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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上堂)
강의 ; 임제록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그 형식에 맞추어 분류하면 서문(序文)·상당(上堂)·시중(示衆)· 감변(勘辨)·행록(行錄)·탑기(塔記) 이렇게 여섯 종류가 된다. 상당이란 선지식이 특정한 날에 법상에 높이 올라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결제나 해제나 그 외의 의미 있는 날에 총림에서 행해진다. 그르므로 법문의 내용도 가장 격이 높다. 시중이나 만참(晩參), 소참(小參) 같은 경우의 법문은 대종장이 행한 법문이라도 상당법어와는 그 격이 다르다. 법상에 높이 올라가서 법문을 할 때는 상당법문이 되므로 반드시 상당법문답게 종지(宗旨)·종풍(宗風)을 거량해야한다.
1-1 전쟁의 시작
府主王常侍가 與諸官으로 請師陞座하니 師上堂云, 山僧今日에 事不獲已하야 曲順人情하야 方登此座하나 若約祖宗門下하야 稱揚大事인댄 直是開口不得이라 無?措足處니라 山僧此日에 以常侍堅請이니 那隱綱宗이리오 還有作家戰將하야 直下展陣開旗?아 對衆證據看하라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스님께 법상에 오르시기를 청하니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 그런대 산승에게 오늘 왕상시가 간곡히 청하니 어찌 근본종지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이름 난 장군[作家]이 있다면 곧 바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대중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라.”
강의 ; 먼저 글의 단락을 나누고 번호를 붙인 것은 뜻을 더욱 잘 파악하자고 임의로 나눈 것이다. 매 단락마다 담긴 뜻을 요약해서 그 제목을 붙인 것도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길로 흐르게 하지는 않았는가 해서 좀 염려가 된다.
부주는 하북부의 지방장관이다. 우리로 치면 도지사 정도에 해당한다. 상시(常侍)라는 말도 관직의 이름으로서 항상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국사를 의논하는 직책이다. 부주이면서 상시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니 외호(外護)인연으로서는 법을 펴기에 손색이 없다. 자고로 선지식이 한 지역에서 법을 펴는 데는 외호인연뿐만 아니라 토지인연, 납자인연, 단월인연, 도(道)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제스님은 이 왕상시로 해서 당신의 법을 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법이란 언어나 사량으로 표현할 일이 아니다.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님의 본마음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간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좀 흠이 되는 부담을 안고라도 어쩔 수 없이 언어로 거량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마치 굽은 화살로도 원숭이를 쏘아 맞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내가 먼저 무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일대사인연을 거론함에 있어서는 스승도 입을 열 수가 없고 학인도 발붙일 곳이 없다. 더구나 임제록의 안목은 언어도단하고 심행처멸한 자리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라도 혹 이 자리에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어디 한번 나와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그 솜씨를 보여라. 목숨을 걸고 한바탕 겨뤄보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걸 맞는 전쟁의 용어를 써서 법거량을 하고자 한다. 매우 살벌하고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퍽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이었다.
1-2 불교의 대의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這箇師僧이 却堪持論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만하구나.”
강의 ; 청천백일에 천둥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 쓴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계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할”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 “할”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 “할” 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육신통(六神通)이 이 “할”에 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 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할”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임제할, 덕산방이라 하여 임제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 “할”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 “할”과 “방”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 “할”을 하였다.
어느 비구니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스님이 여름 한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스님들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 ‘할’이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임제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 “할”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의 흉내를 낸다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1-3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問, 師唱誰家曲이며 宗風嗣阿誰오 師云, 我在黃檗處하야 三度發問하야 三度被打니라 僧擬議한대 師便喝하고 隨後打云, 不可向虛空裏釘?去也니라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할!”을 하고 뒤이어 내려치며 말하였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강의 ;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의 법을 이었다. 황벽스님은 백장(百丈,749-814)스님의 법을 이었고, 백장스님은 마조(馬祖,709-788)스님의 법을 이었다. 마조스님은 남악(南嶽,677-744)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악스님은 육조혜능(638-713)대사의 법을 이었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라고 하여 자신의 전법내력을 여운이 있고 의미심장하게 밝혔다.
