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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왕세계(1914년 갑인보)
原典 : 1914년 갑인보
解釋 ; 2005. 11. 5. 金順大
2010. 7. 12. 일부 수정
駕洛國王世系(가락국왕세계)
一世
太祖皇太王(태조황태왕)
王姓金氏諱首露一云靑裔東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卽位于是月望日建國于弁韓地駕洛九干推戴也
왕의 성은 김씨로서 휘는 수로이며 또는 청예[1]라고도 한다. 동한의 광무제 때의 건무 18년 임인(42)년 3월3일 하늘로부터 구지봉으로 내려와 즉위하여, 이 달 보름(3월15일)에 변한의 땅에 나라를 세우니 가락 9간 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다.
[1]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편의 건치연혁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 자세한 것은 김해부의 산천 편을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 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를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응감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駕洛國) 옛 기록의 ‘여섯 알[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써 믿을 수 없다. 또 중 순응(順應)의 전기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신라 진흥왕이 멸망시켜 대가야군으로 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초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소속하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이 설화는 수로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서, 고령지방의 토착집단이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로 보인다.
國號大駕洛都金官城故史或稱伽那迦邏金官駕洛封五伽倻以弁辰十二國爲藩漢史金官駕洛國爲弁辰之總王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고 수도를 금관성이라 하니 역사책에서 혹 칭하기를, 가나/가라/금관가락이라 하고 5가야를 두었다. 변진 12국으로서 번한을 만드니 역사적으로 금관가락국이 변진을 거느리는 왕이 되었다.
梁書新羅傳新羅以百濟征高句麗不堪戎役襲百濟附庸於迦邏國
양서의 신라전[1]을 보면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갑자기 침공하자 백제는 가라국에 의지하게 되었다고 한다[2].
[1]양서(梁書)에 신라전(新羅傳)이라는 것은 없음. 梁書에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내용은 ‘列傳第四十八 諸夷’에 나옴.
[2]아래의 내용에서 백제가 가랑(加良;가야)과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550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을 뺏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을 뺏는 등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551년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가 돌궐과 싸우는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영역인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 7월에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가랑(加良;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비고]가야의 멸망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1145년경 초간)에서 김구해의 금관국(가야)이 532년(법흥왕 때)에 멸망했고, 또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1281~1283년경)에서 김구형의 가야가 562년(진흥왕 때)에 멸망했다고 한다. 그러면 562년에 멸망한 김구형의 가야와 백제와 연합하여 김무력과 553년에 싸웠다는 말이 되는데???---그렇다면 562년에 멸망한 가야의 김구형과 신라 장군으로 출정했던 김무력이 父子관계가 될 수 없다. --- 종합적 검토필요(김구해와 김구형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삼국유사의 기록이 틀릴 수 있고, 562년에 멸망한 가야는 김구형의 가야가 아닐 수 있다???)
壬寅滅音汁伐國乙卯與新羅戰于黃山破之國益强地方東至黃山河北至大良州西南際海西北至居陀州百濟爲界
임인(102)년 음즙벌국을 멸망시키고[1], 을묘(115)년 신라와 황산에서 싸워 이겨[2] 나라가 더욱 강성해져서 나라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황산하(지금의 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량주에,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타주에 이르러 백제와 접하였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편의 내용임.
[2]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4년편의 내용임.
至開國一百二十一年漢延熹五年十四國皆來朝賀尊王爲普州皇太王后爲普州皇太后
개국한지 121년이 되어 한나라 연희5년(162년)에 14개국에서 모두 사신이 찾아와서 왕이 보주황태왕이 된 것과 왕후가 보주황태후로 지위가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
是歲傳位于太子居登王與太后移御于水晶宮國初建宗廟于金官城西祀典重孟春三日七日仲夏重五仲秋五日十五日四仲冬
이 해에 왕위를 태자 거등왕에게 물려주고 태후와 같이 수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금관성의 서쪽에 종묘를 짓고 제사를 드렸는데, 1월(孟春) 3일과 7일 두 번, 5월(仲夏) 5일, 8월(中秋) 5일과 15일, 11월(仲冬) 4일에 지냈다.
至開國百五十八年漢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在王位百二十年 在太王位三十八年春秋百五十八歲 葬于納陵 ○納陵一曰首陵今金海府西郭外百步許龜旨峯南子坐
개국한지 158년이 되어 한나라 헌제의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23일 서거하시니, 재위한지 왕으로는 120년, 태왕으로는 38년이었고 나이는 158세였으며 장사는 납릉에 지냈다. ○납릉은 수릉이라고도 하며 지금 김해부의 서쪽 외곽에서 100걸음쯤에 떨어져 있는 구지봉의 남쪽 자좌이다.
○麗文宗置陵田充享禮知金州事金良鎰撰碑銘云今傳其文無其碑
○고려 문종(1046~1083)때 능의 경비를 충당할 밭을 배당하여 충실한 제사를 드렸으며, 지금주사 김양일이 비명을 찬술했다고 하며 지금 그 글은 전해지나 비는 없다.
本朝 仁祖丁亥後孫道伯許積 竪碑撰外裔全榮{滎}書先是士林修會老堂尊香火其後自 朝家設備致享
조선에 들어와 인조 정해(1647)년 후손인 관찰사 허적(1610~1680)이 비를 세우고 찬하였으며 외손의 후예인 전영(전형)이 글을 썼다. 이 이전에 사림에서 회로당을 보수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그 후부터 조정에서 제사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英宗甲午御製致祭重修祭閣 正宗辛丑壬子並致祭寘陵監春秋二仲降香祝 御製會老堂懸版文
영조 갑오(1774)년 임금께서 치제를 하고 제각을 중수하였다. 정조 신축(1781)년과 임자(1792)년에 치제를 하고 능감을 두어 봄과 가을 2번 제사를 드리게 했으며 회로당의 현판문을 임금께서 지어 내렸다.
至 太王戊寅命建殿設齋室置寢郞降號 崇善殿竪神道碑後孫判書許傳撰外孫參判趙濟華書後孫本陵參奉金顯{氵+柱}篆
태왕(고종) 무인(1878)년에 이르러 전(殿)을 짓고 재실과 침랑을 두도록 명하였으며 숭선전이라는 호를 내렸다.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인 판서 허전이 비명을 찬술하고 외손인 참판 조제화가 글을 쓰고 후손인 본릉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龜旨峯以王發祥之地 隆熙二年戊申竪碑曾曾孫前享官金雲培撰碑陰銘外孫奎章閣學士閔泳璘書後孫前郡守金鍾應篆隆熙三年己酉南巡時 命官致祭
구지봉은 왕의 발상지로서 융희 2년 무신(1908)년에 비를 세우고, 증증손인 전 향관 김운배가 비음을 찬술하고, 외손인 규장각 학사 민영린이 글을 쓰고 전 군수 김종응이 제목을 썼다. 융희3년 기유(1909)년 남쪽을 순시할 때 [순종이?] 관리에게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普州皇太后諱皇玉姓許氏許國君阿隃陀王長公主漢光武九年癸巳誕生年十六駕洛開國七年戊申秋七月七日乘大船載石塔至駕洛王親迎爲后延熹壬寅封普州皇太后后弟曰寶玉嘗來遊金官如桃山聖母而國人歎其歸也
보주 황태후의 휘는 황옥이고 성은 허씨로서 허국 임금인 아유타왕의 맏 공주이다. 한나라 광무 9년 계사(33)년에 탄생하시어 나이 16세 되던 가락국이 개국한 지 7년째인 무신(48)년 7월7일 큰 배를 타고, 석탑을 싣고 가락에 당도하였다. 수로왕이 친히 영접하여 황후로 삼고 연희 임인(162)년 보주황태후로 봉하였다. 태후의 동생은 보옥으로서 일찍이 도산성모[1]와 같이 금관국에 놀러 온 적이 있으며, 그가 돌아가실 때 나라사람들이 탄식하였다.
