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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釋 金順大 2004. 11. .
1. 序文(서문)
昔我 王考進士公創成我 輔國公派以譜寓羹墻之慕又爲文弁卷此實爲先裕後之謨也
옛날 우리 조부이신 진사공(상현,참의공파,宇兼->漢熙->益祚->象鉉,1751~1832)이 조상을 기리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보국공파의 파보(1824 갑신보)를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머리말에 기록하여 선조를 위하고 이를 이어 받아 후대를 꾀하고자 한다.
今去甲申纔逾二紀餘而手澤尙新所謂孝悌之心油然而發者誠不誣矣不肖更當派譜之刊成非敢曰繼志述事而豈無一言以識之乎
이번 지난 갑신년(1824년)이 겨우 二紀(24년)여를 지났다. 손때가 묻었으나(手澤) 오히려 새로운 소위 효제지심(효도와 공경의 마음) 이 자연히 생겨 그 정성을 무시하지 못하여, 불초가 다시 당 파보의 간행을 완료하고,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계통을 이어가려는 뜻을 글로 표현하는 일에 어찌 한마디 없겠는가.
謹按自我 始祖王傳至十世 仇衡王見羅運之盛不以養人者害人遜位於新羅而入智異之會稽建始祖廟刱宮室以居終而葬焉
삼가 살피건데 우리 시조왕으로 부터 전하여 10세 구형왕까지 이르러 구형왕이 신라의 운이 번성함을 보고, 양인으로서 해를 입히면 않되겠기에 신라에 왕위를 양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머무르며 시조묘를 쌓고, 궁실을 만들어 생을 마치고 장사 지내어 졌다.
王之德詰抗於太王去邠之躅至 王之曾孫純忠壯烈興武王合三韓招六鎭偉功壯跡斑斑靑史環東土人庶莫不被其澤是以 朝家崇獎之廟享於慶州之西岳山淸之會稽會稽之號稱王山以三王遺蹟之致也
왕의 거빈(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함)에 대한 것은 왕의 덕이 그 비난을 감쌀 수 있고(詰抗), 왕의 증손인 순충장렬 흥무왕에 이르러 삼한을 통일하고, (육진을 개척하여) 그 위대한 공로가 역사의 기록에 베어 있다. 동쪽나라(우리나라) 사람 모두 그에 감히 미치지 못하므로, 조정에서 널리 권장하는 묘로서 경주 서악에 제사를 지내고, 산청에 회를 쌓고 왕산이라 칭하며 삼왕유적지로서 관리하고 있다.
王山一面便是駕洛乾坤盆城日月則金相國
왕산의 한쪽은 가락의 땅이고, 분성의 땅은 김씨의 나라이다.
所謂王山金氏之門戶王山高則金與之高 王山不毁則金與之俱 存者豈非千載的確之論耶
소위 왕산은 김씨의 문호이며 왕산이 높아지면 김씨도 같이 높아지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함께 보존될 것이다. 이 어찌 천재적(오랜 세월의) 확실한 지론이 아니겠는가.
噫金海之 納陵王山之 石陵雙全於嶺右粵在 先朝遺重臣祭侑之數此莫非我 始祖王神異之聖也 仇衡王遜位之德也 興武王合韓之功也
아! 김해의 납릉과 왕산의 석릉은 둘 다 영남의 오른쪽에 있다. 이전의 조정에서 중신을 파견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돕도록 한 것은 우리 시조왕의 신과같이 기이한 성스러움과, 구형왕의 양위에 대한 덕과, 흥무왕의 삼한통합의 공이 아니겠는가.
