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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게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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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정형진의 고대문화 새로 읽기
김정화 추천 0 조회 248 12.02.23 18: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프롤로그
상고시대 한민족은 여러 엘리트 종족들이 모여 구성
환웅세력인 공공족·홍산문화의 맥족…
우리 문화유산 제대로 이해하는 바탕
地文 통해 고대 종교·문화유산 조명

 
  북경 북쪽 64㎞ 위치에 있는 환웅족의 공공성 유적(원형 점선). 공공성은 중원에 살던 공공족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최초 근거지로 북경대 고고학계에서 발굴했다. 그곳 밀운현 중심지를 예부터 백단촌(白檀村 =밝달촌)이라 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이동의 역사였다. 상고시대로 갈수록 당시 사람들은 열악한 도구로 생존하기에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지구의 환경은 수시로 바뀌었고 그때마다 인류는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했다.

상고시대는 유라시아 초원을 매개로 동·서가 끊임없이 교류하고 이동하면서 민족과 문화가 융합되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됐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전파설'을 강조하는데, 상고시대는 주민의 이동을 수반한 문화 전파가 많았다. 상고시대를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현재 지구에는 65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각 지역이 국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상고시대에는 국경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며, 인구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적었다. 가령 기원전 3500년경의 중국 요서지역의 인구는 5만여 명에 불과했으며, 한나라 때인 기원 전후의 만주의 총 인구는 100명 정도였다.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역사를 연구하면, 상고사의 경우 역사의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상고시대는 끊임없이 민족과 문화가 교류하고 흐르던 시대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주민과 문화가 이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당시의 여건 때문이다.

일본이 고립되어 살던 시절인 조몬시대(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일본 열도 전체 인구가 26만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 열도에 이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주민이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야요이 시대(기원전 4~기원후 3세기)를 개척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인문·지리적 조건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열린 마음으로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면 의외로 한민족의 그것이 유라시아 전체 역사나 문화와 연결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나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민족을 형성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한민족은 단군 이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민족을 구성한 초기의 주민들이 여러 종족일 것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필자도 오랜 상고사 연구를 통해서 한민족을 구성한 엘리트 종족이 여럿임을 밝힌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종족으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세력인 공공족이 있으며, 그 공공족과 연합하여 단군시대를 연 후기 홍산문화의 주인공인 맥족이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 백제의 시조와 관련된 부여족인 프리기아인들이 있고, 신라 김 씨왕족과 관련된 사카족도 있다. 이들 중 몇몇 종족은 천산 너머에서 동으로 이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으로 이동하면서 현지인과 혼혈종족을 이루며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들 이외에 한민족을 구성한 세력으로 주목해야 될 종족은 선홍산문화의 주인공이었다가 남으로 이동했던 동이족, 그리고 한반도에 선주해 있던 고아시아족이 있다.

이러한 각각의 종족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후에야 우리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한민족의 종교문화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형국을 하고 있다. 시루떡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한 덩어리의 떡임에는 틀림없으나, 떡시루 속에 담겨진 한층 한층의 떡은 다른 시기 다른 주민들이 쌓아놓은 떡이다. 특히 고대의 문화유산은 대부분 그들의 우주생명관과 관련되어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각 시대의 엘리트 주민들이 누구인가와 그들의 우주생명관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알아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연재할 글에서 한민족을 구성했던 각각의 엘리트 종족의 시각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문화유산을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특히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많은 문화유산이다. 상고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입장에서 '땅에 새겨 놓은 글(地文)'이야 말로 귀중한 자료이다. 그것들은 한민족 공동체를 이끌던 초기 주민들의 신앙 표지(標識)이다. 그 표지가 어느 시대 어떤 엘리트 주민들이 그들의 백성들을 이끌기 위한 상징들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단군시대부터 삼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 형성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풀어갈 것이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

우리 곰 신앙은 어디로 사라졌나?
이주한 공공족과 홍산문화 웅녀족이 만나 단군신화 탄생, 일부 학자 곰 대신 호랑이 주장 곰 토템은 일본까지 전해져

     

중국인 황강태가 소장하고 있는 웅녀상. 어미곰이 아기곰을 업고 있다.

 

필자가 한민족 공동체를 구성한 초기 주민에 관심을 가진 계기 중 하나가 우리 고유 종교유산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였다. 사찰에 가면 어김없이 칠성각·삼성각·산신각이 있다. 이곳에는 대체로 칠성·용왕·산신·독성을 모신다. 불교와 관련된 독성을 제외하면 모두 우리 고유의 신이다.

필자의 의문은 이들 세 신이 언제 어떤 집단에 의해 모셔지게 되었는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답은 아직 정확히 설명된 적이 없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상고시대 한민족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들의 우주관과 생사관이 반영된 종교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신들 말고도 우리에게 오랫동안 모셔졌을 법한 대상신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곰이다. 한민족 공동체의 영원한 어머니인 웅녀가 믿었던 곰신앙은 왜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까? 한국인이라면 단군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단군신화는 외부에서 이주해온 환웅이라는 세력과 현지의 곰토템 부족이 만나 단군을 탄생시켰으며, 그것이 한민족의 모태라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는 환웅 세력을 요임금 시절 중원에서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는 밀운현 공공성으로 쫓겨났던 공공족으로 파악했다. 이들이 연산을 넘어 홍산문화 지역의 웅녀족과 만나 단군신화의 역사적 배경을 만들었다.

홍산문화의 제단유적인 우하량 유적 발굴에 참여했고 현재 중국고고학회 상무이사인 곽대순은 제단유적에서 나온 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곰룡(熊龍)으로 파악했다. 그는 옛 기록에 황제를 '유웅 씨'라고 한 것과 연결하여 그 곰룡을 황제와 결부시켰다. 또한 우하량 홍산문화 적석총 유지에서도 여러 건의 곰뼈(熊骨)가 발견됐다. 이는 홍산문화인들이 곰을 제사한 습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2001년 발견된 곰 형상 사람 얼굴.
뿐만 아니라 〈사진1〉에서 보듯 어미곰이 아기곰을 업고 있는 옥기도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이 옥기는 중국에서 홍산옥기를 가장 많이 수집한 황강태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정식 발굴을 거치지 않은 것이어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2001년 발굴된 웅녀상이라 할 만한 옥기가 있다〈사진2〉.

이와 같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홍산문화 지역은 단군신화가 발생할 수 있는 토양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학자들은 그곳에서 나온 곰을 황제족과 연결한다. 그러나 기존 정설에 따르면 황제족은 섬서성의 황토고원 지대에서 출발하여 산서와 하북성 일대로 이동했다. 즉 황제족의 원주지는 홍산문화지역이 아니었다. 이들 곰 토템 부족은 '맥(貊)'부족을 가리킨다. '후한서'에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돼 있다.

아무튼 필자의 가설대로 중원 앙소문화의 주인공인 공공족이 밀운지역을 거쳐 이곳 홍산문화 지역으로 넘어와 곰을 제사지내는 웅녀족과 만나 단군조선을 탄생시켰다면 곰을 숭배하는 흔적이 이후 한민족에게 전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흔적은 너무나 미미하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혹 단군의 어머니가 곰이 아니고 호랑이였을지 모른다고까지 한다.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조선시대 승려 설암(雪巖 1651~1706)이 지은 기행문인 '묘향산지'의 '단군신화'다. 그 내용을 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단수 아래 살았다. 환웅이 하루는 백호(白虎)와 교통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다. 그가 요임금과 같은 해에 나라를 세워 우리 동방의 군장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기존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를 바꾸어 놓았다. 왜 그랬을까? 정말 조선시대까지 그런 전설이 전해져 왔을까? 아니면 처음에 제시한 대로 우리 고유의 신으로 산신은 존재하는데 곰신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곰을 호랑이로 바꾼 것일까?

그러나 단군신화에 등장했던 곰은 서해안을 타고, 혹은 진한지역을 거쳐 일본 규슈로 들어간 흔적이 분명히 보인다. 서해안을 타고 내려왔던 흔적은 공주의 '곰나루(熊津)'전설에 보이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마나리'는 백제의 '곰나루'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 이 지역으로 내려온 곰 숭배 사상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말한다. 또한 진한 지역으로 들어왔던 곰신앙은 수인천황 3년에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가지고 간 귀중품인 웅신리(熊神籬)로 알 수 있다. 이 웅신리는 곰을 신으로 모시는 휴대용 신전이다. 다음 회에는 곰신앙이 한반도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칠성님이 곰신앙을 약화시켰다
우주생명관을 지닌 환웅족의 '칠성신앙'이 주도적 신앙의 지위에 올라
하늘님 환인이 사는 북두칠성 섬기던 공공족의 환웅이 부계적 질서를 꾸려

 

    충북 영동 천태산 망탑봉 윷판 알터

앞글(2회)에 이어 이제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의 곰신앙이 왜 사라졌을까에 대답할 차례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환웅이 도래했을 때 곰과 호랑이의 경쟁에서 곰이 외부에서 온 환웅세력과 연합하고 호랑이는 밀려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곰신앙은 사라지고 한반도에 호랑이와 산신신앙이 만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민족 초기 공동체의 구성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구조를 보면 분명히 주연은 환웅이고 조연은 웅녀와 호랑이 여인이다. 환웅이 하늘세계(다른 곳)에서 이주해와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만들어 간다. 그가 신시를 열고 신정을 펼치기 시작하자, 굴에서 살던 곰과 호랑이가 그에게 와 사람 되기를 빈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면서 일정기간 수련할 것을 요구하는데, 곰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실패한다. 사람이 된 웅녀는 환웅에게 신인(神人)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이에 환웅이 응해서 단군이 태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 전파의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물이 흐르듯이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단군신화의 구조를 보면 환웅이 가지고 온 문화가 그곳에 있던 곰이나 호랑이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보다 에너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지의 주민들이 환웅이 가지고 있던 우주생명관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을 흠모했던 것이다. 환웅이 가지고 온 문화는 이미 부계사회로 이행된 단계였으며, 곰이나 호랑이 부족은 아직 모계적 전통을 다 벗어나지 못한 단계였다.

    청원군 아득이 마을의 돌판 문양. 북두칠성이 선명하다.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고 보면 왜 곰신앙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종국에는 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환웅이 가지고 온 신앙체계가 웅녀가 가지고 있던 그것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에너지가 강한 집단의 종교가 그들보다 약한 집단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인류사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삼국시기에 불교가 들어오자 우리 고유 신앙이 약화되었던 현상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환웅이 가지고 온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칠성신앙이다. 필자가 환웅족이라고 주장하는 공공족은 중원에 있을 때부터 하늘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기록했다. 중국 문화사에서 하늘의 뜻을 최초로 기록한 집단이 공공족이다. 중국학자 왕대유에 따르면 '典'자의 원형은 네모난 단(壇)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인 공(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전(典)자는 공공족이 자신들의 제단에서 하늘의 뜻을 표시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도[工]와 관련 있는 공공(共工)이란 이름에서 칠성신앙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공공은 '공(工)을 받드는(共)'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신성한 제단(소도)에서 하늘을 섬기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하늘의 중심에 바로 하늘님(환인)이 사시는데 그곳이 북두칠성이다.

동북아시아 선도의 뿌리도 공공족과 무관하지 않다. 무(巫)자의 소전(小篆), 즉 진나라 때의 글자를 보면, 땅의 중심에서 북극성(북두칠성)을 연결하는 척목(尺木)을 상형한 것이 공(工)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소전에 보이는 무자는 공(工)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이 글자는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척목) 아래에서 무사가 무술을 행하면서 신명계와 소통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도교가 무속에서 천계의 중앙으로 생각하던 북두칠성관념을 계승하여 칠성신앙을 성립시켰다면(정재서, '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의 설명) 중국 도교의 뿌리도 바로 공공족의 우주생명관과 연결된다.

이와 같은 우주생명관을 가진 공공족 즉 환웅족의 신앙이 곰신앙을 누르고 주도적인 신앙이 됨으로써 웅녀의 곰신앙은 차차 그 힘을 잃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칠성신앙은 도교 신앙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칠성신앙을 도교와 연결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칠성신앙은 우리고유 신앙이다.

칠성신앙은 공공족이 중원에 있을 때부터 신앙하던 것으로 삼국시대에 도교가 한반도로 유입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그 흔적이 고인돌이나 암각화에 나타나 있다. 북한에서 기원전 25세기경에 새워졌다(함주군 지석리 고인돌)고 주장하는 고인돌 덮개돌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으며, 충북 청원군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옆에 묻혀있던 돌판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암각화에는 윷판모양의 알터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또한 칠성의 운행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고구려의 문장은 삼족오인가 궁륭인가
삼족오 문화는 중원에서 동북으로 전파돼 고구려에서 화려하게 꽃피워
고구려의 전유물처럼 표현하는 것은 잘못, 호우총 궁륭이 고유의 문장 가능성 커
 

    기원전 3500년께 중국 황하 중류 앙소문화권의 채색도자기에 그려진 삼족오.

 

동북아시아 문화사에서 삼족오를 가장 일찍 표현한 집단은 중원 앙소문화의 주인공들이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가 일자 각 방송국에서 고구려 관련 대하드라마를 제작·방영하였다. 그 영상물을 보면 마치 삼족오가 고구려의 문장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여 많은 국민들이 삼족오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화유산이며 고구려의 문장인 것처럼 오해하게 됐다.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과연 삼족오가 고구려의 문장이었는지 아니면 415년에 만들어졌다는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에 보이는 궁륭(井 자처럼 보이는)이 문장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현재 발굴 자료로만 보면 삼족오는 황하 중류지역의 앙소문화에서 출발한다. 다음으로는 산동지역의 대문구문화에서 세 발 달린 맹금류 도기가 보인다. 상대에는 봉황 모습을 갖춘 형태로 변형된 삼족조(三足鳥)가 보이며, 서주시대에도 청동으로 만든 삼족조가 보인다. 춘추시대에도 많지는 않지만 삼족조가 만들어진 것은 확인된다.

그러다 전국시대가 되면 다시 삼족오가 와당(瓦當·기와의 막새)에 등장한다. 진나라 이후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여러 점 발견되고 있으며, '산해경'에 나오는 서왕모가 신선사상과 결합하면서는 서왕모의 심부름을 하는 새로운 삼족오가 등장한다. 신선사상에서는 삼족오를 보통 삼청조(三靑鳥)라고 하며,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와 함께 서왕모의 사자로 나온다.

위의 자료들을 보면 삼족오 혹은 삼족조에 대한 관념은 이미 신석기부터 진한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대륙에 면면히 이어져 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북지방에서 이들보다 이르거나 혹은 비슷한 시기에 삼족오 혹은 삼족조가 없었다면 고구려의 삼족오는 문화 전파와 교류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 속의 삼족오.

이 같은 이유로 항공대 우실하(문화사회학) 교수나 선문대 이형구(역사학과) 교수는 고구려의 삼족오는 중원과 요서지역의 교류를 통해 탄생한 것으로 본다. 삼족오는 앙소문화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한 삼족조에 대한 생각이 전국시대까지 근근이 이어오다, 전국시대에 체계화된 음양론이나 신선사상, 복희-여와신화와 연결되면서 부활한다. 그러나 삼족오에 대한 관심이 중국에서는 후한 이후 거의 사라지지만, 고구려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하여 고구려 벽화무덤에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수많은 삼족오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중원에서는 사라지는 삼족오가 고구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려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20세기 천황의 즉위식의례에까지 생명력을 얻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단순히 중국에서 부활한 삼족오가 고구려로 전파되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필자는 삼족오가 고구려에서 힘을 얻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삼족오가 고구려와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얻었던 것은 북방 초원루트를 통해 전파된 태양신의 사자로서 까마귀에 대한 생각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삼족오가 음양론과 결합되어 양(陽, 3수)의 상징으로서 '태양 속의 삼족오'(日中三足烏)와 다른 문화전통을 보이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페르시아에서 발생해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미트라교의 '태양신'의 길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폴론을 수행한 아리스테나스도 '까마귀의 모습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주몽을 수행했던 오이(烏伊), 온조를 수행했던 오간(烏干)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양신의 사자로서 까마귀는 일본으로 건너가 웅야(구마노)에서 대화국(야마토국)을 침공하러 갈 때, 태양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이 보낸 세발달린 까마귀인 팔지오(八咫烏)는 신무천왕(神武天皇)을 안내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 삼족오는 천황가의 수호새로 자리잡는다. 일본 황실의전에는 까마귀 장대가 등장하는데, '속일본기' 문무기(文武紀)에 따르면 그 전범은 701년 신년 축하식에서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족오문화는 중원에서 동북으로 전파된 문화와 서쪽에서 초원을 타고 동으로 이동한 문화가 고구려에서 만나 화려한 꽃을 피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날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삼족오를 고구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전파의 산물보다는 호우총에서 나온 궁륭을 나타낸 기호가 고구려의 문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궁륭은 하늘을 숭상한 고구려의 문장
북두칠성 중심의 하늘 형상화…당·송과 다른 고구려만의 별자리 만들어
고깔모자도 궁륭문양의 또 다른 모습, 단군시대 하늘 숭배전통 고구려가 계승


 
지난주 연재(4회)에서 고구려의 삼족오는 중원에서 동북으로 전파된 문화와 서쪽에서 초원을 타고 동으로 이동한 문화가 고구려에서 만나 화려한 꽃을 피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날아갔으며, 삼족오가 고구려의 왕실 문장일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왕실 문장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고구려의 문장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 경주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 호우(壺?)이다.

