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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백호 임제 풍류기행기
지난달에 이어 다산 선생의 풍류기행은 3월에도 계속 되었다. 2월에는 다산이 23세 때(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생가인 여유당과 다산문화관, 그리고 여유당 뒤편에 자리 잡은 그의 묘소를 찾아본 기행이었다. 3월에는 다산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을 둘러보기로 했다. 거리가 멀어 당일 코스로는 어려울 것 같아 1박 2일을 선택했다. 대신 강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주와 연계해서 일정을 설계했다. 나주는 조선 제일의 풍류남아로 불리는 백호 임제가 태어나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지난 3월 9일 우리 자유행복학교 학생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당산역과 양재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풍류기행과는 다른 설레임과 약간의 긴장감이 각자의 얼굴에 멤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풍류기행은 당일 코스였지만 이번 3월 풍류기행은 처음으로 가는 1박 2일 코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1박 코스로 인해 이번 여행에 참석하지 못하는 회원들도 많았다. 아무리 풍류도 좋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분이나 주부들이 자신의 자리를 비운 채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무거운 배낭을 버스 앞 칸에 차곡차곡 채운 후 남녘 봄소식을 찾아 남쪽을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버스에서 초암이 오늘의 풍류기행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강진에 도착해서 먼저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그리고 오후 6시경 숙소인 주작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한 후 저녁 풍류체험을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다음날에는 새벽 등산을 하고 아침식사를 한 후 백호 선생 유적지를 찾아본 다음 점심 겸 뒷풀이를 마치고 서울로 복귀한다는 계획이다. 일정 설명을 마치고 나는 아내가 준비한 김밥을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김밥으로 요기를 채운 일행은 서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첫 1박 2일 여행에 대한 흥분으로 밤새 잠못 이루고 뒤척였을 것이 분명하다.
버스는 중간에 두 번 쉬고 강진에 도착했다. 차가 밀리지 않았는데도 오후 1시가 거의 다됐다. 서울에서 강진까지 이렇게 멀 줄이야? 일정상 1시간이 벌써 초과되었다. 강진 땅이 이렇게 먼 곳에 있으니 귀양지로는 적격지였을 것이다. 우리 회원중 진봉 선생의 고향이 이곳 근방이다. 진봉 선생은 오랜만에 고향땅에 오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고향에서 버섯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에게 미리 연락을 해 놓았는지 친구분 내외가 버스가 도착하는 지점에 미리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친구분이 강진에서 제법 유명한 단골 음식점인 흥진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늦은 점심에 배가 고팠던 일부 회원들은 우선 술부터 찾는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여러 가지 남도 음식들! 입이 호강한다는 말은 이때 사용하는 말인가? 점심을 배불리 먹은 우리는 음식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의재(四宜齋)로 걸어갔다. 사의재는 다산 선생이 1801년 11월 23일 낯선 땅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을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며「경세유표」등을 집필하였다. 사의재는 당시의 초가집 형태로 지어져 있었는데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무 평상과 그 옆에 있는 작은 연못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참으로 멋스러운 집이었다. 아래채에는 지금도 술을 파는 주막이 있었는데 우리가 왔다 갔다 해도 주모는 나와 보지 않았다. 나는 ‘당시 다산이 이곳에서 4년을 살았는데 주막집 외동딸과 무슨 일이 없었을까?’ 하는 얄궂은 생각을 잠시 하다가 ‘죄인 신분으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신 다산에 대해 이런 불경스런 생각을 하다니?’ 고개를 저으며 사의재를 나왔다.
