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
소백산자락길
소백산자락길 <영주문화연구회>
1. 소수서원 조선 중중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죽계천 옆에 백운동서원(주자-백록동서원)을 세웠고, 명종 5년(1550) 풍기군수 이퇴계의 건의로 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았다.(사액서원의 효시) 고려시대 학자인 회헌 안향(최초로 유학을 받아들임)을 제향하는 소수서원은 옛 숙수사지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소수서원은 사적5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유물로는 안유(안향)의 영정인[晦軒影幀]를 비롯하여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周世鵬影幀], [오리 영정], [서총대유연도], [주지번의 족자], [운원잡록], [소수서원 전답안], [관찰사 관문], [소수서원 임사록], [죽계지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2. 선비촌영주 지역 종중 고가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가를 그대로 복사하여 세운 모형촌이다. 주말 정기 공연이 열린다. 제42회 한국민속예술축제의 주 행사장이었다.
3. 제월교 竹溪川을 건너는 다리 霽月橋(청다리)이다. 옛날 순흥에는 나그네, 선비, 관원, 구실아치들이 많아 청루주사라 일컫던 기생집, 술집도 즐비했다. 눈이 맞아 기생들이 아기를 낳게 되면 모두 청다리 아래에 버리고 대신 아기 없는 사람들은 청다리 밑에서 아기를 주워다 길렀다 한다. 청다리는 소수서원 뒤편 죽계 냇물에 놓인 다리이다. 이퇴계가 이름한 제월교 비석이 다리목에 있다. “청다리” 는 마을 이름이 되어 다리목에 있는 마을이 청다리라 불려진다.
4. 금성단(錦城壇/도 기념물 제93호)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다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향사하는 제단이다. 순흥부는 폐부되었다가 숙종 9년(1683년)에 다시 복원되어, 숙종 45년(1719년)에 이기룡이 제단(금성단)을 설치하였다. 매년 음력 2월19일과 8월13일에 금성단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5. 압각수(鴨脚樹/도나무 제46호) 은행나무 잎사귀 모양이 마치 오리발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수령이 1,200년이라고 전한다. 흥주 고을이 폐지되자 말라죽었다가 200년 뒤 순흥도호부가 회복되자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도 국가적인 큰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6.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안치는 죄인이 왕족 또는 고관일 경우 예우하여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켜 생활케 하던 제도이다. 안치의 종류에는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는데, 위리안치는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두르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죄인을 가두어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던 것인데, 죄가 무거운 자에게 적용하였다. 이 유적지는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위리안치를 당한 곳으로 구전되어 오는 장소이다.
7. 고분군 순흥에는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 고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벽화고분은 전국 55기 정도, 남한지역 5기 중 2기가 순흥에 있다.
8. 순흥저수지(배점저수지) 죽계천을 막아 만든 소규모 댐이다. 소백산 비로봉에 둘러싸여 경치가 수려하고, 원앙 등의 철새가 많이 날아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9. 한스빌 스웨덴 수입 통나무로 지어진(대원건설 송화선) 퇴역자 마을이다. (손봉숙+안청시),(조창현) 등
10. 배점 배순은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천민 출신이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수서원까지 매일같이 걸어와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퇴계 선생이 이를 가상히 여겨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된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심에 鐵로 像을 모시고,三年喪服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매월 朔望에 국망봉에 올라 宮城을 향해 哭祭祀를 3년 동안 지냈다 한다. 그 소문이 궁 안에까지 들리어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 이곳은 배순의 점방(대장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모두들 裵店이라 부르게 되었다.(500여년전-78세로 사망)
11. 삼괴정 배점마을 입구에는 세 그루의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곳을 삼괴정(三槐亭)이라한다.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동신이 된 배순을 배향하는 동신제가 열린다.
12. 배순정려비(유형문화재 제279호) 조선 중기 이 지방에서 대장간을 하던 충신 배순의 정려비이다. 광해군 7년(1615)에 정려되어 인조27년(1649) 손자인 배종이 비석을 세웠고, 영조 31년(1755) 그의 7대 외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이란 말을 넣어 고쳐 세웠다. 원래 배점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던 것을 남쪽 도로변 저수지 근처에 옮겼던 것을 최근 다시 이곳에 이전하였다.
