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일주 여행기
갑자기 여행을 가고 싶은 생각이 나서 어디를 갈 가 고민을 하였다. 인도. 네팔을 가고 싶은데 그곳은 아내와 같이 가야 될 것 같고 궁리를 하다가 아내는 가 본 곳인 터키를 가 보기로 했다. 나도 2002년도에 이스탄불은 가 보았지만 다른 곳은 가보지 않았으므로 터키를 가려고 여기 저기 여행사를 알아보다가 2008년 북유럽 갈 때 이용하였던 투어2000으로 정하였다.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예약금을 보내고 여권 사본을 제출하고 3월12일 아시아나 항공으로 떠나기로 했는데 2월 하순 연락이 와서 하루 먼저인 11일 출발하면 안 되느냐고 묻기에 상관이 없다고 하니 11일 출발하는 팀에 넣어 주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3월6일 여행사에 가서 잔금을 내고 룸메이트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더니 혼자 사용하는데 룸 차지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다행이다 생각을 하였는데 출발 3일 전에 연락이 와서 같이 써야 된다고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2013년3월11일 월요일 어제 성당을 다녀와서 짐을 꾸리는데 간단하다. 혼자 가려니 좀 미안하기도 하다. 3월11일 아침 8시 40분 콜택시를 불렀는데 탄현동이라고 하니 115동이냐고 물어 깜짝 놀랬다. 조금 있으니 문자가 왔는데 택시가 배차되었다며 차량번호 까지 알려주어 또 놀랬다. 조금 있으니 기사 아저씨가 전화가 와서 밑에서 기다린다고 내려오란다. 그래서 짐을 들고 내려가는데 손자 원찬이는 뽀로로 본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할아버지 안녕하자고 해도 들은척도 하지 않는다. 섭섭한 마음으로 내려가니 택시가 있어 바로 출발하였는데 내가 콜센터에서 어떻게 우리집 주소를 아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한번 이용한 사람들은 전부 저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차량배차 된 것을 문자로 알려주더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전부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잘 된단다. 이런점은 우리가 IT강국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리라. 기사 아저씨와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금방 대화역에 왔는데 얘기 내용으로 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나중에 택시를 운전하는 것 같았다. 대화역에서 5분 정도 있다가 인천공항 가는 버스 3300번을 탔다.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인천 공항에 다 왔기에 시계를 보니 인솔자가 10시 까지 오랬는데 9시 45분이다. 가방을 들고 내려 A 카운터에 가니 인솔자가 막 와서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총 32명이라고 한다. 10시 40분 짐을 부치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얼마 없어 금방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널널하였다. 카메라를 살까 하고 기웃거려 보니 사고도 싶고 별로 사용도 하지 않으면서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갈등을 느끼다가 포기하였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처사촌 동서인 박서방을 만났는데 직원들과 런던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란다. 지난번엔 행담도 휴게소에서 만나더니... 12시 쯤 되어 빵 하나를 사 먹고 뉴스를 보다가 12시35분 KE955편에 탐승을 하였다. 13시30분 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나 활주로가 복잡하여 다소 이륙이 늦어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행히 얼마 있지 않아 이륙하였다. 고도를 잡고 2시 40분경 점심을 먹고 술을 먹고 자려고 하니 잠이 안 온다. 2011년 우루무치 갈 때 기내에서 맥주 먹고 혼난 적이 있어 술도 맘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여하간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영화 <왕과 나> 한편을 보고 가지고 간 책 <이향견문록(하)>를 다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가지고 간 원고를 검토하다 보니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다. 우리 시간 밤 12시 30분경. 옆 좌석에 앉은 사람도 일행인데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것 같았다. 우리와 7시간 차이가 나므로 이곳은 오후 5시 30분이란다. 수속을 밟고 나가니 현지 가이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현지시간 6시 30분. 버스를 타고 Esser Diamond호텔에 도착하니 7시반. 나처럼 혼자 온 진ㅇㅇ 라는 친구와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호텔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호텔비 때문에 그렇단다. 이곳 시간으로는 밤 8시 정도이지만 한국시각으로는 새벽 3시 정도이니 아유. 졸려..
3월12일 화요일 아침 4시 40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5시 반에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6시 반에 버스가 출발하였는데 비가 조금 내렸다. 호텔 주변을 보니 밀밭이고 저 멀리 동네가 보인다. 즉 호텔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국이다. 버스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배를 타고 관광을 하러 출발하였다. 항구 근처에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새로 지은 집이 바짝 붙어있다. 우리처럼 얼마 이상 떨어져 지으라는 규정이 없는지?
8시 25분에 보스포러스해협을 보러 배가 출발하였는데 바다 근처에 궁전도 있고 학교도 있고 볼게 많구나. 갈라탑도 있고 갈라 다리도 있는데 그전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큰 배가 지나갈 때는 들어 올린단다. 근처에는 아주 큰 크루즈선이 있었는데 우리 배가 지나가니 몇 사람이 손을 흔든다. 그런데 날씨가 추운데 짧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어 공연히 내가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감기 들면 어쩌누... 근데 나는 언제 저런 배를 타고 여행을 가나 생각해 보니 아득 하기만 하구나...에이... 9시 넘어 배에서 내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만든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관광 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터키 아가씨가 동행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여행이 끝날 때까지 동행하였다. 지방까지도..이 사람이 동행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단다. 법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우리도 배울 점이다. 여하튼 입장을 하는데 검색대의 직원들이 “빨리빨리” 하면서 한국말을 하여 우리를 즐겁게 하였다. 이곳은 터키가 민주 공화국이 되기 전의 왕정 말기 궁전이었다고 하는데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고 하여 밖만 찍었다. 참으로 호화롭게 되어있는데 이런 시설을 만들면서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그래도 그 덕분에 후손들은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게 사실이니 뭐라고 얘기해야하나..
