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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나의 처 외삼촌께서 설악산 기도 순례를 마치고 남기신 기행문을 옮긴 것입니다”
(1) 설악동(雪岳洞) 까지
김해읍 외동 수인사(修仁寺)가 주최하는 설악산 기도순례단은 수인사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충무용화사 일각스님과 해인사 도견스님 밖에 남녀승려와 신도 및 처사를 망라하여 40여명의 대단원이다
처사로 이번 순례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신도인 큰 누이동생과 과분한 도움이 있다.
1977년 10월 11일 아침 7시에 동래에서 고속버스로 출발한다 모두들 상냥하고 밝은 표정이다 출발하면서 반야심경을 봉송하는가 하면 관세음보살을 봉송한다. 이번 순례가 관광만이 목적이 아니고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내지는 사회의 정화와 전 우주의 불자로 하여금 자비의 보시로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기도행사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여로의 긴장과 피로를 들기 위해 가끔 음악의 공양이 진행되고 있어 화기애애한 친목을 느낀다.
경산휴게소에서 아침공양이 시작된다 아늑한 풍경을 바라보는 버스 안의 식사는 꽤 맛있다
추풍령(秋風嶺)
버스가 추풍령을 지나간다 구름도 쉬어 가는 추풍령고개는 그 옛날 인간도 희소하였으니 아픈다리 타는 목에 죽장망헤로 맥없이 허느적 거리던 나그네의 모습이 뜨 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주파하는 고속의 여행에 고도의 명명을 찬양한다
금강(錦江)
버스가 금강휴게소에 멈춰 잠깐 휴식을 취한다 푸른 비단폭 같은 강물에 단풍으로 수놓은 건너편 산 그림자가 거꾸러져 있다 산자수명(山紫水明)에 쇄락(灑落)한 청경(晴景)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금강은 출렁이는 여울에 은파를 싫고 옥천을 떠나 부여로 기울어진다 저 백제의 고도 백마강 반월성에 낙화의 애사를 상기케 한다
천안(天安)삼거리
천안 삼거리휴게소에서 점심공양이 시작된다 푸른 잔디 나무그늘에서 도시락을 펼치고 아담한 산세에 청초한 정서를 느끼는가하면 버스가 꼬불아져 돌아가는 삼거리는 노래에 엮어진 능수버들에 흥겨워 어깨가 우쭐거린다
태조산 남북통일 기도대불(太祖山南北統日 祈禱大佛)
천안삼거리를 지나 망향(望鄕)의 동산을 거쳐 태조산을 찾아간다
태조산에는 각원사(覺願寺)가 있고 이번에 남북통일 기도대불을 봉안하였다 태조산은 고려왕건 태조가 통일고려를 염원으로 각원사를 짖고 사병과 군마를 양성한 곳이니 배산(背山)은 비단 병풍처럼 영정한 슬기에 눈부신 광채가 주름지고 백호와 청룡등은 맥박이 꿈틀거리듯 생생한 봉우리가 마치 보석 구슬을 꿴 듯이 조롱조롱 연달아 달리는가 하면 청룡 백호 사이에 신기하게 존엄을 간직한 동그름 한 능선이 소복 도드라져 있어 한눈으로 신비한 천작의 명산묘국(名山妙局)을 경탄케 한다 이 능선 위에 청표 융숭한 청동좌불을 봉안 하였으니 그 높이가 11미터 80에 좌대 만도 1미터 4십이고 무게는 놀랄 마치 7십톤으로 웅고한 규모는 세계 제1로 꼽는다 이 좌불은 남북통일 기도장으로 경내를 성역화 하였다 기도장으로 오르내리는 정명 층계는 백 8번뇌와 4십 9일의 단식 기도 일수를 안배 상징한 것이니 애절한 망향의 동산을 거쳐온 개개인의 소망은 곧 온 겨레의 숙원으로 조국 통일을 기도한다, 버스는 다시 태조산을 물러 나오고 단원은 석가모니불을 봉송한다.
