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4X6판 121페이지로 짙은 남색 표지로 된 작은 책이다. 이 책의 지은이, 강 부웅은 1982년 당시, 미국 L.A 반석교회 단임 목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1982년 9월 30일에 예수교 문서 선교회에서 <天道敎 批判>이란 책명으로 발행했다. 원래 이 글은 강 부웅 목사가 1978년 대한 신학교 대학원 수학중 지도교수의 지도로, 역사적 칼빈주의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서 비교 연구하여 비판한 "천도교의 원리 비판"이란 글을(이 책의 제 2 장에 해당.) 발표했던 것을 바탕으로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간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동학(천도교) 창도이래 타 종교인이 천도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판한 글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최초의 것으로 현재까지 전무후무하다. 왜 우리가 이런 책을 만나야 하고 읽어야 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 제가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이 책의 구성은
머리말.
서론.
제 1 장. 천도교의 역사적 배경과 최 수운.
1. 천도교 발생 전의 역사적 배경.
2. 창설자 최 수운과 동학.
3. 천도교의 연혁.
제 2 장. 천도교의 원리와 비판.
1. 본체론.
2. 인생관.
3. 윤리관.
4. 종말관.
제 3 장. 천도교의 현황과 전망.
1. 천도교의 조직과 활동.
2. 천도교의 의식과 생활.
3. 천도교의 현황과 전망.
제 4 장. 맺는 말로 되어 있다.
이 중 제 3장의 3. 천도교의 현황과 전망. 그리고 제 4장 맺는 말 전문을 옮겨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천도교에 대한 잘못된 시각과 천도교 연구의 목적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우리 모두가 현재 천도교의 모습을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를 돌아보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천도교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데 비해, 유독 기독교가 천도교를 깊이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많은 것과 잘못된 비판과 평가의 목적에 대해서는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례별로 분석 평가작업을 거친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할 것입니다. 이번 이 책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평가 없이 여러 동덕님들의 비판적 안목에 맡깁니다.
3. 천도교의 현황과 전망.
천도교의 교세는 191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19년에 약 13만이고, 1930년에는 약 9만으로 나타났는데 실제로는 더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이 자료는 확인되지 않은 것을 사용하였다. 조선 총독부가 조선 총독부 촉탁 촌산지순에게 연구 조사하게 하여 1935년에 간행된 <조선의 유사종교>의 천도교 항목의 자료는 1927년도 기준, 도별 신,구파별로 구분 정리하여 작성된 자료로 103,544 명으로 되어 있다. 이미 필자가 다른 곳에서 이 통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김 용천 주.) 1919년 3.1운동 당시 교세가 절정에 이르렀고 그 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로 교세가 해마다 줄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천도교는 남한보다 북한 쪽에 기반과 교세가 강하여 1934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평북, 함남, 평남, 황해도 순으로 교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처음 북한에서는 공산치하에서도 천도교의 교세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북한 종무원의 조사에 따르면 1947년 당시, 약 33만 가구에 17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 3월 당시로는 67만 호에 290만 명이나 되었는데(이 통계 자료는 북조선 종무원에서 법도관장을 지냈던 문 재경(文再慶)동덕이 지참하여 월남해서 밝혀진 자료이다. 이 통계 자료는 정확하게 단 단위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정확한 자료인지는 논의된 바 없다고 알려졌다. 또한 교단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이다.-김 용천 주. ) 6.25사변을 계기로 하여 공산당의 철저한 탄압으로 거의 활동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별로 교세가 확장되지 못하고 교단의 활동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 4월에 수운회관을 15층 연건평 3,600평을 당시 4억 원을 들여 완공하여 천도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천도교는 구세대인들 사이에서는 그 존재와 인식이 다소 있으나 해방 전후세대와 그 이후 세대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에서 "과거에 천도교가 있었는데 3.1운동과 동학혁명을 주도하여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정도 이외에는 잘 모르고 있으므로 40대 이전은 점점 인구가 감소되면서 30대 이하의 포교가 활발하지 못한 관계로 과거의 교인들과 그의 가족을 1980년도 현재 150여 교구와 약 70만 명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실제 시일식(일요일 예배)에 참례하고 있는 교인수는 20만 정도나 될까말까 할 것이다.
천도교의 전망은 그렇게 밝지 못하다. 포교적인 면에서 볼 때 원리와 사상이 재래 민간신앙의 혼합적인 요소가 짙은데다가 한자화(漢字化)한 유교적 사상의 이상적인 데가 많아 현대인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초기에 기치로 내 걸었던 보국안민(保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이란 말이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신선한 용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국안민은 국제간의 방위적 어떤 함수관계에 달려 있고, 광제창생은 어떤 종교적 사상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합적 역할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지상천국이란 말은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전 세계가 다 그 베일을 벗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설만한 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천도교 총부에서는 천도교의 중흥을 위하여 새로운 포덕(포교)전략을 구상하고 있으며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서울 우이동 의암성사 묘소인 봉황각을 천도교 연수원으로(묘소 가까이 있는, 3.1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였던 봉황각을 천도교 종학원-후에 종학 대학원으로 변경됨-이라고 해야 옳다.-김 용천 주) 그 기능을 원활히 하고 또 수 만 평의 대지를 확보하여 종학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외에 있는 교포들에게도 포교의 계획을 가지고 일본. 미국 등지에 전교실을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미국의 경우 로스엔젤러스에 있는 천도교 전교실은 전에 천도교인이었던 분들로서 약 30명쯤 모인다고 하나 천도교에 대한 영문서적이 거의 없고 이중언어 교육이 필요한 교포 2세들에게 지도할 만한 젊은 층의 사람들이 거의 없어 교세확장의 템포는 지극히 느릴 것으로 내다보인다.
