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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始祖靈蹟碑銘
曺氏는 新羅太師 駙馬都尉 昌盛府院君으로써 鼻祖를 삼나니, 고려시대에 八平章事와
九少監이 났을 뿐 아니라 조선에 들어와서도 도덕과 공훈이 끊일 새 없이 염염하여 지금에 와서 자타가 대성이라 한다. 태사공의 어머니는 신라한림학사 이광옥의 따님으로서 결혼
전부터 腹疾이 있어 창녕화왕산 용지에서 목욕하고 기도 하던 중 홀연 운무가 자욱하여지며 백주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후 이상하게도 병이 낫는 동시에 懷妊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동해용왕의 아들 玉玦인데 이 애를
잘 양육하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탄생하시니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겨드랑이에 曺字가 새겨져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신라왕은 曺氏라는 姓과 繼龍이라는 이름을 내리셨다. 장성하여 진평대왕의 駙馬가 되시고 倭寇를 동래에서 정벌할 때 왜병이 두려워서 蒼惶하여 曺公은 하늘사람이라 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이것은 曺氏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 사실이다. 今上二十九年 (距今육십오년)에 조씨가 서로 의논하여 龍池위에 비를 세우기로 하고
吏曹參判 寅承이 主幹이 되어 나에게 그 비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曺氏의 世誼가 敦厚한 터이므로 구태여 辭讓할 수 없어 이에 그 족보의 기록을 참고하여 대략 앞과 같이 요약하는 바이다. 생각하건대 氣化(일종의 造化不測한 신비적 현상)로서 사람이 탄생하였다는 일은 저 商頌과 周雅(皆詩傳所載)를 비롯하여 左氏春秋傳과 司馬氏所著에 이르기까지 괴상한
氣化之事가 허다히 기록되어 있어 간혹 이치에 부합되는 것도 없지 않은 바인데 저 蘇洵이가 자기 신념만을 전담하여 이것을 虛荒無限之說이라하고 一切을 否認한 것은 지나친 단안이라고 생각되는 바라 즉 천지의 큼과 고금의 다름에 어찌 尋常한 식견으로 국한 할 수 있으랴? 다시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국토의 開闢과 문화의 발달이 가장 뒤 떨어져 신라는 중국의 漢과 동시대로서 저 漢나라에서는 모든 문명이 대단히 발달하여 單純하고 質朴하던 未開시대를 벗어나 고대신화가 理智的判斷앞에 그 사실여부가 논란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동방에서는 저 아득한 上古 神話시대와 같은 기화지사가 종종 나타났으니, 이것은 즉 동방의 地運이 備蓄됨이 年久하여 그 나타남이 더딘 탓인가 생각되는 바라. 그런고로 三韓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재의 배출과 富貴福澤이 錦錦不絶하여 끊일 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曺氏得姓의 유래는 더욱 명백한 사실로서 그 전하여 듣는바와 또한 전해옴이 지금에 이르러서 자손 된 자 어찌 믿지 못할 것이랴? 이미 굳게 믿고 있는 바이다. 그러니 어찌 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고자 생각지 않으랴! 금번 曺氏의 建碑之事는 예의에 맞는 일이니 예라 하는 것은 즉 그 근본과 시초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인 것이다.
노래하여 가라사대
동쪽바다 저쪽에서 해도 솟고 달도 뜨네. 주옥으로 꾸민 집에 龍자님이 계셨으니
金鱗萬點 곱다 해도 짝을 어찌 지으리까? 오색구름 불러 타고 하늘멀리 날았도다.
火旺山 높은 봉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南畿에 고인물이 맑고 깊어 龍池 되니
窈窕淑女 목욕타가 依支하고 느낌 있어 탄생하신 貴童子는 의젓하게 자랐으니
공주님과 짝을 지어 貳宮榮華 누리셨고 덕망과 위엄 앞에 왜병들도 물러섰네.
무성하게 뻗는 나무 잎잎마다 빛이나니 孝悌忠信 어김없이 뒤를 이어 남이로다.
