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전력을 다해 집중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100편의 영화를 찍고 이제 막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의 개봉을 앞둔 임권택 감독을 M25가 어렵사리
만났다. “101번째 작품이 아니라 100번의 습작을 끝내고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감독의 첫 작품으로 봐 달라”는 임 감독의 말은 그간 이 거장이
얼마나 대단한 장인 정신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는지 살필 수 있는 단초에 불과했다. 에디터 김수연 포토그래퍼 이규열
틀을 부수고 모든 것을 열고
찍었다
신작
<달빛 길어올리기> 매체 평을 읽어보니 다들 “생각보다 재밌다”는 평이 많던데요. 속으로 기자들 괘씸하다는 생각 안 드셨나요. 한지라는 소재 때문일까 다들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웃음). 뭐 이런 식의 반응은 워낙 많아 왔으니까 괜찮아요, 허허허!
촬영 준비하면서
한지에 대해 얼마나 연구하셨나요. 내가 판소리와 동양화 등 우리 선조들이 이룬 흥과 정서를 다뤄왔는데 한지를 소재로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좋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지에 관해 1년 이상 취재하면서 많은 분을 만났지요. 준비 이후 4개월 동안
찍었는데 촬영 끝날 때까지도 많은 분들이 한지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한지의 깊고 넓은 세계를 겁도 없이 영화화한다고 대들었다는
경솔함을 느껴 후회도 했지만 이런 깊은 세계를 영화로 담을 수 있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내가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새마을영화를
찍으며 정권이 요구하는 주제와 소재를 영화에 강제로 담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는 생각에 마음의 걸림도 있었어요.
그러나 나 같은 나이 든 감독이라도 이런 영화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생각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한지의 정보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오고가는 이야기 구조가 생경했습니다. 영화를 100편이나 찍은 감독이 101번째 작품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품을 통해 내가 새로워지고 달라져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어요. 그 결심을
현실로 옮기는 방법으로 다큐멘터리 장르를 차용한 거지요.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 복원에 관계된 일을 맡게 된 7급 공무원의
지지부진한 일상을 담은 이야기에요. 그런 평범한 일상을 어떻게 재미있으면서도 힘 있게 찍어낼까를 고민하다가 다큐멘터리를 차용하게 된
겁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카메오를 보는 재미가 크더군요. 특히 감독님 가족 전원이 출연해서 시사회 전부터 화제였는데요. 내가 그렇게 몰아간 건 아닌데 그런 결과가 나왔어요(웃음). 나이가 들다 보니까 나
힘들까봐 근자에 집사람이 촬영장에 와서 나를 수발해 줄 때가 있어요. 집사람이 현장에 있을 때 단역 연기자가 펑크를 내버린 거죠. 나 모르는
사이에 연출부가 집사람한테 그 사람 대신 연기해 달라고 졸랐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집사람은 내가 그렇게 몰아가서 본인이 출연하게 된 줄
알더라고요(웃음). 그리고 둘째아이는 아버지로서 “저 놈이 연기자가 될 놈인지 아닌지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몇 컷에 출연시켜
봤어요. 연기력을 보기보다 몸 자체가 주는 맛이 배우로서 있나 없나 살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영화 찍다가 뒤에 한두 컷 정도 남았는데
이놈이 그때 미리 약속된 다른 영화를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내 현장에 못 오게 됐어요. 내가 애비라고 그거 무시하고 내
영화 현장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큰 애를 나오게 해서 그 역할을 마저 찍었어요. 다행히 큰 애가 작은 애와 비슷하게 생겨
대신 출연이 가능했지요(웃음).
감독님에게도
특별한 추억이 됐겠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내 영화에 나온 게 처음은 아니에요. <티켓>(1986)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설악산에 가족이 산책하며 지나가는 신을 찍어야 했던 적 있었어요. 그때 집사람이 우리 애둘 데리고 지나가는 행인 역할을 했지요(웃음). 물론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대사 있는
역할로는 가족들 첫 출연인데 연기시켜 보니 어떠셨나요. 집사람이 연기자로 출발했다가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연기를 그만두고 두 아이의
엄마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이번에 시켜보니 그렇게 살아온 집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억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일동 박장대소!). 내가
집사람한테 스스로 내린 인생의 선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이번에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이, 이런 이야기는 집사람 앞에서
해선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한데(웃음).
