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4세대 중형 세단 로체가 태어났다. 쏘나타 감각의 기아 세단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생각을 고쳐먹도록. 콩코드 탄생 이후 18년, 기아는 이제서야 제 색깔을 지닌 중형차를 갖게 됐다.
여자가 스무 살 안팎이 되면 ‘방년(芳年)’이라는 수식어가 흔히 붙는다. 한자어 그대로 꽃 다운 나이라는 의미. 꽃 다운 나이가 되면 여자와 여성의 경계에서나 보여질 수 있는 오묘한, (좋은 의미에서의) 색기가 흐른다. 싱그러운가 하면 섹시하고, 풋풋하더니 노련미가 묻어난다. 부모님께 의지해 마냥 어리광만 부리던 녀석이 이제서야 사람 구실 한다는 소리도 듣게 된다.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씩 자기 색깔을 찾아간다.
팔십 인생의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자동차도 사람의 방년 즈음이 되면 ‘한 칼’까지는 아니어도 무엇이든 ‘한다’ 싶은 모습을 보여줘야 마땅하다. 지난 십 수년의 존재감이 아무리 흐릿했더라도 말이다. 기아의 족보대로라면 그들의 중형 세단은 이제 4세대째를 맞이했다. 지난 1987년의 콩코드를 시작으로 95년 데뷔한 크레도스가 2세대, 2000년의 옵티마가 3세대다. 지난 11월에는 이들의 계보를 따르는 신형 로체가 태어났다. 이 차를 만들어낸 기아도, 이를 받아들일 시장도 로체가 지난 18년 동안의 선조들과는 다른 모습, 다른 결과이기를 기대한다. 최신 중형 기아는, 일단 방년의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은 듯하다.
세상은 2천700억 원의 개발비가 들어간 로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무얼 닮았네, 개성이 흐릿하네 등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부터 구조적으로 현대 쏘나타와 다른 게 무어냐는 엔지니어링 측면의 추측성 발언까지. 긍정적 비평은 어느 영역에서나 필요한 일이지만 몰이해에서 오는 비판이나 경직된 사고에서 비롯된 비난은, 그것이야말로 비판 당하고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이다.
최근의 자동차 시장은, 모방의 흔적은 있으되 증거가 충분치 않은 디자인이 범람하고 있다. 생산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부품 공용화와 플랫폼 공유도 더 이상 어느 한 자동차 그룹만의 사례가 아니다. BMW의 수석 디자이너는 아우디와 벤츠의 감성 디자인이 BMW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고, GM은 하나의 아키텍처에 감성적 터치를 달리하며 예닐곱의 브랜드 이름으로 판매한다. 현대와 기아 역시 적극적 플랫폼 공유 전략 아래 세계 시장을 겨냥한 전략 차종을 선보이고 있다. 요지는 현대와 다른 기아, 기아가 아닌 현대차를 만드는 두 브랜드의 방향성이 디자인, 편의성, 주행성능이나 운전 감각 등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느냐의 문제다.
