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은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 병진원년(B.C. 425)에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진한이 삼조선을 통괄하면서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을 다스렸다. 3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제후국들은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이 각각 망함에 따라 국토가 분열되고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북방 제후들이 자웅을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가 10여 개국이 세워져 약 2세기간에 걸쳐 열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열국중 종주국 격인 북부여는 진조선이 폐관하기 일년 전인 임술년(B.C. 239)에 종실(宗室)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하였다. 을미년(B.C. 86)에는 동부여(가섭원부여)가 분리되고, 동부여에서 남부여가 분리되고, 계해년(B.C. 58)에는 고추모(고주몽)가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 비류백제, 온조백제 등이 건국되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이 성장·발전하면서 열국이 정비되었고, 서기 3, 4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등이 만주와 북중국 일대 고토(故土)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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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시대 관련 자료
한단시대 7000년은 인간의 신성을 중심으로 삼는 높은 의식이 사회를 주도했던 시대였다. 특히 단군조선 시대에는 방대한 수의 부족들과 나라들이 단군의 지배아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았었다. 그런데 고열가 단제의 폐관을 기점으로 인간완성의 기준을 잃어 버렸으며 그로부터 인류 전체는 神性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獸性을 중심으로 한 약육강식의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단군 조선이 쇠망 한 후 얼마간은 스스로 단군의 후예임을 칭한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가장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후 차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강성해지고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면서 4국 시대를 맞게된다. 부여 1. 북부여 단군 조선시대의 부여국은 단군왕검 임금의 넷째 아들인 부여를 오늘날의 만주 하얼빈 서남방에 위치한 부여 지방의 후(候)로 봉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부여는 남으로 발해만, 서로는 난하 및 천진 지방, 동으로는 대능하 유역까지를 강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 고열가의 종실이었던 해모수는 단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웅신산에 제실을 짓고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제위에 오른 후 북부여를 건국(기원전 239년 4월8일) 했으며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올랐다.
2.북부여의 번성과 멸망 단군 조선의 진 조선과 번 조선을 차지한 북부여는 자연 강한 군사력을 가졌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했으며 몸집이 크고 성격이 굳세며 용감하여 다른 나라와 싸워 진일이 없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북부여 4대 고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재위 1년만에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에 쫓기어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후 동부여, 혹은 가섭원부여 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두법 으로는 갈사국이라 표현했으며 지나의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옥저(沃沮)라고 불렀다. 5대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던 부여는 이후 세력이 커진 고구려에 병합되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지 108년만에 막을 내렸다(단기 2355년)
고구려 현재 고구려는 단기 2775년(서기전 194년)고주몽이 건국한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호태왕비와 기타 여러 사료를 통해볼 때 조선이 멸망한 후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 고구려가 건국된 것을 볼 수 있다
1.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 아니라 900년이다. 1) 호태왕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광개토대제는 고구려의 19대 임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제의 공적을 기록한 호태왕비에는 호태왕이 동명성왕이후 17세손 이라고 기록했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것 도 아니고 서거한지 2년 뒤, 아들인 장수제에 의해 세워졌는데 잘못 기록해 놓을 리가 없다 그 비밀은 대(代:19대)와 세손(世孫:17세손)은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등이 왕위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4대 민중제= 3대 대무신제의 동생 6대 태조제= 2대 유리명제의 손자 7대 차제= 6대 태조제의 동생 8대 신대제= 7대 차제의 동생 10대 산상제= 9대 고국천제의 동생 18대 고국양제= 소수림제의 동생
북한학자 김일출은 이 경우 6대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6세대가 삭제되었으며 따라서 광개토대제는 19대가 아니라 25대왕, 동명성왕의 17세손이 된다. 그렇다면 1세대당 30년씩 계산해도 약 200년 정도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올라간다.
2)삼국사기의 고구려비기 고구려가 망하기 전 당의 군사밀정인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에게 한 보고의 내용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 고려비기(高麗秘記)라는 책에 고구려가 900년이 못되어 80먹은 대장에게 멸망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한나라 건국(=기원전 221년)때부터 나라가 있었으며 지금(668년)이 꼭 900년이 되는해 이며(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이세적 장군의 나이가 마침 80세입니다.
2. 고구려의 성장 -3페이지 고구려건국 시조인 東明聖帝의 연호는 다물 이었다. 다물 이란 땅을 되 물린다는 의미의 고어이며, 단군 조선의 잃어버린 정신과 영토를 다시 찾는다는 염원이 서린 말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조선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건국초기부터 고토 회복을 위해 주변 소국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통합에 나서, 동명성제 대에는 비류국(沸流國),해인국(海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2대 유리명제 대에는 선비족(鮮卑族)과 양맥(梁貊)을, 대무신제 대에는 개마국(蓋馬國)구다국(句茶國) 낙랑국(樂浪國)을 차례로 병합하였다.
소국들을 병합하여 세력이 신장된 고구려는 단군 조선 멸망 시에 요동지방에 진출했던 漢의 세력을 물려받은 後漢과 세 대결을 시작했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후한은 대무신제 때 요동태수가 이끄는 10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명재상 을두지의 지휘아래 일치단결 하여 싸우는 고구려 군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일이 있다.(서기28년) 또한 태조제대에 갈사국(曷思國:남동부여) ,조나국(藻那國), 주나국(朱那國),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면서 세력이 크게 팽창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後漢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강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후한의 요동지역을 선제 공격하여 6개 현을 정복하였고,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여 후한의 세력을 위축 시켰으며, 요동지역 일부를 점령하였고, 남으로는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며 산동반도는 물론 그 너머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명실공히 대륙의 맹주로 등장했다. 또한 태조대제 이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종주국임을 내외에 천명 하였다.
3. 고구려의 흥망, 의의 고구려는 광개토경호태왕(광개토대제) ,장수홍제호태열제(장수왕), 문자호태열제(문자왕)등의 치세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국가들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더 강성해 졌다. 그리고 백제의 세력권 이었던 제, 노, 오, 월나라까지도 병합하고, 평원왕(평강상호태열제), 영양왕(영양무원호태열제)등을 거치면서 그 세력은 더운 커지고 번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300년 가까운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나리인 隨에 의해 통일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隨는 대륙을 통일하자 고구려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연전연패 한 후 결국 멸망하고, 수의 뒤를 이어 중원을 통일한 唐역시 고구려를 제압할 필요를 절감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외침에 강했던 고구려는 내부의 분열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함으로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서한, 신, 동한, 위, 촉, 오, 서진, 동진, 5족의 16국 남북조의 9국, 수, 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개의 나라가 명멸하는 동안 천년왕조 고구려는 북방의 방파제, 그리고 겨레의 맏형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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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1. 고구려의 수도 : 고구려의 수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 졸본(홀본)지역 졸본(홀본) 지역에는 비류수 가에 두 성이 있다. 흘승골성과 하고성자 토성이다. 험난한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흘승골성은 서쪽은 절벽에 의지하여 따로 성을 쌓지 않았고 서쪽에 비해 완만한 동쪽은 성벽을 쌓아 방비하였다. 현재 흘승골성 유적지에서는 많은 집터가 발견되어 고구려의 초기도읍지로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흘승골성 아래쪽에 있는 하고성자 토성은 지금은 홍수나 사람들에 의해 많이 파손되고 흔적만 남아있다. 흘승골성은 산성, 하고성자 토성은 평지성으로 추정이 되는데, 평소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 토성에 있다가 전쟁 시에 산성인 흘승골성으로 대피한 것으로 보여진다. 2) 집안 지역 현재 집안시에는 국내성, 환도산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유적지가 있다. 바로 이 집안 지역에는 그 유명한 태왕릉,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이 위치하고, 환도산성 앞에는 고구려 양식의 돌무지무덤들이 많이 있니다. 20세기 초 만하더라도 국내성 성벽은 건재했었으나, 지금은 성벽부분이 훼손되었다. 그래도 중국정부가 국내성 성벽을 다시 복원하고는 있다. 그리고 환도산성 유적에서는 궁궐터, 병영터 유적과 점장대(전투지휘대), 남문, 서벽 유적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로서 평지성은 국내성, 산성은 환도성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환도성이 수도 역할을 다 할 때도 있었다. 3) 평양지역 사실 장수왕 때 천도한 수도와 고구려 후기에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는 수도 평양은 다르다. 장수왕 때 국내성으로부터 천도한 성은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이었다. 이 성들 또한 현재의 평양 지역 주변에 분포해 있다. 안학궁성과 대성산성 또한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로서, 평시에는 안학궁성에, 전시에는 대성산성으로 대피하였다. 지금 안학궁성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불렸다. 평원왕 때 20년이 많이 넘는 공사기간이 끝나고 완공되었다. 평양성은 기존의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아니다. 수도를 하나의 성으로 묶었다. 평양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평양성은 보통강과 대동강을 해자로 삼은 성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북한의 수도 평양시가지와 유사하다. 2. 고구려의 주요사건 1) 고구려 건국 고구려 건국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전 37년 건국되었다. 부여에서 도망쳐 온 주몽의 세력과 졸본부여 혹은, 그 토착민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고구려가 세워진 직후, 추모왕(주몽)은 주변국들을 통합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2) 선비 복속, 학반령 전투 유리왕 시기에 고구려의 장수 부분노가 계책을 통하여 선비를 복속시킨다. 또한, 북쪽의 강국이었던 부여국이 고구려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그러나 그 당시 태자였던 무휼에 의해 부여는 학반령에서 패배한다. 3) 부여 정벌, 낙랑국 정복 대무신왕 때 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의 목을 베어 부여를 혼란에 빠뜨리고, 남쪽의 낙랑국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힌다. 4) 명림답부의 혁명, 좌원대첩 태조왕에 이어 왕위를 받은 차대왕이 폭정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명림답부는 반란을 일으켜 차대왕을 제거하고 동생을 왕위에 추대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다. 이것을 계기로 명림답부가 속해 있던 연나부의 힘이 강성해져 왕실과 나란히 하게 된다. 그리고 신대왕 시기에 한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이 때, 명림답부가 출전하여 좌원에서 대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바로 좌원대첩이다. 5) 고국천왕의 진대법 고국천왕은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그 뒤에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진대법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제도로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6) 관구검의 침입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동천왕 때에 쳐들어온다. 1차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하였지만, 2차 전투에서는 동천왕이 자만하여 관구검의 군대를 얕잡아보고 전쟁에 임 하자, 관구검 군대의 진법에 의해 고구려는 패배하고 뒤이어 수도가 함락당하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충신 밀우와 유유 등의 활약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관구검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7) 창조리의 혁명 봉상왕이 폭정을 하여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해 궁궐을 짓게 하는 등의 노역을 백성들에게 지우자, 국상 창조리는 반란을 일으키고 떠돌아 다니던 왕족 을불을 추대하였다. 왕위에 오른 을불이 바로 미천왕이다. 8) 연의 침입, 백제의 공격 고국원왕 때에 전연이 침입하였다. 고구려 수도로 가는 길은 북로와 남로가 있는데, 전연은 북로로 강병을 보내였고 남로로는 소규모군대를 보낸다. 이런 전연의 전략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고국원왕은 북로에 소규모군대를 두고 남로에 강병을 두었다. 결국, 남로에서는 가볍게 고구려가 승리했지만, 북로에서는 전연의 강병에게 길이 뚫려 수도를 함락당하였다. 