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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유적 탐방 ⑤>
단양(丹陽)의 문인 유적 ---- 申 吉 雨
단양군(丹陽郡)은 충청북도의 동북쪽에 있다. 동남쪽으로 소백산맥이 감싸고 영월을 거쳐 온 남한강이 한가운데로 흘러 명승지가 많다. 풍광이 좋은데다, 충주댐으로 육지 속의 바다가 생기고, 석회암 동굴도 많아서 단양은 매년 45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단양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나왔는데, 鍊丹은 신선이 먹는 환약(丸藥)이고 調陽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정감록(鄭鑑錄)에 단양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니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에 한강이 감돌았다”라 하였다.
단양에는 신구 석기시대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赤城縣)이었다가 757년에 내제군(奈堤郡, 현재 제천시)에 소속되었다. 진흥왕 12년(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고, 940년에 단산현(丹山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원주에 속했다가 뒤에 충주로 이속되었고, 충숙왕 5년(1318)에 단양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단양군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는 충주부(忠州府)가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1979년에 단양면, 1980년에 매포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2년 1월 옛 단양출장소가 단성면으로 승격하였다.
현재 단양군은 단양읍·매포읍과 단성면·대강면·가곡면·영춘면·어상천면·적성면 등 2읍 6면으로 되어 있다. 동쪽은 경북 영주시, 북쪽은 영월군, 서쪽은 제천시, 남쪽은 경북 문경시와 각각 연접되어 있다.
단양은 산천이 아름다운 데에 비해 출신 문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시대의 문인으로는 경상도 안찰사, 추밀원 우부승선, 국자대사성 등을 지내고 병려문(騈驪文)에 능한 이공로(李公老)와 주역(周易)의 대가 우탁(禹倬)이 있다. 조선조에는 건국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鄭道傳)과 숙종 영조 때의 문인 권섭(權燮)이 있다. 조선 말엽에 방랑과 풍자의 시인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의 생가가 있으나, 개울 건너 영월 땅에 묘가 있어 김삿갓축제로 부각되어 영월의 시인으로 더 알려졌다.
현대문학기 문인으로는 시인 신동문(辛東門同이 적성면 애곡리에서 살았고,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남두(趙南斗) 시인은 단양읍 북하리 출신이다. 현재 단양에서 살며 활동하고 있는 시인으로는 신기선(申基宣, 1932년 청진 출생, 1956년 문학예술 등단, 대강면 당동리 거주)과 화가 도예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준환(金準煥, 1959년 자유문학 등단, 단성면 외중방리 거주) 시인이 있다.
1.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
단양군에는 국보 3점을 비롯하여 국가지정문화재 11점, 도지정문화재 10점이 있다. 국보는 적성면의 단양신라적성비와 영춘면 구인사의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29(국보 257호), 권74(국보 279호)이다.
국보 제198호인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는 적성면 하방리 국가사적 제265호인 단양적성(丹陽赤城)에 있다. 신라 진흥왕 6년∼11년(545∼550) 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4개의 순수비 중 가장 빠른 창녕순수비(561년)보다 10여년 앞선 것으로, 규모는 작아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적성비는 중앙고속도로 단양인터체인지에서 나와서 우회전하여 대강면을 지나 신단양쪽으로 조금 가다가 단성면 북하리에서 단양1교를 건너 고개를 넘는다. 영동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서 우측길로 들어가서 단성면 사무소를 지나 우측 길로 올라간다. 작은 길로 오르며 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여 올라가면 왼쪽으로 고속도로 단양휴게소가 보인다. 길은 그 우측 울타리를 따라 나 있고 앞쪽으로 적성산성이 바라보인다. 산성 밑에서부터 걸어서 거의 다 오르면 우측으로 비각이 나온다.
이 비는 1978년 1월 6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높이 93㎝, 상폭 107㎝, 하폭 53㎝, 두께 25㎝로 위가 조금 더 넓은 화강암 비석이다. 세로로 큰 금이 났는데 돌 대석에 홈을 파서 세워 놓았다. 발견 당시에는 받침돌 없이 묻혀 비석 일부만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비석의 윗부분은 크게 깨져 나갔는데, 비문의 남은 글자들은 자획(字劃)이 또렷한 편이다.
비문의 글자들은 사방으로 줄을 맞추어 음각되어 있는데, 남은 것은 288자이며, 전체는 440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진흥왕이 야이차의 공적을 표창하며, 앞으로 야이차와 같이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하겠다는 시책과 주민 격려의 내용이다. 야이차는 적성 사람으로 신라의 국경 확장 사업을 도와 목숨을 바친 사람이다.
