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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오늘도 장미공원으로 간다
-운주 하연승 고문 인터뷰
시간 : 2014년 5월 12일
장소 : 카페 ‘장미를 찾는 사람들’
참가자 : 하연승, 이처기, 공영해, 황시은
정리 : 황시은
연록의 잎들이 씻은 듯 반짝이는 오월이다.
아카시아 꽃과 이팝나무 꽃들이 산이며 길이며 가리지 않고 향을 피워 키질하는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뿐이랴.
울타리엔 붉은 장미꽃까지 아픈 4월의 슬픔을 하루 빨리 떨치고 일어나자며 조심스레 피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계획을 잡아온 하연승 고문과의 대담을 위해 함안 이수정을 거쳐 카페 <장미를 찾는 사람들>로 가게 된다.
카페의 원두막이 대담장소로 물색되다.
이처기 자문이 지원군으로 자리를 함께 하다.
제1부 ‘창원사랑시회 시대’는 공영해가 진행을 맡고
제2부 ‘문학과 삶’은 황시은이 진행을 맡다.
인터뷰를 마치고(좌로부터 이처기, 하연승, 황시은, 공영해)
제1부 藝原 시대를 거치며
공영해 : 시단은 물론 인생에서도 대선배이신 하연승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문학적 자취를 찾아가며 문학인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사석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지만 어떤 주제를 두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 오늘 이렇게 모셨습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자리를 함께해 주신 이처기 전 회장님, 고맙습니다.
일동 :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영해 : 이 자리는, 1993년 이후,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공직생활을 마치고 인생의 후반기를 맞아 문청 못지않게 문학 활동을 하신 ‘창원사랑시회’ 시절을 중심으로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창원사랑시회’를 떼 놓고 선생님의 90년대 문학활동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작 모시고 얘기를 나누어야 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제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시향》의 '나의 문학, 나의 삶'에서 선생님은 두 차례에 걸쳐 <나의 시, 그 자전적 편력>을 발표하셨는데요, 2008년 《詩嚮》 5집에 발표한 ‘젊은 날의 시편들을 되새기며’는 유년기에서 1950년 육이오 전쟁 때까지의 문학적 감성기를, 《詩嚮》 6집에 발표하신 ‘동인지 《麥鄕》에서 회원지《詩硏究》를 거쳐’는 사춘기 문학에 눈을 뜰 때부터 대학과 공직생활을 마칠 때까지의 활동을 주로 다루셨지요. 글의 말미에 “그 이후의 것에 대하여는 또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고 하셨으나 그 후속편을 언제 마무리해 주실지 알 수 없는 입장이어서,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이렇게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하연승 : 그 점은 참 미안합니다. 옛일에 대한 기억도 분명치 않고 긴 글을 쓰자니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마침 시향에서 자료까지 찾아 자리를 깔아 주니 대신 회고의 장으로 삼겠습니다.
공영해 : 선생님은 경남 도청 국장으로 도임하신 후 경남운수연수원(현 경남교통문화연수원) 원장으로 재직하시던 1993년 ‘창원사랑시회’를 결성하여 8년여 간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셨습니다. 문학회 결성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우리는 아름다운 이 도시의 마음이 되고자 한다.”는 회의 취지문을 토대로 ‘창원사랑시회’를 결성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의 배경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하연승 : 1993년 직장이 창원운수연수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창원시사랑회’를 결성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본인이 앞장서서 회를 만든 것은 아니고, 나의 직장 부근에 살던 최명학 시인과 만나 얘기를 하던 중 말이 나와, 최명학 시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여러 동인들을 모으게 되었고, 실질적인 활동은 최명학 시인이 문학 현장에서 알게 된 넓은 인간관계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영해 : 최명학 시인의 힘이 컸군요. 창원사랑시회는 회지 《藝原》을 1993년도에 발간하였습니다. 그런데 창간호 발행일이 애매합니다. 자료를 보면 창간호라 하지 않고 1집과 2집 합본으로 묶었던데, 발간일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요. 표지에 “1993. 8.11.”이라고, 자료 제공자가 쓴 글씨만 있더군요. 자료만으로는 정확한 발간 날짜를 알 수가 없겠네요. 이 날짜를 중심으로 추리해 보시면 당시의 상황이 짚이지 않겠습니까? 창립 멤버인 이처기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이처기 : 예. 제가 말씀드리지요. 그 책 표지에 쓴 날자는 제가 쓴 것인데요, 그 책자를 받은 날짜를 무의식적으로 써 놓은 거랍니다. 어떤 연유로 합본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그냥 그 해 신학기 무렵에 그런 얘기가 있어 참여하였는데, 모임 초기에는 회라기보다 그냥 문인들 몇이 모여 시를 주고받고 하며 차나 한 잔 마시는 그런 모임이었는데,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것보다 한 달에 서너 번 모일 따마다 시 한 편씩을 숙제처럼 가져오자, 이래가지고 그 시를 그냥 1회성 이벤트로 버리느니 이를 모아보자 하여 하연승 원장님(당시에는 원장님이었으니)께서 운전기사와 경리아가씨와의 도움으로 (사무실에서) 문집을 만들 수 있었어요. 그 열성에 회원들이야 미안스럽지요.