제일 부러운 것은 케말파샤가 이곳에서 죽었는데 그가 집무하던 공간을 아이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박정희대통령과 비슷한데 우리는 이런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독재했다고 욕들만 하고 있으니.. 이승만 대통령도 욕들만 하지 그가 건국을 위해 애 쓴 것은 말을 안 하고 그가 남긴 유물이 비에 젖어도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내부 구경을 하고 나와 정원을 가는데 이곳 아이들이 싸이의 강남스타일 흉내를 낸다. 그래서 나도 조금 흉내를 내었더니 아이들이 좋아 죽겠단다. 싸이가 얼마 전에 터키에 와서 공연을 하였단다.
입장객이 많아 성소피아 사원 입장권을 들고 한참을 줄서서 기다리다 입장하였다. 이곳에서도 초등학교 정도의 아이들을 만났는데 이놈들도 강남스타일 흉내를 내서 웃었다. 우리 일행 몇 사람이 그 애들과 사진도 찍고 즐거워하였다. 나는 2002년도에 이곳 구경을 하였는데 그리스정교회 성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천장이나 벽화에 그려진 예수나 성모마리아 등을 가리기 위해 회칠을 하고 그 위에 이슬람식 그림을 그리고 이슬람 사원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가 지금은 일부를 다시 거둬내어 예전의 카톨릭식 그림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런 내용만 기억이 나고 그림 내용이나 이런 것들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전에는 기둥에 손가락을 넣은 기억이 있는데 그냥 지나쳐 버렸다. 지금은 박물관이란다. 택시를 보니 Taksi라고 되어있네. 영어를 본 따 만든 것인지... 12시40분 쯤 나와서 걸어서 식당으로 갔다. 케밥이라고 한다. 식당 앞의 조그만 공원을 사진 찍고 걸어가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길 가운데서 우리를 태우는 바람에 뒤에 있던 차들이 경적을 울린다. 미안.. 여기 올 때 날씨가 좋더니 또 꾸물거린다. 13시 45분경 다음 일정을 위해 앙카라로 출발하였는데 케말파샤 사진이 거리에 많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길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데 통행료가 우리 돈으로 2,800원 정도라고 한다. 아시아 쪽에서 유럽 쪽으로 올 때는 안 낸단다. 종전에는 양쪽 다 냈는데 다리 만든지가 30년이 지났는데 너무 하다고 항의가 있어 한 쪽은 안 받는다는 것이다. 길옆에는 새로 지은 집들이 많다. 길이 막히는데 차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도로확장은 잘 안 되므로 정체현상이 나오는 거란다. 1시간 정도 자고 나니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러쿵저러쿵 하다 보니 저녁 7시 반경 앙카라 Marinem호텔에 도착하였다. 저녁을 먹고 가이드는 시내가 위험하다고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술을 먹으려고 룸메이트와 둘이 나가서 큰길 옆을 다녀보았지만 술파는 곳을 찾을 수 없어 호텔 앞 슈퍼에 가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옷 속에 감춰가지고 들어와 방에서 먹었다. 길옆에는 복권가게가 많구나. 룸메이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IT 분야에 종사한다고 하며 나이는 41이라고 한다. 나는 캔 한 개를 먹고 그는 두 개를 먹고 잤다.
3월13일 수요일 아침 4시 40분에 일어나 5시 반에 아침을 먹고 7시에 출발하였다.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을 갔는데 6.25전쟁에 참가했다 전사한 터키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란다. 전사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그만치 773명이 전사했다니.. 고귀한 생명을 바쳐 우리나라를 지켜준 이들에게 우리는 깊이깊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 일행은 잠시 묵념을 하고 우리를 돕다가 산화한 영령들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입구에 있는 초소의 지붕 기와가 우리식이 아니고 현지식이다. 에이. 조금만 신경을 더 쓰지... 갑갑한 것은 그곳에 건립 동기가 붙여 있는데 맨 밑에 대통령 박정희라고 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지워버렸다고 한다. 어느 얄팍한 자의 소행인지...노무현, 이명박대통령이 참배하였다고 하니 언제 그랬을까 대강 짐작은 가지만.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이 나라에서 국부로 추앙하는 케말파샤의 무덤인 영묘를 지나가며 설명을 들었다.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가도 가도 밀밭이다. 얼마쯤인지 가다가 소금호수가 있어 내렸는데 물을 혀에 대보니 정말 짜다. 이곳은 바다였는데 지각변동에 의해 호수가 된 곳으로 충북 정도의 크기라니 상상이 안된다. 빗물이 계속 유입되므로 소금 농도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을 갔는데 1인당 0.5달러를 내었고 석류 주스 한잔에 2.5유로를 주고 사 먹었다. 석류를 손님 앞에서 기계로 압착하여 주스를 만들어 주는 것인데 맛은 잘 모르겠다.
