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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어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병풍뒤곶감
거짓 또는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
<출생과 가난 부분>
1. 자서전 내용 #1
“아버지(이충우)는 포항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경북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농사꾼 집안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작은 땅 뙈기는 두 형에게 돌아갔으므로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 . 1935년 고향친구 몇 사람과 함께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고용됐다. (중략) 아버지는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이 몸에 밴 전형적인 양반타입이었다.”(자서전 37-38쪽)
거짓내용#1: “아버지 지(이충우)는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이 몸에 밴 전형적인 양반타입이었다.”
거짓이유: 갑제1호증은 일본시대에 작성된 원 호적입니다. 갑제2호증 및 제3호증은 위 호적의 중요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 호적을 보면 ‘거짓내용#1’의 글이 아버지를 미화하기 위해 거짓으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충우로 알려진 아버지 이름은 호적상 원래 ‘이덕쇠’(李德釗)입니다(갑1,제2쪽 제3항). 당시를 살았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나, 옛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들을 보면 하인들 이름에 ‘쇠’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마당쇠’ ‘떡쇠’ ‘돌쇠’ ‘꺽쇠’ 등이며, 옛날을 살았던 많은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덕쇠는 떡쇠로 불리던 이름을 일본인들이 한문으로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명박 부친의 이름은 덕쇠였다!
자서전 44쪽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집은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씩은 더 큰 장신집안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큰형, 둘째 형, 세 사람은 180센티미터에 가까운데 유독 나만이 173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기골이 장대한 사람을 당시에는 떡쇠라 불렀다 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덕쇠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소화 14년(1939)인 33세에 이름을 충우로 개명했고(갑1, 제1쪽, 제3항), ‘이유’ 란에는 ‘허가에 의해 이름을 덕쇠에서 충우로 바꾸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내용을 생략하거나 사실 그대로 소개했다면 오히려 그 순수성에 감동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유교풍의 양반 타입으로 묘사한 것은 분명한 미화작업인 것입니다. ‘덕쇠’라는 이름은 ‘유교풍의 양반’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거짓내용#2: “작은 땅 뙈기는 두 형에게 돌아갔으므로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중략) .1935년 고향친구 몇 사람과 함께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고용됐다.”
거짓 이유: 갑제1호증, 일제시대의 호적에는 이덕쇠의 맏형인 ‘이무특’의 자손 8남매에 대한 기록들이 질서 있게 정리돼 있습니다. 갑제3호증은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이무특은 1924년 9월까지 포항에서 2남매를 낳았고, 10년 후인 1934년부터는 일본 오사카에서 6남매를 낳았습니다. 8남매 중 6남매가 오사카에서 출생한 것입니다. 호적을 보면 이덕쇠의 맏형인 이무특은 1924년과 34년 사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사진....일본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있다.
月山 明 博 (츠키야마 아키히로)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호적을 보면 이무특은 1934년 이후 일본 오사카(大阪市 住吉區 平野市町 21目47번지)에 살았고, 이덕쇠 역시 오사카(大阪市 住吉區 松田町 2丁目 9번지, 갑1, 제5쪽, 제4항)에 살았습니다. 두 형제들이 같은 시기에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본가문이었던 것입니다.
자서전에는 이명박의 부친(덕쇠)의 3형제 중 형들 2형제가 땅뙈기를 나누어 갖고, 3형제 중 막내인 그의 부친(덕쇠)만 일본으로 갔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호적의 기록사항과는 사뭇 다릅니다. 갑제1호증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이덕쇠의 바로 위의 형인 이경특만이 1934년에 영일군 덕성동 그의 아버지 주소 옆으로 분가하였습니다(갑1, 제2쪽). 이명박의 아버지 이덕쇠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1935년 이전에 할아버지의 땅뙈기에서 농사를 지은 사람은 3형제 중 오직 한 사람 이경특(2남)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뙈기가 두 형에게 돌아갔고, 3형제 중 이충우 혼자만 친구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허위입니다.
