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계보
마 1:1-17
지금은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지만 예전에는 어르신들이 사람의 이름을 물을 때에 꼭 묻는 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시면 이재은입니다. 라고 말하면 무슨 이씨 냐? 고 물으십니다.
경주 이씨입니다.라고 그러면 파는 어디냐? 라고 또 물으십니다.
그러면 국단파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해야 비로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십니다.
예전에 유교가 자리잡던 시절에는 가문과 혈통이 중요해서 양반가문 평민가문 노비가문이 다 정해져 있어서 양반가문은 노비가문과는 결혼도 하기 힘들었지요.
그만큼 족보와 조상이 누구인가가가 참 중요하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보란 쉬운 말로 족보, 조상, 가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족보가 예수님과 그렇게 깊은 연관은 없습니다.
마지막 16절에 보듯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요.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요셉의 피를 직접적으로 이어 받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이 계보는 족보요 주님의 조상들의 가문입니다.
즉 인간이신 예수님은 가문에 속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계보를 통해 예수님도 인간의 한 분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라는 1절과 16절의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유대지파, 다윗왕의 가문은 메시아 그리스도를 탄생시켰기에 감히 거룩한 족보, 거룩한 계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를 신약성서 첫 장에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아마 유대인들은 우리 옛 조상들처럼 가문과 전통을 중요시 여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이스라엘도 그렇고 족보에는 특징이 하나 있지요.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자이름은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남자만 이름에 넣고 여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빼어버립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숫자를 셀 때에에도 여자는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셨다고 하면 그 5천명은 남자만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본문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는 아주 특이하게도 여자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마리아를 빼고 무려 네 명의 여자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사라나 리브가나 라헬처럼 유명하고 덕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생각지도 못한 여자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네 명의 여자들중 세 명이 재혼한 상태인 과부들이고 한 명은 놀랍게도 창녀이기도 합니다. 과부가 셋이요 창녀가 하나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희한하게도 이 거룩한 계보에 들어간 여자들은 뭔가 불결하고 더럽고 정상이 아닌 여인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절의 다말은 남편 엘이 죽자 시아버지 유다와 부정한 관게를 맺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5절의 라합은 기생으로서 여리고 성의 이방여인입니다. 역시 5절의 룻 역시 전 남편 기론이 죽자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땅으로 와서 보아스와 재혼한 모압여인인 이방인과부 입니다.
6절에 보시면 우리야의 아내 역시 우리야를 전장에서 잃고 다윗 왕과 부적절한 관계로 시집 온 과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 들 뭔가 문제가 있고 뭔가 좀 부정한 사람들 같은데, 거룩한 계보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여인들을 숨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드러내 보이지도 않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아니라 그냥 다말이라고 부르고 기생 라합이라고 칭하지 않고 그냥 라합이라고 칭합니다. 암몬여인 룻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룻이라고 부르고 밧세바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칭합니다.
숨기려면 이 여인들의 이름을 아예 안넣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고 이 여인들의 부정함을 드러내려면 더 정확하게 앞에 뭘 붙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여인이고 부정한 사람이고 죄인이고 간에 새롭게 변화되면 거룩한 계보에 들어올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거룩한 계보에 들어간 여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앙의 여인,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시아버지를 꼬드기고, 과거가 창녀고 이방인이고 왕에게 억울하게 남편을 빼앗겨도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과 과거를 극복했기에 거룩한 계보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탈 많고 부정한 여인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계보에 들어간 여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악착같이 끈질긴 믿음입니다.
3절에 보시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라고 말씀합니다.
다 아시는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사건입니다.
유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다말은 첫 번 째 며느리입니다.
다말의 남편 엘이 죽자 유대법에 의하여 둘째 아들과 다말이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 오난도 다말과 결혼하자마자 죽어버립니다.
동양법으로 표현하자면 이 다말이 기가 센 여자인지 유다의 아들 둘이나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유다는 겁이 나서 다말에게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합니다.
원래는 셋째 아들도 다말에게 줘야 하는데 셋째 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그냥 보내어 버립니다.
그런데 다말은 희한한 방법을 써서 유다와 직접 관계를 맺고 본문3절에 나오듯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다말도 조금 이해가 안되지요?
친정으로 쫓겨나갔으면 그냥 아무나 다른 남자랑 재혼해서 행복하게 오순도순하게 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유다의 가문에 집착을 하는 것이었을까요?
여기에 바로 다말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거룩한 계보의 가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영감으로 알았습니다.
