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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1. 08.14-15
누가 : 대운산악회 2차 특별산행 팀
장소 : 지리산 성삼재-중산리(34.5km-50km)
인원 : 37명
실제 소요시간 : 12시간 50분
휴식 및 식사시간 포함 : 18시간
지리산은 고대 신라 때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우리나라 5악 중 하나인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이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또한 백두산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그 깊은 의미를 빌어 방장산이라고도 불린다.
지리산은 1967년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북도남원시, 경상남도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3개 도,5개 시.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는 곳으로,
면적이 440.5㎢에 이르러 설악산의 2.2배, 한라산의 3.4배로
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남한 제2의 고봉인 천왕봉(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등 10여개의 고산준봉이 줄지어 있고 뱀사골계곡, 칠선계곡 등 6개의
계곡과 구룡폭포, 불일폭포, 용추폭포, 등선폭포 등
10여개의 폭포 등 뛰어난 명승지를자랑한다.
한냉한 고산지대와 온난한 산록지대가 있어 824종의 식물이 원시림 상태를
유지하고 42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사향노루를 비롯하여 수달,
청설모, 오소리, 담비, 반달곰 등의 희귀한 동.식물이 보호를 받고 있다.
또한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대원사, 실상사 등의
대사찰을 비롯하여 많은 암자가 남아 있으며
문화재로는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국보 12호) 등 8점의 국보와 56점의 보물들이 있다.
智異 대자연 속으로 떠난 "인간 산신령" 홀연히 종적 감춰 "入神 35년"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님. 산이 좋아 동경 유학생활도 때려치우고 처자식도 버리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살았던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님. '지리산신령' 또는 '산사람'으로 더 알려졌던 우천님은 산다기보다 인적도 드문 깊은 산속에서 산짐승처럼 야생했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세석산장이 없었을 때 옛날의 산장 자리에 토담집 한 채가 있었다. 어느 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만수 선생님의 보금자리였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쯤 1976년 6월 어느 날, 지리산 최초의 인간 산신령, 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렸던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선생이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좋아하던 산, 지리산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 떨기 산야초처럼 살았던 그분이 아무도 모르는 지리산 어느 언저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지리산의 시계를 시간의 멈추고 사라진지 어언 35년이 지났다. 우천 선생님의 큰 뜻을 마음에 담으며 지리산의 극히 일부인 그 언저리를 감히 오늘 대운산악회 회원 37명이 선생님이 만드신 그 길을 허락도 없이 들어갑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로 선생님께 알현 드리며 1박2일 우천 허만수 선생님의 발자취를 밟아 보렵니다.
성삼재 09:30 기념촬영 성삼재 삼한 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 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여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노고단대피소 10:05 지리산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옹(84). 사람들은 그를 ‘노고단 호랑이’ 또는 ‘지리산 털보’라고 불렀다. 지리산에 혼을 빼앗겨 입산한 지 40년째. 눈을 들면 늘 지리산 자락이 보이는 구례가 그의 고향이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천중과 연희전문을 마친‘인텔리’였다. 인천기계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했고 연탄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의 절반을 내맡긴 곳은 아홉살 때부터 오르내렸던 마을 뒷산, 지리산이었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했다. 그는 이같은 무애(無碍)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피아골 산장 옆 간이휴게소도‘무애막’(無碍幕)이라 이름 붙였다. “사는 게 뭐 별 거 있어. 사람이 태어나서 죄 안짓고 나보다 약한 사람 좀 도와주며 사는 거제.”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옹의 넋두리다. 젊은시절부터 술과 산을 일체로 살아서 그런지 요즈음은 피아골 산장에서 그분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않다. 구노고단대피소 산장이 무인대피소로 있던 시절 그가 자원해서 산장지기를 맡았던 곳이 지금의 노고단대피소 좌측에 있었던 구대피소다.