거룩하신 그 神佑를 남이 어찌 따르리까? 마침내 돌에 새겨 세상에 밝혔으니
우뚝한 비석 앞에 자손만대 빛나네.
右副承旨 完山 李建昌 撰
*李建昌【1852(철종 3)~ 1898(광무 2)】. 조선 말기의 문신·대문장가. 가학(家學)을 이어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으며,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 필요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지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陰記
우리 鼻祖 태사공께서 신이(神異)한 감응에 의해 나셨다는 사실은 서문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대저 태사공이 가신지 일천삼백년이 되었건만 아직까지 그 관향에 하나의 표석도 건립되지 못하여 수만 수억의 후손들이 우리 비조가 어느 지방에 발상되고 어느 시대에 창시 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누대의 유감이었는데, 이번의 공사야 말로 선대를 추모하고 후대를 열어놓은 계기이다. 비가 완성된 뒤 건립할 곳을 모의할 때 모두들 화왕산꼭대기에 건립했다가 樵夫 牧童에 의해 마멸되느니보다 아예 후손들이 주거하는 곳에 건립하여 오래도록 유전시키는 것이 낮지 않느냐고 결정지었다. 더욱이 태사공의 外祖인 李翰林이 昌寧 鼓巖里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大巖은 바로 고암리 이다. 그럼 태사공의 출생지는 아무리 다른 곳이라 하더라도 그 주거지는 이곳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衆論에 따라
대암에 건립하는 바이다.
後孫 柄義가 삼가 기록하다.
11.始祖基壇碑銘
하늘은 사람을 더불어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그 玄妙한 哲理로 氣化하여 탄생하는 자 있으니 즉 저 꿈에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고 감응생자 하였다는 商頌의 玄鳥와 또 거인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 감응생자 하였다는 周雅의 巨跡 등의 고서는 다 經書의 典範인 詩傳의 雅頌에 기재되어 있는 바로서 어찌 속임이 있으랴? 우리 동방에 있어서도 朴赫居世의 알에서 나온 것을 비롯하여 金閼智의 鷄林에서 난 것과 金首露의 金盒에서 난 것이며, 제주의 高, 夫, 梁 三姓이 토굴에서 나온 것 등이다. 이와 같은 氣化之事이니 일찍이 蘇子瞻(蘇洵의 아들)이가 “신인의 탄생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라고 말하였음도 그 또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런즉 曺氏의 시조가 용지에서 탄생하심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여기에 있어서 그 시조와 후손이 비록 얼굴은 다를지나 상응하는 氣脈은 동일한 것이니, 저 제사 때 馥郁한 香姻속에 나타나는 洋洋한 感應과 꿈속에 나타나는 신비적 感應이 비록 천백년을 지냈다고 하여 그 어찌 막힘이 있을 것인가? 그런즉 이번에 曺氏始祖公께서 澹雲公의 꿈에 나타나심이 또한 理致에서 조금도 이상할 바 없는 것이다. 처음에 曺氏始祖墓를 世遠하여 失傳하였던바, 澹雲公이 꿈에 어떤 神廟에 들어가니, 사람이 있어 말하는 것처럼 어찌하여 비를 세우지 않느냐? 고 하는 소리가 들림으로 문득 우러러 보니 산 아래 古冢이 있고 그 위에는 풀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그 아래에 흙빛이 다 붉으며 앞에 잇는 돌에다 曺繼龍 三字를 크게 써놓았다. 