년 그의 유골을 국립묘지로 이장할 때 그의 시신의 머리뼈와 가슴뼈가 박살나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우리의 가슴을 더욱 슬프게 한다.
오십천 언덕배기 솔밭에 ‘순국의사 신돌석 장군 기념비’가 1965년에 세워졌고, 그가 태어난 축산면 도곡리 효촌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3. 가정과 목은의 생가비와 선비마을
영해면 괴시리(槐市里)에 이르면 마을 앞을 수놓은 연꽃의 향연과 풍채만으로도 묵은 세월을 말해주는 두 그루 고목이 따뜻하게 맞이한다. 황토빛 반사하는 흙길 따라 이어지는 200여년 전통의 고가옥들이 머릴 맞댄 이곳이 바로 괴시리 전통마을이다. 마을의 분위기를 귀띔해 주듯 만개한 연꽃이 전답처럼 피어나 있어, 바쁜 일상에서 여유로운 과거 고택으로의 먼 시간여행을 나온 듯하다.
마을을 주름잡는 기인 기와 토담길, 발길 더듬어 한집 한집 들여다보며 걷자니 어느덧 내 몸과 마음도 조선후기로 물들어 간다. 400여년 영양남씨(英陽南氏) 세거의 흔적이자 집성촌을 훔쳐보며 묵은 고택의 향취와 세월의 흔적을 마주한다. 이곳은 도청과 영덕군이 함께 전통마을로 지정하여, 복원도 하고 단장도 하여 잘 보존된 고유마을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 살고도 있는 가옥들이 반, 문화재로 지정받고 원형 그대로를 보존만 하고 있는 가옥들이 반 정도 될 듯하다.
이곳은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의 처가이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출생한 곳으로, 목은은 고려말 최고의 학자로서 여기에 있는 관어대에 올라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지었다. 고려 공민왕 8년 때 이색이 원나라 유학 후, 고국 길에 잠시 들른 중국 구양박사(歐陽博士 : 歐陽玄)의 괴시마을과 고향인 이곳(당시-豪池村)과 유사하다고 여겨 이후 ‘괴시(槐市)’라 칭하였다고 한다.
여말 이색의 외가가 처음 입주한 이래 몇몇 종씨가 기거하다, 인조8년 1630년부터 영양남씨가 처음 정착하여 점차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후 380여년이 흘렀다.
전통마을의 주택양식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가의 원 형태 그대로 계승하며, 문화와 예절 또한 함께 전승되고 있다 한다. 마을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300년된 영남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 대남댁, 영은고택, 물소와고택(勿小窩古宅 : 南澤萬) 및 서당 등 많은 종택과 서당, 정자 등 도합 14점의 국가 및 도지정 문화재 자료가 있어 ‘문화재마을’이 아닐 수 없다.
4. 김도현(金道鉉)과 도해단(蹈海壇)
도해단은 영해 대진 해수욕장을 지나 바닷가에 있는 단으로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경술국치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바다를 밟아 자결한 곳이다. 김도현은 영양군 청기면 상청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와 함께 안동․영양․봉화․청송 등지에서 많은 의병활동을 하였다. 김도현은 이만도를 스승이자 선배로 가장 존경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만도는 비장한 마음으로 27일동안 단식하고서 자결하였다. 이것을 본 김도현은 이만도와 같이 자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단식으로 자결하는 방법 대신에 동해 바다를 밟아 죽는 길을 택하였다.
바다를 밟아 죽는 것은 중국 노중련(魯仲連)의 고사이다. 노중련은 전국시대 말기 제(齊)나라 사람으로 절의가 높았던 고사(高士)였다. 진(秦)나라 세력이 강해지자 겁을 먹은 조(趙)나라가 진나라를 황제로 받들면서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나는 그런 비굴한 모습을 볼 바에야 차라리 바다를 밟아서 죽겠다.”는 준엄한 말을 하자, 조나라가 진나라를 황제로 받드는 존칭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도현은 이만도와 같이 즉시 자결하고 싶었지만 연로한 부친이 계셨기에 부모 앞에 먼저 죽는 것은 불효이고, 또 자기가 죽으면 부친을 봉양할 사람이 없었기에 역시 불효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면서, 부친이 돌아가시면 자결하리라 마음먹고 연기하게 된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번에도 곧바로 자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은 3년상을 지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은 필수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고 없으면 그것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를 삼년상을 마치고 자결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이 “김도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동해 바다를 밟아 죽는다고 하였다가, 처음에는 부친을 봉양하는 것을 핑계로 삼고, 그 다음에는 부친의 삼년상을 나는 것을 핑계를 삼고 있네. 이것은 말로만 죽으려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핑계를 대어서 넘어갈 것이다.”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김도현은 그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다가 삼년상을 탈상하던 바로 그 다음날 자기집을 출발하여 가장 지름길이고 가까우며 또 관어대라는 명승지가 있는 이곳에 와서 자결하게 된다. 자기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여러 일가친척과 친구집을 들러 4-5일 정도 걸렸으며, 바다를 밟아 돌아가신 날은 1914년 11일 7일(음력)로 매우 추운 날씨였다.
자식과 손자를 비롯한 가족들은 소매를 잡고 통곡하면서 바다에 들어가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김도현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비장한 마음으로 바다에 들어갔다.