노고단(1,507m)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노고단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부악(부악·지금의 팔공산)이었다' 고 적혀 있어
지리산에서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노고단 안부 10:20 정상에 서면 여성 둔부처럼 보이는 반야봉이 눈앞에 보이며 1백리 멀리 떨어져 있는 천왕봉이 아스라히 모습을 비친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의 또다른 매력으로 일컬어지는 왕시루봉 능선과 문수리계곡,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가 확연하다. 손에 잡힐듯 뻗어 있는 만복대 능선도 노고단 정상에서 보면 절경이다. 한민족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 전해져 오고 있는가 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보기 흉한 잔해들과 함께 동족상잔의 아픔을 빚은 흔적들이 그대로 상존해 있는 노고단. 태고적부터 영겁의 세월을 보내오면서 고스란히 대자연을 물려받은 우리가 오늘날 조금씩 조금씩 대자연을 갉아 먹어 가고 있음을 노고단에서 새삼 느낄 수 있다. 신라 박혁거세 시대때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노고단의 유래를 음미하며, 청학동 도인들이 쌓았다는 돌탑을 바라보며 노고단 정상을 지나 40여분을 걸으니 돼지평전 팻말이 보인다. 멧돼지가 자주 나타나 원추리 뿌리를 파먹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왼쪽으로 둥그스런 봉우리 두개의 반야봉이 가깝다. 여자 엉덩이같이 생겨서 사람들 입방아에 자주 오르 내린다는데 왜 하필이면 여자 엉덩이 인가? 남자 엉덩이는 뭐 다르게 생겼나? 내눈으로는 두 봉우리가 적당히 둥그스럼한 것이 우리 아들녀석 엉덩이 같이 보이는데... 아무튼 재미 있다. 여기서 보다는 천왕봉쪽에서 바라다 보면 더욱 여자 엉덩이 같이 생겼단다. 나중에 더 자세히 봐야지. 앞방향을 쳐다보니 아스라히 멀고 한없이 이어지는 주능선과 함께 세석평전과 천왕봉 정상이 멀지만 깨끗하게 보인다. 특히 지리산은 사계절, 그리고 변화하는 날씨에 따라 언제 와봐도 항상 새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들으며 그중에 이처럼 청명한 날씨에 이정도의 조망을 볼수 있는것도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 하기로 했다.
돼지령 11:05(1,424m) 산허리를 돌아 돌밭길로 노고단 정상의 산허리를 옆으로 돌아간다. 등산로가 돌밭이다. 돼지령으로 올라 돼지평전에 이르니 조망이 시원하다. 주능선에 지척인 듯 반야봉이 우뚝 솟아 있고, 첩첩이 쌓인 지리산 능선과 계곡이 시야에 들어 온다. 노고단에서 돼지평전까지는 비교적 완만하게 오른다.
성삼재에서 쉬지않고 시간 반을 달려왔으니
여기서 서산대사의 한시를 한수 읊어보고 쉬었다 가기로 한다.
사월에 두류산 산마루에 곧장 오르니
수많은 골짜기에 꽃은 만발하고 새소리 따사롭네
우뚝한 한 봉우리는 하늘에 가까워 산의 조상이 되고
수많은 봉우리는 땅에 줄지어 서서 손자아이 되누나
앉아서 바라보니 새하얀 해는 눈 밑에서 돋아오르고
붉은 안개와 푸른 바다는 서로 삼켰다 토했다 하네
골짜기 입구의 조각 구름은 밤새도록 검나니
인간세상의 큰 장마비임을 알았네
가소롭구나, 지팡이 가로 맨 나그네
티끌 세상 돌아보니 시끄럽기가 불더미 같네
피아골3거리 11: 20 피아골은 지리산의 관문인 노고단의 등너머서 섬진강으로 행하는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깊이 빠져나간 큰 계곡이다. 한국전쟁 직후 피아골이란 영화작품이 나왔던 탓으로 흔히들 한국전쟁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불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옛날에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이곳 선경(仙境)을 찾은 선객(仙客)들이 이곳에 오곡중의 하나인 피(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피田谷)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후 점차 그 발음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라 한다. 여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한시간 반을 내려서면 함태식옹이 운영하는 피아골대피소가 있고 피아골대피소에서 연곡사로 이어지는 계곡은 가을 음악회와 단풍이 하늘을 가린다.
