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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작가들] 2006년 겨울호 대담
역사를 가로질러 작가의 길을 묻다
- 소설가 이원규 선생과의 대담
일시 : 2006년 11월 15일 오후 1시~3시
장소 : 인천 연수구 선학동 이원규 선생 자택 서재
대담 : 이희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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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항일 독립투사 김산의 일대기를 새롭게 조명한 김산 평전(실천문학사)을 상재한 소설가 이원규(李元揆) 선생을 만나 선생의 문학세계를 들었다. 이원규 선생은 인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동안 인천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발표하여 분단문학의 영역을 확대해 왔으며 10여 년 간 항일독립투쟁의 현장을 발로 뛰어 다니면서 묻혀버린 역사를 발굴하고 이를 대하소설로 발표한 바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를 바탕으로 전기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늦가을 오후 자택에서 김산 평전의 출간을 계기로 이원규 선생의 소설세계와 앞으로의 계획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김산 평전의 작가, 그의 유년시절>
이희환 :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인천의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문제로 번번이 찾아뵙는다는 전화만 드렸다가, 선생님께서 귀한 책을 내시게 되어서야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네요.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이원규 선생님이 인천대건고등학교에 재직하실 때 제가 대건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인상이 굉장히 무서운 선생님이셨는데, 이렇게 작가들에서 대담 자리를 마련하여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고 보니 그 시절 선생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선생님, 이번에 출간하신 김산 평전이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실감하고 계신가요?
이원규 : 네, 평전․인물․역사 부문 1위라고 하네요. 비교적 잘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 평전이 1위였는데,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0)이 워낙 스테디셀러니까 그 출판사의 시리즈에 들어 있어 덩달아 선전하고 있는 거지요. (웃음)
이희환 : 네, 아주 반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럼 본격적인 대담에 앞서, 먼저 선생님의 과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작가가 된 동기라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이원규 : 지금 인천서구문화원의 정인표(鄭仁杓) 원장이라는 분이 계셔요. 인하대 행정학과 정일섭 교수 부친이시거든요. 정 선생님이 내가 서곶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그런데 선생께서 아동문학가나 작가에 대한 어떤 신망이나 생각이 있었는지 유난히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 글짓기를 강조했어요. 지금은 연로하셨지만 카리스마도 있었던 분이셨고, 한때는 교장과 교육장 등 교육 관리직에도 계셨던 분이었어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의 젊은 시절 풍모는 풍금 잘 치고 음악도 잘 하고 글짓기 잘 하는 그러신 분이었어요. 정인표 선생님 덕분에 처음 작가로서의 토양을 닦은 것 같습니다. 정 선생님이 아마 내가 작가가 된 걸 제일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인천시내 백일장에 나가 학교에 돌아올 때마다 상장을 들고 왔단 말이죠. 어쨌든 그런 걸로 눈을 뜬 것 같아요. 어려서 글을 쓰는 게 좋고 글을 쓰면 잘 쓴다는 칭찬을 받고. 시작은 그렇게 됐지요.
<향토사학자이신 선친 이훈익 옹의 늦공부>
이희환 : 선친이신 고(故) 이훈익(李薰益) 선생님께서 인천향토사 연구에 이뤄놓으신 업적이 상당하고, 그래서 선친에 대한 궁금한 점도 많습니다.
이원규 : 우리 할아버지(李賢新)가 부평 향교를 대표하는 전교(典敎)였어요. 옛날 부평이라는 게 오늘날의 부평, 계양, 서구를 총괄하는 넓은 곳이잖아요. 조부께서 거기 대표를 했으니까 굉장히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그런 집안이었지요. 아버지는 인천 의료계 이영호 박사, 신현정 변호사와 동기거든요. 아버지가 나오실 무렵이 소학교인지 보통학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부평소학교의 두 동기 분한테 들으니까 아버지는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고 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형제가 많아서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공부를 더 못하고 소 꼴이나 베고 그랬다고 해요. 그러다가 옛날 서곶면사무소(부천군에 속했음)에서 아버지를 데려다가 대필시키거나 그런 일을 시켰던 것 같아요. 공부도 잘하고 문장을 잘 만드니까 임시직으로 불려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면장이 아버지를 좋게 봤나 봐요. 1년 단기 수련으로 공무원을 키우는 과정에 보냈고 그걸 마치고 열아홉 살에 면서기를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공무원을 시작하신 겁니다.
해방되고 나서 4·19 이후 김정렬 시장 시절에 아버지가 중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사무관급들이 권고 사직됐었는데 아버지도 그때 해직됐어요. 그런데 그 당시 해직은 요즘의 해직하고는 틀렸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밑에서 계장 하던 분이 1년 반 동안인가 월급봉투를 가지고 왔거든요. 박정희는 해직을 시키고도 그냥 내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월급봉투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살던 기억이 나요. 그 후 군사정부에서 알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예농협으로 가셨거든. 거기 전무대리로 가서는 나중에 전무를 하셨어요. 그러다가 정년퇴임을 하시고······. 우리 형님 댁에 가면 수석(壽石)이 많은데 수석 모으기를 한 3년 하셨어요. 그러더니 “아, 나 해야겠다, 나 이젠 공부 해야겠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곤 인천 역사 공부를 하시더라고.
아버지는 어려서 한학을 하셨거든요. 여담이지만, 내가 동국대에서 양주동(梁柱東), 이병주(李丙疇) 선생님한테서 고전과 한문을 혹독하게 배웠어요. 그래서 <월인천강지곡>이나 <용비어천가>를 해석하라고 하면 하거든. 물론 대건고에서 고3 국어도 맡았지만. 지금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백지에다 쓰라고 하면 거의 90% 완성할 것 같아요. 원문 자체를 한문으로 완성하라고 해도. 그런데 아버지는 나보다 한문 실력이 뛰어났어요. 나도 대학에서 좋은 선생님 밑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도 더러 한문 선생을 했는데 나는 아버지가 <조선왕조실록>에 점찍어 놓은 거 보고 겨우 알겠거든요. 어디서 띄어 해석하는지도 몰랐는데 말예요.