치악산(雉岳山)
수원과 평택을 지나 푸른 여울에 은 구슬을 띄우고 있는 남한강(南漢江)을 바라본다 푸른산 그림자를 싫고 흘러가는 시원한 경색이야 말로 쇄락한 흉회에 강산의 다정을 느끼게 한다, 원주에서 오른편으로 유순하고 울창한 산세는 경명한 슬기를 띠우고 마치 파도가 치밀듯 섬세한 산맥이 첩첩이 주름잡고 있어 누가 보아도 신구영봉(神丘靈峰)으로 절찬을 아끼지 않는다, 해발 8백미터에서 5백미터에 불과한 슬기로운 산맥은 일찍 듣고 있던 치악산이다.
치악산에는 신라태자가 창건한 상원사가 있고 상원사에는 경주 신종의 다음가는 보종이 있는가 하면 꿩이 종을 울렸다는 인과응보의 전설이 담겨있다, 왼편으로 높고 슬기로운 산은 푸른 의지에 부풀어 있고 가끔 나타나는 남한강과 섬강은 조국의 영광과 자손의 번영을 말해주듯 흐뭇함을 느낀다
오대산(五大山)
원주를 지나 도견스님으로 부터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유래와 전설에 따른 설법이 끝나자 금시에 석가모니불을 봉송하는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성스럽고 융숭한 오대산 일부가 보이는가 하면 월정사 앞을 지나가고 있다, 월정사는 보이지 않으나 오대산은 예로부터 음양풍수학 상으로 명산이라 전해오고 있다, 오대는 두루 사방의 4대산과 중앙의 주산을 말하는 것이니 그 산세의 정려과 분포의 묘는 도통 신인이 아닌 속인의 눈으로도 가히 경탄 아니할 수 없다 한다, 신라 자장율사가 일찍 당나라 오기산(五基山)에서 기도정진(祈禱精進)한 끝에 해동에 불자(佛子)를 전파할 문수보살의 현몽으로 얻은 석가모니 전신사리 5개 가운데 그 하나를 오대산에 봉안 함으로써 월정사가 창건되고 이조 이성계 태조가 참회와 속죄의 기도를 올렸으니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상원사로 산과 절의 유래와 전설은 자못 뜻 깊다 하겠다 내 후일에 기필코 오대산을 찾으리
대관령(大關嶺)
흥겨운 음악공양이 한창 무르익고 버스가 대관령휴게소에 멈춘다 험하다고 만 듣고 있던 대관령이 어쩌면 천연스레 평탄하고 자연생의 따가 쓰러져 있을 뿐 광범한 전망에 어리둥절 해진다, 해발 천2백 미터의 산정에 올라 앞으로 내려다 보는 험한 준령에 짙은 단풍이 실려 있고 탁 터인 동해의 호탕한 금도에 호연(浩然)을 느끼고 청초하게 뜨 있는 경포대의 한우한 의취(意趣)에 도취할 다름이다, 그런가 하면 청고한 웅위(雄威)를 떨치고 있는 동해영동고속도로 준공비를 우러러 숱한 생명이 희생되고 많은 재정을 기울인 대관령 난공사를 생각 할 때 스스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지나간 옛날 이고개를 걸어서 오르내리던 나그네들의 외롭고 슬픈 사연이 저 붉은 단풍으로 얼룩 졌던가 하면 오늘 고속여행을 생각이나 하였으리, 조국의 동맥에 길이 영광있기를 빈다.
이승복 반공관(反共館)을 관람하고 모두들 이를 갈고 분개하던가 하면 기도로 거듭 통일의 염원을 다진다, 대관령에서 해가 기울어 진다, 버스는 광릉을 누비고 어둠 속에 주문진을 통과 3.8선이 가로놓인 양양을 빠져 속초 설악동에 이른다 저녁 8시에 대한여관에서 여장을 푼다.
