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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公論政治의 確立과 慈仁復設 ---------- 205
선조로부터 대두한 사림정치(士林政治)는 재야유생을 포함하는 사림의 공론(公論)에 토대를 둔 정국운영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공론정치(公論政治)를 보장하는 정치구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공론정치는 정치참여 가능층의 확대를 보장하는 것으로 그 과정에 굴곡과 파탄이 있었다 할지라도 19세기 척신의 전제체제가 재확립되는 세도정치(勢道政治) 이전까지 군주와 사림세력의 합의에 따른 정국운영의 근간으로 존속하였다. 또한 공론정치는 사림세력의 분열로 야기된 붕당정치(朋黨政治)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공론대결로 분식된 당론(黨論)대결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붕당체제가 군주를 비롯한 권력구조에서 근본적으로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세력의 당론대결을 공론대결로 간주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 정치는 현실적으로 붕당과 공론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명분상으로는 붕당을 부정하고 공론을 용인하는 이율배반적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붕당정치ㅣ가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의 구조에서 운영된 것이라면 공론정치는 군주를 비롯한 권력구조를 포괄하여 운영된 것이라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 공론은 이이(李珥)가 “인심(人心)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바를 국시(國是)”라 정리한 바가 있으나, 조선 초기 이래 국가의 원기이자 국체(國體)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며 공론소재(公論所在)는 천심(天心)의 소재로 규정되고 있었다. 군주도 인심을 천심과 동일시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것으로 정통성을 부여받고 있는 한 공론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은 없었다. 또한 공론은 모든 인심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주에는 조관 뿐만 아니라 서민의 논의도 사실상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민의 논의를 수용한다는 것은 관념적 수사에 그치고 있었고, 단지 “유자(儒者)는 모두 공론이 있다”고 하여 유학자의 소양을 갖춘 양반유생들도 대간의 재조공론(在朝公論)과는 별도로 재야공론(在野公論)을 형성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생이 공론형성층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성종 23년 국가사(國家事)에만 상소(上疏)하도록 제한하는 규정이 마련되어 유소(儒疏)의 공론성이 확보되면서부터 였다. 연산군의 군주 전권체제 확립에 따라 일시 차단되었던 유생의 공론형성은 중종반정을 계기로 군신공치(君臣共治)의 논리가 강조되고 기묘사림이 등장하게 되면서 성균관 유생을 중심으로 촉진되고 있었다. 그들은 성학(聖學)을 공부하는 유생은 ‘국가의 흥망’과 ‘오도(吾道)의 성쇠’에 관련된 것에는 반드시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로 정치참여 명분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유향소(留鄕所)와 향청(鄕廳)을 배경으로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던 향촌유생도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유생들의 성장에 의해 인종이 성균관을 공론소재로 인정하여 유생의 시비참여를 보장하게 됨으로써 유생공론은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한 재조공론과 대등한 위상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조 문정대비(文定大妃)를 정점으로 한 척신정권이 다시 언관을 비롯한 유생공론을 통제하게 되었으나, 유생들은 궁중의 숭불(崇佛)행위를 호기로 활용하며 꾸준하게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지역적 연대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하여 명종 20년 언관들이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는 동안 유생들은 그들의 결집된 공론으로 청신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보우(普雨)를 집중 탄핵함으로써 재조공론과 역할분담의 방식으로 척신정권의 와해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같이 척신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사림공론의 위력은 뚜렷한 외척이 없는 선조에게 새로운 정국운영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림세력의 공론이 군권을 보장하는 대신 군주는 사림의 공론을 토대로 정국을 운영하는 상호 보험적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그러한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다. 곧 군주는 척신과 같은 특정의 소수 권력집단에 의존하지 않고 유생을 포함하는 사람의 공론을 근간으로 정국을 운영해야 한다는 공론정치의 기조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공론정치는 광해조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大北勢力)이 토역론(討逆論)으로 공론을 악용하여 권력의 집중화를 추구하는 등 굴곡이 있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일단 재정비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자인현민들의 복설운동(復設運動)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것으로 향촌의 공론형성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그들의 복설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원훈세력(元勳勢力)이 서인계 사림과 제휴하여 영남에 대한 탄압과 유화책을 병행한데 따른 정치적 분위기가 마련된 때문이기도 했다. 곧 반정주도 세력은 그들의 군주교체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조를 패륜에 의한 난정으로 규정하여 이와 연계된 남명학파(南冥學派)에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특히 경상우도에 탄압을 가하면서도, 이에 저항했거나 광해조의 정국에 책임이 없는 영남의 여타 지역에 대하여서는 다각도의 유화책을 보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반정의 명분획득을 위한 조정의 공론과 함께 재야사림의 폭넓은 공론을 확보해야 하는 그들의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인현민들은 공론을 표방하며 그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 했다. 물론 그들의 복현운동은 이때 와서 비로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광해군 즉위초 경주부에서 자인현의 복현이 실현될 것을 예상해 구사(仇史)에 별창(別倉)을 지어 자인현과 경제적으로 분리시키려 했던 점으로 미루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부터 그들의 복설운동의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전란으로 인한 피해가 격심하여 복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경주부의 속현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던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예상이 되고도 남는다.