이 그릇의 바닥에는 고구려왕실에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15)에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다. 그 명문의 상단 중앙에 우물 정(井)자처럼 보이는 문양이 보인다〈사진〉. 이 문양은 다른 고구려 유물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인들은 이 문양을 왕실 문장처럼 사용한 것 같다. 왜 그들은 이 문장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고구려인들의 북두칠성을 포함한 하늘 숭배의식과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칠성 숭배는 앞서 제3회 글에서 말했듯이 필자가 환웅족이라고 가정한 공공족과 관련 있다. 고구려인들의 독자적인 칠성과 북극성 숭배는 당·송과 다른 독자적인 별자리를 만들었다. 고대 천문도를 연구하는 김일권(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고구려의 별자리 벽화에는 북두칠성과 나란히 묘사한 삼성(三星) 별자리가 그려졌으며 이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이와 같은 양식의 천문도는 중국에 없다고 한다.

 
고구려 왕실에서 궁륭형 문양을 사용한 배경을 알아보자. 무속화에 보면 칠성, 환인제석, 삼불제석만 고깔모자를 쓴다. 이들은 모두 소도(蘇塗)의 신목을 타고 하늘에 올랐을 때 만날 수 있는 동일한 하늘 주인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 무속의 전통에 보이는 고깔모자는 유라시아 문명사에 두루 보이는 고깔모자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바로 그 고깔모자와 호우총 궁륭문양이 관련된다. 즉 호우총의 궁륭은 하늘의 궁륭을 받드는 사람들의 후예임을 나타내는 문양이다.

이는 고깔 변(弁)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림〉를 보면 고깔 변자의 형성과정을 알 수 있다.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고깔은 양쪽에 뿔과 같이 뾰족한 것이 있고 중앙이 높은 첨두형의 모자다. 그리고 진나라 때의 소전체로 표기된 변(弁)자를 보면 손으로 궁륭형(穹?形)의 변형(弁形)받들고 있다. 여기서 궁륭형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중앙은 높고 사방은 낮은 것을 상형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궁륭을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형상을 글자로 표현한 것이 변(弁)자이다. 이는 변자가 하늘을 받드는 사람들과 관련된 상형자임을 말한다.

그리고 이 변자는 크게 보아 하늘을 받드는 것을 상형한 것이지만 좁게는 하늘의 중심에 있는 북두칠성(북극성)을 받드는 것이다. 중국의 서법과 문자사를 연구한 모작무(牟作武)는 변자를 '두 손으로 관을 받드는 것을 '변'(雙手擧冠爲弁)이라고 했다. 모작무가 관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린 것을 보면 하나는 뱀을 상형한 것이고, 둘은 삼각형의 고깔모자를 상형한 것이며, 세 번째의 것은 뱀을 상형한 것인데 활 궁(弓)형으로 그렸다. 이는 이들 세 요소가 동일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징을 담고 있는 변관을 쓴 사람들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신의 뜻을 전달하던 사람들로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이는 〈그림〉에 보이는 령(令)자의 형성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A자처럼 보이는 것은 고깔모자로, 령(令)자는 이를 쓴 사람을 상형한 것이다. 즉 령(令)자는 고깔모자를 쓴 사람이 호령을 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무속에서 신령[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고깔모자를 쓴 무당이 공수를 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고깔모자는 중원에서 공공족이 쓰던 모자다. 이 전통은 그들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맥족인 웅녀족과 만나 형성한 단군시대로 이어졌고, 그들의 북두칠성 숭배와 관련한 하늘 숭배 전통을 맥족이 주류를 이룬 고구려에 전달되었다. 바로 이러한 전통을 상징으로 도상화한 것이 바로 호우총에 보이는 궁륭형 문양이며 고구려 왕실은 이것을 왕실의 문장처럼 사용했던 것 같다.

금정의 유래와 신선도(상)
금정산 정상의 석정은 공공족의 삼신산 위 물동이와 비슷
아이 낳거나 농사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불교문화 유래됐다는 기존학설 뒤집어


 
  금정산의 금정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정상 부근에는 여러 개의 석정(石井)이 있다. 그 중에서 금정(金井)으로 불리는 석정이 있어 금정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겼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금정 주변에는 석정만이 아니라 남근석과 여근석 등 많은 고대인들의 신앙유적이 있다. 이는 이곳이 고래로부터 부산지역의 신앙 중심지였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금정은 과연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파 놓은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 석정을 신선이나 불교와 관련시켜 이야기 한다. 영조 22년(1746년)에 동계(東溪)스님이 쓴 '범어사창건사적'에서는 금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금정산 산정에는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어 항상 금색으로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차고 마르지 않는다. 그 곳에는 범천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며 놀고 있다'.

'범어사창건사적'에서는 금정을 불교문화로 윤색하여 전하고 있다. 불교문화로 윤색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우선 금정산과 가까운 양산 천성산에만 해도 금정보다 더 큰 석정이 있으며 통도사 자장암에도 석정이 있다. 뿐만 아니라 속리산 문장대, 영암의 월출산 구정(九井), 장흥의 천관산 구정, 남해의 금산 구정, 서울의 북한산 등 전국 도처의 명산에 석정이 있다. 이 석정은 한반도를 넘어 요동에서 제일 높은 산인 천산(千山)에도, 요하 상류 지역의 청산(靑山)에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고깔모자 모양으로 표현된 삼신산이 그려진 앙소문화시대의 채색도자기(앙소채도).
이렇게 많은 석정이 모두 불교와 관련하여 조성되었을 리 없다. 이 석정들은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우리조상들이 어떤 종교적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해답을 조심스럽게 추론해 보자.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는 고모(姑母) 할머니가 산신으로 계신다. 고당봉 안내판에는 '정상 부분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봉우리는 하늘에서 천신인 고모 할머니가 내려와 산신이 되었다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 바, 이는 고대 신선사상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금정산 지역이 고래로부터 신선사상과 결부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선사상은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일까 아니면 중국의 도교가 유입되어 형성된 신선사상일까?

금정산 지역에 전해오는 신선사상은 우리 고유의 선도와 관련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석정이 한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석정은 요하 상류와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이러한 지리적 분포 외에도 중국의 신선전설에서는 석정이 탄생할 문화적 배경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석정은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과 결부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신산에는 석정이 없다. 다시 말하면 신선이 산다는 오신산(五神山)이나 삼신산, 또는 곤륜산에는 석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도교경전에 따르면 오신산은 '발해로부터 동쪽으로 몇 억만리인지도 모르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엄청나게 커서 바닥이 없는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가운데 대여·원교·방장·영주·봉래라고 하는 다섯 개의 높은 산이 있다'고 한다. 경전은 이어 그 산들의 정상에는 선인이 사는 황금어전이 있다고 하면서 주변 경관을 설명하고 있는데, 석정에 비유될 만한 것은 없다.

또 다른 도교 신산으로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도 마찬가지이다. 그 산에는 서왕모의 궁전이 있으며 궁전 왼쪽에는 요지(瑤池)라는 연못이 있고 오른쪽에는 취수(翠水)라는 강이 있으며 산 밑에는 약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요지가 석정의 탄생 배경이 될 수도 있으나 문화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의 중원이나 동쪽 지역의 명산에는 석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주요 산 정상부분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석정의 문화사적 배경은 무었일까? 그것은 필자가 환웅세력으로 상정한 공공족의 앙소 문화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앙소채도를 보면 금방 이해하겠지만 그들은 삼신산에 생명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앙소채도에는 삼신산 위에 물동이를 따로 마련하고 있다. 이 도상에서 삼신산을 금정산이라고 생각하고 물동이를 석정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바로 금정산의 금정이 된다. 그들이 요서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해 오면서 명산에 석정을 파고 아이를 낳게 해 달라거나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조상들이 금정(金井)을 파 놓은 진짜 이유이다.

 

금정의 유래와 신선도(하)
金井은 지하 생명수가 표출되는 상징적 장소, 그 곳에 사는 금어는 상상의 神이자 생명의 상징 

 

 
  <그림1> 앙소 채도에 나타난 쌍어문이 그려진 사람 얼굴
'금정에 사는 쌍어는 메소포타미아의 천년왕국에서 이동해왔다'.

앞글에서 금정의 문화사적 원형이 중원 앙소문화 지역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석정은 어디에서 어떤 상징적인 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석정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들어보자. 노중평은 '석정은 북두칠성의 정기가 고인 우물'이라 하면서 칠성신앙과 연결한다. 또한 조선시대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는 석정을 생명선이라고 하면서 석정이 몸속으로 흘러 마음의 생명수를 이룬다고 했다. 민속학자인 조자용은 '용알바위' 신앙과 연결시킨다. 그가 1992년에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큰바위속 구멍에 물이 고여 있는 바위를 용알바위라고 하는데, 아기를 원하는 어머니들이 용알바위를 빙빙 돌면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석정에 '용알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모두 석정이 생명수나 기자신앙과 관련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생명수가 칠성과 관련되었는지 아니면 지하에 있다고 상상한 감로수와 관련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까지 진지하게 접근해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석정은 지하의 생명수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상징적인 장소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공족과 이웃하며 중국 중원에 살았던 염제의 신화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농업의 신인 염제가 막 탄생했을 때 그 주위의 대지에는 인간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아홉 개의 샘(九井)만이 그를 반겨 주었을 뿐이었다. 이 아홉 개의 샘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만일 샘 하나에서 물을 길어 올리면 나머지 여덟 개의 샘물도 함께 출렁거렸다'.

이 구정신화가 용알신앙, 즉 정월 대보름 우물에 비치는 달을 보고 용알이라고 부르며 그 용알을 먼저 마시는 사람이 행운의 아기를 얻는다는 민속이 결합되면서 석정을 구정(九井)이라고 부른 것 같다. 월출산이나 천관산, 그리고 남해 금산의 구정이라는 명칭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홉 마리 용이 노닐다 승천했다'는 구정 전설로 볼 때 구정은 용과 관련된 신앙처로 이해할 수 있다.

 
  <사진1> 엔키가 삼신산을 밟고 있고 물고기와 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석정이 탄생했을 때는 구정이라는 명칭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단서는 금정에 살았다는 금어(金魚)에서 찾을 수 있다. 석정에는 원래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 물고기의 원형을 찾아가 보자. 지난회 글(6회)에서 제시한 중원의 앙소채도는 삼신산과 석정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앙소채도의 다른 도상에서 물고기와 삼신산이 연결된 그림을 볼 수 있다(그림1). 이 그림은 생명수인 지하의 감로수에 사는 물고기와 그곳에 산다고 상상한 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면 물고기 모양의 고깔모자를 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인(神人)이 된다.

석정에 사는 물고기의 원향(遠鄕)은 메소포타미아에 형성되었던 초기 신석기문화이다. 그곳은 공공족이 중원에 들어와 앙소채도문화를 일구기 전에 살던 곳이다. '수메르 왕명록'이나 '바빌로니아 서사시'에 의하면 인류가 세운 최초의 도시인 에리두에는 '엔키(Enki)'라는 신이 살고 있었다. 그 엔키가 인류를 창조한다. 수메르 서사시에는, '그 생물에게 신들의 형상을 부여하라. 심연 위에 있는 찰흙으로 심장을 만들어라. 솜씨 좋고 훌륭한 너희 장인들은 찰흙으로 형태를 지으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 것과 유사하다.

신화학자 조철수는 지하에 있는 생명수의 신이며 구원의 신이고 치유의 신인 엔키를 단군신화의 환웅과 비교하면서 그가 환웅과 가장 가까운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 엔키의 도상에서 우리는 삼신산 위로 솟아오르는 생명수를 볼 수 있다(사진1). 그 생명수를 타고 노니는 물고기가 바로 금정산 금정에 노닌다는 물고기의 원형이다.

석정은 바로 삼신산과 지하의 생명수 그리고 물고기가 결합된 구조로 생명의 원향이자 모든 생명의 발원지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금색 물고기(金魚)는 힌두교에서 구세주인 비슈누 신이 제1의 화신으로 나타나 인간을 홍수에서 구한 모습이자, 홍수에서 최초의 인간 마누를 구했던 물의 신 바루나의 상징이다. 이 신화도 수메르신화에서 우트나피쉬팀(노아)에게 대홍수를 미리 알려준 엔키가 물고기를 머리에 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 기원이 어디인가 자명해진다.

이로써 금정이 불교로 윤색되기 이전의 원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금정은 삼신산에 솟아오르는 생명수가 나오는 곳으로, 그곳에 노닐던 금어(金魚)는 생명의 상징이었다.

알지 신화를 그린 유리구슬의 비밀
신라 상감玉, 소그드인들의 작품?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견된 목걸이의 유리구슬에 그려진 흰닭.
경주박물관에 가면 작은 유리구슬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구슬에 상감된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구슬 앞에 돋보기를 설치해 놓았다. 오늘은 이 유리구슬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이 이 구슬의 아름다움이나 제작상 고도의 기술이 동원되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뿐 정작 그림의 내용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구슬에는 흰 닭과 황금색 나무 그리고 인물이 컬러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알지의 탄생 신화를 그린 것이다.

알지 탄생신화를 보자. '탈해왕 9년에 왕이 금성 서쪽에 있는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신하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나뭇가지에 황금 궤짝이 걸려 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왕이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해서 성을 김(金) 씨라 하였다'.

 

 

 

 

 

 
  유리구슬의 다른 면.
알지 탄생신화에 보이는 나무는 천상의 신성한 존재가 내려오는 생명의 나무이고, 흰 닭은 신성한 생명을 낳는 태양새이다. '삼국유사' 중 '천축으로 간 여러 법사들'편에는 '신라인들이 닭의 신(鷄神)을 섬겨 머리에 날개깃을 꽂아 꾸미개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인들이 알지 탄생신화의 흰닭을 신성시했음을 말한다. 알지 탄생신화에 나오는 기본 요소를 모자에 반영한 것이 신라금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라금관에 나타나는 요소들이 유리구슬에 그대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상감옥이 수입품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유리구슬은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으며, 어떻게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묻히게 되었을까?

당시 신라왕족과 연결되면서 천산 너머의 정보나 물자를 신라에 전했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 국제무역상이었던 소그드인을 들 수 있다. 이들 소그드 상인이 유리구슬을 신라의 왕이나 왕족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소그드 왕의 궁전 벽화에 보이는 그림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묘사된 신라 사절은 유리구슬에 묘사된 인물이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머리꾸미개를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신라인의 풍습을 알고 있었음을 말한다.

고미술사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이 유리구슬이 고도의 기술을 익힌 기술자에 의해서 주문생산된 것으로 보았다. 그 생산지로는 흑해의 서쪽 지방이 유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라 왕족의 시조신화를 흑해 서쪽 지방의 장인이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프라시 앞 궁전에 그려진 신라사절의 모습이나 소그드인이 당시 국제상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그드인들은 신라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보 중에는 알지 탄생신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소그드 상인들이 신라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알지신화를 담은 상감옥을 주문제작하여 신라왕에게 바쳤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무리일까? 경주에 있는 대형 고분에서 서역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천전리 암각화
울산 천전리 암각화 속 용이 고깔모자를 쓴 까닭은
천산 동쪽 신강 호도벽현 초기 철기시대 암각화에, 고깔 쓴 사카족 모습 새겨져…문화사적 연결 고리의 방증

 
  고깔모자를 쓴 용의 삼국시대 암각화
울산시 언양읍 천전리에는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선사시대 암각화가 있다.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이 암각화는 대체로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그림은 삼국시대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고깔모자를 쓴 용(사진1)'이다.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면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용은 분명히 고깔모자를 썼다. 이 특이하게 생긴 용 그림은 누가 어떤 의도로 그린 것일까?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많은 용 그림이 있지만 이 같은 모습의 용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기원을 알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의 문화사적 기원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인도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해안지역을 거쳐 울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전리 암각화에 보이는 용은 아무래도 신라왕족과 관련해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듯하다. '구당서'와 '신당서' 신라전을 보면 '신라국은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변한(弁韓)이라 함은 '고깔모자를 쓴 한'이라는 말이다.

 
  이집트 파피루스 문헌 속 그림.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고깔모자를 썼을까? 그것은 그들이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들만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라 김씨 왕족이 자장스님이 문수보살에게서 신탁을 받은 대로 천산 너머의 사카족과 관련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신라왕족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이씩 적석묘 고분에서 발굴된 고깔모자를 쓴 황금인간과 관련이 있다. 그 고분은 기원전 5~4세기의 사카족 무덤이다. 이들 사카족의 무덤 조성 방식은 신라의 적석목곽묘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란 고원에 있는 유명한 '비시툰 비문'에는 다리우스(기원전 521~486년)왕이 동쪽으로 진출하여 잡아들인 소국 왕들의 모습이 새겨져있는데, 사카족왕만 고깔모자를 썼다. 이는 고깔모자를 쓰는 것이 당시 사카족 고유의 풍습이었음을 의미한다.

사카족이 천산 동쪽으로 진출한 사실은 암각화나 고고학적 발굴로도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천산 동쪽에 있는 신강 호도벽현의 초기 철기시대의 암각화에는 고깔을 쓴 사카족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들이 요서지역까지 진출한 흔적이 문헌에 보인다. 전국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해경'에는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천독'을 중국학자들은 천축(天竺)으로 해석하면서도 잘못된 기록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사카족이 천산 동쪽으로 이주한 고고학적 흔적이나 암각화가 발견되기 이전에 행해진 것이다.

천전리 암각화의 '고깔모자를 쓴 용'의 모습을 의외의 지역에서 발견하였다. (사진2)는 이집트 왕릉에 그려진 것과 같은 주술적 장면이 묘사된 장례용 파피루스 문헌이다. 이 장면은 죽은 왕이 지하 세계를 지나 여행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왕관을 쓴 날개 달린 왕의 영혼이 지나가고 있다. 천전리의 용에도 날개가 달려있다. 그렇다면 천전리의 용도 저승으로 간 신라왕의 영혼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천전리의 고깔모자를 쓴 용은 천산 너머의 세계와 문화사적 고리가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한 듯하다.

