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표 작가 아사다 지로
모든 유명한 작가가 그러하듯이…
그렇다. '어린 왕자'로 전 세계 철 없는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던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도 사실 비행조종사였고, '해리포터'시리즈로 전 세계 어린이들을 독서의 세계로 초대했던 영국 작가 '조앤롤링'도 1년 여 동안 생활보조금으로 연명하며 살았던 평범한 주부였다. 뿐인가. 앞서 필자가 소개했던 로알드 달 역시 공군 비행조종사였다. 일반화하기엔 논리가 부족하지만, 널리 명성을 떨친 작가들을 보면 그들의 직업이 처음부터 소설가는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정식으로 작가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만큼 문체나 문장의 완성도가 낮다는 비판을 사긴 해도 경험이 풍부해 유머 감각이라든가 이야깃거리가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소개할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는 소설가이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 놀라지 마시라. 일본의 대표적인 폭력조직을 칭하는 야쿠자였다. 그런데 이 야쿠자, 겉으로 보면 살벌할 법도 하건만 내놓는 작품들은 어울리지 않게 감동적이다. 아사다 지로라는 이름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송해성 감독이 제작한 리메이크 영화 '파이란'이나,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된 '철도원'을 아는 사람은 꽤 있을 것이다. 영화 '파이란'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 <철도원>에 수록된 '러브 레터'를 원작으로 제작되었고, 영화 '철도원' 역시 그 소설집에 수록된 아사다 지로의 대표작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었던 아사다 지로의 단편작 '러브레터'의 리메이크 '파이란'
흔히들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가리켜 "눈물로 정화되는 따뜻한 감동"이라고 평한다. 이야기가 극적이거나 소재가 자극적이라서가 아니다. 요컨대 아사다 지로는 우리 시대가 검다고 말하는 것을 희다고 하는 사람이다. 사회의 모서리 귀퉁이로 밀려나 아무도 유심히 눈 여겨봐주지 않는 사람들의 소소한 인생의 기쁨을 다루며, 우리가 어쩌면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해놓고 살았던 행복에 대해 원초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작가가 바로 아사다 지로다. 또한 아사다 지로는 몰락한 유복자 출신답게, 풍족하고 기품 있는 상류층의 지저분한 이면을 조소하는 동시에 동정한다. 비웃으면서도 동정을 느끼는 이중적인 아사다 지로의 시선은 특히 단편소설 '악마'에서 잘 드러난다. '악마'는 유복한 가풍에서 태어난 소년인 주인공이 어느 날 새 가정교사를 들이게 되면서 겪는 끔찍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어린 주인공은 집에 하녀와 하인 등 가솔이 몇 명이나 있을 정도로 물질적으론 충분한 가정환경을 갖고 있었으나, 유명 사립중학교의 입시 때문에 TV도 못 보고 늘 공부의 중압감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중 도쿄 대학을 다닌다는 가정교사가 들어오면서 주인공의 인생은 공포의 나날로 변하게 된다. 어린 주인공 눈에 비친 가정교사는 악마 그 자체였다. 이와 동시에 가족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와 순종적인 억압에 갇혀 살다 외도를 해버리는 어머니 등 위태로운 집안 분위기는 곧 악마의 먹잇감이 되어버린다. 이 작품에서 아사다 지로는 본인 스스로가 악마가 된 듯이, 겉만 번지르르할 뿐 내실은 전혀 사람답지 않은 귀족 사회를 조롱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인공 소년이 따뜻한 선의를 가진 시골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 받게 함으로써 어떤 연민의 동정을 주고 있다. 즉 아사다 지로가 주는 '감동'의 원천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는 세태에서 타인의 선의가 주는 따뜻함, 그 희귀한 온정을 좀 더 소설처럼 풀어놨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사다 지로 본인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으며,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인생이라는 위대한 유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가문이 몰락한 뒤 자위대에 입대하고 그 후 야쿠자, 의류 외판원, 부티크 경영, 세탁소 등을 하면서 아사다 지로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꽤 많이 겪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친척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일본 유명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한 말을 듣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40대까지 가족과 장모님에게 신세를 지면서 일을 하는 한편으로 글쓰기도 병행하다가 첫 단편소설집 '철도원'이 문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필모그래피는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위대 시절, 부티크 경영, 야쿠자 등 다양한 경험들이 그의 소설에 전반적으로 고스란히 녹아있으며, 특히 군대와 야쿠자 이 두 소재는 아사다 지로 소설의 단골로 자주 나온다.