到大津汕水巖 甲寅(1914) 11월 7일(음)
我生五百末 내가 조선조 오백년의 말기에 태어나
赤血滿空腸 붉은 피 빈 가슴 속 가득하네.
中間十九載 중간 19년동안(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그때까지 19년)
鬚髮老秋霜 수염과 머리가 가을 서리처럼 늙었네.
國亡淚未已(我安適) 나라 망함에 눈물 그치지 않고(내 어디로 갈까)
親沒心更傷 어버이 돌아가심에 마음 더욱 슬프네.
獨立故山碧 홀로 선 옛 산은 푸른데,
百計無一方 백방으로 헤아려보나 한 가지 방책도 없네.
萬里欲觀海 만리에 바다를 보고자 하니,
七日當復陽 이레만에 다시 천지 기운 회복되리라.
白白千丈水 희고 흰 천 길의 바닷물에
足吾一身藏 나의 몸 감추기 족하네.
김도현은 물이 목에까지 차오르는 지점에 들어가서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죽더라도 너희들은 살아서 일본놈에게 끝까지 투쟁하여 독립을 성취하라. 나는 주권을 빼앗긴 이 땅에 살기도 싫고 묻히기도 싫어서 바다의 물고기 밥이 되고자 한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 죽은 뒤에 만약 시신에 물위에 떠오르면 그 시신을 거두지 말고 긴 장대로 다시 밀어 넣어라. 왜냐하면 내 시신마저도 더러운 땅에 묻히기 싫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물속에 들어간 김도현의 시신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고, 또 곧바로 잠수부를 투입하여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 가련한 일이로다. 그리하여 그의 묘소는 없으며, 제삿날은 바로 11월 6일이 되었다. 이 날이 되면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바로 이곳에서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1973년 벽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그가 순국한 장소에 도해단을 세웠다. 비문에 쓴 ‘千秋大義’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그러나 별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거기에다 이은상의 글을 새겼다.
5. 안동 권씨 송천자(松川子)와 칠우정(七友亭)
1) 오봉종가(五峯宗家)
안동권씨 영해파 입향조인 오봉(五峯)선생은 휘가 책(策)이고 자는 경지(經之)이다. 시조 행(幸)으로부터 18세손 증조부 백종(伯宗)은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伯宗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전(專), 촌(忖), 기(渏)인데 맏아들 전은 영의정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전의 따님이 문종(文宗)의 비(妃)가 되어 단종(端宗)을 낳았으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둘째 아들 촌은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책의 조부가 되며, 촌의 아들 자홍(自弘)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다. 자홍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저(著), 서(署), 책(策)이다. 교리(校理) 저와 교리 서는 사육신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종조부 예조판서 자신(自愼)과 함께 화를 입었다.
책(策)은 당시 13세로 연좌당할 연령이 되지 않아 천애고종(天涯孤踪)이 되어 영해지역으로 귀양 와서 살며 단양신씨부인(丹陽申氏夫人)을 만나 인량리에 기지를 택하게 되었다.
곤궁한 중에도 공부를 폐하지 않고 국가흥망의 사기(史記)에 이르러서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두 형이 순사하였음을 애통해하였다. 일신의 처소도 없음을 분한(憤恨)하여 호곡하여 죽으려 해도 이루지 못하고 향인(鄕人)의 담소하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일구유시(一句遺詩)가 있으니 “분격하여 소리치니 천지가 성을 내고 원통하여 우는 때는 귀신도 슬퍼한다[憤號天地怒 寃泣鬼神悲]”이다.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니, 비분함을 참지 못하여 죽령(竹嶺)까지 가서 통곡하였으며 그 해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하였다는 듣고 대통하여 후곡(後谷) 왕암(王巖)앞에 삭망(朔望)으로 북천(北天)을 바라보고 통곡하였으며 기절한 적도 있었다. 좌석에서는 반드시 북향하였고 평생 모리(謀利)하는 사업은 하지 않았다. 1923년에 충청도 유림이 발론(發論)하여 동학사(東鶴寺 : 충남 공주 계룡산) 숙모전(肅慕殿)에 오봉선생도 배향됨이 도리에 당연하다고 하여, 도산(陶山)과 옥산(玉山) 서원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전문중(全門中)이 합의하여 추배하였는데,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고 있다.
2) 臺隱宗家와 觀魚臺
臺隱 先生은 宣祖 37년(1604)에 槐市里에서 부친 宜悏과 모친 寧德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璟이고 字는 璟玉으로 호는 臺隱이다. 安東權氏 寧海 入鄕祖인 五峯 策은 대은선생의 6대조가 되며, 5대조는 仁衡이며, 高祖는 世平이며, 曾祖는 希彦이며, 祖父는 應商이고, 부친은 宜悏이고 號는 醉翁亭이다. 공은 영덕 김씨로 士人 金鍜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다.
어려서 살이 옥과 같이 희고 외모가 준수하고 자질이 총명하고 조숙하였다. 13세에 영해에 귀양온 荷潭 金時讓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한결같이 規矩를 따르고 服膺하여 가르침을 놓치지 않으니 학업이 크게 진전되고 德器가 성취하니 何潭公이 이 사람은 公輔(천자를 보좌하는 三公과 四輔. 전의되어 재상과 같은 벼슬을 이름)의 그릇이므로 딸을 시집 보낼만하다고 하고 형의 딸을 아내로 삼아 주었다.