임란 이후 전결수(田結數)가 감소한 것은 전국적 경향이었지만 왜병이 장기간 주둔했던 경상도 지방은 그 정도가 심하여 경작가능한 전결이 왜란 전 43만결이던 것이 1/6에 불과한 7만 결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다가 호조의 년간 경비 7만석에 비해 세입은 4만 석에 불과하여 추가 수미(收米)를 실시하는 상황이 거듭되고 있어 영남지역 백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혹심할 정도였다. 광해조 초반 “전란후 남은 백성이 열에 두셋인데 온갖 비용을 모두 민결(民結)에 부담시키므로 그 참혹함이 극심하다”고 한 호소는 전후 향촌의 실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자인현민은 이같은 보편적 상황에 함께 처해 있으면서도 간리(奸吏)들의 속현이라는 약점을 이용한 수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복현(復縣)은 그들에게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것이기도 했다.
조정의 분위기를 주시하던 자인의 현민들은 인조 10년(1632년)부터 본격적인 복설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먼저 현유(縣儒) 백렴(白濂)이 혼자 상경하여 경주부에 소속된 자인현을 독립된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억울하고 원통할 때 부모를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듯 자인현이 경주부의 속현이 된 이래 겪는 고통을 왕에게 호소하는 것은 백성의 당연한 도리라 전제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그처참한 실상을 밝히는 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렴의 단독상소는 그의 독자적인 판단의 산물은 아니었으며 사실상 현민들의 공론을 수렴한 것이었다. 백렴의 상소사실이 알려진 것을 계기로 경주부에서 자인현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던 것도 다수의 현민이 상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판단에 따라 관련자의 색출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세족(世族)들이 도피하고 소민들이 각지로 흩어져 현 전체가 비어버릴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 점에서도 그같은 사실은 확인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렴의 상소는 왕에게 봉입(捧入)되었고, 인조는 경상감영에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호조(戶曹)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감사 정세구(鄭世矩)가 민정을 조사하여 자인현이 경주부에 소속됨으로써 현민이 겪는 고통의 실상과 더불어 복설이 불가피한 것임을 밝히는 내용의 조사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이로 인해 호조에서는 부윤의 주장만을 수용하여 연혁과 후폐등을 이유로 복현이 불가한 것임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로써 자인현민의 복설에 대한 시도와 기대는 일단 무산되고 말았다.
백렴을 앞세운 자인현민의 복현청원 운동이 실패했음에도 경주부의 그들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몇 갑절이나 가중되었다. 예컨대 그들은 마을의 우물에 고의로 돌을 던져 넣어 훼방을 하기도 하고 사소한 잘못된 일도 억지로 들추어내어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인현의 대소민은 장차 수족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자인의 현민들은 경주부(慶州府)의 이 같은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인 인조 11년(1633) 정월 다시 복현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우선 백렴의 단독상소가 비록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복현에 대한 조정의 관심을 환기시키는데는 일단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여기에는 당시 복현을 방해했던 부윤이 교체되기는 했으나, 복현에 긍정적이었던 감사조차 바뀔 조짐을 보이는 등 현민들에게 상황이 절박하게 돌아가는 사정도 있었다.
