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당시의 승려인 양지(良志)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가 영묘사(靈竗寺)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각할 때에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운반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는
가문을 알 수 없는 신분이고, 지팡이와 자루를 보내 동냥을 했다고 하듯이 일반 백성
단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스스로 장인 노릇을 했다.
풍요라는
명칭은 민요라는 의미이지 개별 작품의 명칭은
아니다. 노동요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서민들의 애환을 두루 담고 있다.
'서럽더라'의 해석
1. 원하지 않은 노동에 동원되는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2. 불교적인 의미에서 인생이
무상하다.
중 양지(良志)는
그의 조상이나 주소는 알지 못하나, 선덕왕(善德王) 때 사람인 것만은 나타나 있다....
그는 여러 재주에도 능통해서 신묘(神妙)했고 글씨도 잘 썼다. 그리고 영묘사(靈廟寺)의
장육 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과 그 탑의 기와며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
신장(八部神將)이나 법림사의 주불 삼존상(主佛三尊像), 또는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이 다 그가 만든 바며, 영묘사와 법림사의 액자도 또한 그가 쓴 바다. 또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을 만들며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절에 안치하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의 장욕존상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마음을 한 경계에 정하고, 고요히 생각함)해서
법심(法心)의 태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성내의 남녀들이 모두 와 진흙을 나르며
풍요를 불렀다. 풍요에 이르되.... 지금(고려 충렬왕11년)도 시골에서 부녀들이 맞절구질할
때면 풍요를 부르니 이 노래가 그 때에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