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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문명의 차이 및 그 원인
인간 진보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하여서는 첫 단계로 문명의 차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이러한 차이의 본질적인 성격을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진보가 인간의 심정(心情)에 작용하는 변혁(變革)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는 현대철학이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검토한 바 있다. 또한 문명의 상이한 단계에 있어서의 각 사회 간의 차이도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생리적인 차이에 기인하고 있지 않은 사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며 특수한 형질유전(形質遺傳)과 같은 것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상이한 사회형태만의 사람 사이의 심한 차이를 이런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전의 영향력도 인간이 세상에 탄생한 후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영향력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근육의 자동적인 버릇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상의 매개체로 되어 있는 언어만큼 습관에 있어서 생래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또한 언어만큼 오래 지속되며 국적을 신속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우리들은 어떤 특정한 언어에 소인(素因)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즉 모국어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모국어로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어린아이는, 자기의 조상들이 무수한 세대를 통하여 한 언어만을 사용하였으며 한 언어만으로 사고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말이라고는 조금도 듣지 않았는데도 다른 언어도 자기 모국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이하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적 내지 지방적 혹은 계급적 특이성도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특이한 차이란 교육이나 관습의 문제이지 유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유아 시에 인디언에게 붙잡혀서 인디언의 오막살이에서 자라난 백인의 어린이들의 경우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백인 어린이들은 완전한 인디언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집시가 양육하고 있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집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양육하고 있는 인디언의 어린이들이나 특정인종의 어린이들은 완전히 동화가 안 된다는 사실은 저자의 생각으로서는 이들이 완전히 백인 어린이들처럼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데 기인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흑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어떤 신사가 한번은 저자에게 흑인 어린이들은 열두 살까지는 백인 어린이들보다도 더 명석하며 더 쉽게 배우는 것이나, 이 나이만 지나면 우둔해지고 조심성이 없어진다는 말을 들려준 일이 있었다. 그는 이것이 생래적인 민족열등의 한 증좌(證左)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저자도 한때 이런 생각을 가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언젠가 우연히 대단히 교양있는 흑인 신사인 힐러리 주교가 “흑인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는 백인 어린이들과 같이 명석하며 배우는 것도 쉽게 배우고 있지만, 장성하게 되어서 자기들은 열등 인종이라고 생각되고 있다는 것과 기껏해야 요리사나 급사나 그런 종류의 일이나 할 수 있었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자기들의 위치를 인식하게 되자 야망도 상실하고 향상하려는 의욕도 상실하게 된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흑인 어린이들이 가난하며 무교육하며 자포자기적인 부모의 슬하에 있기 때문에 가정교육이라는 것도 흑인 어린이들의 의욕을 좌절시킬 것이라고 여기에 첨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교육의 초기단계에 있어서는 무식한 부모들의 자식들도 교양있는 부모들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수용력이 있는 것이지만 점차로 교양있는 부모들의 자식들은 일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가장 교양있는 남녀로 된다는 것은 공통적인 사실로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 것이다. 학교에서만 배우고 있는 최초의 단순한 경우에 있어서는 이들은 모두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가 더 복잡하여짐에 따라서 교양있는 영어를 배우며 교양있는 회화를 듣게 되는 것이며 책과 접근할 수 있으며 질문을 하면 꼭 대답을 듣게 되는 등 여러 가지의 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 후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반 노동자로부터 입신한 사람이 문화인과 실무가들과 접촉하게 되면 더 교양있고 세련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난한 부모의 자식인 두 형제가 같은 집에서 같은 방법으로 양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의 한 사람은 막벌이꾼이 되어서 매일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다른 한 사람은 사환으로 시작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출발하여 마침내 변호사가 되며 상인이 되며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40세나 50세가 되면 이 둘의 차이는 현저하여서 성급한 사람들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보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재질에 대부분 그 원인이 있다고 귀결시킬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한 두 자매 간에 있어서도 태도나 교양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가난한 사람과 결혼한 한 여인은 적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며 기회라고는 별로 없는 데 반하여, 자기를 사교계로 진출케 하며 기회를 제공하게 하는 사람과 결혼한 다른 한 여인은 취미가 고상해지며 교양이 가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락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나쁜 사교는 좋은 행동도 썩히는 것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성격이 상태나 환경에 따라서 심각하게 변형된다는 일반법칙을 표현한 데 불과한 것이다.