적성산성은 성재산 정상 부근에 만든 석성이다. 둘레는 923m인데 대부분 붕괴된 것을 많이 보수해 놓았다. 남쪽 부분은 가파르게 축성을 하고 위쪽은 평평한데, 동북쪽 끝자락 부분은 안팎으로 높고 두툼하게 쌓아올렸다. 신라의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 중요 자료가 되고 있다. 북쪽은 가파른 절벽 밑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동쪽은 단양천, 서쪽은 죽령천이 감싸며 남한강과 합류된다.
2. 사인암(舍人巖)과 우탁(禹倬) 선생
사인암은 단양팔경 중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경승이다. 단양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5번 국도에서 우회전하여 대강면사무소 쪽으로 가다가 대강우체국 사거리에서 좌측 927번 지방도로 들어간다. 우측의 하천을 따라가면 사인암리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절벽인 사인암이 바라보인다.
사인암은 수직 70m 정도의 커다란 암벽으로 병풍처럼 우뚝 서 있다. 바로 아래로 운계천 맑은 물이 흐른다. 여름철이면 사인암 앞이 물놀이하는 어린이들과 관광객들로 유원지가 된다.
사인암 바위벽은 가로세로로 금이 가서 마치 크고 작은 벽돌들을 교묘하게 맞춰 수직으로 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검은색 암벽인데 붉고 노란 색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바위 틈새에 띄엄띄엄 자란 나무와 풀, 꽃들이 일부러 수놓은 듯하다.
사인암 앞 상류 쪽에 구름다리가 놓여 있어 건너서 사인암 밑으로 바짝 다가가 볼 수 있다. 다리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는 모습이 더욱 일품이다.
사인암은 고려 때 우탁 선생이 사인(舍人, 정4품) 벼슬을 지낼 때 즐겨 찾아와 노닐었는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재광이 그것을 기려 사인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은 자가 천장(天章), 탁보(卓甫)이고, 호는 역동(易東)이다. 충렬왕 16년(1290)에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좨주, 진주목사, 사인, 감찰규정, 진현관 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주역』을 최초로 해득하였으며, 경사역학(經史易學)의 대가로 알려졌다. 묘는 안동 정정리에 있고 사당은 적성면 애곡리에 있다. 시조로 백발가(白髮歌)와 탄로가(嘆老歌) 2수가 전한다.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또 한 손에 매를 들고
늙는 길은 가시로 막고, 노는 白髮은 매로 치렸더니
백발이 눈치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탄로가>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자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백발가>
사인암 암벽의 아래와 옆에는 이황, 이인상, 이윤영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사인암을 읊은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도 새겨져 있다.
卓爾弗群 確乎不拔 獨立不懼 遯世無憫
뛰어나게 높아서 견줄 데 없고
단단하고 굳세어 흔들리지 않는다.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해 살아도 근심걱정이 없도다. <신길우 역>
구름다리 위쪽 개울 중간 둔덕에 200여년 된 금송 4그루가 비석 2개와 함께 서 있다. 역동우선생기적비(易東禹先生紀蹟碑)가 두 개 있는데, 북쪽의 작은 것은 네모진 화강암 대석 위에 지붕형 비갓을 하고 있는데, 1974년 10월 3일에 세운 것이다.
남쪽의 튼 비석은 네모진 기단 위에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췄는데, 뒤와 측면에 비문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1977년 6월에 지방의 유림에서 세운 것이다.
3. 도담삼봉과 정도전(鄭道傳) 선생
도담삼봉(嶋潭三峰)은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 195번지 남한강 가운데에 있다. 단양읍에서 북쪽으로 3㎞쯤의 곳이다. 바위 봉우리가 세 개여서 삼봉이라 부른다. 중간에 있는 장군봉의 남쪽 얕은 자락에 6각의 삼도정(三島亭)이 서 있다.
가운데에 있는 장군봉이 가장 큰데, 남자어른이 등을 약간 굽히고 다리를 개고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남쪽의 바위는 장군봉을 향해 만삭의 배를 내밀고 앉아 있는 형상이고, 북쪽의 바위는 토라진 듯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 쭈그리고 돌아앉아 있는 자세이다.
가운데 바위가 남편이고, 북쪽 것이 아내, 남쪽 것이 첩이다. 남편과 아내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이가 없어 첩을 얻었는데, 아기를 밴 첩이 남편을 향해 자랑스레 배를 내밀며 웃고 있고, 이를 본 아내는 눈꼴이 시어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이라는 전설이다.