그 후 아버진 고지식하게 공부를 하시더군. 십 년이 지나 일흔다섯 살쯤이 되니까 아버지 친구들이 “여보, 그거 안고 갈 거야? 책을 내야지.” 해서 아버지가 책을 일곱 권인가 여덟 권인가 내놓으신 거예요. 아까운 건 아버지가 공부를 더 해서 대학을 나오셨으면 큰 정리를 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도 인천 향토사에 대해서는 안목이 트이셨으니까, 철저하게 인용처를 밝히고 종합해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자비로 그걸 일곱 권인가 여덟 권인가를 책을 내셨어요. 그런 점이 좀 아쉽죠. 내가 아버지 집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앉아서 작업을 할 때가 있었거든. 그러면 아버지와 내가 서른한 살 차인데 아버지가 정신 집중력이 더 강한 것 같았어. 그래서 노년에 왕성하게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향교 전교를 지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부평사(富平史)를 쓰라고 말했대요. 부평이 원래 인천과는 다른 문화권인데…, 비록 가난했지만 할아버지는 본인이 향교의 전교를 지냈기 때문에 계양, 부평, 서곶 쪽에서는 우리 집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께 “우리는 비록 징멩이고개 너머 살고 있지만 부평의 중심 가문이야.” 하고 말씀하시더니 “네가 부평사를 쓰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유지 때문에 아버지가 육십 넘어가지고 예순다섯이 돼 공부를 하셨단 말이죠. 책을 낼 때 처음에는 내가 책의 구성을 잡아드리고 챕터마다 균형을 잡아드리곤 했어요.
이희환 : 선친께서 인천향토사에 남긴 업적뿐만 아니라 이후 서구문화원 창립에도 깊이 관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원규 : 아버지가 오늘날로 따지자면 구청장을 세 군데나 하신 거예요. 서구, 남구, 북구 등이죠. 그래서 인천 시내 사람을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죠. 얘기 좀 할 줄 아는 노인들을 다 알았을 거 아니에요? 또 선친, 그리고 내 할아버지와 관계하시던 어른들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인천의 문화가 멸실되기 전에 직접 채록을 하셨단 말이죠. 아버지가 그런 걸 안하셨다면 아마 지금 다 사라졌을 것 같아요. 어쨌든 서구문화원을 창립할 당시에 아버지가 85세였는데 ‘서구문화원 주비(籌備)위원장’을 맡았어요. 나는 반대를 했지. 구청장에게 “우리 아버지가 협심증이 있어서 은가락지를 심장 속에 세 개나 넣고 계신데, 게다가 작년에는 개심수술까지 했는데 노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걸 맡기면 되냐.”고 따졌지. 그랬더니 구청장이 “어르신네밖에 할 사람 없는 걸 어떡합니까?” 그러는 거야. 내가 아버지께 “뭐, 그런 걸 하세요?”하고 만류했더니, 아버진 “내가 하지 않으면 응집이 안 되잖아.”하고 말씀하셨어요. 결국 ‘서구문화원 주비위원회’ 모임을 주재하시다가 서구 부청장 방에서 쓰러져 돌아가셨어요. 부구청장 방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우리 형제가 임종을 못 봤어요. 그래서 당시의 부구청장과 문화홍보과장이 자기들이 임종을 봤다고 자기들도 아들이라고, 볼 때마다 그래요. 아버진 비록 자식들을 벌어 먹이려고 고생을 하셨지만 생의 후반 말년 20년 동안에 좋은 일을 많이 하셨지요.
이희환 : 선친께서는 젊은 후학들 이상으로 향토사학자로서의 열정과 인내를 보여주셨는데 이원규 선생님도 선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이원규 : 아버지의 열정과 인내가 나한테도 큰 도움이 됐어요. 나이가 들면 문단에서 밀려가잖아요. 출판사에서도 소설을 내자는 말이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지금도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아버질 닮은 것 같아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게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지난 2년 아니, 3년 동안 원고를 5,000매를 썼거든. 원고지 5,000매라는 게 정신적 건강이나 총기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에너지 그런 것이 없으면 쉽게 쓸 수 없잖아요. 대부분 작가들이 40대에 반짝하다가 그냥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뭐 펜클럽이나 문협이나 왔다갔다가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그런데 난 지금도 꾸준히 쓰거든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게 그게 아닌가. 아버지한테 영향 받은 것은 그런 게 있겠죠.
이희환 : 선친께서 이뤄놓으신 인천향토사에 대한 업적과 자료들을 이제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도 있고 또 그것을 발전시켜야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이원규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하던 작업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하는 문제가 나왔어요. 대충 세 가지 방안을 가지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 안은 인천역사자료관에 보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천의 시립도서관에 아버지 자료를 보내는 방법, 나머지 하나는 아버지가 준비하다 쓰러지셨던 서구문화원에 보내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어요. 형제들이 내게 판단을 맡겼어. 고민이 됐었죠. 아버지가 이룬 업적 중의 하나가 화도진(花島鎭)의 고지도를 발견한 거예요. 시에서 화도진을 복원하려고 하는데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선생의 소묘밖에 흔적이 남아있는 게 없었어요. 그때 그걸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아버지가 화도진의 고지도를 발견했던 겁니다. 그래서 엎어버리고 다시 했지요. 화도진도서관도 그런 의미로 생긴 것이죠. 화도진도서관 관장을 만났더니 한 코너를 주겠다고 그래요. 아버지 흉패도 달아주고. 그런데 서구문화원이 창립이 되면서 정인표 선생이 원장을 맡았고 정인표 선생이 우리 형님과 나를 담임 맡았던 인연도 있고 형님이 부원장이라 결국 서구문화원으로 아버지가 모아놓은 자료를 보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사장이 된 것 같습니다. 멸실은 되지 않았겠지만 전시도 안 되고 정리도 안 된 것 같아요. 아니라면 죄송한 일이지만. 어쨌든 차라리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역사자료관에 주거나 아니면 내가 작업실을 내면서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 간판을 이어받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요. 그게 아쉬워요. 그런데 소설장이인 내가 그걸 받아서 거 뭐 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러나 아버지한테는 죄송해요. 마지막 판단이 사실 나한테 맡겨져 있었는데요.
어쨌든 아버지가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인천향토사에 기초와 뿌리를 놓았고 향토사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세상에 던져놓았던 점, 그리고 인천이 서울의 어떤 변두리 주변 문화권 중 하나가 아니라 인천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낸 업적 때문이겠지요.
이희환 : 시립박물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선친 이훈익 선생님이 근거를 남겨놓지 않았지만 찾아 놓으셨던 사실들이 최근 들어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까 앞으로 후배 학자들이 후속 연구를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선친께선 선생님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지니셨는지요?
이원규 : 내가 동국대 국문학과에 다니다가 특전사에 입대해서 낙하산 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 전쟁터에 갔다 왔어요. 그때 나보다 두 살 위인 군대 동기가 경찰 간부후보생이 됐습니다. 그 친구 말이 경찰 간부후보생 시험을 보면 현역 복무, 월남전 참전, 특전사 출신에게는 각각 5%씩 점수를 더 준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나오면 또 점수를 더 줬대요. 그러니까 그 친구 말이 경찰간부 되는 게 “가산점 특혜가 합하면 20퍼센트 아닌가. 너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라는 겁니다. 동국대 국문과에서 경찰행정학과로 전과하는 것은 원서만 쓰면 가능했거든요. 당시 그 대학에서 국문과가 제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제 동기가 경찰간부후보생 교육을 받고 있는데 걔가 그러는데 다른 애들은 75점이면 붙는데 저는 65점만 받으면 경찰간부가 된대요.”하고 여쭸더니 “야, 너 그냥 국어 선생 해라.” 하시는 겁니다. 당시에는 동국대 국문과 나오면 국어 선생은 따놓은 것이니까. 아버지는 내가 작가가 될 줄을 미리 알았는지 “나는 아들이 경찰하는 것 싫다.”고 하시면서 국어 선생 하라 하셨어요. 권력 지향적인 분이었다면 경찰로 가라고 했겠지요. 그때 한번 흔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간부후보생으로 갔으면 나중에 아마 경찰서장까지 했겠죠.