만일 자서전이 사실대로 쓰여졌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이명박의 가문을 친일파 가문이라고 비난했을지 모릅니다. 이명박은 이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서전을 사실과 다르게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자서전 내용#2
“1935년 고향친구들 몇 사람과 함께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 고용됐다.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를 짜고 목초를 베고 축사를 돌보는 목부였다. 고향 땅 머슴살이보다 더 고달프고 서러운 생활이었으나 아버지는 부지런하게 일에만 전념했다. 저축도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아버지는 잠시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반야월채씨 집안의 딸을 신부로 맞았다. 신혼부부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타향살이 속에서도 여섯 남매를 낳아 키웠다. 막내 동생 상필은 고향에 돌아와 태어났다.”(자서전 38쪽)
앞줄에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이명박의 부친
거짓내용#3: “1935년 고향친구들 몇 사람과 함께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 고용됐다.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를 짜고 목초를 베고 축사를 돌보는 목부였다. 고향 땅 머슴살이보다 더 고달프고 서러운 생활이었으나 아버지는 부지런하게 일에만 전념했다. 저축도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아버지는 잠시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반야월채씨 집안의 딸을 신부로 맞았다.”
거짓인 이유: 갑제1호증에 의하면 ‘아버지가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는 1935년에는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 이미 세 아이들이 태어나 오사카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거짓인 것입니다.
갑1호증에 의하면 장녀 귀선이 1930년 1.11일에 일본 오사카시(大阪市 住吉區)에서 태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첫딸을 나은지 14개월 후인 1931년 3월28일에 이덕쇠와 채태원이 결혼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1933.6.15.에는 둘째 아들 상은을 오사카(大阪市 中河內郡 長吉村)에서 낳았고, 이어서 1935.11.29.에는 셋째 아이 상득을 같은 번지에서 낳았습니다.
기록이 이러한데도 이명박의 자서전은 ‘아버지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고, 거기에서 자리 잡고 돈 벌어 포항에 나와 채씨와 결혼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1935년에 낯선 일본 땅에 가서 자리를 잡고 고향인 영일군에 가서 장가를 들 정도의 돈을 모으려면 아마도 예를 들어 194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의 고향 일본 오사카(大阪市 住吉區 松田町 2丁目 9번지)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김영사)는 1995년 1월부터 2007.1.28일자에 114쇄가 나와 판매되었습니다. “자서전을 보니까 이명박은 너무 훌륭해”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서전을 사실과 다르게 거짓 미화해서 썼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짓내용#4: “신혼부부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타향살이 속에서도 여섯 남매를 낳아 키웠다. 막내 동생 상필은 고향에 돌아와 태어났다.”
거짓이유: 자서전은 일본에서 6남매를 낳았다고 썼지만, 갑1호증을 보면 4번째 아이인 ‘귀애’는 포항에서 낳았습니다. 채태원은 일본에서 3남매를 낳은 후 갑자기 영일군으로 와서 넷째 아이 ‘귀애’(1938년생)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섯째인 명박(1941년생)과 여섯째인 ‘말분’(1945년생)은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채씨가 귀국하여 영일군에서 귀애를 낳았을 때, 채씨에게는 4살, 6살, 9살 박이 아이들이 딸려 있었습니다. 장자인 ‘상은’이 취학할 나이였습니다. 바로 이 사실들은 명박과 말분이 여타의 남매들과 배가 다를 수 있다는 개연성이 담겨 있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을 철저히 검증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출생에 의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거짓으로 미화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대통령으로 뽑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출생에 관한 의혹을 분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채태원씨가 오사카에서 포항으로 돌아와 1938년에 넷째 아이 귀애를 낳았을 때 4,6,9살 박이 아이들이 모친을 따라 포항에 왔느냐,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귀애를 포항에서 낳은 후 채씨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느냐, 아니냐는 출생의혹을 밝히는 중대한 대목이 됩니다.