사의재를 둘러본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목에 최근 건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강진 인도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인도교는 중간 부분이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있는 섬을 거쳐 다시 이어진 다리로 제법 길어 보였다. 강진에서는 이곳이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는 곳인 모양이다.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인도교 중간에 서서 우린 사진을 몇 판 찍고는 다시 다산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유물전시관에 들어서자 마침 해설하시는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유물전시관에는 다산이 남긴 각종 서적과 수원 화성 축조 때 사용한 거중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해설사의 해박하고도 유창한 설명을 들으니 지난달 풍류기행 때 공부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났다. 특히 다산이 제자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에게 보낸 ‘매조도(梅鳥圖)’을 보며 아버지로서의 미안함과 사랑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부인이 보내온 치맛폭을 잘라 그린 매조도는 다산의 화가로서의 자질을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품이기도 했다. 유물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초당으로 가는 입구에 윤동환 前 강진군수가 운영하는 찻집에 들러 녹차를 마시며 다시 한번 다산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차를 마신 후 우리는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오래된 나무 뿌리들이 길을 가로막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서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울퉁불퉁한 산길과 나무 뿌리들이 다산의 굴곡 많은 삶을 닮아 있었다. 10분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아담한 다산초당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18년 중 10여년을 이곳에 머물렀다. 본래 초가지붕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기와로 개조했다고 하며 앞으로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18제자를 가르치며 ‘목민심서’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다산초당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바로 다산이 차달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했다는 ‘다조(茶竈)’였다. 그 옛날 다산의 제자들이 넓고 반반한 이 바위 위에 다기(茶器) 올려놓고 그 옆에 조그만한 아궁이를 만들어 산에서 주워온 마른 나뭇가지로 찻물을 끓였을 것이다.
초당 오른편에는 ‘연지석가산’이라는 조그만 연못이 있다. 당시에는 이 연못에 잉어가 몇 마리 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유배지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온 다산이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연못의 잉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잉어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잉어는 보이지 않고 이끼긴 석가산만이 쓸쓸히 옛 추억을 간직한 채 우리를 반겼다.
또한 초당 왼편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丁石)’이 있다.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바위에 새겨 넣은 것으로 그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잘 보여준다. 우리 일행 중 어느 분은 다산이 직접 새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다산의 글씨는 맞는데 돌에 새긴 사람은 전문적으로 글씨를 돌에 새겨 넣는 사람이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바위에 새겨져 있는 ‘정석(丁石)’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그 옛날 다산이 이 글을 새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다산초당을 옆 연지석가산을 지나면 동암이 나온다. 이곳은 다산이 ‘목민심서’ 등 5백여권의 책을 집필한 곳이다. 동암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천일각(天一閣)’이 보인다.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먼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았을 이 산모퉁이 자리에 강진군에서 1975년 세웠다고 한다. 천일각에 서서 나는 멀리 영산강 너머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오랜 유배생활에 그리운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독과 회한이 오죽했을까?
