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레오
비단같은 바다, 보석처럼 박힌 분재 같은 섬들이 한폭의 동양화를 만들어내는 다도해.
그 살아있는 화폭위를 쾌속선으로 미끄러져 2시간여를 가면 남해의 빛나는 보석 거문도가 눈앞에 스크린처럼 나타난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약 26Km 떨어진 백도.
온갖 형상의 바위가 코발트색 맑은 물위에 수정을 박아놓은 듯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모습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깍아지른 절벽, 그 모습들이 천태만상으로 변화 무쌍하여 장엄한 선경의 극치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매바위, 서방바위 각시바위, 형제바위, 석불바위 등에 얽힌 갖가지 전설이 가득한 곳이다.
백도에는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30여종의 조류들과 풍란, 석곡, 눈향나무, 동백, 후박나무 등 아열대 식물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353종의 식물 분포와 연평군 수온이 16.3℃로 큰붉은 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종의 해양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어 수중의 경관은 극치를 이룬다.
백도의 전설
태초에 옥황상제 아들이 노여움을 받아 귀양을 왔다. 그는 용왕의 딸과 눈이 맞아 바다에서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옥황상제는 수년 후 아들이 몹시 보고 싶어서 아들을 데리러 신하를 백명이나 보냈으나, 신하들 마져 돌아오지 않았다.
옥황상제는 화가나서 아들과 신하들을 벌을 주어 돌로 변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크고 작은 섬인 백도가 되었다고한다.
또한 섬이 백개정도여서 백도라 하였는데, 섬을 헤아려 본 바 "일백 百"에서 한 섬이 모자라 "한 一"을 빼고 보니 "흰 白"자가 되어 白島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8개의 유인도와 104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거문도와 백도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14.7km 떨어져 있는 다도 해상국립공원인 거문도를 찾아가는 뱃길은 섬 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거문도는 고도·동도·서도와 삼부도·백도군도를 포함한 섬을 말한다.
거문도의 본섬인 동도·서도·고도 등 세개의 섬은 바다 가운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천연적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돼 있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구구실을 한다. 때문에 거문도항은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 왔고, 현재는 남해의 어업기지로서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있다.
영국군묘지 British Nary Cemetery
고종 22년(1885)부터 1887년까지 약 23개월에 걸쳐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던 ‘거문도 사건’ 과정에서 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군의 묘지이다. 당시 영국군의 철군 결과를 확인하고자 거문도에 내려온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보고에 의하면 사망자 묘지는 총 9기 였으나 현재는 3기만 남아있다. 서구식 비문에는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는다. 월리암, J.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로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는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유림해수욕장 Yurim Beach
바깥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깨끗한 물과 넓은 모래사장등 섬 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해수욕장이다. 삼호교의 개통으로 거문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며 식수, 화장실 등 기본 시설이 완료된 상태이다. 텐트를 칠 수 있는 텐트동과 샤워장, 등대로 연결되는 산책로 등은 이곳의 풍미를 더해준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붐비지 않는 조용하고 편안한 여름 휴가지로 추천된다.
거문도에서 1시간 남짓 물길을 가르면 다다를 수 있는 백도는 남해의 절경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꼽을 만한 명승지로, 다도해 여행 중 한 번은 들러 가야 하는 '신비의 섬'이다. 거문도 동쪽28㎞ 해상에 3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무인 군도 백도는 북쪽에 위치한 섬들을 상백도, 남쪽에 위치한 섬들을 하백도라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도(白島)라는 이름은 일찍이 섬의 봉우리가 백(百) 개에서 하나(一)가 모자라 흰 백자를 섰다는 설과, 멀리서 바라보면 섬 전체가 흰빛을 띠고 있는 형상에서 백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거문도는 일찍부터 문장과 학문이 탁월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거문도 서도의 수월산 아래 바다 속에 길이 30m 가량의 남근형 바위가 있어서 대유학자가 태어났다고 하며, 이 바위를 "문필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 섬에 들어와 김유라는 대학자와 필담을 나누다가 그의 문장력에 탄복하여 거문도라 이름지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이곳은 동양 최대의 거문도 등대,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수월산의 동백나무숲, 남해안 최고의 절경에 속하는 백도 등 아름다운 관광지와 영국군 묘지,조선시대 유학자로 유명하였던 귤은 김유를 기리는 거문사, 그리고 유학자 만해 김양록을 기리는 서산사 등의 역사 유적이 있다. 또한 서도의 수월산 남쪽 끝에는 1905년 4월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거문도등대가 있다.