 

왜 조상들은 바위에 발자국을 새겼을까
길이 107cm '왕발'의 주인공은 누구
선사시대 발자국 성자의 흔적 표시, 김해 초선대에 남겨진 거대 발자국, 중국서 이동해 온 치우족의 성소 추정

 
  김해 초선대의 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 거대한 발자국 모양의 유적.
■초선대 발자국
부산에서 낙동대교를 건너 김해시로 가다 보면 '가야고도'라고 쓴 큰 바위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지나 왼쪽으로 400여 m 지점에 나지막한 봉우리 하나가 있다. 담시선인이 노닐었다는 초선대(招仙臺)다. 가락국의 거등왕은 칠점산의 선인 담시를 이곳으로 초대하여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서로 즐겼다고 하며, 또한 담시선인은 거등왕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오늘은 초선대 바위에 새겨진 커다란 발자국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곳 마애불 앞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발자국 중 제일 크다. 발의 길이는 107㎝, 폭은 55㎝나 된다.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바위에다 거대한 발자국을 새겼을까? 선사시대의 암각화에 표현된 그림이 가지고 있는 상징들을 이해하면 한민족 초기 공동체의 사유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구성원의 뿌리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필자는 10여 년 전 초선대를 처음 답사했다. 그때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애불을 비롯한 바위들을 살피고 있을 때,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올라왔다. 그런데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장수 발자국 바위"를 보러 왔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소풍을 왔었고, 그때의 기억이 오늘 아침에 문득 떠올라 그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는 "옛날 장수 한 분이 여기 초선대에 한 발을 딛고, 송산에 한 발짝 딛고 명지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발자국이 크니 장수의 보폭도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치우족의 족휘(문장)
이러한 발자국은 선사시대 암각화에 많이 보인다. 경주 석장리나 포항 칠포리, 안동 수곡리 발자국은 다른 암각화들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작은 편이다. 필자는 초선대의 발자국과 같이 단독으로 새겨진 발자국도 여럿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발자국은 성자의 표시나 그의 방문을 의미한다. 초기 불교미술에서도 석가모니의 존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보리수, 보좌, 법륜, 불탑, 불족적 등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즉 부처의 발자국으로 부처를 표현했다.

 
  뱀 문양과 발자국 문양이 그려져 있는 치우족의 문장(紋章).
그렇다면 초선대 발자국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전해 내려오는 바와 같이 장수 발자국일까? 필자는 이 발자국이 동이족의 이동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동이족의 기원이 되는 중국 신화상의 복희씨의 탄생신화는 이렇다. '화서라는 처녀가 뇌택이라는 곳에서 놀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발자국을 따라 갔다. 발자국은 뇌택의 주신인 뇌신(雷神)의 것이었다. 뇌신과 관계하여 복희를 낳았다'. 이 복희는 여왜와 함께 인류를 창조하고 혼인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복희의 문화를 계승한 동이족 수장 치우도 발자국과 관련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림)은 치우족의 족휘(문장)인데, 그 족휘에는 분명히 발자국과 뱀이 표현되어 있다. 이로 보아 치우는 복희계열의 한 지파로 구렁이를 토템으로 하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경 서북쪽에 있는 판천 들에서 중국의 시조로 삼는 황제와의 전투에서 치우가 패하고 그들의 일부가 동으로 이동했다면, 선사시대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동이 치우족의 성소로 뇌신이 강림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우리 어머니들은 명석하고 훌륭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남산 게눈바위의 비밀
커다란 알 품고 똬리 튼 구렁이는 태양의 재현
박혁거세·석남사 창건 등 신라시대 설화 속 구렁이 생명력의 화신으로 여겨

 
경주 남산에 가면 게눈바위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커다란 알 구멍이 있고 그 알을 구렁이가 사리고 있다(사진1). 이 신앙유적은 아마도 박혁거세 집단과 관련된 듯하다. 신단은 경주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박혁거세와 알영이 왕과 왕비로 추대된 후 처음으로 조그마한 궁성을 짓고 산 곳도 신단 아래 창림사터다. 오늘은 이 신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박혁거세는 뱀과 관련된 설화를 남기고 있다. 박혁거세가 죽어서 하늘로 승천했다가 7일 만에 육신이 다섯으로 나뉘어 떨어졌는데, 그것을 수습해서 장사지내려 하니 구렁이가 방해했고 한다. 이 사건 설화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한다.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여 5체를 각각 장사지낸 것을 다산·풍요의 소망을 내포한 이야기로 보거나, 큰 뱀을 뱀신으로 혁거세의 사후를 보호하는 신으로 보거나, 큰 뱀을 왕권 확대를 위한 매개체로 보기도 한다. 또한 큰 뱀은 천상의 신 즉 태양신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구렁이는 태양과 그 빛에 관한 신앙과 관련해서 해석해야 한다. 박혁거세가 죽은 후 나타난 구렁이는 혁거세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태양)에서 분화되어 태어난 동일자이다. 그런 혁거세와 그의 자손 왕들이 묻혔기 때문에 오릉을 사릉이라고 했다.

 
신라 사람들은 구렁이가 둥그렇게 사리고 있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느꼈다. 그들은 태양이라는 하늘의 알을 천상의 구렁이가 사리고 있으며, 그 하늘의 알을 사리고 있는 구렁이가 환생한 것이 지상의 구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구렁이는 생명력을 나타내는 동물이었고 곡령신(穀靈神)으로 대접받아 업신으로 불렸다.

신라인들이 구렁이를 생명력의 화신이라고 생각한 예를 자장스님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장 스님이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정암사를 창건할 때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그래서 자장이 태백산으로 가서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자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갈반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곳에 절을 지어 석남사라고 했다.

석남사 창건 이야기를 보면 칡넝쿨(葛蟠)이 서려 있는 것과 구렁이가 서려 있는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 칡넝쿨은 봄에 태양의 정기를 받아 구렁이가 사리듯이 하면서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 정암사 창건 설화에는 칡넝쿨이 서린 곳이자 구렁이가 서리고 있는 곳이 명당이라는 의식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조상들이 태양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 명당이라고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게눈바위 알터 신단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공공씨의 아들인 구룡(勾龍)을 들 수 있다. 주나라 때 옥으로 만든 그의 모습은 게눈바위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사진2).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게눈바위 알터는 태양을 상징하는 '알을 감싸고 있는 구렁이'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필자가 공공족을 환웅세력으로 파악하고, 초기 단군신화의 주인공들이 이후 한국사에서 진(辰) 혹은 진(眞)으로 불린 집단이라는 주장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신단은 진인(辰人)들의 우주생명관을 바탕으로 해서 조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라시아 늑대가 경주분지로 숨어든 내력
"늑대모양 신라 관장식, 투르크·흉노문화 유입 증거"
알타이지역 언어·늑대토템 등 신라 문화와도 유사점 많아 '뿌리' 관련 중요한 정보제공, 신라왕족 흉노 후손 가능성도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특이하게 생긴 유물 하나가 나왔다(사진1). 이 유물은 고분유물 소개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 유물을 왜 소개하고 설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유물의 특이한 모습 때문일 것이다. 늑대의 얼굴 모습을 한 이 유물이 황남대총에 묻힌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유물은 경주의 진산인 낭산(狼山)과 함께 신라 고분문화의 주인공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늘은 늑대 관식을 머리에 쓰고 저승에 간 신라왕의 비밀을 들여다보자.

최근 들어 신라 김씨 왕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문무왕비문에는 한 무제의 충신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던 김일제가 신라왕실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당나라에가 살던 신라여인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김일제가 신라왕실의 직접적인 조상인지는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신라왕실이 흉노 혹은 천산지역의 주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필자는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이 부도(浮圖)왕으로 사카족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늑대가 젖을 먹여 민족의 조상을 키웠다든지(로마, 오손), 저승길의 안내자라든지(이집트), 왕을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무사라든지(투르크, 흉노) 하는 문화는 남러시아 초원에서 발생하여 동서로 확산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 왕의 기념물인 나르메르 팔레트에 이미 늑대가 나타난다. 나르메르 팔레트에서 늑대는 선도자 역할을 한다. 이는 돌궐인(투르크인)이 왕을 호위하는 사람을 늑대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사진2). 고대 이집트에서 늑대는 왕이 죽어서 저승길을 갈 때 길 안내자 겸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남러시아에서 출발한 투르크인들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념과 동일하다. 그들은 남러시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하여 알타이의 파지리크 문화를 일구었다.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흉노나 돌궐은 다 같이 자신들이 늑대의 자손이라 믿었다. 그리고 알타이 지역의 고대인들은 지하세계의 상징동물로 물고기·뱀·늑대를 숭배했다.

이러한 늑대에 대한 관념이 신라로도 유입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간접적인 근거를 들면, ①알타이지역의 파지리크문화와 신라문화가 친연성이 있으며, ②후기 신라의 지배층 언어에 투르크어가 스며있었다 주장이 있다. ③그리고 문무왕비문에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 우현왕의 아들인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고, ④경주 분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경주의 진산(鎭山) 이름이 낭산(狼山) 즉 늑대산인 것도 관련이 있다. ⑤또한 천전리 암각화에는 고대 알타이 지역에서 지하세계의 동물이라고 한 물고기·뱀·늑대가 모두 그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모두 고려하고 보면,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늑대 모습을 한 은제 관식은 흉노나 투르크인의 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잠시나마 신라의 왕족들이 늑대를 저승길의 안내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신라의 왕족들이 늑대관식을 머리에 쓰고 저승에 갔다는 것은 그들의 뿌리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즉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북방문화 특히 천산이나 알타이 지역 사람들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꿈속의 고향 박달촌에 가다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행운 '백단촌'
공공족 동북이주 자취 쫓아간 中 북경 밀운현 답사길에서, 상고시대 '박달촌' 흔적 찾아내

 
  '백단촌당지부'와 '백단촌민위원회' 간판. 백단촌이라는 지명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우리 고대사와 밀접히 연관된 '박달촌'의 중국식 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상고사의 매듭을 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단군신화의 주 무대를 밝힌다든지, 환웅이나 웅녀의 존재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짓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학들이 벌써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정설은 없다.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이 문제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해결해보고자 오랜 세월 고민했다. 필자는 '삼국유사' 등에서 자장스님이 언급한 공공족이 환웅족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많은 준비를 하고난 다음 상고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오늘은 그 답사 중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2005년 2월 19일, 마침내 공공족이 한원(韓原)에서 동북 지역으로 이주한 흔적을 답사하는 날이었다. 전날 대릉하의 발원지인 능원(凌源)에서 버스를 타고 승덕(承德)을 거쳐 북경시 밀운현(密云縣)으로 향했다. 승덕을 출발할 때가 오후 5시였다. 버스는 산맥 사이로 형성된 그리 넓지 않은 회랑을 한동안 달렸다. 그러다가 산길로 접어들었고 이윽고 연산산맥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았을 때쯤은 어둠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7시40분께 밀운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장 번화한 곳에 내려달라고 했다. 한참을 가서 택시는 오성급 호텔이 있는 곳에 멈추었다. 이곳이 밀운현의 중심인 듯했다. 호텔 주변에는 밀운현청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호텔을 나서다가 정문 옆에 있는 사무실 현판에 시선이 갔다. 순간 전율을 느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백단촌당지부(白檀村黨支部)' '백단촌민위원회(白檀村民委員會)'라고 쓴 현판이 보였다. '백단'은 곧 '박달'이다. 민족의 뿌리를 추적하는 데 정성을 쏟았기 때문일까. 캄캄한 밤에 난생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하룻밤 묵을 곳을 정했는데, 그곳이 박달촌이라니. 마치 깜깜한 밤에 멀리 있는 표적을 향해 쏜 화살이 중앙에 명중한 기분이었다. 야릇한 인연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상고시대의 박달촌으로 날아갔다. 이곳이 동북 지역 최초의 박달촌이구나.

사실 그러한 지명이 그곳에 있으리라고는 오랫동안 준비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헌 자료를 뒤지면서 확보한 자료는 현재 북경시에 속한 밀운현이 과거에 단주(檀州)로 불렸다는 사실과 밀운현에 공공성(共工城)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그 현판을 보는 순간 상고사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십수년 간 노력한 고생이 한 송이 꽃이 되어 피어났다.

다음날 아침 밀운수고의 서북쪽 상류 지역에 있는 공공성을 찾아갔다. 밀운현은 화북평원 최북단 도시이다. 밀운에서 북경까지는 남쪽으로 67㎞이다. 요임금 말년에 유릉으로 이주해온 공공족은 화북평원과 연산산맥이 만나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 중국의 역사에서 북경지역에 처음으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 다음에는 숙신이 중국 동북 지역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이어서 주나라 초기의 북연과 한국(韓國)이 등장한다. 이 무렵 (고)조선도 문헌에 등장한다. 주나라 초기에 현재의 북경 남쪽 50㎞지점인 고안(固安)의 한성(韓城)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한국(韓國)도 공공족과 관련 있다. 이들 공공족의 문화코드를 가지고 우리 고대문화를 이해하면 많은 부분의 의문이 풀린다.

천지교합으로 태어난 박혁거세 신화 새로 보기
나정과 백마가 결합해 낳은 붉은 알 '神婚' 상징
경주 석장리 암각화 일부 내몽고 음산지역의 것 유사, 이주해 온 마한의 신화 반영

 

 
  (사진1)아랫 부분에 마름모꼴이 선명하게 새겨진 내몽고 음산지역의 암각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에 관한 신화는 두 계통이 전한다. 하나는 나정(蘿井) 곁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부인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박혁거세 신화는 최소한 두 방향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신화가 반영되었다. 하나는 북에서 내려온 부여계와, 또 하나는 중국 북방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관련 있는 듯하다.

북방 지역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후한서' 동이열전에 "진한의 늙은이들이 직접 말하기를 '진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망명하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망명인들은 진시황이 만리장성 축성에 백성들을 동원하자 그 노역을 피해서 이주한 북방인들일 것이다. 최근 들어 경상도 지역에만 나타나는 암각화가 내몽고 음산 지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경주 석장리 암각화의 일부 그림이 내몽고 음산 지역의 그것과 유사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혁거세 탄생신화가 음산지역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양산 아래 나정 곁에 전광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웠는데 백마가 그곳에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보니 붉은 알이 하나 있었다(삼국유사)." 여기에서 하늘에서 땅으로 뻗은 '이상한 기운'은 남성 내지 남성적인 것의 상징이며,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뻗은 형상은 그대로 천지교합의 신혼(神婚)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나정은 대지의 자궁을 상징한다.

 
  (사진2) 바린줘치의 닭 모양의 아얼산 바위.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를 이해할 수 있는 암각화가 내몽고 오르도스 지역에 있다. (사진1)에서 보듯이 내몽고 암각화에는 여러 겹의 마름모꼴 무늬에 말이 자신의 정(精)을 쏟아 붓고 있다. 이는 생식과 관련된 의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박혁거세 신화와 비교해 보면 마름모꼴의 도형은 나정에 상응된다. 말이 사정하는 모습은 혁거세 신화에 등장하는 백마와 하늘에서 땅으로 뻗은 '이상한 기운'과 상응된다. 내몽고의 암각화를 참고해서 박혁거세 신화를 이해하면, 박혁거세는 하늘의 남성적 기운이 대지의 자궁(나정)과 결합한 결과 붉은 알이 탄생했고 그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몽고 암각화에는 알이 없다. 그렇다면 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사소부인 이야기에서 추론할 수 있다. 사소부인은 '중국 제실의 여자로 지아비 없이 임신하였는데,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 되어서,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사소부인 이야기에는 '소리개'가 신의 뜻을 전달하는 동물로 나온다. 이는 그녀가 북방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제실의 여자가 아비 없이 임신하였다는 이야기는 고리국(부여의 시조 동명의 어머니가 머물던 나라)의 동명이 그러했던 것과 유사하다.

고리국 시비가 임신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계란 같은 기운 때문이었다. 즉 태양 새인 닭으로 상상한 태양의 기운을 받아 임신했던 것이다. 그 태양 새인 닭이 고리국으로 추정되는 내몽고 바린줘치(巴林左旗) 분지의 아얼산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사진2). '삼국유사'에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을 계정이라고도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소부인이 부여계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해 해은사 대왕각 검은 돌의 비밀
모든 생명 품고있는 태모신의 자궁 상징
아들낳기 위해 빌던 祈子石 등 돌과 관련된 다양한 '모태'신앙, 세계 각지 신화 속에서 발견

 
  김해시 분성산 해은사의 대왕각 안에 모셔진 '검은 돌'(오른쪽 아래).
우리 전통문화 중에는 돌에 대한 신앙이 많다. 절이나 그 주변에 있는 큰 바위에는 예외 없이 바위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절에 가면 할머니들이 바위를 향해 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그 바위에다 무엇을 기원하는 걸까. 왜 바위에 대고 절을 할까. 그들이 바위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김해시 분성산 해은사 대왕각에 는'검은 돌'이 모셔져 있다. 오늘은 이 검은 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고대부터 인류는 돌에 특정한 관념을 부여했다. 돌에서 신이나 인간이 태어나기도 하고, 돌에 신이 거주한다고도 생각했다. 몽골인들은 돌과 암석에 조상의 영혼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동부여 금와(金蛙)왕은 호수가의 큰 돌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애로 출생했다. 또한 중국 하나라 우임금의 아들 계(啓)도 돌에서 태어났다. 우임금이 곰으로 변한 모습을 본 부인이 부끄러워 숭고산에 이르러 돌로 변했는데, 그 돌의 북쪽이 깨지면서 계가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서 돌은 생명 탄생의 모태로서 기능하고 있다. 우리민속에 돌이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기자석(祈子石·아들 낳기를 빌던 바위) 신앙이다.