복현을 목표로 한 상소운동을 재개하기로 결의한 자인의 유림들은 속현으로 남아있는 자인현의 현실을 조정에 소상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백렴의 단독상소로 인한 한계를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당시 복합상소를 추진한 것은 단독상소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복현이 자인현민(慈仁縣民)이 여망하는 일치된 공론임을 표방하기 위해서는 향민다수가 대궐로 나아가 복합의 형태로 청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한 결과라 하겠다. 이를 위해 생원(生員) 김응명(金應鳴)을 비롯한 유학(幼學) 최두립(崔斗立) 이시겸 이창후(李昌後) 등의 유림들이 앞장서 향론의 결집과 함께 상소를 위한 제반 준비를 주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그들은 사인(士人) 방희국(方熙國)을 소두(疏頭)로 추천하고 유생뿐만 아니라 상민을 포함한 현민3백여 명으로 구성된 소군(疎軍)을 결성했다.
이같이 복현을 위한 청원운동은 물론 자인현의 유림들이 주도하기는 했으나 상하의 현민이 함께 참여하여 복합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반적으로 상소는 조관 및 유생들이 공적인 일에만 국한하여 할 수 있는 것으로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국왕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향촌의 사족을 제외한 상민 천민들은 원칙상 공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으며, 억울한 사정이 있을 경우 수령에게 호소하거나 조정에 직접 상달할 필요가 있으면 상언(上言) 격쟁(擊錚)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복현과 같은 향촌의 현안에 대한 문제도 공적인 것으로 상소가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향토민의 공론이라 할지라도 유림들의 연명상소에 의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구나 영남지역이 여타지역에 비해 상소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할지라도 향촌사림의 공론을 반영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상소는 사족의 수가 적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파격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했을 때 유림들이 소임(疎任)을 담당하고 하층민이 참여한 자인현 복설청원 상소운동은 다시의 규제를 절묘하게 벗어나면서도, 사론(士論)이 곧 공론(公論)이라는 통념을 깨고 사족과 하층민이 대등한 관계에서 유대강화를 통한 공론형성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영남지역에서 임진왜란 이후 하층민들이 향촌의 복구에 참여하거나 사족지배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사족들이 그들을 향촌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할지 않을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사족중심의 동계(洞契)가 하층민이 참가하는 동약(洞約)으로 전환되어 가는 추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정치적 사안을 제외하고 당시에는 보기드문 3백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상경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발적으로 경비를 조달하는 한편 심지어는 빗을 내는 등의 방법으로 여비를 마련하여 참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자인현민들은 이 청원소(請願疎)에서 자인현이 거현(巨縣)임에도 불구하고 경주부에 소속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한편 그로 인해 현민들이 겪는 각종 고충과 실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독립된 현으로 복설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밝혔다. 여기서 그들은 20여 조목에 이른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복설의 이유로 지형적 조건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들은 자인현이 영천 하양 청도에 막혀 경주부와 격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상으로도 경산과는 15리, 하양과는 20리, 청도 대구와는 4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경주부와는 무려 120리나 떨어져 있으며 자인현에서 경주부로 가려면 준령(峻嶺)을 셋이나 넘어야 하고 대천도 셋이나 건너야 하는 불편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현민들이 경주부에 용무가 있어 왕래함으로써 발생하는 폐해와 실상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벽과 밤중에 왕래하거나 심지어 숙박을 해가며 출입해야 하고, 항상 호랑이와 표범을 두려워하거나 도적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올 때 고개를 넘는 사람은 산이 막히고 물이 넘치는 병통으로 물에 휩쓸릴 염려가 있으며,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릴 때 강을 건너는 사람은 짐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데다 역을 부담하는 인축(人畜)은 풍설(風雪)로 병들어 죽고 종군하는 사마(士馬)는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부에서 명령이 있게 되면 농사철을 넘기기가 일쑤이며, 공무가 급한 공상(工商)은 그 없을 망치기에 이르기도 하니 민(民)은 항산(恒産)이 없어지고, 사(士)는 항심(恒心)이 없어질 지경입니다. 부경(府境)의 대강이와 같고 현촌(縣村)의 피폐함이 또 이와 같으니 곡혈(曲穴)에 햇빛이 들 수 없고 음애(陰崖)에 양지바른 봄날이 퍼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점차 기강이 무너지고 명분이 문란해져 문풍은 단순해지고 풍속은 비루해지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지역간 이질성으로 인한 부민과 현민의 차별실상과 간리(奸吏)들의 농간의 실태를 폭로했다. 곧 경주부와 자인현은 주객의 관계로 그 형세가 다름에도 부담은 같게 하면서도 애증으로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데다, 간리들도 거리가 멀어 민소(民訴)가 쉽지 않은 약점을 악용해 자의로 가렴주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욕설과 구타를 자행하며 재산을 약탈하고 사족들도 그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같은 사실을 부윤에게 알려 정죄(正罪)하고자 하면 간리들이 서로 결탁하여 사실을 왜곡 날조하기를 일삼고, 나아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역을 부과할 때 불이익을 주기도 해 항의조차 하기가 어려워 하정(下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음으로써 생계를 부지할 수 없는 상황임을 하소연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인현이 왕토임에도 성화(聖化)가 미치지 않는 유일한 지역으로 규정하는 한편, 현민들이 품고 있는 원한도 깊어져 날로 퍼져가고 있는 성택(聖澤)이 무색한 실정이라며 개탄했다. 심지어 그들은 백렴의 상소로 자인현에 가해진 탄압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여자가 상심하면 3년동안 고한(辜限)을 겪어야 하고 필부(匹夫)가 재앙을 부르면 6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라며 극언하기까지 했다.