豈不盛哉顧余之金莫不盡祖 三王而三王之後派分支列各祖所蒙我中祖 輔國公及嶺之三賢宅湖之四君家幷顯于世 歲之甲戌壬戌三家連爲合譜卷至三十有餘恐或有難於急遽收藏之端故去甲申 王考進士公之刱成派譜良由是也
되새겨 보건 데 조상이신 삼왕께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는 김씨가 어찌 번성하지 않겠는가. 삼왕 후 각 파가 나누어져 각 조상을 받들고 있다. 나의 중조이신 보국공과 영남의 삼현과 호남의 사군가가 나란히 드러나서 후세에 전하여 갑술년(1754)과 임술년(1802년) 세 가계가 같이 합보하여, 권은 30여권에 이르나 간직되어 온 단서들을 급하게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여 지난 갑신년(1824) 왕고(조부의 형제)이신 진사공(상현, 참의공파, 宇兼->漢熙->益祚->象鉉,1751~1832)이 파보를 만든 것은 이것이 이유이다.
其派譜時昭穆之區別昆季之載錄無一遺漏而儼然成一家之柯則爲諸宗之龜鑑者之矣盡矣而去丁未年京中大臣家宗氏踵成派譜於咸陽安國菴而至於 判書諡文忠公之下以前譜所無之諱永淑錄於大提學公諱 永錫之上北兵使戰亡公諱 結子蔭郡守公諱 德宗子蔭監役公諱 繼楠以欽楠連繼此實前古所無之變而奪宗一款豈非大關於倫紀耶
그 파보를 만들 때, 형과 동생의 소목의 구별이 잘되어 기록되어 있고, 남기거나 빠진 부분이 하나도 없이 엄연히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제종의 귀감이 되었다. 지난 정미년(1847) 함양의 안국암에서 만든 서울 대신가의 종씨인 종성파보는 판서인 문충공(震敍,1394~1457)의 후손까지 이고, 이전의 보첩에는 없는 휘 영숙을 대제학공 휘영석(永錫,1418~1482)의 위에 기록하고, 전쟁에서 사망한 북병마사 휘 결의 아들과 음사로 군수를 지낸 휘 덕종의 아들과 음사로 감사역을 지낸 휘 계남을 흠남에 연계한, 이러한 결과는 이전에는 변하지 않던 종계를 탈취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어찌 인륜에 있어서 큰 관련이 아니겠는가(없겠는가).
閱覽舊譜瞭如指掌則不足多卞而爵啣與外裔所錄亦多有錯誤者建于今日豈可準信丁未之譜而不思更張之道乎
구보를 열람하면 손바닥을 보듯이, 충분하지 못하고 다급하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 명백하다. 관작과 외손의 후예를 기록한 것 역시 착오된 것이 많다. 오늘에 와서 어찌 정미보(1847)를 다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겠는가.
玆與諸宗更鳩如干財一依舊譜刊成新系適當其時有急遽之端故各處諸宗尙多遺漏敢竭卑誠更成新譜觀此譜系者庶幾知愼重之意矣
이에 제종과 같이 다시 조금씩 비용을 마련하여, 구보를 참고하여 적당(정확)한 새로운 계통을 만들어 간행하였다. 이때 시급한 단서<자료>가 있어서 각처의 제종들이 오히려 기록되지 못하고 누락되는 것이 많거나, 정성을 다하지 못할까하여 새로운 보첩을 다시 만듦에 있어서 이 보첩의 계통을 잘 보고, 모두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歲崇禎四戊午三月旣望不肖孫幼學 儀植謹序
숭정4무오(1858)삼월 기망 불초손 유학 의식(참의공파, 1804~, 象鉉의 系孫) 삼가 쓰다
一 自鼻祖距仇衡王凡十世 自仇衡王至長淸 盖六世以仇衡王論至今擧成數千二百餘年 年代蒼茫世系難尋者理固 其然而今觀各派草單則或繼六七十代或至四五十世人皆聽氷世皆駭矚以是井邑僞譜傳派詿誤則一依前後大譜規各立中祖以各派中祖叙列于左依此愼重之義焉
-. 시조로부터 구형왕까지 10세, 구형왕으로 부터 장청까지 6세이며, 구형왕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이백여년이 흘러 연대가 오래되고 아득하여 세계는 찾아보는 것이 어려워, 그 연유를 지금 보건데 각 파의 초단이 혹 6~70대가 계속되고 혹은 4~50세로서, 사람들 모두 세대의 계통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氷世)을 듣고, 모두 놀라 유사함을 자세히 보니 이는 정읍의 위보가 전한 속임수요 잘못된 것이다. 전후 대 보규에 의하여 각 중조를 세우고, 각파 중조의 순서를 매김에 있어 신중을 기하라.