저자는 브라질의 어떤 항구에서 최신의 유행복을 입은 한 흑인을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아뿔사! 그는 구두와 양말은 신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와 동행하였으며 노예무역을 하고 있다는 어떤 선원은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의 일종이라는 지론(持論)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광경은 그의 좋은 본보기라고 지적하면서 흑인이 구두를 신는 것은 비자연적일 뿐 아니라 본연의 상태에 있어서는 옷을 조금도 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자는 후에 흑인들이 구두를 신는 것은 영국에 있어서 제복을 완전하게 입은 요리사가 보석반지를 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으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저자는 그 후로 자유스럽게 옷을 입을 수 있는 백인들도 브라질의 노예와 같이 부자유스럽게 입고 있는 광경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실들이 형질유전은 전위(前衛)적인 다윈학도의 이와 같은 형질유전보다는 실제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뉴욕에서의 대다수의 범죄인과 정부구호 수령자들은 자기들의 선조가 3, 4대나 빈민이었다는 사실은 형질유전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강조되어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대한 적당한 설명에는 가까운지는 몰라도 전연 형질유전과는 무관한 것이다. 빈민은 자기자식들 뿐만 아니라 하더라도 하여간 빈민을 발생시키는 것이며, 범죄인과 접촉하고 있는 가족은 유덕한 부모의 자식들일지라도 범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선에 의뢰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면 자존심과 경쟁이 극심할 때 필요한 독립독행심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주지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선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진정한 사실인 것이어서 정부자선과 개인자선이 좋은 효과보다는 도리어 해로운 것이 아닌가 하여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식들도 부모들과 동일한 감정, 취미, 편견 내지 재능을 가지려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평소의 동료로부터 더 감화되고 있는 것 같이 이와 같은 성향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혐오와 반감이 촉발되는 것 같은 예외도 원칙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값싼 소설책을 읽은 소년들을 해적이 되고 싶도록 작용하고 있는 영향력과 같이 성격의 격세유전(隔世遺傳)을 때때로 설명하고 있는 섬세한 영향력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자기의 혈통에 인디언 추장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신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조부에게서 배웠으며 백인으로서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전통, 예를 든다면 인디언의 사고방식이나 물건에 대한 강열하면서도 참을성 있는 피의 갈망이나 화형주(火刑柱)에서의 인내 등과 같은 전통에 대하여서 자주 말하곤 하였다. 그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비록 고등교육을 받았고 교양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면 인디언의 혈통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는 데 대하여서는 저자도 의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런 것은 자기 선조들의 업적에 대한 자기상상(想像)의 성장으로써만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주1)
어떤 대규모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계급이나 집단 간의 상이와 같이 사회 간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문명을 구별짓고 있는 것과 같은 차이 예를 들면 지식, 신앙, 습관, 취미, 언어 등의 차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중에도 극심한 것은 동일민족이 동일국가 내에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문명사회와 야만사회의 차이와 같은 극심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는 것이다. 석기시대 이후의 모든 사회발전단계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사회에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던 집단이 발견되었던 것과 같이 동일국가와 동일도시 내에서도 유사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는 집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과 독일과 같은 나라에 있어서 동일종족이며 동일한 장소에서 태어났고 동일한 장소에서 교육을 받아서 성장한 어린이들 간에도 언어를 상이하게 사용하며 상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이한 습관을 따르고 있으며 상이한 취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 미국과 같은 나라에 있어서도 동일한 정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일한 종류의 차이는 상이한 단체나 집단에서는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분명히 선천적이지 않다. 어떤 아기도 감리교도냐 가톨릭 신자냐, 또는 에이치 발음을 못 하느냐 하느냐를 정해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집단이나 단체를 구별시키는 이러한 모든 차이는 이러한 단체 내의 연합(聯合)에서 비롯된다.