<치열했던 작가 입문의 길>
이희환 : 문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작가 수업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이원규 : 인천고 동기 중에 시인 조우성, 정승렬, 그리고 KBS 앵커 했던 박대석, 그런 친구들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을 했는데 나는 안 했어요. 할 생각도 없었죠.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한 번도 백일장에 나간 적도 없었어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요. 고1 때는 인천고 교지 미추홀에 오페라 해설을 썼었어요. 누님 덕분에 고전음악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들었죠. 그런데 고3때 극심한 류머치스열에 걸렸어요. 그때 이듬해까지 오래 투병하면서 소설 읽기에 빠지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동국대 국문과에 진학했어요.
대학생 시절엔 술 마시고 토론하는 문화가 대단했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국대 국문과에는 소설 교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선배들로부터 소설을 배웠어요.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야단맞으며 소설을 쓴 걸로 1학년 때 동국대 문학상을 받았죠. 그리곤 그때 착각에 빠졌지. 나보다 3, 4년 나이가 많은 복학생 선배들을 물리치고 문학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졸업 때까지 반액 장학금을 받았으니까. 그때 소설로 완전히 돌아버렸지. 그때 상을 안 받았으면 글을 안 썼을 것 같아요. 이후에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쪽으로 글을 쓰다가 군대에 갔어요.
그런데 동국대 문학상 수상 이후 작품공모에 여덟 번을 시도해서 최종심까지 여섯 번 올라갔다가 번번이 떨어졌어요. 이건 나중 얘긴데, 언젠가 나보다 문단에 두 해 먼저 나온 문순태 선생을 만났더니 문순태 선생도 다섯 번을 떨어졌대. 같은 공모에서 최종심까지 함께 올라갔다가 같이 떨어졌던 사람들이었으니까 둘이 만났는데 통성명하고 나선 말이 필요 없었어. 그런데 또 이순원을 만났더니 이순원이 “형은 나보다 덜 떨어졌다”고 그러더라고. 자기가 더 떨어졌다고 해서 웃었죠. 문학사상에서 ‘나의 문학수업 시절’이라는 시리즈물을 연재했고 나도 썼는데 이순원이 그걸 본 거지요.
군대를 특전사로 가서 베트남 전쟁터까지 갔고 낙하산을 삼십 번 이상 탔어요. 베트남에서는 자동소총 들고 장거리 정찰을 나갔지. 참, 이후에 현대문학 장편공모에 당선된 훈장과 굴레는 군 제대 15년 뒤에 쓴 건데, 그건 민사심리전 장교 얘기를 쓴 거야. 나는 민사심리전 부서에는 있지 않았어요. 그 소설에서 ROTC 장교 세 명을 얘기했는데. 내가 체험했던 것은 아니란 말이죠. 배경이나 그런 것들은 맞지만.
선생님들이 고마운데, 내가 동국대에서 선생님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동국대에서는 시인은 많이 나왔는데 작가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 당시 선생님들이 내가 복학해서 왔을 때 한 번 두 번 문단에서 떨어지니까 두 번만 출석해도 학점을 그냥 줬어. 그리고 어디 강화에라도 가서 글을 쓰라고 보내기도 했어요. 그런 바람에 잔뜩 소설적 물이 올랐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재학 중에 등단할 정도의 수준이 된 것 같고 또 그럴 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불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운이라기보단 늘 2등을 하는 거, 그게 내 한계였던 것 같아.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됐으니까요. 난 최종심에서 2등 한 게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서 보니까 어렸을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꼭 2등을 하는 거야. 그러다가 서른일곱 살에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나오게 되었던 거지요.
이희환 : 네, 지금 말씀을 들으니까 등단하기 전까지는 여러 번 좌절도 겪으셨고 늦깎이로 문단에 나오셨는데, 한동안을 전혀 글을 안 쓰신 거지요?
이원규 : 내가 붓을 꺾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대학 4학년 때 우리 국문과의 조연현(趙演鉉) 선생님이 현대문학 주간으로 계셨는데, 당시에는 선생님이 주간인 잡지에 선생님 모르게 장편을 써서 응모하는 게 미덕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시도를 해서 현대문학 창간 20주년 장편공모에 응모를 했는데 여기서도 2등을 했어요. 그게 한으로 남았어요. 당시 당선작이 내 작품보다 솔직히 못했어요. 조연현 선생님의 친구 분이 당선됐던 거야. 그 참에 붓을 꺾었죠. 그래서 곧바로 교사 임용고시를 보고 인천으로 내려왔어요. 학교 선생을 하면서 테니스도 치고 여행 다니고 한동안 행복하게 살았어요. 소설 다 제쳐두고 말이죠. 결혼을 했고, 애도 낳았고.
그러다 다시 작심을 하고 월간문학을 통해 어렵게 문단에 나왔어요. 문단에 선후배들도 많았는데도 등단 이후 문단에서 원고 청탁서가 거의 안 왔어요. 그런 가운데 대학 선배 조정래 형만이 나를 좋아했어요. 당시 조정래 형이 한국문학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다른 기성작가들이 원고를 펑크 내면 내게 전화를 해서 “원고 갖고 와라” 해서 몇 번 작품을 실은 것밖에 없었어요. 월간문학하고 조정래 형한테서밖에 원고청탁을 받은 게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괜히 문단에 나왔다 싶었어요. 절치부심을 했지요.