一 前輩有曰輿地勝覽三國史記及駕洛國記似涉荒誕云而旣是久遠之文字則不信史筆而誰信乎並收錄焉
-. 전의 선배들이 이르시되 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및 가락국기에서 유사하게 답섭하고 있는 황당무계한 얘기 등은 영구하고 오래된 문자로서 믿을 수 없는 역사가의 글이고 누가 믿을 것인가 마는 같이 수록하였다.
一 首露王之金與時興之金 雖混稱金海之金而 所謂時興封君金海故時興之孫貫稱金海時興之先卽敬順之后也 與首露王之金同貫異本 勿許同譜識別異姓焉
수로왕의 김씨와 시흥의 김씨를 혼돈하여 김해김씨라 하나, 소위 시흥은 김해군으로 봉군된 고로 시흥의 자손들이 본관을 김해라 칭하나, 시흥의 선조는 즉 경순왕의 후예이다. 따라서 김수로왕의 김씨와는 동관이본(관향은 같으나 시조가 틀린)으로서 동 보첩에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이를 다른 성씨로 식별하기 위함이라.
一 湖南井邑有譜一本上自鼻祖下系六七十代僻土管見樂其誕自祔年代之錯誤擧措之儧越不足深誅後之君子庶可辨其眞贋矣
-. 호남 정읍에 있는 보첩 한 책에 시조이하 6~70여대를 어긋난 토관 같이 이어져 있어 보기에 좋을지 모르나, 그 허망한 거짓이 합쳐져 있고, 연대의 착오가 있으며, 이리 저리 모은 것이 뒤섞이어 깊이 보기에는 부족하니 후에 군자는 모두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라.
一 近世僞譜間或有之而去丁未咸陽安國譜則文忠公兵使公兩公之下連系變而奪宗一款宗豈非大關於倫紀乎又况爵啣與外裔貫鄕所錄亦多錯誤豈可準信丁未之譜耶日後僉宗君子庶可辨其眞僞焉
근래에 위보들 사이에, 지난 정미년 함양의 안국보 즉, 문충, 병마의 양공의 아래에 연계하여 탈취한 종중이 있으니, 이 어찌 인륜에 있어서 큰 관련이 아니겠는가(없겠는가). 또 관작과 외손 후예의 관향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 또한 착오가 많다. 어찌 정미보(1847)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 후에라도 여러 종친과 군자들 모두가 그 진위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一 始王納陵山川局體已顯圖圈而至若仇衡王陵在於山淸縣王山庚坐之原王與后眞像曁弓若劍服御等物凡我子姓或顯或徾散處中外有難瞻拜故 別成圈附于納陵圖之以爲傳信
-. 시조왕 납릉의 산천 형상은 이미 그림에 나타나 있고, 구형왕릉은 산청현 왕산 경좌에 있다. 구형왕은 왕후와 같이 실제 형상과 활과 칼과 의복 등의 물건을 그렸다. 모든 우리 자손(子姓)이 혹 드러나거나 혹 서로 따르거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더라도 우러러 숭배할 수 있도록 별도로 한곳에 모아 납릉도를 그려, 전해지도록 하였다.
一 名字無預定之規至有至親間 名字不同是豈敦睦之義哉 以五行講定十世名字書之卷首以爲永久遵行之計焉
이름자는 예정된 규정은 없으나 지극히 가까운 사이에 있어서 이름자가 같지 않고서는 이를 어찌 돈독하고 화목한 사이라 하겠는가. 오행을 검토하여 10세 동안의 이름자를 정하여 책머리에 기록하니 영구토록 이를 따라 행하도록 꾀하라.
○植 顯○ ○基 鍊○ ○ 泰 榮○ ○謙 載○ ○鎭 浩○
3. 구보서(舊譜序)
1) 갑신구보서(1824甲申)
解釋 : 金順大 2004. 11. .