수도에 침입한 전연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주씨와 왕비를 사로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북방으로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남쪽으로 진출하려하여 백제를 공격하였지만, 번번이 패배했고 백제는 고구려를 역공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었다. 9) 소수림왕의 정책 소수림왕은 전진에게서 불교를 받아들여 이불란사와 초문사(성문사)를 짓고 공인하였다. 또한, 소수림왕은 중앙에 태학을 두어 교육을 강화하였고 율령체제를 반포하여 국가질서를 바로잡았다. 10) 광개토태왕의 활동 광개토태왕은 즉위 후,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에게 앙갚음을 하고 남방에 진출하기 위해 백제를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고 북방으로 진출해서 거란, 동부여, 후연 등을 정벌하여 영토를 크게 넓힌다. 남방의 신라가 백제-가야-왜 연합군에게 침입 당하자 신라에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5만의 군대를 보내 구휼하여 신라를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게 하였다. 11) 장수왕의 외교활동 장수왕은 광개토태왕이 넓혀놓은 영토를 유지하면서 서북쪽의 지두우를 유연과의 외교활동을 통해 나눈다. 그리고 중국의 남북조를 이용하고 북방민족인 유연과 남조와의 외교를 통해 북조의 북위를 견제하는 동시에 북위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견제와 함께 연합을 동시에 하는 고품격 외교를 보여준다. 12) 부여 완전 정복 문자명왕 때에 북방의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 건국 이후로 견제하던 부여를 완전히 복속하였다. 13) 안장왕의 한강 유역 회복 안장왕은 문자명왕 시기에 나제동맹으로 연합한 백제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 영토를 군사를 일으켜 다시 회복한다. 14) 돌궐과의 전투, 백제와 신라의 남쪽 압박 북방족속인 유연이 쇠퇴하고 유연의 지배에 있던 돌궐이 발흥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양원왕 때에 일이다. 양원왕은 백암성을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돌궐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돌궐이 침입하자, 백암성에서 굳세게 막아 돌궐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돌궐과의 전쟁 중에 고구려의 남쪽을 압박하였던 나제동맹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15) 고구려와 수, 당과의 전쟁 고구려가 평원왕 때 평화를 되찾아 안정에 접어든 뒤, 영양왕 때 요서 지방에 수나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한 영양왕은 말갈병 1만명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자, 수문제는 30만의 수나라군에 고구려 공격을 지시하여 출정했으나, 폭풍과 비와 질병으로 인해 물러난다. 이것이 바로 고수 1차 전쟁이다. 2차 전쟁 때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군선을 건조하게 하고 113만명과 병참부대까지 삼백만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요동성으로 직행하여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하지만,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수양제는 따로 별동대 30만을 편성하여 평양성으로 직접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은 별동대 30만은 살수대첩에서 대부분 전사하고 수 천명만 남은 채 수양제에게로 돌아온다. 결국 고구려공격을 실패한 수양제는 급히 철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고수 2차 전쟁이다. 그 뒤 수양제는 3차, 4차 출정까지 단행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조성 등을 이유로 쇠퇴하자 중국 전역에서 반란군들이 일어나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중국 전역의 세력들을 모두 통합하여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당고조에 이은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결정하고 수나라가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으나 패한 것을 교훈삼아 정예병 30만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쳐들어갔다. 당나라군은 신성, 개모성, 요동성까지 함락하며 전진해갔다. 하지만, 안시성에 도착한 당나라군은 60일 동안 안시성을 점령하려고 하지만 실패하여 급히 빠져나와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고당전쟁이다. 16)살수대첩 제 2차 고수전쟁 때 있었던 전투로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우중문이 이끄는 별동대 30만명을 을지문덕과 고구려 군사들이 유인하여 평양성 근처까지 오게 한 뒤 맹공격하여 다시 수나라군 30만명을 살수 이북으로 후퇴하도록 만든다. 수나라군이 살수 이북으로 후퇴하려고 살수를 건너는 중에 댐을 터뜨려 수나라군 대부분을 수몰시킵니다. 이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의 대군은 철수하였다. 17) 연개소문의 정변 천리장성 감역으로 가있던 연개소문은 대신들과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대신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 100여명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킨다. 반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죽은 영류왕의 조카인 장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조카 장이 바로 보장왕이다. 18) 고구려의 멸망 연이은 당나라 대군의 침입으로 인해 생산기반이 무너진 고구려는 점차 수도 근처로 영역이 좁혀지고 요동의 주요성들도 함락당하거나 항복하였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밀고 올라오자, 한성에 있던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가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렇게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 평양성이 포위당하지만, 고구려는 끝까지 버티며 항전하였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이 회유한 승려 신성이 평양성 문을 열어줌으로 결국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북쪽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성들이 차례차례 함락 당함으로 고구려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3. 고구려의 임금들 고구려는 소국으로 시작해 빠르게 중앙집권을 이뤄내고 700년이 조금 넘는 장구한 역사를 일궈낸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추모왕의 건국에서 부터 시작하였다. 1) 추모왕 추모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전 37년에 지금의 비류수 가에 나라를 건국한다. 그는 비류수 가에 자리한 비류국 송양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비류국 송양왕을 다물후로 인정하여 비류국을 통합하였다. 비류국을 통합시킨 추모왕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행인국, 북옥저를 점령하고 직접 지배를 하였다. 2) 유리왕 유리왕은 동부여에서 이주하여 추모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에 관한 업적은, 선비족을 전략으로 굴복시키고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것이다. 특별한 것은, 유리왕이 해씨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리왕으로 유명한 문학작품이 바로 '황조가'이다. 3)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이름그대로 전생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왕이다. 그는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는 성과를 거뒀고, 그의 세대부터 부여는 차츰 고구려에게 밀려간다. 그리고 대무신왕은 남쪽의 낙랑국을 정복하였고, 후한이 쳐들어오자 계략을 통해 자진해서 물러가게 하는 등 지혜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의 업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낙랑국 정복이라고 하겠다. 4) 민중왕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동생으로서 5년 동안 왕위 있었으나, 특별한 업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5) 모본왕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아들로 [삼국사기]에서는 대단한 폭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의심할 필요가 있다. 모본왕의 기록에는 대단히 흉폭하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본왕의 모습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본왕은 군사를 내어 후한의 상곡, 어양, 태원 지방을 공격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모본왕은 신하 두로에 의해 살해되었다. 6) 태조왕 태조왕은 고구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 등을 정복하고 책성 지역에 순수함으로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태조왕 시기에 후한과 많은 전투가 벌어지는 데,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요동군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태조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94년 동안이나 재위에 있었다. 7) 차대왕 차대왕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조왕의 큰아들인 막근을 죽인다.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차대왕에 대해 전쟁기사가 보이지만,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뚜렷한 업적은 보이지 않는다. 차대왕은 명림답부 혁명에 의해 죽는다. 8) 신대왕 신대왕은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이다. 차대왕이 자신을 죽일까봐 산골로 피해 다니다가 명립답부의 혁명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의 재위기간에 후한의 대군이 쳐들어왔다. 이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출전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좌원대첩이다. 9) 고국천왕 고국천왕은 진대법과 을파소 등용으로 유명한 왕이다. 그는 을파소를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진대법이란, 춘궁기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갚게하는 제도로서, 농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10) 산상왕 산상왕은 고국천왕이 갑자기 죽자, 우씨왕후와 연합하여 왕위에 오른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결혼풍습인 형수취수제를 엿볼 수 있다. 산상왕 2년 환도산성을 쌓았다. 11) 동천왕 동천왕 시대에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해지는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왕이고 그가 죽자 신하들이 그의 무덤 앞에서 자결하여 같이 묻히려고 했다고 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2) 중천왕 중천왕은 동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다. 중천왕 시기에는 각 나부들이 수도에 모여 살게 되면서 각 나부가 점점 해체되어 편입되기에 이른다. 또, 중천왕 시기에는 중앙 나부와 권력에서 먼 나부로 나부가 갈렸는데,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관나부인 이야기이다. 13) 서천왕 서천왕은 중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다. 서천왕 시기에는 모용선비가 급부상하여 모용선비와 전쟁을 치룬다. 모용선비가 부여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부여를 도와주어 모용선비를 쫓아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동북쪽의 숙신족을 정벌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14) 봉상왕 봉상왕은 서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fms다.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포악하였다고 하였다. 봉상왕 시기에는 모용선비가 자주 침입하였다. 봉상왕은 궁궐을 크게 짓고 사치를 하는 등 횡포를 저지른다. 결국, 국상 창조리는 혁명을 일으켜서 봉상왕을 몰아내었다. 15) 미천왕 미천왕은 봉상왕의 동생인 돌고의 아들이다. 그는 봉상왕의 숙청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하여 갖은 고생을 하였다. 고용농으로 일하거나, 소금장수로 일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지만, 창조리의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공격하여 빼앗고,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대방까지 공격하였다. 그는 봉상왕 때 잦은 침입을 했던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우문선비, 단선비, 서진과 함께 공격하는 등 정복활동을 많이 하였다. 16) 고국원왕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다. 그의 재위기간은 고구려의 위기라고 설명되어진다. 고국원왕 12년에 모용선비가 쳐들어와서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아가는 위기를 겪습니다. 그리고 백제와 많은 전쟁을 하나, 그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의 재위 아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번이 참패를 당합니다. 결국 고국원왕은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 때에 전사합니다. 17) 소수림왕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불교를 전진에서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법률을 정합니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내실을 다지는 작업을 통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에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강국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18) 고국양왕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고국양왕 때에 불교를 권장하고 국사와 종묘를 수리합니다. 19)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18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광개토대왕의 정식시호는 호우명 그릇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고 광개토대왕비에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합니다. 또한, 연호를 사용했는데, 바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먼저 백제를 굴복시킵니다. 수륙양면의 뛰어난 계책을 통해 백제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남녀 1천여 명을 끌고 갑니다. 그리고 신라가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격퇴해줄 것을 요청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 종발성까지 이르는 등 연합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신라에 대해 간섭합니다. 광개토대왕은 모용선비족의 나라인 후연과의 오랜 악연을 정리하고자 공격을 준비합니다. 후연이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의 신성, 남소성을 빼앗습니다. 영락 12년, 드디어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힙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거란을 정벌하였고 동부여에 대해 지배권을 강화하는 등 영토를 크게 넓힌 왕이었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 왕이었습니다. 20) 장수왕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장수왕은 재위 기간만 해도 79년에 이를 정도로 장수한 왕이었습니다.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장수왕은 고구려 문명의 번영을 이룩해낸 왕입니다. 