하연승 : 옛날 부산대학시절 필경 프린팅으로 문집을 만들던 문학을 향한 열정이 아마 식지 않았고 팍팍한 공직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여유를 운수연수원장 시절 되찾게 되어 회에 적극 참여하고 책을 꾸밀 수 있었던가 봅니다. 그 사람들(직원)도 책 만드는 게 전문이 아니다 보니 발행일 같은 것엔 신경을 안 썼어요. 나도 그랬고. 아마 처음은 1993년 7월 초가 될 겁니다.
공영해 : ‘창원사랑시회’는 1993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8년 동안 회원 작품 발표집 《藝原》을 26집까지 발행합니다. 1993년 8월 11일부터 1995년 7월 11일까지 《藝原》은 월 1회 발간되다가 19집(1996년 9월 14일 발행)부터 21집(1996년 2월 13일)은 두 달, 석 달을 걸러 발간됩니다. 22집부터는 시낭송을 위한 별책으로 26집까지 발행합니다.
그리고 네 권의 사화집을 발간하였습니다. 기록상 9회의 시낭송회를 확인할 수 있었구요.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모임이 2000년대에 와서는 휴면기에 들고 맙니다. 그러다가 2004년 ‘창원사랑시회’에 관심을 가지던 후배들에 의해 ‘포에지 ․ 昌原’이라는 모임을 만들게 되고 그 시정신의 발현을 위해 꾸준히 일어서고 있음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앞으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준비한, ‘창원사랑시회’의 자취를 출판물을 토대로 연대별로 간략히 정리한 내용을 살펴본 후 계속하도록 합시다.
♣ 1993년
◇《예원(藝原)》제3집(19×26. 20쪽. 복사본)- 1993년 9월 7일 발행. 참여 회원은 모두 11명. 황선하, 하연승, 최명학, 조용오, 이향안, 이처기, 신찬식, 박태남, 박미향, 김우태, 김명희. 1쪽에 취지문 수록.
◇ 《예원(藝原)》제4집(19×26. 36쪽. 복사본)- 1993년 10월 7일 펴냄. 민병기 입회.
◇ 창원사랑시회 주최로 시낭송회 개최- 팸플리트 크기 12.9×18.9. 접이식 4면. <가을저녁 시와 함께> 프로그램을 보면 1993년 10월 12일(화요일) 19:00시 죽림다원(창원시의회 건너편)
◇ 《예원(藝原)》제5집(19×26. 22쪽. 복사본)- 1993년 11월 9일 인쇄. 예문사 광고가 표4에 처음 보임.
◇ 《예원(藝原)》제6집(19×26. 30쪽. 복사본)- 1993년 12월 6일 인쇄. 황선하의 <용지못에서>가 처음 발표됨.
♣ 1994년
◇ 《예원(藝原)》제7집(19×26. 28쪽. 복사본)- 1994년 1월 14일 인쇄. 표4에 ‘대원종합건설주식회사’ 광고.
◇ 《예원(藝原)》제8집(19×26. 30쪽. 복사본)- 1994년 2월 14일이 펴냄. 역시 ‘대원종합건설주식회사’ 광고. 이 광고는 13집까지 실림.