로체의 스타일링은 싱그럽지만은 않다. 산뜻하거나 열정적이지도 않고,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 흡인력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 모든 수식어를 인위적으로 억압하고 절제한 흔적이 역력하다. 플랫폼을 함께 쓴 쏘나타가 단정하면서도 날쌘 느낌을 세련되게 살려냈다면, 로체는 대형 세단에나 어울릴 법한 큼직큼직한 덩어리로 무난함을 표현했다. 동그랗게 말린 부피 큰 헤드램프는 4개의 타원을 가지런히 겹쳐놓은, 가로로 기다란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와 연관되지 않는다. U자형의 주름을 넣은 볼륨감 있는 보닛은 반듯반듯한 리어 엔드 디자인과의 맥을 잇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사선 방향에서 바라본 앞모습이 제법 세련됐고, 대각선쪽에서 지켜본 뒷모습 역시 뜻밖에 탄탄한 분위기다. 헤드램프나 라디에이터 그릴 디자인이 무슨 차를 닮았든, 앞뒤 덩어리를 쏙 빼놓고 본 옆 모습이 희한하게 익숙하든 그건 흔적일 뿐 결정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이 같은 ‘부조화 속의 조화’가 일관된 틀 안에 정리되어 기아 승용 라인업의 전체를 아울러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엔트리급의 모닝부터 프라이드, 쎄라토를 거쳐 지금의 로체에서 오피러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천차만별인 얼굴 속에서는 기아 패밀리라는 흔적을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로체의 부드럽고 무난한 자태는 그러나, 이 차가 중형 패밀리 세단임을 감안했을 때 단점이라고만 치부하기 곤란하다. 브랜드 인지도와 품질, 색다른 개성이 ‘성공 전략’의 필수라지만, 가족과 사회적 체면까지를 골고루 계산해봐야 할 이 급 시장의 고객(대체로 한 집안의 가장일 가능성이 높다)은 여전히 로체와 같은 보수적인 차에 높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낮고 늘씬하던 옵티마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다. 로체의 길이와 높이는 구형보다 각각 10mm, 60mm씩 늘어났다. 휠베이스 역시 20mm 늘어난 2천720mm. 헤드룸과 레그룸의 여유를 기대해도 좋겠다.
뒤 오버행은 길게 빠졌고 뒤 트레드의 여유도 남다르다. 더구나 트렁크 리드는 높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차의 트렁크 룸은 420ℓ라는 적재용량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넉넉하고 황량하다. 입구가 넓어 짐을 부리기 쉽고 바닥은 알맞은 높이까지 내려앉아있다. 트렁크 안쪽은 양 옆은 물론 위아래 공간도 충분해 언뜻 스쳐봐도 공간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느낌이다. 기아에 따르면, 이 차의 트렁크에는 골프백 4개가 거뜬히 들어간다고 한다. LPG 충전 탱크를 싣더라도 적재공간이 크게 비좁진 않을 듯하다.
로체의 인테리어 테마는 기능성. 면적 넓은 대시보드의 앞면을 짙은 갈색의 우드 그레인으로 치장하고 티타늄 질감의 내장재와 메탈릭한 분위기의 액센트로 스포티한 분위기를 한껏 살렸지만 이마저도 기능적이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진다. 무엇보다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익숙한 디자인이라 참신하지 않다는 얘기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거부감이 적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쪽에 가깝다.
조수석 도어 트림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운데로 올수록 점점 불룩 솟아오르는 대시보드는 기능적 디자인의 진수. 조수석 승객에게는 압박감을 주지 않고 운전자는 스티어링 휠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진 센터페시아의 장비를 손쉽게 다룰 수 있어 좋다. 운전석을 향해 살짝 방향을 틀어둔 센터페시아에는 AV 시스템(이 대신 스테레오 혹은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들어가기도 하는 자리다)과 에어컨처럼 쓰는 일이 잦은 장비만 간추려 담아뒀다. 두 개의 큼직한 다이얼로 조절하는 전자동 에어컨은 더 훌륭하다. 다이얼은 부드럽지만 절도 있게 돌아가고 열선, 내외기 등의 부수 기능 버튼도 큼직큼직해 쓰기 편하다. 무엇보다 처음 접하는 사람도 금세 익혀 쉽게 쓸 수 있는 직관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은 타코미터와 계기판을 중심으로 한 트윈 서클 타입. 