5째인 ‘명박’과 6째인 ‘말분’은 분명 오사카에서 출생했고, 이 두 이이들의 이름이 돌림자를 이탈하였습니다. 딸의 경우에는 ‘귀’자 돌림, 아들의 경우는 ‘상’자 돌림입니다. 그런데 유독 1938년 채씨를 고향에 보낸 이후 일본에서 낳은 두 남매는 모두 다 돌림자가 아닙니다. 이명박은 자서전 37쪽에서 식구들의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큰 누님 귀선, 큰형 상은, 둘째형 상득, 작은 누이 귀애, 그리고 나, 여동생 귀분 등 우리 대식구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 하략”
하지만 이명박은 호적상 엄연히 기록돼 있는 ‘말분’을 ‘귀분’으로 고쳐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이는 4째인 귀애를 포항에서 낳은 후, 일본에서 낳은 두 남매만이 돌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닉’하기 위해 쓴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들이 “어째서 이명박씨는 돌림자를 쓰지 않고 다른 이름을 지었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이명박은 어머니의 태몽 꿈(밝고 큰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다)에 따라 돌림자를 쓰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갑5, 129쪽). 그러나 돌림자를 사용하지 않은 아이는 이명박 한 사람 뿐이 아니라 이명박의 바로 밑 동생인 ‘말분’(1945년생)에도 해당합니다. ‘말분’이 돌림자가 아닌데 대해서는 무엇이라 해명할지 궁금합니다.
1938년 채태원씨가 넷째 아이인 ‘귀애’를 낳고 다시 일본에 가지 않았다면 ‘상은’과 ‘상득’은 영일군 덕성동 근방의 초등학교를 다녔을 것입니다. 이충우씨의 가족은 1945년11월에 오사카에서 영일군으로 왔다 합니다. 1938년 이후부터 1945.11월 이전에 이상은과 이상득이 영일군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증거가 있으면 채씨는 포항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돌림자가 유독 다른 ‘명박’과 ‘말분’은 다른 여인이 낳았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법원은 이명박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명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1941년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무더기로 사망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넘쳐나고 남성들은 고갈돼 있던 시대가 바로 1941년 이후였습니다. 일본 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고관대작들은 여러 명의 여인들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축첩이 바로 신분이었습니다. 이럴 때 첩실이 아이들을 낳을 경우 첩실이나 본 부인 모두 다 돌림자를 쓰기 싫어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신청인은 첩의 자식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시중에는 ‘배다른 형제’라는 의혹이 일었고,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밝혀달라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무차별 고소-고발을 하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에 이명박 스스로가 밝히지 않는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의 자서전 ‘신회는 없다’에서 이명박이 어머니와 관련해 쓴 구절들을 모아보면 ‘명박’과 ‘말분’만이 유독 채씨 부인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채씨의 7남매 중 넷째와 일곱째 아이는 6.25 전쟁 중에 사망했습니다. 그러면 ‘명박’과 ‘말분’이 귀여운 막내들이었습니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의 통념입니다.
그러나 채씨는 ‘명박’을 희생양으로 삼아 살림 돈을 벌었고, 서울에 큰 아들들의 학비를 댔습니다. ‘명박’에게는 학교에 다닐 시간도 내주지 않았고, 돈도 일체 내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건강한 몸으로 돈을 벌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명박’과 ‘말분’만 고향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쌀값을 너무 적게 보내주어서 배를 곯다가 참지 못해 졸업을 앞두고 남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어린 남매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1부1처의 통상적인 가정 통념에서 많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남매가 서자였을 개연성 하나가 더 추가되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서전 내용들을 아래에 정리합니다.