불법(佛法)이니 종풍(宗風)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20대의 몽둥이로 임제를 후려쳤다. 그렇게 간단히 불법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불법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묻고 세 차례나 얻어맞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인 것이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고, 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것이 황벽의 불법이며 또 한 임제의 불법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불법이며, 역대 조사들과 천하 노화상들의 불법인 것이다. 묻고 때리는 이 사실 위에 성성역역(惺惺歷歷)하고 역역고명(歷歷孤明)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밝은 대낮에 여기 이렇게 빨가벗고 춤을 춘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끈이 짧으면 깊은 우물에는 닿을 수 없다. 이렇게 천하 사람들을 모아놓고 불법을 드날리는 것은 명명백백한 근본뿌리가 있고, 금강보검이 있고, 빼어난 솜씨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제대로 된 실력도 없으면서 판을 벌릴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 독화살이 날아와서 명줄을 끊어 놓을지 모르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가 맞다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 이 집안의 진짜 종풍은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 일이다.
1-4 잡초가 무성하다
有座主問, 三乘十二分敎가 豈不是明佛性가 師云, 荒草不曾鋤로다 主云, 佛豈?人也리오 師云, 佛在什?處오 主無語어늘 師云, 對常侍前하야 擬瞞老僧이로다 速退速退하라 妨他別人請問이니라
어떤 좌주[講師]가 물었다.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거친 풀을 두고 호미질을 안했구나.”
다시 좌주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어찌 사람을 속였겠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좌주가 말을 못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상시 앞에서 노승을 속이려 하는구나. 어서 빨리 물러나라. 다른 사람이 묻는 것에 방해된다.”
강의 ; 법석(法席)의 분위기는 이렇게 하여 점입가경으로 달아오른다. 도지사 격인 부주가 주관하여 열리고 있는 이 무차대법회에는 남녀노소와 승속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귀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참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대단히 중요한 법회다. 불교사에 있어서 세존이 성도하시고 처음으로 열린 화엄법회와 같으며, 성도 40년 후 영축산 영산회상의 법회와 다를 바 없다.
요즈음으로 치면 강사격인 좌주가 대뜸 나와서 묻는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속에 당신이 밝히려고 하는 불성이 다 밝혀져 있는데 다시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런 거창한 법회를 열어서 야단법석인가.?”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그런 말을 하는 그 마음이 너무도 황폐해 있다. 불법을 공부한다고는 하였으나 그 영혼은 거친 풀이 무성할 뿐이다. 전혀 정리되지도 않았다.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했을 때 좌주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생생하고 활발발한 산부처님을 보여 주었어야했다. 좌주는 몇 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노승을 속이려 하는구나.”라고 했지만 속이기야 했겠는가. 실력이 그것뿐인 것을. 임제스님은 대중에 대한 기대가 컸든 것이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復云, 此日法筵은 爲一大事故니 更有問話者?아 速致問來하라 ??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何以如此오 不見가 釋尊云, 法離文字며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爲?信不及일새 所以今日葛藤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하야 昧他佛性이니 不如且退니라 喝一喝云,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 久立珍重하라
임제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그대들이 막 입을 열면 일대사와는 벌써 교섭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보지 못했는가.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믿음이 모자라는 까닭에 오늘 이렇게 어지러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왕상시와 여러 관원들을 꽉 막히게 하고 불성을 어둡게 할까 염려된다. 물러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하시며, “할!”을 한 번 하시고는 말했다.
“믿음의 뿌리가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일대사의 일을 마칠 날이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강의 ;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를 밝히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일대사란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실상이요, 제법의 실상이며, 우주와 생명의 실상이다. 그러나 일대사란 무어라고 입을 열면 벌써 틀려버린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법(法)이란, 즉 일대사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수행을 쌓아서 성취하는 물건이 아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간경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행을 하고 6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본래 여여(如如)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모자라는가. 완전무결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또 이러한 이치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처럼 이렇게 갈등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래 아무 일이 없는 이 이치에 대하여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일대사를 마칠 날이 없다. 법회 서두에 불교의 대의를 물었을 때 임제스님은 “할”로써 대답하셨다. 굳이 일대사를 표현하라면 나도 “할”이다.