장수왕 시기에 세운 비석인 중원고구려비에서는 신라에 대해 지배력을 강화했음을 알려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장수왕은 백제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취해 서기 475년에는 남방정벌을 추진하여 한강유역을 빼앗고 백제 개로왕을 죽이는 등의 성과를 올립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뛰어난 외교술의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와 북방민족인 유연을 잘 활용하여 외교적인 우위를 점합니다. 또한,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부족을 분할하고 실위에 철을 수출하여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거란족을 적극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리고 427년에는 평양으로 천도합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고구려 문명을 번영하게 됩니다. 21) 문자명왕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로 왕위에 오릅니다. 문자명왕 시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합니다. 이 때 부터 백제와 신라에게 남쪽에서 조금씩 밀리면서 한강 남쪽을 백제에게 빼앗깁니다. 그리고 북방에서는 문자명왕 3년, 부여를 병합합니다. 22) 안장왕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릅니다. 안장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강 유역을 다시 되찾습니다. 안장왕에 대해서는 두가지가 전해내려 오는데, 하나는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안장왕이 신하들에게 피살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23) 안원왕 안원왕은 안장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안원왕에 대해서는 왕위후계쟁탈전이 전해져옵니다. 안원왕에게는 각각 아들이 있는 중부인과 소부인이 있었는데, 중부인의 집안은 녹군이고 소부인의 집안은 세군입니다. 녹군과 세군이 서로 자신의 손자를 왕위에 세우기 위해 사병을 거느리고 충돌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2천여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안장왕 피살사건으로부터 왕권이 약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4) 양원왕 양원왕은 안원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릅니다. 양원왕 시기에는 돌궐이 침입하여 돌궐과의 전쟁을 합니다. 이 때 돌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합니다. 이와 같은 대비로 인해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중국 북조 왕조인 북제와 갈등을 빚으며, 백제와 신라의 고구려 공격으로 한강 하류와 강원도 일대를 백제와 신라에게 빼앗깁니다. 그리고 양원왕 8년에 고구려는 새 수도인 장안성(평양성) 공사를 시작합니다. 25) 평원왕 평원왕은 양원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릅니다. 평원왕 시기의 고구려는 양원왕 시기에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 갑니다. 평원왕은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가뭄이 있을 때 장안성 공사를 잠시 중단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국력을 정비합니다. 평원왕 시기의 유명한 일화로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입니다. 평원왕 때 장안성(평양성)이 완공되어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26) 영양왕 영양왕은 평원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릅니다. 영양왕에 주요 사건은 역시 수와의 전쟁입니다. 영양왕 시기, 통일제국을 이룩한 수나라가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이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강세에 밀려 퇴각합니다. 수나라의 1차 침입은 수문제 때의 일이고, 2차 침입은 수양제 때에 일어납니다. 수양제는 사상초유의 11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옵니다.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에워싸고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내호아의 수군조차 평양성에 진입했으나, 고구려군의 함정에 의해 거의 절멸되다시피 합니다. 보다 못한 수양제는 우문술, 우중문과 함께 30만의 별동대를 보내지만, 을지문덕의 뛰어난 계책의 성과인 살수대첩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결국, 수나라의 2차 침입은 113만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군사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합니다. 이것은 바로 평원왕 시기의 국력정비로 인한 고구려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나라는 그 뒤에도 3,4차 침입을 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27) 영류왕 영류왕은 영양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 당시에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합니다.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정책을 펼치지만, 강경한 입장이었던 연개소문과 그 일파의 정변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28) 보장왕 보장왕은 영류왕의 조카로서 연개소문의 정변에 의해 왕위에 오릅니다. 보장왕 시기에 당나라는 당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고구려는 당군에 의해 신성, 개모성, 요동성이 함락되는 등 위기를 겪지만, 안시성에서 당군을 지체시켜 결국 당나라군을 본국으로 쫓아내어 승리합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거듭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 전쟁에 준비하도록 합니다. 이 결과, 고구려는 항상 전쟁을 준비하게 되어 국력이 소모되었으며, 국토는 황폐화되어 생산기반이 붕괴되는 등 곤란에 처합니다. 게다가, 우방국인 백제마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위기로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양면에서 받게 되어 662년에 평양성이 포위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으로 연개소문의 군대에 의해 사수전투로 당나라 방표태의 대군을 전멸시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 뒤, 668년, 나당연합군은 또 다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여 평양성을 포위합니다. 고구려는 전쟁을 끝까지 버텼으나, 배신자 신성, 오사, 오묘에 의해 성문이 열려 결국 고구려는 멸망에 이릅니다. 700년이 넘는 고구려의 망국이었습니다. 4. 고구려의 문화 고구려는 700여년의 세월동안 4,5세기에는 중국 왕조와 맞먹는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수입이나 들여오는 것은 중국으로 부터 했으나, 이것을 고구려만의 색깔로 번성하게 해서 중국과 맞먹는 문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중국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1) 고구려의 고분벽화 고구려의 고분들 중에 고분벽화를 가지고 있는 고분들은 대표적으로 쌍영총과 무용총, 강서고분과 유주자사진의 무덤, 안학 3호분, 동명왕릉 등 많은 고분들이 벽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돌무지 무덤은 돌방이 없어 벽화를 그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무덤이 발전함에 따라서 굴식 돌방무덤에 벽화가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고분벽화가 처음 그려졌을 시기에는 고분의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집과 소유물들이 주요 소재였으나,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사신이나 신선들의 세계나 힘이 센 장사 등 추상적인 소재들이 벽화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가장 성행한 시기는 강서고분의 사신도와 같은 벽화들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와 6세기 초중반까지 입니다. 이 시기에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의 벽화를 뛰어넘어 돋보이는 예술성으로 독보적인 발전을 합니다. 2)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의 음악은 현재 잘 전해지지는 않으나, 일본이나 당나라에 전해진 원형들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공으로는 왕산악으로, 그는 노래 100곡을 연주했다고 하며 현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고구려의 악기는 대표적으로 거문고, 오현금, 완함, 오현비파, 필률, 뿔나팔, 피리, 소, 요고 등이 있었습니다. 3) 그 외의 문화 고구려 사회에서 수레는 귀족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생활물품이었습니다. 고분벽화에서도 많이 보이는 소재로, 사람들의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마차를 통해 물건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여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음식은 육류가 대부분으로 채소절임 등 오늘날의 김치의 원형들로 찾을 수 있는 음식들을 먹었고 육류로는 꿩고기, 돼지고기가 주를 이루었고 돼지고기 요리 가운데에는 '맥적'이라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 고구려의 많은 문화들이 있었습니다. 5. 고구려의 종교 고구려인들은 대단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분벽화에 나타난 연꽃그림들과 신선세계를 표현한 그림들, 조상신들을 표현한 그림들, 해와 달신과 수레바퀴와 대장장이 신까지 고구려인들은 매우 다양한 종교를 믿었습니다. 1) 고구려 고유의 종교 고구려가 불교나 도교를 중국에서 수입하고도 고구려의 고유종교는 계속 귀족들에게 믿어져 왔습니다. 바로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주몽)을 건국신으로 떠받들고 그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수신(水神)으로 믿는 종교였습니다. 특히 고구려 종교는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문의 조상신들을 떠받들어 섬겼습니다. 왕실과 나라의 종교와 각 가문의 독자적인 조상신 숭배는 고구려 멸망 때까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종교는 고구려 멸망이후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2) 불교 고구려가 불교를 정식으로 수입한 때는 소수림왕 2년, 기원후 372년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불교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적극 우대합니다. 불교는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연꽃이나 불상 등으로 표현되어 옵니다. 하지만, 불교는 점차 고구려에서 쇠퇴하였습니다. 그래서 보장왕에 이르러서는 도교를 당나라에서 공식 수입할 때 불교 사원이 도교 사원으로 바뀌는 등 쇠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3) 도교 도교 또한 불교나 고구려 고유종교와 마찬가지로 고분벽화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고분벽화에 표현된 신선들이 사는 세계나 장사의 모습 등이 도교적인 요소들입니다. 도교는 보장왕 초기에 연개소문이 당나라에게 도교서적 등 도교를 수입해옵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귀족사회에서 성행했을 것입니다.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4/sub3.html?act=view&target=16300&keyfield=&key=&page=1 ///////////////////
백제 同腹형제이며 부여계로 알려진 고온조와 고비류가 남하하여 고비류는 요서지역의 미추홀에 도읍하여 百濟라는 나라를 건국하였고, 고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十濟라 하였다가 영역이 넓어지면서 백제로 바꾸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국의 통합이후 비류백제의 백성들은 모두 온조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통칭하여 百濟라고 한다
1. 백제의 발전 온조는 부여출신 이라 하여 스스로를 부여씨라 했다. 그리고 고비류의 백성들을 통합하여 백제가 건국될 당시 비류 왕족의 일부는 백제의 왕족이나 외척, 또는 귀족이 되면서 백제 8대성의 하나인 진씨나 우씨가 되었고 일부는 왜국에 건너가 지배층이 되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영도적 국가였던 목지국 까지 병합하면서 세력이 강성해 졌다. 고이왕은 국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단기 2579년 (서기 246년)에는 위나라의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낙랑과 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려할 때 백제의 좌장 진충을 파견하여 요동반도에 있는 낙랑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분서왕때에 이르러는 낙랑의 서현을 점령하였고, 비류왕은 요서군(지금의 하북성)과 진평군(지금의 하남성)의 2개군을 점령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한반도의 남가라국, 안라국, 다라국등의 6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소국을 병합하였으며 대방지역 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당시 倭國은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대국 이후 가야 계열 신공황후의 사후 분열 상태에 있었는데, 근초고왕은 단기 2699년(서기 366년)에 왕자 (후일의 근구수왕)을 候王으로 삼아 이때부터 백제왕이 왜국을 직할통치하기 시작했다
2. 해상강국 백제- 2페이지 백제는 우수한 해양기술과 군사력으로 동북아시아의 제해권을 잡은 해상강국 이었다. 온조와 비류가 한반도의 중서부와 중원의 요서지역에 세운 십제와 백제가 통합한 이후 황해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넓혀 나갔다.그리하여 산동성 일대와 광서성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나갔고 뛰어난 조선술을 기반으로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자치기구인 담로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담로가 설치된곳은 한반도와 요서지역, 왜열도 등이다. 베트남 북부, 필리핀, 인도네시아등 에서도 백제담로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특히 중국에는 요서, 진평지망, 하북성, 산동성, 양자강유역의 오월(吳越)지방에 7개의 백제군이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백제는 신라, 고구려는 물론, 수, 당을 제치고 절대적인 해상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상지배권은 백제의 멸망이후 급격히 소멸되어갔고 장보고의 청해진이 폐쇄된후 완전히 중국의 漢族들에게 넘어갔다.
3백제의 멸망과 일본의 독립 -3페이지 백제가 나, 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전 지역에서 일어난 백제의 복국운동은 바다건어 倭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며 왜국의 37대 천황이었던 寶皇女(齊明女帝)는 백제의 복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 그러나 왜국군대가 백촌강에서 당군에 패해 군선 400여척을 잃고, 백제 본국의 주유성에서 지휘부의 내부분열로 주유성이 함락되어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주유성 함락소식에 왜인들은 “주유(주유성)가 이미 항복하였다. 어찌할수 없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끊어졌다. 이제부터 조상의 묘소에도 갈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라고 하였다. 이후 본국을 잃은 왜인들은 새로운 이름의 나라와 정통성을 뒷받침 해줄 새로운 역사,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의자왕의 동생인 齊明女帝가 죽자 왜의 지도층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을 받들어 텐지천황(38대 天智天皇)이라하고 나라 이름을 日本이라고 붙였다 (단기3001년, 서기668년)
나라이름을 바꾸면서 가야, 신라, 백제 등의 혈통적, 문화적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日本書記, 古事記, 新撰性氏錄등 이른바 일본의 3대 사서 편찬 작업이다. 이때부터 왜 열도는 한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왜국의 역사는 한민족사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역사로 독립해 나가게 된다.