가는 도중에 2010년 6.25특집으로 춘천MBC에서 만든 비디오를 보여 주었는데 터키군으로 참전했던 사람이 5살 된 여자 고아를 돌보다 터키로 데리고 가지 못해 늘 안타까워 했는데 방송국에서 이 사연을 듣고 수소문을 하여 인천에 사는 여자를 찾아 상봉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데 나도 조금 눈물을 흘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데린구유를 가 보았는데 아내는 산에 있다고 했는데 웬 평지에 동굴이 있다고 하여 이상하다 했는데 이러한 동굴이 36개소나 된단다. 그러니까 아내가 다녀온 동굴과 이번의 동굴은 다른 곳이라는 결론이다. 데린구유는 깊은 우물 이라는 뜻인데 닭치던 아이가 닭이 없어져서 닭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런 동굴이 더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하 8층 까지 있으며 1만명이 들어갈 정도로 큰데 붕괴 위함이 있어 일부만 공개하고 있으며 지하 7층에 예배 보던 장소가 있다고 한다. 이곳도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어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하고 이런저런 표시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탐사한 사람들은 어떻게 식당 자리이고 저장고이고 등등 알아냈을까? 당시는 장비도 별로 였을 텐데 어떻게 이런 것을 팠을까? 가이드는 쇠붙이를 소에 매달고 빙빙 돌려 굴을 파고 거기서부터 다시 옆으로 파 들어갔다고 한다. 물론 오랜 세월 필요시 마다 팠을 테지만.., 7층에서 잠간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주위 산에는 간간이 눈이 보인다. 카파도키아라고 하는데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는데 스프는 맛이 괜찮다. 식사 후 비둘기 계곡을 갔는데 장관이다. 비둘기가 많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거란다. 내려서 사진을 찍고 남들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에 나도 사 먹었다. 맛은 별로...이 동굴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살았던 곳이란다. 교회도 이런 식으로 만들고...이곳에서 터키의 유명한 악마의 눈 이라고 하는 기념품을 몇 개 샀다.
다시 버섯계곡을 구경하였는데 별별 모양의 바위가 있다. 어떻게 이런 바위가 생겼을까? 이런 바위에 구멍을 파고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니 참... 밧줄을 걸치고 줄을 잡고 올라가고 했다네. 지금은 강제로 퇴거 시키고 못살게 한다는데 우리가 주차한 바로 옆 바위굴은 군인들이 초소로 사용한다니.. 그런데 그 초소 옆의 굴을 자세히 보니 무슨 칠을 한 흔적이 있는데 궁금하였다. 길 옆 가게에는 골동품도 많은데 믿을 수가 없어 사질 못하겠다.
이어 hadosan 이라는 양탄자 공장을 갔는데 욕심이 나는 양탄자가 많은데 워낙 비싸고 우리나라에는 별 실용성이 없는지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분은 살까말까 망설이니 값을 계속 줄여 주는게 믿음이 가질 않는다고 하였다. 누에고치 한 개에서 실이 1km정도 나오는데 앞 200m, 뒤 200m는 잘라버리고 가운데 600m만 사용한다고 한다. 양탄자 하나를 만드는데 3개월 걸린 것도 있고 1년6개월 걸린 것도 있다고 한다. 확실히 실크로 된 것이 촉감도 좋구나.. 또 계곡을 지나왔는데 이번에는 낙타모양, 성모상, 나폴레옹 모자 모양 등인데 버섯계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Suhan호텔에 짐을 풀고 구내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런대로 괜찮다. 잠시 쉬었다가 밸리댄스를 보러갔는데 7시에 시작하여 9시 반쯤 끝났다. 시작은 이슬람 전통 의식 행사인 하셈으로 시작하였는데 아주 엄숙하였다. 그런데 수십바퀴를 도는데 보는 사람도 어지러운데 도는 사람은 어쩔지.. 이어 청혼 모습을 하는데 손님 중에도 일부를 나오라고 하여 같이 하는게 재미있었다. 맨 나중에는 여자 혼자 나와 밸리댄스를 추더니 손님들 5명을 뽑아 같이 춤을 추니 흥겹다. 우리팀에서도 한명이 나가 춤을 추었다. 술을 무제한 제공하다고 하는데 맥주 한 모금을 먹으니 속이 이상하여 먹지 않았다. 2002년 왔을 때는 밸리댄스만 여러번 했는데 여기는 조금 다르네.. 손님을 나오라고 하여 하는 것은 같고.. 인사동의 사찰음식 하는데도 국악을 한 뒤 손님들을 나오라고 하여 같이 춤을 추며 노는게 좋아 보이더니... 10시 경 호텔에 도착하여 잤다.
3월14일 목요일 열기구를 타러가기 위해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 10분에 출발하여 바위동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본인이 알아서 식사를 간단히 하고 조그만 버스를 타고 열기구를 타러갔다. 바람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열기구가 뜨지 못하는 날도 많다고 한다. 현장에 도착하여 열기구를 세우는 것을 보니 대형 선풍기 2대로 바람을 불어넣고 가스불로 안을 뜨겁게 하니 풍선처럼 생긴 것이 누워 있다가 점점 일어나더니 똑바로 선다. 높이는 약 40미터 정도이고 제일 넓은 곳의 폭은 액 20미터 정도이다. 우리가 탈 열기구가 준비 완료되어 4칸에 각 6명씩 탔다. 7시21분 이륙하여 8시20분에 내렸다. 조종하는 사람이 열기구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조종을 잘 하였다. 약 40미터 상공에서 어제 본 바위계곡을 보면서 참 장관이라는 것을 또 느꼈고 말로만 듣던 열기구를 타보니 안전하다. 일행 중에는 겁이 나서 안 탄 사람도 있다. 수십개의 열기구가 공중에 떠 있으니 그것 또한 장관이다. 열기구에는 높이와 열기구 내의 압력 등을 나타내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 이를 보고 가스불을 조정하였다. 이곳은 해발 1,200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열기구 하나가 우리 돈으로 4억원 정도라고 하며 개인사업자들이 운영하는데 뜨지 못하는 날도 많고 아침에만 하고 또 딸린 직원들이 많으며 장비도 많이 필요하고 세금도 많기 때문에 요금이 비싸다고 한다.
