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 2.10. 제주시 삼도리 출생(부 최원순, 모 박효원) 2남 4녀중 맏딸
1910.4.1.~ 1914.3.25. 제주사립신성여학교 (제1회졸업)
~ 1915.10
1913. 천주교 세례를 받음( 세례명 베아트릭스)
1915.10.~1918.3.22. 경성사립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편입,졸업
1918.4.6.~1919.3.25.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1918. 소녀결사대 조직(박희도)
1919.3.1. 독립 만세운동 참여 후 투옥. 3월3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20일 후 석방.
4월15일 재수감 10월 보석석방 (진명여고 보석금 100만원 마련)
1919.11.6. 선고 공판 (징역 6개월, 집행유예3년)
1920. 3~1922. 여수원운영, 명신학교로 통합
1920.4.20 ~1925.4.5. 제주명신학교 교사
1925.4.15. ~ 1938.4.15. 목포 소화학원 교사
전주 해성학원 교사 (현 전주 성심여자중고등학교)
(1926년 라크루의 초빙으로 전주해성학원에서 교사로 부임: 천주교 전주교구사)
1932년 "따뜻한 봄바람"등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세번째 검속
1939.5.1~1943.4.30.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1942. 10.29. ~ 1943.3.18. 이화고등여학교 편입. 졸업(학제개편으로 중등과정 1년 보충)
1942.11.1. ~ 1944.8.31. 경성성모병원 근무
1944.10.5. ~ 1946.10.17. 제주귀향 정화의원 개원
군의관으로 육군병원 강제 징용
1946.10.18.~ 1949.8.31. 신성여자중학원 재개교, 교사 역임
1949.9.1. ~1953.11.24. 신성여자중학교 개교 , 초대 교장
1953.11. ~1962. 3. 31. 신성여자고등학교 발족, 신성여자중고등학교 무보수교장 (정년퇴임)
1955.4.10. 로마교황훈장 수훈( 교육, 사회, 의료 사업3개부문)
1956.9. UN가입 제주도 추진위원회 부위원장
1958.10.25. 대한적십자사 제주도 지사 부지사장
1960. 교육회 이사 참여, 중등교육회장
1962. 대통령 포상
1963.5.1. 대한 결핵 협회 제주도 지부장
적십자부녀봉사대 자문위원장
1964.1.~1968.2. 제주도 초대 교육감
1967.5.16. 제2회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수상
1967. 정화장학회설립(5·16민족상 부상상금 활용)
1977.2.22. 선종
1993. 독립운동가 대통령표창(3·1운동부문)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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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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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崔貞淑)-3.1운동-대통령표창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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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 100년사(p375~376) 발췌
천주교 호남발전사(p589)발췌
우리말 사랑운동
이나라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한국어를 매체로 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외쳤다.
이러한 메아리는 전주본당에서도 울렸다. 한글 보급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애국심을 높이는 방법은 과거처럼 이론적인 활동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이 효과적이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방법의 일환으로 (연) 극운동을 일으켰다.
전주본당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제주도에서 전주본당으로 초대되어 온 최정숙(베아트릭스)선생은 소년 소녀교리반을 지도하였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13도 를 무궁화로 표현하며 성극을 가르쳐 공연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최정숙은 경찰에 연행되어 문초를 받는가 하면 연극에 출연한 어린이들도 경찰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 일이 있었다. 최정숙은 3.1운동 당시 굽높은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며 활동을 하였는데 발뒤굽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맹렬하게 활동하였으며 경찰의 고문으로 귀의 고막이 터질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한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는 36세의 나이에 서울 여의전에 입학할 만큼 맹렬 여성이었다.
*데레사 여학교 무보수 근무
1925년 목포천주교회의 뜻에 따라 6년간 데레사 여학교 교단에서 가르쳐오던 중 신병재발로 교육사업에서 의료사업으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해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소녀회를 맡아 여성계몽에 열성을 보이다 18년의 교육사업을 접고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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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12. 근우회 김해지회는 집행위원장에 최정숙을 선임하고 집행부를 개선하다.
1945.8.15. 해방. 부녀회조직(북초등학교에서 야학)
부녀회원 30여명 →여성계몽, 시국강연, 의식주강습
일본에 몰수당한 학교를 미군정에 탄원서를 내어 학교를 되찾음
1947.3.1.→4,3사건
1947.9. 농업학교 천막안에서 취조받음. 최정숙은 천주교 신자이므로 공산당이 될 수 없다고 풀려남.
독짓골(박영효집)에 약품보관 했는데 불에 타버림.
* 독짓골: 도남오거리, 보덕사(독짓골8길 26)
*김희열(17기): "최정숙선생이 헌신한 삶은 하늘을 숭배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카톨릭정신 경천애인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17세 젊은 나이에 3.1운동을 하고 많은 학생들은 가르치고 중년의 나이에 의학을 배운 것은 모두 일관 된 행동이다. 이는 카톨릭 신앙에 기반 한나보다 타인을 위한 사랑하는 강한 신념에서 비롯하고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한때 수녀까지 되고 싶어했던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상과 이념을 떠나 인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 한림화"작은 불꽃 하나로 온누리를 밝힌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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