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육십년 동안 해변 고을의 산림에 묻혀 살면서 行義를 닦아 옥처럼 高尙하고 純洁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빈소를 설치하였는데도 날마다 죽을 먹으며 絰帶를 벗지 않고 잠자리에도 나아가지 않았으며 喪事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廬幕을 떠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친의 葬地를 얻지 못하여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었는데 어떤 神人이 꿈속에 나타나서 魚臺 동쪽을 알려 주었는데 사람들이 이는 효성에 감동된 것이라 하였다.
홀로 된 부친이 슬픈 생각에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에 평소보다 갑절이나 더 정성을 쏟았다. 부친 취옹공이 돌아가시자 水漿도 먹지 않았으며 잡곡으로 죽을 쑤어 먹고 쌀은 먹지 않는 등 禮制를 지킴에 엄격함이 모친상에 비해 더욱 지극하였다.
1653년 吏曹參判 崔惠吉이 영해부사로 좌천되어 와서 소문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천거하여 조정에 알린 효종이 가상히 여겨 초빙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의 의론이 이럭저럭 시일을 끌다가 그만 보류되었다. 1666년 향년 63세로 별세하니 그 후 1703년 숙종조에 조정의 신하들이 先朝의 유명이라고 아뢰어 특별히 통선랑 사헌부 지평의 증직이 내려졌다. 1731년에 고을 선비들의 공론으로 陶溪精舍에 陶窩 朴璿과 함께 합향되었다.
觀魚臺란 이름은 高麗 말엽 牧隱 李穡이 命名한 것이고 外家가 이 곳이던 목은이 勝景을 보고 「觀魚臺小賦」를 지어 극찬하니 이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佔畢齋 金宗直이 觀魚臺에 올라 완상하며 賦를 남겼고 晦齋 李彦迪도 시를 지어 전한다. 이곳에 일찍이 터를 잡아 산 이가 없다가 조선 중기때 대은 선생의 先考 醉翁亭(宜悏)이 넷째형 晩翠亭(宜喆)과 더불어 여기에 복거하면서 세거지가 되어 오늘까지 400여년에 이르게 된 것이다.
臺隱이란 ‘觀魚臺에 숨은 隱者’란 뜻인데 이 명승의 정기를 받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부인 안동김씨 贈參判 時說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德輿, 차남은 得輿는 敬陵參奉이고, 삼남은 復輿이며 3녀는 朴澂, 朴濋, 孫鍵 이다. 장자 덕여는 4남 1녀인데 大益, 大謙, 大頤, 大謹과 사위 孫是梓이다. 仲子인 松川子 得輿는 小科 급제하여 贈戶曹參判에 이르렀고 7남 5녀를 두었으니 長男 大臨은 兵曹佐郞이고, 次男은 大有, 三男은 咸鏡都事 大恒(號 霞隱)이고, 四男은 司憲府 監察 大規(號 耻窩)이고 五男은 大矩이고, 六男은 大晉이고, 七男은 大成이며 사위는 申天翮, 南金相, 朴潚, 李伯胤, 鄭重周이다. 三男 復輿는 6남 1녀인데 장남은 生員 大觀, 차남은 大模, 삼남은 大楷, 사남은 大時, 오남은 大受, 육남은 大方, 사위는 孫是橃이다. 孫子 七友亭 大臨과 霞隱 大恒 그리고 耻窩 大規 삼형제가 大科 及第 하였으니 世人이 人傑地靈이라는 말을 증명하는 바라 하였다.
3) 松川子와 七友亭
權得輿(1636~1716)는 字가 得初이고 號는 松川子이다. 1636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觀魚臺에서 부친 臺隱 璟과 모친 안동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재주가 있어서 8세에 이미 문장을 지었으며 소년이 되어서는 經典과 四書를 통달하고 특히 漢詩에 능했다. 향시에 거듭 급제하였으며 壬午년(1682년)에 司馬試에 급제하였고, 癸酉년(1693년)에는 조정의 행의로 천거되어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 후에 參判으로 추증되었다. 살던 집이 관어대 아래 유사정의 언덕아래 있어서 沙亭이란 號를 지었다가 나중에 앞강 상류의 역마을 남쪽(지금의 송천)에 집을 옮겨 짓고 號를 松川子로 고치고 세상사를 벗어나서 시와 역사 진리탐구에 몰입하였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 필히 韻을 내어 賦와 詩를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가혹하게 독려하지 않고 권유하며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하였다. 후생들이 가르침을 청하면 기꺼이 가르쳐서 성취토록 하여 명망과 재주있는 많은 이들이 따랐으며 급제자도 많이 배출되었다. 평생 지은 시와 글을 모아서 《獨娛錄》 2권을 엮었다.
辛卯년(1711)에 맏아들 大臨이 湖西의 보령 태수로 갈 때 76세의 나이에 가마속에서도 지나는 길의 경치를 감상하며 읊은 것이 「西往唱酬錄」인데 聯을 이루 것이 거대하다. 다음해에 송천리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양생에 힘써 80세가 되어서도 오관이 쇠하지 않고 정신과 기운이 왕성하였는데 우연히 감기 기운으로 세상을 버리니 향년 81세였다. 돌아가시기 이틀전 새벽에 세수를 하고 맏아들 대림을 불러 붓을 잡게 하여 “和睦함으로써 門戶를 지키고 친절로써 이어나가야 한다. 또한 宗族을 救恤하고 처음의 뜻을 끝까지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의 말과 논리와 교화의 요체는 미상불 효제충신을 근본으로 몸소 실천하여 많은 선비들이 추앙하게 되었으며 말을 삼가고 행동을 근실히 하며 학문을 닦고 몸을 지키는 것을 가정을 지키는 도리로 삼도록 하였다.