천일각 바로 옆에는 백련사로 가는 길이 나있다. 이길은 유배생활 동안 벗이요, 제자였던 백련사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길가에는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백련사 주변에는 야생 차밭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붉은 동백이 서울에서 온 낯선 나그네를 보자 수줍은 듯 푸른 잎사귀속에 살포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혜장선사는 술병을 끼고 주역과 논어를 배우기 위해 이 길을 수백번 오고 갔을 것이다. 200년 전 이 길에서 두 사람이 벌인 풍류가 지금 내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백련사를 두루 두루 살펴보고 나니 벌써 오후 여섯시가 넘었다. 어둡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린 서둘러 주작산 자연휴양림에 있는 펜션으로 차를 몰았다. 주작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 정상은 온갖 기암이 즐비한 화산(火山)이다. 설악산 몇 봉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멋진 풍광이 우리의 펜션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관리실에서 방 열쇠를 받아서 참가회원들에게 방을 배정했다. 여장을 풀고 씻고 있는 동안 지당과 야공이 저녁준비를 했다. 지당은 구수한 배추된장국을 끓이고 야공은 쌀을 씻어 밥을 짓는다. 8시경 다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데 쇠고기 등심을 안주삼아 술병이 오고 가니 입안이 즐겁다. 늦은 저녁이라 등심은 금방 동이 났고 배추국에 밥을 한그릇씩 먹은 후에야 회원들은 뒤로 물러나 앉았다. 식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한 후 나는 배낭에서 종이와 붓을 꺼냈다. 풍류기행의 품격에 걸맞는 서예풍류를 하기 위해서다. 각자 돌아가며 붓으로 본인 이름을 한자로 써보았다. 처음 붓을 잡아보는 회원도 있었지만 일부 회원은 제법 운필을 한다. 서예가인 백천 선생이 붓글씨에 대한 강의를 하니 다들 진지하게 듣는다. 서예풍류를 마친 우리들은 새벽부터 시작된 장거리 여행에 따른 피곤으로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주작산 등산을 하기로 약속하고 잠이 들었는데 어떤 회원이 다섯시도 안돼 일어나서 등산 준비를 한다. 같은 방에 투숙한 회원들이 따라 일어났다. 새벽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우리는 컴컴한 숲길을 더듬으며 정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어제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새벽이 되니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바람까지 불어 제법 쌀쌀했다. 다들 방한복에 모자를 눌러 쓰고 앞사람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지 채 한 시간도 안돼 정상에 도달했다. 주작산 여러 봉 중에 우리가 오른 봉은 덕룡봉으로 해발 475m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포즈를 잡는데 거센 바람에 몸이 날릴 정도였다. 부랴부랴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밑에서 올라오는 일행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여섯시에 출발한 회원들이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우리는 내려오고 그들은 올라갔다. 거의 하산할 무렵 동쪽 하늘이 밝아오더니 빨간 태양이 솟아올랐다. 한반도 남쪽 끝자락 주작산에서 바라본 일출! 나는 해를 바라보며 우리 자유행복학교의 발전과 회원들의 안녕을 빌었다. 펜션으로 돌아오자 우리 풍류기행의 음식풍류 교수인 지당 선생이 벌써 아침식사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출출하던 우리는 뜨거운 시래기국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늦게 일어난 회원들과 등산을 마치고 온 회원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나니 8시 30분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짐을 챙기고 커피를 한잔 마신 후 9시경 오늘의 기행지인 임제 선생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먼저 도착한 곳은 ‘백호문학관’이었다. 버스가 문학관 마당에 도착하자 담당 직원이 밖으로 나와 우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담당 직원은 “정식 개관은 4월 중순에 할 예정이지만 관람은 가능하다”며 우리를 전시실로 안내했다. 최근 지어진 문학관은 현대식 2층 건물로 내부가 깨끗하고 전시물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담당 여직원의 친절한 설명, 백호 선생에 대한 영상과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나는 백호 선생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백호 선생의 삶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백호 임제 선생(1549∼1587)은 조선 중기인 명종~선조 때 문인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자순(子順)이다.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로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진(晉)이며 어머니는 남원 윤씨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대곡(大谷) 성운(成運)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70(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나주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죽었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글이 유명한 물곡사(勿哭辭)이다. 평생 검(劍)과 옥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일과 기생 한우(寒雨) 및 일지매와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속리산에서 공부할 때 충청감사 아들에게 말오줌을 먹게 한 일화도 있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기개와 호방함은 그를 조선 제일의 풍류남아로 자리매김 시키는데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4권이 있다.