임걸령 11 : 30(1,432m) 성삼재에서 노고단 돼지령 피아골삼거리를 지나 임걸령에 이르는 코스 약 7km는 지리산종주를 하는 산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대로의 종주를 위로해주는 구간이다. 이후 노루목에서 삼도봉을 거쳐 화개제에 이르면 아!~~ 이래서 지리산종주가 설악산보다 훨 쉽다는 것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는듯이 부드럽다. 아니 안성마춤은 경기도의 안성에서 도자기를 만들때 쓰는 용어가 아니고 지리산을 종주할 때 우리의 어머님이 자식들이 힘들고 지칠까봐 부드럽게 살짝은 힘들어서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논 어머님의 마음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여기가 남한 최고봉이 위치한 천왕봉이 자리한 아주 지리한 지리산이다. 산행은 여기까지만 우리를 희롱한다.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8KM거리 능선상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령(高嶺)인데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주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니 녹림(綠林) 속에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터에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녹림호걸(綠林豪傑)들의 은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의적(義賊)두목인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샘터에서 피아골쪽 암벽밑에 막(幕)터가 있으니 이곳을 '황(黃) 호랑이 막(幕)터,라 부르며 옛날에 약초꾼 황(黃) 장사가 눈이 내리던 겨울밤에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지혜와 용기로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4KM의 거리이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임걸령에서 반야봉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을 한동안 숨가쁘게 오르다 보면 평지가 나오고 계속 능선길을 가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약 2KM지점에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을 노루목 삼거리라 부른다. 노루목은 반야봉에서 내려지르는 산줄기가 산중턱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천연의 암두(岩頭)전망대에서 눈 밑에 펼쳐지는 피아골 원시림 계곡을 내려다 보노라면 원시림 속의 정적에서 풍겨 나오는 유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반야봉(般若峰)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의 제2봉이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이다. 지리산 어느 곳을 가던 오롯이 솟아 있는 두 봉우리를 볼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대개 여인의 엉덩이와 흡사하다는데 공감한다. 주봉(1,732m)과 중봉이 절묘하게 빚어낸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답게 노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많이 한다. 그 누가 보아도 두 봉우리의 정다운 모습을 보면 금방 지리산 사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반야봉은 또한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내는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화려한 불꽃잔치와 더불어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피아골로 빠진다는 임걸령 삼거리를 지나
구상나무, 잣나무, 단풍나무들로
울창한 숲속을 한참가니 노루목이다.
오는도중 길옆의 이름모를 꽃들, 풀잎들, 나무들을 보며
산책하듯 힘든줄 모르고 지나 왔다.
이때의 여유로움이 장거리 코스에서 체력안배의 의미였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방에 피어있는 들꽃들도 자세히보니 벌써 조금은 시들어 지고 있다.
고산지대라 가을에 피어야 할 꽃이
여름에 피어서 가을에 지고 만다는 말이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우리는 이제 노루목을 지나 반야봉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오늘 일정에 반야봉은 없다.
1박2일의 코스로
지리산을 종주할 경우 대개 반야봉을 생략한다.
왜냐면 노루목에서 1km인 반야봉이
종주에 많은 영향(시간, 대피소 도착)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가지 않는 반야봉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글로 설명을 더한다.
반야봉은
대전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성삼재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준비해서
반야봉에 올랐다가 원점회귀 산행에 적당한 코스다.
지리산을 한번에 모두 섭렵하려는
산행 태도는 지양해야할 방법이다.
천천히
지리산이 주는 자연의 교훈을
아주 천천히 받아드려야 할 산이 지리산이다.
노루목 12 : 10(1,560m) 태산준령들 사이 사이에 걸려있는 지리산의 운해는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과 반야봉에 얽힌 마고할미와 반야의 애틋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려는 듯 심오함을 갖고 있다. 반야봉에는 지리산 산신 중 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그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선지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데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삼도봉 12 : 30(중식) 반야봉을 왼쪽에 끼고 조금 발빠르게 20분정도를 걸으니 어느새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가 만나는 곳이라는 삼도봉이다. 삼각형 청동비석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세분이 남대전고 대운산악회 4기다. 여기서 준비해온 중식을 먹으며 중간과 후미를 기다리기로 한다. 우리가 하루를 숙박할 벽소령대피소에 전화를 걸어 입장시간을 물어보니 6시란다. 중식을 마치고 후미가 도착 하더라도 5시간정도의 여유가 있고 선두가 천천히 가더라도 4시 30분이면 도착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보낼수도 없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마지막 시간을 조절하면 될 노릇이다. 현재까지는 부상자 없이 37명 전원이 씩씩하게 산행을 계속한다. 화개재를 거쳐 토끼봉부터가 문제의 여지가 있는 구간이다. 날씨는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일년중 최고로 무더운 8월 중순에 별로 땀이 나지않아 준비한 타올도 배낭에 그냥 보관중이다. 삼도봉에서 나중에 문제가된 주먹밥이야기다. 산행준비 과정에서 2번씩이나 주먹밥이 상하는 문제에 대해 업소측에 확인을 했다. 신신당부를 한 부분이 음식이 상하는 부분에 대해 예방조치를 해 달라는 거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거였다. 결론은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로 인해 대원 8명이 다음날 식중독으로 인해 산행을 포기하고 음정으로 내렸다. 마음으로 글로 그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죄 송 합 니 다 .