다시 호텔로 와서 아침을 먹고 9시에 출발하여 9시 20분경 터키석 가게를 들렸는데 사고 싶은 마음은 많은데 가격이 비싸다. 기술자들은 대체로 보아 나이가 많고 사장은 젊다. 또 다시 끝없는 평야를 멍하니 바라보며 달렸다. 주유소의 기름 값을 우리 돈으로 계산해 보니 휘발유가 1리터당 2,600원 정도나 되어 물어보니 터키는 산유국이지만 부족하여 이란 등에서 수입을 하고 있는데 세금이 많이 붙는데 지진세도 있단다. 별 희한한 세금도 다 있네... 11시 경에 Aksaray라는 도시를 통과했고 얼마 뒤 무슨 성같이 생긴 곳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쉬었다. 완전히 하나의 성 같은데 입장료를 받으므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가이드 말을 들으니 이곳은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는 길목의 중요지점으로 이 성같이 생긴 곳에서 상인들이 묵었다고 한다. 일종의 여관이네. 이곳을 통해 아편이 중국까지 나중에는 조선까지 전해졌는데 원래는 터키의 아피온이라는 지명에서 생산된 것인데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가다보니 또 콘야라는 도시를 지났는데 이곳은 대표적인 공단지역으로 약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터키 내에서 가장 이슬람 색채가 강하다고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코니아가 이곳이란다. 12시 50분경 Gunter라고 하는 무척 큰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다가 오렌지주스가 있어 한잔 먹으려고 가져왔더니 종업원이 와서 4달러를 내라고 한다. 나는 가격표를 보지 못했는데 일행 중 한사람이 가격표 있는 것을 보고 자기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거참 주스 한번 비싸게 먹었네....13시 40분에 또 출발하여 토러스산을 넘는데 도로 중 가장 높은 곳이 1,825미터라고 한다. 그래도 버스는 벤츠라 그런지 잘도 달린다. 산을 넘으니 또 평야가 펼쳐지고.. 18시30분에 안턀라의 Ring호텔에 도착하였는데 호텔이 입구만 작으마하게 있고 옆에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입구를 찾지 못하겠다. 짐을 풀고 바로 식사를 하고 쉬었다가 룸메이트와 해변 카페에 가서 맥주를 먹었다. 작은 병 1개에 5달러. 이곳은 전부 Efes Pilsen이라는 맥주만 파는 것 같다. 좀 써서 그런지 내키지 않아 잘 먹지 못하겠다. 21시40분경 호텔로 들어와 잤다.
3월15일 금요일 이곳의 옛 지명은 안탈리아라고 한다. 5시에 일어나 혼자 해변까지 다시 가 보았는데 날이 밝지 않아 그런지 볼게 없고 광고판을 보니 싸이의 말춤을 흉내 내고 있고 사진관에 전시된 사진을 보니 우리의 웨딩 사진첩 같은 것과 아이들 돌 사진 같은 게 많다. 어디나 사람 사는 모양은 비슷한 가 보다.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가서 이울리미나레라고 하는 회교사원의 탑을 보았는데 11세기 셀죽이 통치하던 시대에 만든 것인데 다른 사원의 탑은 둥근 모양 하나인데 이곳은 8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틀리고 약간 붉은 색이다. 다른 것은 회색인데. 옆을 보니 교육장도 있고 기도 전 손발을 씻던 장소도 있고.. 옛날 거리가 잘 보존되어있는데 우리네처럼 좁은 길이 꼬불꼬불 하다. 이것도 같은 이치라고 생각이 든다. 특이한 것은 공원에 개들을 위한 먹이 시설을 설치한 것이다. 터키는 개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들판에 개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개들 먹으라고 공원에 먹이를 주는 기계를 설치하다니.. 완전 개판이네.. 공원 옆 해안가에 있는 망루 같은 데가 있는데 그 옆에는 대포도 전시되어 있다. 또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여 AD130년경에 만들었다는 기념문을 보았는데 참으로 조각이 섬세하고 옆에 있는 성곽도 오래된 것이 표가난다. 마차가 다니던 길은 유리로 덮어놓고...
옵션으로 배를 타고 해안을 일주하기로 한 것이 풍랑으로 취소되어 다음 일정을 조금 당겨서 가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며 보니 핸드폰 가게에 있는 제품에 삼성 것이 많다. 배는 못 타지만 포구는 구경하라고 하여 가 보니 배가 여럿 있는데 배에 해적모양 등을 붙여 놓은 것이 인상적이고 성벽은 까마득하게 높은데 성벽 중간 중간에 배수구가 설치되어있다. 9시 50분경 출발하여 11시50분경 Keloglan이라는 곳에서 약간 이른 점심을 먹고 12시 30분경 출발하였다. 우리가 가는 파묵칼레는 인구가 50만명 정도인데 파묵은 목화라는 뜻이고 칼레는 성(城)이라는 뜻인데 로마시대에는 리에라폴리스라고 하였고 요한묵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이아가 이곳이라고 하며 지금은 브르기아라고 한단다. 이곳은 목화가 많이 생산되던 곳으로 목화를 따기 위해 이스라엘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녀도 많고 돌싱도 많았는데 지금처럼 자유연애를 하던 시기가 아니므로 적령기의 여자가 있으면 지붕위에 병을 세우는데 처녀 1명이면 병을 똑바로 1개 세우고 2명이면 2개를 세웠으며 돌싱이 1명이면 병을 거꾸로 1개 세우고 2명이면 2개를 거꾸로 세우는 등으로 여자들이 있으니 중매를 하던지 와서 청혼을 하라는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지나다 보니 옛날의 풍습대로 지붕에 병을 꽂아 놓은 것이 있는데 사진은 찍지 못하였다. 중간에 아울렛에 들려 구경을 하다가 버버리 티셔츠 등을 샀다. 로마시대 유적지인 히에라폴리스를 갔는데 참 희한하였다. 어떻게 산 위에서 온천이 솟고 이런 곳에 어떻게 성을 쌓고 화장실, 목욕탕 까지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옛날에 중장비도 없었을 테니 순전히 인력으로 했을 텐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을까? 지금도 이곳의 온천수가 아래로 흘러가 호텔에서 데워 사용한다고 한다.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큰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니 온천물에서 수영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다. 또 돌아다녀보니 Fishing doctor라고 하여 가보니 물고기로 발의 각질을 벗기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펌프질을 하다가 가기에 나도 해보니 따뜻한 물이 올라온다. 성당 자리는 너무 멀어서 포기를 하고 일행이 발 담그는 곳으로 가서 담가보니 미지근하여 별로다. 옆에 있는 도랑 같은 곳은 그나마 조금 따뜻하다. 터키의 유명한 제품인 가죽 매장을 갔는데 패션쇼도 하고 물건을 사라고 하는데 여럿이 샀다. 나는 2002년도에 잠바를 사려고 했었는데 ...이번 일행 중에 나이 드신 분이 나이 먹은 사람은 가죽 제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17시 40분경에 파묵칼레의 Halici 호텔에 도착하였는데 꼭 콘도처럼 낮고 길게 퍼져있다. 밥을 먹고 온천엘 갔는데 설명 들은 것에 비해 실망이다. 물도 미적지근하고 밑에는 미끄럽고.. 한증탕을 가니 그곳도 그렇고, 마사지를 하라고 권하는데 값만 비싼 것 같다. 유럽 지역의 한증탕이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터키탕이 아니다. 방에 들어오니 졸리기 시작하는데 참을 수 없어 룸메이트가 나가자는 것을 못가고 9시경부터 잤다. 룸메이트가 언제 왔는지도 모르고 잤다. 호텔 근처에 양고기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하는데 너무나 졸려서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다 그쳤다 하니 종잡을 수 없는 날씨고 옷 입기도 어렵다.
