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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 스크랩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동부 추천 0 조회 146 07.02.11 23:4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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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0일 (금) 11:59   스타다큐

한국인 첫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드디어 유엔 수장 자리인 사무총장직에 당선됐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릴 때부터 영어 신동 소리를 들으며 외교관의 꿈을 키워온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인생과 어머니 신현순 여사의 아들 교육법.

“가난한 집안의 충주 영어 신동이 유엔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반기문(62세) 외교통상부 장관이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60년 한국 외교사의 빛나는 쾌거’라 일컬어지는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이들이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무엇보다 반 장관 본인의 자질과 노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외교관, 37년 동안 큰 오점 없이 외교관의 외길을 걸어온 스페셜리스트, 조직 관리의 귀재 등 그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지만 반 장관의 주변 사람들은 무엇보다 남 앞에서 싫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는 인간성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는다.

“아무리 부하직원이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소리 지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특히 외국에 나가 있는 직원들을 남다르게 신경 쓰는 것도 유명하죠. 아마 부하직원들 중 반 장관의 친필 편지 한 통 안 받아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37년 동안 외교관의 외길을 걷다


외교부의 한 직원이 전하는 것처럼 그는 주변에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에 외무고시 3회 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해 수석으로 연수과정을 마치고, 외무부 외교정책실 실장,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외교통상부 차관,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등 요직만을 두루 거치는 동안 주변의 질시나 험담이 전혀 없던 이유로 반 장관의 소문난 인간성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1, 2회 선배들을 모두 추월해 외무고시 출신 사상 처음으로 2급 이사관으로 승진했을 때에도 추월당한 선배들조차 앞 다퉈 그를 감싸고 아껴줬다는 것.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부족한 능력임에도 먼저 승진하게 돼 죄송하다”는 친필 편지를 보내며 머리를 깊이 숙인 반 장관의 태도에 선배들조차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공직생활이 마냥 순탄하기만 하던 것은 아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오해 살 일도 원한 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반 장관의 지론이지만 실무진들의 실수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동성명을 발표할 당시 실무진의 실수로 미국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강력히 주장하던 ‘ABM(탄도탄 요격미사일) 조약’을 인정하는 문장이 포함되고 말았다. 당연히 미국 쪽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고, 김 대통령은 이후 부시 대통령 등 미국 쪽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수시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외교부 수장이던 이정빈 장관은 물론이고, 반기문 당시 차관까지 줄줄이 옷을 벗어야 하는 대형 악재가 터지고 만 것. 하지만 자칫 그대로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형사고 앞에서도 반기문 장관은 실무진을 탓하기는커녕 본인의 부족함만을 탓했다고 한다.

물론 평생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그에게 불명예 퇴진의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보통은 차관직을 마친 뒤 미국, 영국 등 주요국 대사로 나갔다 들어오면 장관직에 오르는 것이 외교부 내의 관례였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불명예 퇴진을 당했으니 앞으로의 미래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던 것. 4개월 동안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다. 한승수 장관은 때마침 유엔총회 의장으로 발탁되자, 그를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겸 유엔대표부 대사로 뉴욕으로 데리고 갔다.

“사실 반 장관이 갈 만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보통 국장급에게 배당되는 자리였거든요. ‘외교부 차관까지 한 사람이 겨우 그런 자리에 가느냐’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일에만 매진하시더군요. 반 장관다운 성품이라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유엔에서 1년 동안 근무한 경험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유엔이라는 조직을 이해하고, 인맥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가 된 것. 결국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의 경력은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반기문 장관을 소개할 때마다 꼭 따라 나오는 말이 있다. ‘가난한 집안 장남 출신 엘리트’, ‘충주 영어 신동’ 등의 수식어가 바로 그것. 원래 반 장관 위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해 사실상의 장남으로 자랐다. 아버지 고 박명환씨는 1950년대까지 창고업을 하는 등 넉넉한 집안이었으나 친구들의 빚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반 장관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달리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신현순(85세)씨 슬하에서 반 장관을 비롯한 자제들은 금융인, 교사, 약사 등으로 훌륭하게 자라 이웃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오죽하면 ‘(반)기문이의 반에 반만큼이라도 공부를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 동네에 떠돌았을까.

반 장관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가정교육이 철저하다’는 부분이 유달리 눈에 띈다. 어머니 신씨는 장남 반 장관에게 좋은 성품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여기에 당시 시대를 앞서 나간 어머니의 교육방식도 지금의 반 장관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어머님은 선각자셨어요. 무엇보다 그 옛날부터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죠.” 반 장관이 어릴 때부터 영어 신동으로 불린 것도 ‘영어를 잡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선견지명 덕이 크다.

반 장관의 초등학교 동창이 전하는 것처럼 반 장관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찌감치 영어를 접했고, 큰 재능을 보였다. ‘세계적인 외교관 반기문’의 자질은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 학창 시절 내내 반장과 1등을 놓치지 않은 그는 충주중학교 시절, 그날 배운 영어 문장을 10번씩 쓰며 통째로 외워버리는 방식으로 영어를 익혔다. 어머니는 영어에 재능을 보이는 장남을 위해 집 근처에 생긴 화학비료공장으로 일부러 아들을 데려가곤 했다. 기술 이전을 위해 여러 명의 미국인 엔지니어와 그 부인들이 회사에 머물렀기 때문. 그때부터 반 장관은 틈만 나면 공장에 들러 미국인들과 대화하며 영어회화를 몸으로 체득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 충주 영어 신동


그렇게 쌓은 영어 실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다. 적십자사가 주최하는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등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반 장관은 적십자사에서 주관하는 ‘외국 학생 미국 방문 프로그램’에 선발됐다.

전국에서 4명을 뽑았는데 소도시 충주 출신 반 장관이 수많은 우수 학생들을 누르고 뽑혀 일약 전국적인 학생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외교관의 꿈을 품게 된다.

부인 유순택(61세)씨도 이때 처음 만났다. 한국의 학생대표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충주여고 학생들이 현지에서 나눠주는 선물용으로 복주머니를 직접 제작해줬다. 이 선물을 전한 사람이 바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씨. 두 사람은 반 장관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1971년부터 서울 흑석동의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오붓한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된다.

반 장관의 또 다른 에피소드는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심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했을 때 ‘난생처음 2등을 해보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엘리트 코스만을 밟은 반 장관은 수석으로 연수과정을 마치고 나서 제3세계 근무를 자청하는 의외의 행보를 보인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등으로 연수과정을 마치고 나면 주미 대사관을 시작으로 엘리트 코스만을 밟는 게 관례화되어 있었기 때문.

반 장관 본인은 “많은 나라들을 경험해보고 싶었다”며 웃음으로 넘기지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 장관의 지극한 효심 탓’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가가 싼 가난한 나라에서 월급을 모아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한 반 장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 결국 어렵게 인도 총영사관에 지원한 그는 평생 외교관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노신영 전 국무총리를 그곳에서 만나게 돼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돼 내년 1월 1일부터 본격적인 집무에 들어가는 반기문 장관. 앞으로 세계 어디를 방문하든 국가원수급의 대우를 받게 될 그가 한국인의 기상을 만천하에 떨칠 수 있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출처 : 우먼센스

박지호 기자()/사진=서울문화사 자료실, 외교통상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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