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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문화관강연록 >
시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시인
-나의 시, 나의 삶
오늘 제가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시인에 대해서, 아니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존재이었는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물론 변변찮은 텍스트로서 제 시를 몇 개 가지고 나왔고 제 얘기도 곁들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보다도 지금 우리 시인들이 전 시대 시인들의 본질적인 측면을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시를 쓰기 시작하던 시절에, 어떻게 보면 한국 시인들의 시에서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가 거의 백 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와 있지만, 많은 선배 선생님들의 어떤 시에서보다는 외국 시인들의 시인됨됨과 시에서 영양을 많이 섭취했습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서의 전공과가 국문학이 아니었고 영문학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었겠지만 외국 시인들 중에서도 특히 독일 시인들과 영시, 唐詩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점이 제 또래의 동년배 시인들과 다른 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마음속에 師表가 되는 어떤 모델시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는 미리 배포해드린 텍스트 첫머리에 횔덜린 시인의 ‘반평생’이란 짤막한 시 한편을 올려놓았습니다.
횔덜린은 1770년에 독일의 중서부 지방이자, 예전에는 뷔르텐베르크 공국의 땅이었던 디르팅겐에서 태어나서, 1843년에 사망을 했어요. 횔덜린은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철학자 헤겔하고 같이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시를 썼어요. 그런데 이 횔덜린 시인이 살던 당대에는 괴테와 쉴러라고 하는 막강한 거장이 문명을 날리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문학권력’이란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은 이 당시 독일 문단의 막강한 대부는 괴테와 쉴러였어요. 그 괴테와 쉴러의 그늘에 가려져 가지고 이 횔덜린이라는 시인은 73세로 죽을 때까지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엔솔로지에 젊었을 때 몇 편을 발표한 것 외에는 전혀 무명시인이었어요. 그러니까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산 채로 시들어버린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무명시인으로서 삶을 마감했지요. 그런데 이 시인이 주고난 후 1905년도이니까, 50년이 훨씬 지났죠? 사후 반세기가 넘은 후 여기저기 흐터져있는 횔덜린의 시 원고들을 딜타이라고 하는 文學史家가 추려 가지고 연구논문도 쓰고 작품집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간당시는 1차대전의 와중이라 작품이 보급이 안 됐지만, 1919년부터 판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2차대전을 겪고 난 다음에 특히 하이데거에 의해서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횔덜린이란 시인은 사후 100년 만에 평가를, ‘괴테보다도 더 독일적인 시인’이라는 그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시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당대의 시간과 싸우는 존재이기 보다는 당대의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과 싸우는, 싸워서 이긴 존재로서 전율처럼 다가옵니다.
횔덜린아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제가 문단에 나온 1970년대 초반입니다. 저의 모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시다가 전북대학교 독문과 로 가신 전광진 선생님이 <현대시학>에 근 2년 동안 이 횔덜린의 시세계를 연재하고 계셨어요. 그때 이 횔덜린 시인을 알게 되었고 이 시인의 삶에 대해서 전기에 감전 당하듯이 전율을 받았습니다.
횔덜린은 34살 되던 젊은 나이에 정신착란증세로 일생을 유폐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34살 이후부터 73세까지, 근 40년에 해당하는 기간은 산 것이 아니라 의지와 달리 시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의 목수 짐머라는 사람이 그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40년 동안 그냥 보살폈어요. 누구보다도 절망을 했고, 거장들의 그늘에 가려서 절망하고, 또 시집 한 권도 내지도 못하고 시 발표도 못하고, 평생 그런 어두운 삶을 살다가 간 시인을 40년간 보살핀 목수에게도 머리가 수그러들지만 횔덜린의 삶 앞에서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이런 시인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독일 문단뿐만 아니고 세계 문단에서도 제가 볼 때는 가장 시인다운, 가장 시인됨의 상징으로서 기억될 시인입니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시대적인 어떤 박해, 문학세력에 의한 따돌림, 그 속에서 미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시인의 대표시 <빵과 포도주>가 있습니다만, 헤르만 헤세는 <빵과 포도주>에 나오는 첫 번째 시를 어렸을 때 읽고 문학을 하게 됩니다. 저는 횔덜린이 정신병으로 40년 간 유폐돼서 살던 독일 튀빙겐의 목수 짐머의 집을 1992년 겨울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슈트트가르트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거린데 옥탑방 5층 꼭대기 한 평반 정도 되는 그런 곳에서 살았더군요. 좁은 공간이지만 창은 사방으로 뚫려 있어 집 앞을 흐르는 네카강이 보이고 아마 강을 내려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정신이 좀 멀쩡했을 때 시인은 이런 구절들을 시 곳곳에 많이 남겼어요. 이 구절은 기록하실 분들은 기록하세요.
