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4.]
오빠 생각
최순애 작사·박태준 작곡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https://youtu.be/SeR_NYT4z5E
오빼생각의 탄생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동요는 70~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익숙하다.
최순애(1914~1998) 시인의 ‘오빠 생각’에 멜로디를 붙인 동요는 오래전부터 자장가로, 돌림노래로 불리면서 어른이 된 다음에도 기억 한편에 잔상처럼 남아 있다.
이만큼 ‘오빠 생각’이라는 이 노래는 우리의 국민가요라 할 만큼 어릴 때부터 많이 부른 노래이다.
이 동요의 시를 쓴 최순애는 당시 12세의 소녀였다.
1925년 방정환 선생이 내던 잡지 <어린이>의 당시 소년 문사들이 글솜씨를 뽑내던 잔치 마당에 최순애가 ‘오빠 생각’ 동시를 써내어 입상하여 발표한 시기는 1925년 11월이었다.
최순애는 출판사인 개벽사의 일로 서울에 자주 가서 소식도 없는 여덟 살 위오빠인 최영주를 그리워하며 ‘오빠 생각’을 썼다고 한다.
도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어린이 계몽 운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8세 위의 오빠 최영주를 그리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서울가는 오빠에게 비단구두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아무 소식이 없는 오빠를 생각하면서 시를 썼다고 한다.
당시 과수원 밭둑에서 소녀는 서울 쪽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이 시가 오늘까지도 애송되고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것은 우리를 돌보아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곧 오빠였는지도 모른다.
이무렵 박태준은 <어린이>에 실린 이 시를 보고 선율을 붙여 곡을 만들었다.
최순애의 ‘오빠 생각’은 1930년 동시에서 동요로 노래와 음반과 함께 세상에 파급되기 시작했다.
활자로 된 ‘오빠 생각’이 나온 지 5년 만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발표함으로써 읽는 문자에서 부르는 노래가 된 것이다.
거기에 최순애 작시와 박태준 작곡의 ‘오빠 생각’은 국민동요로서 일제강점기 시대적 비애를 겪고 있는 민족 주체들의 정서를 달래면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동요 ‘오빠 생각’이 남녀노소와 동화되면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시대적 요구와 민족 정서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https://youtu.be/PINYMPlKQX8
‘오빠생각’에서의 오빠는 누구?
그러면 ‘오빠 생각’에서의 작사자 박순애의 오빠는 누구인가“
오빠의 이름은 최영주로 당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으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피해 다시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아일보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면서 화성소년회를 결성하였고, 1925년 방정환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개벽사와 색동회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어린이>, <신여성>, <학생> 등의 편집 사무를 맡았다.
<소파전집> 출간과 망우리에 있는 소파 방정환 묘비의 건립 등 방정환 기념 사업의 실무를 맡기도 하는 등, 방정환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해방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는데 최영주의 묘는 망우리에 있는 방정환의 묘 지척에 조성되어 있다.
https://youtu.be/1sWVcMSR_-g
‘오빠생각’과 ‘고향의 봄’
여기서 한가지 내용을 더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고 애창되는 홍난파 작곡의 동요 ‘고향의 봄’과 박태준 작곡의 동요 ‘오빠 생각’의 시는 모두 어린이들이 지은 동시라는 것과 이 동시를 지은 두 어린이가 나중에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해로하였다는 사실이다.
1926년 4월에 잡지 <어린이>에 16세인 소년 이원수 역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게 된다.
수원의 최순애 소녀와 마산의 이원수 소년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이를 인연으로 1936년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 시 때문에 만났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고향의 봄’을 쓴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1911~1981년)과 ‘오빠 생각’을 쓴 최순애 선생(1914~1998년)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자.
1925년 11월, 12살 수원 소녀 최순애는 ‘오빠 생각’으로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 동시에서 입선자가 되었고, 다음 해 4월, 14세 마산 소년 이원수가 ‘고향의 봄’으로 입상자가 된다.
그런데 이원수의 시를 보고 크게 감동받은 12살 소녀 최순애가 편지를 띄우게 됨으로써 마산 소년 이원수와 수원 소녀 최순애는 펜팔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는 서로 얼굴도 모른 체 결혼까지 약속하였다.
그리고 7년간의 펜팔 끝에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하여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1년간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최순애 집에서는 이를 못마땅이 여겨 다른 혼처를 알아보지만 최순애는 완강히 거절했고, 1년 후 이원수가 감옥에서 풀려나 최순애 선생의 집으로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1936년 6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것이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 작사자 간 만남의 순애보이다.
최순애와 한국 아동문학의 큰 기둥인 이원수는 많은 동요를 발표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소실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오빠생각’ 작곡자 박태준
한편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에’로 시작되는 이은상의 시 ‘동무생각’에 곡조를 붙이는 등 유명한 작곡가인 박태준(1900~1986년)은 1930년에 ‘오빠 생각’에 곡을 붙여 동요를 만들었는데 시를 지은 최순애를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나중에 이원수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최순애 선생이 살아생전에 언론과 인터뷰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를 밝혔는데 이것이 이 노래에 대한 중요한 부분이다.
“그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계셨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오빠는 우리 집에서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사건을 피해 가까스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밖에 오질 못했다.
오빠가 집에 올 때는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 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 올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 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 귀뚜라미가 우는 겨울이 와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과수원 집 딸인 그녀는 오빠를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며 그리며 울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쓴 시(詩) 노래가 바로 ‘오빠 생각’이다.
2025년은 ‘오빠 생각’이 탄생한 지 100주 년이 되는 해이다.
2025년 5월에는 수원 화성 인근에 ‘오빠 생각 노래비’가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https://youtu.be/G7C3ZLJ7VaI
첫댓글 Yoonjin Kim: 어릴때 많이 불렀던 노래
추억이 새록새록♡
김석중: 열정에 그저 탄복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성홍: 항상 좋은 글로
마음의 양식을 찾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요즘 동요는 정말
귀한 자료라 더 고마움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