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연습날 이야기
1.
새날 교회. 9월 6일 화요일.
7시 20분 경 새날 교회 교육실로 들어서니 지휘자님과 김정곤님, 김미경 총무님과 또 다른 한 여인이 진작 와 있었던 모양으로 지휘자님과 김정곤님은 스무 개 가량의 파일에 복사한 악보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총무님과 다른 한 여인께서는 접시에 과자와 과일을 담고 있었다. 고마운 일! 마음속으로 합장!
고호석 김광돈 김영웅 김정곤 김종세 김태림 김해창 박신열 박 철 백영제 신수현 안하원 윤지형 이정석 이창우 하재훈 이민환 김미경
18명이 모였다. 너무나 반갑게도 네 명의 새 인물도 등장하셨지만 박종철 합창단은 아직 배가 고프다. 테너1, 테너2, 바리톤, 베이스 네 파트 마다 6~7명은 되어야 한다. 아무튼 새 인물 중 경성대 교수로 탈핵을 비롯한 부산 지역 시민운동 지대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해창님은 왜 진작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는가고, 그랬다면 첫 모임 때부터 왔을 것이라고 일갈하여 좌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김해창 단원은 내가 알기로 노래를 좋아하고 또 매우 잘 한다. 기타 공연도 즐겨한다고도 했었다. 김태림 님도 노래패 출신이라고 했다. 만세! 노래 연습에 들어가기 전 백단장님은 한 가지 안건을 제출했다.
"10월 16일(일) 부마항쟁 37주년 행사에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가능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단 단원님들께 알려는 드립니다. 어떻게 할까요?" 언제나 신중하신 단장님의 말씀에 모두들, “아니되옵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린 아직 연습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걸음마하는 아이가 마음을 낸다고 곧장 달릴 수는 없는 노릇! 우리는 내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 30주기에 즈음한 부산 민주 공원에서의 공연을 향해 일로매진할 뿐이다.
2.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주제곡 중 하나인 <민중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휘자께서 <님을 위한 행진곡>에 이어 우리에게 제시한 연습곡이다. 다들 영화도 이미 봤고 노래 또한 여러 번 즐겨 듣고 또 따라도 해 봤다는 것은 처음 주 멜로디로 노래를 같이 부를 때 금방 드러났다.
잔혹한 지배 권력이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핍박하는 시대엔 그 모순된 상황을 뒤집어엎는 혁명을 향한 뜨겁고 순정한 피가 요동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들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레미제라블>에서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내도록 결정한 자리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바 있는 국민의회의 한 의원 G와 장발장의 은인이자 스승이며 예수의 화신이라 할 미리엘 주교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G : 루이 16세 대해서는 --나는 그 사형에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지 않소. 그러나 나는 악을 근절시킬 의무가 내게 있다고 느끼고 있었소.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었소. (중략) 나는 우애와 화합과 여명에 찬성했던 것이오. (중략)
주교 : 당신네들은 파괴했습니다. 파괴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분노가 얽힌 파괴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G : 정의에는 분노가 있는 법이오. 그리고 올바른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입니다. 그야 어떻든 그리고 누가 뭐라 하든, 프랑스 대혁명은 그리스도 탄생 이래 인류의 가장 힘찬 한 걸음이었소. 불완전할지는 모르지요. 그러나 숭고한 것이었소. 대혁명은 사회의 비천한 사람들을 해방시켰소. (중략)
주교 : 재판관은 정의의 이름 아래 말하고, 사제는 연민의 이름 아래 합니다. 그리고 연민은 한결 높은 정의, 바로 그것이오. (중략)
G : 그렇소. 진보의 포학행위를 혁명이라고 부르오. 그것이 끝나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지요. 인류는 곤욕을 겪었다, 그러나 진보했음을.
주교 : 진보는 주님에 대한 믿음 아래 이루어지는 게 아니면 안 됩니다. 선(善)은 믿음없는 노복을 가질 수 없는 것이오. 무신론자는 인류의 나쁜 지도자입니다.
민중의 대표자였던 노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중략) 눈길을 하늘 깊숙이 파묻으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그대여! 오, 이상이여! 그대만이 홀로 존재하도다!”
신의 다른 이름을 진리라고 했을 때 사제와 혁명가가 마음으로 만난 지점은 바로 그 진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리! 그런데, 진리란 무엇이오? 예수에게 빌라도 총독은 물은 바 있고 붓다에게 살인마 앙굴리마라도 물은 바 있다. 빌라도 총독은 제 갈 길로 갔지만 앙굴리마라는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은 총칼을 들고서 목청껏 노래했었다.
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이 다가왔다.
우릴 치려고, 저 독재자는
살육의 깃발을 올렸다
살육의 깃발을 올렸다
들리는가, 저 들판에서
짖어대는 흉악한 군인들이
우리 턱 밑까지 왔다
그대들 처자식의 목을 노리고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정렬하라
전진, 전진!
저들의 더러운 피로
밭고랑을 적시게 하자!
<라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1절
혁명의 시대는, 아마도, 갔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저 혁명의 정신까지 이 지상에서 스러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합창단은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9월 25일) 오후 2시경 농민 운동가 백남기 선생은 서울대 병원에서 끝내 운명했다.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지 317일 동안 정권의 그 누구도 책임은커녕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내 귀로 ‘라마르세에즈’가 다시금 쿵쾅거리며 들려온다.
3.
단 5분의 휴식도 없이 강행된(!) 두 시간의 연습이 끝나자 우리는 '제반활동'을 위해 동네 술집으로 향했다. 지난 번 갔던 꼬지집인데 안주도 분위기도 별로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 힘들어서 다시 간 것이다. 쩝! 다음엔 다른 곳을 꼭 물색해야 한다고 내심 다짐도 하는 건 나 뿐 만은 아닐 듯! 아무튼 삼삼오오로 자리를 잡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건데, 그래도 다들 11시 52분 지하철 막차 시간은 넘기지 않겠다는 이성적 판단은 분명했고 지하철 팀은 막차 바로 전 차를 탈 수 있었다.
그 밤의 지하철 안에서 '수현 C', 그러니까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에도 열성적인 신수현 단원에 대해 내가 한 가지 알게 된 건 이렇다. 그가 타고 다니는 전동휠체어의 별명은 애마. 사랑하는 말이란 뜻이기도 하고 애환이 많은 말이라는 뜻이기도 하단다. 평균 시속 10km로 달리는 그 애마를 타고 그는 제주도를 일주한 적이 있었다. 4일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자정이 넘은 시각 수영역에서 내려 2km 남짓한 거리의 집까지 가는 건 어쩌면 식은 죽 먹기 쯤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상하기도 힘들 온갖 애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 부근에 위치한 ‘노들’(노란들판) 장애인 야학의 교장이자 장애인운동의 한 거목이라 할 박경석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를 만난 날 나는 그와 꼭 밤의 술잔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언제나 껄껄껄 잘 웃는 수현C 단원을 보노라면 자꾸만 그가 생각난다. 술도 마시고 싶어진다. 박 교장 역시 그 장군 같은 풍모에 수현C처럼 애마를 타고 다니는 데 속도는 수현C의 애마에 훨씬 못 미치는 수동 휠체어다. 애마를 탄 지하철 안의 수현C가 입고 있는 조끼 등짝에는 이런 글이 박혀 있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장애등급제, 부양 의무제 폐지
광화문 행동>
장애인보다 더 ‘땅의 사람들’의 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도 따로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두 번째 연습 날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