1) “형님들이 먼저 상경하고 부모님마저 서울로 갔을 때, 여동생(말분)과 둘이 고학하며 끼니를 구해야 했던 포항의 앞바다는 무심하게도 푸르렀다”(자서전 15쪽 하단)
2) “우리 집은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씩은 더 큰 장신집안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큰형, 둘째 형, 세 사람은 180센티미터에 가까운데 유독 나만이 173센티미터의 단신이다. 그런데도 내 팔의 길이는 보통사람들보다 10센티미터는 더 긴 편이다. 성장기 무렵 영양실조로 쓰러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성장하였다면 나도 형들만큼은 클 수 있었으리라. 어쨌든 나는 ‘팔이 긴 아이였다.” (자서전 44쪽 하단)
3) “어머니의 기도는 독특했다. 나라와 사회가 불안하지 않도록 기도한 후에 일가친척들의 안녕을 부탁했다. 그 다음 동네 이웃들의 행복을 빌었다. 아픈 집, 실패한 집, 옆집과 싸운 집, 등을 일일이 대면서 다 잘 되기를 빈 다음,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 형제들의 이름이 나왔다.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한마디의 기도도 하지 않았다. 우리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었지만 언제나 남에 대한 것이 먼저였다. 형제들에 대한 기도도 형과 누나들의 것은 길었지만 맨 마지막인 나는 늘 정해진 한 마디였다. ‘은이는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득이는 곧 시험을 치르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게 해주시길 바라오며 . .우리 박이는 튼튼하게 자라게 해 주십시오’. 나에 대한 기도가 짧은 것은 나의 위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동지상고 재단이사장의 목장 일을 한 덕분에 큰 형과 둘째 형은 동지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었고, 장사에 능했던 큰 형은 일찍이 집을 떠났다. 수재였던 작은 형은 집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막내인 나는 포항에서 부모님을 도와 형의 학비를 대야 하는 신세였다”(자서전 45-46쪽)
4) “부모님은 둘째 형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기 위해 포항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에 매달려야 했다. 나는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넉 달이나 누워있었지만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자서전 48쪽)
5) “어머니는 둘째 형 등록금 마련이 최대의 과제여서 이웃을 만나면 한숨을 짓곤 했다. 나는 말이라도 꺼내보자는 생각으로 담임선생님이 오신다고 어머니께 전했다. 어머니는 국화빵을 굽다 말고 먼데로 눈을 돌렸다. ‘우리 형편에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형이 대학에 떨어진다면 몰라도 . .꼭 가고 싶으면 국비로 공부시키는 체신고등학교에 가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장사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으냐, 이 장시 어미 혼자는 못한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 . 나는 가난과 형들이 원망스러웠다.”(자서전 49쪽)
6) “집안 사정을 들은 선생님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서울 1류 고등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북고는 갈 줄 알았다. 너무 아깝구나. 무슨 수가 없을가? 그래, 포항에 동지상고라는 야간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라도 가라. 네가 지금 어려서 모르겠지만 생을 살아가는 데는 중졸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담임선생님의 의견을 어머니께 전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단호했다. ‘너는 장사해서 형을 도와야 한다. 장사해서도 잘 살 수 있는 거야.’ 담임선생님과 어머니의 공방전은 오래 갔다. 양쪽의 말을 전하는 나 역시 힘들었다. 어머니는 낮에 일 할 수 있는 야간고등학교라도 월사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는 학생에겐 등록금이 면제된다. 너는 할 수 있다’. 선생님의 마지막 제의를 어머니는 받아 들였다. 돈이 들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약속을 하나 하자. 학교에 다닐 시간은 주겠다. 대신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니는 거다.’”(자서전 50쪽)
7) “내가 3학년(고교)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서울에 있는 둘째 형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동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포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부모님은 서울에 가서 발붙일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절간 집은 물론 장사도구도 다 팔았다. 나와 여동생에게 작은 방 하나를 구해주면서 서울 가서 쌀값은 보탤 테니 염려 말라는 말만 남기고 부모님은 포항을 떠났다. 포항에 남은 여동생과 나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 졌다. 쌀값은 보내겠다는 어머니는 매달 돈을 부쳐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돈은 충분하지 않았다. 말이 밥이지 후르룩 마셔야 할 정도로 묽게 죽을 쑤지 않으면 한 달을 먹을 수 없었다. 늘 허기에 시달렸다. 참다못한 여동생은 열흘이라도 실컷 먹고 나머지 스무날은 굶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면 꼭 죽을 것만 같았다. 폐종이를 구해서 봉투 30개를 만들었다. 거기에 양식을 똑같이 나누어 담아 두고 동생에게 하루에 봉투 한 개씩만 죽을 쑤도록 했다. 지금도 동생은 나를 만나면 ‘그 때 오빠 참 지독했어. 난 가출하려고 했었어’라며 쓴 웃음을 짓는다. ”(자서전 56쪽)