백호문학관을 관람한 후 우린 백호 선생이 당대의 시인묵객들과 풍류를 즐겼던 영모정을 찾았다. 영모정은 백호문학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호 선생이 이곳 나주시 다시면 회진에서 태어났으나 현재 생가는 복원되어 있지 않았다. 영모정은 백호 선생의 조부인 임붕(1486∼?)이 중종 15년(1520)에 지은 정자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하였으나 명종 10년(1555)에 후손이 다시 지으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2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었고, 비교적 오래 전에 지은 정자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영모정 앞에는 영산강 물결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양지바른 정자 마당에는 봄풀들이 벌써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백호 선생의 풍류를 생각하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다시 백호 선생의 무덤이 있는 다시면 가운리로 향했다. 영모정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기사님의 친절(?)한 투어정신으로 한참을 돌아서 묘소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한 후에도 묘소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또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계단을 발견했으나 계단이 너무 많아 일부 회원들은 묘소 등산(?)을 포기했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묘소까지 올라오니 숨이 턱밑까지 찼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올라오기 힘든 코스였다. ‘그래! 조선 제일의 풍류객 묘소가 길가에 있으면 안되지!’ 라고 자위하며 묘소에 도착해서 올라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양편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그 가운데로 영산강 하구가 훤히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와 목덜미 땀을 식혀준다.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편히 자는 듯 누워있는 백호 선생을 생각하며 아무 글자도 새겨져있지 않은 하얀 비석을 손으로 무심히 만져 보았다. 초암이 소주 한병을 꺼내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일행은 쭉 늘어서서 잠시 묵념을 했다. 묵념이 끝나고 남은 술을 서로 나눠 마시며 백호 선생의 시와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분위기에 취한 초암이 백호 선생이 평소 즐겨 불렀던 옥피리라며 단소를 꺼내 한 곡조 연주를 했다. 백호 선생 묘소에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신걸산 중턱에 자리잡은 백호 선생의 묘소에서 우리는 그렇게 3월 중순의 봄볕을 쬐며 이번 풍류기행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시간을 보니 점심때가 지났다. 우리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나주시내로 향했다. 차안에서 진봉 선생이 “조금 전 갔다 온 백호 선생 묘소 계단을 내가 내려오면서 세어보니 총 328개였다”며 “기행문에 328계단을 꼭 넣어 달라”고 말해 좌중이 크게 웃었다. 328계단이면 30층 빌딩 높이다. 나주시내에 도착해서 식당을 알아 보니 마침 일요일이라 음식점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지당 선생이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찾아 헤맨 후 우린 전통 한정식집 분위기가 물씬 나는 어느 허름한 음식집으로 들어갔다. 남도음식은 확실히 맛으로 말해준다. 어제 점심 때 처럼 여러 가지 반찬이 나왔는데 막걸리 안주로 안성맞춤이었다.
한 시간 가량 식사에 집중하고 나니 다들 포만감으로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초암이 재빨리 배낭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낸다. 명상시 몇 편을 프린트한 종이를 오늘 처음 참석한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시가 적힌 종이를 받은 회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 내려갔다. 다들 눈을 지그시 감고 시를 감상했다. 욕심을 버리고 좋은 친구들과 노후를 즐겁게 보내자는 흔한 내용인데도 회원들은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여러 회원들이 미리 준비한 삼행시를 발표했으며 영소님은 임을 그리는 가곡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한참을 즐기다 보니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이나 초과했다. 3월 풍류기행 마무리 멘트와 건배를 마치고 우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오늘 기행에서 느꼈던 부분들을 모두 한마디씩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3월 풍류기행의 주제는 다산 장약용과 백호 임제이다. 지난 2월에 다산 선생에 대해 충분히 알아봤으니 이번에는 백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한다. 백호 선생은 기질이 호방하여 예속(禮俗)에 구속받기를 싫어했고, 당리당략으로 발전의 동력을 잃은 당시 시대를 비판하며 저항적인 태도를 굳게 지켰다. 또한 호방한 기상과 탈속적인 생활태도로 후세에 많은 일화를 남겨 ‘풍류남아’로 불려 졌으며, 민족의 자주와 애국에 대한 남다른 각성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글로 표출한 위대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다산과 백호의 풍류정신을 기리고 자연과 함께 호연지기를 기른 이번 풍류기행에 바쁜 일정을 마다하고 참석한 회원들께 감사드린다’는 막바지 인사를 한 후 창밖을 보니 벌써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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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박 2일로 다녀온 풍류기행이라 내용이 좀 깁니다~
그래도 빠진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참석하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4월 풍류기행에서 더욱 즐겁고 운치있는 프로그램으로 모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