비로소 始祖墓임을 알고 悚然히 놀라며 남쪽을 향하여 재배하였는데 깨어보니 꿈인지라, 마음속으로 이싱하게 여기던 중 마침내 永川宗人 善迪에게 古文이 있다기에 얻어 보니, 鼻祖墓가 경주 초제리에 있는데 옛날부터 曺氏始祖墓라 불러오며 屢次兵史를 겪었음에도 아무 피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농민들도 감히 들어가 경직치 못하고 만약 침범하는 자가 있을 때는 문득 이상한 변고가 있어, 구내에는 지금껏 塚墓가 없다. 고 말하였다. 그 뒤에 또 和順宗人 善行의 舊譜를 얻어 보니 始祖墓가 慶州府 북쪽 사십리 밖에 紫玉山 아래 草堤洞辛坐之原에 있다, 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양자를 참고하여 볼 때 前者 善迪의 書는 지방인의 傳記에서 얻은 것이고, 후자 善行의 보첩은 先代祖先들의 기재에서 나온 것인데 양자의 내용이 부합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드디어 영남종인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던바 그 지형과 土邑이며 묘지의 坐向까지 꿈에 본 바와 같으므로 이에 그 봉분을 개수하고 樵夫(초부)와 牧童들의 침입을 경계케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釋明치 못한바 있어 의심으로 전하여 오는 바이다. 그런데 始祖公께서 탄생하심이 저와 같이 神靈하였음을 미루어볼 때 그 精魄은 반드시 형체와 함께 消盡되지 않았을 것이다. 담운공은 문장과 덕행이 일세의 典型일뿐 아니라 天資가 虛明無欲하고 淸澹沖和하여 가히 神明으로 더불어 사귈 만 하였으니 저 소위 屈原이의 아득하게 비고 고요함이 暢明無涯하여 태초로 더불어 이웃하였다. 는 것과
近似한바 있도다. 이것은 祖孫의 정신이 渾然一體가 되어 그 소리와 얼굴을 상접하게 된 것이니 어찌 常情으로서야 감히 생각이나 해 볼 바이랴! 옛날 柳子厚가 襄陽 趙丞의 墓誌를 쓸 때 그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묘를 찾아 들에서 울고 헤매다가 卜者의 말을 쫒아 마침내 눈이
움푹 들어가고 수염이 난 사람을 만났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의 성은 趙다” 그리고
저것이 너의 아버지의 묘다“ 하고 가르쳐 주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효성에 감응하여 신의 모양을 빌려서 말하여 준 것이니 이 두 일들은 비록 千年相巨의 일이로되 서로 부합되는바 있으니 어찌 기특한 일이 아니랴? 당시 淡雲公이 노쇠하여 몸소 성묘치 못하고 돌아가신 후 그 무덤 앞에 심은 나무가 벌써 오큼 드리 컸는데 이제야 그 손자 晦振이가 유지를 쫒아서 不遠千里하고 여러 종인들과 동행하여 담운공의 꿈과 영남의 書와 호남의 家牒등의 사실을 質正對照하여보니, 보고 들은바와 꼭 일치하는지라 드디어 塋域內를 깨끗이 쓸어 정성껏 제사지내고 國中諸孫과 협력하여 壇을 쌓고 비를 세우니 이에 이르러서 비로소 澹雲公에 자손있음을 알게되었다. 또 令尹(지방관의 직명) 兪漢謨는 공의 외손으로서 이곳에 재직당시 였으므로 힘써 이 일을 도운바 있었으니 이것은 외가일을 잘 보았다고 말함이 옳을 것이다. 삼가 曺氏世譜을 살펴볼때 始祖는 新羅翰林 李光玉의 따님으로 날때부터 복질이 있었는데 장성함에 따라 더욱 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昌寧火旺山에 龍池가 있어 퍽 靈異하다는 소문이 높으니 어찌 기도하여보지 않겠느냐? 함으로 이말을 쫓아 목욕하고 기도하던중 갑자기 용지가에서 운무가 자욱하게 솟아올라 白晝가 오히려 캄캄하게 되었다. 얼마후에 개었었다. 이로부터 병이 낫는 동시에 인하여 懷妊하고 시조공을 탄생하였는데 꿈에 한 丈夫가 와서 ”내가 동해용왕의 아들 玉玦인데 즉 이 아이의 아버지다. 모름지기 잘 양육하라. 크게는 가히 公侯가 될것이고 적어도 卿相이 될것이며 그 자손은 萬世繁榮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광옥은 이 사실을 진평왕께 알렸드니 왕께서 그 얼굴이 이상하게 생기고 脇下에 曺字와 같은 點文이 있음을 보시고 이어서 姓名을 내리시고 장성하여서는 공주님으로서 처를 삼게 하셨다. 