[1]桃山聖母; 출처는 모르겠으나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서술성모(西述聖母)를 말하며 서술성모가 선도산(仙桃山)에 산다고 하여 일명 도산성모라고도 한다.
命其山曰長遊寺曰長遊村曰長遊慕其神聖以慰太后也
그 산[무슨산?]을 장유라 하고 절도 장유라 하고 마을도 장유라 부르도록 명령하여, 그 신성을 그리워하는 태후를 위로 하였다.
后生十子金海郡南有胎峯胎臺長太子二子從后國姓賜許氏七子厭世上昇一子居漆封君曰居漆君一女昔太子云
태후는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김해군의 남쪽에 태봉이 있으니[1] 이는 태를 모신 태대(胎臺)이다. 장남은 태자가 되고 두 번째 아들은 왕후나라의 성을 따라 허씨를 내렸으며, 7명의 아들은 세상을 싫어하여 하늘로 올라갔고, 나머지 한명의 아들은 거칠(居漆)로서 군(君)에 봉하여 거칠군이라 하였다. 한명의 딸은 석태자[2]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1]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태봉리로 되어 있음.
[2]신라의 4대왕 탈해이사금(57~80)이거나 또는 그의 아들
在后位百十四年在太后位二十八年東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日薨春秋百五十七歲 ○葬龜旨峯東子坐南距王陵二里許
왕후로 있은 지 114년이고 태후로는 28년을 지냈으며 동한의 령제 중평 6년 기사(189)년 3월 1일 서거하시니[1] 나이는 157세였다. ○구지봉의 동쪽 자좌에 장사지내어 남쪽으로 왕릉과 2리(800m 정도)쯤 떨어져 있다.
[1]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有陵表戊寅降殿號合享于 崇善殿如舊禮后之渡海王 命留天于望山島神鬼于乘岾以候之及后舟到泊處曰舟浦村下陸處曰夫人塘在熊川地贄送綾袴于山靈處曰綾峴在府南石塔今在后陵墻內隆熙戊申竪碑于夫人塘外裔輔國閔泳韶銘判書張錫龍撰
능에 묘표가 있고 무인(1878)년에 전호(殿號)를 내렸으며, 옛날의 예와 같이 숭선전에 함께 제사를 모셨다. 왕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수로왕이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로 가게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으로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왕후의 배가 도착하여 머문 곳을 주포촌이라 하고, 배에서 내린 곳을 부인당이라 하니 웅천땅에 있다.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보내어 산신령께 바친 곳을 능현(綾峴;비단고개)이라 하고 김해부의 남쪽에 있다. 석탑은 지금 왕후 능의 담장 안에 있다. 융희 무신(1908)년 부인당에 비를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보국 민영소가 쓰고 판서 장석룡이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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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居登王(거등왕)
太王長子東漢建安四年己卯卽位蜀漢延熙十六年癸酉秋九月薨在位五十四年
태왕의 장남으로서 동한의 건안 4년 기묘(199)년에 즉위하여 촉한의 연희 16년 계유(253)년 가을 9월에 서거하시니 재위 54년이었다.
○謹按一譜下同庚辰卽位以世孫冊封太子己卯王子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離去王歎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幀後人名招仙臺一曰招賢又曰招七點山人神始作伽倻琴至今傳樂府
○삼가 한권의 보첩을 살펴보니 한나라 건안의 경진(200)년에 즉위하여 세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고 되어있다. 기묘(199)년에 왕자인 선(仙)이 어지러운 세상과 슬픈 장례식[1]을 보고 신녀(神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이별하여 가버려, 왕이 한탄하며 도읍의 강에 있는 석도암(石島巖)에 올라가 <아들인> 선(仙)을 불러다가 초상(影幀)을 새겼는데 후세사람들이 이름 붙이기를 초선대라 하고 초현[2]또는 칠점산이라 부른다. 인간과 신이 비로소 가야금을 만드니 지금 악부에 전해온다.
[1]수로왕의 장례식인 것 같다.
[2]招賢; 어진 사람을 부르던 곳이란 의미
漢書卞韓國有瑟其形如筑辛亥滅甘文國己巳新羅王子昔于老使于洛還朝爲島倭襲殺王怒斬二百級又沙伐梁叛滅之壽一云二百三歲 ○陵都西野麓近世一譜爲道王
后諱慕貞父泉府卿申輔一云以后遺命火葬東史申輔妻太后出來時媵臣
한서에 변한국[1]에는 슬(瑟;거문고)이 있는데 모양은 축(筑;거문고)과 같다. 신해(231)년에 감문국을 멸망시켰다[2]. 기사(249)년에 신라왕자 석우로[3]가 낙(가락)에 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오다가 섬나라 왜가 습격하여 <석우로를> 죽이자, 왕이 노하여 200여명의 왜인을 죽이고 또 사벌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멸망시켰다. 나이는 한편으로는 203세라고도 한다. ○능은 도읍의 서쪽 야산 기슭 근방이고 세보 중 어떤 보첩은 도왕이라고 한다. 왕후는 모정으로서 천부경 신보의 따님이며 한편에서 말하기를 왕후는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역사서에는 신보의 부인은 태후가 올 때 태후의 몸종이었다고 한다.
[1]이런 책은 없음. 아마도 後漢書卷八十五 중 東夷列傳第七十五에 있는 辰韓의 내용을 말하는 것 같음.
[2]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조분이사금 편에 나옴.
二年秋七月以伊湌于老爲大將軍討破甘文國以其地爲郡.
2년(231) 가을 7월에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3]석우로는 10대 나해이사금의 아들임(신라본기 나해이사금편). 249년은 12대 첨해이사금 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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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馬品王(마품왕)
居登王子延熙癸酉卽位晋元康元年辛亥春二月薨在位三十八年一云母后本神女琉冕庚辰歲孕王九年戊子誕王五十二年春三月三日與父王離塵同爲上昇有史蹟晋元康庚戌薨在位三十七年 ○陵無傳一云成王
后諱好仇宗正監趙匡孫 趙匡妻名慕良亦太后媵臣壬子薨 ○陵王陵同原無傳
거등왕의 아들로서 연희 계유(253)년에 즉위하여 진나라 원강 원년 신해(291)년 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8년간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모후는 본래 신녀였고 이름이 琉冕(유면)인데, 경진(200)년에 왕을 임신하여 9년 무자(208)년에 왕을 낳고 52년[1] 봄 3월3일 부왕(선)과 같이 속세와 이별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또 다른 사적에는 진나라 원강 경술(290)년에 돌아가셔서 재위가 37년이었다고 한다[1]. ○능은 전해지지 않고 성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호구이며 종정감 조광의 손녀이다. 조광의 부인의 이름은 모량으로 역시 <허>태후의 몸종이었으며 임자(2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이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1]9년이 무자(208)년이면 52년은 서기 251년이 된다.
[2]삼국유사에는 291년 1월 29일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다. 누군가가 아들 거질미왕이 291년에 즉위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맞추기 위해서 마품왕은 290년에 돌아가셨다고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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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居叱彌王(거질미왕)
諱一云居叱今勿麻品王子元康辛亥卽位丁巳伊西古國叛遣將滅之壬申日本國請婚不納歸于新羅晋永和二年丙午秋七月薨在位五十六年一云德王
后諱阿志阿干我躬孫一云永和丁未薨 ○陵祔王陵同原無傳
휘를 거질금물이라고도 한다. 마품왕의 아들로서 원강 신해(291)년에 즉위하여 정사(297)년에 이서고국의 반란에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켰다[1]. 임신(312)년에 일본국이 청혼하였으나[2] 받아들이지 않자 신라로 돌아갔다. 진나라 영화 2년 병오(346)년 가을 7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7년간이었다. 또는 덕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 또는 영화 정미(34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에 붙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편
伊西古國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不能攘忽有異兵來其數不可勝紀人皆珥竹葉與我軍同擊賊破之後不知其所歸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長陵由是國人謂先王以陰兵助戰也.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하였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편
三年春三月倭國王遣使爲子求婚以阿湌急利女送之.