위안받아라.
이 삶은 고통 받을 가치가 있도다.
‘위안받아라 / (우리들의) 이 삶은 고통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다.’ 이 시 구절은 목사가 된 노이퍼라는 친구한테 준 구절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 받도록 태어났도다.
그러니까 횔덜린의 어떤 시인됨, 시인 의식,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나도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나 이외의 많은 분들, 많은 인간들은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위안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 고통보다는 남의 고통을 더 생각하는, 위로받고 위안 받으라는 메시아적인 의식도 가지고 있었고요. 목수 짐머의 집에서 정신병자로서, 또는 식객으로서 40년 동안을 살았다곤 하지만 산 게 아니겠죠. 그냥 숯처럼 안으로 연소해서 재가 되어 버린 거죠. 저는 횔덜린 같은 시인은 지상에서 산 게 아니고 차라리 연소해버린 시인이었다라고 봅니다. 그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중간중간에도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시들을 길게 쓰질 못하고 한 두세 줄 정도 일종의 잠언 비슷하게 남긴 구절들이 있는데 이런 것도 있어요.
3월과 4월과 6월은 멀고
나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
나 기꺼이 산다고도 할 수가 없네.
이런 구절도 있어요. ‘3월과 4월, 6월은 멀고 / 나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 / 기꺼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네’
이런 의식은 근자에 들어서 김지하 선생님의 시에서도 나타났어요. 김지하 선생님도 <횔덜린에게>라고 하는 제목의 시를 시집에 발표를 하셨고. 휠덜린 같은 이런 고통받는 시인의 시인됨을 보여주셨지 않았습니까. 아까 얘기했던 ‘지상의 아들인 나, / 사랑하며 고통받도록 아주 그렇게 태어났도다’ 이런 구절들은 뭔가 예언자적인 요소가 있지 않겠어요? 위대한 시인에게는 예언자적인 요소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횔덜린의 <반평생>이라고 하는 이 짤막한 시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이 시인이 34살, 그 정신병이 발병할 당시에 쓴 작품입니다. 이 <반평생>이라고 하는 작품 속에는, 참 묘하죠. 시인이 쓰는 시는 어느 면에서 자기 운명을 예감할 경우가 있어요. 예감하는 시를 쓰는 경우가 있어요. 바로 이 시가 그런 시라고 볼 수 있죠. 제가 이 <반평생>이라고 하는 시를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평생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 열매와
들장미 가득하여
육지는 호수 속에 매달려 있네.
너희 사랑스러운 백조들
입맞춤에 취하여
성스럽게 깨어 있는 물속에
머리를 담그네.
슬프다, 내 어디에서
겨울이 오면, 꽃들과 어디서
햇볕과
대지의 그늘을 찾을까?
성벽은 말없이
차갑게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는 덜걱거리네.