일즉 왜병이 萊州를 침범하게되자 왕께서는 공으로하여금 衆兵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라고 명하셨다. 이에 공은 단신으로서 수레를 타고 적진에 나아가 말고삐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타이르니 수많은 왜병들이 엎드려 절하며 ”공은 천인이 올시다“ 말하고 즉시 撤兵歸去 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비록 정사에 게재되지는 않았으나 전해오는지가 벌써 오래되었으므로 그저 황당한 말로만 돌릴수는 없는 것이다. 그 후로 八平章과 九少監을 비롯하여 크게 창성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東方에 曺氏는 모구 그 後裔인 것이다. 澹雲公의 諱는 命敎이고 官은 天官小宰 藝文官提學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위로 眞平王때와 相巨가 천이백년이나 되는데 나는 이 사실을 듣고 이상하게 여긴바 있어 이에 澹雲公의 기록한 바와 지방민들의 전기등을 종합고찰하여 비석에 새기고 百世之下에 曺氏始祖墓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바이다. 그러나 봉분에 제사치 않고 단에 제사지냄은 그 지극히 신중함을 기하고자 함이다.
노래하여 가라대
거룩하신 탄생이라 氣運으로 서렸다가 목욕가신 아가씨께 感應하여 나타났네.
신비롭다 꿈에 와서 내 아들을 만지시고 脇下에다 글자 새겨 王께 姓을 받으셨네.
공주님을 아내삼아 百乘駙馬 영화로다. 나라근심 새때왜군 一寸舌로 물리쳤고
八世平章 뒤를 이어 불꽃같이 창성하니 千年上代 오랜 무덤 斧形같이 간직하며
바람말이 굽달토록 현손찾은 보람있어 천리 먼 곳 慌惚하게 새벽꿈에 나타나서
내 무덤을 알고프냐 이곳에서 멀지않다 경주초제 靑草속에 또렷하게 있느니라.
모든 보첩 고찰해도 털끝만한 틀림없이 새벽선잠 놀라 깨고 머리 숙여 재배했네.
점을치고 가르침을 대인께서 할 것인가? 牛羊같은 微物인들 차마 어찌 밟을소냐?
澗水에서 마름따라 정성으로 致祭하니 한결같은 그 기맥은 물과 같이 통함이라
너의 지성 기특함을 성복으로 갚으리라. 千億子孫 壯할시고 그 제사를 闕할손가
皇明崇禎紀元後三丁丑月日(英祖三十三年距今二百年,1757년)大提學 豊山 洪良浩 撰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군수 중성(重聖)의 손자이고,
진보(鎭輔)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경모(敬謨)의 할아버지이다.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거쳤고,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12.種德齋記
慶州紫玉山 아래 초제동에 우리선조인 신라태사공의 묘가 있었는데 歷代가 누차 바뀌는
사이에 그만 失傳되었다가 지난번 삼종조인 담운공 諱命敎께서 자나 깨나 誠力을 기울여 묘를 찾아내었고 우리 선군이 계속해서 선대의 일을 주관 무오년에 팔도의 여러 종족과 협의하여 묘앞에 단을 모아 해마다 제사를 드렸고 병자년 봄에 소자가 東來府使로 부임하여 돌을 세워 그 顚末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선군이 다하지 못한 유지를 받들기 위함이었다. 묘 옆에 있단 墓齋역시 무오년에 건립된 것인데 오랜 세월에 이어 퇴폐되었으므로 종인들이 나를 찾아와서 사실을 말하였다. 내가 마침 湖南을 按撫하고 있던 터이라 여러 자손들과 약간의
자금을 갹출하여 중수할 경비를 마련하고 종인 錫五가 공사를 감독한바 임진년에 묘재가
다시 완성되었다. 이에 나에게 齋名을 짖고 또 記를 쓰기를 청함으로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재명을 種德(덕을 심는다는 뜻)이라 하였으니, 옛적에 묘재를 건립하는 이가 의례히 재명을 보고 意義를 생각할 만한 것으로 이름 하였으니, 이는 그 조상에게 충실하고자 함이다.