◇ 《예원(藝原)》제9집(19×26. 28쪽. 복사본)- 1994년 3월 14일) 발행.
◇ 《예원(藝原)》제10집(19×26. 26쪽. 복사본)- 1994년 4월 19일 발행.
◇ 《예원(藝原)》제11집(19×26. 18쪽. 복사본)- 1994년 5월 20일 발행. 민병기 회원 작품이 빠진 10명의 시 수록.
◇ 《예원(藝原)》제12집(19×26. 18쪽. 복사본)- 1994년 6월 21일 발행. 김명희 회원의 작품이 빠진 10명의 작품 수록.
◇ ‘창원사랑시회 11인 詞華集’인 《어디서 찌르레기 울고》(도서출판 불휘. 14.7×21.7. 202쪽. 값 4,000원)- 1994년 10월 20일 발행.
◇ 창원사랑시회 사화집 《어디서 찌르레기 울고》 출판기념 및 문학의 밤- 팸플리트(12.9×18.9. 20쪽) 겸 자료집 발간.
◇ 《예원(藝原)》제13집(19×26. 28쪽. 복사본)- 1994년 12월 12일 발행. 11명의 작품 수록.
♣ 1995년
◇ 《예원(藝原)》제14집(19×26. 28쪽. 복사본)- 1995년 2월 14일. 14집부터는 취지문을 표2에 담고 있음. 광고 없음. 황선하, 하연승, 이처기, 이향안, 최명학, 박태남 6인의 시를 수록하고 ‘작품 감상집’을 마련. 권말에 회원 주소록 수록.
◇ 《예원(藝原)》제15집(19×26. 34쪽. 복사본)- 1995년 3월 14일 발행. 회원 작품 뒤에 ‘작품감상집’ 둠.
◇ 《예원(藝原)》제16집(19×26. 94쪽. 복사본) 1995년 4월 7일 발행. 혁신호. 총 94쪽 분량. ‘제9회 고향의 봄 축제 <신춘 문학의 밤> 작품집’으로, 부록에 ‘출향시인작품 선집①’을 둠.
◇ 《예원(藝原)》제17집(19×26. 38쪽. 복사본)- 1995년 6월 14일 발행. 회원이 16명으로 늘어남. 회원 주소록에 황선하, 하연승, 이처기, 이향안, 이월수, 이상개, 이춘하, 신찬식, 민병기, 최명학, 박태남, 조용오, 김민수, 김명희, 김우태, 박미향. 회원작품과 처음으로 감상 작품을 수록. 하연승 회장의 머리말 <창원사랑시회 2주기를 맞이하여> 발표은
◇ 《예원(藝原)》제18집(19×26. 68쪽. 복사본)- 1995년 7월 11일 발행. <’95 시와 시민의 만남>을 위한 자료 차원의 회지.
◇ 《예원(藝原)》제19집(19×26. 40쪽. 복사본)- 발행일은 1995년 9월 14일. 광고 없음. 편집 체제 앞과 같음.
◇ 《예원(藝原)》제20집(19×26. 64쪽. 복사본)- 발행일은 1995년 11월 일(발간일을 밝히지 않음). 광고 없음.
♣ 1996년
◇ 《예원(藝原)》제21집(19×26. 46쪽. 복사본) 발행일은 1996년 2월 13일. 광고 없음. 이때의 회원은 황선하, 조영서, 하연승, 이처기, 이향안, 이월수, 이상개, 이춘하, 신찬식, 민병기, 최명학, 박태남, 이형우, 김민수, 김명희, 김우태(16명).
◇ 《예원(藝原)》 22집(15×22. 54쪽. 복사본)- 1996년 5월 3일 발행. 제10회 고향의 봄 축제 기념 <’96 새봄, 시와 시민의 만남>을 위한 별책 작품집.
◇ 창원사랑시회 사화집 2 《하늘 닿는 새벽 기침》(도서출판 경남. 15×22.2. 186쪽. 값 4,000원), 96년 12월 11일 발행.