///////////// [ 백제의 역사 ] 1. 백제의 신화 ‘三國遺事’권 제1紀異 제2에 의하면, 왕검조선(王儉朝鮮)은 상제(上帝)인 桓因의 서자인 桓雄이 지상(신단수아래 神市)에 내려와 3.7일을 굴에서 지낸 후 여자가 된 熊女와 결혼해서 난 檀君王儉이 阿斯達에서 나라를 엶으로써 생겨난다. 그 해가 堯帝 즉위후 50년 庚寅년(실제는 丁巳)으로 기원전 2333년(東國統監에 의해 唐高 戊辰年)에 해당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일컫고 이어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5백년을 다스리다가, 周成王(虎王)기묘년(紀元前 1122년)에 기자조선이 들어서매 藏唐京으로 옮기고 후일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1천9백8세였다 한다. 최근 그의 무덤(소위 단군릉)이 평양근교 江東군 大朴山기슭에서 발굴되었다고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무덤의 위치, 연대, 묘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에서 여러 가지 모순점을 보인다. 北夫餘의 경우 解慕漱가 하늘에서 다섯 마리의 용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 해가 前漢 宣帝 神爵3년으로 기원전 59년에 해당한다. 그의 가계는 解扶婁(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함) - 金蛙(하늘이 점지한 개구리 같은 어린일, 해부루의 수양아들이며 태자임) - 帶素에게로 세습된다. 삼국유사 권1 동부여조에 의하면 이 나라는 王莽15년, 기원후 22년(고구려 3대 大武神王 5년)에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여는 346년 燕王 모용왕에게 망하고, 실제 고구려에 투항하는 494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東明王(朱蒙, 성은 高)의 개국설화에는 대개 세가지가 전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는 북부여의 건국자인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용왕의 딸인 河伯女(柳花) 사이에 알로서 태어났는데(卵生), 그 해가 漢 新爵4년, 기원전 58년이다. 그리고 그는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와는 異母兄弟가 된다. 그가 금와의 태자인 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 卒本州(졸본부여, 忽本 骨城)로 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건국자는 주몽의 세 째 아들인 온조(溫祚)(BC18-AD28년)이다. 그는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왕자(고구려의 제2대왕)존재에 신분의 위협을 느껴 형인 불류와 함께 남하하여 하북 위례성(현 중랑천 근처이며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에 옮긴 하남 위례성은 강동구에 위치한 몽촌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하고,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인천)에 근거를 삼는다. 이들 형제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百濟本紀 별전(권23)에는 북부여의 둘째왕인 해부루의 서자인 優台의 아들로 나와 있다. 이는 그의 어머니인 西召奴가 처음 우태의 부인이었다가 나중 주몽에게 개가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천손(天孫)인 해모수, 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의 신화적인 요소와, 알에서 태어난 주몽의 탄생과 같은 난생설화가 없이 처음부터 주몽-서소노-우태라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백제에는 부여나 고구려같은 건국신화나 시조신화가 없다. 백제는 신화나 설화의 자료가 사실상 희박하다. 특히 건국신화는 없다. 우리 신화의 원전격이라 할 수 있는 ‘三國遺事’의 경우 고구려, 신라, 가락의 건국 신화만을 다루었다. 그러면서 신라중심의 호국(護國), 인문신화(人文神話)에 치중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건국 신화 말고는 武王(?-641년)과 관련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용이 등장하는 설화다. 그 어머니가 서울 남쪽 못가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한 이후에 낳은 아들이 武王이라는 것이다. 용을 모티브로 한 숱한 ‘삼국유사’ 기록 가운데 하나인 이 武王과 용에 대한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용은 대체로 호교(護敎)의 상징 내지는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 武王은 호교와 호국 두 요소에 바로 연결된다.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고 부소산성(扶蘇山城)과 마주하는 백마강(白馬江) 건너 울성산성(蔚城山城)근처에 호국사찰 왕흥사(王興寺)를 완공시켰다. 그는 금강 언덕의 바위에서 예불한 다음 배를 타고 건너가 법회에 친히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는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 신라를 위협했다. 사비성(泗批城)으로 천도한 이후 가장 막강한 군주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 영토를 관리하는 데도 주력했다. 이렇게 보면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와 비교되는 용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과 무왕의 연관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비시대 백제의 고토인 夫餘 능산리 출토품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용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된다. 2. 한성시대(漢城時代 BC 18 - AD 475)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하남위례성에 작은 부족국가인 백제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지배계급은 북쪽에서 남하(南下)한 유이민(流移民)의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이므로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는 한강 유역인 바 서울 풍납동 토성내(風納洞 土城內)는 소위 김해식(金海式)토기와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유적층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강성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234-285)때부터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전부 정벌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대이다.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까지를 백제 영토로 하는 것은 369년경으로 보인다. 근초고왕 26년(371)겨울에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精兵)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들어가서 고국원왕(古國原王)을 전사케 한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경기, 충청, 전라도와 강원, 황해도의 일부까지 영토로 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시 국내성(國內城)으로 퇴진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강성한 힘은 근초고왕대를 이은 근구수왕(近仇首王)대인 377년에 다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침하고, 이어 중국대륙을 정벌하여 요서(遼西)와 북경지방을 쳐서 요서(遼西), 진평(晋平)의 두 군(郡)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지방까지 백제의 힘이 미쳤다 한다. (梁書, 宋書, 資治通監에 기록) 이같이 백제가 강성해진 근초고왕대는 문화적인 치적도 컸던 것이니,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서기(百濟書記)(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외교적인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각별한 선린관계를 맺었던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빠져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3. 웅진시대(熊津時代 475 - 538) 문주왕(文周王)이 475년에 즉위하면서 그해 10월에 熊津城(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는 고구려의 예봉을 피하기 위하여 금강(錦江)이 북(北)을 막아 흐르는 천험의 요새인 웅진성(현 공산성)으로 옮겼으나 병권을 잡고 있던 해수(解仇)에게 477년에 문주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탐라가 최초로 백제와 통교한 것은 문주왕2년(476)의 일이다. 뒤를 이어 즉위한 삼근왕(三斤王)은 겨우 13세의 나이로 부왕을 죽인 해수에게 모든 국권(國權)을 맡기었으나 左平眞南과 德率眞老의 군에 격살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동성왕(東城王)(478-501)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소지왕(炤知王)에게 혼인을 청하여 왕족 伊飡 比智의 딸을 보냈음으로 신라왕실과 통혼을 하고 동맹하여 고구려의 힘을 막았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은 22년(500)에 궁성내에 임루각(臨樓閣)을 짓고 원지(苑池)를 파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등 사치한 생활을 즐기고 방탕하여졌다. 동성왕은 23년(501) 衛士佐平博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사냥 나갔다가 살해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 무령왕(武寧王)(501-522)이다. 무령왕은 佐平苩加가 있는 가림성(성흥산성)을 쳐서 苩加를 죽이고 여러 성을 다시 쌓았으며, 고구려군과 싸워 백제의 옛 땅 일부를 되찾기도 하였다. 특히 남조의 梁과 교류를 활발히 하여 양서에 ‘更爲强國’이라고까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이때 왜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서기 繼體 7년(513)조에 보면 백제에서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陽爾)를 보냈고, 5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무(高安茂)를 보내면서 먼저 가 있는 단양이와 교대시켰다. 오경박사는 역(易), 시(時),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에 통달한 박사를 말한 것이다. 의학(醫學), 역상(曆象), 복서(卜筮), 노반(鑪盤), 와(瓦)에도 박사(博士)호가 있었다. 1971년,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발견되어 당시의 백제문화를 자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卷)을 보면, 무령왕은 개로왕(蓋鹵王)8년(462)에 출생하여 백제가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 14세이며, 왕위에 즉위할 때 40세가 되고, 죽을 때가 62세였다. 백제의 가장 어려운 시대를 체험하면서 자라났으며 백제의 재기를 도모했던 왕이었다. 무령왕대는 중국 남조(南朝)의 문화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백제에는 전축분(전축분)이 조성되고, 무령왕릉출토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중국문물의 유입이 많았다. 이러한 국력의 뒷받침을 받아 즉위한 성왕(聖王)은 527년에 웅진에 대통사(大通寺)를 세우고 주위에도 많은 불사(佛寺)를 이룩하였다. 527년에 백제를 다녀간 양의 사신이 보고한 양서 백제조(梁書 百濟條)를 보면 중국의 군현과 같은 읍을 담노라 하는데, 22개처가 있고, 이 담노(擔魯)에는 왕의 자제와 종족이 모두 웅거한다 하였다. 李丙燾박사는 이 담로를 백제어의 ‘다라’를 사음(寫音)한 것이며, 일본서기의 ‘구다라’와도 같은 뜻으로 대읍성(大邑城)이란 말이라고 한다. 4. 사비시대(泗沘時代 538 - 660) 백제가 웅진의 협소한 지역에서 넓게 트인 사비성(泗沘城)으로 왕도를 옮긴 것이 성왕 16년(538)의 일이다. 성왕은 사비성으로 왕도를 옮긴 2년 후인 541년에 梁에 사신을 보내어 시경 박사(詩經 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 화사(工匠 畵師) 등을 초청해 왔는데, 당시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남조(南朝)의 문화를 직수입하였다. 특히 공장(工匠)과 화사(畵師)는 새로 조영되는 사비(泗沘)의 왕도를 건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성왕대에는 백제승(百濟僧) 겸익(謙益)이 인도에까지 가서 범어(梵語)를 연구하고 오부율(五部律)의 범어 경(梵語 經)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여 율부(律部)72권을 펴내고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성왕대는 백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대로서 일본 고대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기 欽明6년 (545)조에 백제로부터 불교의 문물 및 그 사상이 전래하였다 하고 동 13년(522) 10월에는 백제 성왕이 西部 姬氏와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일본에 보내면서 금동석가불(金銅釋迦佛) 1구와 경론(經論) 등을 보냈다 한다. 이는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欽明 15年(554), 백제는 장군 三貴와 奈率物部烏, 德率東城子莫古를 보내면서 전에 가 있던 東城子言과 五經博士 柳貴 등을 교대시켰다. 