夫自我 始祖王傳至十世 仇衡王見羅運之盛不以養人者害人遜位於新羅而入智異之會稽建 始祖廟刱宮室以居終而葬焉
우리 시조왕으로 부터 전하여 10세 구형왕까지 이르렀으나 구형왕이 신라의 운이 번성함을 보고, 양인으로서 해를 입히면 않되겠기에 신라에 왕위를 양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머무르며 시조묘를 쌓고, 궁실을 만들어 생을 마치고 장사 지내어 졌다.
王之德詰抗於太王去邠之躅至 王之曾孫純忠壯烈興武王合三韓拓六鎭偉功壯跡斑斑靑史環東土人庶莫不被其澤是以朝家崇獎之廟享於慶州西岳山淸之會稽會稽之號稱王山以三王遺蹟之致也
왕의 거빈(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함)에 대한 행적은 왕의 덕이 그 비난을 감쌀 수 있고(詰抗), 왕의 증손인 순충장렬 흥무왕에 이르러 삼한을 통일하고, 육진을 개척하여 <그> 위대한 공로가 역사의 기록에 베어 있다. 동쪽나라(우리 나라) 사람 모두 그에 <감히> 미치지 못하므로, 조정에서 널리 권장하는 묘로서 경주 서악에 제사를 지내고, 산청에 회를 쌓고 왕산이라 칭하며 삼왕유적지로서 관리하고 있다.
王山一面便是駕洛乾坤盆城日月則金相國
왕산의 한쪽 면은 가락의 천지(건곤)이고 분성의 땅(일월)이며 즉 금상국(김씨의 나라? 상국은 재상임)이다.
所謂王山金氏之門戶王山高則金與之高王山不毁則金與之俱存者豈非千載的確之論耶
소위 왕산은 김씨의 문호이며 왕산이 높아지면 김씨도 같이 높아지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함께 보존될 것이다. 이 어찌 천재적(오랜 세월의) 명확한 이론이 아니겠는가.
噫金海之納陵王山之石陵雙全於嶺右粵在 先朝遣重臣祭宥之數此莫非我 始祖王神異之聖也 仇衡王遜位之德也 興武王合三韓之功也
아! 김해의 납릉과 왕산의 석릉은 둘 다 영남의 오른쪽에 있다. 이전의 조정에서 중신을 파견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돕도록 한 것은 우리 시조왕의 신과같이 기이한 성스러움과, 구형왕의 양위에 대한 덕과, 흥무왕의 삼한통합의 공이 아니겠는가.
豈不盛於哉顧余之金莫不盡祖 三王而三王之後派分支列各祖所蒙我中祖輔國公及嶺之三賢宅湖之四君家幷顯于世歲之甲戌壬戌三家連爲合譜譜族也 是譜也
되새겨 보건 데 조상이신 삼왕께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는 어찌 김씨가 번성하지 않겠는가. 삼왕 후 각 파가 나누어져 각 조상을 받들고 있다. 나의 중조(中祖)이신 보국공(輔國公:諱世恭)과 영남의 삼현과 호남의 사군가가 나란히 드러나서 후세에 전하여 갑술년(1754)과 임술년(1802년) 세 가계가 연합하여 합보하게 된 것이 이 족보이다.
卷至三十有餘恐或難於急遽收藏之端故與近派族人鳩如干財刊成我 輔國公派譜便同家乘也 顧余不肖忘拙謹識世守敦睦以寓羹墻之慕焉
권은 30여권에 이르고, 간직되어 온 단서들을 급하게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되어 근처에 사는 파족인들이 비용을 모아 간행을 완성하였다. 우리 보국공 파보는 가승되는 것과 일치한다. 불초가 서투른 서문을 삼가 쓰고 기타 부분을 생각건대, 조상을 기리고 그리워하며(갱장지모) 세세토록 돈독한 화목을 지켜주기 바란다.