세 봉우리의 놓여 있는 모습과 자세에 어울린 이야기다. 이를 안도섭 시인이 「도담삼봉」이란 시를 썼는데, 이 작품비는 단양읍 소금정공원에 서 있다.
도담삼봉에는 또 이런 전설도 있다. 본래 강원도 정선에 있었는데 어느 해 심한 장마로 이곳까지 떠내려 왔다. 삼봉을 찾아 이곳까지 온 정선의 관리들이 원래 자기들 것이라며 세금을 내라 고집하여 해마다 걷어갔다. 어느 해에 한 아이(정도전)가 나서서, “저 삼봉은 우리가 부른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온 것이오. 우리는 쓸데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하고 대들었다. 그 뒤부터 도담 사람들은 삼봉에 대한 세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도전 선생은 도전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을 자주 찾았다. 삼봉을 자신의 호로 삼고, 군청 앞산인 종지봉의 이름을 따서 자를 종지(宗之)라 붙였다고 한다. 도담삼봉 서쪽 강변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정도전 선생의 동상과 숭덕비가 있다.
삼봉 정도전선생 숭덕비(崇德碑)는 화강암 이수와 귀부에 오석의 비신석으로 서 있다. 뒷면에는 국한문으로 된 비문이 세로로 가득한데, “三峰 鄭道傳은 고려말 조선 초기에 民本政治의 길을 열어놓은 위대한 學者 官僚이자 革命家이다… ”로 시작되고 있다. 비문은 한영우 선생이 짓고 이두식 선생이 썼고, 신단양지역개발이 세웠다고 되어 있다.
정도전(1342~1398) 선생은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부사(三司副使)와 우군도총제 등을 지냈다. 유학(儒學)의 대가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여러 방면으로 건국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후에 태종)에게 참수되었다. <고려사>와 <경국대전>, <삼봉집> 등과, <신도가> <납씨가> <정동방곡> <문덕곡>, 다음의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흐르르니
반 천년(半千年) 왕업(王業)이 물소리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古國興亡)을 물어 무엇하리요.
4. 단양수몰이주기념관의 문인유적과 퇴계 선생
옛 단양읍은 충주호 건설로 수몰되었다. 지금의 단양은 새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수몰 지역은 옛 단양읍을 비롯하여 3개면 26개리에 2684세대였는데, 1984년부터 다음해까지 모두 이주를 했다.
이에, “고향을 잃은 이주민들의 애향심(愛鄕心)과 망향심(望鄕心)을 고취하고 후세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90년에 <단양 수몰이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 안에는 옛 단양의 여러 모습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동쪽 정원에는 옮겨온 탁오대, 복도별업 암각자, 우화교 신사비, 석물 등 유적들이 놓여 있다.
기념관은 적성면 면사무소 뒤 얕은 언덕에 있는데, 그 바로 뒤쪽으로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탁오대(濯吾臺)는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행적과 관련되며, ‘탁오대’ 세 글씨도 퇴계 선생의 것이라 한다. 실제로는 옛 단양 고을의 단양천에 놓였던 우화교에서 상류로 약 200m 올라간 냇가에 있었는데, 수몰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를 지낼 때 공무를 마친 뒤 단양천을 거슬러 오르며 산책을 하다가 이 탁오대 바위 아래의 맑은 물에 손발을 씻고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자신의 심신을 씻는 곳이라 하여 ‘탁오대(濯吾臺)’라 하였다고 한다.
복도별업(復道別業)은 본래 옛 탁오대에서 다시 상류로 500m쯤 올라간 곳에 있던 복도소(復道沼) 옆 길가에 있었다. 글씨는 퇴계 선생의 것이라 한다.
복도소(復道沼)는 단양 군수 퇴계 선생이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도록 단양천에 둑을 쌓아 만든 보(洑)이다. ‘복도’란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도를 회복한다는 뜻이고, ‘별업’은 자연속의 별장이란 의미이다. 퇴계 선생은 이곳에서 자주 목욕을 했는데, 목욕을 하면 심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복도소는 수몰되기 전까지는 수영장이 되곤 하였다.
대학자인 퇴계 선생은 선정(善政)을 베풀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 단양 주민들에게 혜택과 교화를 함께 한 것인데, 시조 <도산십이곡> 12수를 남겼다.
5. 옥소 권섭 동상 (玉所權燮銅像)
단양읍에는 소금정공원(소금정공원)이 있다. 남쪽의 큰길 건너 남한강 강가 둔덕에 마련했다. 공원 표지석에 설립 취지가 적여 있다.