鄕中에 大小及第者를 結契하여 蓮桂所를 창립하여 수시 효친경장과 후진 양성을 장려하는 中樞的 역할을 하였으며 하천을 정리하여 제언을 보수하고 최초로 松川洑를 만들어 농경발전에 기여하였다.
松川世廬 地方文化財 資料 86호로 지정되어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獨娛軒(松川精舍)에서는 愛國精神을 함양함으로써 지역 의병과 영해 乙未 3.1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松川子의 맏아들 大臨의 字는 萬容이고 號는 七友亭이다.
權得輿의 暮春日到臺下醉吟
長恨家貧無酒錢 가난하여 술값 없음을 길이 한스러워하니
春心何處酒家眠 일렁이는 봄 마음 어느 주점에서 졸까?
偶來臺下同昆季 우연히 관어대 아래에서 형제들과 같이 하며
醉到韋園花樹前 취하여 집 마당의 화수재에서 모였네
6. 재령이씨(載寧李氏) 종택
1) 운악종가(雲嶽宗家 : 忠孝堂)
충효당은 재령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의 당호(堂號)로 알려져 있으며, 인량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산 쪽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이 가옥의 대문 앞에 서면 인량마을과 앞들판, 그리고 안산을 비롯하여 멀리 동해까지 조망이 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 자리에 위치한다. 충효당은 재령이씨 입향조가 조선 성종 때 건립한 가옥으로, 별도의 팔작지붕 사랑채와 ‘ㅁ’자형 정침, 그리고 별도의 담장으로 꾸며진 사당을 갖추고 있다.
또 마을 쪽으로 정침에 붙어서 헛간채와 뒷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은 별도의 솟을 대문과 같은 대문채는 없고 마을길을 지나 집 앞으로 난 길을 반듯이 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긴 담장이 앞을 막고 있는 형국이며, 충효당 사랑채 전면에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일각대문이 이 집을 출입하는 대문이다. 사람이 드나들기조차 좀 작은 느낌으로, 별도의 출입을 위하여 오른쪽 동쪽으로 담장 없이 개방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관계로 일부러 담을 막고 큰 대문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 가옥은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켜 영남 성리학을 중흥시킨 갈암 이현일 선생의 출생지로, 사랑채는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후학들을 양성하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주인이 많은 책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둥근 뒷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충효당은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하고, 그 곳에서 마을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 하다. 이 집은 사주문으로 된 맞배지붕 형식의 한 칸짜리 대문을 동쪽, 즉 정침을 바라보고 자리하고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안채의 작은 사랑채와 아래채가 보이고 그 앞으로는 담장 아래 화단을 만들어 아름다운 꽃들을 심어 봄부터 피기 시작하는 예쁜 꽃들이 가득한 화단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문이 있는 위치와 건물이 있는 위치는 높이의 차이가 있어 막돌허튼층으로 3벌대를 쌓은 기단 위에 정침이 자리하고 사랑마당도 2벌대의 축대로 되어 있다.
재령이씨는 우칭(禹偁)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고려 성종연간(981-997에 당시 수상격인 문하시중에 재직할 때 황해도 재령을 녹읍으로 받고 재령군으로 봉해짐에 따라 재령이 본관이 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 창왕을 거쳐 공양왕을 옹립시킨 이성계 등 무인중심의 신진사대부 계열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이 시기에 모은(茅隱) 오(忤)는 고려의 국운이 끝나감을 알고 함안군의 모곡으로 들어가 숨으니 이미 그 곳에 와 있던 版圖判書 洪載와 工曹典書 趙悅과 더불어 서로 위문하며 지냈다.
忤의 이들 개지(介智)가 네 아들을 낳으니 孟賢(號 覲齋)과 仲賢(號 栗澗), 叔賢, 季賢인데 맹현과 중현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맹현은 세조 6년(1436)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이조정랑, 형조. 예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으며 김해부사와 나주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淸白吏에 錄名되었다. 경학과 사학에 심오한 경지에 달했으며 문장도 뛰어나서 당대의 석학인 四佳 徐居正과 乖崖 金守溫과 함께 이름이 났으며 佔畢齋 김종직과 교분이 두터웠다.
맹현은 7자를 두었는데 첫째 瑺은 校理에 ,둘째 瑋는 司圃, 셋째는 래(王+來)로 縣令을 넷째아들 속(王+束)은 縣令에 다섯째 종(瑽)은 판관에 여섯째 애(王+愛)가 雲嶽 涵의 조부이며, 일곱째는 구(玖)로 진사이다.
애는 성종 11년(1480) 7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부친(맹현)을 여의고 16세에 숙부인 율간(중현)공의 책실로 따라와 영해 고을의 대성인 진성백씨 백원정의 따님과 혼인하여 인량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사헌부 감찰을 거쳐 무안현감과 함창현감을 지냈으며 도총부 도사를 거쳐 경주판관과 울진현령을 지냈다.
