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4번째 말씀입니다.
보통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제법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안다라고 생각들 합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들이라해도 성경 줄거리 꽤나 아는 사람들도 자신들은 진리를 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는다고 하지요.
1편에서 짧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진리를 안다라는 것은 성경줄거리를 많이 알거나 성경관련한 신학적 지식을 깊게 습득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고고학자들이나 신학박사들이 수두록하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천국간증을 들어보아도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서 해와같이 빛나고 있다라는 간증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찌니에서 진리를 안다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편에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바로 주님과 사귐이 있다라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다라는 것은 단지 주님을 만났다, 주님을 영접했다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친구와 깊은 우정을 갖기 위한 과정을 살펴보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먼저는 만나야 합니다. 그 상대와 대면을 해봐야 하지요.
그리고는 그 상대와 주기적으로 시간을 같이 공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해보아야 합니다. 대화를 하면서 또한 같은 생활공간에서 서로의 다른 점들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고 이해하고 공유하면서 서로간의 신롸와 깊은 우정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서로의 좋은 점과 다른 점들을 이해했다면 친구로서는 이어질 수 있어도 사랑까지는 아니됩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아픔과 어려움까지도 같이 동행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성교제에서 한눈에 반했다라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실제로 만난지 3시간도 안되어서 결혼을 약속했다라는 해외 토픽 뉴스를 접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뒤로 그 사람들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간다라는 소식은 따로 없으니 과연 행복하게 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상 최초로 한 여인을 만나서 한눈에 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아담입니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와를 보고서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늘상 짐승들만 보다가 자신과 동일한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났으니 참으로 아리따운 하와를 보고서는 한눈에 반해버렸고 그녀와 부부의 관계를 이룬 것을 보게 됩니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그러나, 아담이 여인을 보고서 한눈에 반한것과 오늘날 사람들이 한눈에 반한 것은 영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아담은 영적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처럼 죄가 퍼져있고 죄성으로 물들어진 시대가 아닌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요, 영으로 둘러매쳐진 에덴이라는 공간에서의 살아온 영적존재인지라 그의 고백은 참으로 영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할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귀한 영적 존재였는지 우리는 깨우쳐 보아야 합니다.
그런 아담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자세히 길게 기술되어 있지 않다보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것으로 오해들 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그저 아담을 죄의 시작으로만 보는 견해들이 다분하지요.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존재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명철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그의 지식과 지혜는 출중했고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세가 있었다라는 것을 깨우쳐 보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사귐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자유했습니다. 내일 일로부터 자유했고, 먹거리로부터 자유했고 입거리 잘거리 놀거리 등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는 자유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자유함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하지 못한 상대성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졌던 자유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내외는 말 그대로 처참했습니다.
땀을 흘려서 먹거리를 장만해야했고 그마저도 염려하며 근심하며 내일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실컷 수고하고 땀 흘려 수확을 할라치면 엉겅퀴가 나고 가시덤불이 생겨서 열매를 얻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고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농작물들이 망가지는 일들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름붙여주었던 , 자신이 말 한마디면 따르던 짐승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겠구여.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싸움과 죽음에서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지금도 자녀들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집니까. 이런 부모의 마음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담은 에덴동산의 삶을 분명 그리워 했을 것입니다. 그때 누렸던 권세와 영광이 얼마나 좋은 것이며 그 풍성함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유했는지 그립고 또 그립고 사무치도록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로 물들어가는 세상을 보면서 자신들에게도 육의 속성과 악의 속성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아담과 하와는 시시때때로 부부싸움도 하였을 것이라 저는 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귀가 미혹해서? 하와가 미혹해서?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구여. 실제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선악과를 안먹어 봤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선악과를 먹어 본 아담에게 그래서 그 고통과 좌절을 뼈저리게 느껴본 그에게 다시 하와가 선악과를 가져와서 이왕지시 이렇게 된거 또 먹자고 한들 아담이 먹을까요? 안먹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의 상대성을 체험해 본 아담은 에덴의 자유함과 에덴 밖에서의 속박함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요 이런 메카니즘은 오늘날도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자유함을 때로는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기웃거리게 되고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을 더 좋아하게 되고 세상 것을 늦기전에 더 즐기고 싶은 마음들이 솟구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접하고 누리고 탐닉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지요. 그 이후론 주님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분명 체험하고 누리기도 하였겠지만...