또 승 담혜(曇惠) 등 9인을 일본에 보내어, 먼저 가 있는 승 도심(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당시 백제는 군사적 요청을 일본에 하면서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 있는데 일본은 당시 경이적인 백제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성왕대의 군사적 측면을 보면 동왕(同王) 2년(524)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고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으며, 529년에는 안장왕(安藏王)이 백제의 북변을 침략하자 백제는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으나 대패하여 2천여의 전사자를 내는 등 위급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의 침략이 계속되자 백제는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드디어 성왕 29년(551)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의 한성지역을 회복하고, 신라는 죽령(竹嶺)이북 철령(鐵嶺)이남의 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 십군(十郡)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성왕 31년(553) 신라는 돌변하여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성지역을 공취하여 신라의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와의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554년 성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옥천)을 공격하다가 성왕은 전사하고 좌평(佐平)4인과 29,600인이 참살되었다 하니 삼국사기의 표현이 과장된 듯하나 참혹한 패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산성 싸움 이후 백제와 신라는 120년간 계속된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백제가 망하는 그날까지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威德王)은 554년 왕위에 오르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진성(珍城)(경남단성)을 쳐서 남녀 39,000인과 말 8,000필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 이때 고구려의 남침도 계속되어 백제로서는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자 중국의 진(陳)이나 북제(北齊) 북주(北周) 및 수(隨)가 번번이 사신을 보내서 외교적 수단으로 난국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면서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위덕왕(威德王)때의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 557년 11월에 백제에 왔다 돌아가는 왜사(倭使)편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주금사(呪禁師) 등 6인을 보냈으며(日本書紀 敏遠紀 6年11月條), 584년에는 왜사(倭師) 鹿深臣이 백제에서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日本書紀 敏遠紀 13年 9月條). 588년에는 백제가 일본에 사신과 승 혜총(惠摠), 令斤, 惠寔 등을 보내면서 불사리(佛舍利)를 전하고, 또 승 惠宿, 惠衆 등과 사공(寺工), 노반박사(鐪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을 보냈다. 이 해에 일본에서는 善信尼와 禪藏尼, 惠善尼가 백제에 와서 유학을 하고 590년에 돌아가기도 했다. 595년에는 백제승 惠聰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고구려 승 慧慈와 더불어 일본 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日本書紀 推古紀 3年條). 이 당시 일본은 聖德太子 섭정초기로서 성덕태자는 고구려 승 慧慈에게 불교를 2년간 배웠으며, 백제인 博士覺哿에 유교를 배웠는데, 백제승 惠聽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597년에는 위덕왕의 왕자 아좌(阿佐)가 일본에 와서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고 성덕태자의 상을 그렸다 한다(日本書紀 推古期 5年 4月條). 武王代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백제는 隨와 내통하여 고구려를 칠 약속을 하였으나 사실은 고구려와도 내통하여 양단책(兩端策)을 썼으며, 612년 수의 대군이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정벌에 임했을 때 백제는 호응하지 않았다. 수는 遼東을 출발할 때 30만 5천인이었는데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2천 7백인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또 수(隨)를 이은 당(唐)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무왕때 당에 보내는 예물로 명광개(明光鎧)(626년), 주갑 및 금갑(金甲)과 조부(雕斧)(639년)를 보내는 바 중국황제가 보고 탐낼 만큼 잘 만들어진 갑옷들이었다. 백제의 갑옷과 무기 만드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광개(明光鎧)는 갑옷 위에 황칠(黃漆)을 발라서 사람의 눈이 부시게 만든 것이었다. 武王은 634년 백마강이 임한 곳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배를 타고 드나들었는데, 이 절은 채식(彩飾)이 장려하였다. 이 해에 또 관성(官城)남쪽에 큰 원지(苑池)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여 물속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고 못가에 버들을 심어 왕궁의 원유(苑囿)를 크게 가꾸기도 하였다. 의자왕(義慈王)(641-660)은 초기에는 용감하고 결단성이 강한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642년 7월에는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의 서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군을 주어서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이때 대야성(大耶城) 성주가 金春秋 武烈王의 사위인 품석(品釋)으로 처자 모두가 잡히어 죽었고 竹竹, 龍石 등이 전사했다. 백제는 의자왕 3년(643)에 고구려와 和親을 맺어 오랜만의 원한을 풀고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이는 612년 무왕이 수(隨)의 고구려 침략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미리 내통하는 등 친고구려정책을 쓰기 시작한 결과이기도 했다. 의자왕5년(645),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신라 군사를 동원한다는 말을 듣고 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성을 쳐서 빼앗았으며, 동왕 8년 3월에 장군 義直이 신라 서변의 腰車(尙州) 등 10성을 쳐 빼앗고, 동왕 9년 8월에 왕이 左將(身+殷)相에게 精兵 7천을 주어 신라의 일곱성을 쳐 빼앗았다. 651년 신라의 사신 金法敏(후에 文武王이 됨)이 唐 高宗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하여 신라의 大城과 重鎭이 모두 백제에 병합된바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이 쇠하였다 하면서 백제에 詔書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애원하고 있다. 백제는 신라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지게 되자 의자왕은 656년 이후부터 궁인과 더불어 荒淫에 빠져 成忠 興首 같은 충신을 제거하고 간신의 무리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자 인심은 흉흉하고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져 갔다. 그리하여 의자왕 20년(660) 蘇定方이 거느린 13만 唐軍과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5만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함에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黃山(連山)에서 신라군을 막았으나 패하고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7월 18일 항복하니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당시 백제는 5部 37郡 2百城 76萬戶였다 한다. 당장(唐將)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위시하여 왕자, 大臣, 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唐의 서울 長安으로 데리고 갔다. 백제의 都城은 함락되었으나 수많은 백제의 지방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기에 백제가 멸망한 후 각지에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왕족 福信과 僧 道(王+深)이 주류성(韓山)에 웅거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과 사택상여는 任存城(大興山城)에 웅거하여 3萬餘衆을 모아 소정방의 군을 깨뜨리고 백제의 2백여城을 회복하였다. 이들도 일본에 가 있는 왕자 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사비성 웅진성을 포위하여 당군은 식량이 궁핍하게 되어 여러번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나(羅), 당(唐) 연합군은 부흥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하기도 하였다. 풍왕은 고구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여 당군을 막기도 했으나 부흥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福信이 道(王+深)을 죽이고 풍왕이 또 복신을 죽였다. 마침내 나당(羅唐)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유성을 공합하니 부흥군은 663년에 항복하였다.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4/sub4.html?act=view&target=11116&keyfield=&key=&page=1 //////////////////
가야 -1페이지 伽倻는 단군 조선이후 민족의 분열시기에 이동하여 김해등 낙동강 중 하류 지역 남 변한땅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단기 2375년(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구야국을 모태로 금관가야(본가야)를 세웠고,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등 5가야 연맹국가로 발전하였다. 김수로왕 시대에 신라의 5대 파사 이사금은 영토분쟁이 일자 사태를 김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수로왕은 무례한 신라 6부의 지도자를 처형하였는데, 파사 이사금은 신하만 처형했을 뿐 더 이상의 보복조치는 취하지 못해 가야의 세력이 더 컷음을 알 수 있다. 가야는 특히 뛰어난 철기문화를 한반도와 왜국에 전파시켰으며, 왜에 분국을 설치하며 500년간 해상강국을 이루었다.
가야의 분국은 바다건너 왜의 구주지방에 김수로왕의 딸인 묘견공주(비미호여왕:서기 184-247까지 통치)가 야마대국을 세운 것을 말하며, 비미호여왕 사후 33대까지 가야계열이 일본최초의 고대왕국이라 일컬어진 야마대국을 통치하였다. 이렇게볼 때 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종주국으로 하고 대한 해협을 건너 일본 규슈지역의 야마대국(독로국)을 분국으로한 특별한 성격의 고대왕국 이었다. 가야는 비미호여왕의 후손인 진무 (神武天皇)가 혼슈로 이동하여 야마토 정권이 시작 되면서 차츰 야마대 분국을 통한 왜국내 배후거점을 잃게된다. 가야는 서기 6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세력에 밀린 백제와 신라가 압력을 가하고, 가야의 분국 이었던 야마대국이 몰락하녀 왜나라가 백제 근초고왕의 직할통치로 들어가자 왜국내 거점이 사라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가야국의 이뇌왕이 신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세력을 보존하고자 하였으마 이것은 오히려 가야의 통합을 저해하고 멸망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드디어 10대 구형왕이 다스리던 금관가야(본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병합 당하면서 건국 490년만에 멸망하게 된다.(단기 2865년 서기 532년 구형왕42년) 그후 금관가야의 지배층은 신라귀족으로 흡수되었으며, 김유신, 진지왕, 문무왕등은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대가야는 진흥왕이 보낸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 단기 2895년 (서기 562년)신라에 병합되고 이때 가야의 다른 9국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신라 -총 2페이지로 나눔. 남진한의 한 국가로 출발한 사로 국은 6개의 씨족을 기반으로 한 부족연맹 이었는데 박혁거세가 6촌 촌장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었고, 국명을 사로 라고 했다. 혁거세의 자손이 계속 왕위를 이어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으로 내려가다가 바닷가에 상륙한 석탈해가 4대 왕인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또 김 알지의 6대 손인 김 미추는 초대 김씨 왕이 되었다. 서기 2-3세기를 거치는 동안 신라는 우시상, 거치산국, 음즙벌, 비지, 실직국, 압독국등을 병합하였고 박, 석, 김, 세씨족에서 지배세력이 교체되어 나왔다. 그러나 서기 4세기 내물 마립간 때에는 김 씨족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부족연맹적 성격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때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 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는등 국력의 급격한 신장을 맞이한 신라는 진흥왕때 백제의 성왕과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에 진출한후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연맹의 전지역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사국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민족의 눈으로 볼 때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 즉 외교를 통해 당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 시킨후 고구려와 백제가 있던 지역을 점령하고 신라까지 통치하려다가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결사항전을 펼치자 결국 신라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배신의 역사를 통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그후 영역이 확대되고 백제, 고구려의 견제없이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 시기를 후기신라라 하며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260년을 말한다.