"이 곳은 나그네가 쉬었다 가던 옛 상진고개로 임금이 신에게 제물을 올리기 앞서 손을 깨끗이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단 앞에 선 형상을 하고 있다. 이렇듯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임한다면 하늘도 스스로 도울 것이며 모든 일이 엄숙하고 정연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뜻을 기려 이곳을 "소금정" 이라 이름하고 군민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는 바이다."
소금정공원에는 상징탑과 정자, 여러 휴게 시설들이 있는데, 단양 출신의 대표적 인물들에 대한 동상과 기념비, 시비 등도 서 있다. 공원이 읍내 바로 앞이고 큰 길가 남한강변에 있어서, 군민들의 휴식과 문화 공원으로 애용되며, 철마다 여러 가지 행사도 치러지고 있다.
소금정공원에는 숙종 영조 때의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선생의 자는 조원(調元), 호는 옥소(玉所)ㆍ백취옹(百趣翁)이다.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성리학자인 백부 권상하(權相夏)가 제천 청풍 황강으로 내려오면서 그에게 배웠다. 묘는 단양 장회리 옥소산에 있다.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여행을 즐기며 시문으로 보냈는데, 89세로 장수한 선생은 한시·가사·시조에 능했다. 친필문집 50여권에 시 2천여 수, 국문시조 75수, 국문가사 2편, 그림 72점을 남겼다. 유고 13권이 1938년에 간행되었다.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과 도통가(道通歌)가 있고, 시조로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가 있다. 선생을 기리는 <옥소예술제>가 단양군 일원에서 해마다 열리는데, 금년에 4번째로 거행되었다.
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그 뉘러니
조대(釣臺) 단필(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져기 져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ㄴ가 하노라.
<황강구곡가의 구곡>
6. 신동문 시비 (辛東門詩碑)
신동문 시비도 소금정공원에 있다. 커다란 화강암 자연석을 옆으로 뉘인 채 그 앞쪽에다 가로로 시구를 새겼다. 시비는 1995년에 제작되었는데, 비제(碑題)는 <辛同門詩碑>이고, 시는 <내 勞動으로>의 후반부가 새겨져 있다.
辛 東 門 詩 碑
친구여. / 모두가 모두 / 蒼白한 얼굴로 明洞에 /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 쓸쓸한 이 습성은 /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 절반을 다 못 깨친 / 이 답답한 목숨의 未練 /
未練을 되씹는 / 이 어리석음은 / 다 무엇인가.
내 勞動으로 / 오늘을 살자.
내 勞動으로 / 오늘을 살자고 / 決心했던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1927~1993)은 본명이 건호(建湖)이고 동문(東門)은 필명이다. 청주(淸州)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 1년도 안 되어 휴학하고, 다시 동국대에 편입 반년만에 폐결핵으로 휴학했다. 공군 제대 뒤 충북일보, 사회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6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고 그 해에 첫 시집 『풍선과 제삼포복(第三匍匐)』을 청주에서 발간하였다.
4․19때 청주에서 신문사설 등을 쓰고 있다가 청주 데모의 배후 인물로 쫓기듯 서울로 이사하여, 종합지 <새벽>, <사상계> 편집장을 지냈다. 1964년 경향신문 특집부장 때 쌀값이 엄청나게 오르자 "북한에는 쌀이 남는다니 수입이라도 하자"는 독자투고의 글을 실었다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1970년대 초에 신구문화사 주간, 창작과비평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아! 신화같이 다비데群들」「아니다의 酒酊」「아아 내 祖國」등을 발표하여 ‘앙가주망의 시인’으로 불렸다. 1960년대 중반에 절필을 선언하고 70년대 초에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농장에 정착하였다. 침술을 배워 무료로 20여년을 시술하여 10만 치유자로부터 ‘辛바이처’로 불리었다.
1993년 봄에 췌장암에 걸려 가을에, 쓸모 있는 장기가 남아 있으면 모두 기증할 것, 화장하여 농장에 뿌리고 무덤은 쓰지 말 것, 두 가지를 유언하고 세상을 떴다. 시비에 새긴 <내 노동으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 勞動으로>
내 노동으로 / 오늘도 살자고 /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 머슴살이하듯 / 바친 청춘은 / 다 무엇인가. /
돌이킬 수 없는 / 젊은 날의 실수들은 / 다 무엇인가. / 그 여자의 입술을 / 꾀던 내 거짓말들은 / 다 무엇인가. /
그 눈물을 달래던 / 내 어릿광대 표정은 / 다 무엇인가. / 이 야위고 흰 / 손가락은 / 다 무엇인가. /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 이 술버릇은 / 다 무엇인가. /
그리고 / 친구여 / 모두가 모두 /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 쓸쓸한 이 습성은 /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 절반을 다 못 깨친 /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
미련을 되씹는 / 이 어리석음은 /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 오늘을 살자고 /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7. 안도섭 도담삼봉 작품비(安道燮 詩碑)
안도섭 시비도 소금정공원에 신동문 시비 옆에 있다. 앞쪽이 거의 네모진 커다란 화강암 자연석에 까만 고딕 글씨
로 시 <도담삼봉>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도 담 삼 봉
강심에 뜬 저 장군봉 / 첩봉 다가앉으니 / 웬 시샘인가.