그 조상에게 충실하고자 하면서 덕을 심는데 충실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다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種德으로 이름 한 것이다. 아! 우리 조상이 심어 놓은 덕은 너무도 많다. 지금까지
천여년 동안 자손들이 그 덕을 한 없이 누리어 或은 高車駟馬를 탄 듯 그 몸을 귀하고 영광되게 하기도하고, 혹은 많은 전토를 소유한 부로 그 家産이 潤澤하기도 하고, 혹은 長壽와 康寧에다 자손이 繁昌하기도 하였으며, 이에서 뒤진이도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추우면 입을 수 있어 溝壑에 뒹구는 고난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조상이 심어놓은 덕으로서 이다.
이를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이를 잠시도 잊지 않는다면 조상에게 충실함으로서 그만한 보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조상에게 충실함으로서 그만한 보답이 있는 것이고 보면 역시 덕을 심는 일밖에 없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 누가 여기에 곡식을 심어 놓았을 때 그 자손이 거두어 먹기만 하고 이어서 심지 않는다면, 어찌 쉬 고갈되거나 황폐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 조상을 같이한 우리 자손들이, 조상이 심어놓은 덕을 이어서 심고
누리고 또 누리고 심어서 끊임이 없다면 우리 조상의 묘와 우리 조상의 제사도 天地와 같이 끊임없게 될 것이니, 보답을 받는 길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아! 앞으로 이 齋에 들어온 이가 어찌 이를 서로 근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적에 蘇子瞻이 남의 種德亭에 題하면서 “나무를 심는 것이 종을 심는 것만 못하다. 사람의 聚散은 마치 날아다니는 새들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덕을 심는다는 명칭만 내세우고 덕을 심는 실속이 없어 스스로 침체부진한데 이르게 되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그러므로 조상을 같이한 우리 자손이 능히 차첨의 풍자한바가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 다행일까 한다. 고 기록한다.
後孫 翰林奎章閣校理修撰 執義樂正兼 弼善 通政大夫左副承旨
大司諫 吏曹判書 兵參 同義禁摠管 副提學知成均館事 工參 禮參
崇祿大夫世子侍講院司書 左賓客 左贊成 鳳振이 삼가 撰한다.
13.平章事諱漢知墓碑文
우리 나라의 해서에 위치한 平山府 동쪽 삼십리 지점 수월봉에 卯坐 酉向의 묘는 우리 26대 祖考인 門下侍郞平章事 諱漢知의 遺藏으로 26대 祖妣인 南陽洪氏가 合祔되었다. 삼가 가첩을 상고해보면 우리 鼻祖인 新羅太師 諱繼龍은 眞平王이 駙馬로 창성부원군에 봉해졌고
그 이하 4世의 관직 휘호는 譜牒에서 빠져 정확하지 못하여 6世 諱謙은 고려태조의 따님
德恭宮主의 부군으로 公의 曾祖가 되고 祖考 諱瑞는 刑部員外郞이며 考 諱延佑는 門下侍郞平章事였다고 하였는데, 그 연대가 이미 멀고, 문헌을 고증할 수 없어 公의 行誼와 功業을
알길이 없다. 그러나 公 以後로 6世 平章事와 6世 少監이 연속 배출되었고 또 襄平公이 위대한 功業이 이어졌으므로 論하는 이들이, 漢代의 袁氏가 楊氏보다 더하다고 한다. 그 盛德과 休光(아름다운 명성)이 후세에 귀결된 사실을 고증할 수 있으니 그 근원이 깊음으로써 그 흐름이 長遠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가 가끔 실전한데 대하여는 우리 증조고인 晦谷 文忠公(諱漢英)이 關西 接廉使로 나왔을 때 沿途 土人에게 물어서 湮沒(인몰)된 것을 드러냈고, 계유년에 가친이 信川郡守로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찾아내게 되었다.