3년(312) 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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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伊尸品王(이시품왕)
諱一云伊麻一云伊尸品懷居叱彌王子永和二年丙午卽位義熙三年丁未薨在位六十二年 ○陵無傳一云明王
后諱眞信父司農卿克忠一云義熙丁未薨 ○二陵在金海陵洞異國兵禍每因金氏陵號而不知葬法疑有古品物寶藏入寇輒掘陵故蓋致失陵
휘는 이마, 또는 이시품회라고도 한다. 거질미왕의 아들로서 영화2년 병오(346)년에 즉위하여 의희 3년 정미(407)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2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명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진신으로 사농경 극충의 따님이다. 의희 정미(40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두 능은 김해의 능동에 있었으나, 다른 나라(일본?)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김씨의 능호가 붙어 있어서, 장례의 법을 모르고 고물건이나 보물이 있는 것으로 여겨[1] 도둑(왜구?)들이 자주 능을 도굴하고 다시 덮어 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옛 장례의 법에는 물건이나 보물을 넣지 않았던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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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坐知王(좌지왕)
諱一云金叱伊尸品王子義熙丁未卽位戊申日本始置營于對馬島洛羅二邦自是爲憂王寵一宮姬忠臣朴元道諫且筮得解卦曰解而拇朋至斯孚王乃辭之擯女于荷山島國大治宋永初二年辛酉夏五月薨 在位十五年一云神王
后諱福壽父大阿干道寧 ○陵幷無傳
휘는 또는 김질이라고도 한다. 이시품왕의 아들이며 의희 정미(407)년에 즉위하였다. 무신(408)년에 일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자 가락과 신라의 두 나라가 이것으로 인하여 우려하였다[1]. 왕이 총애하는 궁희가 한명 있었는데 충신 박원도가 간하면서 또 점을 쳐서 괘를 풀어 말하기를 ‘점을 풀어보니 엄지손가락 한 쌍이 쪼개졌다가 다시 붙었다,’고 하니 왕이 이에 여자를 물리쳐 하산도로 보내고 나라를 크게 다스렸다. 송나라 영초2년 신유(421)년 여름 5월 돌아가시니 재위는 15년간이었다. 신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능은 둘 다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편
七年春二月王聞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我欲先其未發揀精兵擊破兵儲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凶器戰危事況涉巨浸以伐人萬一失利則悔不可追不若依嶮設關來則禦之使不得侵猾便則出而禽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策之上也王從之.
7년(408) 봄 2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들이 오면 막아서 쳐들어와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할 때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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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吹希王(취희왕)
坐知王子辛酉卽位癸酉與百濟通和甲申日本犯境王拒之堅守萇山居漆國等設備後鷄林數被邊患宋元嘉二十八年辛卯春二月薨在位三十一年一云惠王壬寅薨
后諱仁德父角干進思一云思申 ○二陵無傳
좌지왕의 아들이다. 신유(421)년에 즉위하여 계유(433)년에 백제와 화친을 맺었고[1], 갑신(444)년에 일본이 변경을 침입하자[2] 왕이 이를 막아 지키고 장산에 거칠국 등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후에 계림(신라)이 여러 번 변경을 침입하여 근심하였다. 송나라 원가 28년 신묘(451)년 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1년간이었다. 또는 혜왕이라고도 하며 경인(450)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3]. 왕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 또는 사신의 따님이다. ○두 능은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을 베낌
十七年夏五月未斯欣卒贈舒弗邯秋七月百濟遣使請和從之.
17년(433) 여름 5월에 미사흔(未斯欣)이 죽어,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
二十八年夏四月倭兵圍金城十日糧盡乃歸.
28년(444)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3]삼국유사에는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이라고 되어 있어 취희왕의 돌아가신 해가 451년이나 다음의 질지왕의 즉위연도가 451년이라고 되어 있으니, 취희왕의 돌아가신 해를 450년으로 억지로 꿰어 맞추고자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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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銍知王(질지왕)
吹希王子一云銍智辛卯卽位南齋書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詔曰伽倻王荷知海外奉贄授輔國將軍本國王丁卯獲白雉遣新羅國初太王一子于進禮城設王宮太子壇設瞻星臺王就幔殿合婚處建寺曰王后王祀皇太后于金城齋永明十年壬申薨在位四十二年一云辛未薨諡莊王
后諱邦媛父沙干金相一云壬申薨 ○陵無傳
취희왕의 아들이다. 또는 질지(銍智)라고도 하며 신묘(451)년에 즉위하였다. 남제서에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왕 하지가 바다건너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고하였다.’고 되어있다[1]. 정묘(487)년에 흰 꿩을 사로잡아 신라로 보냈다. 나라의 초에 태왕(수로왕)의 한 아들을 진례성으로 보내어 왕궁과 태자단을 건립하고, 첨성대를 설치하였으며, 왕이 천막으로 만든 집(幔殿)에 들어가 결혼한 장소에 절을 세워 ‘왕후왕사’라 하였다[2]. 황태후는 금성재로 모셨다. 영명10년 임신(492)년 돌아가시니 재위는 42년이었으며 또는 신미(491)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하며 시호는 장왕이다. 왕후의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김상의 따님이며 임신(492)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1]南齊書卷五十八,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편에 나옴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가라국’은 ‘삼한’의 종자이다. ‘건원’ 원년(479)에 나라의 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널리 헤아림은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 먼 이가 감화 되었다. ‘가라왕 하지’가 동쪽의 먼 바다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 로 되어있고 위 본문에는 공물을 바쳤다는 글이 생략되어 있음.
[2]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과 유사함.
銍知王一云金銍王元嘉二十八年卽位明年爲世祖許王玉王后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여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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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鉗知王(겸지왕)
銍知王子齋永明壬申卽位新羅智證王始定國號丙戌滅小伽倻梁普通二年辛丑薨在位三十年一云諡肅王
后諱淑父角干出忠 ○陵一云在居漆國內山以上八代陵無傳
질지왕의 아들이다. 제나라 영명 임신(492)년에 즉위하였다. 신라의 지증왕이 비로소 국호를 정하고[1] 병술(506)년 소가야를 멸망시켰다. 양나라 보통 2년 신축(521)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시호는 숙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숙으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능은 거칠국내에 있는 산에 있다고 하나 이상 8대의 능은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503년)편의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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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子 讓王(양왕) <子 世宗, 武力王, 武得>
諱仇衡鉗知王子普通四年辛丑卽位甲戌百濟數伐新羅王子武力將兵在外大破濟兵殺濟王明穠在位十二年壬子傳位于世子仇亥王將與世子入于知品川世子乃傳位於弟武力王乃率世子世宗妃嬪及宗廟樂器移御于太王之水晶宮以終
휘는 구형이고 겸지왕의 아들이다. 보통4년 신축(521)년에 즉위하였다. 갑술(554)년에 백제가 여러 번 신라를 침범하므로 왕자 무력장군과 병사가 밖에서 백제병사를 크게 무찌르고 백제왕 명농(성왕)을 죽였다[1]. 재위는 12년간이며 임자(532)년에 왕위를 세자인 구해왕(=세종)에게 물려주고 <구형왕은> 세자들과 같이 지품천(지명, 아래에 설명 나옴)으로 갔다. 세자(구해=세종)는 이에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왕(양왕,구형왕)은 세자인 세종(구해)과 비빈을 거느리고 또 종묘악기(제사용 비품)를 가지고 태왕(수로왕)의 수정궁으로 옮겨서 종말을 고하였다[2].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十五年秋七月修築明活城百濟王明穠與加良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及交戰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2]본문대로라면 왕위는 구형->아들 구해->구해의 동생 무력이고
가족관계는 구형의 아들은 구해와 무력이고 구해는 즉 세종임.