재니서리(터키제국의 근위보병)들은 유아 시에 기독교인 부모와 생이별한 청년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광신적인 회교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터키의 모든 특성들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회나 기타의 교단들은 특이한 성격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 성격은 형질유전으로 영속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이 단기간만 남아 있으며, 항상 변하고 있는 학파(學派)와 연대(聯隊)와 같은 협동체에서도 일반적인 특질을 보이는 것이니 협동체를 영속케 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감화력인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으로서는 민족의 성격을 결정하고 있는 위대한 요소는 허버트 스펜서가 소위 ”고도(高度) 유기(有機)적 환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모든 사회와 개인에 발생하고 있는 전통과 신앙과 관습과 법률과 습관과 협동체 등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형질유전보다는 이러한 요소로 인하여서 영국인은 프랑스인과 상이하게 되었으며, 독일인은 이탈리아인과 상이하게 되었으며, 미국인은 중국인과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런 요소로 인하여서 민족적인 특징은 보존되었으며 확대되었고 개조되는 것이다.
일정한 범위 내 혹은 어떤 점에서는 형질유전은 제한을 받지않고 자질을 발전시키거나 혹은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보다도 육체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며 더욱 인간의 육체적 부분보다는 동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비둘기나 가축을 양육함으로 연역된 것은 인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인간의 생활은 가장 조잡한 상태에 있어서도 무한정으로 복잡한 것이다. 즉 인간은 무수한 영향을 받으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인데, 그중에서 형질유전에서 오는 영향은 비교적 근소한 것이다. 정신적 활동이 동물보다도 우월하지 못해서 먹고 마시고 자고 번식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종족의 사람을 정성껏 우대하며 선택하여서 양육시킨다고 한다면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육체나 성격 등에 대폭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인간 안에서는 정신적인 영향력이 마음을 통하여 육체에 작용하면서 계속적으로 이 과정을 방해할 것이다. 정신이 긴장되어 있는 사람은 돼지의 경우와 같이 우리에 가두고 양육한다고 하더라도 비대(肥大)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 인간은 여러 동물보다는 오래 살아왔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들로 하여금 가장 현저한 차이를 발생케 하고 있는 기후의 차이로 인하여 구분될 수 있는 것이나, 상이한 종족 간의 육체적인 차이도 백마나 흑마의 차이만큼도 못한 것이며 동일한 개의 아종 예를 든다면 여러 종류의 테리어나 스파니엘 간의 차이만큼도 못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종족 간의 육체적인 상이는(이것은 자연선택이나 형질유전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론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에 가까워질 때 즉 인간의 마음이 덜 작용할 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적 구조의 사정이 이렇다면 정신적 구조는 얼마나 더 진실이겠는가?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서 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그 후에 발전하는 것이다.
각 유기체의 성장에는 그것이 물고기든 파충류든 원숭이나 사람이든지 환경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생아도 마찬가지 경우인 것으로 의식과 권력에 눈뜬 정신이 영국인이나 독일인이나 중국인으로 된다고 하더라도 문명인의 마음이나 야만인의 정신은 이 정신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교양있는 부모에게서 난 수명의 아기를 무인도에 이동하여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장성할 때까지 거기에 머무르게 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고 생각되는가? 기껏해야 그들은 불의 사용법을 발견할 것이며 가장 조잡한 도구와 무기를 발견하고 말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들은 결국 마치 어린아이들이 걷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현재 가장 하급종족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습득하느라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모든 일들을 제 시기에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저자는 추호의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걷는 힘이 인간구조 내에 있는 잠재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런 가능성도 인간심정의 잠재력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동일한 상태에 있는 야만인의 어린아이들보다 더 우수하거나 열등하지도 않으며, 더 신속하지도 않으며, 더 지지(遲遲)하지도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특출한 개인만이 표시하고 있는 가장 고차적인 정신력을 소유하였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마치 17년 주기의 매미처럼 중간에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면 인류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이러한 간격이 인류를 야만시대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야만시대가 문명시대처럼 보이는 상태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와는 반대로 어머니도 모르는 (이것은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함) 야만인의 아기들을 문명인의 아기들과 교체하여서 성장시킬 경우에 여기에 어떤 차이점이 발생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아마 상이한 사람과 계급들과 혼합한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인간의 성격은 전세계를 통한 인간의 성격이다“라는 위대한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훈은 도서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행자의 여행기에 대하여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책을 저작한 문명인의 야만인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마치 야만인이 우리들을 보고 기록하는 것과 같이 순간적인 방문만 하고서 저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다른 시대와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에 관한 형적을 저술한 기록에는 우리와 같은 생활의 별견(瞥見)과 우리와 같은 사상의 서광이 뚜렷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인들이 호흡하고 있는 감정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이다. 