2 정안(正眼)이란
師因一日에 到河府한대 府主王常侍가 請師陞座하니라 時麻谷出問,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師云,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速道速道하라 麻谷?師下座하고 麻谷却坐하니 師近前云, 不審이로다 麻谷擬議한대 師亦?麻谷下座하고 師却坐라 麻谷便出去어늘 師便下座하니라.
임제스님이 어느 날 하북부에 갔더니 부주 왕상시가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 때에 마곡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그러자 마곡스님이 임제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마곡스님이 대신 법좌에 올라앉았다.
임제스님은 마곡스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니, 마곡스님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임제스님도 또한 마곡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마곡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임제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강의 ;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중에 어느 것이 정안(正眼)인가? 하고 물었는데 임제스님은 똑 같은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관음보살에게는 천수 천안뿐만 아니다. 천 손 만 손 팔만 사천 모다라 손이 있고,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모다라 눈이 있다. 몇 개의 눈이 있든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형식의 법담은 조사스님들에게 자주 보인다. 능엄경에도 있다. 설법제일의 부루나가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겼습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똑같이 “청정본연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는가?”라고 되묻는다.
임제스님과 마곡스님이 천수천안의 질문을 주고받은 것과, 법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주고받은 것과 세존과 부루나가 똑 같은 말로 법담을 주고받은 것을 한데 묶어서 저 삼계(三界)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비록 그것을 부처와 부처의 경계요, 종사와 종사들이 주인과 손을 서로 바꿔가며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무애자재한 경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더라도.
천개의 눈은 그만두고 그대의 한 개의 눈은 어떤가? 이렇게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똑똑히 듣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청정본연하지 않은가? 청정본연하니까 산하대지가 이렇게 있지 않은가?
마곡스님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나, 임제스님이 바로 법좌에서 내려온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정한 정안을 보여준 멋진 마무리라고 하겠다. 두 사람이 합작으로 엮어낸 빼어난 법문이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빈주호환(賓主互換)이라고 한다.
3 무위진인(無位眞人)
上堂云, 赤肉團上에 有一無位眞人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未證據者는 看看하라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고 師下禪牀把住云, 道道하라 其僧擬議한대 師托開云, 無位眞人이 是什?乾屎?고하시고 便歸方丈하다
법상에 오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 임제록에서 한 구절만 택하라면 바로 이 무위진인이다. 불교는 달리 표현하면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를 구가하는 종교다. 그 대자유, 대해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무위진인이 답이다. 여기에는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런대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있고 없고 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다. 차별이 있는 사람은 가짜사람이다. 차별이 없는 사람은 참사람이다[차별 없는 참사람]. 대개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한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값은 백두산 크기의 백 만개만한 다이아몬드의 값보다도 억 만 배 더 나간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 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 소소영영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임제일구 치천금(臨濟一句置千金). 임제록의 이 한 구절의 법문이 천금의 값을 한다. 아니 어찌 천금으로 그 값을 대신하겠는가. 만고에 빼어난 말씀이다.
어느 해(1971년) 겨울철 봉암사에서 서옹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선사는 전쟁을 맞아 원자폭탄으로 일본열도가 불에 탈 때 “일본이 다 타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있으면 된다”라고 하였단다. 필자는 이 한마디로써 일본에 사람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지 않는다. 임제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나는 도반의 절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족자가 하나만 걸려 있으면 그 도반을 달리 본다. 속으로 두려워하면서 더 친해지고 존경하게 된다. 글씨야 졸필이든 말든 관계없다.
4-1 할(喝), 할(喝), 할(喝)
上堂에 有僧出禮拜어늘 師便喝한대 僧云, 老和尙은 莫探頭好로다 師云, ?道하라 落在什?處오 僧便喝하니라 又有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道하라 好喝也無아 僧云, 草賊大敗로다 師云, 過在什?處오 僧云, 再犯不容이로다 師便喝하니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니 한 스님이 나와서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곧 바로 “할”을 하였다.
그 스님이 말했다.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말해 보아라. “할”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
임제스님이 문득 “할”을 하니, 그 스님은 예배를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한번 말해봐.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
그 스님이 말했다.