(2) 설악산(雪岳山)
천불등(千佛嶝)
신흥사(神興寺)와 비선대(飛仙臺)
1977년 10월 12일 아침 6시에 내설악 입구 신흥사 정문에 들어선다, 신흥사는 신라 자장율사의 창건으로 당초에 2키로 밖에 있는 내원사 자리에 있었고 내원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이라 한다, 당시에 신흥사는 건물만도 수십동이나 되는 광범한 규모로 호화를 누렸으나 임진병란에 소실 됬다는 것이다, 첫눈에 좌,우 산봉우리는 준절한 기암으로 하늘 끝에 닿아 있고 좁은 골자기를 빠져가는 푸른 물에 소나기같은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가 하면 청량한 의취(意趣)에 표연이 넋을 잃게한다, 사천왕문과 보제루를 지나 극락 보전을 참배하고 깊숙이 올라가면 비선교(飛仙橋)가 있고 비선교를 지나 비선대(飛仙臺)에 이른다, 비선대는 광범한 석반 위에 폭포가 떨어져 둥근 석담(石潭)을 이뤄있고 이 석담에는 신선이 목욕하고 하늘로 날아 갔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기도 순례단은 등산에 앞서 손을 씻고 이를 딱아 제계한다, 단원은 일렬로 병풍교를 치닫는다 줄달음 치는 물 짙은 단풍 기암 괴석에 앞서 욋치고 뒤져 부르짖는 바람에 그 어느 것을 보아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오련폭포(五連瀑布)
높은 석벽에서 비스듬이 글러 떨어지는 폭포는 큰 가닥 만도 다섯 바퀴나 감돌아 간다 백설같은 은 구슬을 싫고 달아나는 물위에 조용히 부처님을 염하고 속(俗)의 번뇌와 세려(世慮)를 씻어 주었더니 미련없이 부탁도 없이 여울에 담은채 그 장엄하고 통쾌한 메아리는 마치 옥황에 전하는 풍악처럼 울려 퍼진다, 앞으로 바라보는 산은 그 모두가 금강옥봉으로 조롱조롱 애워싸고 뒤를 돌아보는 동벽철성에는 창검같은 기암이 금시라고 굴러 떨어질 듯 아슬한 두려움에 소름이 끼친다, 오른쪽 반곡에 날아서 내닫는 물이 백척용소(龍沼)에 떨어지고 영롱한 무지개가 설악에 닿아 있어 청상(淸爽)한 풍경이야 말로 별유 천지에 비인간을 실감케 한다
천불등의 봉우리와 암석은 그 어느 것 할 것 없이 미륵불을 닮아 있고 골 마다 떨어지는 폭포에 청고한 메아리는 장엄한 불국의 풍악이라고나 할까, 등마다 짙은 단풍은 3세 보살님의 가사 장삼을 말하듯 거울같은 바위 틈에 잔잔한 물소리는 부처님을 염하는 독경으로 티가 없는 바람에 그윽한 향취로 공양하고 항유한 조각구름을 따라 날개를 펼치는 소리개는 법무(法舞)에 도취하고 있어 이 모두가 발랄한 조물의 신묘로 화엄세계를 장식하고 청정을 예찬한다, 사람은 그 속 뜻을 모르고 곁 치레에 걸음을 멈추고 미치듯 환호를 외치고 손뼉을 치는가 하면 돌아보고는 환성을 부르짖고 발을 구른다, 그들이 마구 찍은 사진은 설악의 허수아비를 담아 갔을 뿐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참뜻은 건드러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가 만일 극락을 묻는다면 반드시 설악산 천불등이라 말해둔다. 천불등을 넘고 깊은 계곡에서 점심공양이 시작된다, 단풍이 담겨있는 청류에 땀을 씻고 주먹밥을 대하는 맛은 설악에 오지 않은 사람으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대청봉(大靑峰)
설악산 군봉에 가장 높고 험한 것이 대청봉이라 한다, 치닫고 치닫아도 대청봉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산악인으로 많은 생명을 잃었고 갖인 고난을 겪었던 곳이다, 아슬아슬한 두려움에 정신이 얼떨떨한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듯 위태한 등마루에 배밀이를 하는가 하면 때로는 기고 때로는 사다리를 타고 바위에 매달려 넘기도 한다, 이번 기도순례에 있어서 고행의 수련이라고나 할까 6십이 넘고 7십에 가까운 남녀 단원이 있었으나 얼마나 엄청난 모험인가 그러나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한사람의 부상없이 출발 8시간 만에 당당 상봉의 등반을 성공하였다, 필연코 신도들의 신심에 부처님의 가호하신 덕분이라 하겠다,
소청봉에서 대청봉을 바라보는 등마루는 마치 기름진 대마의 잔등 같고 그 잔등 위에 다박 소나무가 바싹 쓸어져 누어있는 모습은 갈기처럼 가리마를 타고있어 이색한 풍경에 또 한번 놀랜다, 그런가 하면 높은 산 마루에 거센 바람의 위세를 다시금 느낀다.