그리하여 에마뉴엘 도이치는 ”여기에서 역사와 예술에 관한 연구가 끝나는 것이다. 이들의 역사나 예술도 우리들의 역사나 예술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전(全)세계에는 특이성이 유전전승이나 혹은 연합전승으로 훌륭하게 설명되는 민족들이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럽의 어느 다른 민족보다도 자기들의 혈통의 순결성을 정성껏 장기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으로서는 인상학(人相學)이라는 특징뿐 만이라는 것과 이것도 인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덜 현저하다는 것은 관찰해보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비록 동족끼리만 결혼한다고 하지만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환경으로부터 많은 변화를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영국이나 러시아나 독일이나 동양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이들 나라의 국민이 상이한 것과 같이 여러 점에서 상이한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기들의 개성을 어디가서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한 것으로서 어디가서나 유대민족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는 장본인은 유대종교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런데 종교야말로 세대에 의하여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육체적인 특성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이나 결합으로 인도하고 있는 이 종교는 가르침에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의혹과 혐오를 발생시킴으로써 교훈보다는 강력한 외부적인 압력을 산출시켜서 사회 안에 유대인들의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특출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일정한 특수환경이 이룩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혈족결혼은 여기에 대한 결과이지 원인은 아닌 것이다. 유대인들의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떠나게 하여 이러한 특이한 환경 외에서 양육시키게 하는 박해로서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종교적 신앙의 강도를 감소시키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미국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특이점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을 보아도 명백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조직 내지 환경에서 오는 영향력으로, 하급문명민족이 고도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의 곤란이라던지, 어떤 민족들이 고도의 문명 앞에서 용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등의 민족차이의 증명이라고 생각되어 온 것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한 사회적 환경이 완고하게 존속된다면 그 환경에 종속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환경을 용납한다는 사실이 곤란하거나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국민들의 성격이 결정된다면 중국인의 성격도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미국식 노동과 거래와 기계사용법을 대단히 용이하게 습득하는 것을 보니 중국인들이 융통성이나 자연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다른 점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중국인을 아직도 완강하게 둘러싸고 있는 중국인의 환경인 것이다. 즉 이들은 중국에서 오면서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또한 마치 인도의 영국인이 소(小)영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소중국을 유지하면서 여기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특이성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결합을 자연적으로 추구하며, 또한 언어나 종교나 관습은 개인이 절대적으로 고립되고 있지 않은 곳에서 완강하게 존속하려는 경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가 이와 같은 결합을 강조하고 있는 외부적인 압력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원리들은 생래적인 차이이론을 채택하지 않고서도 문명의 한 단계나 집단이 다른 문명의 한 단계나 집단과 직면하므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비교언어학이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힌두인은 영국정복자와 동일한 민족이며, 그리고 힌두인이 완전하고 배타적인 영국적 환경(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어린이들이 장성하여 감에 따라서 그들이나 그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 어린이들을 영국가정에서 생활할 때만 완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에 놓여지는 경우, 한 세대만 소요되면 영국적 문명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예를 풍부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영국식 관념이나 습관들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저조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념이나 습관은 거대한 인구로 인하여 부단히 완강하게 존속되고 있으며 모든 생활행동에서 교차되고 있는 진보적인 관념이나 습관과 대결하여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젓은 그의 저서인 ”물리학과 정치학“에서 문명이 진보된다면 강직한 육체적 구조가 부여된다고 가정함으로써, 야만인들이 고대인의 문명 앞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문명 앞에서는 쇠약하여가는 이유를 설명해보려고 애썼던 것이다. 배젓은 고전학자들이 야만인을 위하여서 비가(悲歌)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한 야만인들은 도처에서 로마인과 접촉하였으며, 로마인도 야만인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47~48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기원 후 첫해의 야만인들은 1800년대의 야만인과 거의 비슷했다. 