각각의 원 아래에는 냉각수 온도와 연료 게이지가 부드러운 그래픽의 바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의 마름모꼴 액정에서는 외기온도, 적산거리계, 주행가능거리 등 트립 컴퓨터의 운전 정보가 표시된다. 간단한 구성이라 눈에 쉽게 들어오고 미터 바늘 주변으로 파란색의 두터운 띠를 입히는 등 패션 감각도 그만이다. 디지털 방식 냉각수, 연료 게이지에 멀티 플레이어적 성격(잔여 연료량이나 순간 연비 표시 기능 등)을 부여했더라면 한층 감동적이었을 텐데. 중형 세단의 트립 컴퓨터라면 평균 연비 기록 기능 정도는 지니고 있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실내공간에는 미국 시장을 겨냥한 듯한 편의장비가 여럿 눈에 띈다. 인테리어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는 다이얼을 ‘딸깍’ 소리가 나도록 끝까지 올리면 뒷자리 독서등이 실내를 환히 비춘다. GM이나 크라이슬러 디비전 제품에서 흔히 보여지던 기능. LEX24(2.4ℓ 엔진) 모델에만 마련되는 전동식 페달 어저스터 역시 고급 미국차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비다. 로체의 향상된 감성품질은 이밖에도 인테리어 곳곳에서 드러난다. 덮개 안쪽에 접이식 지지대를 달아둔 컵홀더는 분명 과거의 기아 차답지 않게 세심한 모습. 센터페시아 아래로 놓인 수납공간은, 비록 덮개를 여닫는 게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지만, 마치 고급 서랍 장인 양 깔끔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요즘의 패밀리 세단 시장은 한 가족을 위한 편안한 공간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공간이 여유로운 것은 기본이요, 운전자가 즐거울 수 있는 인테리어 구성까지 기대한다. 로체의 인테리어는 첫 느낌이 무척 좋다. 직물 소재에 가죽 내장을 두른 시트는 야무지게 몸을 떠받치고, 살짝 감아본 스티어링 휠은 단호한 느낌이 물씬하다. 차체는 액셀 페달을 가볍게 건드려도 경쾌하게 움직이고 과속 방지턱을 넘어갈 때면 탄탄한 하체 감각이 전해온다. 금방 차를 움직여 출발했을 뿐인데 운전 감각에서는 벌써부터 예전과 다른 양질의 품질감이 느껴진다. 운전이 즐거우리라는 기대감을 준다.
고속도로에 합류하고 나면 차를 다루는 솜씨가 한층 과감해진다. 스티어링을 힘차게 돌리고 반응이 빠른 엔진을 마음껏 요리한다. 이제 겨우 100여km를 달렸을 뿐인 새차건만 거칠게 다루고 싶은 유혹이 점점 더 커져 간다. 그런 유혹을 순순히 따라준다는 게 더 기특하다. 조금 더 다그치고 싶은 유혹에 휩싸이지만 운전 자세에 대한 아쉬움도 그만큼 불어난다.
로체의 계기판은 위치가 낮고 스티어링 칼럼은 틸팅 각도가 좁다. 그리고 전동 레버를 아무리 짓눌러도 더 이상 낮아지지 않는 전동 시트. 히프 포지션이 높은 시트는 운전시야를 확보하기에 좋다. 그러나 도로와 계기판, 센터페시아 등으로 이동하는 시야의 폭도 함께 커져 안전성도 쉽게 떨어진다. 차의 무게중심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멀어진다. 구불구불한 지방의 국도를 세차게 뒤흔들고 다닐 때면 운전자의 몸도 그만큼 크게 흔들려 불안감이 커진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에게, 불안정한 운전 자세는 로체의 가장 큰 흠으로 비춰질 수 있다.
엔진은 4기통 2.0ℓ의 세타 144마력. 6천rpm에서 최고출력을 내고 4천250rpm이면 19.1kg·m의 최대토크가 나오는 이 엔진의 가속력은 대단하달 것 없다. 0→시속 100km 가속 11.5초의 성능은 스포티하네, 화끈하네 운운할 수준이 못 된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가속력은 중형 패밀리카로 손색 없는 무난한 수준. 날카로운 맛은 떨어지지만 이 차는 배기량의 여유를 등에 업고 힘차게 달리거나 엔진의 치밀한 감각을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400여만 원을 더 투자하면 2.4ℓ 엔진으로 166마력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숨가쁜 가속과 고속주행의 연비를 높여줄 5단 기어박스도 마련된다. 시승차인 LEX20은 동력 전달이 의심스러운 자동 4단을 얹는다. 액셀 조작에 따른 변속 반응은 상당히 민감한데 기어를 바꿔 달 때의 충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체 점성 토크 컨버터가 슬그머니 힘을 빨아들이는 느낌이다. 운전의 재미를 더하는, 팁트로닉과 흡사한 수동변속 기능이 위안거리. 6천200~6천300rpm의 한계회전수에 이르면 자동으로 변속을 해치우는 ‘완전 자동식 수동 기능’이긴 해도 가속력의 장단을 운전자가 제어할 수 있어 추월가속 등에 요긴하게 쓰인다.