이 시는 모두 2연으로 구성된 14행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아도르노는 바로 이 시에서 뛰어난 현대성, 자기분열증세의 징후를 발견했어요. 정신분열의 징후가 생겼을 당시 시인의 의식을 이 작품을 통해서 예리하게 간파했지만, 실제 이 시는 첫 연과 두 번째 연이 상반되어 있어요. 첫 연은 여름의 풍요로움을 그렸고 두 번째 연부터는 겨울에 메마르고 공허한 침묵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죠. 극단적인 대비예요. 극단적인 대비라고 하는 것은 곧바로 내 안에 있는, 내 자아 속에 있는 분열 현상을 의미하는 거죠. 바로 그런 식의 분열되어 가는 어떤 개인의 어떤 심리상태, 정신상태를 그냥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선 첫 연과 두 번째 연이 상반된,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시를 통해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연은 한 여름의 목가적인 온화한 자연풍경이 전개되고 있죠. 노랗게 익는 배들하고 온 대지에 만발한 붉은 들장미들, 그리고 호수의 백조들. 백조들이 우아하기도 하지만 부리끼리 입맞춤하는 모습까지도 횔덜린은 보고 있어요. 또 대자연의 어떤 성숙, 그 풍요로움 이런 것뿐만이 아니고 색채의 대비도 뛰어나죠. 노란색의 배 그리고 들장미의 붉은 색,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의 녹색, 하늘이 담긴 호수의 푸르름, 하얀 백조의 깃털, 우아한 자태에서 오는 너무나 엘레건트한 흰색. 그리고 만약에 카메라맨이 있다면 카메라의 앵글을 비치는 솜씨도 프랑스영화에 나오는 식의, 우선 그 원경으로 시작을 하죠. 멀리 대지의 노란 배밭에서 앵글이 들장미쪽으로, 그리고 이제 육지와 접해 있는 호수를 비치고 미세하게 호수에 헤엄쳐 다니는 백조들, 그러니까 점점 원경으로 해서 가깝게 근경으로 앵글을 돌리고 있죠. 1805년이면 벌써 2백 년 전입니다. 2백년 전에 벌써 이런 시를 이런 원근법을 동원한 이미지즘시가 써졌다는 것도 특기할만학다고 봅니다. 이미지즘은 에즈라 파운드 같은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횔덜린의 이 시속에 영미의 이미지즘 이전에 독일의 이미지즘이 태생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엘리어트도 이 시를 놓고서 현대성을 얘기했습니다. 뛰어난 현대성이라고. 물론 아도르노는 1800년 초의 시에서 개인의 어떤 균열, 자아의 균열, 분열 현상을 그려낸 시로서는 이게 처음이라는 가치평가를 했지만 그 당시 시의 수준으로 볼 때는 이 시는 이미 미래의 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두 번째 연은 갑작스럽게 전경이 바뀌어버려요. 풍요로운 여름이 아니고 벌써 겨울이 와버렸어요. ‘슬프다 겨울이 오면 꽃들과 햇볕과 대지의 그늘을 어디에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여름이라고 하는 풍요로움, 삶의 풍요와 성숙, 나의 어떤 젊음, 이 시에서 횔덜린은 어느 면에서는 나의 젊음을 첫 연에 다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자기가 꿈꾸는 그런 이상향적인,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했던 세계는 첫 연에 다 상징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첫 연과 완전히 단절되어버린 2연에서는 차가운 겨울로 넘어가면서 꽃들이 다 사라져버리죠. 햇볕도 다 사라지고. 쉴 만한 따스하고 시원한 그늘도 다 없어져버리고 다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말없이 보이는 성벽뿐입니다. 그리고 바람결에 그냥 자기 의지도 없이 덜그덕덜그덕 흔들리는 풍향계소리. 그런데 이 시에서 ‘겨울이 오면’ 라고 하는 가정법을 썼지요. 가정법을 썼다고 하는 것들이 어떤 불길한, 만약 나한테 겨울이 온다면이라는 그 어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마주해야 될 성벽, 돌벽 같은 나의 운명, 삶, 이런 것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2연부터는 첫 연과 색채가 완전히 다릅니다. 첫 연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노란 색, 붉은 색, 흰색, 푸른색, 따스한 색들인데, 두 번째 연의 칼라는 회색이에요. 그 톤이 완전히 모노크롬적인 어두운 회색입니다. 붉고 푸르고 하는 노란 이런 색이 생동하는 색이라면 회색이라고 하는 것은 침묵이죠. 게다가 그 침묵 속에는 덜그덕거리는 불협화음과 같은 금속성의 풍향기 소리까지 나고 있어요. 금속성 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또 메마른 빈 들판의 삶의 공허함 그리고 금속이 주는 차가움, 앞으로 내 삶은 이런 것들이 내 삶이겠구나 하는 것을 횔덜린이 이 ‘반평생’이라고 하는 시를 통해서 예감을 하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 오늘날의 시인은 행복하죠. 지금의 저를 비롯해서 오늘날의 시인은 횔덜린의 이런 삶에 비하면 행복합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시인됨이 오히려 부끄럽고 내가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사치스럽구나, 너무 사치스럽다는 거죠. 우리들은 많은 것으로 무장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때로는 학문으로, 또는 학교 선생도 하고 교수도 하고 직장도 갖고 또 돈도 많이 벌고, 그러면서 사장이면서도 또 시인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횔덜린의 예를 들어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인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시인이란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인, 평생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 그런 시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횔덜린을 가장 시인됨의 으뜸자리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시인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또 우리는 당대병에 걸려 있죠. 자기 시대에 뭘 이루려고 하는. 그런데 횔덜린은 어땠습니까. 당대에는 완전히 무명으로 살았습니다. 횔덜린한테는 괴테나 쉴러를 찾아가서 작품을 발표하고 그 밑의 그늘에서 성장하려고 하는 조급증도 없었습니다. 잊혀지면 잊혀진 대로 그 엄청난 고독, 절망, 그런 것들을 견뎌냈던 이 시인의 정신 같은 것들을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봐야겠다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지식이나 학문, 온갖 것들로 무장을 하고 우리들은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횔덜린은 세상앞에서 어떤 걸로도 자신을 무장하지 않았어요. 무장하지 않은 영혼, 무장하지 않은 정신, 물론 이러한 칭호는 니체가 얘기한 겁니다.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은 무장하지 않은 영혼을 소유한 때에만 가능하다 그랬어요.