/////////// 신라(新羅) 신라의 건국 신라가 위치하는 서라벌 지역에는 여섯 개의 촌이 있어 육부촌이라고 불리었다. 각 촌에는 촌장이 있어 대소사를 관장하였고 6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가 있어서 ‘만장일치제’로 6촌 전체의 문제를 결정하였다. 기원전 69년의 화백회의에서 6촌에는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법도를 모르니 임금을 추대하고 도읍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6촌장들이 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굽어보니 남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다. 우물가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6촌장들이 나타나자 말은 하늘로 오르고 우물가에는 큰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알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뭇 짐승들이 모여서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6촌장들은 아이의 이름을 박혁거세라 칭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나라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정했다.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후 어느 날, 샤량리의 알영 우물가에서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여자 아이는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지만, 입술에 닭의 부리가 달려있어 보기 흉했다. 사람들이 여자 아이를 북쪽 시냇가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지고 매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이가 자라나 13세가 되어 왕후로 추대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알영이었다.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같으며, 나라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부르며 크게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의 경순왕조에 따르면 옛날 중국의 연나라에서 마한으로 피난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박혁거세의 선조라고 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여섯촌에 대한 이야기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마을을 사탁(沙涿)이나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었다. 《삼국유사》에 전하길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기준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고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고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이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및 한반도의 대부분을 992년간 지배하였던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들 중 하나에 속한다. 국호인 ‘신라(新羅)’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6세기 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동맹(나 · 당 연합)을 맺은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또한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를 나당 전쟁을 통해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부분적인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 때 신라의 영역은 현재의 남한의 영역과 비슷하며, 고구려멸망 약 30여 년 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 · 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립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뒷날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바꿈)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徐羅我)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徐羅我) · 서벌(徐我) · 서라벌 등의 여러 한자 가차자와 또한 계림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한자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뱃사람들의 은어로 동풍을 샛바람이라 하는 점, 함경북도 방언으로 동쪽을 새라고 하는 점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나는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동예', '부여', '고려', '구례' 등의 '여', '려', '예', '례' 등이 '라'와 같은 어원을 둔 북방계의 방언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들어가는 게 많은데, 예로 '마을', '고을', '길', '골', '굴' 등이 있다. 삼국사기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로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상대(上代:1대 시조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박 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 28대 771년간)는 성골이 왕위를 독점하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과 함께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시기이다. 삼국시대 말기와 남북국 시대이다. 또한 이때는 신라문화의 황금기로 여러 국가들과 교역한 시기이도 하다. 중대(中代: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 654년∼780년, 8대 127년간)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대체로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와 일치한다. 하대(下代: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 20대 156년간)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의 혼란 등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 지어 상고 ‧·중고 ‧ 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하였다. 상고(上古:1대 시조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박 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왕, BC 57~514)는 불교 전래 이전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를 구분할 때 사용된다. 중고(中古:23대 법흥왕 ~ 28대 진덕여왕, 514~654)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골품제 하에서 성골 왕실이 성립되어 소멸하기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하고(下古:29대 무열왕~56대 경순왕, 654~935)는 불교식 왕명 사용이 끝난 이후의 시기이다. 하고 시기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는 보통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최근에는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일신라라는 용어에도 문제제기가 되고 있으며 이를 후신라 혹은 대신라로 부르기도 한다. 신라사를 5기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내물왕 이전의 시기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년 ~514년)를 제2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부터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514년~ 654년)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 제36대 혜공왕(惠恭王)까지(654년~ 780년)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宣德王)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까지(780년~935년)를 제5기로 잡는다.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물 마립간 (재위: 356년 ~ 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하였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진보하였으며,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북한산 비봉_北漢山 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로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위기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진덕여왕 (재위: 647년 ~ 654년)대에 와서는 백제가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공격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이 생기면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뒤이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들어서면서 남북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남북국시대는 남과 북에 두 나라(二國)가 있다는 것인데, "통일(統一)신라", 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오직 신라만을 인정, 발해를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므로 잘못 되었다는 반성이 학계에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켰으며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현재 사용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은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한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며, 반도사관을 정당화하려는 일제식민주의사학에 의해 강하게 뿌리내렸다. 또한 유신독재시절 전국에 김유신동상과 사당이 세워지는 등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잘못된 용어라고 지적하며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남북국 시대 신라의 발전 :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해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 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의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통치 제도 [삼국 시대] 신라는 원래 육부(六部)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 연맹을 병합·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 신라를 이룩했다. 따라서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증왕 때는 주군(州郡) 제도가 처음 생겼고, 영토의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법흥왕·지증왕 때에는 그 지방관제가 확립된 듯하다. 신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중요한 곳은 주(州)로 삼았다. 주에는 군주(軍主)를 두어 그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군주 밑에는 여러 성주가 있었다. 또 《양서》신라전에 따르면, 신라가 동해 남단에 편재(偏在)할 당초에는 경주 부근에 6부(六部)가 있었고, 기외(畿外)에는 52읍륵(邑勒)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차차 주현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한편 중요한 곳, 즉 아시촌(阿尸村)과 국원(國原)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지방장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남북국 시대]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왕권 아래 정치 체제를 재정비해야 했다. 통일 사업의 단서(端緖)를 마련한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족의 혈연적 제약을 벗어나, 종래 ‘성골(聖骨)’의 신분만이 계승한 왕위는 이후 ‘진골(眞骨)’로 바뀌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골품제는 진골을 제1급으로 하여 확립되었다. 또 종래의 불교식 왕호 대신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의 존엄성을 높였다. 모든 관료는 엄격한 신분 제약을 받아야 했고, 율령정치(律令政治)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확충되었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관등(官等)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가 진덕왕 5년(651년)에 설치되고, 형률(刑律)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理方府)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지고, 감찰 기관인 사정부(司正府)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이 밖에도 조부(調部)·예부(禮部)·선부(船部) ·위화부(位和府)·사록관(司祿館)·병부(兵部)·창부(倉部)·승부(乘部)·예작부(例作府)·영객부(領客部) 등을 설치했고, 도성(都城)의 수축이나 사찰을 영조(營造)할 때마다 소관의 관서가 세워졌다. 왕권의 강화의 추세에 따라 군현의 명칭과 관호(官號)가 전면적 중국식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료 체제의 지향은 진골 신분의 반발 때문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환원되었고, 이후 진골 신분 간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야기되었는바 선덕왕·원성왕은 모두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신문왕 때 9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갔고, 또 정치·군사상의 요지에는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摠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 밑에는 군(郡)을 두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太守)·현령(縣令)이라 칭했다. 이들 지방 장관은 관계(官階)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일정한 제한 밑에서 신라의 관료 체제에 흡수하였다. 군현 외에 신라에서 특수한 것으로는 일종의 천민 집단(賤民集團)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지방의 호족은 지방 관서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검찰하고 번상(番上)·시위(侍衛)케 하여 그들의 지방에서 발호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통일 후 신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하자 종래의 6정을 개편·확충하고 중앙의 군단 조직인 9서당(九誓幢)과 지방의 군대 조직인 10정(十停)을 배치하여 복속민을 회유·견제했다. 또 5주서(五州誓)와 3무당(三武幢) 등을 두어 군제를 보충 내지 확충하였다. 통치 조직과 운영 남북국 시기에 접어들어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민(民)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 후기부터 지방 통치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전국의 민과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점차 강화되었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 신라 행정 조직의 말단 단위는 촌(村)으로, 이는 자연적인 경계에 따라 형성된 촌락이었다. 이런 촌을 단위로 3년마다 경작지의 면적, 호구, 가축, 과실수, 뽕나무 등이 조사되어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 기간 내에 변동된 사항도 그때마다 보고되어 문서에 추기(追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매년 조세와 역역(力役)이 부과되었다. 각 촌의 위에는 이 같은 자연촌락 몇 개가 묶인 행정촌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촌주(村主) 한 명이 있어 행정 업무를 도왔다. 촌주는 현지인이 되었는데, 삼국 시기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각 행정촌은 상급 기관인 현에 귀속되었으며, 현은 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소경과 군에 직접 귀속된 촌들도 있었다. 군의 상급 기관이 주였고, 주와 소경은 조정에 직속되었다. 업무에 따라 중앙에서 군에 직접 하달하고 군에서 중앙으로 직접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 부곡(部曲)과 향(鄕)이 있었다. 이들의 성격에 대해선 일반 군·현의 주민과는 달리 천민 신분에 속하는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특수 행정 단위화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어왔는데, 근래에는 군·현으로 편제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지역을 부곡과 향으로 삼았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각급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주와 군에는 각각 감찰관을 따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0정(十停)이라 하여, 전국의 주요 지점 열 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를 상주시켰다. 그밖에 지방민의 신앙과 의례(儀禮)의 대상이 되어온 전국의 주요 산과 하천에 대한 제사도 정비하여 중앙에서 간여하였다. 이들 제사는 지방민의 결집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중앙의 각급 관서들도 확충되었다. 그중 왕 직속의 집사부(執事部)가 행정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또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部)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확충된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군의 핵심으로 9서당을 두었고, 왕실의 경호를 맡는 시위부(侍衛府)를 개편, 강화하였다. 이들 기구는 왕권과 중앙권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물리력이었다. 삼국 시기 이래 관리에 대한 주된 보수 지급 방법은 녹읍(祿邑)을 주는 것이었다. 녹읍은 촌 이상의 단위로 주어졌고, 녹읍의 거주민들이 국가에 내야 하는 조세를 관리가 대신 받아가게 하였다. 이 같은 녹읍은 7세기 후반 신문왕대에 폐지되고, 대신 관리들에게 녹봉(祿俸)이 매달 지급되었다. 이는 녹읍지의 민으로부터 관리가 직접 조(租)를 받는 데 따른 민에 대한 경제외적 침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역시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757년 다시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읍제가 부활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번거로움과 함께 귀족 세력의 반발 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일단 외형상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국가 권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깊숙이 뻗쳤다. 하지만 국가 권력이 촌락 사회에 작용한 정도는 아마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지간에 삼국 시기와 비교했을 때 집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비된 통치 조직을 바탕으로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귀족 회의는 존속하였으나 권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왕은 전제군주의 면모를 지녔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전면에 내세워졌고, 충과 효가 주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왕호도 유교식이어서, 6세기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中古期) 불교식 왕명과 차이를 보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시기 구분하면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에서부터 그의 직계 후손인 왕위를 이어간 통일기의 1백여 년간의 시기를 중대(中代)라 하였다. 이런 구분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관료 조직이 정비되고 왕권이 전제화 되었지만, 중대의 집권체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관료제는 그 실제 운영에 있어 신분제에 의한 제약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출신 신분에 따라 관직의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고, 비(非)진골 신분의 인사들이 승진하는 데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중요 관서의 장은 진골 귀족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 권력은 소수의 진골 귀족 출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관리의 선발은 보편적인 제도 없이 궁술(弓術)과 추천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활이 주요 병장기였던 고대 초기에는 궁술이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주는 기준이 될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결국 관리가 되는 주된 길은 귀족의 천거를 받는 것이었다. 