13. 배점분교(폐교) 2008년 폐교
14. 죽계구곡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 따 죽계천에 붙인 이름이다. 초암사 앞에서 제1곡이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 삼괴정 앞의 제9곡에 이르기 까지 약 5리에 걸쳐 있다. 이 계곡은 고려 후기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의 무대와 이퇴계, 주세붕 등 유현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1곡 金堂盤石, 2곡 靑雲臺, 3곡 ( ), 4곡 龍湫飛瀑 5곡 沐浴潭, 6곡 ( ), 7곡 ( ), 8곡 ( ) 9곡 梨花洞
15. 초암사(草庵寺) 초암사는 신라문무왕 때 의상조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얽었던 자리란 뜻에서 초암이라 명명하였다. 당시에는 소백산에서 두 번째 큰 절로 삼층석탑과 동.서부도가 창건 당시의 것이라 전한다. 6.25동란 직전의 소개령에 따라 초암사도 한때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초암사에 있던 몇몇 유물들이 지금의 흑석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16. 월전계곡 죽계구곡의 끝에 놓여 있는 초암사를 지나면 오솔길이 나타나는데 그 길을 따라300m 쯤 더 올라가다 보면 슬쩍 감추어 난 왼편 길이 있다. 왼편 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개울과 길이 거의 하나가 되는 좁고 깊은 협곡이 계속되는데 숲 속을 감추어 흐르는 개울은 협곡을 따라 또 다른 길로 국망봉을 찾아간다. 정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추위를 느끼는 곳이 바로 이 월전계곡이다.
17. 전문가를 위한 달밭골 등산로 초암사→삼가계곡→달밭골→시거리로 연결되는 등산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코스는 오랫동안 등산가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코스이다. 금방 목욕탕을 나서는 달밭골아가씨의 깨끗한 얼굴과 같다는 느낌이다.
18. 동화 속의 나무다리 길은 산길치고는 산책로처럼 편안하고 넓다. 더러 빨간 표지기가 눈에 띄고 계곡 오른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는 잠시 계곡과 멀어지는가 하더니 솔잎이 폭신하게 깔린 전나무숲길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어떤 곳은 계곡은 좁고 깊이는 깊은 곳도 있다.월전계곡에 들어선 지 20분쯤이면 예상치 않은 나무다리를 만날 수가 있다. 냇물을 건널라치면 징검다리가 제격이듯이 계곡을 건널라치면 좁은 나무다리가 제격이 아닐까? 긴 통나무를 묶어 발판을 만들고 허리께 높이에서 잡히도록 손잡이까지 정성 들여 만든 예쁜 통나무다리였다.
19. 월전동과 달밭골 풍기 달밭골은 ‘달밭골’, 순흥 달밭골은 한자로는‘月田洞’으로 쓰고 있다. 사람들은 달빛이 밝은 밭이라고 쉽게 해석하고 있다. 달빛이 집에서 밝아야지 왜 하필이면 밭에서 밝을까? 달밭골은 ‘달’은 원래 산의 고어이다. 그러니‘달밭’은 ‘산에 있는 밭’을 말한다. 즉,‘산의 경사지에 있는 작고 다닥다닥 붙은 다락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순흥 달밭골과 풍기 달밭골은 행정구역상의 구분일 뿐이고 그들은 언제나 한동네였습니다. 언덕에서 부르면 한 걸음에 달려가는 그런 인정이 솟아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오면 동정철씨가 예순여섯에 낳았다는 소백산 날다람쥐 동호철군이 생각납니다.>
20. 성재(달밭재), 달밭골마을 ‘달밭골’은 옛날 화랑도(花郞徒)들이 무술을 익히던 훈련장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재 정감록 신봉자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순흥 달밭골과 풍기 달밭골 사이의‘성재’라는 고개엔 옛 성터가 있고, 조금 내려와서 비로봉 가는 길옆에는 사고(史庫)터도 있다.