3월16일 토요일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에페소로 가는 날이다. 5시 조금 넘어 일어나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 30분경 출발하였다. 에페소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에베소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식사를 했는데 다들 좋아한다. 12시 반에 식당을 출발하여 13시에 에페소에 입장하여 14시30분에 나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아주 좋다. 제일 유명한 것이 두란노서원인데 우리도 두란노서관인가 두란노출판사인가가 있는 등 두란노 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정식명칭은 셀시우스 도서관이라고 한다. 앞부분만 있으며 조각품도 거의 없다.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극장, 공창(公娼)거리, 하드리아누스신전, 집단 거주지의 거리 보도에는 지금도 당시의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콧대 높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화장실은 여럿이 앉아 볼일을 보게 되어 있는데 밑에는 물이 흐르도록 되어 바다로 흘러가게 만들어져 있었고 도서관 옆에는 시장터가 있다. 바로 앞 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었는데 퇴적물이 쌓여 바다가 멀어졌다고 한다. 대극장에서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여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나이키 상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돌도 구경하고 여러 가지 모양의 문이나 건물의 모습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대극장에서 출구 쪽으로 나오다 보니 돌무더기가 있는데 로마시대 귀족들의 관(棺) 이라고 한다. 출구 쪽에는 거리 표지판도 있다. 제일 뿌듯했던 것은 입구와 출구 근처에 삼성에서 한글로 안내판을 설치해 놓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즉 우리나라가 그만큼 국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의 12제자 중 요한이 이곳에 와서 선교하다가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8개월만에 석방되었고 요한은 성모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드렸다고 하며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100세가 넘어 자연사 하였단다. 그래서 성경 중 요한이 쓴 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사실은 독일을 벗어나 보지 않은 수녀가 1800년대에 꿈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여러 가지를 보여주었는데 마리아가 살던 곳과 묻혔던 곳을 보여주어 독일 수녀가 꿈에서 본대로 책을 지었는데 나중에 책을 근거로 발굴을 해보니 유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 자리에 성모마리아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 에페소를 발굴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중요한 것은 자기네 박물관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여하간 힘이 있어야 한다. 15시 경에는 시린제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나름 독특한 냄새가 있는 곳이란다. 길 좌우에는 온통 올리브 나무 천지이고 올라가니 포도주 시음장에서 각기 다른 포도주를 조금씩 세 번 주는데 나 같은 사람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는 포도주를 사라고 한다. 포도주를 나누어 주던 사람이 어찌나 우리말을 잘하고 웃기는지... 앞 가게에서는 즉석에서 가스불로 유리대롱을 녹여 목걸이를 만드는데 참 신기하였다. 도중에 이즈미르라는 지역을 통과하였는데 이곳은 전에는 스밀라라고 하였고 3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하며 또 1차 대전 때 케말파샤가 그리스군을 무찌른 곳이라고 한다. 오후 7시경 아이발릭의 Mare호텔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와이파이가 되어 메일 등을 확인하였고 룸메이트가 쉬린제 마을에서 사온 사과주를 먹고 10시 넘어 잤다. 내가 외국 나왔을 때 와이파이 사용하는 것을 몰라 사용을 못하였던 것이다. 에이. 바보. 우리가 들리지 않은 페라가모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로마군이 이 지방을 점령 후 처음으로 수도로 정했던 곳인데 150년이 지난 후 에페소로 수도를 옮기는 바람에 몰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성지순례단은 꼭 들리는 곳이고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을 공부하던 곳이라서 의사들도 잘 가는 곳이란다. 또 지금 베라가모라는 상표가 유명한데 원래 이 지방에서 나는 가죽 제품을 가져다 팔다가 지명이 상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날씨는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내복을 벗지를 못하겠다. 감기 걸리기 좋은 날이다.