감독의 입장에서
보는 둘째 아드님의 연기는 어떠셨나요. 자질이 보이던가요. 처음에 둘째가 영화과를 지망한다고 했을 때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지가 가고 싶다고 하니까 반대는 안했지만요. 어느 날 촬영을 마친 나를 아들이 데리러 왔는데 차 속에서 내가 조마조마하면서 물었어요. “너 정말
영화배우 되려고 하냐?”고요. “그렇다”길래 나는 속으로 그 아이가 얼굴 좀 된다는 주변의 부추김에 놀아나 꽃미남 주연이나 생각하는 정도의 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둘째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카리스마 있는 악역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요. 그 순간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애가 눈이 좀 센
편인데 자기 외양에 대해 비교적 냉정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 헛바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네
애비고 영화감독이지만 내가 너를 도울 수는 없다고요. 내가 널 도우면 영화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미리 언질을 줬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아버지 도움 받을 생각 전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만 얘가 이름을 권 뭐시기(임권택 감독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연관성을 지우고 연기자로
평가받고 싶어 ‘권현상’으로 이름을 바꿨다)로 바꾸대. 허허허. 둘째랑 이번에 영화 찍어보니 애가 배우로서 모양새는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모양새
가지고만 배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정말 피 나오게 열심히 해야 제대로 된 배우가 되지요. 앞으로는 본인 여하에 달렸어요.
이번 신작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감을 여쭤 봐도 될까요. 나는 한 번도 내 작품에 만족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에요.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고통인데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그 허전한 데서 오는 홀가분함이 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대한 만족은 아니에요.
고통의 역사가 영화 인생의 자산이
되다
감독님의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 난 꿈이 없었어요. 어린 시절에 6·25 전쟁이 발발했거든요. 꿈을 꾸려면 생활 환경이 안정되고 사회
자체도 불안한 것이 없어야 하지 않나요. 게다가 우리 집은 아버지가 좌익으로 밝혀져 가족사도 복잡했어요. 그런 부모와 친척들 사이에서 살려니
어린 나이에도 고단했어요. 오죽하면 어떤 평론가는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임권택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유년시절에 꿈이 없었거나 그런 시절에
대해서 아예 무시해 버리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고요. 그러면서 그는 내 영화엔 동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열여덟 살에 집을 나와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압니다. 그것도 전쟁과 연결돼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가출한 거죠. 아버지가 좌익 쪽에
가담했다는 문제 때문에 가족을 포함한 일가친척이 전쟁 중에도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어요. 이런 환경에서 정신적으로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가출해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부산 가서 첫 사흘은 돈이 없어 굶었어요. 그리고 먹고살려고 막노동부터 시작했어요. 지게도 짐을 져
나르는 일을 했는데 돈이 없어 밥을 못 먹으니 힘이 없어 지게도 잘 못 졌어요. 그러니까 만날 일을 줄 때도 뒷전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지요.
그러다 우연히 군화 장사하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그분들이 군화 몇 켤레를 주고 그걸로 장사를 해보라고 나에게 기회를 줬어요. 그래서 국제시장
골목 아주 조그만 좌판에서 장사를 했는데, 몇 켤레 팔면 그걸로 겨우 밥을 사먹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장사엔 영 수단이 없는 사람이라
벌이도 신통치 않았죠.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그분들이 서울로 돌아가 <장화홍련전>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
딱한 사정을 봐준 분들이어서 나를 그 영화제작부에 넣어줬어요. 거기에서 (스승인) 정창화 감독님을 처음 만나게 됐어요. 참 신기했어요. 내
고향엔 영화관도 없어서 나와 영화는 그 어떤 인연도 있을 리 없는데 그런 내가 영화판에 가게 됐다는 게 말이죠. 그런데 그게 정말 내겐 큰
행운이었지요.