“초야의 도적[草賊]이 크게 패했습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스님이 말했다.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임제스님이 곧 바로 “할”을 했다.
강의 ; 임제스님은 역시 할이다. 예배를 드려도 할이요. 불교를 물어도 할이다. 나에게서 불교[無位眞人]외에 다른 것은 찾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만나 불법 외에 주고받을 일이 무엇이 또 있겠는가.
호사가들은 할에도 사람을 떠보는 할과 법을 바로 보이는 할과 상대를 제압하는 할 등등을 말한다. 여기 이 스님도 할의 진정한 뜻을 모르므로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그렇다면 할의 낙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보라.”고 하셨다. 그가 곧 바로 “할”로 답한 것은 잘한 일이다.
곧 이어서 또 한 스님이 나와 불교의 대의를 물었다. 임제스님은 또 “할”로 답하셨다. 그 스님은 “할”에 대한 대응을 예배로 했는데, 임제스님은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하니까 이 스님은 임제스님을 초야의 도적으로 몰아놓고 초야의 도적이 크게 패하였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의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라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랬더니 임제스님은 그의 뜻을 받아드려서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선문답에서 말이 딸릴 때 잘 쓰는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고, 임제스님은 역시 “할”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할”도 실은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도(道)를 표현하고, 법(法)을 표현하고, 불교를 표현하고, 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간단명료한 방법이다. 불교는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먼지 하나 붙지 않은 자리다. 이 “할”에 무슨 이론이나 수행이나 깨달음이 붙을 수 있겠는가. 본래로 불교공부란 문자와 이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행하고 증득하고 깨닫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써 으뜸을 삼고 최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4-2 주인과 손님이 분명하다
是日에 兩堂首座相見하고 同時下喝하니 僧問師호대 還有賓主也無아 師云, 賓主歷然이로다 師云, 大衆아 要會臨濟賓主句인댄 問取堂中二首座하라하고 便下座하다
이날은 양당의 두 수좌가 서로 보고 동시에 “할”을 하였다.
어느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그 할에 손님과 주인이 있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손님과 주인이 분명히 있다.”
임제스님이 말하시기를,
“대중들아. 임제의 손님과 주인의 도리[賓主句]를 알고 싶으면 승당의 두 수좌에게 물어 보아라.”하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강의 ; 줄탁동시(?啄同時)의 소식이다. 또한 큰 불구덩이 속에서 솜털을 가지고 노는 일이 생겼다. 이날의 법회는 본래 전당(前堂)과 후당(後堂) 두 선방의 두 수좌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할”을 한데서부터 발단이 되었다. 언제나 주객이 나누어 질 수 없는 혈혈단신, 독보건곤, 유아독존, 한 사람의 무위진인을 표방하는 임제의 깃발이 푸른 하늘에 펄럭이고 있다. 그 깃발아래 대중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기회는 왔다고 생각한 어떤 스님이 두 수좌의 동시 할을 들고 나와 시비를 걸었다. “두 사람의 할에 주객이 따로 있습니까?” 일이 벌어진 상황은 분명히 있어야 하고, 임제의 입장에서는 없어야 하는 처지다. 아니 본분종사의 견해로는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고 대답하면 그 역시 틀리는 말이다. 그런대 임제스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빗나가고 말았다. “주객이 분명히 있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틈을 주지 않고 “임제의 주객이 분명히 있다. 고 한 소식을 알려면 할을 한 당사자인 두 수좌에게 물어 보라.”라고 하였다. 주객이 있다, 없다는 말 대신 주객의 근본을 멀리 날려 보내버렸다. 마치 낚싯대를 늦추어서 잡힌 고기를 살려 주는 듯 하다가 다시 확실하게 잡아당겨 명줄을 끊어 놓는 격이다.
일체 세상사는 모두가 주객이 나누어 진 데서부터 나누어지고, 다시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우주만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계에 끌려 다니게 되면 고향에 돌아올 기약이 없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볼 날이 없다. 임제스님은 그런 사실들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이처럼 상큼하게 해결하였다.