[비고]가야의 멸망은 삼국사기에는 532년이고 마지막왕이 구해라고 하며, 삼국유사에는 562년으로 마지막왕이 구형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구해를 구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형(삼국사기에는 구해)이 다스리던 가야가 532년에 멸망하고 무력(삼국유사에는 구해)이 다스렸다고 주장하는 가야가 562년에 멸망하니, 이러한 햇수의 차이 30년을 억지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구해는 구형의 아들이고 무력은 구해의 동생이라고 해야 들어맞으니 필자인 휘운배가 가설(假說)을 세우고 억지로 맞다고 주장하고 있음.
史稱傳位于弟者史之傳誤而世子仇亥之於武力之謂也 王曰讓王仇亥曰世宗武力王之上諡也
역사서에서는 말하기를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역사서가 전하는 것은 틀렸다. 세자 구해(=세종)가 무력에게 물러준 것을 말한다[1]. 왕이라고 할 때는 양왕이라 하며, 구해를 세종이라 하는 것은 무력왕이 선왕을 위해 올린 시호이다.[2]
[1]즉 ‘동생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은 양왕이 구해에게 물러 준 것이 아니고, 양왕의 세자인 구해가 동생인 무력에게 물러 준 것을 말한다.’라는 뜻
[2]여기서는 구해=세종
○陵在駕洛國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西二十里壘石爲邱四面皆七級制度朴古如箕子陵
○능은 가락국의 지품천 왕산동쪽의 경좌에 있는데 지금의 산청군 서쪽 20리 쯤이다. 돌을 쌓아 4면의 경사로 되어 있고 7층의 계단으로 그 제도(형식)가 소박(朴古)한데 기자릉과 같다.
○在位一曰四十二年丁丑薨春秋六十九是在王位十二年及傳位後三十一年在上王位至壬午革國合歷歲也
○재위는 하나의 설로서는 42년이고 정축(557)년에 돌아가시어 나이는 69세였다. 이는 왕위로서 12년과 왕위를 물려준 후 31년간 상왕으로 지내다가 임오(562)년에 이르러 나라가 바뀌었으니 이를 합한 기간이다.
山曰王山臺曰王臺寺曰王山寺卽讓王父子世宗二王之遺蹟也 王山下有宗廟舊趾是知宗廟樂器太子妃嬪移御太王之水晶舊宮一曰興武王遺趾則非也興武乃追諡也 豈有王號於山名射臺也 又非復國則焉有創始祖廟哉
산은 왕산이라 하고, 대는 왕대라 하고, 절은 왕산사라 하니 즉 양왕과 부자(父子)인 세종의 두 왕의 유적이다. 왕산아래에 종묘의 구 터가 있는데 이는 종묘악기로 알려져 있으며 태자와 비빈이 태왕(수로왕)의 수정궁으로 옮긴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흥무왕의 구 터라고 하나 이는 틀렸다. 흥무는 추가로 내린 시호이다. 어찌 왕호를 산에 있는 사대에 이름붙이겠는가. 또 나라는 회복되지 않았는데 시조의 종묘가 만들어 질 수 있는가.
陵東距金官三百里陵舊失傳至朝鮮正宗戊午始復陵自營邑報京司越六年 純祖癸亥京鄕雲仍建陵齋講堂廟舍門樓有司禁樵焉
능은 동쪽으로 금관(김해)와 300리 거리에 있으나 예전에는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정조 무오(1798)년에 이르러 비로소 능을 복구하고, 이를 관리하는 읍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6년 후 순조 계해(1803)년 서울과 지방에서 후손들이 능의 제실과 강당과 종묘와 문루를 짓고, 유사들을 두었으며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1].
[1]숭선전지에는 1803년의 일에 대해 나타나 있지 않음.
○雲培謹按一譜云讓王辛亥冬燕子樓鳴驚動長安王命毁樓有太祖王牒曰燕子卽壬子傳國羅王不逆天此乃禪位而啓傳國之兆云
○운배가 삼가 살펴 보건대 어떤 보첩에서 말하기를 ‘양왕의 신해(531)년 겨울에 연자루에서 우는 소리가 나서 장안(나라의 수도, 김해?)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왕이 연자루를 부수어 버리라고 명했다 한다. 태조왕(수로왕?)의 글에서 말하기를 연자라는 것은 임자(532)년에 나라를 신라왕에게 바친다는 뜻이니 하늘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아 이에 선위하여 나라를 바칠 조짐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
又按王之傳位誣以革鼎先之者三國史法興王本記繼之以輿地勝覽玆後作史者因之尤之者禪坦瑛掇俚訛爲秘函而三王考趙鎭寬王陵碑序銘李秉鼎撰王陵祠碑及畵像碑銘誣罔天人誣斷王統三史僞歎可勝誅哉國史有錯家譜正之者竊有望於來賢也
后諱桂花父{分/叱}水伊一云丁卯薨
또 생각해보면 왕(구형왕)이 왕위를 <신라에> 전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나라가 다시 바뀐 것이다. 옛 사람들이 삼국사기의 법흥왕 본기[1]를 계승하여 여지승람에 어렴풋이 나타내었으나, 후세의 역사가들이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2]. 더욱이 중 탄영이 속된 것과 거짓을 가려내어 써서 비밀함속에 넣어 삼왕고 라는 책 속에 실렸고, 조진관이 쓴 왕릉비명의 서문과 이병정이 찬술한 왕릉사 비와 화상비명도 거짓으로서 하늘을 속이고, 사람들은 거짓으로 왕통을 끊어버리고 삼국사가 허위로서 한탄스러우니 다 없애야 할 것이다. 나라의 역사서에는 착오가 있고 가정의 보첩이 올바르니 가만히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왕후의 휘는 계화이고 뿐수이의 따님이다. 정묘(54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편
十九年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以國帑寶物來降王禮待之授位上等以本國爲食邑子武力仕至角干.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어떤 근거로 이를 거짓말이라고 하는지? 위의 삼국사기보다 더 오래된 正史가 없는 이상 삼국사기를 신뢰해야 하지 않는가. 모두들 개인의견을 가질 수는 있으나 틀렸다고 하기에는 곤란함.
[참고]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의 멸망에 대한 내용은 구형왕에 대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仇衡王金氏正光二年卽位治四十二年保定二年壬午九月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興兵薄伐王使親軍卒彼衆我寡不堪對戰也仍遣同氣脫知爾叱今留在於國王子上孫卒支公等降入新羅.
구형왕은 김씨이며 정광 2년에 즉위하여 치세는 42년이다. 보정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형제)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陵王陵同原云未詳
○왕후의 릉은 구형왕릉과 같은 언덕이라고 하나 알 수 없다.