여하튼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인으로서, 횔덜린이 있지요.
그 다음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있어요. 이 시인도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시인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웨일즈 출신의 딜런 토마스라고 하는 현대시인도 있습니다. 딜런토마스는 초등학교를 중퇴했어요. 어릴 때,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귀에 익힌 낱말, 한 오백여 개가 평생 그의 시의 밑천이었어요. 딜런 토마스, 천재적인 시인이죠. 그러니까 시를 쓰기 위해서 지식을 섭취하려고 시론을 읽고 두꺼운 책들을 읽는 행위는 천성과는 다른 행위라고 볼 수 있어요. 시인이 공부할 책은 대자연속에 있고 딜런 토마스의 예를 보면 그 시인은 오백 개 내의 낱말밖에 없어요. 그걸로 평생을 시를 썼습니다. 오히려 뒤집어서 얘길 해 보면 너무나 많은 걸 알면 시를 못 쓰죠. 오히려 시는 가장 단순됨, 가장 단순됨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시를 쓸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무장하지 않고, 또는 무장한 여러 가지 세상에 필요한 잡동사니들을 다 버리고 가장 시인됨을 추구했던 이런 시인들은, 동양에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중국 당나라 시인들 보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를 공부하면서 횔덜린을 통해서는 이건 조급하게 할 것도 아니고 평생을 가야 되기 때문에 횔덜린이 지녔던 생각의 어떤 만 분의 일이라도 잃지 않고 평생 지녀야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비슷한 동양의 唐詩나 禪詩들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가도(賈島)는 7세기 때 당나라 시인인데 <반평생>만큼이나 저에게 또 영향을 준 시, 아주 짧은 네 줄짜리 시가 있지요.
첫줄이 ‘松下問童子’로 시작되는 시인데 딱 네 줄인까 적을 수 있으면 적어 보세요.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하네.
이 산에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구름이 너무 깊어 어디 계신 줄 모른다 하네
이 시는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은자를 뵈러 찾아갔다가 만나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것을 쓴 거죠. 소나무 밑에 어린 동자에게 물었더니 약초를 캐러 나가셨는데 산속엔 분명히 있다는 거죠. 그런데 산에 구름이 너무 깊어서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시에서 은자의 존재는 도저히 만나 뵙지 못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깊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는 신비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이 아득한 산 속에서의 공적감은 현세와의 격절된 거리에서 발생하는 감정이지만 이 시는 우리에게 욕망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어렸을 때 이 시를 읽고서 시대는 틀리지만 예나 지금이나 욕망이 들끓고 복잡하고 온갖 어지러운 난세에 이런 식의 삶을 사는 사람, 그것도 역시 시인이겠구나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습니다. 서양의 無名은 동양의 無化, 이런 존재들과도 맥이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1974년도에 쓴 작품 ‘코스모스’를 읽어 보겠습니다.
코스모스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 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 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옵니다.