아! 공과의 세대가 7백여년이나 되는 오늘날에 묘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문중의 慶幸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세웠던 작은 표석을 明宣宗宣德三年 (1428)에 鐫刻(전각)된 것으로 오랜 세월에 워낙 殘缺되어 더 이상 遺傳할 수 없으므로 소자가 마침 白川郡守로 있으면서 큰 표석으로 바꾸고 그 음기를 기록하는 바이다. 번창한 후손들과 赫赫한 名節에 대하여는 보첩에 게재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崇禎紀元以後 두 번째 辛亥(1731)년에 26대손 通政大政 承政院
同副承旨 知製敎 命敎가 삼가기록하고 쓰다.
14.參議公墓碑文
公의 諱는 深, 本貫은 昌寧이다. 曾祖 諱元桂는 閤門祗候이고 祖 諱遇禧는 判典儀寺事로 贈左侍中 府院君이고 考 諱敬修는 密直司使로 贈左贊成이고 妣 平山郡夫人金氏는 洪武(명태조의 연호)乙丑年(1385)에 公을 낳았다. 公은 散員(고려 때 別將다음의 武官)에 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이 내려지는 것)되었다가 永樂(明成祖의 연호)갑오년(1414) 팔월에 本第에서
별세, 이곳에 返葬되고 弘治(명효종의 연호) 계축년(1493)에 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夫人 瑞山鄭氏는 고려때 僉議中贊(첨의중찬) 仁卿의 五世孫으로 증조 諱世忠은 監察掌令이고 祖 諱璹는 判典農寺事이고 考 諱允弘은 軍器寺副正이고 妣는 江陽李氏로 弘治 丁卯년(1507)생이다. 부인은 曺門에 와서 二男을 낳았으니 장남 承重은 宣務郞이고 차남 繼門은 蔚珍縣令이다. 宣務郞공은 2님2녀를 낳았으니 장남 保는 司直이고 차남 倜(척)은 현직 義禁府都事이고 장녀는 僉節制使 (첨절제사) 崔漢伯에게, 차녀는 金顗(김의)에게 출가하였다. 縣令公은 1남1여를 낳았으니, 1남 偉는 현직 全羅道觀察使이고 1녀는 刑曹判書 金宗直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成化(明 憲宗의 연호) 乙未年(1475) 정월에 89세를 일기로 별세, 동년 12월에 공의 묘 좌측에 祔葬되었으니, 묘는 같으나 壙穴은 다르니 弘治 癸丑年(1493)에 숙부인으로 추증되었고, 丁巳년(1497) 이월 일에 세우다.
15.德源齋上樑文
朝夕으로 松楸(무덤주위에 심은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보호하니 경모하는 뜻 저절로 생기고 春秋로 霜露(계절의 변천)를 밟으니 悽凔(처창)한 마음 더욱 간절하네. 이는 당연한 天理요. 固然한 인사일세. 그러므로 先王이 근본 보답하는 儀禮를 제정하고 후손이 조상 추모하는
정성을 다한다는데, 우리 참의공은 세족의 출신이요, 廟堂의 名賢으로 불행이 국운이 다할 즈음 만나 王朝의 교체 차마 볼 수 없었으니 竹館(죽림 속에 지어진 고토의 처소)에서 누가 밤중의 明月을 알손가? 栗里(晉나라때 徵土 陶潛의 고향)에서 스스로 상고의 청풍 즐기었네. 福地에 菟裵(노은공이 은거하던 곳인데 전하여 은거하는 것을 뜻함)가 마련되니 시내는
鳳溪를 流轉하고, 吉地에 衣履가 모셔지니 때는 牛山을 차지한지 벌써 5백년동안 자손니
번창하고 거의 20代 가까이 家聲이 赫赫하여 爵祿을 서로 이었고, 詩禮를 능히 전수하니,
先德 두터워서 그 蔭德 저절로 두터운 줄 알겠고, 根源 長遠해서 그 流波 역시 長遠한줄 알겠네. 祭享은 이내 빠뜨림이 없으나 齋舍를 아직 건립하지 못하여 서로 깊은 유감 간직했다가 끝내 빠른 협의 이루어져 도끼질하고 톱질하니 新甫(山名)의 잣나무와 祖徠의 소나무 다듬어지고, 장엄하고 찬란하니 離婁(옛날 눈 밝은 사람)의 먹줄과 公翰子(魯나라 巧才)의 먹통