실상은 문제가 여기서부터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과 주님을 영접한 후의 삶의 방식과 태도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깊은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주님 밖에서의 삶이 그토록 좌절스럽고 고통스럽고 낙심되었으면서도 그래서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주님 밖의 삶과 주님 안의 삶의 상대성을 분명 체험을 하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 밖의 삶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여차하면 주님 밖으로 나가려고 할까요?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첫째. 주님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은 있었지만 그 평안과 기쁨이 지속적이지 못하다보니 주님 밖으로 다시 뛰쳐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주님 안에 들어왔지만 주님과의 사귐이 적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말하였지요. 사귐이란 같은 공간과 시간, 마음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성령의 기쁨과 평안이 있으면 잠시잠간 좋다가도,
자신 편에서는 주님에게 자기 시간과 공간을 드리지 않으니 사귐이 안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어려움도 주님에게 드리며 같이 하여 줄 것을 기도하여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세상 친구들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니 주님과의 사귐은 여전히 뒷짐이 되고 만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계명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계명을 배우면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분별하지 못한채,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을 갖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도덕적 양심을 갖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하늘에서 주는 평안과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과연 진리의 자유함이 있을까요? 없지요.
무슨 말입니까.
어떤 이들은 주일을 지키는 것에는 아주 투철한 정신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주일성수는 분명 하나님의 계명이니 우리는 반듯이 지켜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겉으로 볼때는 주일성수에 목숨바쳐 지키는 의를 갖고 있으니 믿음이 좋아보이지만, 실상은 주일성수가 목적이 되어 있어서 주일을 지키는 기쁨과 평안이 그들에게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하나님의 계명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에 평안과 기쁨이 없다면 그는 분명 계명을 지키는 것에 목적시하고 있다라는 것을 깨우쳐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우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목적은 그 계명을 지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에 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전에 기독카페안에서 추도예배, 장례예배, 헌화등등이 우상이냐 아니냐 갑론을박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행위를 하고 안하고를 갖고서 하나님께 속했느냐 마귀에 속했느냐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계명을 목적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늘상 족쇄가 되고 기준이 되고 판가름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겉으로 볼때는 믿음이 대단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사귐은 그다지 가깝지 않다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사귐만 있으면 된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주님을 알고 주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일수록 계명을 목적시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여전히 육을 할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행복감을 주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주변에 볼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맛있는거 먹는 것으로 행복감을 갖습니다. 이런 행복도 없으면 무슨 재미냐고 하면서 맛있는거 찾아다니기도 하지요.
어떤 이들은 남을 학대하는 것에 행복감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억울려 있는 자학기질을 발견하지못한 채, 그런 자학기질로 남을 짓누르고 억업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핸드폰으로 어디서나 보고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행복해 하기도 하구여.
이와같이 우리 사람에게는 육이 주는 만족감도 있습니다. 동시에 영이 주는 만족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기도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보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성경 보는 일은 참으로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남에게 봉사하고 배려하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런 짓은 자기 손해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여.
그런데, 문제는 주 안에 들어왔다해도 육을 할례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육이 주는 행복과 만족감으로 여전히 삶의 태도가 이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육과 영이 공존하는 마음속에서 어느 때는 육, 어느 때는 영의 것을 취하지만 전반적으로 육이 영을 앞서있으니 육의 속성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언제든지 주님 밖으로 나가서 육이 주는 즐거움과 자유함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육은 사단이 주관하는 영역으로서 사단의 음성을 자꾸 듣고 그쪽으로 내어주다보면 영이 주는 즐거움은 딴나라 세상 말 처럼 들리기 때문이요,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 두손을 모아 과연 나는 주안에서 자유함이 있는가 기도해 볼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날 주님 안에서의 자유함과 주님 밖에서의 자유함을 번갈아 체험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때는 하루안에서도 두 갈래로 마음이 나누어지기도 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 밖에서 세상이 주는 자유함을 누릴때에는 그것이 행복이고 만족인것 같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난 뒤에는 허무와 좌절입니다. 그러나 주님안에서 주는 자유함은 평안이요 사모함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분명 상대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것으로 끝나지 마시고, 상대성을 체험해보면서 무엇이 과연 나에게 영적으로 유익인가, 내 영혼이 잘 되는 길인가 분별해 가면서 영을 선택하고 영을 바라보는 능력을 주님께 기도해 가야 하는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