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속 풍경화
강흥구
거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동양화를 바라본다. 지난 세월만큼 먼지가 잔뜩 올라붙어있다. 털고 닦아주었다. 그런데도 빛이 나질 않는다. 색이 바래 그런가보다. 같은 장소에 같은 모습으로 늘 걸려있는 액자지만 그다지 지겹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액자 청소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틀 안에 있는 풍경화를 본다.
창틀이 만들어준 액자 속 풍경화가 오늘은 변화가 없다. 어제 그 모습 그대로다. 낙엽 진 앙상한 가지들을 조용히 매단 채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서 있는 나무들뿐이다. 새 한 마리 없이 그저 쓸쓸함 그 자체다. 그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비친다. 한때 연둣빛 새싹과 검푸른 숲, 노랗고 빨간 단풍,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자태를 뽐내던 풍경화가 이젠 쓸쓸함을 안겨준다. 흔들림 없는 가지들로 보아 바람도 없는 듯하다. 사시사철 변화를 가져다주어 나를 깨워주는 또 다른 액자 속 풍경화다.
연둣빛 가지가 움직인다. 그 아래 바닥엔 새싹이 돋아나 파랗게 채색된다. 이를 밝혀주려는 듯 파란 하늘에 구름을 그려 넣는다. 해가 떠오르면 더욱 강한 색채로 변해가고 어둠이 찾아오면 풍경화 속 그림들은 사라지고 별빛만이 반짝인다. 잠시도 같은 그림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달력이 넘겨지면 풍경화는 빠르게 변한다. 잎은 점점 커져 햇빛을 감추고 꽃을 피운다. 새와 벌‧ 나비도 날아든다. 새순 길게 자란 소나무는 노란 송홧가루를 날려 대지를 덮는다. 하늘 어두운 날 풍경화 속에 비가 내리며 송홧가루를 씻어내고 생동감을 더해준다. 자라나는 생명체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준 것이다. 비 갠 오후, 풍경화도 맑게 갠다. 검푸른 나뭇잎은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린다.
폭풍우 몰아치던 날이면 액자가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롭다. 풍경화 속 나무들이 꺾일 듯 휘어지고 몸부림친다. 애처롭다. 바람을 피해 옮겨주고 싶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한번 설치된 액자는 요지부동이다. 그저 애태우며 폭풍우가 지나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림이 다 망가진다. 시간이 지나 평화가 찾아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풍경화는 제자리를 찾아 원형을 복구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림이 또 변했다. 가지마다 열매가 익어가고 잎도 채색된다. 빨강, 노랑, 물감으로는 표현하기 힘들 것 같은 색깔로 물들인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또 다른 색으로 변해간다. 이제 성장을 멈추고 겨울을 준비하나 보다. 파랗게 채색되었던 바닥도 갈황색으로 변해 간다. 솔방울 사이로 다람쥐가 바쁘게 지나간다.
며칠 전 풍경화가 하얗게 변했다. 지루했던 앙상한 나뭇가지에 하얀 눈을 살포시 올려놓아 변화를 주었다. 날이 따뜻하면 녹아 없어지겠지 생각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다음은 다음에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겨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 잡았다.
정지된 것은 변화를 추구하지 못한다. 물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썩듯이 생각도 머무르면 썩게 된다. 나의 풍경화는 일 년 동안 영화 속 장면처럼 변화를 전해주며 나의 정체성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창밖 풍경이 변하듯 생각도 다양하게 변화를 가지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창이라는 액자 속 풍경화를 감상하며 나를 그림 속에 넣어본다. 내 마음의 창, 내 마음의 액자에는 어떤 그림으로 변화할까 생각해 본다. 항상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나에게 변화를 느껴보라고 등 떠밀어본다.
첫댓글 액자 속의 머물러 있는 풍경화를 보다가
유리창이 만들어준 변하는 풍경화를 보면서
자신의 마음 속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솜씨가 참 대단하십니다.
우리에게 육신은 성장을 멈추지만
정신 세계는 죽는 날까지 성장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깨우침의 수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멋과 맛이 깊이 우러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항상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나에게 변화를 느껴보라고 등 떠밀어본다....글쓴이가 누구인 지 모른다면....부드러운 감성을 지적으로 풀어내는 여작가님일 것이라는 추측이 들 정도로 샤방방한 감성이 깔려있네요...언제나 고여있지 않으려 애 쓰시는 강선생님....응원의 박수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