코스모스는 원래 원산지가 페룬가 그렇지요. 남미쪽 꽃이에요. 코스모스라고 하는 이름도 그쪽에서 온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코스모스 코스모스하다가 ‘高士慕師(고사모사)’란 말이 우연히 떠올랐어요. 이건 제가 만든 말이에요. 사전에는 없어요. 고사모사 와 코스모스가 발음상 좀 비슷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만들어 놓고 보니까 재미있기도 해요. 이 꽃을 고사모사꽃으로 한번 불러 보자. 이 시는 쉽지요. 지금은 조금 시들어 가는 철인 것 같은데 코스모스라고 하는 꽃은 상당히 연약해요. 바람에 팔랑팔랑 대고, 바람이 불면 꺽이진 않지만 그런데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핀 밭을 이렇게 보면 바람결에 고개를 수그리는 놈도 있는데 안 수그리는 놈도 있어요.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기 뜻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스모스에 무슨 척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인간의 척추의 기능은 뭡니까. 척추의 기능은 구부리고 엎드리는 기능이 아니라는 거죠. 척추의 기능은 꼿꼿이 일으키는 그 기능 쪽이 더 강하다는 거예요. 시 공부를 하고 시인의 어떤 정신 됨됨이 이런 것들을 관심을 갖다 보면 인간의 허리도 구부리는 기능도 있지만 구부리는 기능보다는 펴는 기능, 그쪽이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코스모스 밭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바람결에 휘어지는 놈들도 있지만, 휘어지지 않는 놈들도 있어요. 바로 휘어지지 않는 그 코스모스꽃, 한주먹도 안 되는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는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아주 어렸을 때 생각인데 그걸 이 시에 담아 만든 겁니다. 오늘 여기에는 시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하시면서, 또는 시 쓰는 분들도 계시고 또 아까 보니까 이미 시단에 나온 후배도 계시더라고요. 저는 이런 방법으로 시를 썼습니다.
그 다음에 <수유리시편>, 이걸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수유리시편(水喩里詩篇)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 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太古木)들의 숙연한 전신침묵(全身沈黙)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端坐)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오던 고목들의 출렁거리는 뿌리
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 겨울내내 산중(山中)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시는 수유리, 바로 화계사 밑 한신대학 옆에 살 때 쓴 시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서울 토박이입니다. 그것도 사대문 안쪽인 서대문 네거리 냉천동이죠. 지금 문화일보사가 있는 자리, 농협이 있고, 동양극장이 있었던 바로 거기서 자라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시토박이이긴 하지만 도시적인 감수성 같은 것들이 제 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제 시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도시적 감성이라는 게 없어요. 어떻게 보면 결함처럼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그런가 생각해 봤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유년을 보낸 냉천동 산비탈 양철집 옆에는 감리교 신학대학이 있었고 그 산이 금화산 끝줄기입니다. 그 산은 인왕산 건너편 안산으로 연결되고, 할미꽃도 보고, 칡뿌리도 많이 캐 보고, 제가 접했던 자연은 한주먹도 안 되는 자연이었습니다. 그거밖에 없어요. 제 시에 나오는 자연의 언어들은 소년 시절에 돌아다니며 본 금화산, 안산, 인왕산, 북한산의 자연에서 본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딜런 토마스가 500개 안팎의 언어를 가지고 충분히 일생 동안 시를 썼다는 식으로 시를 쓸 때에 우리가 택하는 언어들이라고 하는 것은 원초적 시어 수십 개 안팎일 것입니다.
<수유리시편>은 화계사 뒤 삼성암으로 오르내리던 때의 겨울풍경을 담담하게 서술한 시입니다. 겨울날 어두컴컴한 새벽에 바위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엄청나게 나이를 먹은 나무들은 안개를 휘감은 채 수도하는 어떤 노승처럼 전신침묵을 하고 있고. 그 추운 겨울날 새벽에 이 무슨 소린지 놋쇠가 짱하고 부딪히는 그런 소리를 내면으로 듣는 거죠. 그런데 그 소리는 얼어붙은 흙위로 근육처럼 불거져 굽이쳐간 뿌리, 그 뿌리둥치에서 들린다는 거죠. 물론 제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거고, 그 추운 날 새벽 아침에 분명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겨울 내 두문불출하고 있는 그 어떤 강철 같은 근육을 향그러운 망치로 치는 소리를. 뭐 이런 시들은 별다른 큰 내용들을 담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 새벽의 산을 청각화하는 울림은 남아 있습니다. 중국 당시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하고 당시 한 수를 제가 소개하면서 대비를 시켜 보겠습니다.
韋應物(764- ?)이란 시인의 <가을밤에 구원외에게>라고 하는 제목의 시입니다. 구원외라고 하는 것은 사람 이름입니다. 성이 구씨니까.
懷君屬秋夜 - 가을도 깊은 밤이라 그대 생각하면서
散步泳朗天 - 외로이 거닐면서 시를 읊네.
空山松子落 - 빈산에 솔방울 떨어지나니
幽人應未眠 - 숨어사는 이 잠 못 이루고 있으리.