"엄마는 가난한 너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아냐. 부자인 너에게 버림을 받고싶은 거지." 장편'천국까지 100마일'
그의 소설들은 대체로 피카레스크 소설 형식을 따르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이란 16, 17세기 에스파냐에서 유행한 문학 양식의 하나로, 주로 1인칭 서술자 시점에서 주인공이 고백을 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변했으나 피카레스크 양식을 따른 대표 예시로 J.D.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 수 있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 역시 대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지거나, 혹여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해도 언제나 한 인물을 중심으로 플롯이 진행된다. 돈이 많든 적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든 낮든 본질적으론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은 이야기 후반부에 가서 참회하며 주변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세상의 '선함'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과도 헤어져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인공이 형제들도 외면한 심장병을 앓는 어머니를 위해 100마일을 달리는 장편소설 '천국까지 100마일'에서도, 위험천만한 운전을 마치고 심장 수술의 권위자가 있는 병원에 도착한 뒤 주인공은 그제서야 자신이 그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며 분노했던 지난 날을 반성한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는 인물은 아무 바람 없이 그를 받아들여주었던 그녀, 마리였다. 나중에 가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아사다 지로의 소설엔 꼭 바보 같은 주인공을 위해 아낌 없이 희생하는 인물이 한 명쯤 나오는데, 대개 그런 역으로 여자가 많이 등장한다. 단편 '죽음비용' 역시 대기업과 대 식구를 거느린 회장이지만, 평생 돈만 좇고 사느라 인간적인 행복은 포기해야 했던 주인공이 어느 날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준다는 회사를 알게 되어, 그 회사의 뒤를 캐다 문득 자신의 삶이 무척이나 허망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주인공을 최고의 극락으로 이끄는 인물은 그의 여비서다. 물론 구원자가 꼭 여자가 아닌 작품도 많다. 부처님의 벌로 오천 년 동안 사람의 불행을 먹고 살아야 하는 동물을 만난 한 여자의 이야기 '시에'가 그렇다. 또한 전직 야쿠자답게 야쿠자의 생활을 실감나게 알 수 있는 작품도 많다. 단편 '은빛비'에서는 야쿠자가 마치 의리 있고 용감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순박한 온정도 있는 인물인양 묘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야쿠자들은 하나같이 비겁하고 난장판 같은 생활을 하거나 겁쟁이로 나온다. 묘사 방식을 떠나서 야쿠자 세계의 서열과 예의, 소위 '전쟁'이라고 하는 싸움판 등을 무척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독자 나름대로 상상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칫 조악한 감동이 될 수 있는 감정의 인플레
어느 독자든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으면 어느새 눈물이 나고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었다고들 평하지만, 필자는 언젠가 김수현 작가가 언급했던 단어가 떠오른다. 감정의 인플레.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이 독자의 마음에 한 번 터진 온천수처럼 샘솟는 따뜻한 감동을 주는 건 맞지만 간혹 이게 지나치면 감정의 인플레이션으로 빠질 수 있다. 즉 지나친 감동에의 호소로 인해 적정선을 넘어 조악한 감동을 짜내는 신파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프리즌 호텔'이다. '프리즌 호텔'은 사계절 시리즈로 된 장편 소설인데, 야쿠자가 운영하는 호텔에 묶는 숙박객들의 다채로운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면 매우 흥미 있을 이야기지만 필자에겐 처음으로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다 그만두고 만 소설이기도 하다. 이야기 전개가 너무 개연성이 없고, 억지 감동을 짜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사다 지로가 전하는 감동의 매력은 직접적이긴 하나 작위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 매력을 유지하는 데는 그의 문체도 한 몫하고 있다. 아사다 지로의 문체 자체는 그다지 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군더더기 없는 묘사를 지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에게 더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사다 지로는 어떤 단어와 어떤 표현을 써야 독자에게 실감나게 다가오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장황한 묘사를 하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탁월한 표현력 덕분에 자칫 촌스러운 신파로 빠질 위험이 있는 소재도 꽤 설득력 있는 신비한 감동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야쿠자가 운영하는 호텔 이야기.장편소설 '프리즌 호텔'
필자의 주관을 가득 담아서 얘기하자면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작가의 가치관이 모든 소설에 반영되어있고, 또 그것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수동적이고 한없이 착하다. 이들은 아무리 봐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 주인공을 성모 마리아같이 감싸주며, 그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다. 그런 점이 순수한 감동과 슬픔을 엮어내는 효과도 주지만 그런 여성의 피동성이 극복되지 않고 단지 남자 주인공의 인생을 구원해주는 소극적인 역할로만 국한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 아사다 지로가 자위대 출신임을 반영하듯 군대와 전쟁을 소재로 한 단편도 간간이 발표되곤 하는데, 역사가 바라보는 시점과 달리 당시 2차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마치 백의종군처럼 묘사하는 점은 자못 씁쓸하다.
아름답게, 알기 쉽게, 재미있게
그럼에도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각자 마음의 상처를 잊고 살아가는 무딘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 아니, 야쿠자였던 그가 어느새 일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걸 보면 이미 시대가 요구하고 있다. 빙빙 돌려 이야기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러나 단순하지 않게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입담도 성질 급한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한 몫을 한다. 깜빡 잊었던 흉터를 건드리듯이 아사다 지로는 문득문득 독자의 곯은 상처를 건드려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앞서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 자칫 신파로 빠질 수 있다는 한계점을 쓰긴 했으나 최근에 낸 작품들 '슈산보이', '사고루 기담'등을 보면 감정 유입의 과도기를 지나서, 마치 혜안을 통달한 노인처럼 담담하게 인생의 이치를 전하는 능력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세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아름답게 쓸 것, 알기 쉽게 쓸 것, 재미있게 쓸 것. 반박할 여지도 없이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이 세 가지 원칙이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인생 밑바닥을 전전했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선의를 믿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수 놓는 아사다 지로. 자타가 공인하는 '소설의 대중식당'이란 수식어처럼,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줄 노인의 입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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