그러므로 천도교가 외적으로 나타내는 150여 교구와 70만 신도라고 말하면서 그 중흥의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천도교 자체 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점과 현 교도들의 거의가 장년이상 노년층이 많아, 자연감소현상의 촉진과 아울러 사색이 없는 현대조류에 무한히 사색적이고 많은 정성과 시간을 요하는 의식생활과 이상과 현실의 너무 큰 격차가 있는 원리와 사상을 가지고는 1910년대와 같은 민족의식에 붐을 탈수는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제 4장 맺는 말.
지금까지 독창적인 사상을 가지고 한국에서 발생했다는 천도교인(천도교의 잘못인 듯.)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원리와 사상과 의식과 생활에 관하여 고찰해 본 결과 천도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첫째. 천도교는 시대적 산물이다.
19세기 중엽 이조 말기에는 국내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및 외교적인 혼란과 국제적으로 정세의 급변화에 따라 민심이 크게 동요되어 어떤 강력한 지도적 인물과 사상이 요청되었을 때에 최 수운이 내세운 이슈와 사상은 유효 적절하게 민심을 사게 되어 급진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처음에는 동학이라고 하나의 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 시대적 필연성에 따라 하나의 자연종교(自然宗敎)로 나타나게 되었다.
둘째. 천도교의 원리는 혼합적이다.
천도교의 창사자(창시자의 잘못.) 최 수운 자신이 굿도 해보고 불도도 닦아보고 유교도 연구해 보고 심지어 당시 서학이라고 하는 천주교까지 연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했는데 원리에 나타난 사상은 본체론에서 우주의 자연발생관적 입장에다 진화론을 혼합했으며 인성관에서도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내천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모든 종교에서 기본사상이며 특히 17-18세기 구라파에서 휩쓸었던 휴머니즘의 혼합이라 할 수 았으며 윤리관 역시 사람을 한울님 같이 모시고 도덕적 기준으로 정성, 공경, 신의도 유교적 색채가 짙다고 할 수 있으며, 전체원리와 사상속에 재래 종교의 유 불 선과 초기 기독교회(Roman-Catholic)의 색채까지 흐르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셋째. 천도교의 의식과 생활은 샤머니즘적이다.
천도교의 의식속에 청수, 주문, 염주, 성미, 제사 및 정신이 맑아지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것과 주문을 500번 암송하는 것은 샤머니즘과 아니미즘과 토템이즘과 타부의 주술종교가 갖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다분하다. 그리고 내세의 소망이 따로 없고 현실세계에서 진선미를 바탕으로 바르게 살면 그것이, 곧 낙원이며 천국이라는 현실무사주의는 곧 재난을 피하여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샤머니즘의 기복적(祈福的)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천도교의 현황과 전망은 밝지 못하다.
천도교가 현재 150여 교구와 70만 신도를 가졌다 하나 그 중 1/3도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2세 교육에 맹점이 있어 그 수요를 증가하는 추세에 비례하여 노년층의 자연감소현상이 두드러지며, 한국정부에서 민족문화 재 발굴이라는 점에서 재래종교인 샤머니즘, 불교, 유교, 천도교가 문화재 관리국의 직접 간접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가운데, 현 천도교 중앙대교당(서울 종로구 경운동 88)이 1978년 12월 19일에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국역사 속에 퇴조해 가는 옛 민간신앙의 본체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천도교 총부에서 바라는 것만큼 중흥이 이루어지기는 현실역사의 급진적 변화에 발맞추어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전망이 밝지 못하다고 본다.
천도교에서는 샤머니즘이나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까지도 인정은 하나 다 완전한 진리성을 갖추지 못한 시대를 따라 나타나는 부분적인 종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도교의 과거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동학농민봉기, 갑진 개화운동, 3ㆍ1운동을 내세워 나라와 민족을 가장 사랑하는 종교인양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3ㆍ1운동의 33인 대표가 바로 손병희 선생이라 하여 3ㆍ1운동은 천도교의 민족해방운동이라 너무 과대 평가하다 보니 실상 한국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의 하나님의 사랑과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수많은 희생을 드렸던 그 공효가 그들 속에서 묻혀버린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지각없는 기독교인들이 천도교를 연구하는 가운데 최 수운이 받은 귀신의 음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로 보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지탄하면서 각계 각층의 학자들간에 천도교 연구에 관심을 가진 많은 분들이 일제히 천도교의 원리와 사상을 긍정적 입장에서 어떤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비판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때 아쉬운 감이 있다.
필자의 입장과 제언은 천도교는 과거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고무했으며 민권운동을 통하여 봉건제도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는 민중의 의도를 전달했음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민족해방을 위해 희생적 투쟁을 감행한 것도 잘한 일이다. 그러나 천도교가 가지는 종지 중에 교정일치라는 점에서 볼 때, 천도교는 어떤 종교적 입장을 취하지 말고 사상적 입장만 취하여 한국민의 정신문화에 기여한다면 오히려 그 공이 크고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기독교회에서는 천도교의 원리와 사상이 하나님 없는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제언하며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므로 과거 초기 기독교회의 입장이 아닌 성숙한 기독교회의 자세에서, 피차 이 원리와 사상을 깨우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전도의 전략을 마련하여 천도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문화를 수립해 왔던 재래종교 일체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바른 판단을 하여 거기에 속해있는 사랑하는 내 동포를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현재 인구비례로 25%가 기독교복음화가 된 이 마당에 그러한 선교전략을 세워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하여 연구하고 연구한 책자를 발행하여 보급하고 직접 간접으로 이해하며 대화하여 무한히 인내함으로 이 일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아 크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의 분부>일 것이다. -2003,8,9. 홈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