해발 천 7백 미터의 최고 봉으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내 조국의 성스럽고 영광있는 설악에서 만세를 불러 국기를 맞이는 순간 감격의 기쁨이 없을 수 있던가.
봉정대(鳳頂臺)와 봉정암(鳳頂庵)
대청봉 등반을 끝내고 봉정암으로 내려간다 백척을 우러러 보는 미륵암 7~8상이 설악 궁창에 우람한 풍채를 드리우고 있어 봉정대라 부르고 그 오른편 층암위에 5층 석탑이 서있다, 이 석탑에는 오대산 월정사와 양산 통도사의 석탑과 함께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기산 기도에서 신통으로 얻어온 석존의 사리를 보장하고 있다, 봉정대아래 봉정암이 있고 좌,우 전,후로 준절하고 고결한 금성옥강(金城玉崗)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적멸보궁(寂滅寶宮)을 호위하고 있다, 봉정대에 올라 후면을 바라보면 형산옥립(荊山玉立)이라고나 할까 중첩 만봉에 수정같은 기암 괴석을 이고 두루 감싸고 가로 줄지어있는가 하면 영롱한 단풍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경관에 조물의 신비한 공능을 예찬하고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사람은 매미가 껍질을 벗듯 속세를 해탈하고 청정세계에 유유하는 느낌이다, 누가 만일 선장의 비경(秘景)을 묻는다면 기필코 설악산 봉정대를 소개할 것이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천하의 명정(明井)이라 일컫는 봉정암 우물을 찾아간다, 두꺼비 같은 큰 바위 속에 텅 빈 석실 빙고로 옥같은 샘물이 석담(石潭)을 이뤄있고 겨울에는 따사한 김이 서리는가 하면 여름에는 얼음이 얼린다 한다, 설악의 마루에 천영 석빙고의 석정(石井)은 정말 기적이라 할까 조물의 신기함을 감탄케하니 과연 자장율사는 천문지리를 통달한 호걸리라 하겠다.
쌍폭(雙瀑)
1977년 10월 13일 이른 새벽 봉정대 사리탑에는 석가모니불의 기도 봉송이 메아리쳐 울려퍼진다, 이또한 청정한 불국의 전당이 아니고 무었이랴, 아침공양을 끝내고 일행은 오세암을 향해 내려간다, 우뢰 같은 소리에 쌍폭이 나선다 한 가닥은 짧고 한 가닥은 길게 비스듬이 석반용소(石磐龍沼)에 떨어져 파문이 일고 그 용소는 넘쳐 다시 한가닥 폭포가 3층으로 떨어진다, 사람은 온통 청상한 풍경에 붐벼 법석이나 산은 말없이 앉아 있고 폭포는 마냥 자랑도 않고 거꾸러진다, 그런가 하면 긴계곡을 이어 높고 낮은 폭포가 연달아 있어 마치 폭포의 계곡이라 하겠다, 어디서 왔어 어디로 가는지 나그네는 뭇지도 말라는 듯이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난다, 인생도 저러하거니 하고 망설이 기도한다.