○雲培謹按戊午邑儒閔景元所發坦瑛秘函弓劍若錦袍王所御也繡裳影幀王與后也此記粧撰須辨眞贋作今日大訓河圖則不得不求古而返正焉
○운배가 삼가 생각해 보면 무오(1798)년 읍의 유학자인 민경원이 발견한 탄영의 비함(秘函)속의 활과 칼과 약간의 비단으로 만든 옷은 왕의 것이었다는 것과 수를 놓은 치마의 영정은 왕과 왕후이라는 이러한 기록은 꾸민 것이니(粧撰) 모름지기 진위를 밝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크게 교훈을 주는 하도[1]의 그림같은 것을 어떻게 하든지 구하여 올바른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1]河圖; 중국 황하에서 나왔다는 신비한 그림. 우주순환과 인생의 이치를 나타내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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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지왕의 子 脫知(탈지)
官{分/叱}今
관직은 뿐금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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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양왕의 子 世宗(세종) <子率友>
讓王子諱仇亥一云奴宗凡稱仇衡王傳位于弟仇亥弟卽子字訛誤今正之仇衡王十二年壬子受禪位及衡王移御于太王水晶舊宮也傳位于弟武力以宗廟樂器及妃嬪陪讓王入于水晶宮以終
양왕의 아들로서 휘는 구해이고 또는 노종이라고도 한다. 무릇 말하기를 구형왕이 왕위를 동생인 구해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제(弟;동생)라는 글자는 자(子;아들)이라는 글자를 잘못 기록한 것이니 지금 바로잡는다. 구형왕 12년 임자(532)년에 왕위를 <세종이 양왕에게서> 선위받았고 또 구형왕은 태왕(수로왕)의 옛 궁궐인 수정궁으로 옮기었다. 세종은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종묘악기와 비빈을 거느리고 양왕이 계시는 수정궁으로 들어가 종말을 고하였다.
今山淸郡王山王射臺曰王山寺皆王父子之遺蹟也近世譜稱角干當刪其曰興武王於讓?王侍陵七年者王與武力王事亦未可詳后與陵俱無傳諡世宗弟武力王之上尊也
지금 산청군의 왕산과 왕사대와 왕산사 등은 모두 왕의 부자(구형왕과 세종)의 유적이다. 최근(1800년대 말~1900년대 초)의 세보에서 말하고 있는 각간이라는 것은 당연히 삭제해야 하고, 또 거론되는 흥무왕이 양왕의 묘소에서 7년동안 묘를 지켰다는 것과 왕(양왕)과 무력왕에 대한 일도 역시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왕후가 누구인지와 능이 어디에 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세종이라는 시호는 동생인 무력왕이 선왕(=구해)을 높여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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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의 子 武力王(무력왕) <子舒玄>
新羅角干仇衡王第二子衡王壬子禪位太子世宗後世宗將 入于伽倻山傳位于王王受禪至新羅眞興王二十二年陣文帝天嘉三年壬午傳國于新羅眞興待以賓禮以其國爲食邑以金官爲金官郡
신라의 각간으로서 구형왕의 두 번째 아들이다. 구형왕의 임자(532)년에 태자인 세종(=구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이후에 세종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면서 왕(무력왕)에게 또다시 왕을 물려주었다. 왕(무력왕)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신라 진흥왕 22년, 진나라의 문제 천가 3년 임오(562)년 나라를 신라에게 넘기자, 진흥왕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어 대접하면서 그 나라를 <무력왕에게> 식읍으로 주고 금관을 금관군이라 하였다.
東國遺史曰周保定壬午傳位于新羅自駕洛紀元元年壬寅歷五百二十一年編年國記秋大伽倻謀復國羅將異斯夫擊之諸臣皆死之於是駕洛平通典新羅襲滅駕洛任那諸國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역사(삼국유사)에서 말하기를 주나라 보정 임오(562)년에 신라에 왕위를 넘겨주었으니, 가락기원 임인(42)년 으로부터 521년이다. 라고 되어 있고 편년국기[1]에는 가을에 대가야가 나라를 다시 찾을 모의를 세우니, 신라장수 이사부가 이를 공격하여 여러 신하를 모두 죽여, 이로서 가락을 평정하였고 신라는 가락과 임나의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되어있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二十三年秋七月百濟侵掠邊戶王出師拒之殺獲一千餘人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
23년(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是歲高靈伽倻亦亡此駕洛與高靈壬午幷亡之左証也
이 해에(562) 고령가야가 또한 망하니 이로서 가락은 고령과 임오(562)년에 같이 망했다는 증거이다.
王旣傳位于新羅官至大總管大都督角干一世譜武力王遜位于新羅賜爵新州大總管角干又慶州金氏璿源譜武力王固以王駕洛之國君新朝之將相一位而曰王曰角干固其眞傳也一世譜曰在位七年因迭史而在位之年傳之失實之文
왕(무력왕)은 이미 왕위를 신라에 넘겨주고 대총관/대도독/각간이 되었다. 어떤 세보에는 무력왕이 신라에 왕위를 넘겨주고 신주대총관/각간의 작위를 받았다고 하고. 경주김씨선원보에는 무력왕이 진실로 왕으로서 가락의 국군(國君)이며 새로운 조정의 장수와 재상 중 제 1위로 되어있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각간(무력)의 진실을 실제로 전하는 것이다. 어떤 세보에서는 말하기를 재위기간은 7년이라고 하나 역사를 잃어버렸으니 재위의 기간으로 전하는 것은 잃어버렸던 실제의 글이다.
○雲培謹按一古譜以王命出佐新羅辛未以居漆夫攻取高句麗設八關所甲戌戰役殺濟王明穠南攻大元帥月峯下作藏春三十舍還軍城太和關築轎山輪山城骨浦漆浦甘文草八沙伐來降眞平王元年十月十六日薨一云死節官角干
○운배가 삼가 살펴보니, 한권의 옛날 보첩에 왕의 명령으로 나가서 신라를 도와, 신미(551)년 거칠부가 고구려를 공격[1]하여 <땅을> 빼앗아 팔관소(?)를 설치하였고, 갑술(554)년의 싸움에서는 백제왕 명농(성왕)을 죽였고[2], 남쪽을 공격하여 대원수로서 월봉(?) 아래에 창고를 지었다. 봄 30일에 군사를 이끌고 태화관으로 돌아와 교산성과 윤산성을 건축하고, 골포/칠포/감문/초팔/사벌의 여러나라가 항복하였다. 진평왕 원년[3] 10월16일에 돌아가셨고, 사절관 각간이라고도 한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十二年---중략---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乘勝取十郡.
12년(551) --- 중략---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빼앗았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기사
[3]진평왕 원년은 579년이나 본글의 작성자이신 휘운배공은 580년이라고 할 것임
○墓鷲山下癸坐石物賜牌地鷲山寺云
妃朴氏巴刀夫刀弟一云祔公墓云
○묘소는 취산아래 계좌에 있고 석물로서 비석이 있는 곳을 취산사라 한다.
왕비는 박씨로서 파도부도의 동생(巴刀夫刀弟)이라고 하며, 공의 묘 옆에 묘소가 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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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의 子 武得(무득)
官角干 ○一譜官角干號義卿封金寧君伐首若西州漢山享于觀晶洞伯仲祠故三忠公云 配金氏父護軍伊湌改物
관직은 각간을 지냈다.