通政公 애(璦)는 殷輔와 殷佐를 두었다. 은보는 중종 15년(1520) 2월 영해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중년에 身恙이 있어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門蔭으로 忠武衛 副司直에 증직되었다. 初娶는 安東金氏 松隱 金光粹의 孫女이자 瑭의 女이고, 再娶는 全義李氏 舜應의 女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광옥(光玉)과 함(涵)인데 장자 광옥은 일찍 죽었다.
雲嶽 涵은 근재 맹현의 증손자로서 명종 9년(1554) 4월에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도량이 넓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대해 황선생(휘 應淸)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과 문장이 동류 중에서 뛰어났으며 20세가 넘어 향시에 여러번 합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선조 13년(1580년)에 부친 사직공이 돌아가시자 여묘 3년을 마치고 학봉 김성일선생 형제에게 종유하여 군자의 처신과 수양하는 방법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다. 선조 21년(1588) 사마시에 합격하자 당시 府使 崔慶會가 이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잔치준비를 시켜 연회를 베풀면서 이 고을에 인재가 나서 영광이라고 기뻐하였다.
모친상을 당한지 이듬해인 선조 24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집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순찰사인 月灘 韓孝純이 안동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보를 지나가는데 군량미가 없어 끼니를 거르자 雲嶽공이 쌀을 보내어 위급함을 대처해 주자 韓公이 매우 기뻐하여 行在所에서 馳啓하기를 ‘이 아무는 초야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염려하여 처음부터 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이 어려움을 구제해 주었다’고 하였는데 길이 막혀 장계가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때 明나라 군사가 援兵을 왔으나 공사의 창고가 텅 비어 공급할 물건이 나올 데가 없었다. 순찰사 한공이 선생을 기용하여 동해의 鹽場을 관장케 하여 군량의 밑천을 삼게 하였는데 당시 체찰사 梧里 李元翼이 운악선생이 이 일에 노고가 있음을 알고 공적에 이름을 올리려 하지 극구 사양하여 올리지 않았으며 오리 이원익의 추천으로 선조 32년(159)에 金泉 察訪에 임용되었다.
선조 33년(1600)에 文科에 올랐으나 殿試 廷對(殿試에서 답하는 策文)의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考官이 장원으로 뽑으려 하자 선조는 策文에 壯者의 말을 인용하였다하여 科榜에서 이름을 삭제하게 하고 파직까지 시켰다. 이 때 搢紳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겨 劉賁(唐나라 文宗때 사람으로 賢良科에 대책에서 당시 환관의 비리를 비난한 구절이 있었다. 시관들은 탄복하면서도 환관이 두려워 급제시키지 못하였다)에 비유하기 까지 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대신들의 추천으로 義禁府 都事가 되었고, 선조 38년(1605)에 司宰監 直長이 되었는데 사재감은 戶曹에 예속되어 5일마다 호조의 堂上 및 臺官이 모여서 일을 보게 되는데, 하루는 公會에서 본조의 고질화된 일처리의 폐단을 지적하자 상관이 확인하고 고쳤다고 한다.
선조 39년에 主簿로 옮기고 선조 40년(1607)에 의령현감에 나갔는데 임란을 겪은뒤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많았으나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위엄으로 아전을 거느리면서 복구하는 일에 힘쓴 결과 몇 해가 되지 않아 창고는 차고 호구가 늘었다. 고을에 향교가 없어서 先聖의 位版이 오래도록 오두막집에 붙여 있었고 師生도 거처할 처소가 없었다. 선생은 父老와 생도들을 불러 의논하여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이루어졌다. 祠堂과 堂室을 제도에 맞게 하였으며 典僕(향교의 잡역을 하는 하인)과 소모 물품을 헤아려서 보급해 주었다. 공무의 틈을 타서 친히 횡사(黌舍, 공부하는 집)에 가서 小學과 四書를 강론하고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권장하였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이 일을 상례로 하였다. 광해군 원년(1609)에 두 번째 文科에 올랐으며 뜻을 펴서 여망에 부응하려 하였으나 광해군의 昏政으로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 竹樹松雲 의 勝景을 즐기면서 자적하였다.
만년에 둘째 아들 愚溪公이 과거보러 가던 중에 돌아가시고(1612년), 또 맏아들 淸溪公이 과거보고 오던 중에 돌아가시자(1616년) 상심이 컸다. 인조 5년(1632)에 정침에서 향년 79세로 돌아가시다.
死後 孫子인 文敬公 葛庵(현일)의 현달로 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志經筵 義禁府 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 五衛都摠府 副摠管에 追贈되었다. 著書로 雲嶽先生文集이 있다.
貞夫人 眞城李氏는 通政大夫에 贈職된 希顔(두루파 10세 종손)의 따님으로 退溪선생의 族孫으로 明宗 12년(1557)에 안동 주촌리에서 출생하셨다. 정부인 이씨는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부지런하며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內外의 姻親에게 은정이 흡족하였으며 자손을 가르치고 노비를 거느리는데 법도가 있었다. 선생보다 13년뒤인 인조 22년(1644) 7월에 인량리 본가에서 향년 88세로 돌아가셨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時淸으로 성균진사로 호는 淸溪이고, 차자는 時亨으로 증직 宣敎郞이며 호는 愚溪이며, 셋째는 時明으로 호는 石溪이며 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넷째는 時成으로 호군에 증직되었으며 다섯째는 時震으로 무과에 올랐다.