이러한 신화는 페르시아 미트라신앙에도 나타난다. 구세주 미트라는 손에 칼을 들고 바위로부터 태어났다. 또한 셈족도 바위를 여성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바위신앙 풍습이 성경에 보인다. 예레미아 2장 27절에는 "왕이나 고관들이나, 사제들이나, 예언자들이나 모두 창피를 당하리라. 너희는 나무를 보고 아비라, 돌을 보고 어미라 하며, 나를 외면하고 등을 돌렸다가도 재앙만 만나면 나더러 살려달라고 한다. 네가 만든 신들은 모두 어디를 갔느냐"라고 힐난하는 구절이 있다.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대상인 '삼신'으로 돌 세 개를 모셔놓은 부산 초읍동 당산의 모습.
그렇다면 '검은 돌' 신앙은 어떤가. 기원전 1200년 경부터 히타이트 이후 터키 중부를 장악했던 프리기아의 태모신 키벨레의 상징은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돌(운석)'이었다. 로마인들은 이 키벨레를 숭배하기 위해 프랑스나 영국처럼 먼 곳에서 검은 돌을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 제12왕조 때 세운 벤벤석의 꼭대기에도 '검은 돌'이 있다. 검은 돌 숭배의 가장 극적인 공간은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메카의 카바신전일 것이다. 신전의 동쪽 구석, 지면에서 1.5m 정도 높이에 검은 돌이 끼워져 있다. 이 검은 돌은 모든 생명을 품고 있는 우주란으로 원형적인 생명의 고향인 태모신의 자궁이다.

그렇다면 해은사 대왕각에 모셔진 검은 돌은 어떤 상징을 가지고 어떤 연유로 모셔지게 되었을까. 이 돌은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올 때 가지고 온 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검은 돌은 어쩌면 부여계로 추정되는 가야 지도층 문화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지' 한전에 보면 구야국의 지도자를 '부례구야진지렴(不例狗邪秦支廉)'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례구야'는 앞에서 언급한 검은 돌로 상징되는 키벨레 여신의 나라 프리기아의 음을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대왕각의 검은 돌도 모든 생명 있는 것을 낳는 태모신의 상징일 수 있다.

부산진구 초읍동 당산에도 돌을 삼신(태모신)으로 모신다. 돌을 태모신으로 생각한 흔적이다. 초읍동 삼신은 천지개벽 때 선학을 타고 하강하였다고 한다.
금와가 영취산 자장암에 숨어들었다
신라까지 흘러들어간 東부여왕 탄생설화
양산 통도사 자장암 금와보살, 고령서 출토된 금개구리 형상, 東부여인들 남하에 따른 결과

 
  가야 금관 부속구.(호암미술관 소장) 제일 오른쪽 장식물에서 보듯 전체적으로 금개구리 형상이다.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의 탄생은 '아버지 없는 아들' 신화의 한 전형이다. 동부여 왕 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하여 왕은 산천에 제사 지내며 대를 이을 아들을 구했다. 어느 날 그가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大石)을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굴리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애가 있었다. 그가 바로 금와였다.

이 금와 출생신화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금와는 곤연가에 있는 지모신의 대석신전의 신녀(여사제)가 낳은 아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부루와 신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일 수도 있다. 금와를 낳은 큰 돌과 유사한 바위신앙 흔적을 길림성 동남쪽에 있는 주작산(朱雀山) 8부 능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바위는 필자가 부여지역을 답사할 때 발견한 것으로 송화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금와왕의 탄생 이야기는 동부여인의 이동과 함께 남쪽으로 전달되어 경남 양산 통도사의 자장암에 금와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의 '변화금와(變化金蛙)'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중략)…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게 한 것이다."

 
  길림성 주작산에 있는 금개구리 형상의 바위가 송화호(松花湖)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장암은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신단을 의지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자장스님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신앙 공간이었다. 이로써 불교가 고유 신앙을 누르고 뿌리내렸음을 알 수 있다. 금와가 산다는 구멍과 한 덩어리인 거대한 바위 위에는 지름이 30㎝, 깊이 20㎝ 정도 되는 인공으로 판 구멍이 있다. 전국 명산(名山)의 바위에 산재해 있는 이러한 인공의 구멍은 용신(龍神)신앙의 흔적이다. 즉 생명의 탄생과 유지에 필수적인 물과 관련된 신앙유적이다. 이곳에는 물에서 생명이 탄생한다고 직관한 고대인의 의식이 숨어있다. 통도사를 창건할 때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통도사 주변에 구룡신앙의 신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곳의 금와보살 전설은 자장율사가 부여계의 이동과 관련된 흔적을 불교와 습합시켜 남긴 것으로 이해한다. 동부여인들이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또 하나 있다. 동부여의 금와왕 출생 이야기에 나오는 금개구리에도 보인다. 이 유물은 금으로 만든 개구리로 고령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고분미술'에서는 "금관 부속 장식으로 믿어지는 것으로…(중략)…전체적으로 금판 장식은 소머리 형으로 보이는데, 곡옥이 소뿔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하였으나 사진의 제일 오른쪽의 것에서 보듯이 금개구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동부여의 금와왕 전설과 관련된 이야기가 통도사의 바위신앙과 관련해 전해지기도 하고, 이야기 소재인 금개구리가 가야의 왕관 장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는 동부여인들이 남하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자료다. 금개구리와 관련된 문화는 전연의 모용외(285년)나 모용황(346년)이 부여를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을 때 남하한 주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요동과 한반도 고인돌
"BC 11세기 한반도 들어온 辰人들이 고인돌 문화 남겨"

 

 
  요서지역 후기 신석기문화를 뜻하는 홍산문화권에 속하는 우하량의 돌널 무덤 유적.
한반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다. 그러나 고인돌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유산은 아니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는 북유럽과 서유럽, 지중해 연안을 거쳐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하며, 인도와 동남아시아, 필리핀과 대만 등에도 있다. 한반도 주변에는 중국 요동·산둥 반도와 저장성 해안 일부, 그리고 일본 북큐슈에 고인돌이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고인돌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확산됐을까? 한반도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남방기원설과 북방기원설, 그리고 자생설이 있다. 남방기원설은 고인돌이 쌀농사와 함께 북상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벼농사 문화의 원류에 해당하는 양쯔강 유역과 회하(淮河) 하류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한반도의 고인돌에서는 남방 전래의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방기원설은 한반도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 주목한다. 북방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북방식 고인돌이 중국의 랴오닝성의 돌널무덤으로부터 발전했다고 본다. 최근에 요서지역의 후기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 시기에 이미 돌널무덤이 유행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고인돌의 발생을 홍산문화와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생겼다.

그렇다면 한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요동의 고인돌과 한반도의 그것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고교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그것은 고조선 주민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최근 홍산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필자는 후기 홍산문화를 계승한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인과 중원에서 북경 공공성을 거쳐 이주한 환웅세력이 연합해서 단군숙신이라는 정치체를 형성했다고 본다. 이들이 중국의 순임금시기부터 기원전 11세기경까지 중국 문헌에 동북지역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숙신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전·후조선기의 공백기가 시작되는 은나라 무정 8년에 단군이 아사달산으로 이주했으며, 그 후 164년의 공백기를 거쳐서 후조선이 성립되었다'고 했다. 당시 동으로 이주한 단군은 요서의 의무려산 이동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죽국이 있었던 난하 지역에 기자의 무리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정치체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관자'에 등장하는 조선이다. 즉 기원전 11세기경 이후 한동안은 숙신(이들 중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한 이들을 진인이라 한다)은 요동에, 조선은 요서의 난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쥬신족이라는 광의의 범주에는 숙신과 조선이 동일하지만 문헌상으로만 보았을 때 분명히 숙신이 먼저 등장하고 조선은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중국 측에서는 요동에 있는 가장 큰 고인돌인 개주시 웅악(熊岳)의 석붕산 고인돌이 기원전 1000년경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단군숙신이 요동으로 이주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와 비슷한 시기의 서북한 지역의 탁자식 고인돌이나 그 후의 한반도 남부 고인돌은 이들 숙신인의 또 다른 호칭인 진인(辰人) 혹은 진국(辰國)의 문화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고조선은 요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요동까지 미치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시기는 고인돌 축조시기가 아니다.
신라왕족은 흉노인가
신라왕족은 고깔모자 쓰는 사카족의 후예 가능성

 
  (사진1)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명에 따라 조각된 비시툰 비문. 이란 중부 케르만샤에 있는 이 조각은 다리우스 왕에게 잡혀온 주변 지역 수령들을 표현했는데 가장 오른쪽 사카족 수령만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요즘 TV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드라마에서 예언 때문에,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난 덕만(후에 선덕여왕)은 신라를 떠나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덕만은 그곳에서 서역문물을 접한다. 신라 김씨왕족과 서역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문무왕비문에 의하면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은 흉노의 우현왕에 속했던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다. 그는 한 무제의 신임을 얻어 '투후'라는 후작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신라 김씨왕족이 흉노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과연 김씨왕족은 흉노일까?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라는 기사가 보인다. 왜 중국인들은 신라인들을 '변한의 후예'라고 했을까? 우리는 흔히 '변한' 하면 '삼국지' 한조에 나오는 낙동강 서쪽 지역에 있던 변한을 떠올리는데, 이 변한의 후예가 신라라고 이해하면 모순이 생긴다. 신라가 가야의 후예가 되기 때문이다.

변한이라는 말은 '고깔모자(皮弁)를 쓰는 한(韓)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깔모자를 쓰는 풍습이 흉노에게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라왕족과 흉노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무리다.

신라인들이 '고깔모자를 쓴 한인들'의 후예임은 신라의 사신이 중국에 가서 자신들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에 대해서 언급한 데서도 나타난다. 수나라에 파견된 신라의 사신이 수나라 관리가 고깔모자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 "피변(皮弁)의 유상(遺像)인데 어찌 대국의 군자가 피변을 모르는가?"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있다.

 
  (사진2)천산 동쪽인 중국 신강성 호도벽현에서 발견된 사카족의 암각화.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깔문화를 쓰던 집단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경계선상에 있는 천산(天山)의 동서지역에 살던 사카족이다. (사진1)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기원전 521~486)왕에게 잡혀온 주변 지역의 수령들이다. 그림 맨 오른쪽 인물은 사카족의 수령인데 그만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신라 김씨왕족은 바로 이들 사카족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간략하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이 왕권을 획득했을 때 조성하기 시작한 적석목곽묘는 천산 서쪽에 있는 사카족의 그것과 가장 유사한 양식을 띤다. 둘째, 신라금관의 양식도 그 모델이 천산 서쪽의 사카족과 가장 가깝다. 셋째, 변한이란 명칭 자체가 '고깔모자를 쓴 한'인데, 천산 동서 지역에서 고깔모자는 사카족의 특징적인 복식이다. 이는 천산 동쪽에 있는 암각화나 고고학적 발굴유물로도 확인된다(사진2). 넷째, '산해경' 해내경에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천독'을 사카족으로 보는데, 이는 동쪽으로 이주한 사카족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의 연구 결과(2009년 7월 18일 KBS에서 방영한 '역사 추적'), 신라인의 부계는 스키타이 인골과 가장 가깝고, 모계는 서흉노나 스키타이와 가깝다고 한다. 필자는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라는 책에서 문무왕비문에 나오는 김일제가 천산을 넘어온 사카족과 몽골인의 혼혈임을 밝힌바 있다.
개구리와 뱀의 교합은 생명순환의 상징이다
개구리·뱀, 현세중심적인 신라인의 性의식 상징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 장식 항아리.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동식물에 상징을 부여했다. 그들은 나무·바위·새·물고기·개구리·뱀 등으로 생명의 변화를 설명했다. 경주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항아리'에는 그러한 상징동물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항아리는 5~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신라인들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신라인들의 성 풍속이 상당히 개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의 성의식은 항아리에 장식되었던 토우에 잘 나타나 있다. 남녀가 교합한다든지, 남녀 성기를 과장하여 표현한 토우가 많이 발굴되었다. 그러한 신라인들의 성의식은 이전 한민족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후한서' 부여전에는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이며, 더욱이 투기하는 부녀자를 모질게 다스려 죽이고 나서 그 시신을 다시 산 위에 놓아둔다"고 했고, 같은 책 예전에는 "부인들은 정절과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이들 기록은 초기 한민족의 성의식이 상당히 엄격했음을 전하고 있다.

엄격했던 조상들의 성의식은 신라 김씨 왕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변화를 겪는다. 그들은 페르시아나 이집트 왕족들과 같이 친족들끼리 결혼했다. 동시에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것은 당시 신라가 중국문화가 아닌 서역문화를 수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성의식은 고려조에 접어들어 유교가 국가를 지도하는 이데올로기로 정착하면서 다시 엄격해진다.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중국 대릉하 상류의 삼관전자에서 출토됐다.
'토우장식 항아리'에 장식되어 있는 신라인들의 성의식을 살펴보자. 이 항아리에는 자연과 인간 모두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주제가 담겨있다. 자연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개구리와 뱀이 선택되었다. 항아리를 보면 신인(神人)이 뜯고 있는 거문고 아래로 뱀이 움직여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다. 이는 여성원리를 상징하는 개구리와 남성원리를 상징하는 뱀의 결합으로 자연계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오른 쪽에는 엎드린 여성의 뒤에서 남성이 성기를 드러내어 교합을 시도하고 있다. 남녀의 교합으로 인간의 생명이 태어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식을 담은 이들 두 쌍의 토우는 무덤에 묻힌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있다. 현세중심적인 신라인들의 성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인류가 남긴 많은 신화·전설에는 자연계와 인간의 생명 활동을 주관하는 상징적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단군이요, 아티스요, 오시리스요, 디오니소스이다. '토우장식 항아리'에서 거문고를 뜯고 있는 인물도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리듬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바람)를 가지고 생명의 음률을 만들고 있다. 바로 '바람의 흐름(風流)'를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상에서 우리는 신라의 풍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처음에 화랑은 여성인 원화(源花)였다. 그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지모신의 딸이자 대리인이다. 낭도(郞徒)는 그녀의 아들이자 애인으로서 생명계와 인간세상을 정의롭게 이끌어 가는 무리였다. 당시 원화와 낭도에게는 영원히 순환하는 재생신의 화신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인은 왜 무덤 속에 소나무를 그렸을까?
천상-지하 연결하는 神木 죽은자의 부활과 영생 기도
당시 지배층이던 부여족 영향, 무덤가에도 소나무·잣나무 심어, 日 금송 숭배도 부여계와 연관

 
  진파리 1호분 소나무 벽화.
고대인들의 신목(神木)신앙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은 꿀참나무를 신목으로 했고, 프리기아인들은 소나무를 신목으로 삼았다. 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의 종교에서는 '이그드라실'이라는 거대한 물프레나무가 신목이었다. 또한 마야문명 세계의 중심에는 '신의 얼굴을 한 옥수수 나무'가 있었다. 이러한 신목는 지구의 중심축을 이루어 천상과 지하세계를 연결한다.

우리 문화에도 우주수인 신목이 있다. 그것은 단군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고 신정을 펼친다. 그때 웅녀는 환웅이 요구하는 금기의 조건을 잘 견뎌내어서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 웅녀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기원했다. 이에 환웅은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신단수에 대한 신앙은 단군시대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원래 신단수는 박달나무(檀木)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지역에서는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삼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한민족 초기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이 여러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신목으로 삼은 사람들은 부여족이다. 그들은 현재 터키지역에 있던 프리기아인들과 관련 있다. 프리기아의 신목은 소나무였다. 이들 부여족이 한민족사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단군신화는 국조신화로서의 힘을 잃는다. 단군신화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몽골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다시 부상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부여계의 지배엘리트들이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군신화와는 다른 천손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부여계가 우리 민족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이 신성시하던 소나무는 중요한 신목이 된다.

'한국문화상징사전'에 따르면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목(洞神木) 중에 소나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산에 있는 산신당의 신목은 거의 소나무라고 한다. 일본 왕실에서 금송(金松)을 신성시하는 것도 부여계와 관련 있다. 일본인들은 금송을 '고오야마키'라고 하는데, '고오야마키' 가지를 조상의 영전이나 제단에 봉헌하는 풍습이 있다. 백제 무령왕의 목관을 일본에서 수입한 금송으로 제작한 것도 부여계의 소나무 숭배와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인들도 소나무를 신목으로 여겼다. '후한서' 고구려조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물을 많이 들여 후하게 장사 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이 무덤가에 소나무를 심었던 것은 고구려의 지배층인 부여계의 관념이 반영된 것이다. 그들은 무덤 속 벽화에도 소나무를 그렸다. 평양의 대동강 남쪽에 있는 진파리 1호분과 4호분 북쪽 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구하는 전호태(울산대)교수는 '이 소나무는 고구려인들의 수목숭배 신앙과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소나무는 부여(프리기아)인들의 재생신인 아티스의 나무였다. 고구려인들은 아티스의 화신(化身)인 왕자나 귀족들이 죽음을 넘어, 영생하는 아티스와 결합하여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나무를 무덤의 북벽에 그렸던 것이다(신채호의 주장에 따르면, 고어에 '송(松)'을 '스'라고 했다고 한다).