21. 비로사(毘盧寺) 신라 문무왕 20년(680) 의상조사가 영전사에 거주하면서 문도라는 제자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신라말 진공대사가 중건한 후 큰 사찰로 전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보물 제996호인 석조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조상이 적광전에 함께 모셔져 있고 유형문화재 제4호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제7호인 영주 삼가동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22. 시거리 삼가리는 삼거리와 같은 말이다. 이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욱금리 였는데 왜정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가동으로 분리되었다. 삼가리란 유래는 소백산 비로봉을 중심으로 세갈래 골짜기로 되어 있고 골짜기 마다 마을이 산재해 있어 삼가리라 불리어 졌다고 한다.
23. 금계바우 마을 뒷산에는 닭의 모양과 비슷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닭산” 즉 금계바위라 부른다. 옛날 이 바위 가운데 부분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었고 닭의 눈 부분에는 두개의 빛나는 보석이 박혀 이 마을을 지켰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을 동네의 수호신으로 믿었다. 어떤 나그네가 일확천금을 노리고 절벽을 기어 올라가 금계암에 박힌 보석을 빼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이 벼락으로 바위의 일부분이 무너지고 나그네는 숨졌다. 그리고 보석 없어졌다. 이 일 후에 마을은 점차가난해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바위 의 형태도 닭처럼 보이지 않는데 많은 수정 조각들이 금계암 부근에 흩어져 있어 해질 무렵이면 낙조에 반사되어 절경을 이루기도 한다.
24. 삼가분교(폐교) 1954년 설립
25. 금선정(錦仙亭) 장선마을 뒤쪽 풍광이 빼어난 개울 절벽위에 동남향한 아담한 정자이다. 금선정 아래의 절벽에는 영조33년(1757) 풍기군수 송징계가 새긴 금선대라는 작자가 남아있으며 건물은 절벽바위에 바로 두리기둥을 세웠다. 조선 영조 때 단양군수, 신주목사 등을 역임했던 금계 황준량(1517~1563)이 학문을 닦던 곳에 정조 5년 (1781)에 군수 이한일이 정자를 건립하고 금선정이라 이름 지었다.
26. 금계동(십승지마을) 소백산 비로봉에서 남쪽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풍기의 삼가동,욱금동,금계동에 이르는데, 삼가동 저수지 밑에 이르러 절승의 골짜기 금선계곡이 있고, 그 아랫마을이 금계동이다. 금계동은 풍수지리상 전국십승지 중의 제일승지로 꼽히고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가뭄이 없고, 홍수가 나지 않는다. 소위 자연재해가 없는 셈이다.
금계촌 일대는 정감록을 믿고 십승지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인 적이 없던 곳이다. 일제시대 말기인 1930년에는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떼를 지어 살았고, 그 뒤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남쪽으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봇짐을 싸 들고 와서 골짜기마다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27. 풍기인삼시파지(임실마을) 신라26대 진평왕(서기627년)때 당 태종에게 인삼(산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순수한 선물로, 교역품으로 이용되다가 고려 중엽부터는 공물이 되면서 해마다 중국에서 요청하는 양은 늘어나고 국내 수요량도 증가하는 반면, 인삼(산삼) 생산량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이에 주세붕(조선 중종) 풍기군수가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풍기읍 금계동 임실 마을에 시험 재배한 것이 이 지역 인삼재배의 효시가 되었다. 인삼은 만병통치약이다. 아직도 인삼의 신비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밝혀진 인삼의 효능은 다음과 같다. ①간장보호작용 ② 당뇨병 개선장용 ③ 암 효능 ④ 항피로작용 ⑤ 동맥경화, 고혈압 ⑥ 중추신경(뇌기능)계 ⑦ 심맥관계(순환관계) ⑧ 빈혈 ⑨ 면역증강 및 소염작용 ⑩강정작용
28. 과수원 산비탈 - 배수