2) 갈암종가(葛庵宗家)
경상북도 기념물 제84호. 숙종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종택으로 1910년에 지어진 집인데 1992년 임하댐에 수몰되게 되자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던 것을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ㅁ자형 살림집과 대문채 만이 현존한다. 이현일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거두로 추앙되는 분이므로 그의 종택을 기념물로 보존하게 되었다. 대문간채는 4칸집이고 안채는 형의 날개집이다. 사랑채가 부설되어 있다. 안채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간반통이다. 대청이 중앙에 2칸을 차지하고 좌측에 안방, 고방과 칸반의 방이 계속되면서 반칸이 서쪽 날개로 이어졌다. 다음이 다락이 있는 부엌, 다음이 작은 사랑인데 날개로 돌출한 부분에서 중문간 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작은사랑은 방 2칸에 쪽마루가 부설되어 있다.
다음이 중문칸, 이어 큰사랑인데 정면3칸 측면 간반통이다. 사랑방이 2칸이고 나머지는 마루와 난간이 설치되었다. 사랑방 뒤로 감실, 다음이 고방 약간 사이를 두고 정침의 건넌방에 이어진다. 평범한 구조이다.
이현일(1627∼1704)은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아버지는 참봉 시명(時明)이며, 어머니는 안동 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휘일(徽逸)의 아우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 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했으며, 1666년(현종 7)에는 영남 유생을 대표해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나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 2)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이듬 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은(謝恩)만 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8년 공조정랑·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했으며, 1689년 산림(山林 :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한 학파와 정파를 아우르는 우두머리)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무옥의 신설(伸雪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건의했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 겸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될 경우 자손이 추증된 자의 무덤에 가서 누런 종이의 부분을 태우던 의식)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했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 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자헌대부(資憲大夫)·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 : 재야로 돌아감)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했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 명령을 환수했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했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配位는 貞夫人 務安朴氏로 武毅公 朴毅長의 孫女이다.
7. 영양(英陽) 남씨(南氏) 난고종택(蘭皐宗宅)
1) 난고종택
난고종택은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의 장남 성균진사 안분당(安分堂) 길(佶)이 1624년(인조 2년) 사당을 먼저 세운 다음 종택을 건립하였으며, 본 건물은 1624년 최초 건립부터 지금까지 화재 및 기타의 사유로 종손이 거주하지 않은 적이 385년 동안 한번도 없었다. 약 3000평의 대지 위에 정면 5칸 측면 6칸 정동향 □자형 평면 팔작 지붕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호화스럽지도 않고 넓은 공간 등을 잘 조화시킨 건축미를 지니고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의 생활상과 건축 양식에 대한 의식을 볼 수 있다.
만취헌(晩翠軒)은 난고 남경훈 선생의 장증손(長曾孫)으로 문과 급제 후 병조좌랑과 거창부사를 역임한 남노명(南老明)이 퇴관 후 강학(講學) 서식지소(棲息之所)로 건축한 건물이다.
난고정(蘭皐亭)은 난고종택과 동일 번지에 건립된 건물로서 난고 남경훈이 심신과 학문을 수양하기 위하여 1606년 처음 건축하였다. 그 후 난고 남경훈을 제향하는 광산서원(光山書院)이 완공되어 1684년 서원 경내로 이전 복원되었다가 1868년(고종 5년) 서원 철폐령을 계기로 서원은 훼철되고 정자는 현 위치에 이전되었다.
2) 난고의 생애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이 쓴 난고 행장(行狀)에 의하면, 난고는 대대로 급제한 사대부가 후손인 남의록(南義祿)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의록은 퇴계 제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토벌한 공로로 조산대부 판관벼슬을 지냈다.
난고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효경(孝經)을 받아 읽고 신명처럼 받들어 실천하였다. 훗날 가학(家學)을 계승한 난고는 부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당시 영해부사였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손을 두드리면서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승지(承旨) 조덕린(趙德隣)이 지은 난고 묘갈명에는 우복이 난고의 글을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는 과거 정도의 문장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난고는 혼란한 당시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오직 고인들의 전적과 경(經)·사(史)·자(子)·집(集) 읽기를 좋아하며, 오로지 정밀히 분석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특히 예학에 대한 깊은 연구로 당시 사대부들이 의문점을 그에게 물어서 결정할 정도로 확고한 판단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20세 때 부친과 함께 의병활동 투신한다. 난고의 부친은 영해에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향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난고는 20세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부친을 따르려 했다. 그러자 부친은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되고 자식된 자가 높은 베개에 편안히 누워 있을 세월은 아니다. 너가 약관의 나이로 전란에 임하여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의리를 알고서, 한 몸 죽고 삶을 계산하지 않으니 내 어찌 자식 사랑하는 애정 한 생각으로 너의 가상한 뜻을 막겠느냐[國事至此, 此非臣子高枕安臥之日也. 汝以弱年, 惟知臨亂死上之義, 而不計己之有無, 則吾豈可以 情一念, 沮其志尙乎]”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자가 함께 출두하니 고을에서 모두 이들의 충의심에 감동하여 의병에 서로 다투어 참가하였다. 난고 부자는 경주성 전투에 참전, 경주성 수복을 위한 문천회맹(蚊川會盟 : 경주 남천)에서 결사항쟁을 서약한 후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그 후 영천성 전투, 당교전투(함창-점촌 경계), 팔공산회맹 등을 통해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 전투에 참가하여 망우당 곽재우 장군에게 군대의 선발, 교육, 보급 방법 등을 제시한 난고의 승전전략책은 의병전사에 길이 빛나는 탁견이었다. 왜란 7년 기간 중 5~6년 세월을 전투장에서 보내고 돌아와서는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성인의 글을 읽고 실천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난고가 벼슬의 뜻을 접고 35세(1606년)에 고향 돌아와 사는 집 동산의 연못 위에 난고정 짓고 강학을 한다. 난고정 본래 현판 글씨는 권진모(權進模)의 글씨였으나 도난당하고, 조선 헌종 때 영해부사인 남상교가 쓴 글씨가 남아있다.