5-1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上堂에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竪起拂子하니라 僧便喝하니 師便打하다 又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亦竪起拂子한대 僧便喝이어늘 師亦喝하니 僧擬議어늘 師便打하니라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벌레를 쫒는 불자(拂子)를 세워들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곧 “할”을 하니, 임제스님이 바로 후려쳤다.
또 다른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또 불자(拂子)를 세워들자, 그 스님도 곧 “할”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또 “할”을 하니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 이 대목에 대해서 함부로 주각을 달거나 설명을 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어차피 모르고 하는 말이니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임제록은 불법의 대의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몸살이 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불법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불교의 대의는 실로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話頭)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천형(天刑)이다. 진정한 불교가 무엇일까? 도(道)가, 진리가, 무엇일까? 인생의 실상은 무엇일까? 하는 이러한 문제의식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다.
한데 여기에 너무나 쉽고 간단한 답이 있다. 사람의 사는 모습 그대로가 불교다. 진리다. 도다. 그 사람 그대로가 불교인데 다시 물으니 무어라고 일러줄 수밖에 없다. 가장 쉽고 간단명료하게 열어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행복하게 하였다[日日是好日].
임제스님은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자비스러운 분이다. 그런대 왜 불교를 어렵게 설명하겠는가. 가장 알아듣기 쉬고 바르게 가르쳐 주는 분이다.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고 그 가르침이 가장 뛰어난 분이다. 그래서 불교역사상 가장 큰 선지식이다. 임제스님 이후에는 모든 조사들과 노화상들과 선지식들이 다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하고 있다. 임제스님의 후손이 아니면 명함을 내지 못한다. 사찰마다 즐비한 비문(碑文)들이 그를 증명한다.
그 간단명료하고 쉽고 바른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늘 앉은 자리 가까이에 두어 먼지도 털고 벌레도 쓸어내는 도구인 불자를 들어 보인 것이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임제에게서는 불자를 들어 보였다. 나는 안경이 늘 가까이 있으니 안경을 들어 보였을 게다.
보여주면 알려는가. 들려주면 알려는가. 때려주면 알려는가. 그래서 불자를 보여도 주고, “할”을 하여 들려도 주고,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몽둥이로 때려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노파심으로 모든 정성을 다 쏟아서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가서 노닐게 해 주었다.
말이 난 김에 불자(拂子)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야기를 해 두고 싶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광엄성(廣嚴城)의 미후지(??池)라는 못 옆에 있는 고각당(高閣堂)에 계셨다. 여러 비구들이 모기와 온갖 벌레들의 침입을 받았다. 상처 난 곳에 붙어서 쏘고 빨아 먹으므로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 말씀드렸더니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모기나 벌레를 떨어내는 도구를 소유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비구들이 떨이게[拂子]를 갖게 되었다. 뒷날 법을 쓰는 도구로도 사용하게 된 것이다.
5-2 다시 한 번 맞고 싶다
師乃云, 大衆아 夫爲法者는 不避喪身失命이니 我二十年에 在黃檗先師處하야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三度蒙他賜杖하야 如蒿枝拂著相似하니라 如今에 更思得一頓棒喫하니 誰人爲我行得고 時有僧出衆云, 某甲行得이니다 師拈棒與他한대 其僧擬接이어늘 師便打하다
그리고 나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대저 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몸과 목숨 잃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20년 전에 황벽스님의 회상에 있을 적에 세 번이나 불법의 확실한 대의[佛法的的大意]를 물었다가 세 번이나 황벽스님의 몽둥이 하사하는 것을 얻어맞았다. 그 때 마치 부드러운 쑥대가지로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한 번 그 몽둥이를 얻어맞고 싶구나. 누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주겠는가?”