29. 풍기온천 지하 800m 심층에서 분출하는 100% 천연원수로 불소가 함유된 알칼리성 온천으로서 전국에서 으뜸가는 유황온천이다. 물은 유황, 불소, 중탄산 등의 우리 몸에 좋은 물질이 온천수에 용해되어 있어 만성관절염, 신경통, 금속중독, 동맥경화증, 당뇨병, 만성기관지염,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30. 비트로시스(생명공학) 생명공학은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주목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주)비트로시스(대표 손성호)는 산삼배양근을 비롯해 다양한 생명공학 연구들을 진행, 뛰어난 제품들을 생산하며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기업이다. 2002년 자본금 30억 원으로 시작해 현재 생명공학관련 우수벤처기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중외제약 등 중견기업이 시장 포격에 나선 산삼(산삼배양근) 시장에서도 현재 비트로시스가 업계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산삼(산삼배양근)은 노화방지, 당뇨치료, 암 예방, 고혈압 조절 등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무쇠다리옛터(수철동) 희방사 역이 있는 이 마을은 원래 순흥부 창락면 수철촌이었는데 1914년 풍기 수철동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큰길 좌우로 숙박업소, 음식점, 마방(馬房), 짚신 미투리 파는 가게 등이 있어서 죽령 옛길에서 가장 큰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희방사 전설> 희방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두운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어느날 두운조사가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줬다. 그 후 호랑이는 두운 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 그 규수는 바로 慶州戶長의 무남독녀였다. 경주호장은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져 이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되어 기쁘다는 뜻의 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方을 써서 喜方寺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마을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지금도 마을이름이 水鐵洞이다.
32. 희방사역(소백산역) 희방사역(喜方寺驛)은 경상북도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위치한 중앙선의 역이다. 무궁화호 열차가 1일 4회 정차한다. 1942년 4월 1일 : 배치간이역으로 영업개시, 1951년 4월 11일 : 역사신축 및 보통역으로 승격, 1988년 12월 12일 : 현재 역사 신축
33. 죽령터널(철로, 고속도로)
중앙선 철도터널이 뚫리고,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인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로 뚫려있다. 1941년 4.5km의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철도가 개통되었고, 터널의 동쪽에 희방사역, 서쪽에 죽령역이 개설되었다. (죽령역에서 원형의 ‘또아리굴’ 을 파서 360° 회전하며 하강한다) 1949년에는 중앙선 죽령터널서 열차탈선사고가 일어나 46명 사망하고 101명 부항한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고속도고 죽령터널은 총 연장 약4.6km 국내 최장터널로서 터널 속에서 파 낸 흙만도 190여만톤이란다. 최신 공법이 총동원된 죽령터널은 거대한 첨단 빌딩과도 같아 CCTV 68대가 상황을 점검하고 매연 등을 대형 펌프로 24시간 퍼낸다.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의 죽령이 완전히 드러낸 속살을 뚫고 단 5분에 통과하고 보니 마치 요술세계를 지나온 것 같다.
34. 죽령 개척과 죽지랑 신라의 술종이란 사람이 기병 3,000의 호위를 받으면 삭주도독사로 부임하는 길에 행차가 죽령에 다달았다. 한 거사가 길을 닦고 있었는데 술종이 그를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도 술종을 당당하게 보아 서로 마음이 통했다. 술종이 임지 당도 한말만에 거사가 술종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거사가 그 날 밤에 죽었다 한다. 그 날로 아내가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매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이 아이가 화랑이 되어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죽지랑이다. 득오가 그를 사모하여 지었다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간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에 주름살을 지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님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밤인들 있으리까. ※ 9개월의 짧은 사랑이 퇴계의 이동으로 이별이 될 때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이나이다. 나으리.” 하고 울며 퇴계에게 말하였던 두향의 별사는 바로 ‘모죽지랑가’ 에 나오는 내용을 한소절 인용하였던 것이다.