그러던 중 어느 날 내가 10년 전에 떨어진 현대문학에서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 공모 공고가 나온 걸 보게 되었어요. 나는 그 책을 들고 교실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제자들한테 “네 담임이 십 년 전 이런 한을 맺고 고향 인천에 왔는데 난 이걸 쓸 것이다. 너희들은 학력고사 공부를 해라. 너희들의 시험이 끝날 무렵 나도 결과를 받을 것이다. 우리 시합을 하자!” 하고 말했죠. 그리곤 교실 뒷자리에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 얼마나 처절했냐 하면, 함께 니나노 집에서 술도 먹기도 하고 파친코에서 월급봉투도 다 털어먹기도 하며 함께 어울리던 선생들이 내가 장편을 쓴다며 피골이 상접한 채로 수업을 빼먹으니까 괄시를 하기 시작하는 거야. 교감 선생도 한두 번은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야, 이원규! 집에 가서 써.” 하고 소릴 지르시는 거예요. 그런데 소설을 쓰기 위해선 결국 그런 걸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 절 죽이세요. 내쫓으세요. 징계위원회 여세요.” 선생들에게도 “날 죽여.” 그랬지.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하고 순찰에 걸리는 선생들은 아주 싫어했어요.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근무 안하니까. 그런 걸 이겨내지 못했으면 결국 지방작가로 머물렀겠지. 나는 계속 밀고 나갔어요. 교실 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쓴 거야. 심지어는 가속이 붙었을 땐 마누라한테 그랬어요. “내가 지금 소변이 마려운데, 소변을 누면 깊이 잠드니까 소변을 안 누고 잔다. 나 이렇게 사니까 날 새벽에 깨워라.” 그때는 학교 수업도 주당 서른여섯 시간이나 했어요. 살인적이었죠. 그래서 마누라가 울면서 새벽에 깨웠어요. 그걸 넘었던 거예요. 그게 아니었다면 월간문학에 등단한 걸로 끝나고 말았겠죠. 그러다보니까 1년이 금방 가는 거야. 그것이 아마 내 생애의 고비였고, 결국 거기에 당선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원고청탁 전화가 무섭게 왔어요. 원고청탁을 가려 받을 정도로. 그때부터 한 10년 1급 작가 생활을 유지해왔죠.
<분단문학의 새 지평 황해 전후>
이희환 : 선생님께서는 그 동안 분단문제에 천착하면서 인천을 배경으로 한 분단소설을 발표하시고, 그런 평판작들로 문단 내에서도 입지를 다지셨는데 분단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원규 : 어느 날 조정래 선배가 술자리에서 “넌 일제 관리의 아들이야.” 그러는 거예요. 내가 “형, 우리 아버진 나쁜 짓 한 것 없어. 말단이었어요.” 그랬더니, “아무튼 넌 분단소설 같은 건 쓸 수 없을 거야.” 하고 말하더군요. 당시 80년대 전반기 문단 풍토가 어땠냐면, 분단 얘기가 아니면 비평가들이 말을 안 하는 거야. 지평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거지요. 분단문제에 대해 조정래 선배와 토론도 많이 했었어요. 분단소설이 한창 나오던 시절이었던 거죠. 그런데 “너는 못 쓴다.”는 거야, 나 보고. “내가 왜 못써, 형?” 그랬더니. “너는 우선 6·25 때 세 살이니까 못 쓰잖아.” 이러는 거야. 그래서 “후일담 쓰면 되지.” 그랬지. “너는 그런 거에 고민을 안 했으니까 못쓴다.”고 나를 자극했죠. 결국 분단소설을 쓰게 된 기폭제가 조정래 선배가 약 올린 덕분이죠. 조 선배가 “그럼, 네가 뭘 쓸 수 있냐?”고 묻기에 내가 우연히 인천 앞바다 덕적도나 대부도의 좌우익 갈등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서 아는데 그걸 쓰면 되지 않겠나 했더니, “한승원이 바다 쪽 분단 얘기는 쓰고 있는데?” 그러는 거야.
어쨌든 그 직후에 내가 문예중앙에 분단 이야기를 한 편 썼어요. 그랬더니 평론가들이 좋다고 달라붙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게 인물하고 동일시만 되고 공부 좀 하면 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비평가들이나 기자들이 얘기하는 게, 분단소설의 지평을 공간적으로 바다 쪽으로 넓혀가는 특징이 내 작품에 있다고 그러더군요. ‘바로 이거로구나. 내가 써먹을 것이!’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래서 그 다음에 「포구의 황혼」이라는 단편을 썼어요. 조정래 선생이 내 단편 「포구의 황혼」을 받아가지고 앉은 자리에서 전화 온 지도 모르고 끝까지 다 읽었대요. 그리고 “너 됐다. 분단소설 됐다.” 그랬어요. 조정래 선생이 분단에 관한 단편만큼은 자기보다 내가 났다고, 지금도 그렇게 말합니다. 내 장편은 자기의 태백산맥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단편은 내가 났대요. 조정래 선생이 계속 나에게 성취동기를 줬어요.
그래서 쓰다보니까 평가가 계속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다, 섬 이런 쪽을 배경으로 분단소설 쓴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또 인천이 해방공간에서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니까 파고들어가면 나올 게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박정희가 굴절된 안경을 씌워 고정되었던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을 스칼라피노와 브루스 커밍스 같은 학자들의 원서를 보면서 바꾸어나가게 됐어요.
이희환 : 네, 여러 단편을 통해 분단소설의 지평을 넓혀가다가 장편 황해를 쓰게 되시는데요. 황해를 집필하셨던 과정을 좀 말씀해주세요.
이원규 : 어느 날 조정래 선배가 “한 달에 원고 500매 지면 줄 테니까 장편을 써라” 그랬어요. “이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다”라면서 청탁을 줬죠. 이건 당시 굉장한 특혜라 조정래 선배가 주변에서 욕을 먹었지. 왜냐하면 문예지를 운영하면서 한 달에 500매 청탁을 주면 다른 작가들의 기회를 빼앗는 거였거든요. 조정래 선배는 내가 국문과 후배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자기가 썼던 분단소설의 지평을 넓히려는 의미도 있었던 거겠지요. 내가 반수락을 하고 나서 어느 날 조정래 선배가 “너, 뭘 쓸 거냐?” 물어요. 그래서 이승엽, 조봉암, 수도경찰청 문제, 삼팔따라지 문제, 덕적도, 대부도 문제 등을 얘기했더니, 그걸 쓰라는 거야. 그걸 쓰려고 덤비다보니까 다른 사람들의 장편을 이겨야 하더라구요. 나는 분단 이후의 세대니까, 나는 생으로 자료를 찾아 연구를 해야 하잖아요. 당시에 자료가 없어 국립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고, 학교 선생 할 때였는데, 그러면서 덕적도도 몇 번 갔다 오고 했어요. 황해를 500매씩 연재를 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당시엔 미친 듯이 썼습니다. 한 달에 500매인데 그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석 달 만에 완성이 됐으니까.
<항일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90년대>
이희환 : 네, 엄청난 작업이었군요. 그리고 그만큼의 성과가 장편 황해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분단소설의 한 정점에 이 작품이 놓여 있다고 봅니다. 결국 장편 황해의 창작 이후에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게 되셨고, 그 후에는 항일 독립투쟁을 배경으로 하는 대하소설 집필에 몰두하시게 되었지요?