歲崇禎四甲申三月晦不肖孫進士象鉉謹序
숭정4갑신(1824년)3월 불초손 진사 상현(참의공파,宇兼->漢熙->益祚->象鉉,1751~1832) 근서
2) 정미보서(崇禎四丁未1847)서
人道之大者莫如五倫 五倫之大者莫如父子
사람의 도리에서 으뜸은 오륜만 한 것이 없고 오륜에서의 으뜸은 아버지와 자식<관계>만 한 것이 없다.
自父子而往至于九族延及百代本支支分昭穆之序自有差等則其在親 親之義不可無明之之道 譜之所由作良有以也
부자로 부터 9족에 이르기까지, 또한 백대의 줄기와 가지의 소목(신주를 모시는 차례)의 순서를 나누고 차등있게 하는 것은, 친족의 의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무명의 도가 불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첩이 이렇게 만들어진 연유에는 진실로 까닭이 있다.
我東姓金不爲不多而淵源之久遠最稱金海粵
우리 동국의 성인 김은 많지 않다고는(적다고는) 하지 않으나 연원이 가장 장구하고 먼 김해족이라 칭한다.
自駕洛十世而國絶入于新羅有興武王忠孝智略卓異絶倫入奇勳於唐朝唐朝特賜王號至于麗季有金寧君竹堈公爲當世碩輔入 本朝有安敬毅憲忠靖數三公之表著顯達盖自三韓迄今數千載軒冕相望節孝貞忠碩德偉勳迭相踵起涵虛亭洪斯交所謂金海之金獨高今古者非溢辭也
가락으로부터 10세에 나라가 끊어져 신라로 들어갔다. 흥무왕이 있었으니 충효와 지략이 탁월하고 絶潤하여 당나라에서도 공을 세우고(?), 조정(신라 흥덕왕)에서 특별히 왕호를 내렸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금녕군 죽강공이 당대의 큰 대신이었으며, 조선에 들어와 안경공, 의헌공, 충정공의 3분이 현저히 두드러진 달사(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였다. 대개 삼한시대부터 지금까지 수천명의 재상과 명망있는 절개, 효도, 정절, 충성, 석, 덕 위, 훈 들이 있었으니 함허정 홍사교(홍귀달)이 말했듯이 김해김씨는 지금과 옛날에 홀로 우뚝섰다 라는 말은 지나친 찬사가 아니다.
近世以來漸至零替科宦雖疏懷謹之士蘊玉之人種種有之後昆之將進不可量也
근세 이래로 점점 과거급제자와 고관직에 나가는 사람이 줄고 있어, 비록 드물긴 하나 회근지사(마음에만 품고 있는 선비?), 온옥지인(보배를 쌓아 놓은 사람= 아주 중요한 사람?)과 같은 여러 후손들이 <관직에> 장차 진출하고 있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一否一泰天道之自然安知異日之蔚興猶勝於前代之炳爀耶
한번 막혔다가 한번 통하는(一否一泰)것은 하늘이 만든 법칙인데, 이전 세대의 훌륭한 분보다도 오히려 더 나은(猶勝) 훌륭한 분이 언젠가는(異日) 부쩍 많이 등장(蔚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자연히 어찌 알겠는가(安知).
忠靖公之遺蹟著於廟堂見於史乘余嘗欽慕景仰其冑孫元植甫欲修譜牒數年經營遠近同心方謀剞劂請余爲弁首之文余以蔑學淺見不能贊一辭而於其報本之誠敦族之義竊有咸焉略陳其槩之萬一云爾
충정공(宇杭,1649∼1723)의 유적이 묘당에서 현저히 드러나고, 역사서에도 올라 있어 일찍이 흠모하고 따랐는데, 그의 주손(맏 장손)인 원식이(元植,1783~1856) 보첩을 수보할 의욕을 가지고 수년간 일해 와서, 멀리서 가까이서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보를 간행(기궐)할 것을 의논하여 머리말을 요청해 와, 배운 것이 보잘 것 없고 소견이 좁아, 한마디 말로서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하나, 보첩의 정성과 동족간의 우애돈독함의 뜻이 두루 미치도록 개략적으로 늘어놓아 보았다.
崇禎四丁未月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月城金道喜謹序
숭정 4 정미(1847년)월일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월성 김도희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