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나눔 방식
한때 요한은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 부근에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설교로 죄인들의 회개를 이끌어냈고,
‘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어느덧 그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백성의 추측과 기대를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2016. 1. 10)에 언급한 대로, 요한은 세례자로서의 역할 외에도 설교자,
광야 은수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증거자, 상담치료사, 독설가(‘독사의 자식들아’),
도로공사 사장(‘길을 곧게 내어라’), 패션 리더(‘낙타 털옷’과 ‘가죽 띠’), 자연섭생가
(‘메뚜기’와 ‘들 꿀’) 등의 화려한 경력으로 사람들의 기대감에 한 몫을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던 이는 백성의 이러한 예상과 환상을 뒤엎으며,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자신보다 더 커져야 할 ‘나자렛 사람’을 스스럼없이 소개
함으로써 그리스도 앞에 작아져야 하는 삶을 선택했던 인물(요한 3,29 참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던 그 즈음, 요한은 영주 헤로데의 부정한 일에
항변하다 하루아침에 보복 수사의 대상이 되어 수인의 신세가 됩니다.(마태 14,3 참조).
그는 부자연스러운 처지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의 자기 소명을 잊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파다하게 퍼진 소문만으로 확신의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한 요한은 마침내
제자들을 대신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가 맞는지 당사자의 확언을 요청합니다.
그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대답 대신 ‘삶’을 나누어 주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5). 이 말씀은 예수님을 처음
따라갔던 요한의 제자들이 그분을 뵈었을 때도 동일하게 하셨던 ‘초대의 나눔’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묵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예수님과 직접 삶을 나누고 그분을 체험한 이들의
증언보다 더 강력 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초대와 삶의 나눔은 또 다른 초대와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제자 필립보가 친구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고
말하며 그를 예수님의 삶에 동참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예외 없이 ‘와서 보고 듣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또 다른 초대와 나눔이 확산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나눔의 방식은 소소하지만 많은 것을 일깨웁니다.
오늘 ‘자선 주일’을 맞이한 우리 신앙인에게도 여러 나눔의 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간 나눔, 이야기 나눔, 재능 나눔, 노동 나눔, 기도 나눔, 웃음 나눔, 지식 나눔,
정보 나눔, 친절 나눔, 행복 나눔, 고통 나눔, 처지 나눔, 물질 나눔, 환경 나눔,
가치 나눔’ 등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나눔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습니까?
아니, 굳이 나눔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나눔이 자연스럽게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박현창(베드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