이원규 : 어느 날 신구미디어 이사영 사장이 찾아 왔어요. “좌나 우에 기울지 않고 김일성까지 다룰 수 있는 항일 독립전쟁 소재 대하소설을 써 달라”는 거예요. 지금 하는 말이지만, 아마 그때 이사영 사장이 나를 찾아오지 않고 그냥 나뒀으면 내가 아마 그 후에 이상문학상도 받고 동인문학상도 받았을지도 몰라. (웃음) 그런데 이사영 사장이 5,000 달러를 내놓더라고. 난 여권도 없었는데 여권도 만들어주고. 그래서 내가 1992년에 5,000 달러를 받아가지고 만주를 횡단하게 됐어요. 그래 내가 그때 만주를 다녀보니까 이거 되겠다 판단했어요. 그래서 중국 여행 중에 전화를 해서 학교에 사표를 냈어요. 그러고 나서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신구미디어, 1995)를 아홉 권을 썼어요.
그때 중국공산주의 혁명의 근거지 연안(延安)도 가고 태항산(太行山)도 갔어요. 연안, 태항산은 국내에서 내가 처음 간 거지요. 거긴 미개방지구였고 당시엔 여행 목적하고 다르면 중국에서는 그대로 붙잡아갔어요. 인하대 국문과 홍정선(洪廷善) 교수가 따라왔는데 연안을 가다가 기차에서 붙잡혔지. 그래 슬픈 얼굴을 하고 연기를 했지요. 물론 거짓말이었지요. “내가 서울에서 공산주의 공부를 하다가 핍박을 받아가지고 고생하다가 여기까지 겨우겨우 왔다. 나를 막으면 어떡하란 말인가.” 그랬지. 그리고 중국 혁명사에 대해 줄줄이 말로 늘어놓았지. 중국 관리들이 놀라며 통과증을 끊어주더라고. 그대 철도초대소에 잤는데 거기 묵는 철도원들이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주던지. 나중에 우리가 연안을 떠날 땐 연안 기차역에서 내 이야기를 방송하며 <대전블루스>까지 틀어줬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선열들이 싸운 곳을 찾아 중국 전체를 돌아보고 만주에서는 김일성이 싸운 데까지 다 돌아봤어요. 화룡현(化龍縣)의 약수동(藥水洞) 같은 곳은 지금도 가본 사람이 드물어요. 약수동은 김일성이 열아홉 살에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야. 약수동에는 중국옷을 입고 들어갔어요. 취재를 위해 북경인민출판사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죠. 참아야 하는데 질문을 해야 했지요. 내가 서울말 쓰니까 거기서 게이트볼을 치는 노인들이 눈치 채고, 남조선에서 나쁜 놈 왔다며 게이트볼 망치로 때리는 거예요. 어깨를 얻어맞았지요. 그곳 조선족 노인들 스무 명 중에 열여섯 명이 항미원조전쟁(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가리키는 말)에 참전한 분들이라 남한에 대한 인식이 나빴어요. 그분들께 내가 왜 여기 왔겠냐 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었지. 그렇게 어렵게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내가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 데리고 약수동에 들어가면 그때마다 그 노인네들이 “우리 아들 왔구나”하고 끌어안고 반겨줍니다. 내가 책을 제대로 썼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광복군이나 민족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공산주의까지 양쪽을 아우르는 눈을 가지고 글을 썼어요. 그리고 고단한 작업이었지만 우리 항일투쟁사에 있어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열패감을 반을 줄일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좀 악바리인데다 극성이라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 항일파르티잔 투쟁을 하다가 중단하고 소련군의 붉은군대88특별저격여단에 속해 머물렀던 하바로프스크 70㎞ 북쪽에 있는 곳, 그러니까 김정일이 태어난 기지까지 갔었어요. 내가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거기 브야스코에까지 간 거야. 블라디보스토크도 가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중국 화북의 태항산은 참 고생 많이 했어요. 당시 우리 역사에는 조선의용군의 김무정 장군 지휘소, 조선혁명군정학교 자리 등이 전혀 안 알려졌었어요. 조선의용대 대원 출신들의 구술만 받아 적은 기록은 있는데 그나마 현장 확인 과정이 없어서 방위가 다 틀린 엉터리 기록들뿐이었습니다. 김무정 지휘소 같은 곳은 지금은 신문과 방송이 쉽게 찾아가지만 사실 내가 다 찾아냈어요. 조선의용대나 조선의용군 유적지는 나 이후에도 더 찾은 사람도 있지만 처음 찾은 건 나였습니다. 그때 겨울이라 고생을 많이 해서 동상도 걸리고 혈변도 보고 그랬어요. 온몸에 이가 옮아서 호텔에서 속옷까지 드라이클리닝을 맡겨 놓고 이틀 동안은 중국옷을 입고 지내기도 했죠.
귀국 후, 서울신문에서 르포 연재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때 스포츠서울이 잘 나갈 때였거든요. 그래서 내가 스포츠서울 지면을 달라고 했지. 처음에는 스포츠서울에 20회 연재를 하려고 했는데 내용이 좋으니까 분량이 50회로 늘어나 1년 내내 한 페이지 전면 연재를 했어요. 그 후 KBS PD가 와서는 관련 다큐를 찍는데 내게 리포터와 총괄자문을 맡아 함께 가자는 거예요. 두둑하게 돈을 받고 마이크도 잡고 그러면서 그걸 했지요. 그래서 이후 신문과 방송사 기자들을 데리고 여러 번 항일독립투쟁 현장을 답사했어요. 약수동에 가니까 할아버지들이 PD에게 “당신, 이원규 선생처럼 양심적으로 할 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렇게 여러 매체를 데리고 항일독립투쟁 유적을 탐사하며 다니니까 그 분야에서 저절로 도사가 되더라구요. 책을 내자는 제의도 많이 왔어요. 그래서 독립전쟁은 사라진다(자작나무, 1996)라는 르포집을 낸 겁니다. 기자들이 그 책을 가지고 항일유적 탐사 가면 그게 가이드북 역할을 해요. 거기에 거리, 방위가 다 나왔으니까. 일종의 항일유적 탐사 나침반 같은 거지요.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때 이상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노리는 단편을 썼어야 했어요. 소설에 물이 한창 올랐을 때였으니까. 어쨌든 항일독립투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끝났을 때 쯤 거대담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밀려가는 작가군에 끼어 있더라구요. 게다가 애들은 크지, 그래서 여기저기 사보(社報)에 글을 쓰면서 먹고 살았어요. 그리고 또 소설 제자들을 키우는데 빠져서 살았던 거죠. 그런데 제자들 키우는 재미가 또 적지 않더라구요.