41세 때 아버지 대신 옥살이 병 얻어 운명하였다. 난고의 부친 조산공은 임란 평정 후 자제들은 학업에 전념토록 하였고, 자신은 나라의 유사시를 대비하여 무과시험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였다. 예빈시주부, 군기시판관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탐관오리 영해부사의 가혹한 농민수탈에 농민을 대표하여 탄핵하려다가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난고는 순찰사에게 나아가 원통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늙은 부친의 옥고를 대신 받겠다고 피눈물로 간청하였다. 순찰사는 효성에 감동하여 부친을 사면하였고, 난고는 부친 대신 감옥에 갇혀 추운 겨울을 나면서 병을 얻어 1년 후에 운명하니 41세의 장년(壯年)이었고 나라의 간성(干城)이었다.
난고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佶)은 진사 시절 성균관에 당시 광해조의 폐모사건 가담자가 있음을 알아채고 지우인 성이성(成以性 : 봉화 가평리 가두들 계서당)에게 “백설이 장차 어지러이 날릴 것 헤아리니(白雪調將亂)/ 봄기운 더욱 차구나(靑陽氣更寒)/ 풍진세상에 모름지기 각자 보전해야 되리니(風塵須各保)/ 세상일 절로 단서가 많구나(世事自多端)”라는 한 수의 시를 남기고 초연히 낙향하여 친 난고의 뜻을 계승함으로써, 훗날 폐모사건 주동자 색출 과정에서 성균관 진사가 모조리 연루되는 화를 면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증손자 되는 만취헌(晩翠軒) 남노명은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문호가 크게 열렸고, 난고의 자손에 진사 28명, 문과급제자만 8명이 배출되었으니 충효의 가문을 누가 번창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난고는 문장과 시가 뛰어나 당시 남산문장(南山文章)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특히 “예란 집에서 날마다 행하는 것이니 익숙히 강론하지 않으면 그릇되기 쉽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가례의 요점을 뽑아 선현들이 의심한 문제점을 설파, 주석을 붙여 동이(同異)점을 판별하고 그릇된 곳을 고증하여 사례해의(四禮解義) 2책을 저술하였다. 난고선생 유고 1책이 전하고 있다. 난고종택의 남종통기(南宗通記) 등 많은 전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학술자료가 되고 있다.
* 영해 나라골 전통마을(인량리)
영덕 나라골(인량리 ; 仁良里)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慶北 盈德郡 蒼水面 仁良里) 에 위치하고 있다. 인량리는 창수면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영해면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7번 국도와 918번 지방도와 연결된다. 동해안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축산항과 강구항을 중심으로 한 어촌이 형성되었다면, 서쪽으로는 주로 동성집단이 분포하는 평야촌과 산촌이 형성되어 있다. 인량리는 그 중심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량리는 송천(松川) 다리를 건너 학이 펼쳐놓은 것 같은 인량대산의 왼쪽 날래가 동으로 뻗어 해풍을 막아주고 오른쪽 날개가 서풍을 막아주며, 남으로는 수백정보의 너른 들판을 감싸고 송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이름난 명당이기도 하다
인량리는 삼한시대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어 나라골이라하기도 하고, 뒷산이 학의 날개가 펼쳐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나래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양남씨(英陽南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대흥백씨(大興白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재령이씨(載寧李氏) 등 소위 5대성 8종가가 고려시대부터 거주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석학과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내륙이지만 바다와 가까워 내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봄바람은 쌀쌀하고 겨울바람은 따뜻하다. 여름에는 미탄해협으로부터 남하하는 한류로 말미암아 우량이 적고 시원해서 피서에 알맞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며,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지어진 웅장한 ㅁ자형 고기와부터, ㅡ자형 기와집, 정자와 재사 등의 전통가옥 30동이 즐비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전통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현재 경북도기념물 84호 갈암종택(葛菴宗宅), 중요민속자료 168호 충효당(忠孝堂), 경북도문화재자료 274호 지족당(知足堂), 경북도문화재자료 307호 우계종택(愚溪宗宅) ,경북도민속자료 61호 용암종택(龍岩宗宅), 경북도문화재자료 209호 만괴헌(晩槐軒) 등과 지정되지 않은 고가, 사묘, 정자, 충효비들로 고가인 오봉헌(五峯軒), 삼벽당(三碧堂), 처인당(處仁堂)이 있고, 사묘로 후곡재(後谷齋), 추모재(追慕齋)가 있고, 정자로 우계정(愚溪亭), 서산정(西山亭), 집선정(集仙亭), 청계정(淸溪亭), 수택정(水澤亭), 임연정(臨淵亭)이 있고, 충효비로 仁良里旌閭碑閣 등이 있다.