이 번역은 김달진옹 번역을 제가 옮겨본 겁니다. 가을밤에 멀리 떨어져 사는, 그대를 생각하며 외로이 거닐면서 시를 읊는다는 내용이죠. 여기까지는 가을밤에 친구 생각하면서 혼자 산책 나가서 시를 혼자 읊조리는 것은 별 큰 내용도 아니죠. 그런데 바로 그 다음 구절입니다. ‘공산송자락’. 그 밤에, 그 고요한 산에 솔방울이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빈산에 솔방울 떨어지나니’ 그 적막을 깨우는 또 하나의 적막한 솔방울 소리. 그런데 그 솔방울 소리를 으며 나만 잠 못 자는 게 아니고 그대 또한 나처럼 잠 못 자고 있으리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대라고 표현하는 그 대상과 시인하고의 거리가 엄청 먼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거리는 솔방울 하나 빈산에 떨어지는 소리 하나로 만나지요. 이 시에서 제가 특히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공산송자락’이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경허선사도 좋아하셨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빈산에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우리 토지문화관도 가을엔 굵은 솔방울 툭툭 떨어지는데, 여기 창작실에 와 있는 문인들이 그 소리 들으면 잠 못 자죠. 그런 소리 잘 듣고 있으면 수지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 쓰는 여러분들, 산책이라고 하는 것도 사유의 일종이에요. 그러니까 산책도 사고의 한 과정이다 그런 말입니다. 하여튼 이런 청각적인 이미지들에 제가 상당히 몰입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뿌리둥치에서 놋쇠소리, 놋쇠끼리 ‘쩡’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로 읽을 시는 <독락당>입니다.
독락당(獨樂堂)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이 시는 불과5행밖에 안되는 단형시이지만, 고일한 정신세계로의 지향을 꾀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삶의 공간으로서 자연을 선택했으며 그것도 지상의 가장 높은 격절공간인 벼랑끝을 선택했다는 점이 특이해 보일 겁니다. 이 독락당이라고 하는 건물은 상상속의 건물입니다. 대월루는 제가 만든 상상속의 부속물이구요. 실제로 경주 안강읍에가보면 조선 중종때의 명현 이언적선생이 서실로 건축해 사용한 독락당건물이 있기는 하지만 개울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벼랑꼭대기에 상상력의 산물인 독락당과 대월루를 노래한 것이지요. 이 시는 간단합니다. 독락당이라고 하는 건물, 조그마한 건물, 달을 쳐다볼 수 있는 그런 누각이 하나 있는 조그마한 그런 정자, 건물 한 채가 벼랑 꼭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로 올라가는 길이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거기 주인이 내려가는 길을 없애버렸기 때문이죠.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을 아주, 없애버렸단 말이죠. 여기서는 부셔버렸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쓸 당시는 저는 북한산 화계사 밑자락에서 다시 불암산과 수락산이 있는 상계동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노시인 한 분을 뵙게 되었지요. 지금은 작고하셨습니다. 김달진 시인이죠. 법구경 번역하시고, 팔만대장경 번역하시고, 평생 불경번역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미당 서정주와 시인부락 동인이었어요. 1920년대 시인부락 동인이었고 해방 후까지 활동을 하시고 해방되고 좌우익 한참 복잡할 때 김동리 선생하고 청년 문학가 동맹을 만들어서 부회장까지 하셨어요.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로 잠깐 계셨는데, 이분이 어느날 갑자기 다 때려치고,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리고서 승려 생활을 하시다가 내려오셨는데 작품 활동도 일체 안 하셨어요. 어디 숨어 살고 계시긴 했는데 어디 계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알고 보니 수유리 자락 조그마한 우거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김달진 시인, 나이가 워낙 많으니까 저희는 옹이라고 불렀습니다만은, 그 당시 김달진 선생님은 살아 계셨는데도 문단 주소록 보면 작고 문인으로 되어 있었어요. 주소가 없어요. 작고하신 문인으로 그냥 취급해버린 거예요.