♣ 1997년
◇ 《예원(藝原)》 23집(19×26. 48쪽. 인쇄본)- 1997년 4월 3일 발행. 제16회 창원시민의 날 야철 축제 기념 <’97 푸른 봄, 시와 시민과 함께> 별책 낭송작품집.
◇ 창원사랑시회 사화집 3《바닷물 모래톱 햇빛 바람》(도서출판 경남. 15.1×22.3. 162쪽. 값 4,000원) 1997년 12월 15일 발행. 참여 회원은 12명
♣ 1998년
◇ 《예원(藝原)》 24집(19×26. 40쪽. 인쇄본)- 1998년 4월 3일 발행. 제17회 창원시민의 날 야철 축제 기념 <’98 푸른 봄, 시와 시민과 함께> 별책 낭송작품집.
♣ 1999년
◇ 《예원(藝原)》 25집(19×26. 50쪽. 인쇄본)- 1999년 4월 26일 발행. 제38회 도민체전 기념하여 <’99 신춘, 시와 시민과 함께> 별책으로 낸 낭송작품집.
◇ 창원사랑시회 사화집 4《은박지에 나래치는 먼 바다》(도서출판 경남. 15.1×22.3. 136쪽 값 5,000원)- 1999년 12월 20일 발행.
♣ 2000년
◇ 《예원(藝原)》 26집(19×26. 46쪽. 인쇄본)- 2000년 5월 3일 발행. 문화의 전당 ‘성산 아트홀’ 개관 기념 <새 천년, 새 봄 시와 시민과 함께> 별책 낭송작품집.
공영해 : 이상에서 확인해 본 바와 같이 회지 《예원(藝原)》을 26집이나 발행하였는데 그 ‘藝原’(예원)이란 명칭은 무슨 뜻을…, ‘예술 마을’이라는 의미입니까?
이처기 : ‘예술’과 ‘창원’을 합친, 시(예술)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이란, ‘예술의 창원’이란 의미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藝原’이라는, 문집의 표제자, 그 당시 예서로 유명한 정지훈 서예가의 글씨입니다. 이 또한 예서체라 보탬이 되지요.
공영해 : 《예원(藝原)》 17집(1995년 6월 14일 발행)에서 선생님은 그 머리말에 “창원사랑시회 2주기를 맞이하여”를 발표하셨는데요, 이로 미루어 보면 창원사랑 시회의 공식적 출범은 1993년 6월경이 아닐까 싶습니만, 아까도 짚어 보다가 넘어왔습니다만 출범 한 달 후 《藝原》 창간호를 내었을 것 같은데요?
하연승 : 그게 그렇게 되는 것 같군요. 준비 기간을 거쳐 책을 내었다면 7월경이 되겠네요. 그 당시에는 창간이다 뭐다 하는 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친한 문인들 몇이 만나 작품 얘기를 하다가 그냥 헤어지는 게 아까웠으니까요.
공영해 : 그런데 아까 이처기 선생님께서 월 세 번 정도 모였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매회 작품 한 편씩 준비하여 참석한다는 것도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하였나 봅니다?
이처기 : 직장 생활로 한 달에 3편의 작품을 제출한다는 것은 부담이 컸었지만 회원들은 문학을 향한 열정이 남달라 매달 꼬박꼬박 참석하였는데, 나의 경우, 미술 교사시절 그래도 안 빠지고 제출 가능했던 것은 문학성과 작품성에 비중을 두기보다 참여한다는 데 의미를 더 두었다고나 할까요. 이 작품들을 일일이 모아 문집으로 담아내었는데, 이는 동인지라기보다 창작을 위한 자료집으로 발간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때의 참여 시인들은 시창작에 대한 열정이 유별났고 시사랑에 대한 열정 역시 존경할 만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유인물을 모아 인쇄하는 일을 하연승 원장님이 하셨다면 전 회원들 간의 식지 않은 친목 도모에는 최명학 시인의 마당발 인간관계가 큰 역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영해 : 하연승 선생님과 최명학 시인의 회를 위한 열정은 후인들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원(藝原)》4집부터 민병기 시인이 입회했군요. 그런데 민병기 시인은 회원들과 끝까지 호흡을 함께 하진 않았던가 봅니다. 네 권의 사화집에도 이름 한번 오른 일이 없는걸요? 그리고 10월 12일 처음으로 죽림다원(창원시의회 건너편)에서 시낭송회를 열고 있습니다. ‘가을저녁 시와 함께’라는 주제로 프로그램 내용이 풍성하군요. 보람을 느끼셨겠습니다. 낭송회의 풍경을 이처기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처기 : 민 교수님은 워낙 바쁘신 분이라 마음은 우리 회원들과 늘 함께하였었답니다. 죽림다원이 공식 행사로는 처음인가 봅니다만, 사실 회원들은 롯데상가 1층 전통찻집 '만날고개'이거나 도미술관 앞 ‘예다원(藝茶苑)'에서 늘 모임을 가져 왔어요. 그러다가 시내로 진출하였는데, 일반 시민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시를 낭송한다는 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참 많이 준비한 행사였습니다.