3월17일 일요일 이제 이번 여행도 막바지이구나 생각하니 아쉽다. 오늘 에게해를 건너야 하는데 내일이 1차 대전 때 케말파샤가 처칠을 이긴 승전기념일 이므로 배가 막힐 수 있다며 일찍 떠나자고 하여 4시 반에 일어나 5시에 식사를 하고 6시 반에 출발하였다. 8시에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에 도착하였는데 이곳도 로마군이 주둔하던 도시였는데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이란다. 그런데 독일 사람인 슐레이만 이라고 하는 분이 미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트로이를 발굴하고자 부인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는데 조건이 그리스인으로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고 했단다. 그래서 여하간에 부인을 만나고 같이 발굴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리스인지 알고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많은 고생을 하였고 나중에는 욕도 많이 먹었는데 마지막 시도로 발굴한 것이 다행히도 항구에서 트로이 도시로 들어오는 길과 문을 발굴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트로이 목마는 없고... 조형물로 하나 있는데 가림막이 있는 것을 보니 수리중인 모양이다. 그 사람은 왜 자기 돈을 들여 발굴을 하였을 까? 토질 측정결과 1기-9기 까지 있는데 트로이 유적은 6기에서 발굴되었는데 지진이 몇 번 있었는지 토질이 가지런히 되어있는 곳도 있고 뒤섞인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을 슐레이만이 독일로 가져간 것이 많은데 2차 세계대전 후에 러시아가 독일로 진주하면서 러시아로 가져가 지금은 모스크바에 있는 유물이 많은데 돌려달라고 해도 안 준단다. 이곳도 항구 근처였는데 토사로 항구가 멀어지고 말았단다. 에페소를 본 뒤라 그런지 아직 발굴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런지 여하간 에페소 만큼은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8시55분 출발하여 영화 트로이에 나왔던 목마를 구경하러 차낙칼레 라는 곳에 가서 간단히 사진을 찍고 옆에 있는 해시계도 보고.
9시 50분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이동하였다. 버스도 함께 이동하였다. 10시 15분에 건너편인 Eceabat에 도착하여 11시경에 식당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었다. 내일이 1차대전 승전기념일 이라고 하여 행사장에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곳곳에서는 행사를 하느라 분주하기도 하고 행사가 끝난 뒤라 지저분하기도 하고...이곳 버스에는 지붕에 둥근 것을 달고 다니는 버스를 볼 수 있는데 버스안에서 Wifi를 할 수 있단다. 참 좋은 세상이다. 3시 10분경 처음 묵었던 호텔로 다시 와서 짐을 풀고 3시 45분에 야경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스탄불이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이었는데 1,500년 전 쯤에 쌓은 성벽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당초는 20km였다고 한다.
탁심이라는 곳을 갔는데 우리의 명동거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면적은 약 3배 넓다고 한다. 탁심은 원래 물을 나누어 주던 곳이라는 뜻이란다. 여기서는 몇% 할인해 준다고 할 경우 %를 앞에 쓴다고 한다. 전차를 타고 잠간 가서 내려 1시간 자유시간을 주었는데 나는 전차를 타던 곳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거리를 구경하며 내려오다 보니 1시간이 되었다. 수민이 주려고 Swach시계점에 들려 만지작거리다 그냥 왔는데 나 보고도 담뱃불을 빌리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개 이런 사람들은 삐끼라고 한다. 다시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1정거장을 가서 내렸다. 걸어서 다리 밑 술집으로 가서 맥주를 한잔 하였는데 다들 일행과 앉으니 나는 합석할 곳이 없다. 젠장.. 서러워라. 나중에 가이드와 같이 앉았지만 계속 왔다 갔다 하느라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터키 아가씨는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고.. 이날 맥주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고등어 케밥도 맛있고.. 9시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소피아사원과 블루모스크 야경을 찍고 9시 반에 출발하여 졸다보니 호텔에 도착하였는데 시계를 보니 10시 50분이었다. 씻고 아이들에게 내일 밤 떠난다고 카톡을 하고 잤다. 여전히 날은 추워 내복에다 두꺼운 잠바를 벗지 못하겠다.
3월18일 월요일 5시 조금 지나 일어나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 15분에 출발하였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서운하다. 며칠 더 구경했으면 싶다. 호텔이 변두리이다 보니 시내로 가는데 월요일이고 출근 시간이라 많이 막힌다. 우선 톱카프 궁전을 갔는데 오스만제국시절의 왕궁으로 돌마바흐체 전에 사용하던 왕궁이다. 건물 입구에 거리 기준점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어있다.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여 구경만 하였다. 9시 조금 넘어 입장을 하였는데 다윗왕의 칼, 모세의 지팡이, 요셉의 손 등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새것 같고 조그만 해서 영 믿음이 가질 않았다.
왕이나 왕비, 왕족들이 입었던 옷이나 보석함 등은 화려함이 극치였는데 그런 걸 만드느라 백성들은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생각도 들고 어찌되었던 그래서 후손들이 지금 돈을 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시 그 유명한 그랜드바자르를 갔는데 바자르는 시장이라는 뜻이란다.
2002년에는 무척 커 보였는데 두 번 째 보니까 그런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떡 같이 생긴 것을 하나 사 먹고...이 시장이 1461년에 건설된 것이라니 ....시장입구에 할례(포경수술) 할 때 아이들에게 입히는 옷이 찬란하다. 이 사람들은 남자 아이를 어릴 때 포경수술을 강제로 시킨단다. 성소피아 사원 앞에 있는 블루모스크는 정식이름이 술탄마호멧사원인데 이슬람이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 소피아 성당보다 더 크고 멋있게 지으라고 하여 잘 만든 것이라고 하고 탑이 여섯 개인데 일설에는 왕이 전부 금으로 하라고 했는데 돈이 조달 되질 않아 금이라는 단어와 여섯 개라는 단어가 비슷하므로 지시를 받은 신하가 탑을 여섯 개를 세우고 왕이 문책을 하려고 하자 자기는 여섯 개를 만들라고 한 줄 알아들었다고 하여 책임을 모면하고 잘 만들었다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입구 쪽의 사진을 찍으려고 일행보다 일찍 나왔는데 사진을 다 찍고 기다려도 일행이 나오지 않아 밖으로 나와 보니 가이드가 저만치 가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달려가니 인솔자가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내가 나온 출구로 나오지 않았는데 인솔자 얘기는 내가 나온 곳은 신자들의 출입구란다. 어휴... 자칫하면 미아가 될 뻔했네.. 공연히 31번째 외국 나온 것이라고 떠들지나 말 것을 하는 후회도 들었다. 사원 바로 옆의 오밸리스크는 이집트에 있던 것을 빼앗아 온 것이고 오밸리스크가 있는 자리는 원래 전차경기장이 있는 히포드럼 이었다나...바로 옆의 푸른색 청동 제품은 뱀 형상의 동상이었는데 누가 목 부분을 잘라가 버렸단다.