야만인들이 고대 문명인들과는 접촉을 견디었는데 현대의 문명인들과의 접촉은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대인들이 고대인들보다 강직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인보다도 막중한 재난의 씨를 감당해야 했고 현재도 감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불변야만인들을 이들이 접촉한 사람들의 육체구조의 체력을 측정하는 계량기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배젓 씨는 1800년 전의 문명이 현재의 문명과 같이 야만인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이점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설명하려고는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인 것이며, 또한 인간의 구조가 조금은 향상되었다는 증명을 결하고 있다하여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문명과 접촉시키므로 열등민족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허식없이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가 야만인보다 자연적으로 강인해서 우리들에게는 비교적 무해한 병폐(病弊)들이 야만인에게 치명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이러한 병폐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반하여 야만인은 지식도 방법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뿐이다. 문명의 진행 중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명의 여독(餘毒)으로 야만인을 병들게하는 병에 대하여서 문명인들이 속수무책이었더라면, 야만인들이 무지로 인하여 이 병을 침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인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 병을 처리하는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는 치명적인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야만인에 대한 문명의 침입은 문명인에게 힘을 부여하였던 그러한 상태로 야만인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야만인의 힘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야만인의 습관과 관습이 완강하게 존속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가능한 한 완강하게 존속하였지만 이러한 습관과 관습이 적용되고 있는 환경은 타율적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야만인들은 사냥할 짐승이 없는 토지의 포수였으며, 무기를 박탈당하였으며, 전적으로 법적인 변론을 해야하는 무사(武士)가 되어버린 것이다. 야만인은 문화와 문화 사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배젓 씨가 인도에 있는 유럽의 혼혈아에 대하여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도덕에 끼어서 문명의 장점을 배우지 못하면서 악덕만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야만인들은 고유한 생활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며 자긍심과 도덕을 상실함으로써 타락하고 멸망하여 버리는 것이다. 개척도시나 철도역 근방에서 배회하면서 얻어먹고 훔치고 추잡한 장사를 용이하게 하고 있는 비참한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그 장소에 침입하기 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문자 그대로의 인디언은 아닌 것이다. 이들은 더 고차적인 것을 획득하지 못하고서 이런 상태의 힘과 덕성을 상실하여 버린 것이다. 문명이란 홍인종을 추방하므로 실제로 유덕(有德)한 일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개척지의 앵글로색슨족에 대하여서 대개 백인이 존중하여야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야만인은 빈궁하여졌고 오해를 받았으며 멸시당하였고 악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멸망하여야 하는 조건과 동일한 조건으로 멸망하는 것이며, 로마화된 브리튼족이 색슨 야만족 앞에서 사라지듯이 문명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로마문명이 야만족을 격파하지 않고 동화(同化)시켰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고전학자들도 야만인을 위해서 비가(悲歌)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자는 고대문명이 자기들이 대항하여야 하는 야만인들과 거의 동류였다는 사실로서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니라, 고대문명은 현재의 문명이 확대된 것과 같이 확대되고 있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대문명은 식민지사람들의 전진과 보조를 맞추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영토를 전면적으로 굴복시키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면적 굴복은 사람들의 사회적 내지 전면적인 정치적 조직을 대부분 손상시키지 않게하므로 동화과정은 분쇄되거나 퇴보하지 않으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문명은 이와 거의 동일한 방법을 통하여서 유럽의 문명과 동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있어서는 앵글로색슨족이 인디언족을 개화시키지 않고 멸종(滅種)시켰는데, 그 이유란 단순히 앵글로색슨족이 인디언을 자기들의 환경으로 유도하지도 못하였으며, 접촉이 있었다해도 그 접촉은 인디언들이 자기들의 습관적인 사고와 관습이 새로운 환경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급속히 변하여져서 강력한 새 이웃과 사귈 수 있도록 유도하거나 허용하는 접촉이 못되었기 때문에 인디언을 멸종시켜버린 것이다. 이러한 비문화적인 민족이 우리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본질적인 장애가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우를 살펴 본다면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라과이의 예수회나 캘리포니아의 프란체스코 교단이나 태평양 제도의 있어서의 신교의 선교 등을 통한 실험을 통하여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상세히 알고 있는 시대 내에서 어떤 민족이 육체적으로 개량되었다는 가정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또한 배젓 씨가 말하고 있는 시대도 완전히 반증된 것이다. 고대의 동상(銅像)이라든지 운반되고 있던 짐과 고대군대들의 행진을 본다든지, 경주자의 기록이나 운동가의 기예를 보더라도 민족이 2,000년 내의 체격이나 체력이 증가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발전은 일반적으로 확고하게 믿어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몰상식한 가정인 것이다. 