 

단군의 맏아들 부루가 업신(業神)이 된 이유
대지의 첫 생명체이자 곡식 주관하는 곡령신
태양·달·별 정기 상징한 구렁이…곡식·재물 관장하는 業神 대접, 부루단지에 햇곡식 담아 모셔

 

 
  제주도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부루단지.
우리 민속 중에 업신(業神)이란 것이 있다. 업신의 업은 '구렁이'를 말한다. 조상들은 구렁이를 업(業)이라고 해서 곡식이나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셨다. 필자가 어릴 적 만해도 집집마다 업신을 모셨다. 당시에는 대청마루 아래에 구렁이가 기어 다니기도 했고, 헛간에도 구렁이가 살았다. 어른들은 집에 사는 구렁이가 집을 지켜주는 동시에 재물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해치지 못하게 했다.

옛사람들은 왜 구렁이를 재물과 관련된 신으로 여겼을까? 단순히 생각하면 구렁이가 곡식을 훔쳐가는 쥐를 잡아먹으니 사람에게 이롭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구렁이가 집을 지키고 재물을 가져다준다고 믿게 된 데는 좀 더 깊은 종교적 원리가 숨어 있다. 업신을 모시는 단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부루단지'라고 했다. 19세기 문헌인 '무당내력'을 보면, 해마다 10월에 햇곡식을 담아 제사드리던 돌 단지를 부루단지라고 불렀으며 단군의 아들 '부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부루와 구렁이가 업신이 된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면 한민족의 연원이 오래고 먼 곳과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루단지의 '부루'는 단군의 맏아들 이름인데, 이는 아리안족이 사용한 부리(Buri·게르만족의 오딘 신화에 나오는 이름으로 얼음 속의 대지에서 나온 최초의 사람 이름)· Brh(자라다·증가하다·울부짖다를 뜻하는 인도-아리안어의 어근)·Phry- (최초의·처음의 )등에서 나온 이름으로 곡령신(穀靈神)과 관련이 있다. 이는 인도-아리안들이 대지에서 처음으로 솟아나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첫 혹은 맏이라는 의미가 있다. 단군의 첫째 아들 이름이 부루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필자가 앞서 연재해온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천산 혹은 그 이서 지역에서 중원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후예이다. 그들이 그곳에 살 때 인도-아리안 언어를 쓰는 종족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을 맺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지만 환웅세력은 인도-아리안의 일부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언어학자 이병선은 '삼국지'변진전이나 '후한서' 진한조에 보이는 거수(渠帥)는 산스크리트어 kasi(太陽)를 음사한 것이라고 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지적이다. 당시의 수장(首長)이었던 거수는 '태양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공족의 족휘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구렁이는 왜 업신이 되었을까? 그것도 환웅이 속했던 공공족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 공공족의 족휘를 보면 그들이 뱀으로 상징되는 생명력을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뱀이 물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뱀은 물의 정(精)인 동시에 빛의 정(精)이다. 물과 빛은 우주에 충만한 음양에너지의 정수이다. 이 두 기운이 작용할 때 생명이 탄생한다. 복희· 여왜도에서 해와 달을 함께 그리는 것도 그것이 불과 물을 대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공공족의 족휘에 보이는 뱀은 구렁이다. 공공족은 뱀을 숭배했다. 뱀은 태양의 정기(精氣)·달의 정기·별의 정기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러한 관념 하에서 구렁이가 부루단지와 관련된 업신이 되었다.

마고여신의 상징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태모신 전통 잇는 창조여신…전국 곳곳에 흔적 남아있어
평양·영암 월출산 등지서 다양한 관련설화 전해내려와, 강한 생식력은 공통분모…양산 천성산에서도 성기 새겨진 바위 찾아내

 
  양산 천성산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고여신의 음부 문양. 주위에 무속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필자는 직접 이 바위를 확인했는데 그 존재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을 보았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한민족 초기공동체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신화에는 마고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에서는 단군족이 탄생하기 이전의 세력으로 마고족을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단군조선이 한반도 외부에서 성립되어 한반도로 이주했을 때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고족! 생소한 이름이다. 마고에 대한 이야기는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었다고 하는 '부도지'에 나온다. 이 책은 영해 박씨 집안에 전해 내려온 문서로 원전은 함경남도 문천의 박씨 문중 집안에 보관되어 있고, 6·25 때 월남한 저자가 기억을 더듬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구빈마을에 최근까지도 마고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 것으로 보아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은 사실인 듯하다. 물론 마고할미 이야기는 남한에도 전한다.

마고족의 성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영암 월출산과 관련해서 전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마고할미는 덩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그녀가 오줌을 누면 강을 이루어 넘쳐 흘렀으며, 한숨을 쉬면 그 입김이 태풍으로 바뀌었다. 남쪽 바다를 건널 때에는 물이 다른 곳보다 깊어서 치맛자락을 적셨는데, 그 젖은 치마를 벗어 월출산에 벗어 놓았더니 온 산을 휘감아 버렸다고 한다.

마고할미의 대단한 오줌발 이야기는 다른 형식으로도 전한다. 경기도 양주의 노고산에 사는 노고할미 이야기가 그렇다. '노고산에 있는 노고할미는 얼마나 몸집이 큰지 노고산과 불국산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었는데 문학재 고개에 있는 큰 바위가 오줌발에 깨져나갔다'는 것이다. 마고할미로도 노고할미로도 불린 마고여신은 대체 어떤 여신일까? 그녀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거센 오줌발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녀는 강한 생식력을 가졌다. 그녀는 바로 구석기시대 유라시아 대륙에 나타나는 태모신의 전통을 잇고 있는 여신이다. 그녀는 천지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만든 창조여신이었다. 월출산 마고할미 이야기에서 '마고할미가 만물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은 그녀가 태모신이었음을 의미한다.

강동군의 구빈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는 바로 남신이 창조신의 역할을 하기 이전의 마고여신에 대한 기억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고여신의 흔적은 전국 도처에 있다. 월출산 구정봉 가까이에는 베틀굴이라고 하는 여근굴이 있다. 바로 마고 여신의 성기인 것이다. 부산에 가까운 양산 천성산에도 대형 마고여신의 성기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길이만도 1m 정도 된다. 마고할미의 생식력은 지금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이 유적은 필자가 발견한 것으로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발해는 부여인의 바다였다
부여족 조상은 터키 '프리기아인'…그들 출현 뒤 '발해' 명칭도 생겨
킴메르인 침공에 패망한 프리기아인들 이동, 삼국지·중국고대역사지도집 등에 정황 기록, 신채호도 발해라는 명칭 발생한 내막 언급해

 
  현재의 발해 지역을 '해'(海)로만 표기했음을 보여주는 춘추시기 지도. 세로로 '발해'(渤海)라고 표기한 글자 가운데 '해'(海)라고 한 글자만 표기돼 있는 것이 춘추시기 지명을 말해준다.
정말로 한국사는 고조선에서 출발해서 그 정통성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일까? 그러한 계승의식은 고려조에서 확립된 것이다. 고려 후기 이승휴는 저서 '제왕운기'에서 '부여와 비류, 신라와 고구려·남북옥저·예·맥, 이들 나라 여러 임금들은 모두 단군의 혈통을 이었다'고 했다. 비슷한 인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정보들이 드러나면서 한국사를 주도해온 사람들이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신라 김씨 왕족이 흉노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필자도 그들이 흉노의 우현왕에 속했던 사람들로 사카족과 몽골리언의 혼혈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부여족도 단군조선과는 그 혈맥이 다르다. 산둥 반도의 위쪽과 요서 지역의 남쪽에 있는 바다를 '발해'라고 부른다. 이 '발해'라는 명칭은 부여족의 등장과 관련 있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나라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옛날에 망명인이었다고 말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망명인 기사에 주목해보자. 고대국가에서 전쟁이나 내란, 혹은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면 주변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를 망명인이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을 망명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나, 비류나 온조를 망명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부여인들이 스스로 망명인이었다고 한 것은 특별한 사건이었음을 뜻한다.

 
  춘추전국시대로 넘어온 뒤의 지도. '해'(海)라는 한 글자 표기는 사라지고 '발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쓰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 부여인들의 조상이 지금의 터키 중부에 살던 '프리기아'인들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프리기아는 '무엇이나 만지면 금으로 변했다'는 미다스왕이 통치하던 나라였다. 미다스 이후 그 나라는 이웃한 킴메르인들의 침공으로 완전히 패망한다. 패망한 프리기아인의 일부가 동으로 이주하는데, 지금의 난하 지역에 그들이 출현하고 나서 발해라는 명칭이 생긴다. 신채호 선생도 발해라는 명칭이 발생한 정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기원전 5~6세기경에 불리지(弗離支)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북경과 하북성 일대)·산서·산동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부근에 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불리지국(弗離支國)이라고 했다. '주서'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의 '이지(離支)'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중략)…발해의 발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다'라고 했다. 춘추시대 지도에 보이는 령지(令支)가 그곳이다. 필자는 신채호가 사람이름이라고 착각한 '불리지'가 바로 '프리기아(프리지아라고도 함)'를 음사 표기한 것으로 이해한다.

중국에서 발행된 '중국고대역사지도집'에도 프리기아인들이 난하 지역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발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즉 그들이 들어오기 이전인 춘추시대에는 발해라는 명칭을 쓰지 않다가, 춘추전국시기가 되면 발해라는 명칭을 쓴다. 따라서 '발해'라는 이름에는 '프리기아(부여)인들이 사는 바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부여인들의 바다였다. 최근(1999) 길림성 사회과학원에서 '부여의 조상들의 원주지는 발해의 바닷가였다'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각저총 호인(胡人)은 고구려 주민이다
서양인을 빼닮은 고구려 씨름꾼

 
  고구려 시대 고분인 각저총의 씨름도.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두 장사가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 무덤을 각저총이라 부른다. 그 벽화에는 씨름 외에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신단수와 신단수 아래에 앉아 있는 곰과 호랑이다. 누가 보아도 단군신화를 떠올릴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벽화로 단군신화가 5세기 초의 고구려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널방 동편에 그려진 이 그림은 어떤 염원을 담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덤 주인공이 신단수를 통해서 저승으로 잘 갈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에 나오지 않는 씨름하는 장면은 왜 그렸을까?

먼저 씨름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씨름하는 인물상을 주제로 한 향로(기원전 2500년께)가 수메르가 있던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로 보아 씨름은 수메르 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수메르지역에서 발굴된 씨름유적을 보면 현재 우리의 씨름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향로로 사용됐다는 것은 그 용기가 제사용으로 사용됐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씨름은 축제나 제사 의식을 거행할 때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씨름 경기의 제의적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미지의 세계 혹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의 투쟁과 관련 있을 듯하다. 수메르의 신화전설에 보면 영웅들이 자연과 투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들이 자연의 폭력을 극복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황소의 모습을 한 수메르 영웅이 야생의 황소나 사자와 대결하는 인장을 보면 씨름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씨름은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과의 대결에서 이기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하는 경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저총 씨름도는 사자가 저승이라는 두려운 미지의 세계로 갈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각저총 인물 중 한 사람은 서역인이라는 설이다. 씨름도의 나무쪽에 위치한 인물은 크고 길게 째진 눈과 큼직한 매부리코를 가졌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서역인(西域人)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중앙대학 의과대학 연구팀이 아시아 각 지역의 인골 2000여 점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현재의 몽골 전역을 삼등분 할 때 서쪽에서는 유럽인종, 중앙에는 몽골인종, 동쪽에는 유럽인종의 특징을 보이는 인골이 발굴된다.

이를 문헌과 비교해보자. 문헌에 보면 중국 동북 지역에는 전국시대 이후 동호(東胡)라는 세력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일반적으로 흉노를 호(胡)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동호라 한다. 그런데 흉노의 주도 세력도 투르크계였다. 이들도 천산의 서쪽에서 이주한 서역인과 몽골리언의 혼혈이었다. 그런데 2세기 말의 응소 고구려를 '구려호(句麗胡)'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종합해 볼 때, 각저총 씨름도에 보이는 서역인은 호인(胡人)의 모습을 가진 고구려 주민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도사 숲속에는 용왕의 남근이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용신신앙의 흔적

 
  통도사 입구 근처에 있는 남근석.
부산 근교에 있는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스님이 창건했다. 당시 이 산의 이름은 취서산이었다, 신불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그 산은 마치 커다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동남쪽으로 나는 형세를 하고 있다. 취서산이란 이름은 그와 같은 산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현재의 영축산은 통도사가 창건된 후에 부르기 시작했다.

이같이 산의 이름도 그 공간에서 어떤 종교가 신봉되고 있느냐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취서산이 영취산이란 이름을 얻기 이전에도 이 공간은 상당히 중요한 종교 공간이었다. 그것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1705년)에 실려 있는 구룡지(九龍池) 전설로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승려로 화한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에는 독룡이 거처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을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이어질 것이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한다. 자장스님은 이들을 교화하여 수용하려 했으나 그 중 다섯 마리는 통도사 서쪽에 있는 오룡골로 도망을 갔고, 세 마리는 동쪽에 있는 삼동골로 달아났으며, 나머지 한 마리만 불법을 수용하고 그 터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룡신(九龍神)을 대단히 나쁜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를 새로 수용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조작한 전설로 이해해야 한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통도사 주변은 용신신앙이 성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통도사 창건설화에 보이는 구룡전설은 용신신앙계통의 신앙과 새로운 종교인 불교와의 출동과 수용과정을 담고 있다. 그 내용으로 보아 대다수의 용신신앙 세력들은 새 종교인 불교가 자신들의 성역을 접수하려는 데 반발했으며 일부만이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서는 '용들이 독을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한다'고 했지만, 사실 용신신앙에서 용은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이 성장하게 하여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인 동시에 인간에게 자손을 주는 신이었다. 그러한 신앙 흔적이 통도사 주변에 있음은 이를 증명한다. 통도사 입구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 있다. 그 중 가장 큰 바위는 발기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다(사진). 또 다른 남근이 일주문을 조금 지나 오른쪽 산등성이를 오르면 있는데, 실로 그 모습이 너무나 실제와 닮았다. 필자가 발견한 이 남근상은 필시 불교 이전의 용신신앙의 신체(神體)임이 분명하다. 이 남근상은 주변에 여근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용신신앙의 단독 상징이다.

통도사 주변에 있는 이러한 고유신앙 흔적을 이해하면 통도사 창건설화에 내포된 비밀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고유신앙 중 하나인 용신신앙과 불교가 습합되는 정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습합의 결과 사찰에 용왕각이 지어지게 된다.

조상들은 왜 피리에 13개의 구멍을 뚫었을까
숫자 13엔 생명의 문화적 가치 내재…기독교 득세 후 불길한 수가 돼

 

 
  (사진1)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에서 출토된 '로셀의 여신'. 기원전 2만2000~1만8000년 전 것으로 추정.
지난 한가위 때 모두들 보름달을 보셨을 것이다. 한가위가 아니더라도 달마다 뜨는 보름달에는 인간을 끄는 힘이 있다. 오늘은 달과 관련된 문화유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달과 관련된 문화유산은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달의 생멸주기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있다. 이와 관련된 문화유산은 이미 구석기 시대에 나타난다. 구석기시대에 유라시아에 살던 인류는 달이 자랐다가 이지러지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에서 창조의 원리를 생각해 냈다. 구석기인들이 생각해낸 태모신(太母神)은 바로 달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었다.

그들이 태모신을 달과 연관지어 생각했음은 '로셀의 여신'(기원전 2만2000~1만8000년·사진1)으로 알 수 있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 남부 도르도뉴(Dordogne)에 있는 로셀의 바위 은신처에서 발굴된 것이다.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태모신은 오른손에 달을 상징하는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데, 거기에는 달이 차오르는 13일을 나타내는 13개의 금이 그어져 있다. 달은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13일간 조금씩 커진다. 또한 왼손으로는 부풀어 오른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달이 차오르는 국면과 여성 자궁의 다산 간에 밀접한 관계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달이 여성의 출산과 관련된 월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이미 구석기인들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진2)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에서 출토된 뼈피리(골적). 구멍이 달의 운행주기를 상징하는 13개이다. 기원전 1500년 이전에 만든 것이다.
달이 차오르고 이지러지는 13수와 관련된 유적 유물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2007년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 된 태양관측대(기원전 300년경)가 페루의 찬키요에서 발견되었다. 그 유적의 관측대 앞에는 낮은 능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13개의 탑이 조성되어 있다. 능선에 조성된 13개의 탑은 비록 태양을 관측하기 위해 조성하긴 했지만, 그것은 달의 변화수인 13수를 의식하고 만든 것이다. 마야 문명의 1년이 20일 주기의 13개월인 것도 달의 변화수와 관련 있다.

우리 조상들도 달의 변화 수인 13을 읽어내고 그것이 생명의 무궁한 변화와 동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뼈로 만든 피리[骨笛](사진2)도 그 중 하나다. 이 유물은 기원전 1500년 이전에 만들어 졌다. 사진에서 보듯이 이 피리의 구멍은 13개이다. 왜 조상들은 피리에 13개의 구멍을 뚫었을까? 조상들이 피리에 13개의 구멍을 뚫은 것은 피리로 달의 생명원리를 노래하기 위해서였다. 달과 피리의 상관관계는 신라의 월명사가 달밤에 피리를 불면, 달이 운행을 멈추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유라시아의 고대 재생신은 악기를 들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생명의 원리를 노래했다. 우르에서 출토된 달의 왕은 매혹적인 하프를 켰으며, 프리기아의 아티스는 피리를 불었다. 서포항에서 발굴된 피리도 그러한 제의적인 노래를 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달의 변화 수인 13이 우리문화에 나타난 또 하나의 걸작은 절 마당에 조성된 13층탑이다. 달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불교교리인 '무상' ·'윤회'와 잘 부합한다. 13이란 수가 서양문화에서 불길한 수가 된 것은 기독교 문명이 득세하고부터이다.