<전기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찾아서>
이희환 : 네, 한창 소설에 물이 올랐을 때 온몸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시면서 고생을 하셨군요.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이 이번에 출간하신 김산 평전이나 작년에 내놓으신 약산 김원봉 같은 전기문학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역사전기를 쓰시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의도는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이원규 : 이건 또 우연한 계긴데, 모 출판사 사장이 100권의 한국 위인 전기소설을 기획하고 그걸 소설가협회에 하청을 줬어요. 그게 결국 나중에 6권을 내고 중단하고 말았는데. 어쨌든 내게도 청탁이 왔어요. 그래서 난 홍범도를 쓰겠다고 했죠. 내가 홍범도가 활동했던 만주, 연해주도 가보고 봉오동전투 현장도 가봤거든요. 봉오동에서 군화 버린 것도 보고. 일본 군화 조각을 보고 그랬거든. 그리고 홍장군이 죽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까지 갔었거든. 거긴 알마아타에서 소형 제트 비행기로 3시간이나 걸리는 오지이지요. 그런데 홍범도를 나보다 앞서 연구한 송우혜라는 작가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양보하고 약산 김원봉을 쓰기 시작한 거야. 선인세로 200만 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출판사 사장이 전기소설 발간을 추진하다가 망해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출판사 사장을 만났습니다. 계약은 해지되었고 원고는 반쯤 썼지만 딴 데로 가겠다고 하며 돈을 돌려줬지요. 다른 작가들은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난 돌려줬지.
그런데 후에 내가 김원봉 전기 원고를 갖고 있는 걸 실천문학사가 알게 되었어요. 실천문학사는 김원봉이 입맛에 맞거든. 나보고 원고를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약산 김원봉을 먼저 썼죠. 내가 보기엔 약산 김원봉이 김산보다 더 재밌는데 이게 잘 안 나가더라고. 어쨌거나 약산 김원봉이 그런대로 괜찮으니까 실천문학사에서 김산을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김산 평전까지 쓰게 된 겁니다.
이희환 : 네, 두 평전에도 담겨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 발굴한 조선의용대의 항일 독립투쟁사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조금 들려주시죠?
이원규 : 네, 내가 10년 동안 기자들을 끌고 다니며 항일유적지를 찾아 다녔죠. 그런데 솔직히 신문사 기자들이 똑똑하긴 해도 깊이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내가 답사 전날이면 스터디를 시키기도 하고 스케줄도 내가 잡고 했어요. 기사도 이렇게 써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쓰고 난 기사를 고증도 하고 했어요. 그렇게 다니다 보니까 이준 열사 아들이 광주 코뮨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김산, 윤세주, 김원봉 등의 항일독립투쟁의 생생한 실상을 분명히 알게 되고 이걸 발굴하게 됐죠.
김원봉의 경우, 김원봉이 스무 살에 의열단을 만들고 나중에 의열단 멤버를 중심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는데,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에서 “중국 남쪽에서 무슨 독립운동이냐” 며 화북으로 오라고 해서 그 주력이 황하를 건너 홍군 쪽으로 가게 되었죠. 그런데 조선의용대가 중국국민당에서 지원을 해줘 만든 군댄데 홍군 쪽으로 가버리니까 국민당에서 “너희 광복군으로 가라!” 이런 거야. 그래서 조선의용대 지휘부가 광복군 소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화북지대원들이 광복군이 싫다며 조선의용군으로 깃발을 바꿨지요. 사실 그들이 조선의용대 시절에 가장 활발한 항일 전투를 했어요. 그리고 이들이 뒷날 귀국해서 북한 인민군 장성 60%를 차지했고 북한으로 귀국하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공산당 간부로 남았어요. 어쨌든 조선의용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전쟁의 발발 책임이 있으니까 남쪽에서는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완전히 지워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조선의용대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겁니다.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무정은 나중에 숙청당했는데, 6 ․ 25 직후 연안파 지도자와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간이 커져가지고 ‘우리와 함께 싸웠던 중국공산당 우리 동지들이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해 안 도와줬으면 김일성과 북한은 망했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커졌지요. 김두봉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안 도와줬으면 어떻게 한국전쟁에서 살아 남았겠느냐”며 김일성에게 간섭을 했죠.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소련과 동유럽에서 전후 복구 자금을 얻어왔는데 연안파가 그것까지 참견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죠. 그래 미코얀이라는 소련 부수상과 중국 주덕해가 북한에 파견 와서 살펴보고는, 본국에 김일성만한 대안이 없다고 보고를 해서 김일성이 다시 칼자루를 잡게 된 겁니다. 당연히 그 이후 연안파는 모두 숙청을 당했죠. 그때 인천 출신 이승엽도 갔지. 그러니까 이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남쪽에서도 지워졌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서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서 싸웠던 이 사람들이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거지요. 당시 항일투쟁에 몸바친 공산주의자들은 이념보다는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서 싸운 건데 열강들이 조선을 도와주지 않으니까 아나키스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다시 공산주의밖에 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끝내 공산주의로 돌아선 거죠. 결국 북에서도 숙청을 당하고 남과 북에서 모두 역사 속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아까 출생배경을 말했지만 나는 보수적인 환경에서 나서 자랐잖아요. 그러나 사회주의자 항일투사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가졌어요. 그때 취재를 다니면서 소주를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녔어요. 이름 없이 사라진 독립투사 묘에 소주를 부어주며 그들에게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들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들이 활동했던 주둔지며 전투 지역을 찾아서 사진을 찍고 기록했지. 그때 우리 역사란 뭐가 있어요? 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마흔 살까지 살았지만, 실상을 보니까 이게 역사인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누군가 세상에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 난 작가가 시대나 역사에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바뀌게 되었어요. 우연히 거기에 빠져 들어가다 보니 그쪽에 엄청난 자료와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는 겁니다. 엄청난 역사의 빈자리가! 그것 때문에 약산 김원봉을 썼고, 김산 평전을 결국 쓰게 된 겁니다. 독자들은 인터넷 독후감을 통해 말해요. 역사에서 묻혀버린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책에 간곡할 정도로 드러난다고.
이희환 : 선생님의 김산 평전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도 김산의 생애를 두 배 이상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김산에 대해서 더 들려주실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원규 : 김산은 열정적이고 순결한 독립투사, 비운의 독립투사였어요. 공산주의를 조국 독립의 방편으로 여기고 치열하게 투쟁했고, 조직가, 선동가로서 눈부신 자취를 남겼고, 시인, 소설가, 번역가의 면모도 보여 주었지요. 그 사람은 한 순간도 조국 독립의 비원을 잊지 않았어요.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판단 착오로 억울하게 처형당했어요.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혔으나 미국의 여성작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그의 존재가 알려졌고 비운의 찬 생애는 민족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 주는 그런 사람이지요.
1984년 한국어판 아리랑이 출간된 이후 국내와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연구가들은 김산의 생애를 추적하고 투쟁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계속해 왔어요. 특히 금기시되어 온 사회주의 항일투쟁 그룹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지요. 내가 그 성과물들을 섭렵하고 미공개 자료들을 찾아내고 그의 생애를 복원해 본 것이지요.