천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이런 관리 선발 방식은 왕권과 중앙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근원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진골 귀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후반 통일 전쟁과 새로운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층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귀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골 귀족의 세력이 재차 강화되었으니, 이는 신라 중대의 지배체제를 기저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었다. 농민 생활 평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소수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촌락 단위로,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정(丁)과 정녀(丁女)인 20세에서 59세 사이의 남녀를 중심으로, 그 이하의 사람들을 조자(助子)·조여자(助女子), 추자(追子)·추여자(追女子), 소자(小子)·소여자(小女子)로, 그리고 60세 이상은 제공(除公)·제모(除母), 노공(老公)·노모(老母)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분류에 따라서, 노동력 징발 시 각 촌에 부과될 인원이 정해졌다. 촌락 내에 있는 농민의 토지는 논과 밭으로 구분되어 각각 결부법(結負法)에 따라 면적이 조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세 부과량이 정해졌다. 결부법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조세 부과량을 산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였다. 결부법에서의 계산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이다. 파는 한 움큼의, 속은 한 묶음의, 부는 한 짐의 곡식 줄기를 뜻하였으며, 또한 각각 10배씩 증가하였고 다만 100부가 1결이었다. 나아가 각 단위는 곧 그만큼의 수확을 내는 토지 면적을 가리킨다.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농토에 따라 비옥도의 차이가 컸고, 산과 계곡이 많은 자연지형이었으므로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농토의 측량이 여의치 않았던 조건에서, 비교적 손쉽게 면적을 산출할 수 있고 조세 부과에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결부법이었다.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는 이 같은 결부법에 의거한 양전 사업(量田事業)이 널리 이루어졌다. 이후 결부법은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면적 산정 방법이 수차에 걸쳐 보완되면서 19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 농토는 전반적으로 상경화(常耕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토, 특히 그중 밭의 경우는 2~3년에 한 번 경작되었다. 농민들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지는 외에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현물세로 내야 했다. 토지는 국유제가 표방되었고, 722년에 백성에게 토지인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황무지와 같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분여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전국적인 토지 분급이 행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원(西原) 소경 부근의 네 개의 촌락에 관한 기록을 담은 장적 문서(帳籍文書)에서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沓)’이라 하여, 농민이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국가에서 분급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의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따른 표현일 뿐이다. 왕토사상은 국가에서 조세 수취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널리 행해졌다. 단 농민의 토지 소유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노비 당시 일반 농촌에는 노비가 많지 않았다. 위의 장적 문서를 보면, 전체 인구 462명 중 노비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노비 중 정남과 정녀가 19명이었고, 3년간 태어난 노비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비가 자신의 호(戶)를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외거 노비(外擧奴婢)가 아닌 솔거 노비(率居奴婢)였을 것이며, 당시 일반 농촌에서 노비의 노동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비의 주된 소유층은 진골 귀족이었고, 왕실이 최대의 노비 소유자였다. 숫자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신라의 재상가(宰相家), 즉 진골 귀족이 노비를 3천 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각지에 농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부려 그곳에서 경작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경우 노비의 예속 형태는 외거 노비였다. 지역적으로 노비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은 역시 수도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귀족의 대저택이 있었고, 그런 집에는 다수의 노비가 있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의 노비들은 가내 노동과 귀족의 사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수공업품 생산에도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사찰에서 소유한 노비의 경우도 예속 형태가 비슷하였을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 신라의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종래의 재지(在地) 수장층(首長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 생산 수단과 기술 인력이 국가와 왕실 및 일부 귀족에게 귀속되었다. 지방 장인(匠人)들의 경우 생산품을 특산물 현물세(調)의 형태로 공납하였고, 중앙에선 이들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면은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남북국 시대 신라의 수공업은 장인들의 소속처에 따라, 내성(內省) 산하의 궁실 수공업, 주요 관서에 귀속되었던 관영 수공업, 귀족들의 사영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장인들의 처지는 국가의 통제하에서 신분화 되었다. 장인 중 하급 관등을 받아 골품을 지닌 이들이 있었고, 기술 노역만 제공한 평민도 있었다. 노비로서 생산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궁실 수공업의 주된 노역자였다. 궁실 및 관영 수공업은 국가와 왕실에 소요되는 물품을 할당받아 생산하였다. 귀족의 사영수공업도 주로 골품제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등 귀족집안 자체의 수요에 부응하는 형태였다. 이와 같이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한 상품 생산의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일반 농민의 가내 수공업은 농업과 함께 결합되어 농민층 자신의 수요를 충당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삼국 통일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상업이 발달해갔다.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 생산이 늘고 계층 분화가 진전되었으며,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인구의 이동이 있게 되고 수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으며, 일부 상품의 질도 고급화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초기 당나라와의 조공 무역에서 신라가 보낸 물품은 주로 자연산 특산품이었는데, 이후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 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금속 제품과 모직물 등을 수출하고, 풀솜과 견직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고급 물품은 주로 수도의 궁실 및 귀족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조정도 상업을 장려하여, 수도에 시장이 두 곳 더 개설되었다. 당시 상업에 주요 교환매체였던 견포(絹布)의 길이를 정하는 등의 조치는, 상업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상행위는 금지하였지만 일반 신도들의 상업 활동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가론(瑜伽論)의 ‘공교명사상(工巧明思想)’이 유포되었는데, 이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은 재보(財寶)를 만들어 모아, 이것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이익을 줄 것을 강조한 사항이었다. 이는 승려들이 장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논거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 당시 유명한 승장(僧匠)이 적지 않았고, 불교 사원에서도 수공업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집권 체제에 동요가 생기고 국가의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해외 무역은 조공 무역 외에 점차 민간인이 행하는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원(富源)을 찾아,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인간관계하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바다로 나가 활동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해안 지대 각지에 신라방(新羅坊)이란 집단적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신라 상인들에 의한, 신라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다. 남부 중국의 무역항을 거쳐 수입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산 사치품들이 수도의 귀족층 사이에서 애용되었고, 신라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기도 하였다. 신라에 대한 지식이 아랍 지역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듯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서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 하대에 기존의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문화 [삼국 시대]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하였다. 반면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또한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특기할 만하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이나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한편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군사 신라에는 당(幢)과 정(停)이라는 군제의 기본을 이루는 일종의 군단이 있었다. 당·정은 어떤 표지(標識)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한 말로 특히 당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대당(大幢)과 귀당(貴幢)이었다. 대당은 수도 부근에 설치된 듯한 대군영(大軍營) 또는 대군단(大軍團)이며, 귀당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관구에 두던 군영이었다. 정은 대당·귀당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지방 군관 내의 본부·본영으로서 거의 각 주치(州治)에 설치되었다. 당과 정은 지방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개칭되기도 하고 폐지되었다. 9서당(九誓幢) 9서당(九誓幢)은 신라 삼국 통일 이후 군대 편제의 하나이다. 진평왕 5년(583년)부터 증설되어 신문왕 7년(687년)에 완성된 중앙의 군단(軍團)으로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인, 백제인 등을 포함하여 만들어진 군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였던 듯하다. 이는 이국민(異國民)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금색(衿色)에 의하여 부대를 구별하였다. 10정(十停) 10정(十停)은 통일 신라의 군대 편제 가운데 하나이다. 9주·5소경의 완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되며, 지방에 배치된 중요한 부대였다. 10정은 가장 지역이 넓고 또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개정을 설치했으며, 다른 8개 주에는 1개정씩을 배치하였다. 이 10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경찰의 임무까지도 담당한 듯하다. 신라의 관직 신라의 관직 제도는 법흥왕 때 완성되었으며, 모두 17관등이었다. 엄격한 신분체제인 골품제에는 왕족 ·6두품 ·5두품 ·4두품이 있었다. 왕족 이외에는 두품에 따라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어서 신라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6두품은 아찬까지, 5두품은 대나마까지, 4두품은 대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관직에 따라 집의 크기·지붕·공복 등의 제한이 있었다. 1등부터 5등까지의 관위는 진골(자색 공복(公服))만이 가능했고, 6등(아찬)부터는 6두품(비색 공복), 10등(대나마)부터는 5두품(청색 공복)에, 12등(대사)부터 17등까지는 4두품(황색 공복)에 한정되어 있었다. 관등의 제한은 관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육정(六停)을 비롯한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은 급벌찬부터 이벌찬이지만 진골만이 되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제한의 목적은 여러 관부(官府)의 장관이나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왕의 아버지나 장인은 갈문왕에 봉해졌다. 갈문왕은 유력 왕족이 봉해지는 것으로 왕 다음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왕의 사촌동생 등 유력 왕족 중에서 봉해졌다고 한다. [역사적 기록] 제2대 남해 차차웅이 석탈해를 대보(大輔)에 임명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 제3대 유리 이사금이 관위 17등급을 설치하였다고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관직제도는 삼국사기 잡지 7권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라의 관위 17등급]
[신라의 임시 관위] 대각간(大角干) 혹은 대서발한(大舒發翰) : 태종 무열왕 7년인 660년 백제를 정벌한 김유신에게 종전 17관등에 한 단계 더한 것이다. 태대각간(太大角干) 혹은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 문무왕 8년인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김유신에게 종전 17관등과 대각간에 한 단계 더 얹어 표창한 것이다. 이 두 관위는 오늘날의 부통령에 해당되며 태대각간의 경우는 신라 역사상 김유신이 유일하게 오른 관직이다. [상대등과 시중] 상대등(上大等)은 법흥왕 때 둔 귀족회의의 의장으로, 실질적으로 수상과 비슷했다. 시중(侍中)은 집사부의 장관으로, 진덕여왕 때 수상직을 맡아 상대등과 맞서게 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한이 강해졌다. 신라의 행정 구역 남북국 시대에 신라의 행정 구역은 9주 5소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9주(九州)] 9주(九州)는 신라 통일기의 행정 구역으로, 신라는 고구려·백제를 평정한 후 당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다음 신문왕 5년(685년)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9주가 설치된 곳은 신라 본국 및 가야 지역에 3개, 구 백제 지역에 3개, 구 고구려 지역에 3개 등으로 배분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 통일이라는 정당성을 강조한 정치적 배려라고 이해된다. “9주”의 설치 또한 중국의 지형설(地形說)의 “9토(九土)”를 상징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이를 중국식 명칭으로 고쳤으며, 혜공왕대에 다시 원래 명칭으로 되돌리는 등 시기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기준으로 9개의 주의 이름은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이다. 9주의 소관 군현 수는 450군현에 이르렀다. 주 밑에는 군(郡)·현(縣)을 두어 계통적인 조직을 하였으며, 주에는 총관(摠官 : 나중에 도독으로 개칭), 군에는 수(守), 현에는 영(令) 등의 장관을 두었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村)을 두었는데, 지방 토착 세력인 촌주(村主)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그밖에 특수 행정 단위인 향(鄕)·부곡(部曲)도 있었다. 또한 지방관을 감찰하려고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고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다. [5소경(五小京)] 5소경(五小京)은 신라 통일기의 행정 구역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9주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아울러 5개 고을에 소경을 두었다. 신라의 수도는 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수도를 한때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만두었다. 그 대신 수도 외에 대가야(大加耶)의 본거지와 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모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었다. 금관경(金官京 : 김해)·남원경(南原京 : 남원)·서원경(西原京 : 청주)·중원경(中原京 : 충주)·북원경(北原京 : 원주)이 그것으로, 여기에 중앙 귀족의 자제나 호민(豪民) 그리고 여러 주군(州郡)의 민호(民戶)를 강제로 이주시켜서 지방의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다. 소경에는 사신(仕臣)이라는 장관이 있어 이를 다스렸다.
대진국(발해) 고구려의 멸망이후 신라가 포기한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는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대진국(발해)이 건국되어 227년간 고구려의 맥을 이어갔다.
대륙강국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무너진 이래 각지에서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그러한 시기에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제의 아들로 알려진 고덕무는 대조영으로 성씨개명하고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대진국 (大震國)이란 나리를 세웠다(698년) 원래 震國은 단군 조선을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다. 대진의 영토는 5000리 번성기에는 9000리에 이르렀으며 역사는 229년간 지속 되었다. 지나인들은 대진국이 발해만의 저쪽에 있다하여 渤海라 불렀다.
대조영은 말갈족의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족의 장수 이진영등과 손을 잡고 대진을 건설했다. 1대 고황제 의 아들인 2대 무황제 는 말갈족중 독립을 끝까지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대진의 연맹에 복속시켰고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 냈다 ` 3대 문황제때는 한단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다시 설립하고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단기고사를 강의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지배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9세기에 들어 대진국은 크게 융성 하였으며 10대 선황제때는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게된다.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대진의 문화가 꽃피운 시기이다.
1949년 만주 길림성에서 발견된 문황제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비문에 3대 문황제의 大대興진이란 연호가 발견 되어 중국에서 주장하는 대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 이 아니라 건원 칭제하는 황제국가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대외적으로 당과 대등하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며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것 이기도하다.