그럼 처음엔
영화가 꿈이 아니라 밥벌이였군요. 맞아요. 처음엔 밥벌이였어요. 일하는 동안 밥은 먹여준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간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이 좋아보였는지 정창화 감독이 내가 제작부 똘마니임에도 연출부 일도 시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세 작품의 소품 담당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 정 감독님이 홍콩에 가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을 찍고 세계적인
액션영화로 명성을 떨친 뒤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그 뒤로 난 본격적으로 감독님 밑에서 연출부로 일하게 됐지요.
그 뒤로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로 데뷔,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리셨습니다. 흥행감독이긴 했으나 당시 내가 만든 영화들은 미국영화의 아류를 찍은 것들뿐이었어요.
속된 말로 미국영화 베껴먹기. 그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체질화가 됐어요. 어느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런데 그 뜻을
세웠을 땐 정권의 외압 때문에 모든 창작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체제로 넘어가면서 엄청난 통제 속에서
영화를 찍어야 했어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큰 암흑기를 꼽으라면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난 그 암흑기를 가장 잘 보낸 대한민국
감독 중 한 사람이에요. 그 시대엔 정부가 영화 사업을 일종의 허가제로 만들면서 외화 한 편을 수입하려면 반공영화, 문예영화, 새마을영화와 같은
한국영화를 4편을 찍어야 그 권리를 줬거든요. 한국영화 한 편당 제작비가 4000만~5000만원했던 시기였는데, 수입영화 한 편을 사오면
4억~5억원 정도를 벌던 시기였어요. 1년에 틀 수 있는 외화가 20편밖에 안 되는데, 그 20편 안에 드는 외화들은 이미 해외에서 흥행이
검증받은 작품들이 들어오니까 당연히 흥행이 잘 될 수밖에 없었죠. 외화 수입만 잘하면 5억이 아니라 그 이상도 벌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제작자들이 외화 수입을 하기 위해 너도나도 마치 독립영화 만들 듯이 영화를 찍어대던 시기였지요. 그걸 기회 삼아 난 무지 열심히 찍었어요.
미국영화의 아류가 아닌, 제대로 된 한국영화를 찍으려면 나 스스로 그 때를 벗어야 했는데, 그 때를 벗는 데만 또 10년이 걸렸어요. 내가
해보고 싶은 작품들을 반공영화, 문예영화 카테고리 안에서 작가의식을 가지고 찍었는데 그렇게 찍다 70년대 마지막이 되니까 내 영화를 보려는 사람
수가 정말 줄었더라고요. 흥행감독에서 재미 없는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돌아선 거지요, 허허허.
대한민국 역사의
파란만장한 굴곡을 몸소 체험한 세대이십니다. 그 모든 체험이 영화에 담겨 있기도
하고요. 일제 식민치하, 해방 후, 6·25 전쟁, 5·16 혁명, 4·19혁명 다 겪으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험한 수난 속을
걸어야 하나 싶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후에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세월의 경험을 거의 다 영화에 담고 있었더라고요. 고통의 세월이 되레 내
영화 인생에서는 큰 자산이 됐던 거지요. 전 참 운이 좋았어요.
감독님의 영화
현장에는 큰소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스태프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데 어떻게 큰소리 없는 현장을 만들 수 있는 건가요. 큰소리 내봐야 소용없어요. 큰소리 내서 현장을 긴장하게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너무 큰소리를 내면 스태프들이나 연기자들이 정신적으로 위축돼요. 할 수 있는 만큼 기를 살려서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창의력의 베스트를 뽑아 낼 수 있도록 영화 현장의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내 지론이에요.
감독님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중첩되는 이미지는 ‘길’입니다. 그 이미지 구현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늘 떠도는 그런 삶, 서울에 분명 내 집이 있지만 정신 자체는 떠돌고 싶어 하는 나의
심리가 아마 길로 형상화 된 것 같아요.