거쳤으니, 단단한 담장 두루 바라 보건데, 저 물가에 엄연히 둘렀는데, 先德을 추모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편액을 걸고 후손을 계도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규범을 삼았네. 이에 五梁(들보를 다섯줄로 놓아서 짓는 집의 제도)으로 된 건물 준공되어 大偉(다음의 기량대첩을 말함)로 된 노래 화답하누나. 어이어차 대들보 동쪽으로 향하니 九鳳山 꼭대기 하늘에 솟았구나. 鳳이 盛代찾아 내려온 이곳에 창문의 아침 해 대들보 서쪽으로 향하니 둥근 것은 못 굽은것은
둑일세. 밤낮없이 활수가 솟아나니 그 빛 하늘에 반사 되었네. 어이어차 대들보 남쪽으로 향하니, 시냇가의 벼와 기장 가을을 맞이했네. 저 輞川 (唐나라 王維의 별장이 있는 곳)에만
좋은 별장 있다고 마소. 여기 전야에도 세 오솔길 그윽 하다오.어이어차. 대들보 북쪽으로
향하니 극락산 어이 그리 웅장하고 신비의 지역에 맑은 기운 깊었으니, 예부터 뛰어난 才德 배출되기 마련일세. 어이어차. 대들보 위로 향하니 신명을 감응시킨다는 말 거짓이 없네.
조상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온 정성 다하니 의당 많은 福祿그지 없이 누리리. 어이어차. 대들보 아래로 향하니 금릉의 문물 누구나 다 축하하네. 온 동산 꽃나무에 봄바람 일렁이니 천륜을 다지는데 즐거운 일 많아서랴. 삼가 바라건데 상량을 마친 뒤에 祭享에 더욱 경건하고
재사가 점차 새로워지며 효도와 충성은 단연 繼述(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하는데
있으니, 애모와 정성 다해 著存(조상에 대해 애모와 정성을 다함으로써, 조상이 다시 생존한 듯 하고 앞에 나타난듯 하다 는 뜻)을 잊지 않았으면 하네. 아! 오늘의 이 성공으로 보아
반드시 영원한 보수 지속되리.
단기 4296년 10월 일 恩津 宋友用 기록하다
*澹堂(1884~1968)先生은 충북 영동 출신의 서예가. 依巖古宅의 逸憂堂, 敬慕齋, 維新堂,
養敎堂, 敬愼堂 등의 현판글씨, 그리고 玉流亭의 현판글씨 등이 모두 澹堂先生의 작품이다.
16.贈吏曹參判諱繼門碑文(墓文)
公의 諱는 繼門 字는 胤父로 昌寧人이다. 曾祖는 贈 門下左侍中으로 諱는 遇禧이고 祖父는
奉翊大夫 密直司使로 諱는 敬修이고 부친은 贈通情대부 兵曹參議로 諱는 深이고, 모친은 淑夫人 瑞山鄭氏로 태종14년(1414)에 公을 낳았다. 公은 三軍鎭撫典農主簿와 玄風 울진의 수령을 역임, 通訓大夫品階에 이르렀고, 고향으로 돌아와 20여년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성종20년(1489) 2월 일에 金山 봉계리에서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동24년(1493) 7월에 아들에 대한
恩典으로 喜善大夫 吏曹參判에 追贈되었다. 公의 먼저 부인 河濱李氏는 一女를 두어 資憲大夫刑曹判書 金宗直에게출가하고, 다음부인 文化柳氏는 一男 偉를 두어 현재 嘉善大夫 품계에 戶曹參判이고 側室의 所生은 6남 4녀로 아들 倫은 宣略將軍이고 佺은 效力副尉이고 伸은 通德郞 司譯院主簿이고 장녀는 崔松壽에게 차녀는 金諟種에게 삼녀는 崔孟濬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公의 묘는 이해 5월 일에 黃間 馬岩洞 子坐에 모셔졌다.
