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이라는 이름의 기원과 뜻
신라 제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비로소 거창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살거(居)자는 클거(巨)자와 음이 같고, 창성할창(昌)자는 날빛창이라고도 하여 밝은 것을 말함이니, 거창은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다시 말해 넓고 큰 밝은 들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 '아림' 의 뜻
지금의 거창읍 중앙리와 상림리에 걸친 자리의 관공서 터, 다시 말해 거창초등학교에서 거창세무서까지의 거창 한복판에 아름다운 숲이 있었는데 아림(娥:어여쁠 아, 林:수풀 림)이라 불렀고, 그속에 아림사(娥林寺)라는 큰 절이 있었습니다. 신라에서 고려말까지는 아림사가 이 고장을 다스렸다고여겨집니다. 조선조 때부터 그 절터에 관청이 자리하게 된 것이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아림은 숲과 절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고장의 별명으로 널리 부르고 있습니다.
◇ '경상남도' 이름이 생기기까지...
통일을 이룩한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때부터 행정구역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31대 신문왕(伸文王)17년(677)에는 9개 주(州)를 두었는데 그때까지 거타주라 하던 것을 지금의 진주에도 청주를 새로 두었다가 35대 경덕왕때 강주로 고쳤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고장은 거타주, 청주, 강주에 속했습니다.
고려 6대 성종 2년(983)전국을 12목으로 나눌 때는 진주목에 속했습니다.
고려 성종 14년(995)에 10도를 정했는데 낙동강 서쪽 대부분의 경남지역과 함께 산남도라 하였습니다.
그뒤 경상진주도(頸尙晉州道), 진합주도(晉陜州道),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 등 몇 차례의 변혁 끝에 27대 충숙왕 1년(1314)에 경상도(慶尙道)로 고쳤습니다. 이때의 경상도에는 충청도의 일부인 영동.옥천.보은등도 들어있었습니다.
조선초에는 고려 것을 대체로 그대로, 혹은 일부를 바꾸기도 하다가, 3대 태종때(1413, 도는 14116년설이 있음) 전국을 8도로 나누었다 합니다.
11대 중종(中宗) 14년(1519)이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左)도와 경상우(右)도로 나누었던 일도 있었으며, 14대 선조 25년(1592)에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경상우도였던 이곳은 경상남도(慶尙南道)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도청격인 감영 또는 관찰부를 조선 태종 때는 상주에,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는 상주, 경상좌도는 경주에 두었으며, 선조 26년 좌.우도를 통합하고 감영을 성주 팔거에 두었다가, 29(1596)년에는 달성, 32(1599)년에는 안동, 34(1601)년에는 대구에 두었고, 고종 33년(1896) 경상남도 도청은 진주에 두었다가, 일제 치하 1925년에 부산으로 옮겨, 광복 후까지 지속되다가 1983년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 읍.면 연혁
1. 거창읍(居昌邑)
지금의 중앙리 묵실마을을 뺀 대동리와 양평리의 노혜마을을 합하여 동부면이라 하였고, 상림리 일대를 천내면, 김천리.송정리.대평리.정장리를 천외면이라 하던 것을 1914년 3면을 합하여 읍내면이라 하다가 1937년에 거창면이라 고치고, 같은 해에 거창읍이 되었습니다.
사지마을을 제외한 지금의 서변리와동변리에 모곡면, 노혜마을을 제외한 양평리와 사지마을, 그리고 학리를 합친 곳에 음석면을 두었고, 지금의 가지리와 개봉마을(묵실)을 합쳐서 갈지면을 두었는데 1914년에 모곡.음석.개봉을 제외한 갈지 3개면을 묶어서 읍외면이라 하다가 1937년 중앙을 흐르는 냇물 아월천의 이름을 따서 월천면이라 고쳤으며, 1957년에 거창읍에 합쳤습니다.
2. 주상면(主尙面)
지금의 연교리.내오리.안대리 등 서쪽을 주곡면이라 하고, 도평리, 성기리. 거기기.남산리등 동쪽에지상곡면을 두었는데, 1414년 2면을 합하여 주상면이라 하였습니다.