거문도 주변의 해역은 고기떼가 훤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으며, 특히 성어기에는 각지에서 고기잡이배들이 몰려와 불야성을 이룬다. 거문도와 그 주변 섬들은 갯바위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름철이면 해수욕과 함께 낚시를 즐기려는 외지인들도 많다.
거문도와 인접한 손죽도에는 16세기 초, 왜구와의 해전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 등을 비롯해 역사유적이 많다.
여수여객선 터미널에서 1일 2회 운항 (2시간 10분 소요)
※(주)청해진해운 061-663-2191, 바다고속해운 061-662-1144
※ 현지사정에 따라 변화가 심하므로 사전문의 필수
섬내교통
거문도에는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주민들의 주된 교통 수단도 오토바이와 자전거이다.
섬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섬 일주 유람선을 이용하거나 도보로 관광해야 한다.
거문항에서 백도행과 거문도등 대행 수시 출항.
백도 유람 왕복 1인 22,000원
청해진해운, 바다고속해운
고도와 서도, 동도 간은 7월말부터 8월 초 피서철에 한해 주민들의 배로 이용할 수 있다. (운임비 1,000∼2,000원)
문의 및 안내 :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사무소(061-666-8044)
정보제공자 : 여수시청 관광진흥과
전 화 : 061-690-2037
거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삼호교가 가로지르는 항구주변 풍광과 거문도 등대로 오로는 길에 있는 동백숲. 그리고 유림해수욕장이다.
볼거리 거문도에서는 환상적인 일출광경을 볼 수 있다.삼호교를 건너서 들아가는 고도의 삼산이 바로 그곳. 볼거리 서도리 등대와 마주 보이는 곳에 삼호팔경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곡명사 해수욕장이 있다. 까만 몽돌로 덮여있는 숨은 해변중 하나. 사진 찍기 좋은 곳 거문항 언덕위에서 삼호교를 배경삼아서 삼호교아래로 어선 한 두 척이 지나가는 모습이 한폭의 수채화다. 또한 항구너머로 지는 일몰은 보기 드문 절경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림해수욕장은 거문리에서 삼호교를 건너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초입에 있다. 고운 모래가 깔린데다 계단식 입구가 마련되어 있어 아이들도 안전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식수와 샤워장, 화장실 시설도 완비되어 있어 부담 없이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거문도 2년간 점령한 외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영국군 묘지.
1885년 (고종 22년) 4월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선단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기지와 항구를 구축하면서 2년간 머물렀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무시하는 도발행위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과는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철수 당시 영국군 묘지는 7∼9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3기만이 확인될 뿐이다. 남아 있는 묘지 2기는 거문도 뒤편 산령에 자리잡고 있다.
낚시터로 인기 좋은 삼부도·대삼부도
거문도와 백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삼부도와 대삼부도는 낚시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높다.
숙박 및 편의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무인도이지만 섬에 올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고, 참돔과 돌돔 등 대어를 낚기에 좋은 낚시 포인트. 거문항에서 출발하는 일반 배편은 없으며, 거문항 내에 위치한 낚시 대여점에 문의하면 배편과 식사를 마련해 준다.
백도의 전설
태초에 옥황상제 아들이 노여움을 받아 귀양을 왔다. 그는 용왕의 딸과 눈이 맞아 바다에서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옥황상제는 수년 후 아들이 몹시 보고 싶어서 아들을 데리러 신하를 백명이나 보냈으나, 신하들 마져 돌아오지 않았다.
옥황상제는 화가나서 아들과 신하들을 벌을 주어 돌로 변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크고 작은 섬인 백도가 되었다고한다.
또한 섬이 백개정도여서 백도라 하였는데, 섬을 헤아려 본 바 "일백 百"에서 한 섬이 모자라 "한 一"을 빼고 보니 "흰 白"자가 되어 白島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쪽빛 비단이 넓게 깔린 스크린에 여린 봄바람이 일 듯, 찰랑대는 바다.
덜 영근 아침 햇살 비친 섬 들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아름답습니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다도해, 미끄러지듯 섬 사이를 항해하는 배가 가까워 질 때마다 작은 섬 들은 신부의 나신처럼 물안개를 걷고 다가섭니다.
100년 역사의 등대가 있고, 영국군들의 묘지가 있으며, 산에는 진초록 동백숲이 들어차 있고, 나무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꽃망울이 가득 매달려 있는 거문도.
천연적 자연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는 곳을 ‘도내해(만내)’라고 하는데, 깃을 세운 파도도 내항에만 들어서면 숨을 죽일 만큼 항상 바다가 잔잔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일본등 열강이 탐냈던 천혜의 항구.