○어떤 보첩에는 관직은 각간이고 호는 의경이며 금녕군에 봉해져서, 서주의 한산을 정벌하였고 관정동에 제사를 모시니 백형(세종=구해), 중형(무력)과 같이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삼충공이라고 한다. 부인은 김씨로서 호군을 지낸 이찬 개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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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
세종의 子 率友(솔우)
一云率支 配鷄林金氏○墓及子孫無傳
솔지라고도 한다. 부인은 계림(경주) 김씨이다. ○묘와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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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왕의 子 舒玄(서현)<子 庾信, 欽純, 女新羅文明王后,寶姬>
二子二女○一云庶新羅角干梁州都督按撫諸軍事 ○謹按一譜都督伐任羅伽倻萬弩國封萬弩郡太守陞角干蘇判己丑伐高句麗娘臂城公之子庾信斬將奮擊遂援?之賞是功忌九月十九日
配金氏諱萬明新羅宗室肅紇宗女 ○一譜忌十月十一日墓上同原失傳云
2자2녀를 두었다. ○또는 말하기를 신라각간/양주도독/안무제군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가 어떤 보첩을 살펴보면 도독으로서 임나가야를 정벌하니 만로국에서 만로군의 태수로 봉했다가 각간/소판으로 승진했다고 되어 있다. 기축(629)년에 고구려 낭비성을 정벌하고[1] 공의 아들인 유신이 적의 장수를 베고 공격하는 것을 도와 이 공으로 상을 받았다고도 한다. 기일은 9월 19일이다.
부인은 김씨로서 이름은 만명이고 신라종실인 숙흘종의 따님이다.
○어떤 보첩에는 부인의 기일이 10월11일이고 묘소도 위와 같은 언덕에 있었다고 하나 잃어버렸다고 전한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편
五十一年秋八月王遣大將軍龍春舒玄副將軍庾信侵高句麗娘臂城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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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서현의 子 庾信(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耳,元望, 庶子 軍勝>
六子一云五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또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고도 한다.
○都督公舒玄子都督爲萬弩郡太守甲寅歲庚辰日夢太白鎭二星降於己母夫人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室尋有娠二十月生背有七星文郡有胎靈山卽藏胎處後號吉詳山以公也
○도독공 서현의 아들이다. 도독이 만로군[1] 태수로 있을 때인 갑인(594)년 경진일 에 꿈을 꾸니 태백성과 진성의 두 별이 그에게로 내려왔다. 모친도 꿈에서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이고 후에 길상산으로 부른 것이 바로 공(유신)으로 인해서 이다.
[1]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
公曰吾以庚辰日有吉夢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庚與庾字似 辰與信 聲相似 蓋以命之 遂名庾信
공(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도리상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은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같으니 대개 이렇게 하라고 명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公幼有大志年十五人己服從號龍華郎嘗入方丈侍陵七載又入中嶽山誓告于天得兵書寶劍各一仍入咽薄山告誓虛角二星光芒下垂寶劍自躍又 入月生山試劍斬大石後世名曰斷石山
공(유신)은 어려서 큰 뜻을 가졌었고 나이 15세에 사람들이 그의 말에 복종하였다. 호가 룡화랑으로 일찍이 방장산에 들어가 7년동안 시릉[1]하였고, 중악산에 들어가 하늘에 맹세하였으며(무엇을?) 병서와 보검 각 하나를 얻었다. 거듭하여 열박산에 들어가 맹세하니(무엇을?) 허성과 각성의 두 별빛이 내려와 보검을 밝게 비추었다. 또 월생산에 들어가 보검을 시험하고자 큰 돌을 자르니 후세 사람들이 이름붙이기를 이 산을 단석산이라 한다.
[1]이것은 위에서 未可詳이라 해놓고 또 기술함.
奉母訓斬馬絶天官佐新羅太宗與唐將蘇定方伐百濟獲公主歸之後人名其地曰鵲院以白馬釣白龍斬之後人名其江曰白馬江遂滅百濟唐高宗壬戌蘇定方伐高句麗不克公提兵往救之
모친의 훈계를 받들어 말의 목을 베고 천관과 절교하였으며, 신라 태종을 도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같이 백제를 정벌하고 공주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작원이라 이름붙였다. 백마로서 흰 용을 낚아 베어버리니 후세 사람들이 그 강을 백마강이라 했다.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고종이 임술(662)년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벌하라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공(유신)이 병사를 제공하여 가서 구해주었다.
總章元年戊申授方略於公弟欽純與唐將李勣滅高句麗統合三韓官至太大舒發翰太大角干唐高宗遣使冊公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
총장 원년 무진(668)년 방안과 계략을 공의 동생인 흠순에게 주어서 당나라 장수 이적과 같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합하였다. 관직은 태대서발한/태대각간에 이르고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공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책봉하고 식읍 2천호를 주었다.
咸寧四年文武王十二年癸酉春大星隕地震公寢疾王命禳及篤親臨有遺誥夏六月人見甲士數十人自公宅涕泣而去忽不見七月一日薨葬慶州府松花山金山原西岳里賜軍樂鼓吹以葬命國子博士薛因宣撰碑文定八戶守
함녕 4년 문무왕 12년 계유(673)년 봄에 큰 별이 떨어지고 땅이 흔들리자 공이 병이 들었다. 왕(문무왕)이 굿을 지내고 친히 임하니 교훈을 남겼다. 여름 6월에 사람들이 보니 갑옷을 입은 선비 수십명이 공의 집에서 나오면서 울면서 갑자기 없어져 보이지 않았다. 7월1일 돌아가시어 경주부 송화산 금산원 서악리에 장사지냈으며, 군악대의 북과 취주대를 동원하여 장례를 치렀다. 국자감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하고 8집을 정하여 묘를 지키게 했다[1].
[1]삼국사기 열전의 김유신편과 동일함
墓碑序始祖太王曰黃帝之孫少昊之胤此句傳於世碑與全文逸太和二年戊申興德王封公爲興武大王大曆己未惠恭王時有衣甲神將四十餘員擁一位大將至竹峴味鄒王陵有異徵王懼遣金敬臣責躬致祭置享田於鷲山寺
묘비의 서문에 시조 태왕(수로왕)은 황제의 손자인 소호의 후예였다고 하나 이 구절은 세상에 전해져 오는 것이고, 묘비와 전문은 없어졌다. 태화2년 무신(828)년에 흥덕왕이 공을 훙무대왕에 봉하고 대력 기미(779)년 혜공왕 때에 갑옷을 입은 40여명의 신장(神將;장수 귀신)들이 한사람의 대장을 모시고 죽현의 미추왕릉으로 간 이상한 징조가 있어서 왕(혜공왕)이 후회하며 김경신을 파견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며 치제를 올리고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는 밭을 취산사(삼국사기에는 鷲仙寺)에 두었다.
至朝鮮 正廟壬子四月因太王納陵致祭命降香祝致享 隆熙己酉當南巡命官降祝與 崇善殿一體致祭公之史遍於彤管此不重載配享如西岳院香火如鎭川吉祥祠軍威孝靈祠江陵花浮祠至今繼續焉
조선에 이르러 정조 임자(1792)년 4월에 태왕(수로왕)의 납릉에 치제하고 향과 제사에 쓰일 물건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융희 기유(1909)년 당시 남쪽을 순행할 때 관원에게 명하여 축(축문?)을 내리라고 명하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공(휘유신)의 역사에 있어서 동관(彤管)에서 있었던 일은 여기에 중복하여 기재하지 않는다. 배향을 서악원과 같이 모시고 향화도 진천의 길상사와 같이, 군위의 효령사, 강릉의 화부사에 지내게 하여 지금 계속되고 있다.
配慶州金氏新羅太宗第三公主平壤郡夫人封興武王后 ○墓公墓同原有智炤舊碑剝落有神道碑大提學黃景源撰
○舊譜開國公妃智炤夫人生六子長曰三光次曰元述次曰元貞次曰長耳次曰元望庶子曰軍勝一曰三光庶子曰軍勝太宗歲賜城南租一千石嘉夫人內助之陰功也
부인은 경주김씨로서 신라태종의 셋째 따님인 평양군 부인이며 흥무왕후에 봉하였다.
묘소도 공(휘유신)의 묘소와 같은 언덕의 지소에 있고 옛날의 비석은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져 신도비를 세우고 대제학 황경원이 찬술하였다.