화개재 13:20 화개재 화개재는 먼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한다. 화개재에는 먼옛날 산내장터애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넘다 너무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서려있다.
뱀사골이란 이름의 유래는 뱀사골 초입에 있는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背岩寺)란 사찰이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배암사골'이란 이름이 변하여 생겼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때 불타 버리고 없는데, 이사찰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아 뱀이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뱀사골은 용이나 뱀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은곳으로 유명하다. 오룡대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곳이며 탁용소는 큰뱀이 탈피하여 용으로 변신하는 장소, 또 뱀소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던곳을 뜻한다. 이밖에도 병모양의 병소,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속에 빠뜨렸다는 간장소, 뱀사골의 상류 일대를 지칭하는 들돌골등이 유명하다. 이번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무이로 인해 반선-화개재 구간과 칠선계곡구간은 아직도 통제 구간이다.
삼도봉에서 30 여분을 가니 화개재이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기 위하여 오르막길을 오른다. 토끼봉에서는 30여분을 계속 내려간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른 만큼 내려가는 것 같다. 명선봉을 오르기 위하여 다시 오르막길을 1시간 정도 계속 오른다. 명선봉 정상 바로 아래서는 짧은 암릉에 쇠줄을 잡고 급경사를 오른다. 명선봉에서 15분 정도를 걸어 능선아래 있는 연하천대피소다.
토끼봉 13 : 55(1,534m) 봄에는 진달래가 토끼봉 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는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전망이 아주 좋다. 뒤돌아 보면 멀리 출발지점 노고단이 꽤 아득하고 앞으로는 천왕봉, 세석도 아스라히 그러나 뚜렷하게 보인다. 사방이 온통 산이고 나무숲의 청렴한 녹색과 파란하늘색이 절묘하게 어울어진다. 내려다보니 하염없이 내려 뻗은 울창한 원시림속의 계곡들이 깊이를 짐작조차 할수 없게 하여 무서움 보다는 포근함마저 느끼게 한다. 저기에 몸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까지 들게 한다. 좌우로 뱀사골, 의신, 쌍계사 계곡인데 아무튼 꽤 높은 곳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는 반면 계곡의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어제까지 한달가량 내림과 멈춤을 계속한 탓에 계곡의 수량이 엄청나게 불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명성봉 14 : 30(1,586m) 명성봉으로 올라서면서 날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걱정이다. 선두는 이제 연하천 걸쳐서 1시간 30분이면 벽소령에 도착하는데 후미가 문제다. 아직까지 문제발생은 없다. 연하천 에서 삼각고지 형제봉구간이 문제다. 삼각고지에서 음정으로의 비상탈출을 생각해본다. 어려운일이다. 방법은 없다. 무사히 형제봉 오르막내리막 구간을 가는 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때 제일로 무서운건 무전기에서 호출이 떨어지는거다. "환자발생"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며 연하천으로 내려간다.