셋째, 그들은 연혁상 이유로 복설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논박했다. 우선 그들은 언양 기장과 하양 경산이 각기 울산 동래 및 대구의 속현으로 있다 복설된 선례가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그들은 요순(堯舜)이 천하의 9주를 12목으로 나누고 주(周) 무왕(武王)이 1800국으로 분리한 사실 등을 제시하며, 보국안민의 계책이라면 천하를 나눌 수도 있었는데 하물며 일개 현을 복설함에 연혁을 따진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하고 반문했다. 이어 그들은 설사 현이 혁속(革屬)되었다 할지라도 10년 이내에 복설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자인현만 무려 수백년간 복설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로 민물(民物)의 조잔(凋殘)을 드는데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사실 (복현이 불가한 이유로)민물이 조잔한 것을 들지만 현재 자인현민의 경우 물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군정도 번성합니다. 호구도 하양보다 10배가 넘고 미속(米粟)과 전재(錢財)도 7촌의 경산에 비해 훨씬 우세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남에게 의지해 독립하기 어려운 부용(附庸)이라 하겠지만 지금은 가히 후국(侯國)이라 할 수 있어 형제가 마땅한데 어찌 물(物)로서 연혁의 곤란함을 들겠습니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보민(保民)에 있고 보민의 방법은 연혁에 있으니, 연혁(沿革)을 든다는 것은 백성이 바라는 바를 따르자는 것으로 백성의 바램이 지극한데 따르지 않을자가 누구겠습니까. 연혁으로 백성이 편안해 진다면 그것은 국가와 실로 관련이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연혁을 기준으로 노력과 비용이 왕성한 것에만 치중한다면 왕성해도 이로울 것이 없고 백성에게도 해로울 것이니 연혁으로 복설의 곤란함을 말한다는 것은 추세에 어긋나는 도리입니다.
넷째, 그들은 복설로 인해 후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반박했다. 그들은 복현 여부는 그 지방의 광협(廣狹), 도리(道里)의 원근, 인민의 다과, 물력(物力)의 잔성(殘盛)과 더불어 사리와 형세를 상세히 살펴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모든 여건을 충족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현을 막으면 오히려 후례를 유발하게 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거들은자인현의 경우 현이면서도 이미 군의 형세를 갖추고 있는데다 향교가 이미 존재하고 객사(客舍) 관아구지(官衙舊趾)와 역관유허(驛館遺墟) 사직단(社稷壇) 빙고(氷庫)의 터도 그대로 있으며, 향리들도 대대로 호장(戶長)이 되어 인신(印信)을 서로 전하고 있고 관노 관비 관속의 자손들도 남아 있어 이 모든 것을 수합하면 독립된 현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에 후폐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섯째, 그들은 자인현민의 진충위국(盡忠爲國)을 감안해서라도 당연히 복현되어야 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그들은 임진왜란 당시 현에 소속된 정병예졸(精兵銳卒)들이 경주부에서 민물(民物)을 지키는데 기여했고, 다수의 사인(士人)들은 창의하여 자손과 노복을 불러모아 사방에서 왜적을 토멸했으며, 현민들은 창곡을 지키면서 3백리나 떨어진 동래까지 남부여대하여 명군(明軍)의 군량미를 조달해 준 점들을 지적했다. 또한 그들은 자인현으로 찾아온 인근 지역의 피난민들과 전란으로 피해가 막심한 지역에 곡식을 나누어줌으로써 국가의 곡식을 절약하도록 해 준 공로도 부연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역절(逆節)한 곳은 혁속(革屬)해야 함이 마땅하듯이 입절(立節)한 곳은 분설(分設)하도록 해야 조정의 상벌의 도리가 바로 서는 것이라 주장하며 자인현 복설의 당위를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수백 년동안 속현의 백성으로 겪어온 고통을 들어 복현이 현민의 절박한 소원이라는 점을 하소연했다. 그들은 경주부가 경사(京師)에서 8백리나 떨어져 있는데다 자인현이 속현으로 남아 있음으로써 성화(聖化)를 직접입을 기회가 더욱 없어져 겪은 고통이 천태만상으로 치유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경주부와 자인현의 악화된 상황을 뱀과 개구리, 형과 동생의 관계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생각건대 본부의 사람들은 현민을 침학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분설을 막고, 자인의 백성들은 본부의 침학을 면하려고 복설을 청원하고 있습니다. 피차가 원하는 것이 판이하게 다른데 저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어 약자를 부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지금은 뱀이 개구리를 삼키고 있고 개구리는 뱀의 입에서 처절하게 울며 측은한 상황에 있는 형국입니다. 