지금의 인량리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입향조인 이애(李璦:1469-1494)가 익동(翼洞)이라 하였다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다시 비계곡(飛溪谷)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602년에(광해군 때) 어질고 인자한 현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고 인량리라 불리었다고 한다.
함양박씨(咸陽朴氏) 증시조 박신지(朴身之)의 문집 《소호문집(小湖文集)》의 「인량동안중수서(仁良洞案重修序)」를 보면 1680년(숙종6년)에 인량이 1․2동으로 분동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1602년 이후 계속 인량리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각종 문집, 족보의 문헌을 통해 보면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대흥백씨(大興白氏)이다. 대흥백씨는 토성인 영해박씨(寧海朴氏)와 혼인하여 나라골에 정착하였으며, 이 기점으로 영양남씨(英陽南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야성정씨(野城鄭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선산김씨(善山金氏), 신안주씨(新安朱氏),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먼저 이주한 성씨와의 혼인으로 마을에 들어왔다.
입향시기의 추정이 비교적 명확한 성씨별로 세대수를 살펴보면 영양남씨가 19대, 안동권씨가 18대, 재령이씨가 18대, 함양박씨가 17대, 선산김씨가 10대, 평산신씨가 7대로 계산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각 씨족별 세대수는 최소 6대에서 최대 19대까지로 약 200년에서 600년까지로 마을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고 상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에 속하지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영해군(寧海郡) 서면(西面)에 속하였다.
인량리는 흔희 ‘팔종가(八宗家)’ ‘삼십종가(三十宗家)’가 거주한다고 얘기되는데, 영양남씨, 안동권씨, 재령이씨, 영천이씨, 야성정씨, 무안박씨, 선산김씨, 신안주씨, 평산신씨 등의 많은 종가들이 오랫동안 세거한 마을로, 괴시리(호지마을)와 함께 영해를 대표하는 양반마을이다.
지족당(知足堂) : 정면 7칸, 측변 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ㅁ자형 모조와가 건물이다. 조선 영조때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지족당 권만두(權萬斗 : 1674-1753)공이 지은 살림집으로 인량리 마을 뒤편의 산자락에 위치한다.
우계종택(愚溪宗宅) : 정면 6칸, 측면4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ㅁ자형 목조와가 건물로 조선 선조때 재령이씨 영해입향조인 이애(李璦)의 손자인 의령현감 운악(雲嶽) 이함(李涵) 선생의 차남 선료랑 우계(寓溪) 이시형(李時亨)의 살림집으로 약 4백년간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만괴헌(晩槐軒) :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야성정씨(野城鄭氏)의 고택으로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1815년에 대지주인 야성정씨 후손 정상기(鄭象璣)가 이수민(李壽民)에게 매도하였으며, 이수민은 1843년(헌종 9)에 현소유자 신귀현(申龜鉉)의 6대조 신재수(申在洙)에게 다시 매도하였다. 그후 신구현의 고조부 신의영(申義泳)이 지금의 상태로 확장·개축하였다. 야산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안채·사랑채·대문채·좌우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면적은 1,643㎡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안채의 양측면에 눈썹지붕형으로 합각부가 이루어져 있고, 좌우행랑은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1990년 사랑채·대문채·우행랑채의 일부를 보수하였고, 1996년 안채 및 좌우행랑채의 기둥과 기단 교체공사를 완료하여 보존하고 있다. 만괴헌(晩槐軒)이란 당호는 신재수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신재수는 1876년에 영덕군 영해면(寧海面)에 있는 영해향교의 태화루(太和樓)를 개수하여 지방 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많이 시혜한 공으로 조정에서 가의부위(嘉義副尉)를 특사받았다.
인량리는 역사문화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의의가 있는 마을이다. 조선중후기에 건축한 양반가 종택 건축물의 전형을 볼 수 있으며, 주위 자연경관과 조화있는 건물배치를 통해 사대부들의 건축에 대한 의식과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아울러 전통적인 목조건조물의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이 높다. 또한, 한 마을에 8종가가 번성했고, 그 성씨들이 각기 융성을 거듭하며 600년 이상을 함께 살아왔다는 특수한 마을 성격을 갖고 있고, 인량리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나라골의 각 성씨들은 근세까지도 집단적으로 마을내에 거주하면서 공고한 씨족조직을 형성하여왔고, 수 세기 동안 문중조직을 이루어왔다. 많은 종가들이 서로의 입지을 강화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종가를 철저히 보종해온 것을 인량리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따라서 종택을 ㅁ자형으로 더 웅장하게 짓고, 최소 10대 이상 직계의 혈통을 유지하여 올 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각 집안들이 서로의 위세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선시대를 사는 양반들의 생존 전략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송희준(觀善書堂 당장)
동녘 저편에 먼동이 트면
철새처럼 떠나리라
세상 어딘가 마음 줄 곳을
집시 되어 찾으리라
생은 무엇인가요 삶은 무엇인가요
부질없는 욕심으로 살아야만 하나?
서산 저 너머 해가 기울면
접으리라 날개를
내가 숨 쉬고 내가 있는 곳
기쁨으로 밝히리라
생은 무엇인가요 삶은 무엇인가요
부질없는 욕심으로 살아야만 하나?
이제는 아무것도 그리워 말자
생각을 하지 말자
세월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천 년 바위 되리라
천 년 바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