○구보에는 개국공(휘유신)의 왕비인 지소부인이 6남(5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삼광, 다음은 원술, 다음은 원정, 다음은 장이, 다음은 원망이고 서자로서 군승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삼광의 서자가 군승이라 한다. 태종시대에 성남에 1천석의 곡식을 내리니 이는 부인이 내조한 남모르는 공덕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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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子 欽純(흠순) <子 盤屈>
新羅大將軍唐太宗貞觀八年與唐將李勣伐高句麗滅之又伐倭克之又伐渤海
配无傳
신라 대장군으로서 당태종 정관 8년(634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과 같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1] 또 왜를 정벌하여 이겼으며 또 발해를 정벌하였다.
[1]고구려가 망한 연대는 668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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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女 新羅文明王后(문명왕후)
新羅太宗妃小名文姬 ○子法敏文武王金仁問金文汪並將軍老且智鏡愷元並角干
신라 태종의 왕비로서 아이 때의 이름은 문희이다. ○아들은 법민이 문무왕이고 김인문, 김문왕은 모두 장군이고 노차, 지경, 개원은 모두 각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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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女 寶姬(보희)
東史纂要云文姬兄
동사찬요에는 문희의 언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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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유신의 子 三光(삼광) <子 允中, 允文>
二子○官伊湌唐高宗乾封元年丙寅皇帝勅召三光爲左武衛中郎將仍令宿衛三年總章元年戊辰合唐兵滅高句麗
두 아들을 두었다. ○관직은 이찬으로 당나라 고종 건봉원년 병인(666)년에 황제(당의 고종)가 칙령으로 삼광을 불러 좌무위 중랑장으로 삼고, 숙위하도록 명령하였다. 건봉 3년이자 총장 원년 무진(668)년 당나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按東史文武王六年丙寅夏四月遣奈麻漢林三光如唐宿衛漢林天存之子三光金庾信之子王旣平百濟欲請兵滅高句麗故遣之帝以三光爲武衛翊府中郞將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문무왕 6년 병인(666)년 여름 4월 나마(벼슬명)로서 한림과 삼광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숙위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림은 천존의 아들이고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왕(문무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병사들을 빌려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황제(당의 고종)에게 삼광을 파견하니 삼광은 무위익부 중랑장이 되었다.
及還帝贈詩曰燦燦文星熙海東飄揚才德子能全一振高名滿帝都三千躍馬向華邊
또 돌아올 때 황제가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빛나고 빛나는 글이 별과 같이 바다의 동쪽(신라)에 태풍과 같이 떠오르는구나. 재능과 덕망은 능히 모든 나라안을 진동시켜, 고귀한 이름이 황제의 서울에 널리 알려졌구나. 3천마리의 뛰어노는 말이 영화로운 변경을 향해갔다.’고 하였다.
羅史文武王八年夏六月唐遼東行軍劉仁軌奉勅與宿衛沙湌金三光到党項津王使金仁問備禮迎之仁問卽王子開國公之甥也
配位墓所未詳
신라의 역사에는 문무왕 8년 (668년)여름 6월, 당의 요동행군 유인궤가 칙령을 받들고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과 같이 당항진에 도착하니 왕(문무왕)이 김인문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환영하라 하였다고 한다. 김인문은 왕자로서 개국공(휘유신)의 조카이다.
부인과 묘소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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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述(원술)
官蘇判名載史傳 ○舊記唐高宗時與唐兵戰敗欲死戰其佐淡凌止之以圖後以此不敢復見公公欲誅之王舍之欲見母夫人拒之後餘唐兵戰有功終不敢見入太白山終其身
配與子孫无傳
관직은 소판으로서 이름이 역사서에 전한다. ○구 기록에는 당 고종 때 당나라 병사와 싸워 패하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였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그의 계획을 막았다. 이로서 감히 다시는 공(휘유신)을 보지 못했고 공이 <아들 원술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왕이 말렸고 <원술이> 그의 모친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 후 남은 당나라 병사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나 끝내 <부모를> 뵙지 못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종말을 고하였다.
부인과 자손들은 누구인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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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貞(원정)<子 王巽>
官海干
配與墓无傳
관직은 해간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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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長耳(장이)
官大阿湌
配墓子孫无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와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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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望(원망)
官大阿湌
配墓子孫无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와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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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庶子 軍勝(군승)
配無傳
부인은 누구인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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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순의 子 盤屈(반굴)
新羅太宗庚申秋七月唐將蘇定方伐百濟時從角干次于南川亭上四戰不利公力戰死之
신라 태종 경신(660)년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각간(휘유신)을 따라 남천정위에 올라가 4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여 공(반굴)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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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삼광의 子 允中(윤중) <子 長淸>
官大阿湌一云元述子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고 원술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東史唐開元二十一年新羅聖德王三十二年癸酉秋九月唐以渤海靺鞨入寇帝詔曰新羅舊將金庾信孫允中之賢可爲將入送仍賜允中金帛於是王命允中及其弟允文等將兵會唐軍伐渤海因天大雪而還
○우리 역사서에 당나라 개원 21년 신라 성덕왕 32년 계유(733)년 가을 9월에 당나라에 발해와 말갈의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황제(당의 현종)가 조서를 내려 말하되 ‘신라의 옛 장수인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이 현명하여 가히 장수로 될 수 있으니 들어오게 하라.’하고 또 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다. 이에 왕(성덕왕)은 윤중과 그의 동생 윤문 등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여 당나라 군사와 같이 발해를 정벌하라고 하였으나 눈이 많이 내려 돌아왔다.
大曆十四年惠恭王己未王以允中庾信嫡孫擢爲大阿湌寵遇之王之親屬頗嫉之王嘗登月城與從臣置酒爲樂召允中與焉左右曰今宗室戚里豈無可人而獨召疏遠之臣何也 王曰今吾與卿等共享泰平皆庾信之功 若遐棄之非善善及子孫之義賜允中坐語庾信勳烈賜絶影島山馬一匹
대력 14년 혜공왕 기미(779)년에 왕(혜공왕)이 윤중을 유신의 적손으로 발탁하여 대아찬에 임명하고 특별히 총애하자 왕의 친속들이 약간 시기하였다. 왕이 일찍이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같이 월성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며 윤중을 부르자 좌우에서 말하기를 ‘지금 종실의 친척(戚里)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홀로 관계가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공 들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모두 유신의 공로이다. 만일 이를 돌보지 아니하면 선이 아니며 또 자손에게 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하였다. 윤중을 옆에 앉히고 유신의 공적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절영도의 산에서 가져온 말 한 마리를 주었다.
配與墓所无傳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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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광의 子 允文(윤문)
屢立戰功奉王命與伯兄允中提師會唐兵伐渤海官及配位墓所子孫无傳
여러 번 전공을 세웠고 왕명을 받들어 형인 윤중과 같이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사와 같이 발해를 정벌하였다. 관직과 부인과 묘소와 자손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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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의 子 {王+巽}(선) <子 巖>
判吏部事
配與墓无傳
판이부사를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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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
윤중의 子 長淸(장청)
官執事侍郞角干碑陰允中孫 京世譜一云允中孫 又嶺南譜開國公玄孫執事侍郞長淸作公行錄皆以允中孫與京世譜及碑陰同 ○開國公長派京世譜只載長淸十七世无傳
관직은 집사시랑을 지냈다. 각간(휘무력?)의 비음[1]에는 윤중의 손자라고 되어있다. 경파세보에는 윤중의 손자라고도 하고 또 영남보에는 개국공(휘유신)의 현손인 집사시랑 장청이 공(휘유신)의 행록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모두 윤중의 손자로서 경파세보와 비음[1]은 동일하다. ○개국공(휘유신)의 경파세보에는 다만 장청은 17세이고 무전이라고 되어있다.