시인, 예술가, 건축가, 철학자, 수사학자, 정치가, 군인 등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현대문명에는 고대문명보다 더 위대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는 개인이 있다는 것을 예시(例示)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름을 구태여 나열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것은 소학생들도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력의 모델이나 특성을 고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써도 이것은 증명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레싱은,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신앙을 비록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가장 진실하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 알렉산더나 한니발이나 카이사르, 플라톤이나 루크레티우스, 유클리드나 아리스토텔레스가 19세기의 세계에 재생하였다고 할 경우에 이들이 현대인보다 열등하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고대나 더욱 암흑시기에 있어서나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시대에서 우리들은 현재의 사람과 같이, 그 시대의 지식상태나 정도에 있어서 고도의 체계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또한 덜 발달된 민족 중에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다면 그들의 환경하에서 현대의 문명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위대한 정신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철도의 발명이 외바퀴 수레가 없었던 시대에 외바퀴 수레를 발명하는 것보다도 더 위대한 발명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현대문명인인 우리들은 우리 이전의 사람들인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이면서도 발전이 더딘 민족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우리들의 키가 커진 것은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디딜만한 구조가 건조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말을 다시 반복해 보련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정신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며 육체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왔다가 가버린 무수한 사람 중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저자는 민족 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동일한 방법으로 특이한 정신을 전승시키며, 동일한 정도로 육체적 특이성을 전승시키고 있는 유전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으로서는 모든 편차도 귀일시킬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공통척도나 자연규제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환경 아래서는 마치 편두족이 자기들의 어린이들의 머리를 누르므로 생기게 하는 왜곡이라든지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딸의 발을 묶으므로 생기는 왜곡같은 왜곡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편두족의 어린이들이 자연적으로 정상적인 머리를 가지고 탄생하며, 중국인들의 어린이들도 또한 자연적으로 정상적인 발을 가지고 탄생하는 것 같이 정신상태도 자연적으로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의 의안이나 의족을 유전받지 않는 것과 같이 자기 아버지의 지식을 유전받는 것이 아니다. 가장 무식한 부모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과학의 선구자나 사상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문명의 차이라고 하는 상이한 장소와 상이한 시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 간에 나타나는 차이는 개인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차이라는 사실과, 또한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성단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아니라 이러한 구성단위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상태에서 오는 차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중대한 사실인 것이다. 저자는 사회를 구별하고 있는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각 사회는 대소를 막론하고 자체의 지식, 신앙, 관습, 언어, 취미, 제도, 법률 등을 만들어 낸다는 것과, 또한 이러한 조직 내에서나 혹은 가장 단순한 사회가 아닌 사회는 서로 중복되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소(小)사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복수적인 조직 내에서 개인은 탄생하는 것이며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조직체야말로 마음이 전개되고 또한 마음의 형태를 규정짓고 있는 모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조직체야말로, 관습과 종교와 편견과 취미와 언어가 성장하며 완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방법인 것이며, 기술이 전달되고, 지식이 축적되고, 한 시대의 발견은 다른 시대를 위한 공동재산이며 계제(階梯)가 되고 있는 도정(道程)인 것이다. 이 조직체는 어떤 때는 진보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지만 이 조직체로 인하여서 진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어린이들이 몇 시간 안에 이 조직체로 인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알고 있던 우주의 지식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며 가장 보잘것없는 과학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한 마음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기억이 중요한 것 같이 민족에게는 어떤 조직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의 경이적인 예술, 과학, 발명 등 이 모든 것이 이것을 통해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한 세대가 이루어놓은 전진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음 세대의 공동재산으로 보유되고 또한 이것이 다가오는 새 세대의 출발점이 되는 것 같이 진행되고 있다.
(주1) 워즈워스는 다음과 같은 “브루엄 성의 축제의 노래”에서 이 영향을 최고의 시적 형태로 표현하였다.
방안에서 녹쓸고 있는 갑옷은
클리포드의 피를 요구하며,
창은 “스코틀랜드 인을 진압하라”고 외친다.
“나를 프랑스의 심장부에 가져다 주오.”
이것은 방패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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