오세암(五歲庵)
갈치등 같이 길고 좁고도 높은 능선은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다 궁창에 솟아 있는 설악의 봉우리에 불꽃같이 타고 있는 단풍에 이끌려 절찬을 욋치고 망경대(望景臺)를 거쳐 오세암에 이른다, 표연한 망경대에 오르면 설악의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그 옛날 망경대에서 천고를 소요하고 물외(物外)에 뜨 있던 자장율사의 청묘한 의풍(儀風)을 조용히 상념케한다, 오세암은 또한 자장율사의 복지(卜地)로 오세암을 두루 감싸고 있는 봉우리는 누가보아도 활짝핀 연꽃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이 발랄한 연화대(蓮花臺)는 설악의 심장부로 그 묘(妙)를 얻었다 하겠다, 산신각(山神閣)뒤에 우둑 솟아있는 천연주석(柱石) 촛대는 둘레가 열아름이나 되고 높이 만도 백척이나 된다, 그런가 하면 그 위태한 주석위에 우람한 석련(石蓮)을 이고 있어 완연 조각한 연꽃으로 보인다, 호리도 인공을 보태지 아니한 장엄한 연화 촛대야 말로 조물주의 섬세한 손질로 다듬어진 것이 아니면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오세암에는 전설이 담겨있으니 그 옛날 설정이라는 스님이 아빠와 엄마를 여인 생질을 길러 오다가 하루는 시주를 구하러 나갔다 떠날때 관음보살의 초상을 가리켜 저어른이 너의 어머니시니 배가 고프거던 찾으라고 타일렀다, 그가 떠나온 낮부터 큰 눈이 내리어 길이 막혀 섯달에 떠나온 그는 다음해 2월에 돌아갔다, 필연코 주려 죽었을 줄만 알았던 아기가 신기하게 살아 있어 법문을 외우고 있지 않는가,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가호가 천식(天食)으로 길려 나이가 5세가 되었기에 암자를 오세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봉정암에서 출발한지 7시간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는다.
마등령(馬嶝嶺)
1977년 10월 14일 아침 일찍 오세암을 떠나 마등령을 치닫는다,마등령 상봉에 오르면 봉정대 일부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마등령에서 설악동으로 기울이면 마치 천마(天馬)를 타고 일세를 소요하는 느낌이다, 동해는 끝없이 푸르고 하늘은 가없이 담담하다, 해는 태초의 나그네기에 설악의 단풍에 이끌려 바븐 걸음을 멈추고 곁눈을 돌린다, 정처없는 조각구름은 설악의 마등령에 그 무었을 느꼈기에 머뭇거리듯 떠나기를 꺼려하는 눈치다, 오늘 내 다시없을 기회라, 광고(曠古)의 자를 찾아봰다, 공자(孔子)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오히려 작다고 하셨으니 인의(仁義)를 높이시었다, 석존(釋尊)은 일찍 천하가 없다 하셨으니 무아무주(無我無住)의 자비(慈悲)를 기구하셨고 그리스도는 천하는 내 것이기에 천하를 사랑한다 하셨으니 박애(博愛)를 뜻하는 것이다, 3성(三聖)의 가는길은 달라도 닿는곳은 설악의 영봉이라 3성을 뵙고 기뻐 천하의 성산(聖山) 설악을 굽어본다, 설악의 만장 기암은 은빛 서슬에 언월도(偃月刀)를 방불케하니 그래서 사시로 설악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변화를 임의로 하는 설악은 때로는 청악(靑岳) 때로는 풍악(楓岳)으로 변하고 사람의 위치에 따라 그 모습도 천태만상으로 달라진다, 이것이 설악의 신비다, 마지막으로 백척단봉에 무지개 같은 돍 층계를 넘어가는 순간은 구름을 타고 팔황(八荒)을 헤엄치듯 누가 나를 속의 사람이라 하는가, 적송자가 따로있고 소부가 따로있나 설악이 나더러 함께 있자하니 이 밖에 무었을 부려워 하리.