그때 한 스님이 대중 가운데에서 나와서 말하였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임제스님은 몽둥이를 건네주려고 하고 그 스님은 받으려고 하는데,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 그 날 법회에서 대중들이 불법의 대의를 물어오자, 옛날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물으려다가 황벽스님에게 몽둥이를 얻어맞은 기억이 나서 말씀하신 것이다.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爲法忘軀]는 말이 있다. 세존의 6년 고행도 그렇다. 선재동자의 구법행각도 그렇다. 설산동자가 법을 위하여 나찰귀신에게 몸을 던진 예가 그렇다. 임제스님은 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몸과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불법을 물으러 갔다가 20방망이씩 세 차례나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런대 법을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치 당시 민속의 하나인 간난 아기에게 잘 성장하기를 축원하는 의식으로 쑥대로써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고 술회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그립다. 누가 나를 위해서 다시한번 그렇게 해 주겠는가?”하고 물었다. 달은 밝고 시원한 바람 부는데 임제스님은 오늘 친 그물에 혹시 고기 한 마리를 건질 수 있을까 해서다. 바로 그때 큼직한 것이 한 마리 걸려들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다. 몽둥이를 건네주려고 하다가 곧바로 후려쳐서 깔끔한 마무리를 했다. 참으로 자비로우시며 자상하시다. 불법대의를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보인 것이다.
6-1 칼날위의 일
上堂에 僧問, 如何是劍刃上事오 師云, 禍事禍事로다 僧擬議한대 師便打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위의 일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 어떤 스님이 칼날위의 일을 물었다. 여기서 칼날위의 일이란 달리 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요량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말한다. 일대사(一大事)며 본분사(本分事)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칼날위의 일”이라고 한 뒤, 대답하라고 하므로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며, 일대사며, 본분사인가? 수행도 붙지 못하는 자리이며, 깨달음도 붙지 못하는 자리인가? 임제스님은 후려쳤지만 나는 “할!”이다.
6-2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問, 祇如石室行者가 踏?忘却移脚은 向什?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한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행자가 방아를 찧다가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니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
강의 ; 석실행자는 청원(靑原)스님의 4세손인 석실선도(善道)스님을 말한다. 당나라 무종(武宗,814-846)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일로 인하여 스님은 속복을 입고 살았다. 그 후 법난이 끝나고 불교가 다시 회복되었으나 석실스님은 늘 속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행자(行者)라고 불리게 되었다.
석실행자는 정진이 순일하여 디딜방아를 찧다가 생각이 끊어져서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특기할만한 일이라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뜻에서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서 죽어버렸다.”라고 했다.
일대사인연을 깊이 참구하다가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그와 같은 무심(無心)의 경지에 든 것도 드문 일이긴 하나 옳은 공부는 아니다. 방아를 찧는 사람이라면 방아를 잘 찧어야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목석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암담하지 않은가. 멀쩡한 사람이 목석이 되다니. 천하의 육조스님도 방아를 찧으며 행자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리를 옮기는 것을 잊은 적은 없었다.
6-3 모두가 착각이다
師乃云, 但有來者하면 不虧欠伊하야 總識伊來處로라 若與?來하면 恰似失却이요 不與?來하면 無繩自縛이니 一切時中에 莫亂斟酌하라 會與不會에 都來是錯이라 分明與?道하야 一任天下人貶剝하노라 久立珍重하라
임제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였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나는 조금도 잘못보지 않는다. 그가 온 곳[견해·공부의 수준]을 모두 안다. 만약 그와 같이[석실행자처럼 되어] 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언제든지 함부로 이리 저리 짐작하지 마라.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래 서 있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강의 ; 앞서 석실행자의 무심이 된 공부에 대하여 평하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석실행자의 그와 같은 공부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다. 불교공부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목석처럼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선시에 “무심(無心)을 도(道)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힌 상태니라[莫言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라고 하였다.
보고 듣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활발발한 무위진인의 삶을 주창하는 임제스님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공부다. 큰 사람 큰 장용이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무너트리는 마당에,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자리에 목석이라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천하 사람들이 다 욕하고 헐뜯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말씀인가.
만약 공부가 석실행자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그리고 안다.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가 죽은 말이다. 앞서서 내가 그 예를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쯤하고 모두들 돌아가 쉬어라.
7 고봉정상과 네거리
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편히 쉬어라.”