뱀과 개구리는 뱀의 입에서 처절하게 울며 측은한 상황에 있는 형국입니다. 뱀과 개구리는 일물(一物)이나 사람이 개구리를 불쌍하게 여겨 뱀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강한 뱀이 약한 개구리를 삼켜 버리는 우환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무릇 인간에 있어서도 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형은 불량하고 동생은 나약한데 동생의 옷과 음식을 형이 뺏고 훔치면서도 상처를 입히고 멸시하며 급기야 활을 들고 덤비는데도 부모된 자가 만약 형제간 의리를 내세워 그 과실을고치도록 하지 않거나 심하게 나무라며 그 잘못을반성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형제를 따로 떼어 별도의 집에서 살도록 해야 형제간 우환도 점차 그치고 부모의 걱정도 다소나마 덜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경주는 재물을 탐하고 힘이 센 형이며 자인은 죄가 없는데도 피해를 입는 동생입니다. 모두 부모의 적자라면 경주 자인에 대해 어떠한 방법을 써야 마땅하겠습니까. 분리하여 둘로 나누어야만 경주는 경주대로 침학하지 않고 자인은 자인대로 곤경을 겪지 않고 각자의 토지를 경작하며 역(役)을 부담하여 일현(一縣)의 민생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군부(君父)의 적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같이 자인현민의 복설청원은 경주부의 속민으로서 겪는 그들의 고충을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사정에 따른 것으로 지역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지형적인 불합리성과 함께 차별대우의 실상을 부가하는 한편 임진왜란 당시 현민들의 공적과 더불어 자인현이 독립된 현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경주부나 조정에서 연혁과 후폐를 이유로 복설을반대한 것을 논리적으로 공박하며, 오히려 연혁상 복현이 당연한 것이고 후폐를 염려하는 것도 한갖 기우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 상소가 봉입되자 인조는 호조에 경상감영에서 자인현의 연혁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대신들과도 복현의 타당성 여부를 논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상감사의 보고를 토대로 묘당(廟堂:備邊司)에서 복현여부에 대한 회의가 열렸는데, 영상(領相) 윤방(尹昉)과 좌상(左相) 김류(金瑬)등은 현민들의 청원이 설득력이 있음을 들어 복현을 승낙하도록 계청(啓請)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주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당상(堂上)들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나섬으로써 자인현민이 염원하던 복현은 또다시 무산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조정의 분위기가 복현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경한 자인현민 삼백여 명은 3개월 동안이나 낙향하지 않고 도성에 머무르며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복설운동을 계속했다. 그 결과 동행한 사람들의 옷이 해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빚을 얻은 사람들은 흉년과 토색으로 그것을 갚으려면 집안이 기울고 심지어 파산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형편이었다. 더구나 그들으 도와주던 식객(食客) 여응복(余應福)이 복현을 호소하며 격쟁(擊錚)을 하다 장(杖) 일백에 3년간 백마산성으로 정배되는 등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안았다. 거기에다 부윤은 판민(判民)을 빙자하여 이들의 체포를 독려하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현임(縣任) 백현룡(白見龍) 최진강(崔振綱) 안종효(安宗孝)등이 경주부에 붙잡혀 형신(刑訊)을 당하였고, 다른 주동인물들은 산간벽지로 축출당했다. 경주부의 이같은 탄압으로 인해 요행히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피해 달아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주부의 자인현에 대한 탄압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왕은 경상감영에 자인현민들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말고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경주부윤은 이같은 왕의 처사에 반발하여 오히려 수차례에 걸쳐 피혐(避嫌)을 하면서 자인현민의 복설운동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한편 주동자 처벌의 당위를 주장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부윤의 주장을 수용하여 소두 방희국과 김근(金覲)에게 그 책임을 물어 장형에 처한 뒤 해읍(海邑)에 유배하는 조치를 내렸다.