공영해 : 그렇게 매달 상반기에 내던 《예원(藝原)》이 12집까지 발간되고 6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13집(94년 12월 12일)이 발간됩니다. 그런데 그 사이 회는 그냥 쉰 것이 아니더군요. 열망하던 11인 사화집 《어디서 찌르레기 울고》 발간에 이어 10월 20일에는 출판기념회를 겸한 시낭송회가 열리네요.
이처기 : 네. 10월 27일 반림동 경남운수연수원 2층 강당에서 출판기념회 겸 시낭송회를 개최했습니다. 자축연의 성격이 짙지요. 내빈 몇 분과 연수원 직원들이 전부였답니다. 그래도 참 잊을 수 없는 출판기념 낭송회였습니다. 이때 예원 특집호가 발간된답니다.
공영해 : 《예원(藝原)》13집 발간 2개월 후 14, 15, 16집이 다달이 발간되고 있네요. 16집은 특히 94쪽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혁신호군요. 아, 그러고 보니 낭송집을 겸한 발간이네요.
이처기 : 제9회 고향의 봄 축제 ‘신춘문학의 밤 작품집이랍니다. 출향 시인 작품 선집을 처음 내고 있습니다. 행사일은 4월 12일. 경남교원단체 총연합회 강당에서 열었어요.
공영해 :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초기엔 월 3, 4회 모여 작품 발표를 하고 월 1회 《예원(藝原)》을 발간하고, 사화집까지 발간하고 하였는데, 경비가 만만찮았을 것 같은데요?
이처기 : 그야 뭐 각자 조금 부담하였지요. 《예원(藝原)》은 하연승 원장님이 맡으셨고, 사화집과 낭송회만은 창원시에서 지원을 받아 해결하였답니다. 지금의 문예지원기금 형식이지요. 하 원장님과 선후배 관계인 공민배 시장의 관심도 컸고요. 어느 문인단체마다 다 경비가 문제긴 하지만 ‘창원사랑시회’만은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어요.
공영해 : ‘창원사랑시회’는 《예원(藝原)》 17집부터 회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2년만이지요? 이제 회가 자리를 잡았나 봅니다. 이월수, 이상개, 이춘하 시인이 보입니다. 이분들은 출향시인들이 아닌지요? 여기서 선생님은 2주기를 맞이한 머리말을 쓰십니다. 감회가 남다르셨겠습니다.
하연승 : 회원들과 큰 행사도 치러보고 사화집도 내고 하여 회원들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원사랑시회의 활동을 유심히 보아오던 출향시인들이 함께 활동하겠다고 하여 영입을 하였습니다. 타 동인 회원이 아닌 시인으로 본회의 취지에 동의를 하는 분이면 입회시키기로 했던 것이지요. 회로서는 큰 경사였어요.
공영해 : 예원 18집부터 21집까지는 격월간으로 발행하는데 21집부터 조영서 시인과 이형우, 김민수 시인이 함께 하네요. 그런데 이들 중 이형우, 김민수는 사화집에서 함께하지 않았군요.