강의 ; 말이 있는 것이 옳은가? 말이 없는 것이 옳은가? 길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고 높은 봉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다. 쉽게 풀이하면, 높고 높은 봉우리에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사람과 어디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 있으면서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라는 말이다. 고봉정상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알겠는데 네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꿔 해석하면 사실은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교학에 전간문(全揀門) 전수문(全收門)이라는 것이 있다. 일체를 부정하는 길과 일체를 긍정하는 길이다. 고봉정상은 일체를 부정하는 입장이고, 네거리는 일체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공(空)과 유(有)의 경우다. 공이든 유든 모두가 치우친 견해다. 변견(邊見)이며 편견이다. 그래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도가 아니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불교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길이 아니다. 둘 다 틀린 것이다. 거기서 더 나은 사람을 묻는 것은 장난이다. 덫이다.
유마대사는 유마경에서 불이(不二)법문을 말이 없음으로 표현하여 문수보살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말이 없음[杜口]으로써 그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전간문의 삶이다.
그러나 부대사(傅大士,497-569)는 그와 반대의 입장이다. 설법을 많이 한 분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왕궁에도 출입하며 법을 설했다. 저서도 있다. 남달리 전법활동을 많이 하여 다 수용하면서 살았다. 그는 전수문의 삶이다.
임제스님은 경고한다.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하지만 임제스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면 왈, “유마힐도 되고 부대사도 되거라.” 임제스님은 쌍차(雙遮)로 보이고, 필자는 쌍조(雙照)로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사(遮照同時)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독자들은 알아듣기 쉬울지 모르나 여운이 없다. 역시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끝나야 한다.
8. 집안과 길거리
上堂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되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離家舍호되 不在途中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앞에서는 치우친 견해를 들추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이면으로는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보다 조화로운 경우를 말하고 있으나 실은 앞의 사람은 전수문(全受門)의 삶이고, 뒤의 사람은 전간문(全揀門)의 삶이다. 긍정과 부정의 관계다.
본문을 달리 표현하면, 예컨대 한 사람은 언제나 바깥에 있으면서 집안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집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경우가 실은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 이(理)와 사(事)의 두 면을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잘 처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다 치고, 이와 사 어느 것도 관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사를 한 가지도 관계하지 않는 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할까? 실은 이와 사에 있어서 어느 면에서도 그와 같이 물들고 집착하지 않은 자세[中道]가 되어야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들의 설법원칙인 중도(中道)에 기준하여 해석한 것이다.
본래 이 내용의 원형은 이렇다. 문수는 언제나 집안일[理·智]을 담당하지만 바깥일[事·行]에도 어둡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바깥일을 담당하지만 집안일에도 어둡지 않다. 좌와 우, 아내와 남편, 이판과 사판, 국민과 정치인, 동양과 서양, 물질과 정신 등등 모든 상대적인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中道]를 뜻한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부처님이라고 할 때 그를 문수와 보현의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9-1 삼구(三句)
上堂에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師云 三要印開朱點窄[側]하고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묘해[문수]가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 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를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무대 위의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강의 ; 이 삼구법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구구하다. 우선 임제스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구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면 구구한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일구(第一句)[제일의 소식, 제일의 도리]는, 여기에 삼요라는 도장[제대로 갖춘 진리의 도장. 제법실상의 도장]이 하나 있다. 그 도장을 찍었을 때 아직 찍은 도장이 종이에서 떨어지기 직전이라 붉은 글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관에 해당되는 도장과 객관에 해당되는 붉은 글씨가 아직 나눠지기 전이다. “주객이 나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이전 소식이다. 음양이전의 태극이나 무극의 경지라고 보면 쉽다. 그러나 무극이나 태극 송에는 이미 음과 양이 잠재되어 있다. 주객이 나눠지기 전에도 주객은 이미 잠재되어 있기는 하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一念不生]의 소식이다. 무생(無生)의 경지다. 마치 도장을 허공에다 찍은 것과 같다 라고도 표현한다. 한 순간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본래 그대로 여여한 자리다.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성인이니, 범부니, 중생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소리가 아이들의 동화처럼 들리는 경지다. 그래서 제일구의 소식을 알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된다고도 했다. 또 조사선(祖師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이구(第二句)[제이의 소식, 제이의 도리]는, 무착선사가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장안에서 오대산까지 일보 일배(一步一拜)를 하면서 정성을 다해 갔다. 오대산 입구에서 한 거지노인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 벽암록 35칙에도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의 사실여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불교에는 거의가 뜻을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알면 그뿐이다.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교는 어떤가?”