산세는 3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항만을 형성하는 안쪽으로 경사도가 완만하여 6개의 부락을 이루고, 항구의 뒤쪽으로는 깍아 지른 듯한 단애(斷崖)로 대개가 형성되어, 이두지점의 경계선인 산 능선을 따라 음달산에서 거문도등대 까지 단장된 산행로는 아열대의 산림욕을 만끽할수 있는 국내 최고의 섬 산행코스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백도유람 = 자연이 빚은 천혜의 비경
백도는 거문도항에서 쾌속 유람선을 타고 30분정도 가면 다다를 수 있다. 이곳은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유람선을 타면 8자형의 코스로 한 시간 가량 백도의 기암괴석과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쪽빛 바다와 어울려 상백도와 하백도를 포함해 39개의 무인군도로 이뤄진 백도는 오전, 오후, 흐린날, 화창한 날, 시시각각 천태만상으로 변한다. 백도야말로 억만년 세월동안 세찬 풍파에 의해 자연이 깍아 놓은 신의 역작이자 환상의 섬이다.
상백도에는 형태가 병풍같이 생겼다하여 이름 붙여진 병풍바위, 옥황상제가 연락을 취하던 나루섬 하늘에서 내려온 신하형제가 숨어있는 형제바위, 먹을 양식을 쌓아 놓았다는 노적섬, 옥황상제의 아들이 풍류를 즐기고 새를 낚아채려다가 돌로 변했다는 매 바위, 신하가 내려올 때 쓰고 왔다는 갓 모양의 탕건여 등 수많은 이름의 바위가 있다. 백도 유람은 하백도가 백미인데 하백도에는 옥황상제의 아들이 바위로 변했다는 서방바위(남근바위), 용왕의 딸이 바위로 변했다는 각시바위, 그들의 패물상자였다는 보석 바위, 그들이 궁성을 쌓고 지냈다는 궁성 바위, 돌부처처럼 우뚝 솟아 있는 석불 바위, 신하가 내려올 때 가지고 왔다는 도끼여 보는 위치에 따라 변하는 요술바위, 촛대바위, 쌍돗대바위, 원숭이바위, 감투바위, 거북바위, 진돗개바위 등이 있다. 바위들은 마치 건장한 남성의 근육질처럼 그 질감이 단단하고 섬세해서 백도를 흔히 남성적 매력을 가진 섬이라고도 표현한다.
백도는 아무리 가 보아도 그 신비로움은 더해져만 간다.
거문도는 계절마다 비경의 특색이 보장되는 곳이지만 특히 초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터널을 이룬 동백꽃길이 일품이다.
동백은 지는 모습이 필 때보다 더 아름다운 유일한 정절의 꽃. 시들며 이지러져 인생무상의 서글품 마저 느끼게 하는 다른 꽃과는 달리 뒷모습이 아름답다.
그래서 옛 부터 혹자는 '선비의 꽃'으로 부르기도 했다.
화려하게 벌어진 붉은 꽃송이가 그 모양새 그대로 '툭'하고 떨어지면 사뿐히 즈려밟기 조차 부담스럽다.
섬 전체 수종의 80%가 동백인 거문도(巨文島)가 예년과 달리 이른 시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 섬 전체를 붉게 달구기 시작한 동백꽃 때문이다.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서 거문도는 동백의 일렁이는 쪽빛 물결과 단아한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져 남국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다.
이곳에도 모름지기 산꾼들을 위한 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산행은 거문도여객선터미널~삼호교~삼호교 갈림길~덕촌리 바자끝 갈림길~불탄봉(197m)~잇단 동백숲터널~갈림길~전망대절벽~갈림길~촛대바위~기와집몰랑~신선바위~보로봉(전수월산·170m)~360계단~목넘어(무넹이, 수월목)~동백숲길~등대 앞~목넘어~유림해수욕장~삼호교~여객선터미널
산행은 여객선터미널이 위치한 고도에서 출발, 서도를 향해 삼호교를 건넌다.
갈림길. 왼쪽은 등대 혹은 2시간 반 정도의 짧은 코스 방향. 오른쪽 덕촌리 방향으로 간다.
이정표는 없지만 안내줄이 있어 쉽게 인식할 수 있다. 2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불이 자주 나는 산이라는 불탄봉에 서면 동백숲 너머로 고도와 동도 그리고 초도 손죽도 등 주변 크고 작은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에 따뜻한 날씨 덕에 억새가 한창이다.
황금빛 억새와 빨간 동백의 공존. 이곳 거문도만의 진풍경이다.
일순간 에메랄드빛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감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내 동백터널이 이어지기 때문.
한낮인데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가운데 벌써 꽃송이가 바닥에 흩뿌려져 카키색 낙엽과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룬다.