成宗24년 9월 일에 아들 偉가 세우다.
16.贈吏曹參判諱繼門配貞夫人文化柳氏碑文
夫人의 姓은 柳씨요, 文化人이다. 祖上인 諱車達은 高麗太祖를 도와 三韓功臣으로 錄勳이
大丞에 이르렀고 그 뒤로 諱公權과 아들인 諱澤은 高麗中葉에 參知政事와 承旨로 모두 명성이 있었고, 澤의 아들인 文正公 諱璥은 崔忠獻의 손자인 誼를 베고 高麗의 왕실을 바로잡아 衛杜功臣에 녹훈되었고 璥의 아들 諱陞과 陞의 아들 諱墩은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本朝에 와서는 墩의 아들 諱亮이 우리 太祖를 도운 공로로 左議政이 되었고, 亮의 兄 諱信도 높은 벼슬에 이르렀는데 바로 부인의 曾祖이고 信의 아들 諱洽은 議政府 左贊成에 追贈되었고, 洽의 아들
諱汶은 幸州奇氏를 맞이하여 부인을 낳았고 부인은 贈吏曹判書 昌寧 曺繼門에게 출가하여
一男 偉를 낳았는데 文章에 능하여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여 第六位로 합격하고 成宗의 知遇를 만나 현재 全羅道觀察使로있다. 부인이 燕山主 元年(1495) 10월 일에 69세를 일기로 금산 옛집에서 별세 이해 모월 모일에 황간에 있는 贈吏曹參判公의 묘에 祔葬하게되자 偉가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이제는 그만이요, 내가 다시는 어머님을 뵐 수 없게 되었소, 나의 어머님은 일생동안 많은 婦德을 남기셨는데 이대로 인멸되어 버릴까 걱정이요. 숨은 덕행을 드러내 먼 후세에 보이려면 문헌이 없고는 아니 될 것이오. 더욱이 우리집안의 일을 잘 알기로는 公만한 이가
없으니 公은 부디 어머님의 銘을 지어 달라. 고 부탁하였기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 哀悼해 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부인은 천성이 溫和, 仁慈하여 여러 종친을 대하는 데는 멀고 가까운
차별이 없이 일체 恩과 信을 위주로 하였고, 여러 側室을 거느리는 데는 조금의 질투도 없었고 여러 庶出을 養育하는데는 親生과 똑같이 하여 恩愛를 조금도 소홀이 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화사한 것을 싫어하여 의복이나 음식이 검소하였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집에 저축될
여유가 없었고 제사를 모시는 데는 의례 손수 장만하여 그 誠과 敬을 다하였다. 奴僕들은
그 仁慈에 감화되어 아무리 夫人이 모르고 있는 일이라도 감히 속이려하지 않았고 이웃에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의례 부인에게 먼저 드린 뒤에 먹곤
하였으니, 어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하겠는가? 이 몇 가지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銘을 지어 찬양할 만하다. 銘은 다음과 같다.
文化에서는 柳氏, 昌寧에서는 曺氏로, 姓은 雙美를 이루었고 한 아들은 명성이 높았으니
큰 벼슬로 문벌을 부흥시키고 조상을 빛낸 이는 곧 관찰사이지만 夫人의 숨은 德 들어내고
맑은 行 전파시켜 오랠수록 보존하는데 나의 글까지 있고 보니 금릉의 옛집과 黃間의
새 무덤은 그 광채 인멸되지 않고 천년만년 유지하리.
虛白堂 洪貴達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