연하천대피소 15 : 00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연하천(烟霞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하천은 언제나 수림속의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풀향기, 꽃향기가 그윽한 지대이며 여기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약 2km 지점의 삼각고지에 이른다. 삼각고지는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서 좌우로 탁트인 백무동과 화개골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어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북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영원재와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갈 수 있다. 삼각고지에서 다시 종주 코스를 따라 능선길로 내려가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족 능선위에 형제 바위라 불리는 10여m 높이의 우뚝솟은 큰 선 바위(立石)를 보게 되는데 언뜻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石像)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석상임이 분명하다. 이 형제 바위에 얽힌 전설은 , 옛날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하고 있을 때 산의 요정 지리산녀(地異山女)의 간곡한 유혹을 받았으나 형제가 다 같이 이를 물리치고 도통성불하고,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형제가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서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었다고 한다.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시 30분 성삼재를 출발하여 점심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5시간 30분 산행 끝에 연하천산장에 도착하였다. 연하천대피소는 원래 산악회(연하단산악회-함태식-지리산산악회)가 관리하던 대피소를 몇년전부터 공단에서 직영관리를 한다. 물은 콸콸콸 풍부한데 취사장도 없다. 대피시설도 별로 좋지않다. 어떤때는 숙박 정원 50명에 200-300명씩 집어넣고 합숙을 시킨다. 1층에 남자, 2층에 여자. 에약이 정착되지 않던 시절 우천시 예약객의 반 이상이 오지 않으면 애들먼저, 여자면저, 노약자 우선으로 방을 배정 했었다.
음정 갈림길 15 : 30 여기서 좌로 방향을 잡으면 음정이다. 비상탈출로다. 여기서 탈출하는 대원이 없기를 기도하며 통과다.
형제봉 15 : 50(1,452m)
3시 연하천대피소를 출발하여 형제봉을 향한다.
비교적 완만하게 오르내리며 가는 등산로는 대부분 돌밭으로 돌이 많다.
형제봉 정상 부근 아래에서는 10여분간 급경사를 오른다.
연하천대피소를 출발, 50여분만에 형제봉에 이르렀다.
형제봉에서 한참을 내려가 다시 올라가 산허리를 돌아간다.
돌과 바위인 등산로가 너덜지대로 이어지는 길이 험하다.
형제봉에서 1시간을 가니 벽소령대피소 이다.
벽소령 700m를 앞두고 비발이 점점 세어진다.
늘 그렇듯이
이부분만 오면 사면의 길이가 길어진다.
그래서 겨울산행하고 여름산행하고는
여름산행이 그 길이가 더 길다.
능선 안부에 있는 벽소령대피소는 연하천대피소 보다 깨끗하고 규모가 크다.
식수는 대피소에서 30여미터 아래에 있다.
형제봉과 소나무
앞쪽에 달빛아래 의연히 커다란 바위 두개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서있다.
형제바위 란다.
숨이차서 헐떡이는 중에서도
"우리 두 아들놈 키와 비슷한 것이 두놈이 꽤나 싸웠겠구만" 하는
짖궂은 생각이 든다.
이제 다커서 사이좋게 등을 맞대고 저렇게 서있는 거지.
옛날 성불수도하던 두형제가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다가 저렇게 되었단다.