 

여우바위의 비밀
경주 내남면 안심리 암각화, 여우토템 청동기인이 제작한 듯

 

 
  경주 내남면 안심리 암각화, 일명 여우바위.
초기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헌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문헌자료의 부족함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오늘은 구전설화 한 토막과 암각화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해보자.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경주를 막 지나면 오른 쪽으로 제법 넓은 들이 나타난다. 그 들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경주시 내남면 안심리 소재) 가 있다.

필자는 이 암각화를 1999년 답사했다. 당시 마을 주민에게 이 바위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대답이 참 낯설었다. 그 바위를 '여우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바위를 여우바위라고 부르는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연결고리를 황해도에서 채록된 구전설화에서 찾았다. 그 구전설화에는 단군과 기자의 탄생 이야기가 담겨있다. '옛날 밥나무에서 밥을 따 먹고 옷나무에서 옷을 따 입던 시절, 하늘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졌다. 한데 그의 남근이 예순 다섯 발은 될 정도로 길었다. 그래서 동물들이 모두 마다했는데 곰이 굴속에 있다가 그 남근을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후 여우가 받아서 기자(箕子)를 낳았다고 한다'.

필자는 문헌으로 전달되지 않은 민족사의 비밀을 이 구전설화와 안심리 여우바위가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전설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하여 생각해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고,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여우가 만나서 기자가 탄생했다. 이는 단군의 무리와 기자의 무리가 어느 정도 혈연적으로 연결되는 측면도 있지만, 두 집단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우라는 단서를 통해서 우리는 기자조선이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난하 동쪽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이 바로 여우를 토템으로 한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 지역에서 기자일족의 것으로 보이는 '기후(箕侯)'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유물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기자가 동쪽(고죽국)으로 왔을 때 단군세력들은 그보다 더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상고사를 이해할 때는 기자조선보다 먼저 동으로 이동한 세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들이 진인(辰人)으로 후에 진국이나 숙신으로 나타나는 세력으로 본다.

아무튼 우리는 고죽국의 여우토템이 황해도 구전설화나 안심리 여우바위에 그 흔적을 남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죽국은 여우를 사자로 하는 농업신을 토템으로 하던 부족이었다.

이들 고죽국 사람들과 기자무리가 결합했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먼저 들어왔던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섞여 살면서 전한 이야기가 바로 황해도 구전설화일 것이다. 또한 뒤늦게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왔던 조선의 무리 중 여우를 농업신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경주 안심리 암각화를 조각했을 것이다.

이들 안심리 암각화를 조성했던 일단의 무리가 일본으로 건너간 흔적이 바로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이나리신사(古麓稻荷神社)이다. 이나리 신앙은 농업과 관계가 있고 여우가 상징 동물인데 일본 전역에 분포한다. 신사의 외부에는 이나리신사의 상징인 여우 조각 두 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여우토템의 이동 흔적이다.

 

두 길로 이동한 신어(神漁) 한반도에서 만나다
'쌍어문'문화 수로왕 이전에 환웅족 루트타고 한반도 들어와
 

 
  김해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허황옥이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 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가야를 개국한 수로왕은 외국에서 온 처녀와 국제결혼을 한 것이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아유타국, 즉 아요디아(Ayodhia)는 갠지스강 중류에 흐르는 사라유 강변에 자리 잡은 고대 도시로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수로왕의 국제결혼 기록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아유타국을 아요디아와 공개적으로 처음 연결시킨 사람은 아동문학가인 이종기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김수로왕릉의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雙魚紋)이다. 쌍어문은 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을 말한다(사진1). 이종기는 1977년 인도의 아요디아를 방문해서 수많은 건물에 새겨진 쌍어문을 발견하고 탐방기를 썼다.

그를 이어 가야의 문장과도 같은 쌍어문을 집요하게 추적한 사람은 고고학자인 김병모이다. 그는 유라시아 문명사에 나타나는 신어사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는 코살라국이 쿠샨왕조의 침입으로 붕괴되자 아요디아에 살던 왕족 중 일부가 지금의 사천(四川)성 안악(安岳)지역으로 이주했다고 보았다. 안악 지역에 지금도 허(許)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청동제 유물이나 한대의 벽돌에도 쌍어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안악에 살던 허 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후한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후 양자강 하류의 무창(武昌)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허황옥은 그들의 정착지인 무창 지방을 떠나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중원 앙소문화권에서 출토된 채도(채색도자기)의 쌍어문. 수메르문명의 물의 신 엔키는 바빌로니아의 신 에아로 이어지는데 이 신화에 나오는 사제인 물고기 신인(神人)들이 쌍어문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아요디아가 쌍어문의 발상지인가? 김병모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신어사상을 믿는 사람들의 이동루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처음에 앗시리아(기원전 2700년)에서 발생해 페르시아를 지나 스키타이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간다라 지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와 아요디아에 이르렀고 다시 동진하여 중국 운남성에 도달했다. 이것이 무창을 거쳐서 가야에 도착했다.

과연 신어사상은 김병모의 주장처럼 남방루트를 통해서만 한반도에 이르렀을까?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시기보다 훨씬 오래 전에 북방루트를 통해서 한반도로 전해온 신어사상이 있다. 그 비밀은 김병모도 지적한 '떡시루에 북어 두 마리를 걸쳐 놓는 우리의 고사 풍습도 신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신어사상은 김병모가 주장하는 것 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5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했다. 쌍어문 도안은 기원전 5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문화의 채도(채색한 토기)에 나타나고, 그 후 이 문양은 중국 중원지역으로 이동하여 앙소문화 채도에 나타난다(사진2). 앙소채도에 나타나는 쌍어문은 후에 갑골문의 정할 정(貞)자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서아시아에 전승되듯이 물고기가 신의 사자로서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쌍어문 문화는 필자가 환웅족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의 이동루트를 타고 한반도까지 들어온다. 즉 칠성신앙과 관련된 무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새와 배를 타고 하늘나라 오가다
고대인들 가까운 거리에 하늘나라 있다고 생각

 
  기원전 3000년대 초, 옛 수메르인 마을에 지구라트를 짓고 있는 모습을 담은 진흙으로 만든 도장. 하늘의 신들이 '천상의 배'를 타고 하강하고 있다.
고대 국가를 세운 왕들은 대개 천신의 자손들이라 지상의 과업을 마치면 하늘로 돌아간다. 옥편(玉鞭)을 남기고 승천한 주몽이 그런 경우다. 죽어서 돌아가는 곳은 하늘뿐이 아니다. 황천도 있고 서천도 있다. 고대인들의 하늘나라와 저승에 대해서 알아보자.

신석기 시대가 되면 인류는 다양한 신들을 창조(?) 한다.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그 둘의 교합으로 신들이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 신들이 거주하는 하늘나라가 생겼다. 우리민족에게도 단군신화의 형성기에 '하늘'에 대한 신앙이 생겼으며 그 하늘에는 하늘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고대인들의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순진했다.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하늘은 평평한 지구의 위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둥근 지구의 360도 모든 방향의 위쪽이 하늘이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를 평면으로 인식한 고대인들은 하늘나라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유라시아 대륙을 비롯해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우주수(宇宙樹·우주나무) 개념이다. 고대인들은 신들이 우주 중심에 있는 신목(神木)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관념적인 나무라 해도 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하늘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목을 통해서나 새를 타고 하늘을 오갈 수 있다는 관념을 도상화한 신라왕관. 경주 서봉총 출토.
또 다른 근거를 들어보자.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 한전의 변진(弁辰)조에는 "큰 새의 깃으로 장사를 치르는데 그 의미는 죽은 자로 하여금 날아오르게 하고자 함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갈 때 새처럼 날아간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바(ba)로 불리는 영혼이 새의 형상을 하고 하늘나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는 고대인들이 하늘나라가 새가 날아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말한다. 신목을 통해서나 새를 타고 하늘을 오갈 수 있다는 관념을 도상화한 것이 바로 신라왕관이다.

하늘나라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또 있다. 기원전 3000년대 초, 키쉬의 옛 수메르인 마을에 지구라트를 짓고 있는 모습을 담은 인장(진흙으로 만든 도장)을 보면, 하늘의 신들이 '천상의 배'를 타고 하강하고 있다(사진2). 배를 타고 하강할 수 있는 거리에 하늘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또한 최근에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UFO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고대 신들은 UFO나 비행체와 같은 탈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천상을 오갔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선조에게도 있었다. 하늘의 별을 알처럼 파놓은 경남 함안군 함안읍 도항리 고인돌에도 천선(天船)이 새겨져 있다.

저승은 어떤가.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저승인 황천(黃泉)은 지하에 있었다. 그러다 불교가 들어오자 서쪽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바뀐다. '바리데기'를 비롯한 우리 무속신화에 나오는 서천서역국은 황천수(黃泉水) 건너편에 있다. 물론 죽은 자의 영혼이 그 황천수를 건널 때도 배를 탔다. 그리스 신화에도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다주는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나온다. 고대인들은 하늘나라도 저승도 배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날과 같은 비행체는 없었다

 

 

 

 

 

 

삼족오의 다리는 왜 세개일까
동지·춘추분·하지의 태양이 뜨는 3개의 산

 
  조선 후기 장난감 책 '칠교도보'에 있는 그림 속의 삼신산.
삼족오(三足烏) 하면 우리는 고구려를 떠올린다. 대중매체에서는 삼족오를 마치 고구려의 문장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삼족오를 고구려만의 독특한 문화로 보기는 어렵다. 삼족오는 기원전 4000년경 중원의 앙소문화에도 나타나고 일본의 고분들과 신사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족오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왜 다리가 3개일까? 여기에 대한 해명이 아직 미흡한 것이 학술계의 사정이다. 3이라는 숫자를 생각하면 먼저 단군신화가 떠오른다. 단군신화를 보면 3과 관련한 내용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 먼저 삼위 태백(三危 太白) , 천부인 3개, 환웅이 끌고 온 무리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 3인, 삼칠일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민족은 3수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기를 해도 세 번 해야 성이 차고, 술자리 지각생은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라고 하여 술을 세 잔 연거푸 마신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인의 국민적 놀이(?)인 고스톱에서도 3점이 기본 점수이다. 이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3을 완성이나 가득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3수는 삼신신앙에 그대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 이 신은 아기를 점지하고 낳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삼신은 세 명의 신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삼신상에 밥과 국이 항상 세 그릇 차려져 있는 것이 좋은 증거다. 그러나 3수는 세계 문화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숫자이기도 하다. 삼신만 해도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는 운명을 결정하는 3명의 여신이 있다. 힌두교에는 브라흐마·비슈누·시바의 3신이 있다. 기독교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3신이 존재하며, 불교는 3존불 형태로 3수를 수용하고 있다.

 
  평양 역포구 무진리에서 출토된 옛 장식품. 삼족오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그렇다면 삼족오의 다리는 왜 3개일까? 중국문헌에는 '삼족오의 다리가 3개인 것은 양수가 1에서 시작되어 3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태양 속에 삼족오가 있다'고 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삼신사상, 즉 천(天) 지(地) 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삼족오의 다리가 3개인 것은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생겨났다. 태양은 동지에서 시작하여 춘분·추분·하지를 거쳐 다시 동지해가 뜨는 자리로 온다. 삼족오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의 삼위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새인 까마귀를 형상화한 것이다. '중문대사전'에 보면 "삼위는 이적(夷狄)이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삼위산이 중국의 북방에 살던 사람들의 신산(神山)이라는 말이다.

우리 조상을 포함한 북방민족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숭배 의식과 삼위산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 신성한 도시의 동쪽에 삼신산이 있을 때 삼신산의 제일 오른 쪽 봉우리에서 태양이 솟을 때가 동지이다. 중앙의 제일 높은 산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는 춘분과 추분, 그리고 왼쪽 봉우리에서 태양이 솟으면 하지가 된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면 태양은 끝없이 세 봉우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 모습을 상징적으로 도상화하면 태양새인 까마귀 한 마리에 세 발(세 봉우리)이 달린 것으로 상징화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삼족오가 탄생한 것이다.
풍수지리와 서역인이 지키는 괘릉
늪지에 만든 신라 왕릉, 중국식 풍수사상과 달라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 있는 신라 왕의 무덤 괘릉. 땅과 관련해 현재의 풍수사상과는 현격히 다른 사고의 체계가 당시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류는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유를 했다. 그 중에서도 땅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인류는 대지를 어머니 여신으로 생각했다. 생명을 낳는 어머니로서 땅에 대한 생각은 후대로 오면서 더 고차원적인 관념으로 변한다. 노자가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검은 암컷이라고 한다. 검은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고 했을 때 '검은 암컷의 문'은 바로 여신의 자궁을 관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지의 여신은 우리나라 산 속의 여기저기에 어머니 여신의 자궁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상들은 그곳에 기도를 하며 자식 낳기를 빌었다. 그러한 관념이 풍수사상과 결합하면 '지령(地靈)이 뭉쳐 있는 지점에서 인물이 탄생한다'는 사고를 낳는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풍수사상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전통적인 지리 관념이 있었다. 하나의 부족이 이동하여 수도를 정할 때 경제적·군사적으로 호조건을 갖춘 지역을 선택한다든지, 수도 주변의 특정한 지역(예컨대 소도·蘇塗)을 신성시한다든지, 산천을 숭배한 것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지리관념은 중국의 풍수사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령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예로 들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경주의 진산(鎭山)은 경주 분지의 남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인 낭산(狼山)이다. 하지만 신라의 왕성은 그 산을 의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성인 반월성도 남천의 물이 쳐들어오는 형국이다. 후대의 풍수관점으로 보면 길지가 아니다.

중국의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선조들은 명당에 무덤을 마련해야 본인은 물론 후손이 발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새로 탄생한 대통령의 생가와 그 조상의 무덤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터를 보기 위해서다.

과연 그러한 생각은 옳은 것일까? 특별한 신라 왕릉 하나를 조명해 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자. 경주시내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불국사역을 지나면 외동면 괘릉리가 나온다. 그곳에 사적 26호인 괘릉이 있다. 이 괘릉이란 이름이 만들어진 연유를 보면 신라만의 장묘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능이 조성된 곳은 원래 물이 고여 있던 늪지였다고 한다. 무덤방을 조성한 후 물이 차오르자 관을 돌 위에 걸쳐놓고 흙을 쌓았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 하였다 한다.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일 텐데, 굳이 물이 고이는 늪지에 왕릉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식 풍수관념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무덤에 대한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생각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는 특별한 소수가 창안한 사상체계를 마치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 풍수사상만 해도 그렇다. 동서양의 문명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풍수사상을 맹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풍수사상을 신봉하지 않는 서양이 물질적 풍요를 이룬 것만 보아도 그렇다. 여러 사상을 존중하되 그 사상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될 일이다.

 

절 만(卍)자의 기원과 전파
선사시대부터 전세계서 사용…태양·창조주의 힘·생명 등 상징

 

 
  아미타불의 가슴에 선명하게 그려진 절 만(卍) 자.
아미타불의 가슴에 卍(만)자가 있다. 사찰에 가면 새 을(乙)자를 엇갈려놓은 듯한 卍자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글씨를 보면 사람들은 절을 연상한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사찰 표시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지도나 도로 표지판에 절을 표시할 때 卍자를 사용한다. 卍자는 부처님의 가슴이나 손발에도 새겨져 있다. 그런 卍를 우리는 속칭 절 '만'자라고 한다.

학계에서는 卍자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卍자가 인도에서 기원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卍자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 卍자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공간적으로 卍자는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세계에서 사용하던 기호이다. 卍은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인더스강 하류 지방 문명에 나타난다. 그 후 인도에서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모두에서 卍자를 길상문으로 사용했다. 서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卍자를 도자기에 그려 넣었다. 기원전 8세기께 그리스 도자기에도 卍자가 나타난다. 또한 卍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부 유럽, 서유럽, 북유럽과 기독교 이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도 나타난다.

 

 

 



 
  이라크 북부 사마라에서 출토된 기원전 5000년께의 도자기. 한 가운데 절 만(卍) 자의 형상이 또렷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된 卍자의 상징은 동일했을까? 일반적으로 아리안족은 卍자를 태양 및 천공신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태양원반과 함께 그렸다. 같은 인도-아리아인의 종교인 힌두교에서 卍은 생명, 운동, 행복, 행운을 나타낸다. 자이나교에서 卍은 천지의 창조주이며 신적인 힘을 나타낸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심오한 깨달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윤회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에서 卍은 '길상만덕(吉祥萬德)'의 모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지속, 생명의 무한한 소생을 나타낸다. 한국에서도 卍자는 부처님의 만덕(萬德)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卍은 풍요와 비의 상징이었다.

고대 근동의 셈족은 卍자를 태양의 부수물들과 함께 그리기도 했지만, 여신 아스타르테의 음부의 삼각 부분에도 그린 것으로 보아 여성의 생산력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켈트족에게 卍은 행운의 상징이었으며 벼락신과 함께 그렸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卍자는 길상문으로 태양, 창조주의 힘, 여성의 생산력, 비와 관련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卍자는 어디에서 발생했으며, 발생 당시의 상징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고고학적으로 卍자의 원형이 발견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卍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엔키(Enki) 신앙과 관련하여 발생했다. 대지의 신이자 지하에 있는 생명수를 관장하며 인류를 창조하기도 한 엔키는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에아(Ea)로 불렸다. 그런데 기원전 5000년께 만들어진 도자기의 바닥에 엔키(에아)와 관련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보면 卍자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나타나 있다. 卍자는 생명수에서 자아 내지는 영원한 생명 활동을 상징한다. 인도에서 卍자를 갠지스 강의 성수를 담는 항아리의 봉인으로서 사용하는 것에서 卍자의 원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신라금관에 숨어있는 남녀 조상신
3·4단 出자형 장식, 직계 조상과의 관계 표현

 
  그림1. 몽골 출루우트 강변의 암각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중간단계인 동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금관에 숨어 있는 상징은 어머니 조상과 아버지 조상, 그리고 생명의 나무이다. 오늘은 조금 색다른 각도에서 신라 금관을 이해해 보기로 한다. 신라인들은 유라시아의 샤머니즘을 한반도로 가져와 찬란한 금관으로 꽃피웠다. 금관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하지만 금관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완성된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신라에서였다.

