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의 한 국도를 따라 들어간 시골길. 우사를 개조해 만든 작업실에서 한 남자가 뭔가를 열심히 뚝닥거리고 있다. 꽁지머리를 한 작가의 이마에 땅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작업실 주변에는 철제 폐기물로 만든 사람상, 군대에서 나온 발칸포 클립으로 만든 독수리상, 너트와 스프링 고리 등을 용접해 만든 닭 조형물 등이 있다. 이곳은 작가 정경수(52) 씨가 이른바 정크 아트(Junk Art) 작업을 하는 곳이다.
회화 전공자인 정씨는 지난 2001년부터 정크 아트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능동에서 차량 개조 일을 하던 정씨는 바로 옆 가게의 카센터에서 나오는 철제 폐기물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재료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자비까지 들여 고물상을 뒤지게 됐다. 2004년부터는 비싼 임대료를 피해 양평의 시골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작업도 수십여 점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 청계 창작 스튜디오 개관 기념전, 지난 4월 신세계 백화점 정경수 정크 아트 초대전, 5월에는 어우재 미술관에서 있었던 2009 Museum Festival에 초대되기도 했다.
22일 경기 양평의 작업실에서 본지와 만난 정경수 작가는 "평면인 그림에 비해 입체이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게 정크 아트의 매력"이라며 "버려지는 것도 이렇게 예술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이어 "정크 아트는 결국 자원의 소중함 같은 것들을 깨우쳐줄 수 있는 환경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모든 재료들이 갖고 있는 물성의 특질을 잘 살려주는 게 정크 아트를 잘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산업폐기물 등 쓰고 버린 물건을 재료로 사용하는 정크 아트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정크 아트는 대중적인 제작과 수용의 방식을 거쳐 예술의 대중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산업화의 부작용,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표현한다.
늘어나는 정크 아트 전시
정크 아트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정경수 작가의 정크 아트 작품은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 검정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소개된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지난 7월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어린이 갤러리에서 정크 아트 특별전을 연다.
대구광역시 대백 프라임홀에서 20일까지 열린 'Watchk Museum'에는 시계수집가 박문욱 씨가 자신이 엔틱시계 부품으로 만든 정크 아트 작품 8개를 출품해 관심을 끌었다.
오대호 씨는 지난 7월 서울 신도림 테크노마트에서 정크 아트 특별체험전을 열었다. 오 씨는 청남대에 정크 아트 예술체험학교를 만들고, ㈜정크아트를 만들어 정크 아트를 상업화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한국환경자원공사는 지난 2005년부터 '대한민국 자원순환 링크아트 공모전'을 열어 정크 아트 작품을 공모하고 시상, 전시하고 있다.
친숙함으로 예술 제작과 수용태도 바꿔
정크 아트는 소재의 친숙함으로 예술과 수용자의 거리를 좁힌다. 생활 가운데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정크 아트 작품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호소력이 높은 편이다. 정트아트는 대개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재료들이어서 거리감이 없다. 대구 Watch Museum 전시회에 나온 8점의 정크 아트 작품은 대부분 태엽로봇 등의 사람 형식으로 전시장을 방문한 어린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전시 역시 어린이들이 주 관람객이다. 미술관은 재활용 박스 등을 활용해 어린이들이 직접 정크 아트 작품을 만들어 볼수 있도록 유도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정크 아트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게 한다. 광주시립미술관 어린이관 '정크 아트'전에 출품한 주복동 작가는 전남 강진의 농기계 수리공이었다. 그는 폐고철을 용접해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정크 아트에 심취했고, 기성작가들과 정크 아트전에 출품할 만큼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정경수 작가는 "룰이나 규칙이 없다는 게 예술의 본질"이라며 "정크 아트는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거나 즐긴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이어 "산업사회에서 물자가 너무 흔해지며 버려지는 물건이 많을수록 정크 아트도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크 아트의 완성도 등 예술적 가치를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구에서는 이미 미술사조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으며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의 활동을 알리는 작가들도 많다"고 말했다.
환경오염에 경고 메시지
정크 아트는 환경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도 과감히 내보인다. 산업폐기물을 소재로 하는 정크 아트는 산업화 사회의 대량생산·소비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자 경고로서 기능해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미국 중심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저항하는 신사실, 현실주의라는 사조 속에서 탄생했다.
프랑스 작가인 세자르는 폐자동차를 모아 정크 아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른바 포드 시스템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표현한 것이다.
정크 아트는 물건이 놓여진 장소를 이동시켜 레디 메이드에 있는 장소성의 맥락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시도됐다. 장소에 따라 동일한 레디 메이드(기성품)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마르셸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옮겨놓고 자신의 사인을 넣은 '샘'이 이에 해당한다. 피카소가 '황소의 머리'란 작품에서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이용해 소의 뿔과 머리를 표현한 것 역시 주류 예술에서 정크 아트의 기원 격이다.
최근의 정크 아트는 '에코' 의제의 전파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들에 새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환경적인 저항의 메시지를 담는 '에코'예술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폐텔레비전을 활용한 미디어아트로 환경적인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 한국화가 임옥상이 미군이 버린 포탄을 소재로 작업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이태호 역시 80년대 초 버려진 빵 굽는 기계에 조그만 사람을 집어넣고 '사우나'란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정크 아트에 대해 "사물의 위치를 바꿨을 때 맥락의 변화가 작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파운드 오브젝트(fond object)의 의미가 강했다가 90년대 이후에는 '에코'의 의미를 강화하는 추세"라며 "산업사회가 발달할수록 이의 부산물을 활용한 정크 아트와 이를 통한 경고의 메시지 역시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