이처기 : 아마 수록할 작품을 제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영해 : 《예원(藝原)》 21집(96. 5. 3.) 이후 《예원(藝原)》은 해마다 1회씩 시낭송회 별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시민과의 소통을 시로 하신 그 저력이 대단하십니다. 《예원(藝原)》 22집은 제10회 고향의 봄 축제 기념으로, 사이 두 번째 사화집 《하늘 닿는 새벽 기침》이 발간되고 , <96 새봄, 시와 시민의 만남>으로, 《예원(藝原)》 23집은 제16회 창원시민의 날 야철 축제 기념으로 <97 푸른봄, 시와 시민과 함께>를 상남동 토월 대동 A단지 분수광장에서 개최하였네요. 세 번째 사화집 《은박지에 나래치는 먼 바다》 발간이 됩니다. 예원 24집은 제17회 창원시민의 날 기념으로 개최하였는데 제 생각엔 아마 이때(1998년 4월 3일)가 창원사랑시회의 최절정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연승 : 돌아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보니 그날은 김춘수 시인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있어 시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문학 강연을 하셨습니다. 출향하신 이춘하 시인도 오셔서 자작시 낭송을 하셨군요. 강현덕, 원은희 시인도 참가하여 자리를 환하게 빛내 주었습니다. 이때는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 지역 많은 문인들이 참석하여 문학의 열기를 함께 피웠습니다. 모두 참 고마우신 분들이었지요.
공영해 : 예원 25집(99년 4월 26일) 38회 도민체전 기념으로 <99 신춘, 시와 시민과 함께>가 낭송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 12월 20일 사화집으로는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사화집 《은박지에 나래치는 먼 바다》가 나옵니다. 《예원(藝原)》 26집 별책을 마지막으로 창원사랑시회는 긴 휴면기에 듭니다. 이 행사에도 참가하신 분들이 굉장히 많더군요. 크게 기대하며 ‘창원사랑시회’에 최명학 시인의 안내로 가입하였습니다만 26집을 끝으로 시회가 끝나고 말 줄은 몰랐습니다. 막차를 탔어요, 제가. 무슨 말 못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이처기 :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 후에 회가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이직으로 출향한 시인들이 많아지고 회원인 모 시인이 최명학 시인에게 폭행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지켜보던 회원들의 실망감으로 회에 대한 관심도가 약화되고, 그러다보니 회를 더 이상 끌어갈 동력 또한 쇄진이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공식적 해체 없이 말 그대로 휴면기에 접어들고 말았답니다.
공영해 : 그 후를 좀 ?
하연승 : 4년의 긴 휴면기를 끝내고, 창원사랑시회의 활동을 지켜보던 공영해, 이부용 두 시인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회원을 결성하여 ‘창원사랑시회’의 정신은 계승하되 회의 명칭은 바꾸어 ‘포에지 ․ 昌原’을 탄생시켰지요. 더 단단하고 의지적인 모임을 후배 시인들이 부활시킨 셈이 됩니다.
공영해 : 네. 그렇군요. 이에 대해서는 《詩嚮》 10집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0년 동안 ‘포에지 ․ 昌原’과 함께 해 오시면서 동인지 《詩嚮》발전을 위해 정말 어떤 회원보다 열정을 쏟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하실 말씀을 좀?
하연승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창원에서 젊은 문인들이 한마음으로 문학적 기반을 다져나간다는 데 큰 보람을 느끼며 회원들에게 믿음이 갑니다. 초심을 잃지 말고 회를 더욱 젊고 내실도 단단한 동인으로 길러나가기 바랍니다. 항상 자기 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문학 외적인 면에서도 회원들 상호간 친목을 두텁게 쌓아갔으면 합니다.
공영해 : 지금까지 창원사랑시회와 선생님의 역할을 창립 멤버이신 이처기 직전 회장님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8년 동안의 활동이었으나 지역 문단에서 여느 문학 단체 못지않게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창원사랑시회의 활동에 대한 후인들의 연구 또한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긴 휴면기를 거친 끝에 신생 <포에지 ․ 昌原>이 힘차게 바턴을 이어 나가고 있음은 다행스럽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동 : 감사합니다.
(일동 차를 마시며 여담을 나누다.)