향민의 공론을 결집한 이같은 상소로 인해 주동자 다수가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공론정치를 지향하는 당시의 정치관념상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향촌의 사림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되면 사기(士氣)를 꺾는 것이자 공론을 탄압한 것으로 간주되어 물의를 빚는 것이 당시의 정치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촌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려는 향민의 순수공론이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공론의 범주를 사론(士論)에 국한시키고 있던 관행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경주부윤은 사림의 공론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복현의 부당성보다는 상소의 파행성을 부각시켰던 것으로 보이며, 조정에서도 자인현의 사족들이 불순한 무리를 선동한 것으로 파악해 처벌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결국 자인현민이 갈망하던 복현은 다수의 피해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절박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복현운동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복현운동 과정에서 경주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고, 경주부의 탄압이 이전보다 훨씬 가중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이상 절망감으로 좌절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현을 방해하는 경주부의 이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강화됨으로써 그들의 복현운동은 쉽사리 재개될 수 없었다.
자인현민의 복현운동은 3년 뒤인 인조 15년에 와서야 비로소 재개될 수 있었다. 그것은 병자호란으로 자인현의 유생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왕을 호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인조 5년(1627)광해군의 복수를 표방하며 침입해 정묘호란을 일으킴으로써 조선과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물러갔던 만주족의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다시 군신지맹(君臣之盟)의 종속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조선측에서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인조 14년 말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청군의 급습으로 미처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조선군은 쉽게 무너져 버렸고, 왕자를 비롯한 왕족들은 강화도로 도피하고 왕과 일부 관료들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영남의 의병은 비록 임란 당시처럼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국난극복의 충의는 이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뒤에 검찰사(檢察使)로서 영남에 다녀온 정경세(鄭經世)는 왕에게 영남의병의 모병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신이 가만히 도내의 모병하는 일을 보니 임진년과는 같지 않습니다. 임진년에는 각읍의 수령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일시의 충의지사들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 수천의 건아들이 곧장 모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소절진(大小節鎭)에서 각기 그 무리를 통솔했기 때문에 사자(士子)들은 각기 정노(丁奴)들을 거느리는 정도였습니다. 막대를 만들어 대오를 이루니 조종의 유택이 사람들에게 있음을 볼 수 있었으며, 사자들도 유현(儒賢)의 가르침을 습득하여 다투어 충의의 기풍을 권하니 역시 장려할만 했습니다....
영남에서는 경상감사 심연(沈演)이 이끄는 관군 외에도 전부제학(前副提學) 전식(全湜)이 창의대장(倡義大將)이 되어 의병을 규합하고 있었다. 자인의 유생들도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의병을 일으키는 한편 백현룡으로 하여금 산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종하게 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된데 이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인조도 45일간의 항전 끝에 항복함으로써 소위 병자호란은 조선이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을 군신의 예로서 섬긴다는 굴욕적인 맹약을 맺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령을 넘던 도중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자인의 병도 결국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채 해산하게 되었다.