이럭저럭 구경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에 들려 몇 가지를 사고 식사를 하고 공항에 도착하니 15시40분이다. 짐을 정리하고 수속을 밟고 안에 들어가니 할일이 없어 가져간 원고를 수정하다가 돌아다니다 선물가게에서 수민이 시계를 사고 선물 몇 개를 샀다. 예정 보다 조금 빠른 19시40분에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19일 12시22분 도착하였다. 짐을 찾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2시 조금 넘었다. 재미나고 유익한 여행이었다. 인솔자는 유럽 인솔이 8년차라고 하는 베테랑이고 현지 가이드는 아주 박식하여 무슨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고 몇 번 물어보았더니 그저 손님들이 하는 애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겸손하기 까지 하다. 아쉬운 것은 자격증을 가진 터키여자인 가이드가 한국말을 잘 하면 좋을텐데 간단한 말만 하니 대화가 되지 않는다. 가게에 있는 점원들은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일행 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말썽을 부리는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무 탈 없이 일행 모두가 웃으며 귀국한 것이 좋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하는 이야기는 <간단한 용어> 터키말로 아침 인사는 규나이든, 고맙습니다는 사울, 깎아주세요는 인드린이란다. 또 손가락 세 개를 흔들면 잘생겼다, 멋있다. 라는 뜻이란다. <터키에 대해> 터키는 국토 면적이 남한의 8배 정도이고 인구는 7,500만명이며 여기도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가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 땅도 많고 시골로 가면 빈집도 많다고 한다. 국토의 97%는 아시아에 있고 3%는 유럽 쪽에 있으며 원래 중국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흉노족, 돌궐족이 징기스칸에 쫒겨 여기까지 온 거란다. 그들은 원래 이곳에 살던 비잔틴을 몰아내었단다. 그래서 뿌리는 아시아이고 아이들에게 몽고반점이 있는 등 우리와 닮은 점이 많고 특히나 6.25전쟁에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형제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침은 거지같이 먹고 점심은 케밥이라고 하는 것으로 먹는데 케밥은 수천가지란다. 이번 여행 중 먹어본 중에는 고등어 케밥이 가장 맛이 있었다. 지금은 겨울의 끝자락에 있어 날씨가 변덕스러우며 5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고 한다.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루어 여행하기가 불편하다고 한다. 우리가 첫날 내린 공항은 케말파샤 공항인데 포화상태라 새로 공항을 건설하려고 준비 중이란다. 신공항이 있는데 그곳은 케말파샤의 수양딸 이름을 땄는데 그것은 그 수양딸이 이 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었기 때문이란다. 신도시를 지나갔는데 여기는 선 시공, 후 분양이라고 한다. 이스탄불은 그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던 곳인데 현재 인구는 1,500만명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앙카라는 케말파샤가 대통령이 된 뒤 수도로 정하고 계획도시로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11,000달라 정도인데 이스탄블은 3만 달러 정도이고 1터키 리라는 우리돈 600원 정도인데 2006년 화폐 단위를 조정한 것이라고 한다. 어째 이상하다 했지. 내가 2002년 여기 왔을 때 생수 한병이 25만리라인가 했었거든.. 이곳 사람들은 민물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주식은 밀이고 양고기, 소고기를 먹는다. 작년 관광객은 3,500만명이고 한국인은 15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 많이도 갔구나... 정치는 이원집정제인데 평시에는 수상이 정치를 하고 비상시에는 대통령이 정치를 하도록 되어있으며 현 수상은 3번째 연임 중인데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제2의 케말파샤라고 칭찬이 대단하다고 한다. 2023년 공화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EU에 가입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81개 주가 있으며 차량 번호 앞자리 두 개는 지역 번호이고 다음은 차량 종류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곳은 물이 나빠 치과가 유명하고 라식수술, 대머리 이식기술이 좋아 외국에서도 온다고 한다. <터키의 국부 케말파샤> 터키의 아버지, 터키의 국부(國父)라고 하는 케말파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여 초등학교 때 선생이 똑똑하다는 뜻의 케말이라고 불렀단다. 원래 이름은 다르단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는데 너무 똑똑하여 주위의 시샘을 받았고 왕은 무능해도 왕족이라고 호화롭게 사는 것이 못마땅하여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대령으로 있던 때 1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는 그리스군, 처칠등과 싸워 승리하여 명성을 높였으나 오히려 제대를 당하였단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는 독일과 손잡고 있었으므로 패전국이 되어 터키를 그리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분할하여 점령하려고 하자 그는 북부 지방으로 가서 혁명군을 모집하여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웠으며 지금의 터키 땅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슬람 국가면서도 프랑스와 독일 등의 문자를 모방하여 문자를 만들고 일부일처제를 만들었으며 이슬람 문화를 많이 부드럽게 하였다고 한다. 또 혁명 동지들이 많이 있는 앙카라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계획도시로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을 하여 오늘의 터키를 만드는 기초를 닦았으므로 국부(國父)로 추앙을 받는다고 한다. 군인 시절에 결혼했다가 2년만에 이혼을 하고 다시 결혼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수양딸 하나를 길렀는데 그가 이 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한다.