스스로 말씀하시길
인생에 슬럼프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수준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듯 똑같이 찍어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때가 진짜 슬럼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는 내 영화를 뒤돌아 살펴볼 수 없을 만큼 계속 영화를 찍었어요. 그러니까 슬럼프를 느낄 틈조차 없어 슬럼프를 못 느낀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었던 건 아닙니다. 지금 돌아보면 다 불타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부끄러운 작품들도 있지만 촬영
당시에 그 모든 작품들을 정말 필사적으로 찍었거든요.
그렇게 슬럼프도
못 느낄 만큼 영화에만 매진했던 인생, 후회는 없으십니까.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치졸한 영화들을 많이 찍기도 했고,
뼈아프게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반성하고 스스로 체질 개선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내 인생에 그런 불건전한
삶(치졸한 영화를 찍던 시절의 삶)이 없었다면 건강한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성찰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별로 후횐 없어요.
내 약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가족에겐
어떤 남편이고 아버지입니까. 집사람 말로는 내가 집에 와 있으면 몸은 방 안에 있지만, 혼은 훨훨 날아서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사람
같다고 하더라고요. 아내에겐 내가 그런 존재였나 봐요(웃음). 그리고 애들한텐 무척 엄격했어요. 영화 찍느라 애들하고 함께할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엄격했던 것 같아요. 가정 교육이 부족해서 사회에 폐를 끼친다는 평가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어려서 두 아들 녀석들이 나한테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 속사정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첫 애를 마흔여섯 살에 보면 예뻐 죽는 게 당연지사인데 왜 그렇게 애들을 쥐 잡듯 잡냐고
했어요. 내 속사정도 모르고요. 우리 아들들은 그런 내 마음을 군대 다녀오니까 이해해 주더라고요(웃음).
가끔은 가족을
위해 간단한 요리도 하신다고요. 요리 TV 프로그램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에이, 요리라고까지 할 건 없고 통조림 같은 거 끓여내는 수준이에요. 요리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고요(웃음). 나한테 기자들이 만날 묻는 질문이 뭔 줄 알아요? 영화감독 안했으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냐고요.
사실 내 입장에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해요. 평생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는 사람이라 영화감독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상상조차 해본 적 없거든요. 그런데 집사람이 그러는데 내가 요리 프로그램 볼 땐 빠져들 듯 본다고 하대요. 요리하는 장면을 보면 맛을 내기 위해
요리사가 여러 향료와양념을 집어넣잖아요. 얼핏 보기에 무척 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맛을 내기 위한 엄청난 노하우들이 보이지않게 숨겨져 있다고
봐요.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게 무척 즐겁더라고요. 그렇게 보고 나서도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없지만요(웃음). 그런데 나는 영화밖에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예요. 그런 약점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아요. 영화밖에 할 줄 모르니 영화하다가 밀리면 생업을 잃는다는 절대절명의
생각으로 살아왔거든요.
좋은 영화의
요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좀 구식이에요. 인간에게 정서적으로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흥을 일으키고, 거기에 즐거움도 주는
게 영화입니다. 총체적으로는 인간에게 밝고 건강한 정신을 기여해 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사회악을 들춰내서 단죄하는
식으로 몰아가는 영화들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 삶을 어두운 면으로 몰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영화가 그런 어두운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일흔여덟 살의
감독 임권택이 꾸는 꿈은 무엇입니까. 일흔여섯인데….
앗, 1934년
생이시니까 일흔여덟 되신 것 아닌가요? 무슨 소리? 호적상의 나이로 가야지요(웃음)! (임권택 감독은 호적상 1936년 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일흔여섯 된 거예요. 하하하. 글쎄 난 영화밖에 할 줄 모르잖아요.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세월 동안 영화를 접고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놓치지 않고 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건강해야겠죠. 혹시라도 치매 같은 것에
걸려서 영화제작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꿈을 가질
수 없는 나이긴 하지만 그런 불행이 내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은 가져봅니다. 굳이 내게 꿈을 묻는다면, 부산에 임권택영화대학교가 생겼어요.
학생들과 내 영화 인생을 같이 이야기해볼 시간들을 가져보려고 해요. 거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도움이 돼서 앞으로 좋은 영화인이 나와
준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꿈의 결과물이 어디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