10분 뒤 갈림길.
진행방향은 왼쪽이지만 오른쪽에는 전망이 빼어난 암릉이 일품.
산자락이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 풍경은 갈 길 바쁜 나그네를 한숨을 돌리게 만든다.
저 멀리 거문도 등대가 가물가물 시야에 들어온다.
곧 촛대바위. 멀리서 보면 그럴듯한데 다가가 보니 주민들이 세워놓은 것이다.
이어지는 길은 편평한 돌로 온돌마루처럼 깔아 놓았다.
우측 신선바위가 보일 무렵 섬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기와집몰랑이 시작된다.
마을이나 바다에서 보면 바위능선이 마치 기와지붕의 용마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주민들로부터 구전되어오고있다.
신선바위도 연이어 만난다.
암릉에서 바다쪽으로 벗어난 해발 115m 높이의 신선바위에 힘겹게 오르면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래될 만큼 9평남짓하고 평평하다.
동백숲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 보로봉 갈림길.
직진하면 곧바로 정상, 우로 가면 등대 방향.
사방이 확 트인 보로봉은 거문도에서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좋은 곳.
거문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방금 지나온 기와집몰랑 등의 윤곽을 어렴풋이 관찰할 수 있다.
불탄봉 억새군락. 동백꽃과 동시에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능선은 365개 돌계단으로 이어지면서 산행은 사실상 끝.
계단 끝은 등대갈림길.왼쪽은 유림해수욕장을 지나 터미널 방향, 오른쪽은 서도와 수월산을 연결하는 갯바위인 목넘어를 지나 등대로 가는 길.
나무데크로 일부 연결된 목넘어는 태풍때 집채만한 파도가 갯바위를 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주민들은 흔히 무넹이 혹은 수월목(水越目)이라 부른다.
등대가 위치한 건너편 수월산도 이와 무관하지만 않다.
등대로 향하는 수월산 동백숲길도 소문대로 일품이다.
또한 이 산행코스는 구한말부터 시작된 열강의 각축장이었음을 입증하는 불단봉 정상의 일본군의 포대와 연이어 항구를 장악하기위해 세웠던 영국군의 포대의 흔적으로 하여금 슬픈 섬 “거문도”의 역사를 읽을 수도 있다.
거문도 영국군묘지는 당초에는 고도의 하늘땀(여객선 터미널 동북쪽 100미터 지점)에 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인에 의해 거문리가 면소재지로 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일제 말엽 2차대전 당시에는 미·영 타도가 높아지자 일본인 무뢰한에 의해 지금 남아 있는 묘비보다 더 큰 서구식 묘비는 박살이 나고 현재 남아있는 서구식 비도 두 동강이 되어 굴어 다녔는데, 해방 이듬해 섬 유지들이 보수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러시아인의 눈에 비친 거문도의 정경과 주민
1854년 4월 4일, 푸차친의 기함 팔라다호는 거문도에 입항했다. 오늘날이면 남의 나라 영토를 마음대로 함대 집결장소로 지정하고 무단입항하는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당시 조선은 너무나 무력했다. 한편 기함 보스트그호는 이미 도착되어 있었고 상해에서 오는 멘시코프송호도 같은 날 팔라다호보다 늦게 도착 했다. 푸차친의 러시아함대는 이로부터 4월 19일까지 모두 11일간 이곳에 체류했다.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인의 한국 땅을 밟은 곳, 그곳이 바로 거문도였다. 이들은 체류하는 동안 섬에 수시로 상륙하기도 하고 섬 주민과 필담으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거문도와 일본인
거문도와 일본의 오도열도와는 직선거리로 치면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다.(거문도 - 부산 123마일, 거무도 - 구주. 오도열도 100마일, 거문도 - 대마도 105마일) 따라서 왜구의 침입이 자심했다는 것은 거리상 그만큼 침입이 용이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임진외란 전후에 대해 국사학적으로 조명된 것 외에 거문도 주민들의 민간차원에 의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약간의 구전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이곳 주민은 노약자만 남고 주민들은 뭍으로 피난했다가 임진왜란 후에야 다시 섬으로 돌아와 살 게 되었다고 구전과 기록에 전해지니, 거문도와 일본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거문도에 최초로 정착한 일본인 - 고야마미쓰하사
거문도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일본인은 일본 돗도리현 출신의 토족으로 알려져 있는 고야마미스하사라는 사람이다. 그는 우정가사(해저전선)로서 1940년에 거문도로 들어와 서도 덕촌리 마을에서 기거했으며 주민들과는 유대가 비교적 좋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한국의 선비와도 같이 반드시 정장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고야마라는 사람은 일본 정부의 특수임무를 띤 공작원일 거라고 이 지방 원로들은 말한다.