<이슬람교> 이슬람교도 기독교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아브라함이 정실부인한테서 아들이 없자 작은 부인한테서 <이스마일>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16년 뒤 정실부인이 <이삭>을 낳자 아브라함은 작은 부인과 아들 <이스마일>을 집에서 내 쫓았단다. 성경에는 <이삭>만 나온다. <이스마일> 후손 중에서 마호멧이 나왔는데 메카에 살던 마호멧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받으라고 하여 거절하였는데 나중에 또 나타나 계시를 받으라고 하여 자기는 글자도 모른다고 하였으나 그래도 계시를 받으라고 하여 답변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초생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즉 계시를 받고 처음 본 것이 초생달이란다. 그래서 이슬람교회에서는 초생달을 표시하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국기에다 초생달을 넣는다고 한다. 회교 사원 탑 꼭대기에도 초생달이 있고.. 마호멧이 메카에서 새로 종교를 열자 기존 세력들이 박해를 하여 메디아로 도망하여 선교를 하였는데 메카에서 메디아 까지 쳐들어가 마호멧을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전열을 정비한 마호멧이 반대로 메카를 쳐들어가 승리하고 2년 뒤 사망하였단다. 그의 사후 교회 수장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는데 4대 칼리프인 마호멧의 4촌이자 사위인 사람이 3대까지의 칼리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진 것인데 이 사람이 시아파의 시조라고 한다. 무슬림은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란 뜻이고 이슬람의 90%정도는 수니파인데 이 사람들은 마호멧만 메시아라고 하며 시아파는 마호멧 이후 12명의 이맘을 메시아로 존중한다고 한다. 수니파는 하루 5회 기도를 하고 시아파는 하루 3번 기도를 한다고 한다. 기독교처럼 10일조가 없고 종교관에 의거 본인이 알아서 돈을 낸다. 회교 사원은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며 가스, 전기도 무료라고 한다. 사제를 이맘이라고 하는데 공무원으로 지방정부에서 월급을 받는다. 사제는 결혼하며 하루 5번 기도하는 것을 생방송으로 하여야 한다. 기도할 때는 오는 대로 앉으며 앞으로 엎드려야 하므로 의자를 설치할 수 없고 남녀가 섞여 앉으면 엎드려 절을 하다 신체 접촉이 우려된다고 하여 남. 녀 좌석을 별도로 하는 것이란다. 부부도 기도하러 오면 남녀 따로 앉아야 한단다. 터키 국민 중에는 하루에 5번 하는 기도시간에도 안하는 사람이 많단다. 단 조금 말소리를 줄이거나 음악소리를 줄이는 등 예의를 표한다고 한다. 또 다른 이슬람 국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데 터키는 인정을 하고 미국과 아주 끈끈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낮에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메카를 순례하고 오면 <하지>라는 존칭을 붙인다고 한다. 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지참금제도는 지금은 없단다. 종전에는 여자는 밖에 나가 일을 하지 못하므로 남자가 죽었을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부모가 신랑한테 받아 딸에게 주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던 제도라고 한다. 우리는 부모가 갖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결혼관> 여기 젊은이들도 우리처럼 여자는 능력 있고 잘 생긴 남자를 원하며 남자는 여자의 미모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며 집은 남자 측에서 마련하고 살림살이는 여자 측에서 준비한다고 한다. 결혼식은 보통 오후 5시경에 하는데 주례가 없고 공무원이 와서 결혼이 본인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인지, 서로 사랑하는지 등을 묻고 사인을 받으며 증인도 사인을 하면 끝이란다. 그리고 피로연을 하는데 보통 새벽 2시 정도에 끝난다고 한다. 그 동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겁게 논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우리와 다른 문화이다. <장례문화> 죽으면 다음날 매장을 하며 화장은 없고 납골당도 없으며 개인묘지도 없단다. 동네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재벌도 똑같은 크기로 공동묘지에 묻힌단다. 시신은 집에 모셨다가 관을 가져와 운구를 하고 매장을 할 때 머리는 메카쪽으로 향하게 하며 관은 다시 가져와 또 사용한다고 한다. 장례 집전은 회교 사제가 한다. 봉분은 없고 직사각형으로 하고 비석을 세운다. 비석에는 죽은이의 아버지 이름을 넣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기일(忌日)에는 격식이 없으며 대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슬리퍼를 신고 가기도 하며 성묘도 없다. 죽은이가 사용하던 물건을 우리는 대개 태워버리는데 이 사람들은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 < 터키와 우리나라> 보스포러스 지하에 터널을 뚫고 있는데 한화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사를 하고 있다네.. 참 우리나라도 대단하다. 현대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라고 하니 대단한 숫자다. 오다가 현대 자동차 공장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곳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흑해 쪽에 원전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와서 준비를 하고 있단다. 우리나라 교민은 3천명 정도인데 회사 주재원과 가족, 선교사, 유학생 등이라고 하는데 무기 관련 상사원과 건설공사관련 종사자들이 많다고 한다. 1980년경부터 주재원 등으로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 교민의 시초이며 주로 이스탄불에 산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1년에 3,600만원 정도의 예금 실적이 있으면 거류증을 주므로 대체로 그렇게 살고 있으며 인종차별은 없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점은 있다고 한다. 한국식당은 8개가 있는데 에페소에 1개가 있고 7개는 이스탄불에 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내놔도 팔리지를 않는다고 한다. 음식 값이 현지식보다 비싸다고 한다. 아무래도 고춧가루 등을 한국에서 가져가야 하니 비싸겠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