벽소령대피소 16 : 40 동쪽 나무수풀사이 하늘에 붉게 불타는 큼지막한 원이 걸려 있다. 보름달이다. 막 뜨는달이 저렇게 클줄이야. 노랗다기 보다는 붉은색이다. 오늘이 보름이다. 삼각고지를 지나 벽소령까지를 6.25때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피의능선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이렇듯 달빛아래 고요한데... 달빛이 너무강해 별이 하나도 안보인다. 어릴 때 고향뒷산에서 보던 밤 하늘의 그수많은 별들은 어디로 갔나. 달빛에 가려 별은 안보여 섭섭 하지만 달빛 별빛 다보려면 그건 지나친 욕심이지. 하늘은 공평해서 다음에 별보러 한번 더 오라고 하는 것 같다. 멀지만 뚜렷이 남쪽 하늘과 땅이 맞닿은 부분에 붉은색 불빛이 요란하다. 광양만 제철소 불빛이란다. "제길 얼마나 먼거리 인데 저렇게 뚜렷히 보이나." 구름사이로 보름달이 보인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은 듯한 형상이다. 그래서 산꾼들은 시인이 되기 위해 지리산종주시 벽소령에서 명월을 보기위해 1박을 하나보다. "어둑어둑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 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찬탄했던 시인 고은. 달빛이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러 벽소명월(碧宵明月) 반야봉의 낙조가 스러지고 산속에 어둠이 깃들면 적막감 속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 벽소령에서 바라보는 달빛은 참 아름답기만 하다. 푸른 벽(碧), 저녁소(宵)라 하여 '벽소령' 광활한 밤하늘에 떠오르는 푸른 달빛에 취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듯. 벽소령에서 연하천까지는 '낭만의 길'이라고도 한다. 경치와 전설이 참 아름답다. 벽소령 달빛, 형제봉의 전설, 숲의 요정들이 산다는 연하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 중간 지점. 예전에는 화개골과 마천골 잇는 남북 횡단도로. 현재 마천에서 벽소령까지 군사 작전도로가 있다. 벽소령은 지리산 허리 지점의 잘룩한 고개 그 주변의 겹겹 산등성이 풍광이 빼어난 곳. 유난히도 밤하늘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 도시에서 이미 사라진 별들이 이곳으로 와서 모여 사는 느낌. 벽소령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마치 스스로 신선이 된 듯한 착각. 발 아래 흘러가는 구름과 산등성이들. 그곳 능선에는 일제시대 옛 임도 흔적 축대를 쌓은 흔적이 유난히 많은 벽소령. 그곳 달빛이 희고 푸르다 하여,.. 지리산 10경 중 하나 벽소령 명월. 지금은 그곳에 산장이 있어 하루밤 묵어가기 적당한 곳. 벽소령산장이 있어 편리한 만큼, 인적 없던 시절이 아쉽기도 한 곳. 벽소령(뱁실령)은 화개면과 마천면을 잇는 옛 도로. 옛 이정표는 1㎞ 거리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두 곳. 서쪽 벽소령은 '큰 벽소령(구 벽소령)' 동쪽 벽소령은 '작은 벽소령(신 벽소령)' 1970년대 초에 뚫렸다는 군사 작전도로 약 200m 정도 내려가면 벽소령 샘(뱁실샘) 화개면 신흥 - 마천면 삼정(38㎞ 비포장도로). 세석에서 벗어난 서쪽 능선 8㎞ 지점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꽃대봉(1,426m) 봉우리를 뒤덮은 꽃밭이 고와 붙여진 이름. '남부군이 그렇게 불렀다는 꽃대봉.' 꽃대봉에서 평탄한 길을 가다가 덕평봉 남쪽 사면을 돌면 선비샘 벽소령 주능선에는 아직도 넓은 도로 흔적. 화개와 마천을 잇는 일제시대 산판도로이다. 그후 남부군 토벌을 위한 작전도로로 씌인듯. 현재 삼정마을에서 광대골을 거쳐 벽소령까지 작전도로.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이곳 원시림이 벌목되었을까?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도 이곳 도로를 통해 벌목이 된듯. '앞으로 벽소령 도로는 어떤 용도로 씌여질까?'
벽소령에서 이틀째 산행을 위해 선두가 포즈를 취한다.
첫날 상봉이 후배님이 후미를 자처해서 맞겼더니
많이 힘들었나보다.
오늘은 벽소령에서 8명의 대원을 아쉽게
음정으로 비상탈출 시키고
다음을 기약하며 천왕봉으로 향한다.
인생이 원래 그런거란다.
지리산에 오를때마다 천왕봉의 일출을 보고
노고단의 운해를 보고
반야봉의 노을을 본다면
그 또한 재미가 없다.
오늘은 어제 후미에서 고생한 분들을 모시고
내가 후미에 선다.
후미가 힘은 들지만 보람은 있는 포지션이다.
생활체육산악회에서 4년간 후미를 본 경험이 있어
후미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
남들보다 어렵지 않게 후미를 보는 노하우도 있다.
벽소령대피소 15일 07 : 00 멀리 반야봉에서 햇무리가 비춰온다. 어제와는 사뭇 날씨가 다르다. 아주 죽여주는 더위가 예상된다. 본격적인 산행에 접하면 땀께나 흘리겠다. 오늘 가야할 봉이 농부 이씨의 무덤과 선비섬이 있는 덕평봉, 일곱신선들이 영선봉을 위시하고 있다는 칠선봉,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영선봉, 세석평전과 대피소가 있는 촛대봉과 삼신봉을 거쳐 연하봉, 제석봉...천왕봉 코스다.
