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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광(佛光) | 검색 서비스 | |
2001년 10월호 |
우리 스님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하늘엔 금이 그어져 있지 않습니다.” 글· 사기순 |
고통에서 발심의 싹이 트다
“여덟 살 때였던가. 흑인과 백인의 차별 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지요.”
인종 갈등을 접하면서 괴로워하던 소년은 11살 때 일본으로 캠프갔을 때 가마쿠라 대불을 참배하면서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평화롭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소를 뵙고 가슴이 뛰었지요. 또 부처님 앞에 수박을 공양 올리면서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습니다.”
이 날의 감동은 훗날 불교를 믿으면 고통이 해결될 것 같은 막연한 예감으로 발전하였고, 불교서적을 읽어가면서 혼자 수행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열다섯 살 때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해 ‘잘못 된 것이다. 모두들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 말과 행동이 다른 어른들의 이중성이 느껴졌습니다. 하늘을 보면 금이 그어져 있지 않은데 어른들은 왜 저리 다투는지 알 수 없었지요.”
세상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을 하고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성세대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물리학을 선택했다가 중도에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꿨지요. 사람들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대학 때 국방성 앞에서 반전 시위를 했다. 50만 이상 되는 시위대가 운집했던 그 시위는 미국 역사에도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처음 두 차례는 동기도 순수하였고,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세 번째 시위에서는 군중과 경찰이 몸싸움을 했다. 또한 시위를 주도한 지도부가 의견 차이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지도부에 속했던 스님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만일 정권을 잡더라도 똑같이 할 것 같아.”라는 친구의 말에 동감하고, “정치라는 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찾았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정신병원에서 수많은 정신질환자들을 만나 상담해주는 일을 자원했고, 졸업 후 4년 동안 병원에서 카운슬러로 일했다.
“병원에서 환자를 거칠게 대하는 의사에게 실망했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모르고 자비심이 없는 의사는 환자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식은 이웃에 큰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혜가 목말랐다. 어떻게 해야 참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1년 동안 먹물근성을 없애기 위해서 도예도 하고,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착하고 인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매우 즐거웠지만 이 또한 근원적 고통의 해결에는 큰 도움이 못 되었다.
영원한 스승, 숭산 스님과의 만남
“숭산 스님을 뵙고 바로 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스님에 대한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1977년 예일 대학에서 있었던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듣고 인생이 달라졌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에 한 교수가 ‘제정신과 미친 것’에 대해 질문했다.
“평소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제정신으로 사는 길은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숭산 스님의‘집착을 하면 미친 것이다. 조금 집착하면 조금 미친 것이고, 하나도 집착하지 않으면 제정신이다.’라는 말씀에 가슴이 시원해졌습니다.”
숭산 스님의 한마디는 명문대학에서 심리학을 수년간 배운 것보다 나았고, 지난날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라는 것에 집착하기에 괴로운 것이다. 나라는 것 또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보면 나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으며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을 똑바로 보고 남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숭산 스님의 말씀에 전율했다.
“2박 3일 동안 세 차례 숭산 스님 밑에서 수행하였는데, 3번째 용맹정진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선원으로 들어갔지요.”
그 해부터 로드아일랜드의 프라비던스 선원(미국에서 처음 숭산 스님이 문을 연 선원으로 관음선종의 본사격인 곳)에서 살면서 2년간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행자생활을 했다.
“대학 다닐 때는 히피 스타일로 머리를 기르고 다녔는데 삭발을 했더니, ‘네 머리가 짧아졌으면 했는데 너무 짧아진 것 같다.’고 하시던 어머니, 또 어느 날인가 ‘네가 가는 길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어머니에게 ‘거꾸로 된 것보다는 낫다. 나도 엄마를 사랑한다.’고 한 일이 생각나는군요.”
모자지간의 일화가 감동적이다. 서로를 마음 속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운 일화가 아닌가.
“만일 다른 종교와 화합하지 못한다면 자기 종교 또한 바르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에만 집착하고 달을 못 보니 종교간의 분쟁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미 이원론적인 종교의 한계를 느낀 상황에서 고통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해결방법을 제시해놓은 불교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참선 수행법에 감읍, 마침내 1984년 삭발염의(법명은 道門)하였다.
묵언정진, 용맹정진 수좌로 국내외 불자들에게 널리 존경받고 있는 스님은 지난 99년 여름 숭산 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받아 대봉(大峰)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스님은 현재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불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숭산 스님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세계인의 정신을 맑힐 국제선원 무상사
“지난 35년 동안 수천 명의 세계인들이 숭산 큰스님께 선을 배우고 나서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는한국불교의 저력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부터 한국불교는 보물단지 같았다고 강조하는 대봉 스님은 오늘날 재가불자들의 수행공간 부족과 지도 부재를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를 알고 싶어하고 한국에서 수행하길 원하는데 공간이 없습니다. 특히 재가불자들의 수행공간이 없어서 스리랑카, 미얀마 등으로 가고 있지요. 또한 외국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릅니다. 무상사가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계룡산 국사봉 기슭(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일찍이 무학대사가 국사가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예언한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의 무상사는 한국에서 수행하고 싶은 외국 불자들의 열성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지 매입금을 포함하여 선원과 요사채 건축비의 90%를 외국인들이 기부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는 점이다.
“출가자든 재가불자든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상관없이 개방할 것입니다. 누구든 똑같은 자격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서양에도 불교가 강해질 것이고, 한국불교를 중국으로 역수출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지난 해 5월 선원이 완공되어 홍콩, 싱가폴, 중국, 말레이시아인 등 25개국의 사람들이 20명씩 세 차례 무상사에 와서 수행하고 돌아가 본국에서 한국불교를 전하고 있다. 선원에 이어 오는 10월 21일 요사채 불사 회향식을 마치고 나면 동안거, 하안거는 물론이고 1주일 단위로 수행 프로그램을 개설할 계획이어서 벌써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수행의 궁극목적은 보살행
“우리 모두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게 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
순간순간 의문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것, 진짜 모르는 것을 100% 아는 것이 참선이라고 하면서도 스님은 이는 그저 말일 뿐이라며 오직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행을 하면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 삶의 방향이 정확해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해답이 분명해지니 삶에 자신감을 얻게 되지요. 특별한 것은 아닌데 굉장히 멋진 것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보살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수행의 궁극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 공기까지도 돕는 것이 인간의 참 직분이다. 수행을 통해 불교의 연기법을 깨닫고, 나와 남이 본래 한 뿌리임을 체득한다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지옥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자비심이나 연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살행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 참 수행입니다.”라는 대봉 스님의 말씀이 지금껏 귓전을 울린다. 오직 바로 여기에서 실천 한다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듯싶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