3. 웅양면(熊楊面)
지금의 동호리.죽림리.노현리.산포리를 웅양면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본면의 남쪽 주상면 성기리와의 경계에 있는 산이 곰이 누어있는 모양이므로 와웅산 또는 곰내뫼라 하여 웅남이라고 섰다가 따뜻한 양지라는 뜻에서 웅양이라 하였습니다.
본면의 서북부인 군암리.신천리.한기리 일대의 분지를 따로이 적화현방 또는 적화면이라 하였습니다. 1914년에 2면을 합쳐서 오늘의 웅양면이 되엇습니다.
4. 고제면(高梯面)
거창과 옛 안의군이었던 지금의 북상.위천.마리방면에서 무주를 지나 서울로 가는 큰 길목인 농산리 입석마을의 냇물이 높이 6m, 길이 11m의 돌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로 말미암아 높은다리(高悌)라 이름하였습니다.
5. 북상면(北上面)
옛 안의군의 북동 상단에 있음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6. 위천면(渭川面)
지금의 장리기. 남산리,상천리,강천리 등 본면의 서쪽 부분은 가야.신라.고려 때 감은현의 치소가 있었으므로 고현면이라 하고, 동쪽 부분인 대정리,모동리,당신리 일대는 안의군의 북방의 아래쪽에 자리한다 하여 북하면 이라 하였습니다. 1914년 고현. 북하. 2면을 합하면서 가운데 흐르는 위수(渭水) 이름을 따서 위천면이라 고쳐서 거창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7. 마리면(馬利面)
본면의 남서부인 고학리.대동리.하고리 일대는 신라초까지 마리라 하다가 757년에 이안현이 되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에 속했다가 고려말 감음현으로 되고 조선조에 안음현.안의군의 남리면이 되었습니다. 북쪽의 영승리.율리.월계라 말흘리는 안의군이 동쪽을 이룬다 해서 동리면이라 하였다가 1914년에 남리.동리 2면을 합하여 마리면이라 고쳐서 거창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8. 남상면(南上面)
남상면엔 3개 면이 있었습니다. 북서부인 지금의 대산리.송변리와 무촌리의 일부인 지하동 일대를 청림면이라 하고, 무촌리.둔동리.오계리 등 남서부에 고천면과 월평리.전척리.임불리 등 동부에 남흥면이 있었는데, 이들 3개면을 합하여 남상면이라 하였습니다.
9. 남하면(南下面)
본시 북부의 둔마리.양항리 일대에 고모현면(古毛現面)이 있었고, 서남부인 무릉리와 대야리에 무등곡면(無等谷面)이 있었으며, 동쪽 지산리일대의 분지에는 따로 지차리면(只次理面)이 있었는데 3개면을 합쳐서 거창군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하면 이라 한 것입니다.
10. 신원면(神原面)
본래 삼가군에 속했는데 1914년에 삼가군을 합천군에 편입시키면서 그 일부인 지금의 본면의 서쪽일대인 과정리.와룡리.대현리.중유리. 덕산리.청수리등 신지면과 동쪽의 수원리.양지리.구사리 일대의 율원연을 1914년에 합하여서 신원면이라 이름짓고 거창군에 붙였습니다.
11. 가조면(加祚面)
본군의 동부를 이루는 큰 분지로서 가야.신자.고려시대를 통하여 가소.가조.함음.거제현,제창현 등으로 변혁을 겼었으며 가북면과 함계 757년부터 940년까지와 1414년이후로는 거창군 영역으로 연혁을 같이 했습니다. 본면의 서남부인 석강리.기리.대초리일대를 하가남면(下加南面)일부리.도리등 동북부에 상가남면(上加南面),서북부인 동예리.원천리일대에 가서면(加西面), 사병리.마상리.수월리등 북부 중앙 지대를 가동면(加洞面)이라 부르다 1914년에 하가남면을 가서면에 합하고,상가남면을 가동면에 합해서 2개면으로 되었던 것을 1928년에 하나의 면으로 묶어서 가조면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2. 가북면(加北面)
옛 가소(가조) 지역의 북쪽에 있기에 가북면이라 이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