중-일 항로 중간에 자리한 탓 서구 열강 거문도 탐내
1861년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속의 거문도
거문도 사건 이전부터 거의 40여 년간 수차례에 걸쳐 서양 군함과 상선들이 거문도를 드나들었기에 거문도 사람들은 영국군과 함께 생활한 23개월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병영막사 건립과 항만조성 토목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노동의 대가를 받았고 신기하기만 했던 서양 문화와 스포츠, 의술 등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정구 코트와 당구장이 만들어졌고 거리엔 서양 깡통이 굴러다녔으며 궐련도 흔해져 누구나 입에 물고 다녔을 정도였다. 심지어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영국군을 상대로 한 유곽까지 만들어 영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1854년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을 때는 마을 유지들을 함상으로 초대해 차 대접과 피아노 연주를 한 적도 있었다.
당시 경략사(經略使·조선 후기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기 위해 임시로 둔 벼슬)였던 이원회는 영국군 철수 직후 거문도 주민들에게 영국군 점령 기간의 노고를 위로하려다 “노임과 먹을 것을 주고 일을 시켜 좋았다. 앞으론 거저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 놀란 일도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이원회의 보고를 듣고 “그럼 그 섬을 오래도록 점령하라 할 것을 그랬지? 하지만 국가 체면상 안 될 말씀이외다. 그럼 어디 다른 나라에 주었으면 좋겠는데… . 듣자 하니 미국이 우리나라와 친하겠다고 한다는데 그들에게 주도록 하라”고 지시했으나 “지금 문제가 된 곳을 갖고 싶지 않다”는 미국 공사의 거절로 무산됐다. 한국 근대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문도 사람들의 울릉도 원행(遠行)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거문도는 구릉지가 많고 토양층이 얇으며 바람이 세기 때문에 큰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당연히 집 짓고 배를 건조할 나무가 부족해 이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는데, 가까운 육지나 섬들은 관리자가 있어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거문도 사람들이 찾은 곳이 바로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당시 조정에서 입도(入島)를 금지하던 섬이었는데,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해 왜인(倭人)들이 몰래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제멋대로 어로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항해에 능하고 진취력이 강한 거문도 사람들에겐 울릉도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거문도 사람들은 동남풍과 동한난류를 이용해 울릉도로 향했다. 보름에서 한 달이 걸리는 긴 여정. 출발 전엔 세 말의 콩을 볶아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긴 항해 기간에 키를 잡은 사공의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거문도 사람들은 도착 직후부터 나무를 베어 새 배를 만들었고 여름내 미역을 채집했다. 가을철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말린 고기를 가득 싣고 남하하면서 지나온 경상도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며 귀향했다. 거문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서해로 나가 어로활동과 함께 울릉도의 건어물과 해조류를 서해안 곳곳의 포구에서 팔았다. 이들의 활동범위는 진남포까지 이어졌고, 마포나루와 금강하구에도 들러 생필품과 쌀을 구해왔다.
1890년 임명된 울릉도 초대 도감은 거문도 사람인 오성일
왕의 명(命)을 받고 울릉도를 살피러 갔던 검찰사 이규원이 쓴 ‘울릉도 검찰일기’(1882년 4월30일~5월13일)를 보면, 이규원이 답사기간에 직접 만난 거문도와 초도 사람은 서로 다른 다섯 장소에서 무려 84명이나 됐고, 주로 배를 건조하거나 해초를 채취하고 있었다고 돼 있다. 이규원은 벌목하러 온 한 무리의 왜인들을 만나 필담으로 왜인 78명이 당시 울릉도에 불법 입도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해변 바위산 등성이에서 ‘대일본 제국 송도규곡’이라 쓰인 표목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은 왜인들의 빈번한 울릉도 불법 침입을 우려해 그때까지의 조정 방침을 바꿔 육지 주민들의 울릉도 이주를 장려했으며(울릉도 개척령, 1882년), 배를 건조하되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그리고 울릉도를 관할할 관리인 도감을 임명했는데 초대 도감으로 거문도 서도리 사람인 오성일이 교지를 받기도 했다(고종 27년, 1890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거문도엔 100년도 훨씬 넘은 울릉도 목재(노간주나무·귀목)로 지어진 집과 절구통, 다듬이, 홍두깨 등이 많이 남아 있었다. 또한 거문도 사람들은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울릉도 및 독도 근해 어장에서 오징어 채낚기 작업을 많이 했고, 지금도 서도리 장촌마을에 가면 당시 뱃일을 했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거문도 사람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여전히 다정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