35. 죽령 옛길 죽령(竹嶺-689m)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영남에서 서울로 나들이하는 삼대관문 중의 하나인데, 죽령은 새재보다 47m 더 높고, 추풍령보다 454m나 더 높다. 죽령은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에 3월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 라고 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개척연대가 사서(史書)에 분명히 전하는 고개도 죽령이 유일하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에 서려있는 죽영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뒤치락 불꽃 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551년)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을 탈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 민초들의 삶의 젖줄 같은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도 5번국도, 중앙고속도로,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오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36. 주막거리 터 주막거리 중 가장 큰 곳이 지금 희방사역(喜方寺驛)이 있는 마을 어귀의 [무쇠다리] 주막거리였고, 그 버금이 고갯마루 주막거리, 그다음이[느티정] 주막거리, 가장 작은 곳이 고갯마루 대밑의 [주점]이라는 주막거리였다.
37. 잔운대(棧雲臺)·촉령대(矗?臺)
명종(明宗) 3~4년(1548~1549) 풍기군수 퇴계 그의 仲兄 溫溪를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다. 온계는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고향 마을 예안에 다니는 길에 퇴계는 여기 죽령에서 마중하고 배웅했다. 퇴계는 형제의 우애를 즐길 자리로 동·서 두 대를 쌓았으니, 동쪽을 잔운대, 서쪽을 촉령대라 했다. [棧雲]이라 함은 유호인의 時 “竹嶺行百盤 道浮(서리 서리 죽령길 높기도 해라. 가파른 사다릿길 구름에 닿네)”에서 취함이요, [矗?]은 김종직의 “雲根水矗矗??(구름은 삐죽삐죽 물소리 시원)”에서 취함이다. <주세붕의 이현보 마중> 조선조 중종때의 명신 농암 이현보가 고향 예안으로 가는 길에 신재 주세붕이 술과 안주를 조랑말에 싣고 죽령 마루턱에서 이농암을 맞이하여 詩酒로 회포를 나누었다는 사연이 두 분의 문집에 전한다.
38. 상원사 동종의 전설 안동 남문루에 있던 동종이 저선 세조임금의 명을 받고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 갈 때의 사연이다. 이 동종은 아담한 종으로써 청아한 소리는 백리 밖에서도 들렸다. 세조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를 확장 중수하여 임금의 원당사찰로 전국 제일의 가람으로 만들때 이종을 상원사로 옮겨갔다. 800여 년 동안 환란을 겼으며 고장을 지켜왔던 종이 정든 고장 안동을 뒤로 하고 십 수일 만에 죽령 마루까지 올려왔다. 그러나 동종이 영남을 마지막 떠나는 죽령마루에서 요지부동이고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운종도감은 생각 끝에 36개의 젖곡지 중 한 개를 잘라 종이 있던 안동의 남문에 안치하고 큰 제사를 올린다음 죽령으로 돌아와서 역졸에게 당겨 보도록 하였더니 서서히 끌려갔다. 운종은 안동에서 상원사까지 80여일이 걸렸다.
39. 죽령 대나무 “죽령”이라는 글자 그대로 라면, 이곳에는 대나무가 많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없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 조목 선생은 대강면 장림에서 죽령 고개를 넘으며, “장림 무장림, 죽령 무죽령”이라 읊었는데, 이것은 장림에는 긴 숲이 없고 죽령에는 대나무가 없음을 노래한 시다.
40. 다자구야! 들자구야! 전설 또한, 죽령 산신당에는 그 옛날 할머니의 기지로 도둑(산적) 잡던 다자구 할머니의 “다자구야 들자구야”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41. 죽령장승공원
42. 죽령의 중요성 - 국경의 의미 조선시대 죽령은 선비들의 과거 길 이야기가 묻어있는 낭만의 길이었지만, 삼국시대의 죽령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으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싸움터였다. 고구려가 죽령을 장악했을 때의 흔적이 순흥의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듯 신라가 죽령을 넘었을 때(신라는 진흥왕12년에 거칠부 등 여덟명의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결하니 백제군이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는데 신라의 거칠부 등이 이 기회를 타서 죽령 밖과 고현안의 10군을 취하였다. 신라는 북진의 속도를 더하여 진흥왕16년(555)에는 진흥와 자신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순수비를 세웠다)는 단양에다 순수비를 세워 힘을 과시했다.