그러나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대진국은 고구려, 백제와 비슷한 경로로 쇠망해 갔다. 당나라식 문물과 불교의 수용으로 대진의 주체성이 흐려져 갔다. 그리고 10대 선황제가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화 과정은 다른 종족들을 존중해 오던 대진국 연맹체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거란은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 집권화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대진국 15대 애제(哀帝)에 이르러 수도 상경을 점령하고 대진국을 멸망시켜 버렸다(서기 926년)
신라의 통일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무대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줄어들었고 대진의 멸망을 계기로 만주벌판과 시베리아가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후 우리민족은 대륙민족에서 본격적인 반도민족으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 발해사(渤海史) 개략(槪略) ] [발해와 관련된 문헌] : 발해사의 연구는 조선시대 양대호란 이후 반청 감정이 고조되면서 시작. ◈ 동사강목(삼국사기의 북국을 발해로 명명) ◈ 삼국유사(말갈건국으로 기록) ◈ 고려말 - 이승휴 제왕운기(고구려 구장인 대조영 건국) ◈ 발해고(유득공) : 남북국시대를 처음으로 다룸, 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 극복. ◈ 정약용『아방강역고』 ◈ 서상우『발해강역고』 ◈ 홍석주『발해세가』 ◈ 신채호『조선상고사』 ※ <구당서>에 대조영을 "본래 고구려의 또 다른 종족이다(本高麗別種)."라고 기록하고 있다. 『 오대회요』에는 "고구려 종자다(高麗種)."로 기록되어 있고, 남송 시대의 책인 『송막기문』에는 발해 유력 귀족의 성씨로 “고(高), 장(張), 양(楊), 이(李)씨”가 있다고 기록. ※ 환단고기를 쉽게 풀어쓴 안경전 씨는 “당시 역사적 정황을 보면 당나라가 발해군왕 책봉을 보냈을지라도 대조영은 그 책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군사적으로도 우세한 입장에서 당나라를 위협하며 자체 연호를 쓰던 대제국의 황제 대조영이 당나라에 복속을 뜻하는 발해 군왕 책봉을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재 당나라의 기록만 있고 대진의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말갈이라고 부르다가 발해라고 고쳐 부른 것은 대진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외교 정책상 일방적으로 부른 호칭”이라며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대무예는 무황제라고 칭하고 활발하게 주변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와 함께한 발해로 기억할 것만이 아니라 사료 연구를 통하여 정확한 대진사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발해의 건국 ① 발단 : 고구려 유민들의 중국 이주 →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만주 이주 → 당나라군의 추격을 물리침. ② 건국 : 지린성 동모산 근처에 도읍, 발해 건국(698년)→ 신라와 남북국의 형세. ※ 동모산(東牟山)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근거지로 삼은 곳. 오늘날 길림성(吉林省) 돈화성(敦化城) 밖의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이 그 유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방은 이전 고구려 영역의 동북부에 해당하는 곳이며, 이 부근을 <구당서(舊唐書)> 발해전이나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모두 「계루(고구려를 구성했던 5부족 중 한 부족의 이름)의 옛 땅[桂婁之故地]」으로 적고 있다. 동모산은 백두산 북쪽 300여 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동북쪽으로는 송화강의 한 지류인 목단강의 상류를 끼고 있다. 원래 이곳 주민은 말갈족이 대부분이었으나 대조영이 이곳을 근거지로 선정한 것은 외적들의 침입에 대해 유리한 방어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① 주민 구성 :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과 토착 말갈인의 피지배층으로 구성 → 지배층은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유지하면서 두 민족 사이의 조화를 꾀하였다. ② 고구려 계승 :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스스로 고구려라 표현 → 고구려 계승 의식 강조 3) 발해의 성장 ① 국제 관계 : 돌궐ㆍ일본 등과 친선 관계, 당ㆍ신라 견제 ② 무왕(719~737) : 당이 흑수말갈과 신라를 이용해 발해 압박 → 산둥 지방 공격 ③ 문왕(737~793) : 당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관계 개선, 중앙 통치 제도와 지방 제도 마련하여 왕권 강화, 유학과 불교 진흥 ④ 선왕(818~830) : 최고 전성기, 발해의 전성시대로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선왕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확대된 영토를 5경·15부·62주로 구획·정리하였다.(영토를 확장하여 처음에 방(方) 2천 리였던 영토가 방 5천 리까지에 이르렀다.) 4) 정치 제도와 생활 ① 특징 : 독자적인 연호(천통, 인안, 대흥, 건흥 등)의 사용.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대등한 지위를 강조한 것이며,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대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당 문물을 수용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② 중앙 정치 : 당의 3성 6부 본떠 만듬 → 독자적 운영(정당성 아래 6부) 5) 발해의 문화 ① 특징 : 고구려 계승(웅장하고 건실한 기풍), 당 문화 수용, 지방은 말갈 토착 문화 등 복합적인 모습. ② 무덤 : 고구려 양식의 돌방무덤이 많음(정혜 공주 무덤), 당과 고구려 양식의 혼합(정효 공주 무덤) ③ 유학 중시 : 6부의 명칭, 유교 교육 기관인 주자감 설치, 왕효렴과 양태사(높은 한문학 수준 보여 주었다.) ④ 고유문자의 사용 추정. ⑤ 고구려적 요소 - 연화문 와당, 돌방무덤의 모줄임 양식, 온돌장치, 이불병 좌상 6) 발해의 행정 및 국제 교류 ① 지방행정
▪ 발해의 5경 上京 - 용천부, 중경 - 현덕부, 동경 - 용원부, 남경 - 남해부(북청), 서경 - 압록부(국내성) : 수도의 편재성 극복 ▪ 15부(도독) : 지방행정의 중심지, ▪ 62주(자사) ▪ 이들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은 고구려인으로 임명. → 현, 촌락( 토착 유력자인 수령이 통치_말갈인으로 임명 ) - 설치 목적 : 넓은 영토를 관리하고 당∙신라∙일본∙거란과의 교류를 위해 설치. - 이용 내용 : 이 길을 통해 말이나 담비 가죽 같은 특산물 수출, 발해와 신라는 ‘신라도’를 통해 꾸준히 교류. ② 당과의 관계 : 건국 초기에는 적대적 → 문왕 이후 당의 문물 적극 수용(3성 6부제, 상경의 도시 구획_주작대로, 유학 등) ③ 일본과의 관계 :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건국 초기부터 우호적인 관계. ④ 신라와 관계 -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으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다. ㉠ 문화적 입장에서 관계 개선에 노력 ⓐ 발해 건국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5품인 대아찬의 관직을 부여함. ⓑ 원성왕(790)과 헌덕왕(812)때 신라에서 사신을 파견함. ⓒ 거란의 침입 때(911) 발해가 신라에 원조를 요청하자 신라는 이를 수락함. ㉡ 양국 사이의 대립 관계 ⓐ 869년과 873년 빈공과의 수석 다툼 문제 = 등제 서열 사건. ⓑ 897년 신라와 발해 사이에서 사신 윗자리 앉히기 요구로 대립 = 쟁장 사건. 7) 발해의 사회 ① 2중적 사회 구조 ② 상층사회 : 당의 관제, 지방제도, 학술과 종교 도입 ③ 하층사회 : 말갈족의 부족적 전통과 관습 그대로 유지 8) 발해의 경제 ① 밭농사 중심 - 조, 콩 재배. ② 목축과 수렵이 경제의 중요한 위치 차지. ③ 당에 수출품으로 모피, 삼, 금, 은, 불상, 유리제품, 자기 등이 유명. 9) 발해의 멸망 1. 거란족의 성장으로 멸망(926년) : 거란의 시조인 예리아포치는 발해를 공격한지 3일 만에 발해 왕 인선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2. 9세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 자체가 발해의 멸망 원인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역사적 의의 ① 우리 민족의 마지막 만주 지배 왕조 ② 남북국가 시대의 개막 ③ 요동 수복 운동의 전개 ㉠ 고려 태조 때 북진정책 - 왕식렴, 유금필 ㉡ 고려 성종 때 북진정책 - 서희 ㉢ 고려 공민왕 때 요동정벌 - 최영 ㉣ 조선 초 요동정벌 - 정도전 ㉤ 효종 때 북벌계획 - 송시열, 임경업 ㉥ 숙종 때 북벌계획 - 윤휴 [발해의 최대영역]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오히려 동북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발해는 9세기 말엽 제10대 선왕과 제13대 대현석 시대에 사방 5천 리를 경영했다. 이 시대 발해는 남쪽으로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쪽은 요하 경계에 이르렀다.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 남단에 뻗쳐 있었다. 따라서 발해의 강역은 고구려의 1.5배, 신라의 3~4배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고, 고구려인이 살던 곳에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인구를 37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멸망 뒤 당나라, 신라 등으로 이주한 유민은 2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영토에 세워진 발해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이열전’이나 ‘북적열전’에 6세기 이후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이 등장하면서 발해의 종족 구성을 확정하기 모호하게 하였다. 발해의 종족 계통을 밝혀내는 것의 핵심에 ‘말갈’의 실체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와 다른 계통인 말갈의 왕조였다고 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 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지배층만이 고구려인이었다면 발해는 만주사의 입장에서 말갈국 이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틀어 부르는 범칭이었다. 말갈이란 종족의 이름은 스스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당나라나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피지배 주민들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라는 것이다. 또 왕조시대에 나라 사람인 ‘국인(國人)’이란 수도나 도성 중심의 사람만을 의미했다. 신라 왕실이 멸망할 때 <삼국사기>가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기록한 것은 그런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구려시대에는 평양 사람만 ‘고구려인’으로 불렀고, 변방인은 그들과 종족이 다른 ‘말갈인’일 뿐이었다. <속일본기>를 보면 740년 발해 사신 이진몽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통역으로 신라인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발해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해사는 당연히 한국사의 일부이며, 발해사의 주인공이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 발해왕 계보 ] : 발해(渤海, 698~926 , 227년간, 총15대) 1. 고왕(高, ?~719)_재위 698-719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옛 고구려의 장군이었다고 함. 2. 무왕(武, ?~737)_재위 719~737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당나라를 공격함. 3. 문왕(文, ?~?)_재위 737~793 휘는 대흠무(大欽茂).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씀. 4. 대원의(大元義, ?~794)_재위 793~794 5. 성왕(成, ?~795)_재위 794~795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 중흥(中興)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김. 6. 강왕(康, ?~809)_재위 795~809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7. 정왕(定, ?~813)_재위 809~812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 함. 8. 희왕(僖, ?~817)_재위 812~817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9. 간왕(簡, ?~818)_재위 817~818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10. 선왕(宣, ?~830)_재위 818~830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11. 대이진(大彛震, ?~858)_재위 830~858. 선왕의 손자. 연호는 함화(咸和). 12. 대건황(大虔晃, ?~871)_재위 858~871 13. 대현석(大玄錫, ?~892)_재위 871~894 14. 대위해(大瑋?, ?~906)_재위 894~906 15. 대인찬(?~926)_재위 906~926 ※ 거란족 : 정확한 종족 명칭은 키타이(Kitai),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 부족으로, 여러 북방민족 중에서 하나의 '세력', 거주지는 요서 및 내몽고, 만주 서쪽으로, 대략 고구려의 서쪽 대릉하 유역 근처 지역.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자원이었다. 고구려후기 당나라에 일부 복속되고 고구려 멸망 후 거란 전체가 완전한 독립. 요나라(遼) : 거란족이 세운 중국의 왕조(907-1126년).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 907년 야율아보기가 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킴. 자신들이 진정한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갔다. 서요(중국어 간체: 西辽, 정체: 西遼, 병음: Xī Liaó, 거란어: 카라키타이) : 1132년부터 1211년까지 투르키스탄에 존재한 나라. 1125년에 금나라에게 멸망된 요나라의 황족인 야율대석이 서쪽에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서요라고 불린다. 이슬람 사료에는 "카라키타이"라고 불린다. 수도는 키르기스스탄 토크모크의 부근. ※ 말갈족 : 퉁구스계 민족으로 정체성이 매우 뚜렷, 수 천년 이상 이어진 종족으로, 고조선 시대에는 숙신,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때를 물길-말갈, 발해국 때도 말갈, 고려 때는 여진, 조선 때는 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화. 거주 지역은 한반도의 북동부(함경도), 만주 중부에서 동부까지, 연해주 지역. 여진은 거란의 요를 밀어내고 금(金)나라를 건국하였으며, 몽골이 중국을 공략하기 전까지 남송과 대치하고 있던 나라이다.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明)나라가 멸망하자 만주족은 다시 후금(後金)을 세우고, 이름을 청(淸)으로 바꾼다.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4/sub5.html?act=view&target=21413&keyfield=&key=&pag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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