청과 강화를 맺고 남한산성에서 환궁한 인조는 전란의 수습과 국가재건을 위한 방안마련을 위해 전국에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창의대장 전식을 만난 자리에서 영남의 사대부들이 임금을 저버리지 않고 창의한 사실을 치하하며 그에게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 왕을 호종하고 있던 백현룡은 지금이 복설청원을 할 수 있는 호기라 판단하고 급히 자인으로 내려와 복현추진을 주도하던 인물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에 따라 자인현의 유림들은 다시 복현 운동을 조직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곧 백현룡(白見龍) 이창후가 복현의 당위를 내세워 인심을 규합하고, 방희국(方熙國) 김응명(金應鳴)은 소장(疏章)의 작성을 비롯해 소행(疎行)과 관련한 제반업무를 담당했다. 그 결과 이시혐(李時馦)이 소두(疏頭)가 되고 김상건(金尙蹇) 박경룡(朴慶龍)이 배소(陪疎)가 되어 복현청원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그들이 올린 3차 상소의 내용은 방희국이 소두가 되어 올린 2차 청원소와 대동소이하나, 여기서도 그들은 경주부와 차별대우로 인해 겪는 자인현민의 고통을 특히 부각시켰다.
경주부와 자인현은 주객으로 그 형세가 다름에도 모든 요역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균등하지 못한데다, 후박은원(厚薄恩怨)은 애증에서 나오고 손삭배빈(損削排擯)도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간리들은 본현에서 사복을 채우고자 하여 조종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징렴(徵斂)에 있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이미 납부한 것조차 달아보지도 않으며 허실과 완급을 따지지 않고 위세로 겁을 주며 공리를 앞세워 사리를 취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을 메꾸지 못하면 독수노권(毒手怒拳)과 패언욕담(悖言辱談)을 일삼는데다 의관을 찢고 폭행을 자행하며 손발을 묶고 억류하기조차 합니다. 침탈당하는 사람들은 사방에 빚을 내어 주육(酒肉)으로 대접하고 가재를 털어 뇌물을 바쳐야 겨우 협박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니, 이는 오직 공문(公門)이 너무 멀어 민소(民訴)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간혹 부윤에게 알려 법에 따라 정죄(正罪)하려 하면 그들끼리 동심(同心)으로 구제하며 농간을 부려 명부(明府)의 눈을 가리고 서로 변명하면서 반대로 모함함으로써 공연한 일이 되고 마는게 일쑤입니다. 게다가 복역할 때에는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은연중 화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하정은 통하지 못해 폐해가 만연하여 현민들은 생업을 감당하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또한 그들은 2차상소 후 경주부의 위협과 탄압으로 인해 고향을 떠난 상소인들이 적지 않음을 들어, 자신들의 진소(陳疏)가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할 경우 현민들 모두가 겪을 고통도 충분히 예견되는 것이라며 절박한 사정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들은 현민 모두가 궐문 앞에 엎드려 하명을 기다리고자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동행하지 못하고 소두 이하 몇 명만이 일현(一縣)이 원소(冤訴)를 대표하여 청원하게 된 것임도 구태여 밝혔다. 이는 상하현민 다수가 복궐하여 향촌공론을 과시하려 했던 2차상소가 오히려 부작용을 야기했던 점을 교훈 삼아 소사(疎事)의 정형성(定形性)을 표방하기 위한 의도가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상소가 봉입되자 인조는 묘당에 감사로 하여금 형세를 깊이 살피고 물정을 참작하여 조사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감사 이경여(李敬輿)는 경주부 이예(吏隸)들의 자인현민에 대한 침탈의 실정을 직시하며 이로 인해 부와 현이 물과 불의 관계에 있음을 전하는 한편
본현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조석을 보장받지 못함으로써 파가유리(破家流離)하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경주부에 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세가 불행하고 정실이 급박한 상황입니다. 만약 지금 변통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현민들이 각지로 흩어져 버리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물력은 시용(時用)으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는데다 전결(田結)은 이미 천결을 넘어서고 노비 관속도 약간 있어 진보(眞寶)등과 같은 읍에 비해 오히려 사정이 나은 실정입니다. 조정에서 경중을 살펴 선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며 자인의 복설을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에 근거하여 인조는 현민의 피폐한 실정이 그와 같다면 속현이 된지 오래된 일이라는 것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복설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자인현은 고려 현종 9년(1018) 경주부의 속현으로 편입된 이래 실로 619년 만에 독립된 현으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복현이 결정되자 이조에서 참판(參判) 김식(金湜)의 주관으로 현감을 의망(擬望)하여 임선백(任善伯)을 최종 낙점했다. 이에 따라 임선백은 6월 23일 독립된 자인현의 초대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 말자 관아를 증수하는 등 초창기의 각종 난관을 극복하고 토대를 구축하는데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