뒤돌아 본 형제봉
덕평봉 07 : 30 그러고 보니 여기서 바라보는 반야봉 봉우리 두 개가 더 균형있고 예쁘게 보인다. "저정도면 여자 엉덩이 어쩌고하는 표현 할만하네." "천왕봉은 신랑, 반야봉은 각시 하면 어떨까?" "둘 사이에 수많은 봉우리들은 사랑스런 아들 딸 하면 되겠네." 아무튼 힘들어 숨이 차는 와중에서도 산세의 위용에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선비샘 07 : 50 그동안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선비샘에 수량은 풍부했다. 선비샘에는 옛날 한 가난한 노인의 전설이 있다던데,,,. 칠선봉, 영신봉 큰봉우리를 넘어 세석까지는 수없이 오르내리는 제법 힘든 구간의 연속이다. 1600고지 칠선봉에서 좌우로 펼쳐진 한신골, 대성골과 주능선상의 천왕봉, 뒤로 지나온 계곡들과 반야봉, 노고단의 장관을 바라보며 지리산 전체의 산세를 음미한다. 크지만 완만함, 육중함이 조화되어 그냥 웅장하다는 표현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칠선봉 09 : 10 칠선봉(七仙峰:1,576m)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아름다운 선경을 이루니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형상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비경의 암봉들을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면 더욱 아름답고 고요한 운치를 돋구어 준다. 칠선봉에서 두세번 암봉을 힘겹게 오르내리니 영신봉이 바로 코앞인데 드디어 올것이 오고 만다. 아침부터 무전기가 울어댄다. 선두에서 대원중 일부가 다리에 쥐가 오른단다. 위치는 선두그룹으로 세석평전 습지 중간이란다. 여기서 뛰어가면 30분정도의 거리다. 약 2km거리다. 칠선봉을 뛰어오르니 숨이 가쁘다. 배낭도 어제 빼낸것이 없고 더 수입을 해서 무겁다. 한두번 하는것도 아니고 단숨에 칠선봉에서 중간을 떠라잡고 영신봉에 오르니 광활한 세석평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신에서 세석대피소를 경유하지 않고 질러간다. 사고장소에 도착하니 사람이 없다. 무전기로 연통을 하니 애들이라 바로 풀려서 산행을 진행하는데 무리가 없단다. 제기럴 이젠 내 도가니가 아프다. 무리다 싶어 세석슾지에서 20분정도 다리 피로를 풀어준다.
조망대 09 : 40 여기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암봉들의 위치가 가장 잘 보인다는 조망대다. 날이 맑다고 조망이 좋은것은 아니고 비 개인 후가 조망의 제1조건이다. 오늘의 조망은 별로다.
영빈이의 가냘픈 몸매와 얼굴의 천진스러움은
산을 타기에 썩 잘 어울린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영빈이는 산을 꽤 잘 탄다.
보행방법이 좋은것도 아니고
스틱 접지법이 좋은곳도 아닌데
하여튼
산에 오르는 개인적인 특유의 노하우가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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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1편이고 2편 3편으로 이어집니다.
오,탈자는 보시는 분들께서 잡아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세세한 설명 잘 읽고 갑니다 ..하대장님..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째날 후미 보느랴 수고 많았습니다.
하대장 잘 읽고 갑니다.
하대장 덕분에 우리 가족은 새로운 경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작입니다.
시작은 벌써 반까지 왔다는 것이고요.
일단 첫째날올리셨네요,,,,2,3부가 기다려지네요,,,수고많이했읍니다.
감사합니다.
2,3부 연계해서 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2부가 기달려지네요
감사합니다.
함께 하면서도 사진은 장터목 초입에서 찍은 사진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2부 준비힙니다.
한편에 서시같은문장력 참보기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영환선배님이 직접 올르셔서 보고 감상한걸 올리시면 베스트셀러에 바로 등극할 텐데...
연습 좀 하십니까?
산행후기를보니 벌써 또한번더가보고 싶구나
다음에는 2박3일로 여유있게 해보자구나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예 2박3일로 화대종주 아주 좋습니다.
수고 많으셨네...말로 표현 할수 없을 정도로...땡큐... 근데 뱃살 안보이는 그림 없나....
다음부터는 뒷모습 위주로 작업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포즈는 뒷태로,,,,,ㅋㅎㅋㅎㅋㅎㅋ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