금강굴(金剛窟)
마등령을 내려오면 비선대가 나서고 폭포의 맑은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비선대를 떠난 3일째 다시 만나는 기쁨은 표현하기 어려웠다, 수백척을 우러러 보는 낭떨어지에 천연동굴이 있고 신라 원효대사가 금강수행(金剛修行)을 하였다는 전설에 이어 지금은 부처님을 모시고있다, 금강굴 안에는 수백년을 묵은 제비집이 몇개나 있으니 비선대에서 목욕하던 선녀들을 조롱한 허물로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당하고 일생을 동굴안에서 살았다는 제비의 애화(哀話)로 엮어진 전설이 있다, 비선대에 다다라 손과 발을 씻고 머리를 감는다, 오세암을 떠난 6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비선대에서 일생에 잊혀지지 않을 점심공양이 끝나자 휘몰아가는 골 바람에 단풍잎이 쏟아진다, 일행은 합장하고 설악에 무사히 돌아온 고마움을 감사한다.
(3)영월(寧越)까지
낙산사의 석불(石佛)과 해수욕장
이날 오후 3시 일행은 설악동을 출발하고 동해안 고속도로를 달린다, 나지막한 산위에서 가마득한 동해를 바라 수십척으로 보이는 석불이 서있다, 험난한 고해의 중생을 제도하시려는 자비의 풍모를 우러러 관세음보살을 봉송한다, 이 석불은 한국 최고의 웅위를 자랑하고 석불아래는동해의 명찰 낙산사가 자리잡고 있다, 끝없이 푸른 낙산해수욕장에 이어 남애해수욕장과 주문진해수욕장에 잇따라 연곡해수욕장은 길고 넓은 백사장에 울창한 소나무 숲은 과연 동해안의 자랑거리고 관광 강원도의 제 1 강산을 말해 주고있다, 버스는 다시 강릉시가지를 지나 대관령으로 돌아온다, 원주에서 영월로 방향을 바꾼다, 험악한 밤길을 2백십리나 달린다, 문득 이조왕실의 단종애사(端宗哀史)가 뜨오른다, 어린왕의 행각을 연상하고 밤 늦게 영월에서 여장을 푼다.
남한강(南漢江)과 방생
1977년 10월 15일 이른 아침에 고시굴(高氏窟)을 찾아간다, 푸른산을 끼고 옥같은 은파가 여울지는 남한강에 쇄락(灑落)한 풍광을 만끽하고 지나간 그 옛날 어린왕의 시체를 담고 통곡한 강물은 이제는 그것마냥 잊은 듯이 그 님은 천추의 한을 품고 장릉에 잠드셨다, 버스를 멈추고 나룻배에 오른다, 남한강 건너편에 고씨굴이 기다리고 있다, 수안(殊眼)스님은 주점 수족관에 가두어 있는 잉어 한 다래끼를 산다 그리고는 강 한가운데서 놓아준다, 스님과 신도는 일제히 심경을 봉송한다, 하마터면 관객의 구미를 돋구어야 했을 잉어는 기쁜듯이 물속으로 헤엄쳐 달아난다, 이것이 불가(佛家)의 방생으로 살생을 금하는 자비(慈悲)를 말한다
고씨굴(高氏窟)
4억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이 동굴은 이조 선조(宣祖) 2십6년 임진왜란당시 이곳 영월에 있는 고씨 피난처로 총연장 6천5백미터에 천3백미터를 개발한 천연기념 2백 십9호로 지정 되있다, 입구에서 4백미터 지점에 비룡문이 있다, 한쌍의 룡이 몸뚱이는 반공에 뜨있고 머리는 사람의 손이 닫는 양쪽에 마주보고 있다, 두 몸뜽이가 하나로 감겨 꿈틀거리듯 날으듯 그림이나 조각에서 보는 용의 상징 그것이다, 여기에서 한참 나아가면 폭포소리가 들려온다, 신기하다고나 할까, 아주 작은 폭포 4개가 