영국의 금관은 화려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신라금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중국은 아예 금관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라금관이 장례용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금관은 영혼이 가야 할 상징세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여왕이 금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고증의 측면에서는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신라금관은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 가지고 있던 상징 코드를 모두 담아낸 걸작이다. 그 주요 구성 요소는 나무·사슴뿔·새·곡옥이다. 여기서 새는 죽은 이의 영혼을 생명의 원향인 생명나무로 실어 가는 역할을 한다. 나무는 생명나무로 흔히 우주수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 원형적 이미지는 생명의 모신(母神)나무이다. 그리고 사슴뿔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초목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남성 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동물 태아 모양을 하고 있는 곡옥은 생명의 씨앗을 상징한다.

 
  사진1. 기원전 200년께 이집트의 관(棺)에 그려진 그림.
필자는 신라금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출루우트 암각화에서 찾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북쪽으로 700㎞쯤 가면 출루우트 강이 있는데, 그곳에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있다(그림1). 최대 기원전 3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에서 우리는 신라금관을 만든 원형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소련 고고학자 노브고라도바의 설명을 보자.

'오른쪽 맨 위의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 이 그림에서 다리 사이에 보이는 커다란 물체는 막 태어난 아이를 나타낸다. 머리에 자란 것은 사슴뿔이다. 이 뿔 달린 그림에는 씨족의 두 조상- 어머니·여(女)조상 그리고 아버지·사슴 -인 씨족의 장(長)에 대한 보편적인 이데아가 표현되었다.'(그림1 오른쪽 상단, 머리에 큰 사슴뿔을 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

출루우트 암각화에서 우리는 신라금관의 조형 요소 중 두 가지, 즉 사슴뿔과 출(出)자형 나무 장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금관에 표현된 녹각형 장식, 즉 사슴뿔 장식은 부계 조상을 상징하며 여러 단으로 구성된 출(出)자형 장식은 모계 조상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1 왼쪽 하단, 뒤집어진 출자형 그림에 주목)

이렇게 주장하면 여러 대를 이어서 표현한 암각화의 도상과 여러 단으로 구성된 나무 장식이 어떻게 동일한 상징을 담고 있는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것은 후대로 오면서 어머니 조상들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도상이 어머니 여신 나무와 결합한 사실로 해소할 수 있다. 어머니 조상, 즉 모신(母神)이 생명의 나무로 표현된 예는 이집트의 관에서 볼 수 있다(사진1).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신라금관의 출자형 장식이 금관에 따라 왜 3단 혹은 4단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직계 조상(왕)으로부터 몇 대를 계승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첨성대는 천문관측대인가
선덕여왕 즉위 기념하고 권위 과시하는 상징물일 수도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첨성대(국보 제31호).
첨성대는 과연 그 이름대로 천문관측대일까? 첨성대는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등극하면서 이반하는 민심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상징물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하는 상황에서 여왕 불가론은 충분히 제기 될 수 있었다. 신라 승려 안홍이나 당나라 태종이 신라왕은 여왕이기에 이웃나라의 침범을 받는다고 말한 것도 당시로서는 당연한 상황인식일 수 있다.

선덕여왕 또한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장이 당에서 귀국하기 전에 만난 신인(神人)도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소…본국에 돌아가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할 것이오'라고 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이 가지고 온 이러한 논리를 수용하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한다.

기존 견해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첨성대의 상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주류학설은 과학계에서 주장하는 천문대설이다. 다음으로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圭表)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첨성대의 구조에 주목한다. 기단위에 돌로 쌓은 27단과 그 위에 놓인 정(井)자석 단을 합하면 28단이 되는데, 이는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 28수(宿)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로 쌓은 단을 한단 씩 세어서 27단으로 본다면 정(井)자 모양의 단도 2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단의 수가 29단이 된다.

또한 남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 위가 각각 1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12달과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셈한 28단에 기단 1단을 더하면 29가 나오는데 이는 한 달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사진에서 보듯이 몸체를 세는 방식으로 세면 기단도 2단이다. 따라서 첨성대는 기단석부터 돌을 한 단씩 세면 총 31단이 된다. 이 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란 설이 있다. 이 설은 첨성대를 제석천이 지배하는 33천의 도리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첨성대 자체의 31단에 하늘과 땅을 더하면 33이라는 수가 나온다는 것을 든다.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이다.

최근에는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즉위를 기념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첨성대는 우물을 형상화한 것인데, 그 우물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탄생한 우물로써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탄생한 우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의 중앙에 난 창문은 선덕여왕 자신이 석가족의 후예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는 창문이라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재임 중 조성한 두 가지 거대한 상징 구조물인 황룡사 9층탑과 첨성대는 당시 신라주민들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두 측면, 즉 불교와 토속 신앙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두 상징물을 통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 것이다. 즉, 첨성대는 성스러운 인물이 탄생한 우물을 형상화했으며, 그 우물형태의 첨성대에서 하늘의 뜻을 살피고자 했다.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토속신앙의 핵심은 지하 생명수에 관한 신앙과 칠성신앙이었다. 첨성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연결하는 제단성격의 구조물이다. 첨성대 주변이 당시에 비두(飛斗· 북두칠성)거리였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

단군신화에서 쫓겨난 호랑이 산신으로 부활
이주민 환웅과 요동·한반도 문화의 결합으로 탄생

 

 
  김천 직지사의 산신탱화 속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
오늘은 경인년(庚寅年)이 시작하는 날이다. 경인년은 호랑이 중에서도 백호(白虎)의 해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한해가 될 것 같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산신을 모시는데 산신의 사자로 호랑이가 등장한다. 호랑이 해를 맞아 호랑이가 어떻게 산신이 되었으며 한국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호랑이는 한민족의 기원신화인 단군신화에 처음 등장한다. 외부에서 이주해온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터를 잡고 신정을 펼칠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고 있었다. 이들 곰과 호랑이는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며 100일 기도를 하라고 한다. 곰은 3·7일(21일)을 잘 참아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환단고기'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사해 밖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민족의 초기 공동체인 단군조선에서 호랑이 부족은 소외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살던 조상들은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하며 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반도의 고대신앙에서 곰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호랑이가 차지하는 그것이 훨씬 크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공간적인 이동과 관련이 있다. 단군조선의 초기 무대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는 요하(遼河) 서쪽으로 추정된다. 그곳은 최근 주목 받고 있는 홍산문화 지역이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곰 턱뼈, 흙으로 만든 곰 아래턱, 옥으로 만든 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옥으로 만든 호랑이 장식도 출토되었다. 단군신화의 무대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옥호랑이 상
둘은 호랑이를 숭배한 사람들이 시베리아 동부지역과 그 남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 지역인 요서를 기점으로 해서 동쪽 지역 사람들이 호랑이를 많이 숭배했다. 중국문헌인 '산해경' 대황동경에는 '동쪽에 있는 군자국 사람들은 범이나 호랑이를 부린다(使虎豹)'고 했다. 또한 '삼국지'의 '위지동이전' 예(濊)전에는 '호랑이에게 제를 올리고 신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는 요동지역과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숭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국의 산신도에 보이는 산신의 이미지가 만주 에벤키족에 남아 있다. 그들은 숲의 혼령을 모신다. 이 숲의 혼령은 사냥에 행운을 주는 존재이다. 힝간 에벤키족은 이 혼령을 창백한 얼굴빛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 수염 및 무척 긴 속눈썹을 가진 거대한 노인으로 상상했다. 그는 긴 다리에 개를 타고 다니는데, 바라라히족신화에서는 그가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

그렇다면 한국의 호랑이 산신신앙의 문화사적 배경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단군이 호랑이와 직접 관련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호랑이 산신은 두 가지 문화사적 흐름의 결합일 것이다. 하나는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독자적인 호랑이 신앙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요서지역에서 태동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단군조선의 산신신앙이다. 이들이 결합하여 호랑이와 산신이 결합한 호랑이 산신신앙을 낳았다. 즉 고조선계의 산신신앙과 한반도에 자생하던 호랑이 신앙이 결합하여 한국의 호랑이 산신이 탄생한 것이다.

신라왕도 편두를 했을까?
목숨까지 위협한 두개골 성형… 종교적 이유로 행해졌을 것

 

 
  사진1) 중앙아메리카에서 출토된 마야 문명의 모자상. 아기가 편두를 하고 있다.
'삼국지' 한전에 보면,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왜 진한 사람들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기이한 풍습인 편두를 했을까? 편두라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인위적으로 두상을 조작하여 위쪽을 좁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어린이의 두개골이 연약하다고는 하나 돌로 머리를 눌러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사진1 참고).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어린이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편두를 만드는 과정에 아이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발굴된 4세기 때의 편두 중 5~6세의 어린이의 두개골은 후두부가 열려 있었다. 이는 앞이마를 누른 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정수리에서 뒤통수에 이르는 이음새가 열려 사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의 위험이 따름에도 아이의 두상을 강제로 변형시키려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두개골 성형을 한 셈인데, 그들은 편두형의 머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당시의 관점에서는 편두를 한 머리가 아름답게 보였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단순히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 편두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용보다 더 중요한 종교적 이유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해답을 예안리에서 출토된 여성 인골에서 찾을 수 있다. 예안리에서 출토된 편두는 여성 인골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며, 여성이라고 다 편두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고고학계에서는 일종의 무당과 같은 특수 신분의 여성들만이 편두를 했을 것으로 본다.

예안리에서는 여성의 편두만 나왔지만 편두를 여성들만 했던 것은 아니다. 경주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사진2)을 자세히 보자. 이 인물의 모습은 편두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금령총이 6세기에 조성된 것이니까 적어도 당시까지는 신라인들이 편두에 관해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2) 경주 금령총에서 나온 신라 기마인물상. 편두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초기의 신라왕들도 편두를 했을까? 이종호는 신라의 왕들도 편두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비문'에 '편두거매금(遍頭居寐錦)'이라는 글귀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 비문에 나오는 편두는 두상을 납작하게 하는 편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삭발한 머리를 말한다. 비문의 편두(遍頭)는 '삼국지' 한조의 편두( ?頭)와 글자도 다르다.

비문의 해당 구절은 "게다가 성(姓)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매금(왕)과 같은 존귀한 분이 삭발하기도 하였다(加以姓參釋種 遍削也 頭居寐錦)"라고 해석 하여야 한다. 이는 신분과 계층에 구애됨이 없이 많은 백성이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왕까지도 머리를 깎은 분이 있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실제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삭발했다.

이와 같이 이종호는 삭발한다는 의미를 가진 편두를 머리를 변형시키는 편두로 잘못 이해했다. 따라서 그가 든 증거로는 신라왕이 편두를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 4세기께까지 편두풍습이 있었다는 것과 신라인들이 6세기께까지 편두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왕들은 고깔형 관모로 편두가 가지고 있었던 상징을 흡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는 진왕 후손에게 보낸 백제의 선물
마한지역의 '칠성신앙' 담겨있는 神物, 칠지도
마한 진왕의 후예인 왜국 지배자들에게 보여준 백제측의 친선 노력

 

 
한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 첨예하게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유물로 칠지도(七枝刀·사진)가 있다.

칠지도는 1874년 일본 나라 현 텐리시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발견되었다. 그 칼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명문과 함께 칼을 만든 내력이 적혀있었다. 일본 쪽에서는 그것을 백제왕이 만들어 일본왕에게 헌상했다고 하고, 한국 측에서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칠지도의 제작 동기를 색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이른바 '헌상설'은 호시노 히사시(星野恒)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신공황후 49년(369)년에 왜가 가야의 일곱 나라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었더니, 3년 후에 사례하는 뜻에서 백제가 사신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광복 후 북한의 학자 김석형은 칠지도는 4~5세기에 백제가 강성했을 때 백제왕이 황제의 입장에서 일본에 있던 백제계 분국(分國)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하사설'이다.

칠지도는 '신공황후 52년 조'에 보이는 칠자경(七子鏡)과 연계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 대체로 수긍하듯이 근초고왕대(346~375)의 백제는 최전성기였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을뿐 아니라 남으로는 가야지역과 마한 소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갔다. 헌상설의 배경이 된 역사적 상황은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왜국의 지배자들은 백제 지역에 있던 마한 월지국의 진왕(辰王)과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도 '일본을 정복한 기마 정복민족의 지도자는 3세기 중 삼한을 지배한 진왕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그 후의 역사기록에서 끊임없이 자신들이 마치 삼한에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일본서기'는 오진(應神)왕 3년(392)에 왜의 주도로 백제 아신왕을 즉위시켰다고 하며, 유랴쿠(雄略)왕 21년(476)에는 구마나리(웅천 또는 공주)를 문주왕에게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고도 한다.

또한 '송서' 왜인전을 보면 왜왕이 한반도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제나라(479~502) 황제는 왜왕(倭王)에게 '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군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하기도 한다. 당시 왜왕들이 진왕의 후예였다는 것은 칠지도와 칠자경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연제한 글들에서 여러 번 주장했듯이 고조선계로 한반도에 선주했던 집단들은 칠성신앙을 주 신앙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삼한의 주도세력은 마한 월지국의 진왕이었다. 이 진왕세력의 주도신앙은 칠성신앙이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바로 이 칠성신앙과 관련하여 제작한 신기(神器)였다.

이도학은 칠지도가 종교적 의기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충분이 일리 있는 주장이다. 칠자경(七子鏡)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七子'는 칠성의 아들임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칠지도는 당시 왜 왕실의 종교적 정서, 즉 자신들은 칠성(북극성)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칠지도는 백제에서 왜 왕실과 선린관계를 의식하고 만들어 보낸 의기로 볼 수 있다. 일본은 7세기 초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하는데 이 또한 '천황대제는 북극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칠층 피라미드 장군총의 비밀
3·7 數 관념 구조화…한민족 정신문화 투영

 
  1930년대 장군총의 모습.
고대사회에서 수(數)는 세계를 이해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은 처음부터 3과 7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3·7관념은 민족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여러 흔적을 남겼다. 고구려의 문화유산이자 세계의 문화유산인 장군총도 바로 3·7관념을 반영하여 축조했다. 장군총이 갖는 상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진에서 보듯 장군총의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개씩의 계단을 가진 7층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군신화에서부터 등장하는 3·7 개념을 구조화한 것이다. 단군신화에 보면 웅녀는 환웅이 준 마늘 20개와 쑥 한 단을 먹고 굴에서 3·7일(21일)만에 사람이 되어 소원을 성취한다. 그런데 장군총의 구조도 3·7구조, 21계단으로 꾸몄다. 이로 보아 장군총은 단군 이래의 정신문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동안 금줄을 달아서 외인의 출입을 금했다든지,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3·7자 주문(呪文) 같은 것은 한민족이 이어온 3·7문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7일 동안 금줄을 다는 것은 이 기간이 무사히 지나야 아이가 비로소 제대로 사람 꼴을 갖춘다고 하는 측면에서 일종의 변화의 완성과 관계가 있다. 동학의 주문도 그것을 암송하여 깨달음을 얻어서 변화를 완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웅녀가 곰에서 사람으로 변화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도 3·7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경덕왕 시기의 진표율사는 금산수에 있는 순제법사의 명으로 경덕왕 19년에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서 미륵상 앞에서 3년 동안 계법을 구했으나 수기(受記)를 받지 못한다. 그러자 그는 다시 발원한 후 3·7일간 수행하였더니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릿대를 준다. 다시 수행한지 3·7일 만에 천안통을 얻어서 도솔천 무리들이 오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3과 7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먼저 3수는 세계문화사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삼계설, 즉 천상과 지상과 지하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7은 하늘의 중심에 있는 별인 칠성과 관련된 수이다.

우리 민속에서 칠성은 생명을 주관하는 별이다. 무덤에 칠성판을 놓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칠성신앙의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신석기 문화와 관련 있을 개연성이 높다. 7이라는 숫자는 각종 수메르 신화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성수(聖數)로 사용된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도 하늘을 중층 구조로 보는 사유 체계 특히 7층으로 구별하는 관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때 하늘을 7층으로 구분하는 사유도 북두칠성의 일곱 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군총은 바로 유라시아 문명사에 보이는 세계산 혹은 세계수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즉 3·7구조로 된 장군총은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수직으로 잇고 있으며, 그 천상의 정점에 북두칠성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무덤을 통해서 피장자는 세계의 중심 통로를 통해 생명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북쪽에 신전을 만들고 파라오의 조각상을 만들어 북쪽으로 세우고 그의 눈이 북극성을 향하도록 했다. 이는 북극성에 파라오의 형제가 머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방의 파라오인 고구려 왕도 북극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머리에 나뭇가지를 달고 청동기에 나타난 사람
그는 풍요로운 대지·생명을 주관한 木神

 
  ① 대전서 출토된 청동 의례용품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으로 만든 의례용품(사진1)에서 우리는 조상들의 농업생산에 관한 의식을 읽을 수 있다.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종자가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어떤 원리에 의해서 자라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청동기의 한쪽 면에는 갈라진 나뭇가지에 새가 두 마리 앉아 있고, 다른 쪽에는 벌거벗은 남자가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사진2).