이희환 : 권두 저자의 말에서 ‘김산의 등 뒤에 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김산들이 어른거린다’고 썼더군요.
이원규: 그래요. 김산은 생애가 알려졌으니 행운이지요. 이름조차 묻혀버린 소영웅들이 많아요. 그분들도 책에 소개했어요. 그건 그분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기도 하고, 그분들이 바라본 김산의 행동을 그림으로써 주인공 김산의 모습을 확장시키려는 계산도 있었지요. 아무튼 그분들이 김산과 함께 어두운 역사의 벼랑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간 모습은 곧 항일투쟁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지요.
김산에 대해선 홍정선 교수가 미친 사람이에요. 15년 전 연안에서도 홍 교수는 김산이 처형당한 장소와 무덤을 찾겠다고 밥도 안 먹고 돌아다녔어. 그런데 찾긴 뭘 찾아요? 김산은 전선으로 가다가 처형당해 아무데나 쓰러져 죽었는데.
나는 조선의용대 쪽에 애착이 많았고 홍정선 교수는 연안 쪽 항일독립운동이나 김산 쪽에 애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작년에 홍정선 교수가 나더러 “형이 지금 김산 안 쓰면 누가 써요? 더 늙어 총기 잃은 다음에 쓸 거예요?” 그러는 겁니다. 사실 항일독립투쟁사나 김산의 일대기를 아무나 쓰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현장을 알고 있는데다가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독립투사들의 묘지에 술도 부어준 남다른 감정도 쌓여있던 걸 아는 홍정선 교수가 김산 평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자꾸 권유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전제 조건은 님 웨일즈가 아리랑에서 다룬 김산을 3배쯤 확장해서 써야 한다는 거였어요. 실천문학사에서 청탁이 오고서 내가 한 달 동안 대답을 안 했어요. 실천문학사 김영현 사장이 “사실 내가 쓰고 싶은데 이 선배가 낫다고 생각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확답을 주시죠” 하고 재촉하는 겁니다.
그리고 동북아연구재단에 장세윤 박사라고 있는데, 홍정선 교수처럼 김산에 미쳤던 사람이에요. 한홍구, 장세윤, 홍정선 이 세 사람이 김산 연구의 대가들입니다. 내가 장세윤 선생에게 찾아 갔어요. 그랬더니 그가 “선생님이 김산을 쓰신다면···”하면서 자신이 모았던 책과 자료를 한꺼번에 내게 준 거예요. 거기에 없는 것은 홍정선 교수에게서 받았고. 나는 그 자료들의 각주에 담겨 있는 1차 자료들을 미국이나 일본, 중국 심양, 북경에서 모았어요. 그래서 장세윤 선생이나 홍정선 교수가 내게 준 김산 자료에다 내가 이미 갖고 있었거나 새로 구한 자료들을 모아 놓고 보니까 이제 3배 확장은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러나 사실 결심하는 순간 나는 이미 쓸 준비가 되어 버린 거지요.
<평전과 소설 사이에서>
이희환 : 원고지 1,900매 분량이면, 쓰는 일도 보통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요. 대학에서 소설을 강의하시는 등 바쁘셨을 테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으셨을 텐데, 젊으실 때보다 더 강한 집중력으로 연이어 대작들을 쏟아내신 것 같습니다?
이원규 : 사실 쓰는 건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요. 평전은 자료 수집과 해석, 그리고 현장답사가 어렵고 그 인물이 있던 시간과 공간,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작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상력의 한계가 있어요. 소설가들한테는 그게 답답하지요. 그러나 스토리라인 구성은 인물의 생애가 저절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따라가며 쓰면 되지요. 그래서 구성이라는 면에서는 쉽기도 해요.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작가 김용성 선생이 김동리 문학상을 받는 시상식장에 갔었는데, 거기에 얼마 전 작고한 박영한 등 내 또래의 작가들이 모였어요. 그 때 문우들이, 젊은 작가들이 문단을 이끌고 가는데 이제 우리는 물러가는 거다, 우리 총기 흐려지면 빌빌거리지 말고 깨끗하게 접자, 그랬어요. 그런데 한 문우가 “우리는 이제 써봐야 만 장밖에 못 쓴다!” 그러는 거야. 나는 10년 동안 제자 가르치느라고 안 썼는데 말이야. 그리고 며칠 후 가평 의 어느 숯가마에서 국문과 선후배 문인들과 함께 앉아있었어요. 내가 김용성 선생 시상식에 간 이야기를 하며 “우리 또래가 만 장밖에 못 쓴다는데, 그래서 나도 만 장을 쓰러 강원도로 가서 잠수해야 할 것 같아.” 그랬더니, 6명의 선배들 중 4명이 어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짐 꾸려가지고 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작년에 약산 김원봉을 평전식으로 고쳐 800매짜리 원고를 1,900매로 만들어가지고 돌아왔어요.
그때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작업을 하다가 내려앉으려 하면 자리에 누울 힘도 없을 정도였어요. 하루 24시간 중에 14시간씩 글을 쓰기도 했어요. 젊었을 땐 한 달에 500매씩 연재도 했지만, 사실 나도 나이가 들어 그렇게 지속적으로 하진 못해요. 그래도 젊어서 배운 테니스를 일주일에 서너 번 코트에 나가 합해서 열두 시간쯤 하지요. 그래서 체력은 좋은 편이에요. 나는 놀 때는 놀지만 쓸 때는 처절하게 나를 채찍질하며 써요. 그러지 않으면 어디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나요. 약산 김원봉과 김산의 평전을 쓸 때는 내가 그런 정신집중을 통해 내 생애의 고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한 일곱 번 정도는 갔던 것 같아요. 탈고했을 때는 애 하나 낳은 것 같았어요. 아무튼 그렇게 글을 써서 실천문학사에 줬더니 만족해하더군요. 그리고 신문에서도 평이 좋았고.
참, 고마운 일이니 이것도 이야기해야겠네. 내가 김산 평전 원고를 넘기기 전, 북경과 천진과 하북성 일대 배경에 조금 미진한 곳이 있다고 하니까 실천문학사 김영현 사장이 급히 자료 조사팀을 만들어 자신이 이끌고 함께 북경으로 갔어요. 물론 나도 가고 홍정선 교수도 갔어요. 김 사장은 뒷바라지를 했어요. 출판사에서 그렇게 하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제 약산 김원봉 쓰고 김산 쓰고 나니까 다른 출판사들이 계속 평전을 내자고 달라붙는 거예요. 내가 20년 전에 인천을 배경으로 황해를 썼는데 그 앞뒤를 배경으로 2권씩 더 써서 대하소설을 쓰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거든요.