[1]碑陰; 비석의 뒷면에 적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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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巽}의 子 巖(암) <子 瑱>
官執事侍郞司天太博士京世譜輿地允中庶孫名載史傳
관직은 집사시랑/사천태박사를 지냈다. 경파세보와 여지에는 윤중의 서손으로 되어 있고 이름이 역사서에 실려 전한다.
○開國公事蹟篇長文子孫錄允中次曰允文庶孫曰巖聰敏好方術少壯入唐宿衛間就師學陰陽家法術遁甲立成法師曰不圖明達至此還國爲司天太博士執事侍郞鎭浿江敎六鎭兵法人皆便之嘗有蝗蔽野百姓憂懼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滅
○개국공(휘유신) 사적편의 긴 글인 자손록에는 윤중의 다음이 윤문이고 서손으로서 암이 있다고 한다. 암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방술을 좋아하여 어려서 당나라에 숙위로 가 있을 때, 스승으로부터 음양가술과 둔갑입성법을 배워 스승이 말하기를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국내로 돌아와서 사천태박사/집사시랑이 되었다. 패강을 진압하고 육진병법을 가르치자 사람들이 모두 편해 하였다. 일찍이 메뚜기 떼가 들을 뒤덮어 백성들이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암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자 갑자기 바람과 비가 많이 내려 메뚜기 떼가 전부 없어져 버렸다.
後聘日本王 知其賢 欲留之會 唐使高鶴林相見甚懽王以巖爲大國所知不敢留乃還 又歷代唐代宗大曆十四年羅惠恭己未遣金巖 聘日本
이 후에 일본왕이 그를 초청하여 그의 현명함을 알고 그를 머물게 하고 싶었으나, 마침 당나라의 사신인 고학림이 그를 보고 아주 기뻐하여 왕(일본왕)은 ‘암은 대국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인데 감히 머무르게 하지 못하겠다.’하고 돌려보내었다. 또 역대의 당나라 임금인 대종 대력 14년 신라 혜공왕 기미(779)년에 김암은 일본을 방문하였다.
[1]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과 비슷함
巖庾信曾孫性聰敏少爲伊湌入唐宿衛下文同此以曾孫載也京世譜只載子瑱餘無傳有附錄按甲戌歲 井邑金德埰家有抄本自巖以下四十餘代聯係 井邑老僧所傳此非印本公蹟 甲戌僞譜猶不敢合錄 丙戌德埰潛刊近閱數本各自不同 其傳會亦明書此懲後
암은 유신의 증손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는 글에서 이와 같이 증손이라고 적혀있다. 경파세보에는 다만 아들이 진이라는 것 외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부록을 살펴보니 갑술(1754)년에 정읍의 김덕채 집에 초본이 있는데 암으로부터 이하 40여대를 연계했다고 한다. 정읍의 노승이 전해준 이것은 공적으로 인쇄된 책이 아니어서 갑술의 위보를 오히려 감히 합록하지 않았는데, 병술(1766)년에 덕채가 몰래 간행하였다고 한다. 최근(1900년대 초)에 여러 권의 보첩을 살펴보니 각각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 전해지는 바를 분명히 써 두니 후에 검증토록 하라.
正德舊本世系抄
一世
雄元(웅원)---(父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羅宣德朝仕至伊湌助唐討李師道丙午築浿江長城三百與里號金州逸民 ○正德舊本雄元系于諱巖下近日譜或系於諱長淸下未知有何據今姑存錄以備考焉
신라 선덕왕(780~784)때 벼슬이 이찬에 오르고 당나라를 도와 이사도를 토벌하였다. 병오(826)년에 패강장성 3백여리를 쌓았다. 호는 금주일민이다. ○정덕구본에는 웅원의 계통이 휘암의 아래에 있고, 최근의 보첩에는 휘장청의 아래에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를 참고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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雄允(웅윤)---(웅원의 동생으로서 父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舊本无宣
구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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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웅원의 子 擎柱(경주)<子 成海, 成岱>
文聖王朝使于唐奏對稱旨號擎天齋
문성왕(839~856)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아뢰고 서로 마주 교지를 전하였다(?). 호는 경천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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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경주의 子 成海(성해)<子 挺喆>
歷事憲安景文憲康三朝仕至都觀郎唐天符間與崔孤雲較才入唐奉勅還朝所撰漁樵子詩集文詞摸入唐行于世號海陵先生
헌안(856~860), 경문(861~875), 헌강(875~886)의 3왕을 거치고 벼슬은 도관랑[1]에 이르렀다. 당나라의 천부(乾符,874~879 의 오기)에 최고운(최치원,857~?)과 같이 재능을 견주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칙서를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찬술한 어초자[2] 시집에서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실을 찾을 수 있으며 세상에 전한다. 호는 해릉선생이다.
[1]도관랑(都觀郎) 이라는 벼슬은 없고, 도관(都官)이라는 것은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에는 육부(六部)를 각각 다스리던 관아(監典)에 소속된 관직이고, 고려 시대에는 노비의 문서와 호적 및 그 소송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말하며, 이 관청에서 일하는 직업 중에 낭중(郎中)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랑(正郞), 직랑(直郞) 등으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다.
[2]漁樵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며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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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子 成岱(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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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성해의 子 挺喆(정철) <子 琇胤, 玉胤>
舊本廷哲眞聖王朝仕至都督
구본에는 정철(廷哲)로 되어 있다. 진성왕(887~897) 때에 벼슬은 도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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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정철의 子 琇胤(수윤)
官禦史中侍郞 有詩曰今日江湖客當時勇退人壺中一片土閑臥守吾天號逸休齋
관직은 어사중시랑이었다. 시가 남아 있는데 ‘오늘 강호의 손님이 당시에 용감하게 물러난 사람으로서 투호병 속의 한 조각 틈에 누워 우리 하늘을 지킨다.’고 하였다. 호는 일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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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子 玉胤(옥윤)
舊本無
구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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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수윤의 子 天授(천수)
수윤의 子 天與(천여)
天與以下舊本無
천여이하는 구본에 없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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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본 왕세계의 필자인 휘운배께서는 많은 역사서와 보첩을 참고하신 것 같습니다. 단 그 출처를 분명히 명기했더라면 더욱 신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본 보첩에는 양왕(휘구형)의 子로서 3명이 있다고 하고, 이들은 세종(휘구해, 또는 노종), 무력왕, 무득이라고 함.
[가야의 멸망]
[1]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편
十九年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以國帑寶物來降王禮待之授位上等以本國爲食邑子武力仕至角干.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
仇衡王金氏正光二年卽位治四十二年保定二年壬午九月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興兵薄伐王使親軍卒彼衆我寡不堪對戰也.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仍遣同氣脫知爾叱今留在於國王子上孫卒支公等降入新羅.
이에 동기(同氣;형제)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生三子一世宗角干二茂刀角干三茂得角干開皇錄云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尒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議曰案三國史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納土投羅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至仇衡末壬子得四百九十年矣,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首露王)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若以此記考之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則更三十年<摠,總>五百二十年矣今兩存之.
만일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에 해당된다. 그러면 30년을 더하게 되어 도합 520년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비고]삼국사기의 기록; 금관국(금관가야) 532년 멸망
김구해->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
삼국유사의 기록; 가락 562년 멸망
겸지왕(김겸)->김구형/김탈지(脫知)
김구형->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
세종->졸지공(卒支公)
* 562년 멸망한 가락(가야)는 고령가야로서 고령가야의 시조와 김해의 금관가야(김해김씨)의 시조는 형제간이나, 지금 김해김씨로 내려오는 계통은 고령가야와는 무관하다는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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