제가 아까 처음에 얘기할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저는 체질이 횔덜린 같은 그런 시인을 좋아하고 살아 있을 때 작고문인 취급당하고, 그래도 개의치 않는 이런 분들을 좋아했거든요. 제가 만나뵐 때가 일흔아홉이신가 그래요. 선생님을 만나 여름이면 막걸리 대접도 하고 맥주도 사 드리고 그랬지요. 그런데 집에서 한 100미터 이내까지 나오지를 않아요. 전혀 바깥출입을 안 하시니까 살고 계신 데가 암자였지요. 그래서 어디 좀 근사한 데로 모셔서 대접을 할까 그랬는데 기껏해서 오출하시는 곳이 재래시장 있잖습니까. 재래시장 허름한 선술집이 좋다는 거예요. 막걸리를 주전자에 데워 먹는 건 우리 알잖아요. 김달진 선생님은 막걸리도 꼭 데워 드시고 맥주도 끓여서 드세요. (웃음)
하여튼 대단한 득도를 하고 계신 분인데 겉으로는 그냥 아무티도 나지 않는 흔히 만날 수 있는 노인 어른 있잖습니까. 똑같아요. 전혀 뭐 특이한 분이라고 하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뭐 물어보면 ‘다 잊어버렸는데.’ 뭐 이러세요. ‘기억이 안 나.’ 이런 식이죠. 그 당시는 이게 바로 도인 아닌가 그런 생각을 미쳐 못했어요. 뭐하고 계시냐고 여쭤보면 ‘하는 것도 없어.’하시죠.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거 하나는 받아서 쓰십시오.
날이 개어 해가 나고
비가 내려 땅이 젖네
조금도 숨김없이 다 말했거늘
남이 믿지 않을까 다만 두렵네
이 선시를 즐겨 외우시는 겁니다. 장자가 쓴 시였죠. 날이 개니까 해가 나고 비가 오니까 땅이 젖는다. 조금도 숨김없이 다 말했는데 단지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두렵다는 이런 경지. 그분은 이런 경지에 가 계셨어요, 그전까지 횔덜린이나 딜런 토마스나 중국의 당나라 시인들은 책을 통해서 독서 경험으로 만났던 시인들이지만 김달진 옹은 제가 실질적으로 만나고 확인된 시인이었다는 거지요. 김달진 옹을 제가 85년도에 만났는데 89년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4년을 제일 가까이 있었던 시인이 접니다.
87년도 여름이던가 직장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특별면담 대상이라고 해서 병원을 찾았더니 차트를 펴서 보면서 그동안 어떻게 이 지경에서도 회사 나오고 직장 생활 하셨냐고 묻더군요. 이 상태면 이미 병원에 누워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간경화 말기에서 간에 결절 현상이 있다는 거예요. 결절이란 게 뭐냐면 간이 고목나무 가지처럼 굳어 뚝뚝 부러진다는 겁니다. 술은 물론 예전에 많이 먹었습니다. 엄청 먹었어요. 엄청 먹고 다녔는데 간경화가 진행중이라면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두 개의 길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산 속에 들어가서 요양하며 사는 길을 모색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요양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시를 중학교 때부터 써 왔거든요. 시만 썼단 말이에요. 여태까지 시도 제대로 쓰지도 않았는데 죽는다니 억울해서 말이 됩니까. 그래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안 들어가고 시 쓰고 쓰다가 죽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래서 5년 동안 <산정묘지>라고 하는 연작시를 썼어요. 연작 장시죠.
<산정묘지>를 읽을 차롄데, 이 시집은 3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길어요. 한 편이 150행, 100행이 되는 시들이 많고 호흡도 아주 깁니다. <산정묘지>를 쓰는 5년 동안, 제일 먼저 남대문 시장에 가서 미장이 아저씨들이 벽 바를 때 쓰는 조그만 손가방을 5000원을 주고 샀습니다. 시를 쓰는 대로 손가방에 집어넣고 그걸 들고서 회사를 다녔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내가 들고 다니는 시 가방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5년을, 두더쥐처럼 보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시가 구도적인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제 또래의 친구들도 한 둘 췌장암이니 간암이니 세상을 떠났는데 저는 병원에 입원하질 않고 그냥 쓰다 죽는 길을 택했지요. 그러다 보니까 정말 거짓말처럼 지금은 이제 괜찮지요. 시가 인간을 치유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요즘 아트세라피라고 해서 음악요법, 미술요법, 시요법 등 특치요법을 가르치는 대학도 생겨나지 않습니까.