제2부 문학과 삶
황시은 : 이제 2부로 들어가 하연승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집을 두 권 내셨더군요. 김춘수 시인의 서문을 받은 시집 《이슬의 탄생》(예문관. 13×19. 128쪽. 1997년 9월 5일)과 허만하 시인께서 발문을 쓴 《나비의 생태학》(동학사. 13×22. 130쪽. 2007년 6월 29일)을 내셨습니다. 일반 시인들 같으면 그동안 다섯 권은 내고도 남을 세월이었습니다. 그만큼 선생님은 과작이시며 시작에 아주 엄격하십니다. 첫 시집에 김춘수 시인의 발문을 받으셨는데 김춘수 시인과 선생님 간의 인연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하연승 : 그 뭐 내세울 일이라구. 대학 시절 동인지 <시연구>에서 활동하던 시절 몇 년 간 선생님께서 부산대학에 출강하셨는데, 그때 맺은 인연입니다. 그 사연은 본인의 첫시집 《이슬의 탄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황시은 : 허만하 시인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하연승 : 부산에서 맺은 인연입니다. 경남도청이 부산에 있을 때 부산에서 70년대에 문학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지금도 서로 안부를 물으며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황시은 : 선생님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이순이 넘어서야 불태우셨습니다. 제2시집에서는 창원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 <탑골농장 '안나푸르나'에서>, <어느 백화점 앞의 대낮>, <옛 사공의 집 그 '알 수 없는 세상'>, <강가의 집>, <비음산 진달래>, <비음산 딱따구리>, <1997년 겨울>, <한 그루 왕버들나무의 기호>, <주남에 가서>, <주남의 3월>, <조심정釣心亭에 높이 앉아>, <성주사 연못을 내려다보며> 등 1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역적 특성을 소재한 작품들을 쓰시게 된 배경을 좀?
하연승 : 창원에서 살게 되니 자연히 시적 소재도 창원이 많지요. 이는 나뿐만 아니라, 어느 시인이든 그럴 겁니다.
(이처기 선생님 이야기를 삽입한다.) 하 고문님 시 중에 <탑골농장 '안나푸르나'에서>가 있습니다. 그 시를 카페 안나푸르나에서 인쇄하여 찻잔 바닥에 깔고 있어요. 이를 보신 선생님이 이름자를 빼고 이름 대신 호 ‘운주’라 대신 하라, 그러면 시를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답니다. 지금 그 카페에 가면 그 시가 역시 찻잔 바닥으로 나오는데 시인이 ‘운주’랍니다. 운주의 의미는 ‘芸州’, ‘향기로운 풀이 가득한 고을’인 셈이지요.
황시은 : 네, 정말 멋진 호입니다. 선생님 시에는 도시적, 서구적, 회화적, 음악적 이미지가 시 전편에 흐르고 있다. 특히 장미 공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창원 시민들이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허만하 시인은 ‘일상을 읽는 복안적(複眼的) 시선’으로 ‘초록색 안개’를 걷고 ‘언어의 경계’를 읽는 시를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시를 쓰신다면 어떤 시를 쓰시고 싶으신지요?
하연승 : 어떤 시를 쓴다기보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생각입니다. 억지로 시를 다스리진 않을 것입니다.
황시은 : 60년 문학 인생을 사시면서 선생님은 직장에 계시면서는 거의 시작 활동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70년대에 잠시 시세계로 외출 나오셨다가 이따금 작품을 발표하십니다. 문인으로서 겪으신 어려움과 우리 문단이 해나가야 할 앞으로의 과제랄까, 그런 것을 좀 말씀해 주시지요.
하연승 : 어디에서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생에서 시를 잊은 적은 없습니다. 업무에 시달리며 살아도 시를 외면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시작에 몰입할 수 없어 ‘시 비슷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런 시를 나는 ‘시’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주가 있어 두 가지 일을 용케도 잘 해 내지만 나는 그러질 않았어요. 그리고 뭐 내가 우리 문단 어쩌고 할 그런 처지도 아니고…….
황시은 : 선생님을 모시고 몇 가지 얘기를 나눌 시간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언젠가 가음정 장미공원에서 장미축제가 열렸는데, 선생님의 시 <나는 오늘도 장미공원으로 간다> 를 문희숙 시인이 낭송하더군요. 멋진 5월의 밤이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장미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장미 공원에서 우리는 오늘도 장미 향기에 취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포에지 ․ 昌原’에 관심 가져 주시고 후배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연승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