여기서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 새는 우리 민속의 솟대를 표현한 것이다. 솟대의 발생은 우주수(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와 하늘새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우주수는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삼계, 즉 하늘·지상·지하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하늘새 또한 이 삼계를 넘나드는 신령한 짐승이다. 이 하늘새는 족장이나 샤먼과 천신을 연결해주는 사자(使者)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들이 천계로 오를 때나 지상으로 하강할 때 운반체로서도 기능한다.

 

 



 
  ② 밭가는 남자
일반적으로 청동의례용품에 그려진 이 새는 파종의 시기를 알리는 전령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새는 농경에 필요한 종자가 어떻게 전래됐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날아온 새이기도 하다. 농경이 확산되면서 씨앗의 전래 방법이 설명돼야 했는데, 이때 새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씨앗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조로아스터교의 성전(聖典)인 '아베스타' 송가에 나오는 세상의 모든 씨를 모은 '신령스런 나무(聖樹)'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나무에는 새가 앉아 있는데, 나무에 앉아 있는 새는 그 가지를 벗기거나 떨어진 씨를 모아 하늘로 운반한다. 그러면 그 씨는 비와 함께 땅에 떨어져 새로운 식물이 돼 자라난다.

그렇다면 벌거벗고 쟁기를 가는 남자는 어떤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는 신단수(神檀樹) 신의 아들이다. 인물의 머리를 자세히 보자. 뒤통수에서 뒤로 길게 두 가닥이 뻗어있다. 이 두 가닥에 대해 학계는 아직 통일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절풍으로 보는 사람, 단순히 두 가닥의 긴 머리장식으로 보는 사람, 깃털로 보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나뭇가지로 보고자 한다.

 

 

 

 



 
  ③ 머리에 뿔 달린 인물
청동기의 부분 사진(사진3)을 자세히 보면 가지가 하나로 나와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있다. 이를 나뭇가지로 보는 이유는, 남자인 이 인물은 생명을 주관하는 인물로 농경의례에서 대지의 풍요를 기원하며 밭을 가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곡물 혹은 나무의 생명력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그가 봄에 밭을 가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대지에 생명의 에너지가 뿌려진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밭을 갈고 있다. 즉 그는 목신(木神)이요 부활의 신이다. 그래서 목신의 상징으로 머리에 나뭇가지가 자라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보충해줄 자료가 있다. 내몽골 음산암각화에는 머리에 나뭇가지가 솟은 신인(神人)이 표현되어 있다(사진2). 음산 지역은 한반도로 문화가 전파되는 길목이다. 최근에는 경주시 석장동 암각화와 내몽골 암각화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대전 괴정동에서 머리에 나무가 자라는 신인(神人)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기가 출현하게 된 배경도 음산 지역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래암 암각화는 생명이 출입하는 곳
영혼의 안내자, 오리와 말

 

 
  ①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나온 말모양 토기
고대 유라시아 샤머니즘의 세계에서는 영혼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의 주인공 대부분도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들은 무었을 타고 내려왔을까? 말과 오리를 타고 내려온 조상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4세기부터 6세기에 조성된 신라인의 무덤과 암각화에는 조상들의 생명관이 담겨 있다. 당시 신라 무덤에서는 동물모양 토기가 발견되는데 그 대부분이 말(사진1)과 오리이다. 오리형 토기는 대구에서 함안에 이르는 낙동강 하류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오리를 신성한 새로 여겼음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오리를 신성한 새로 여긴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오리가 물새로서 벼농사와 관련된 물을 몰고 오는 새라는 점이다. 오리가 물새로 인식된 것은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구석기시대에 맘모스의 뼈로 오리를 조각한 것이 있다. 이를 천둥새라 하는데, 그것은 구석기인들이 오리가 비를 몰고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리를 영혼의 운반체(運搬體)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은 오리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오갔던 것이다.

 
  ② 속리산 법주사 추래암의 암각화
시베리아 대평원에 있는 사하공화국의 야쿠트(Yakut)족도 오리를 운반체로 생각한다. 그들의 의례장소에는 커다란 신수(神樹)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긴 소나무 장대가 있는데, 그 위에 물오리 아홉 마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말모양 토기는 어떤가? 그것은 박혁거세 탄생신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태어났다.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는 말은 유라시아 유목민족의 백마 숭배와 맥을 같이 한다. 신라 김씨 왕족의 조상인 김일제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사카족의 암각화에도 말이 자손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 있다. 중국 학자 왕빙화는 그 암각화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곳에는 '말을 통한 자손 기원 그림'이 있다. 사람은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고 그림 속 9명의 여성이 나체로 마주보고 있는 말 두 마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한 명의 나체인 남자를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마당에 있는 추래암에도 말을 통해 자손을 얻는다는 생각을 담은 암각화(사진2)가 있다. 이 암각화의 이야기는 위쪽과 아래쪽을 나누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위쪽 가장 왼쪽의 인물이 오른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제의 옆에는 말이 없다. 이로 보아 이 사제는 하늘을 향해 자신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즉 하늘에서 말이 새로운 생명을 싣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그림에는 말과 사제가 함께 보인다. 이 그림은 천상에서 내려온 말이 사제에게 도착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 정확하지 않은 그림 다음의 것을 보면, 사제 옆에 말이 공손히 앉아 있고 사제는 동자를 도포자락으로 받아들고 있다. 천상에서 온 새 생명일 것이다. 반대로 아래 그림 세 폭은 영혼을 하늘로 보내거나 동자를 실어다 주고 천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추래암 암각화는 기자신앙(祈子信仰)과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의식을 표현한 암각화임을 알 수 있다.

황금보검에 보이는 삼태극의 비밀
'세개의 태양' 기원은 홍산문화

 

 
  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황금장식보검(사진 위·가운데는 삼태극 부분)과 중국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곰머리 세 구멍' 모양의 옥기.
요즘 경주국립박물관에서는 '황금보검을 해부하다'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6세기 초 신라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1973년 대릉원 동쪽의 계림로를 새로 내는 공사 중에 많은 신라 무덤이 노출됐다. 이 가운데 계림로 14호묘라고 이름 붙여진 무덤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보검이 출토됐다. 이 황금보검은 서쪽의 먼 나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황금보검은 어디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일까?

보검의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다. 먼저 보검장식에 주목해보자. 보검의 황금판에 박혀있는 붉은색을 띤 보석을 지금까지는 마노(瑪瑙)로 알고 있었는데 과학적인 분석을 한 결과 석류석(石榴石)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보로보 무덤에서 나온 검 장식편에도 석류석이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석류석과 유리를 금판에 박아 장식한 유물은 흑해 북동부 아조프해 연안의 타간로크에서도 발견됐다.

다음으로 황금보검의 형식에 주목해보자. 황금보검과 비슷한 보검은 앞에서 말한 보로보 무덤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중국 신장성 키질 천불동 69호 석굴벽화에 비슷한 검을 찬 인물화가 있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에도 유사한 모양의 단검을 찬 사람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 유물은 제작기법이나 비슷한 유물의 분포로 보아 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작지를 좀 더 추정해볼 수는 있다.

황금보검을 누가 만들었을까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보검에 장식된 세 개의 삼태극무늬이다. 위에서 말한 황금보검과 유사한 검들에는 삼태극 도안이 없다. 보검의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기법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장식보검에 삼태극무늬를 디자인한 장인은 그 디자인에 매우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삼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 한다.

그렇다면 황금보검의 제작자로 켈트인을 지목해 볼 수 있다. 켈트인들이 태극무늬를 사용한 고고학적 흔적은 기원전 2세기께 유물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장식보검을 만든 켈트 장인은 어디에 살았을까? 켈트인의 본거지는 중부 유럽이다. 이들 중 동으로 이주하여 흑해 서쪽의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발 앞서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로마화된 켈트인이었다.

이들 켈트족에게 삼태극은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태양을 상징했다. 동양에서 삼태극은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나 옥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삼태극의 기원은 그보다도 훨씬 빠른 신석기시대의 홍산문화로 볼 수 있다. 필자는 홍산문화 옥기에 보이는 삼공기가 바로 장식보검에 보이는 세 개 태극의 원형이라고 본다. 홍산인들이 만든 삼공기는 바로 세 개의 태양을 도상화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황금보검은 흑해 북동부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장인이 제작한 것이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와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발생한 세 개의 태양문이 어떻게 서쪽으로 전파돼 켈트인들이 사용하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통도사 가람각에 대한 의혹
가람신이 日칠복신 중 하나?

 

 
  통도사 가람각의 목조각상.
불교의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로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가 있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어 법보(法寶)사찰로, 송광사는 보조국사를 비롯한 열여섯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僧寶)사찰로 불린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보(佛寶)사찰로 불린다. 불보사찰로 한국정신문화의 성지인 이곳 통도사에 의혹이 가는 전각(殿閣)이 있다. 바로 가람각(伽藍閣)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셔진 진신사리는 일본인들의 침탈에 의해 여러 번 수난을 겪는다. 첫 번째 침탈은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고려말이다. 우왕 3년(1377년)에 왜구가 들어와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당시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 스님은 사리를 가지고 산문을 빠져 나와야만 했다. 1379년에는 왜구가 사리를 침탈하려고 하자 월송은 사리를 가지고 나와 서울까지 피신했다.

두 번째 침탈은 임진왜란 때이다. 왜란 중 왜구는 금강계단을 파괴하고 사리를 탈취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왜구에게 잡혀있던 백옥(白玉) 거사가 사리를 가지고 탈출함으로써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에 사명대사는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두 개의 함에 넣어 금강산의 서산대사에게 보낸다. 이 중 하나의 함에 들어있던 사리는 갈반사(현 태백산 정암사로 추정)에 모셔지고, 다른 하나의 함에 모셔졌던 사리는 되돌아와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셔져 현재에 이른다.

일본과 이러한 인연을 가진 통도사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각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각이 모셔진 전각이 있다. 바로 가람각이다. 가람각 하면 가람 전체를 수호한다는 의미도 있는데, 그러한 전각에 일본풍의 목조각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럽다.

 

 

 

 

 



 
  일본 신사에 있는 대흑천.
가람각은 천왕문의 왼편에 있으며, 4면 단칸의 작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1706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그후 건물은 원명 스님에 의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건물에 모셔진 가람신은 1706년 이후에 모셔졌을 것이다. 그런데 가람신이 바로 일본의 칠복신의 하나라는데 의혹의 눈길이 보내진다.

먼저 가람신과 일본의 칠복신 사진을 비교해 보자.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탱화에 그려진 가람신 앞에 모셔진 조각상은 분명 칠복신의 하나인 대흑천(大黑天)이다. 칠복신은 일본사람들이 복을 가져온다고 믿는 일곱 신을 말한다. 그 중 대흑천은 인도의 힌두교 시바 신과 일본 고대의 오쿠니누시(大國主)가 습합된 신으로 식복과 재복을 관장한다.

이들 칠복신은 인도의 힌두교, 중국의 불교, 도교, 일본의 토착신앙이 섞여서 형성된 것으로 무로마치 시대(1336~1573) 말기부터 성행했다. 따라서 통도사 가람각에 모셔진 칠복신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반입된 것이 별 생각 없이 가람각에 모셔졌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전통사찰 어디에서도 대흑천을 모시지 않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통도사 대흑천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반입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진신사리를 탈취하려 했던 일본인이 만든 대흑천이 가람각에 앉아서 통도사 가람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신앙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통도사 측이나 일반인 모두 모르고 있는 듯하다. 좀 더 면밀한 연구와 그에 따른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고깔모자를 쓴 단군을 밝힌다
무신도에 등장하는 고깔 쓴 '제석'은 '환인'의 다른 이름

 

 
  사진 1
상식적인 대한민국 사람들이 한민족의 원시조라고 생각하는 단군은 어쩌면 고깔모자를 썼을지 모른다. 이런 주장을 하면 사람들은 요즘말로 '생뚱맞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생뚱맞은 주장이 아니다. 단군시대의 문화는 유교문화에 의해서 무시되었고 불교문화에는 습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단군시대의 종교문화는 우리에게 낯설다.

세계 종교문화사에 나타나는 고깔모자의 발생과 확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고깔모자를 쓴 단군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먼저 우리문화에 나타난 단서를 추적해보자. 무신도를 보면 제석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이를 단군신화와 연결해 보자. 단군신화에서 하늘을 주재하는 상제를 환인이라 하는데 그 환인이 곧 제석이다. 제석이 고깔모자를 썼다고 하는 것은 단군신화의 주인공 집단이 고깔모자를 썼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조선시대에 제작된 무속12거리도는 부정풀이에서부터 산바라기굿, 제석굿, 대거리, 대감놀이, 별상굿, 구능굿, 성주풀이, 호구, 창부, 말명, 뒷전 등 총 12거리에 이르는 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각 거리마다 신령의 복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유독 제석만 흰옷을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사진1). 무속12거리도에 흰옷에 고깔모자를 쓰고 나타난 제석은 어쩌면 환웅족의 수장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할 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는 무속에서 수명과 무사태평을 관장하는 신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무속에서 보통 수명을 담당하는 것은 칠성이다. 사실 칠성이 수명을 관장한다는 말이나 제석이 그것을 관장한다는 말이나 동일하다. 신화구조에서 환인제석이 머무는 곳이 북극성이고 칠성은 상제의 탈것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진 2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속화를 보면 칠성과 삼불제석만 고깔모자를 쓴다. 왜 이들에게만 고깔을 씌우는 전통이 전수되었을까? 그것은 고깔모자를 쓴 그들이 한민족 원형 문화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문화사에 고깔모자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지역은 이란 서남부의 수시아나 지역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수시아나에서 발굴된 인장에 고깔모자를 쓴 인물이 보인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유적지에서 나온 뾰족 삼각형 머리를 한 아시아계 신인상(神人像)에서도 고깔의 모습을 볼 수 있다(사진2). 이 인물의 머리가 고깔형으로 변형된 것은 실재의 머리에 고깔모자가 갖는 상징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바로 우리 조상인 진한인들이 했다는 편두의 원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고깔모자를 쓰거나 편두를 했을까? 그것은 자신들의 머리에 광명신이 내려왔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 고깔은 뾰족 삼각형을 나타내는 도상이며 엘리아데가 알타이 샤먼의 예에서 지적한 것처럼, 뱀의 도상이다. 그것이 뱀의 도상임은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기원전 9세기경에 만든 이집트 유물을 보면 코브라의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워놓았다.

청나라 때 학자 방식제(方式濟)는 그의 '용사기략(龍沙紀略)'에서 샤먼을 숭배하는 것을 기술하며 "신이 내린 것을 샤먼이라 하는데 모자가 뾰족하고 길다"고 했다. 동북아시아 선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환웅의 무리는 바로 이란 서남부 평원의 수시아나에서 천산을 넘어 중국 중원의 앙소문화를 일구고 동북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 필자의 가설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설의 입장에서도 환웅을 계승한 단군은 고깔모자를 썼을 것으로 판단된다.

꽃에서 태어난 화랑은 태모신의 아들
생명의 어머니 源花
화랑 이전에 존재한 여성 '원화… '근원적인 꽃' 우주의 자궁 상징

 

 
  〈사진1〉 고구려 고분인 오회분 4호묘에 그려진 벽화 연화화생도.
화랑을 이해하지 않고는 신라의 정신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랑제도에 신라인들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아직 화랑제도의 뿌리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오늘은 '원화(源花)'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통해서 화랑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보자.

알다시피 화랑에 선행하여 여성 '원화'가 존재했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비로소 원화를 받들게 하였다. 그런데 선택된 두 원화가 서로 시기하여 하나가 다른 쪽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여성이 아닌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여 받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분명 화랑 이전에 여성 원화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원화(源花)'라고 했을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원화란 '근원적인 꽃'이란 의미이다. 많은 학자들이 화랑은 우리 고유의 '무(巫)'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원화는 여자 무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제 2대 남해차차웅이 무당이었음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세운 박혁거세 묘의 제사를 누이동생인 아로가 주관한 것으로 보아 그녀도 무당이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만 보았을 때 '아로'가 바로 최초의 원화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바로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녀는 시조와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2〉 경주 석장동 암각화에 보이는 원형의 꽃들.
그렇다면 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여성을 원화라고 했을까? 원화는 바로 생명의 꽃을 의미한다. 꽃과 생명을 연관시키는 사고는 무속에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의 무가(巫歌) '이공본풀이'를 보면, 주인공이 여기저기 버려진 머리와 몸뚱이 무릎 뼈를 모아 도환생꽃으로 어머니를 환생시킨다. 또 다른 제주도 무가인 '세경본풀이'의 주인공 자청비도 서천꽃밭에서 환생꽃을 가져다가 사내들을 소생시킨다.

꽃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생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표현되어 있다. 바로 연화화생도(蓮花化生圖)이다(사진1). 이러한 연화화생 관념은 이집트에서 발생해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불교와 함께 동진하여 남북조를 거쳐 고구려 백제로 전파됐다.

연꽃은 일반적으로 재생과 불멸을 상징하지만, 가장 큰 의미는 '모든 존재가 태어났다가 사라져 가는' 우주의 자궁을 상징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화는 태모(胎母)신의 딸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원화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화화생 관념은 유입된 시기로 보아 신라의 원화와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초기신라의 원화 이미지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화를 표현한 암각화가 경주에 있다. 석장동 암각화가 그것이다(사진2). 사진에서 보듯 암각화에는 꽃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생명의 꽃을 그린 것이다. 모든 생명을 낳고, 죽은 자를 재생시키는 생명의 꽃이 생명수가 흐르는 형산강 절벽에 그려져 있다. 바로 이 꽃이 '원화(源花)'가 아닐까? 원화는 바로 생명의 어머니였던 셈이다. 즉 모든 낭도들의 누이이자 어머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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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三流人生 원문보기 글쓴이: 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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