이 유다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나중에는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것을 다말은 믿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유다가문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은 모진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가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비록 다말이 한 일은 인간적으로 부정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유다는 다말을 다시 자기 가문으로 받아들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는 나보다 더 의롭구나” 창 38:26
비록 다말이 부정하게 보일지라도 그 악착같은 믿음, 어떻게 해서라도 거룩한 계보에 들어오고 싶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믿음을 보고 “그녀는 옳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계보에 들어가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유다가 셋째를 안 준다고 해서 그래 그 거룩한 계보가 뭐이 중요하다고 별 것도 아니면서.. 하면서 금방 포기하고 토라집니까?
우리는 이 다말의 악착같고 모진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거룩한 계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이든 하겠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룩한 게보에 들어가겠다 하는 끈질기고 모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그 어떤 죄인도 회개하면 용서함 받고 거룩한 계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5절 첫 구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
여기서 생략된 말이 있지요. 여호수아서를 보시면 기생라합입니다.
좋은 말로 기생이지 몸 파는 창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라합도 살몬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고 여리고성을 버리고 이스라엘에게 투항하여 완전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겨룩한 계보에 올라 간 것입니다.
내 과거가 너무 더럽고 죄책감이 너무 많아서 난 안돼!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창녀도 기생도 거룩한 게보에 들어갔는데, 그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가망이 없겠습니까?
누구든지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면 그 어떤 사람도 거룩한 게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3.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믿음입니다.
5절에 보시면 “보아스는 룻에게서 ”
룻은 구약의 룻기에서 잘 설명해 주듯이 100% 이방여인인 모압여인입니다.
역시 남편인 기론이 죽자 시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직 젊으니 좋은 남자를 새로 만나서 잘 살아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룻은 거꾸로 시어머니를 혼자 놔둘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아무 연고도 없는 시어머니의 고향에까지 따라와서 시어머니를 혼자 모십니다.
남편의 동생도 없고, 시어머니도 늙어서 아들도 더 이상 낳기 힘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황을 택하며 룻은 오히려 말 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시어머니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먹여살리기 위해 젊은 과부로서 열심히 일합니다.
여자니까 일도 할 수 없어서 겨우 남이 농사하고 남은 이삭줍기를 해서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룻기에 보면 룻이 얼마나 성실한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땡볕에 하루 종일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으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합니다.
그 성실하고 희생어린 모습을 보고 그 밭의 주인이 감동을 합니다. 그 밭주인이 누굽니까?
비러 다윗왕의 증조할아버지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와 결혼한 이방여인 룻은 이렇게 자기희생과 100%남을 위한 삶을 살았길래 거룩한 계보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이름 없이 묵묵히 인내하며 순중하며 침묵하는 믿음입니다.
6절에 보시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말씀합니다.
마태가 얼마나 다윗왕이 한 행위가 부끄러워으면 밧세바라는 여인의 이름을 빼고 그냥 우리야의 아내라고 했을까요? 거꾸로 우리야의 아내라고 함으로 다윗왕의 잘못을 드러내 놓기도 하는 이중적 표현입니다.
다윗의 아내 밧세바를 이 마태처럼 잘 표현한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이름도 없는 여인, 자기 남편을 잃고 빼앗기기 했다시피 해서 강제로 시집가여야 했던 억울한 인생.
그러나 밧세바는 아무런 불평도 저항도 항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의 기술방법처럼 이름 없는 여인처럼, 그저 조용히 묵묵히 다윗왕의 부정한 방법도 감싸주었으며 솔로몬을 낳아주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는 강제결혼을 당했지만 묵묵히 조용히 자기에게 닥친 환난과 어려움을 감당하고 불평이나 원망 하나 없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절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조용히 순종하며 희생하는 이런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그녀 역시 거룩한 계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다윗왕은 그냥 솔로몬을 낳고, 이렇게 쓰면 될 것을 괜히 우리야의 아내를 덧붙입니다.
이 우리야의 아내도 거룩한 계보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인생이 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무수히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도 불평하나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순종하며 자기희생의 삶을 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거룩한 계보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불행도 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조용히 자기의 길만 걸어가는 사람이야 말로 거룩한 게보에 들어갈 영광을 얻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네 명의 여인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도 이 거룩한 계보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가 하는 각성을 받습니다.
다말같은 악착같고 끈질긴 믿음, 기생라합처럼 회개하고 청산하고 새로운 이스라엘백성이 되어 사는 믿음, 룻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한 믿음, 끝으로 이름조차 없는 우리야의 아내처럼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나의 사명을 다하는 믿음.
이런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거룩한 게보에 다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