연달아 떨어지는가 하면 용소(龍沼)가 3개다, 작은 폭포에 비하면 그 소리가 너무도 웅장하다, 이름을 와룡폭포(臥龍瀑布)라 하고 용소는 거울같이 맑다 그 앞을 빠져나가면 양(羊) 두 마리가 마주서 있다, 바로 살아 있는 양으로 보이고 암컷 수컷에 깊은 애정이 감돈다, 꿈의 궁전은 그럴싸하고 임의 기둥은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고 안고 돌면 임과 같은 정을 느끼고, 음양궁(陰陽宮)은 얼굴이 간지럽게 너무도 닮았다, 7백 미터 지점에 장엄하고 화려한 천궁옥좌(天宮玉座)가 있으니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케하고 오작교를 지나 누어서 어머니 배속을 간신히 빠져 나가면 다시 4십8미터나 되는 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은하(銀河)의 광장은 너무도 광활하고 극락전의 미륵불은 찬란하기만 하다, 극락문의 지석과 진주장의 석류와 효녀심청의 연꽃의 동산은 완연 금과 은으로 장식한 조물의 공예(工藝)라 하겠다, 연정대(戀情臺)의 망부석(望夫石)은 애원하듯 눈물에 젖어있고 신농담(神農潭)은 풍년을 기약하듯 서색(瑞色)이 윤택하고 우람한 천불대(千佛臺)는 설악의 그대로라, 끝으로 요란한 강을 건너 돌아오니 2시간 3십분 동안 황홀한 꿈의 세계를 다녀온 것이다.
장릉 참배(莊陵參拜)
아침공양을 끝내고 장릉을 찾아간다, 장릉은 이조 6대 단종대왕(端宗大王)의 능묘로 슬픈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준마의 잔등같은 능선에 수백척이나 되는 층계를 올라가면 작으마한 무덤앞에 상석과 석불이 서있다 호매하고 당당한 청룡백호의 산세는 명산묘국을 자랑하거니와 능묘 앞에 엎드리는 순간 스스로 모르게 눈시울이 뜨겁다 더구나 생육신의 한분이신 십6대 선조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가련한 군왕을 염습 초혼하신 유적이기에 더욱 강개함을 느낀다.
장릉 정문앞에 충신각(忠臣閣)이 있고 2백6십4위의 향사를 매년 한식 일에 거행한다, 당시의 호장(戶長)으로 세인의 이목을 피해 단종의 시체를 수습 암장한 엄흥도(嚴興道) 정려문(㫌閭門)이 보기에 너무도 초라하여 가슴 아프게한다, 능묘 층계아래 제각과 비각이 있고 비석에는 조선국 이조 단종대왕 장릉이라 새겨 있다, 영천(靈泉)은 가물음과 장마에도 수위(水位)가 가감이 없었으나 우물을 판 그해의 한식날에 물이 넘쳤으므로 능묘의 향사도 한식에 거행한다는 것이다, 어린왕의 마음을 울려 아프게하던 자규루는 보이지 않으나 붉게 물들인 조용한 숲은 깊은 애수에 잠겨있다.
고별(告別)
버스는 장능을 떠나 충주와 청주를 빠져 나간다, 나지막하게 아기자기한 푸른 산세가 마냥 아름답기만 하고 청주시가의 터널같은 가로수를 누비고 달리는 기분이야 말로 경쾌하고 명랑할 따름이라, 추풍령에서 점심공양을 끝내고 고가교(高架橋)를 지나 서울 부산 고속도로 준공기념탑과 공원을 돌아보고 저녁 8시 3십분에 동래에 도착한다, 4박 5일의 기도 순례를 마치고 일행은 손에 손을 잡고 따뜻한 고별인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