“말세의 비구들이 계율이나 조금 지키며 삽니다.”
“대중들은 얼마나 되는가?”
“혹 3백 명, 혹 5백 명씩 모여 삽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문수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불교가 어떻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이느니라.”
“대중들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니라.”
문수보살이 무착의 그와 같이 답지 못한 질문을 받고 방편으로 일일이 대화를 받아 준 것은 무착선사 같은 그 정성스런 근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객이 나눠지긴 했으나 그렇게 흔적이 오래 남진 않았다. 제이구의 경지를 “물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찍을 때는 찍히는 것이 있으나 도장을 떼면 흔적이 없다. 허공에다 찍은 것과 비교해보라. 또 제이구의 소식을 알면 세상 사람들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여래선(如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삼구(第三句)[제삼의 소식, 제삼의 도리]는, 꼭두각시나 인형을 움직일 때 잘 보면 모두가 무대 뒤에서 사람이 조종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인형으로 된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다. 허수아비다. 사상(事相)과 경계와 사항들에 끌려 다니는 삶이다. 불교라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수처작주, 즉 환경이나 대상이나 경계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어디서나 주제자로 있으라는 가르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경지다. 마치 도장을 진흙에다 찍은 것과 같다. 걸음걸음이 상(相) 투성이요. 흔적 투성이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물에다 찍은 것과 함께 비교해 보라. 제삼구의 뜻은 알아봐야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리선(義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삼구를 경절문(徑截門)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에 비교해 보아도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삼구, 이구, 일구의 차원과는 멀리 벗어난 향상일구(向上一句)가 있다. 무엇이 향상일구인가? “할!”
9-2 삼현삼요(三玄三要)
師又云,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一玄門에 須具三要니 有權有用이라 汝等諸人은 作?生會오 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또 말씀 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어서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진실한 자리에는 본래로 먼지 하나 두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적적하다. 이론이나 문자를 세우지도 않는다. 닦고 깨닫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섭수하고 교화불사를 일으키는 마당에는 한 가지 법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래서 좀 어수선 하다.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
임제스님은 삼현삼요에 대해서 위의 말씀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구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우선 “한마디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했는데 그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과 구중현(句中玄)과 체중현(體中玄)이다. 현중현은 말의 그 자체로서의 진실이다. 구중현은 말의 인식 위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체중현은 말의 실천 속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우가 한 마디의 말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다. 한마디 말에 공관(空觀)의 입장과 가관(假觀)의 입장과 중도관(中道觀)의 입장이 있다. 진제(眞諦), 속제(俗諦),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도 있을 수 있다. 한마디 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이 다 가능하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 가지로 현묘하고 유현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났을 때 또는 제자들을 훈도할 때 말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현문(一玄門)에 반드시 삼요(三要)가 갖춰져 있다는 삼요란 세 가지 중요한 것, 세 가지 요점, 즉 본질[體)과 현상[相]과 그 작용[用]이다. 이 본질과 현상과 작용이란 무슨 물건 어떤 말에도 다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을 제접할 때 근기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얕고 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구 중에 삼현문이 있고, 일구 중에 구요(九要)가 갖추어져 있다.
다시 모르는 말 한마디 더한다. 제 일구를 운문종(雲門宗)으로 치면 다종다양한 부류의 근기들을 단칼에 다 잘라 버린다. 조동종(曹洞宗)으로 치면 바른 위치다. 그리고 소탕이다. 제 이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하늘과 땅을 다 덮어 버린다. 조동종으로 치면 치우친 지위다. 그리고 건립이다. 제 삼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쫒아 간다. 조동종으로 치면 모든 것을 함께한 가운데 이른 것이다.
임제록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삼구와 삼현과 삼요다. 하지만 순전히 엉터리다. 그렇다면 엉터리가 아닌 강설은 무엇인가. 이제 여러 분도 다 아는 “할”이다. “할”을 하는 나다. 활발발한 무위진인이다. 오로지 이 사실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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