최근 김산 평전이 반응이 좋으니까 출판사와 방송국 사장 특보가 찾아오는 거예요. 출판사 사장에게 내가 황해 시리즈 얘기를 했더니 그것도 좋지만, 전기 쪽으로 작업을 해줄 수 없느냐고 채근을 해요. 그래 요즘은 내가 이쪽 길로 나간 김에 평전이나 실록소설 쪽을 더 써서 가느냐, 아니면 본업인 순수소설을 쓸 것인가, 항일운동사 쪽을 계속 가야하는 건지, 아니면 인천을 배경으로 한 근현대사 소설을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 선생에게도 한 번 물어보고 싶군요. 어느 쪽이 좋겠어요? (웃음)
이희환 : 제가 감히 말씀드릴 만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학자들이 하는 인물 전기 작업은 딱딱해서 문학적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우리나라 전기문학이 매우 빈곤하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평전 작업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또 인천 지역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인천의 근현대사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요. 사실 인천의 근현대사 이야기는 선생님이 하지 않으시면 할 사람이 그리 없는 듯합니다만.
이원규 :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조정래 선생이 나를 분단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했고 다행히 인천 쪽에 분단에 대한 소설을 쓴 작가가 없었던 거지요. 분단 쪽 소설흐름이 끝나고 내가 주춤거릴 때 신구문화사가 나를 항일독립전쟁사 쪽으로 이끌었고. 어쨌든 그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인천 근현대사 이야기는 조혁신 같은 인천의 젊은 작가들이 앞으로 써나가면 되겠죠. 왜 할 사람이 없겠어요?
이희환 : 그런데, 아까 말씀 도중에 처음에는 작가가 시대나 역사에 대해 사명감을 갖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했는데?
이원규 : 난 작가로서의 길은 궁극적으로 예술적 완성이 목표여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걸어온 길이 그런 쪽과는 다른 길로 빠져들었던 거지요.
이희환 : 그런 방향에서 인천을 무대로 한 장편을 다시 쓰셨으면 하는데요?
이원규 : 인천대 국문과의 오양호 선생이 내 작품에 대한 평론을 많이 써서 책 한 권이 된대요. 오양호 선생이 내게 황해의 “앞에 두 권, 뒤에 두 권 쓰라”고 그런 얘기를 하세요. 황해가 해방공간의 인천과 덕적도 이야기인데, 그 앞에 두 권을 개항 이후 이야기로, 그 뒤에 두 권을 6․25이후부터 오늘까지 이야기로 써서 인천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다섯 권 짜리 대하소설을 만들라는 것이지요.
<문학의 위축과 작가의 길>
이희환 : 네, 꼭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대담을 마무리할 시점인 것 같은데요. 최근 우리 문학이 많이 위축되어 있다고 하는데 젊은 작가들이나 후배 작가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또 인천의 문단 후배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원규 : 내가 젊었을 때 현대문학이 한 달에 7만부를 찍은 걸 봤거든요. 지금은 1/20이니 거기에 비하면 정말 문학이 많이 위축되었다는 것을 실감해요. 문학이 위축되는 시대이고 영상 시대이긴 한데, 나는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힘들어질수록 오히려 서사문학이 살아난다는 희망을 안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소설이 고지식하거든요. 작가들이 지나치게 훈고적으로 매달리고 전통이나 인습을 따라 가려다 보니까 무섭게 변화하는 우리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의식 변화를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죠.
작가로 살아남으려면 민감하게 현실에 적응 또는 순응해야 하지요. 전통적인 단편소설 중심 문학이란 앞으로는 살롱문학화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선 활자매체가 주도했던 시대에 살았던 나 같은 60년대 학번의 경우는 사실 억울할 것도 없이 누릴 건 다 누렸지. 젊은 작가들은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것을 함께 엮어가지고 소설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하면서 무엇인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던져주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요즘 그렇게 쓰는 작가들도 많이 있잖아요.
나는 요즘 30~40대 작가들 작품을 분석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고 사는데, 작품은 주로 젊은 작가들 것을 읽어요. 늙다리들 것들만 가르치면 대학에서 안 통하잖아요. 선배작가들은 별로 신작이 없고 젊은 작가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우리 소설이 다른 매체와 특히 일본문학, 번역 문학에 많이 밀리고 있잖습니까. 시대를 민감하게 받아 안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민감하게 잡아내서 우리시대의 작가들이 이 시대가 원하는 쪽으로 소설의 방향을 틀어야 하겠죠. 그리고 또 그렇게 쓰리라 믿습니다. 그런 작가들만 결국 살아남을 것이고.
인천의 후배 작가들에겐, 인천에서도 민족문학작가회의 쪽이나 문인협회 쪽이나 모두 열심히들 해서 문학을 살지게 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 작가회의 후배들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양쪽이 서로 유대도 더 가졌으면 해요. 또 우리 세대를 잇는 후배 작가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내게는 인천에서 선배 문인들이 별로 없었어요. 중앙문단에서 활동하는 분들 말이에요. 그래서 뒤에 이어지는 작가들이 더 나왔으면 하는데, 내겐 그런 후배도 별로 없었어요. 제자 또래만 있고. 그래서 어떨 땐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 동국대학교에 계약이 되어 있으니 계속 거기 강의를 하지만 인천 소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인천대 국문과에서도 이번 학기에 강의를 맡았어요. 늙으면 고향의 대학에 와서 애들도 키워야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힘들지만 보람 있는 일이 되겠죠.
이희환 : 아참, 선생님께서는 우리 문단에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원규 : 내가 프리랜서가 된 다음에 인하대 국문과 김용성 선생이 인하대에 사회교육원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 김용성 선생이 “이 선생, 뭐 하시오. 우리 대학에 와서 애들 좀 가르쳐 주시오.”해서 소설 선생으로 돌아선 거죠. 그 당시에는 초보 선생이었으나 지금은 소설을 가르친 지 10년이 지났고, 내가 봐도 잘 가르치는 것 같아요. (웃음) 요즘 문단에서 내가 제자들을 작가로 많이 내보낸다는 얘기도 종종 듣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인,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정란,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박석근, 문학동네로 나온 김숙과 김은경, 박진규, 작가세계로 등단한 우경미, 손홍규, 안혜정, 그리고 동서문학으로 나온 유시연, 문학수첩 출신 김경순, 실천문학 출신 김경은, 그리고 여기 앞에 있는 소설시대 출신 조혁신 기자 등 등단한 제자들이 모두 합해서 열일곱 명이 되네요. 인천 출신 작가들이 다섯 정도 되고요.
이희환 : 네, 선생님 장시간 대담에 응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뒤를 잇는 작가들이 인천에서 나와 인천 문학을 살지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또한 선생님의 후속 작품들도 기대해봅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원규 : 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만나서 꼭 소주 한 잔 합시다. 고맙습니다. (녹취·정리 조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