<산정묘지>는 원래 33번까지 썼어요. 33번까지 발표를 했는데 시집으로 묶을 때는 33이라고 하는 숫자가 뭔가 좀 불길한 감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나이예요. 그래서 세 편을 빼고 30편만 실었습니다. 이제 제가 한 번 <산정묘지> 1번을 읽어볼 테니까요. 시에는 어떤 가열찬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려는 화자의 어조가 얼마만큼 힘차게 울리는지, 얼마만큼 힘이 차 있고 강한 주술이 들어 있는지, 내가 나한테 명령하 행말의 어조를 마음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산정 묘지(山頂墓地)·1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의 어조에 힘이 실리면서 첫 번째 <산정묘지> 1번을 쓴 다음에 2번으로 넘어가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못 썼어요. 1년을 허탕을 쳤어요. 허탕을 치고 또 공백기가 생기고 그러다가 이제 2번이 써지면서 다시 10까지 써지고. 그리고 10번부터 계속 써지고 써지고 하는데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문학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시인은 한국시가 아니고 외국시라고 얘길 드렸지 않습니까. 한국시는 외국시에 비해서 대비되는 하나의 차이점 중에서 하나를 얘기한다면 왜소성이에요. 소품적 질서로 갖춰져 있다는 거지요. 저는 그래서 외국시에서 오는 긴 호흡의 장시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산정묘지>에서 시도가 된 것은 우리 서정시의 골격에다 밀도와 힘을 부여하고 호흡이 긴 장시 형태의 가능성입니다. 하여튼 5년 동안을 몰입했는데 짧은 시에서도 역시 충분한, 당찬 힘을 줄 수 있다는 자신도 좀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예시된 <산정묘지> 24번을 보겠습니다.
산정묘지 24
들어오너라, 너! 서슬퍼런 겨울.
내
삭풍을 후려치는 참나무가지 들어
네 못된 사나운 힘 수그려 놓으리라.
서슬 푸른 겨울하고 맞닥뜨리는 참나무가지의 정신 같은 거죠. 참나무가지가 불어오는 삭풍을 후려치는 걸 보십시요. 이 힘은 내가 나한테 준 그런 힘일 수도 있습니다. 저 혼자 제 방법대로 결국 시는, 시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산만큼 밖에 못 써요. 그것도 사실 다 쓰지도 못하고 죽겠지만 혼자 자유롭게, 그러나 홀로. 그런 식으로 저는 앞으로도 시를 더 써 가고,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진행] 장시간 동안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길어져서 혹시 나가시고 싶은 분들은 개별적으로 다녀오시고요. 질문이 있는 분들은 두 분 정도만 받겠습니다.
[질문] 저는 청주에서 온 김정연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시를 쓰시고 완성되기 전에 누구를 보여 주고 그러시나요?
[조정권] 보여 주냐고요? 보여 줄 사람이 없어요.(웃음) 그런데 자기가 쓴 시를 볼 사람은 자기거든요.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렇죠. 보통 써 놓고서 청탁 오지 않고 미리 늘 쓰지요. 써 놓고서 곧바로 잡지사에 보내는 법은 없고요. 서너 달 후에 다시 제가 읽어 보거든요. 그리고 나서 고치지요. 청주에서 오신 분, 대답이 잘 됐는지 몰라도 저는 누구한테 미리 보여 주거나 이러진 못합니다.
[질문] 영혼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걸 어떻게 느끼시는지?
[조정권] 영혼은 마음하고도 틀리고 정신하고도 틀리죠. 그런데 저는 제 식대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 자신이 가장 궁핍하다고 가난하다고 느낄 때, 물질적으로 가난한 게 아니고요, 마음의 가난함, 궁핍함을 느낄 때 그때 뭔가 고여 오는 게 있어요. 그런 게 영혼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런 어떤 가난함, 마음의 어떤 그 뒤에서 뭔가 딸랑 종소리처럼 들리는 조그만 소리 같은 그런 어떤....혹한상태.... 지금은 그렇게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질문] 강의 고맙습니다. 이 시대가 많이 갖고 고민해야 될 화두에 대해서 시인으로서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화두를 어디에 두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조정권] 아까 제가 말씀을 드리는 중간에 비슷한 걸 암시했을 겁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도 시인은 져야 될 것이고, 또 여러 방면의 어떤 그 시대의 시인의 역할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분들이 그런 것은 충분히 해 왔다고 보고 있고요. 저는 그쪽 길로 걸어오지를 않았어요. 그 길을 오지 않고 혼자의 길을 그냥 걸어왔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 길로 혼자 가서 혼자로서 있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