기아의 중형차 제작 18년 자산은 그러나, 세련미가 떨어지는 파워트레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안락한 승차감을 얻어내기 위해 운동성능을 포기하다시피 하던 과거의 구태의연한 차 만들기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이 반갑다. 차를 처음 다룰 때 느꼈던 만족감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릴 때까지 이어진다는 게 기특하다.
속도 감응식 스티어링 시스템의 성능은 정말 기대 이상. 저속에서는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도 손쉽게 다룰 수 있을 만큼 가볍지만 속도를 올리거나 완만하게 휜 도로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야무진 응답성을 드러낸다. 고속도로의 일반적인 주행 속도인 시속 100~120km 정도가 되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색이 사라지고 프런트 휠과의 직접적인 피드백이 이뤄진다. 스티어링은 언제든 중심으로 돌아오려는 성향이 강하다. 앞 바퀴에 무게가 많이 실리는 급 코너에서는 아무래도 정교함이 떨어지는 편. 그러나 빠르고 힘찬 복원력이 와인딩 로드에서의 기민한 움직임을 돕는다.
앞 맥퍼슨 스트럿, 뒤 멀티링크 구조의 서스펜션은 차체를 수평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짙다. 각도가 큰 코너에서는, 들어설 때 몸을 알맞게 기울이고 빠져 나올 즈음이면 재빨리 자세를 추스른다. 댐핑 스트로크가 비교적 짧아 차체를 수그렸다가 솟아오를 때의 움직임이 빠르고 단호하다. 탄탄한 조향 성능과 탄력 있는 하체는 핸들링을 빠르게 한다. 묵직한 느낌의 노즈는 정확하게 자리를 찾아 들고 리어 엔드가 군더더기 없이 뒤따른다. 서스펜션은 노면 정보를 읽는 재주가 뛰어나다. ‘드라이빙은 반응이다’라는 문구가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이 차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는 슬로건이다.
브레이크는 기아의 독특한 감각이라기보다는 그룹 내 형제 브랜드인 현대의 색깔에 가깝다. 빠른 초기 반응에 이어 알맞은 제동력으로 속도를 성큼 줄여나가지만 강단이 있어 뵈거나 경쾌한 느낌은 아니다. 액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오른쪽으로 미약하게 비틀리는 스티어링 휠이 아쉽다. 횅하니 비어있는 공간을 마다하고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치우쳐있는 엔진 위치 때문에 토크 스티어가 나타난 셈인데, 운전을 까다롭게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 다행스럽다.
무던한 외모에 감춰진 기대 이상의 탄탄한 운동성능은 이 차의 분명한 경쟁력이 될 듯. 승차감과 운동성능을 고루 갖춘 해외의 쟁쟁한 라이벌과 당당히 맞서 싸울 만하고, 플랫폼을 공유한 쏘나타의 감각과도 어느 정도의 차별화를 두는 데 성공했다. 꽃 다운 나이에 이른 기아의 주력 차종답게 한껏 물오른 감각이 반갑다. 중형차의 잠재 고객은 구매 대상 목록에 현대 쏘나타와 르노삼성 SM5를 우선 순위에 둔다. 그건, 독자적인 주행 감각이나 품질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시장에서 대접 받을 수 있는 브랜드의 힘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기아는 이제 그들을 이끌 대표 브랜드를 마련해야 한다. 매번 새차가 나올 때마다 산뜻하거나 심오한 작명에 진을 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콩코드나 크레도스, 옵티마가 그리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 못해 굳이 그 이름에 매달릴 필요성이 적다고 판단한 것이라면, 로체를 통해 지금부터라도 브랜드의 힘을 키워가는 것이 좋다. 해외 시장에서는 적어도 마젠티스(유럽)와 옵티마라는 이름을 꾸준하게 밀고 있지 않은가.
(출처: 톱기어 한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