처봉은 등 돌려 돌아앉았다.
지나가는 나그네 / 두 발 모두어 멈칫 서니
삼봉 휘도는 푸른 물살 / 도담의 그 멋 으뜸인가 하오.
안도섭 시인은 1933년 8월 1일 전남 보성 출생으로 조선대를 졸업했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모지(不毛地)>가 당선되었다. 1959년 전봉건(全鳳健) 등과 사화집 <신풍토(新風土)>를 주재하였고, <전환(轉換)> 동인으로 활동했다. 현대문학사 편집기자, 전남매일신문사 문화부장, 대한일보사 기자, 출판사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시집에 『지도 속의 눈, 1959』『황토현(黃土峴 )의 횃불, 1969』『풀잎 서장(序章), 1984』『하늘을 아는 사철나무, 1986』등이 있다.
안도섭 시인는 초기에는 시대적 애상(哀傷)을 서정적 정서로 노래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상황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저항시를 많이 썼으며, 주지적인 태도로 풍자와 알레고리 수법을 즐겨 채용한 시들을 즐겨 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 공원의 현대시 작품비들
소금정공원에는 10개의 현대시 작품비를 둥그렇게 둘러 세운 시비마당이 있다. 작품비들은 받침돌 위에 원뿔모양의 화강암에다 동그란 오석을 붙인 모양인데 높이가 1.5m 정도이다. 10개의 시비는 똑같은 모양과 크기인데, 작품은 원형의 오석 위에 하얀 글씨로 새겼다. 현재 단양에 살고 있는 김준환(金準煥, 1959년 자유문학 등단) 시인을 비롯하여, 한병호, 이창식, 김경자, 이충이, 이기반, 최재순 시인 등의 작품들이다.
9. 우화교 신사비(羽化橋 新事碑)
우화교(羽化橋)는 영조 29년(1753)에 단양 군수 이기중이 옛 단양읍 한가운데를 흐르는 단양천에 놓은 돌다리이다. 주민들이 주야로 편리하게 이용할 뿐만 아니라 경치 또한 좋아서 즐겨 다녔는데, 돌다리 신설을 기념하여 다리 옆에 신사비(新事碑)를 세웠다.
우화교 이름은 우화등선(羽化登仙)에서 연유하는데, 이 다리가 ‘마치 하늘로 통하는 길이요, 거울같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신선인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뒤에 큰 홍수가 나서 다리는 무너지고 비만 남아 있었는데, 옛 단양이 수몰이 되면서 적성면 면사무소 뒤쪽의 언덕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높이는 115㎝인데 다리를 놓은 내력이 적혀 있으며, 충북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0. 죽령산신당 (竹嶺山神堂) 설화(說話)
죽령산신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 49―9번지에 있는데, 1976년 12월 21일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제천 쪽에서 단양인터체인지를 지나 죽령터널 입구의 우측에 있다.
죽령산신당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죽령산신을 마을에서는 ‘다자구 할머니’라고 부르고, 산신당도 ‘다자구 할머니당’이라 칭하고 있다. 다자구 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연유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긴 죽령에는 옛날에 산적들이 많아 밤낮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관군도 산이 험준하여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때 한 할머니가 관군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산적 소굴에 들어가 ‘덜자구야’ 하면 도둑이 다 자지 않고 있는 것이고, ‘다자구야’ 하면 산적이 다 자고 있는 것으로 약조를 하였다.
두목의 생일날에 찾아간 할머니는 밤이 되어 산적들이 술에 취해 모두 잠들자 ‘다자구야’ 하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쳐들어가 산적을 소탕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다가,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사당을 지어 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마을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처음 신당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것은 1948년 3월 8일에 주민의 성금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단양군은 한반도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태백산과 남한강이 어울려 산천이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답다. 충주호마저 생겨 육지 속의 바다요 호수까지 갖추고 있다. 자고로 시인묵객들이 찾아오고,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해마다 몰려오고 있다.
이제 단양은 아름다운 자연과 순후한 민심, 여유로운 삶으로 살기 좋은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많은 문인들이 찾아오고 이곳에 머물며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고장으로 빛나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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