43. 죽령과 온달장군 고구려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하여 온달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 부근에 다달았다. 온달장군이 떠나기에 앞서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나이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나가서 반드시 이를 수복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서하기를 ‘죽령 이북을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출발하여 신라군과 아차성(단양 구인사 부근 온달산성) 아래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44. 龍夫院마을(죽령산신당)
45. 보국사지(輔國寺址) 보국사지는 문화유적총람에 죽령 중턱에서 연화봉으로 오르는 산기슭에 위치(대강면 용부원 2리 산41번지)하는 절터(寺址)로 소개되어 있다. 죽령 마루턱에서 용부원리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가 우측산 기슭 약 200평 가량의 터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보국사지이다. 보국사는 신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고 영토를 확장할 때 치도위민(治道爲民)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설이 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주둔시켰던 최전방의 군사와 문물, 행정을 총괄하기 위하여 세웠던 사찰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 권2에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보면 술종공이 죽리랑 이라는 거사를 위하여 돌미륵을 모셔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국사가 당시에는 교통과 관계되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이외에도 연화문(蓮花紋), 대좌(對坐), 죽절문간석(竹節紋竿石), 연화문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柱礎石), 기와조각(瓦장) 등을 볼 수 있다.
46. 용부사
47. 죽령휴양소
48. 대강주막 단양군 대강면 장림리는 바로 죽령 어귀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나그네들이 높고 험준한 죽령을 넘기 전에 하룻밤을 쉬면서 짚신을 고쳐 신고 말을 타던 마방(馬房)이 있었다. 여기에 객고(客苦)를 달래주던 주막거리가 번창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 가면 ‘소백산 술도가’라는 양조장이 있다. 700여년 전부터 있었던 술도가이니 그 내력이 평범치 않으며, 술맛 또한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특히, 1994년 한국문화재단이 주최한 전통주류품평회에 충북지방 대표로 초대되어 우수 민속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달밭골기) 이제는 발품을 본격적으로 팔 일만 남았다. 풍기 달밭골을 거쳐 순흥 달밭골로 사고 옛산길을 더듬어 석륜사지 봉바위를 답사하고, 등산로를 따라 초암사로 내려오는 길은 몇 년간 우리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매표소에서 아이 둘과 엄마 둘, 아빠 하나가 부석사로 향하고 1420고지 등반팀만 비로사를 휭~하니 지나쳐 풍기 달밭골에 닿았다. 우리는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산행을 시작했다. 고개를 넘어 호리병 속 같은 순흥 달밭골에 도착했다. 끊어진 길을 헤치고 조금 나아가니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흩날리고, 싸릿대로 짐승막이와 바람막이를 한 토담집이 한 채 있었다. 끊어진 길을 이어줄 주인장을 찾았다. 3년 전 여름,“옛날 지름길은 숲이 우거져 길을 잃기 쉽다.”며 골짜기 입구까지 안내해 줬던 그 아저씨가 나온다. 반가웠다. 그때 일을 얘기하고 석륜사지로 가는 지름길을 물었다. 때가 겨울인지라(나무마다 낙엽을 떨군 겨울산은 알몸을 들어내어 시야가 넓다) 이번에는 친정하게 옛길을 가르쳐 줬다. ‘달이 밝아 달밭골’ 이라는 유래를 들려준 주인장은 휴양차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한다. 아저씨께 피 같은 막걸리 한 병으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하고 가던 길을 이었다. 우리는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산등성에 엉겨 붙었다. 왼쪽 산줄기 끝엔 비로봉이 우뚝 서 있고, 오른쪽 저 멀리에 보이는 것은 국망봉이다. 눈이 채 녹지 않은 길 위로 인적은 보이지 않고 산돼지 발자국만 가늘게 길게 펼쳐져 있었다. 소나무 숲과 잡목지대를 지나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갈림길이 나왔다. 남사고는 소백을 가리켜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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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碍洞天 세상과 사람 원문보기 글쓴이: 무애동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