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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는 유라시아 초원을 매개로 동·서가 끊임없이 교류하고 이동하면서 민족과 문화가 융합되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됐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전파설'을 강조하는데, 상고시대는 주민의 이동을 수반한 문화 전파가 많았다. 상고시대를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현재 지구에는 65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각 지역이 국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상고시대에는 국경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며, 인구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적었다. 가령 기원전 3500년경의 중국 요서지역의 인구는 5만여 명에 불과했으며, 한나라 때인 기원 전후의 만주의 총 인구는 100명 정도였다.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역사를 연구하면, 상고사의 경우 역사의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상고시대는 끊임없이 민족과 문화가 교류하고 흐르던 시대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주민과 문화가 이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당시의 여건 때문이다.
일본이 고립되어 살던 시절인 조몬시대(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일본 열도 전체 인구가 26만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 열도에 이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주민이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야요이 시대(기원전 4~기원후 3세기)를 개척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인문·지리적 조건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열린 마음으로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면 의외로 한민족의 그것이 유라시아 전체 역사나 문화와 연결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나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민족을 형성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한민족은 단군 이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민족을 구성한 초기의 주민들이 여러 종족일 것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필자도 오랜 상고사 연구를 통해서 한민족을 구성한 엘리트 종족이 여럿임을 밝힌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종족으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세력인 공공족이 있으며, 그 공공족과 연합하여 단군시대를 연 후기 홍산문화의 주인공인 맥족이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 백제의 시조와 관련된 부여족인 프리기아인들이 있고, 신라 김 씨왕족과 관련된 사카족도 있다. 이들 중 몇몇 종족은 천산 너머에서 동으로 이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으로 이동하면서 현지인과 혼혈종족을 이루며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들 이외에 한민족을 구성한 세력으로 주목해야 될 종족은 선홍산문화의 주인공이었다가 남으로 이동했던 동이족, 그리고 한반도에 선주해 있던 고아시아족이 있다.
이러한 각각의 종족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후에야 우리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한민족의 종교문화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형국을 하고 있다. 시루떡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한 덩어리의 떡임에는 틀림없으나, 떡시루 속에 담겨진 한층 한층의 떡은 다른 시기 다른 주민들이 쌓아놓은 떡이다. 특히 고대의 문화유산은 대부분 그들의 우주생명관과 관련되어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각 시대의 엘리트 주민들이 누구인가와 그들의 우주생명관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알아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연재할 글에서 한민족을 구성했던 각각의 엘리트 종족의 시각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문화유산을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특히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많은 문화유산이다. 상고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입장에서 '땅에 새겨 놓은 글(地文)'이야 말로 귀중한 자료이다. 그것들은 한민족 공동체를 이끌던 초기 주민들의 신앙 표지(標識)이다. 그 표지가 어느 시대 어떤 엘리트 주민들이 그들의 백성들을 이끌기 위한 상징들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단군시대부터 삼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 형성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풀어갈 것이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
이주한 공공족과 홍산문화 웅녀족이 만나 단군신화 탄생, 일부 학자 곰 대신 호랑이 주장 곰 토템은 일본까지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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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황강태가 소장하고 있는 웅녀상. 어미곰이 아기곰을 업고 있다.
필자의 의문은 이들 세 신이 언제 어떤 집단에 의해 모셔지게 되었는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답은 아직 정확히 설명된 적이 없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상고시대 한민족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들의 우주관과 생사관이 반영된 종교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신들 말고도 우리에게 오랫동안 모셔졌을 법한 대상신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곰이다. 한민족 공동체의 영원한 어머니인 웅녀가 믿었던 곰신앙은 왜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까? 한국인이라면 단군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단군신화는 외부에서 이주해온 환웅이라는 세력과 현지의 곰토템 부족이 만나 단군을 탄생시켰으며, 그것이 한민족의 모태라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는 환웅 세력을 요임금 시절 중원에서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는 밀운현 공공성으로 쫓겨났던 공공족으로 파악했다. 이들이 연산을 넘어 홍산문화 지역의 웅녀족과 만나 단군신화의 역사적 배경을 만들었다.
홍산문화의 제단유적인 우하량 유적 발굴에 참여했고 현재 중국고고학회 상무이사인 곽대순은 제단유적에서 나온 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곰룡(熊龍)으로 파악했다. 그는 옛 기록에 황제를 '유웅 씨'라고 한 것과 연결하여 그 곰룡을 황제와 결부시켰다. 또한 우하량 홍산문화 적석총 유지에서도 여러 건의 곰뼈(熊骨)가 발견됐다. 이는 홍산문화인들이 곰을 제사한 습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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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발견된 곰 형상 사람 얼굴. | |
이와 같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홍산문화 지역은 단군신화가 발생할 수 있는 토양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학자들은 그곳에서 나온 곰을 황제족과 연결한다. 그러나 기존 정설에 따르면 황제족은 섬서성의 황토고원 지대에서 출발하여 산서와 하북성 일대로 이동했다. 즉 황제족의 원주지는 홍산문화지역이 아니었다. 이들 곰 토템 부족은 '맥(貊)'부족을 가리킨다. '후한서'에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돼 있다.
아무튼 필자의 가설대로 중원 앙소문화의 주인공인 공공족이 밀운지역을 거쳐 이곳 홍산문화 지역으로 넘어와 곰을 제사지내는 웅녀족과 만나 단군조선을 탄생시켰다면 곰을 숭배하는 흔적이 이후 한민족에게 전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흔적은 너무나 미미하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혹 단군의 어머니가 곰이 아니고 호랑이였을지 모른다고까지 한다.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조선시대 승려 설암(雪巖 1651~1706)이 지은 기행문인 '묘향산지'의 '단군신화'다. 그 내용을 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단수 아래 살았다. 환웅이 하루는 백호(白虎)와 교통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다. 그가 요임금과 같은 해에 나라를 세워 우리 동방의 군장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기존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를 바꾸어 놓았다. 왜 그랬을까? 정말 조선시대까지 그런 전설이 전해져 왔을까? 아니면 처음에 제시한 대로 우리 고유의 신으로 산신은 존재하는데 곰신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곰을 호랑이로 바꾼 것일까?
그러나 단군신화에 등장했던 곰은 서해안을 타고, 혹은 진한지역을 거쳐 일본 규슈로 들어간 흔적이 분명히 보인다. 서해안을 타고 내려왔던 흔적은 공주의 '곰나루(熊津)'전설에 보이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마나리'는 백제의 '곰나루'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 이 지역으로 내려온 곰 숭배 사상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말한다. 또한 진한 지역으로 들어왔던 곰신앙은 수인천황 3년에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가지고 간 귀중품인 웅신리(熊神籬)로 알 수 있다. 이 웅신리는 곰을 신으로 모시는 휴대용 신전이다. 다음 회에는 곰신앙이 한반도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