8)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팔기도 하고 행상도 틈틈이 했으나 가난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1959년12월,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나는 동생과 함께 서울가는 기차에 올랐다. . .서울행 기차에서 나는 망막했다. 포항에서의 19년이 힘에 겨운 것이었지만, 서울에 간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부모님도 아직 기반이 튼튼한 것 같지 않았다.”(자서전 57쪽)
9) “어머니는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딱 한번 면회를 왔다. 1964년 9월말이었다. . . .‘명박아, 나는 네가 별 볼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 말로 대단한 놈이구나,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대로 행동하거나. 어미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어머니가 면회 와서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나를 인정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철창보다 더 단단한 침묵이 흘렀다. . . 시간 더 남았습니다. 모자 상봉치고는 너무나 싱거웠는지 . . 교도관이 어머니에게 면회시간이 5분 더 남았다고 일러주었다. ‘얼굴 봤으니 됐소.’ 어머니는 이런 분이었다.”(자서전 82쪽)
3. 자서전 내용#3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꿈을 이룬 것이었다. 드디어 ‘대학중퇴자’가 된 것이었다. 이태원 시장 사람들도 기뻐하면서 등록금은 마련되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등록금이 필요 없습니다. 합격만 하면 대학 중퇴이니까 됐습니다’. ‘무슨 소리야, 최소한 한 학기는 다녀야 중퇴지, 합격하고 등록을 안 하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알아보니 과연 그랬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했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에 봉착한 것이었다. 어디에서 등록금을 구한 단 말인가. .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길이 뚫렸다. 내 사정을 알게 된 이태원 시장 사람들이 고맙게도 일자리를 하나 주선해 주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시장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잘만 하면 등록금은 해결될 듯싶었다. . (중략) . 쓰레기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중략) .콜트장군 동상을 지나 . (중략) . 공터에 버리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 일은 새벽에 여석 번이나 반복해야만 끝이 났다. (중략). 1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는 쓰레기를 치우며 2학년이 되었고, 3학년 때에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기에 이르렀다.”(자서전 61-62쪽)
거짓내용#5: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에 봉착한 것이었다. 어디에서 등록금을 구한 단 말인가. (중략).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길이 뚫렸다. 내 사정을 알게 된 이태원 시장 사람들이 고맙게도 일자리를 하나 주선해 주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시장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잘만 하면 등록금은 해결될 듯싶었다. (중략). 쓰레기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중략) 콜트장군 동상을 지나 (중략) 공터에 버리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 일은 새벽에 여석 번이나 반복해야만 끝이 났다. (중략) 1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는 쓰레기를 치우며 2학년이 되었고, 3학년 때에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기에 이르렀다.”
거짓이유: 자서전에는 이명박의 부모가 일체 학비를 대주지 않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아래 자서전 내용에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3학년(고교)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서울에 있는 둘째형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동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포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부모님은 서울에 가서 발붙일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절간집은 물론 장사도구도 다 팔았다. 나와 여동생에게 작은 방 하나를 구해주면서 서울 가서 쌀값은 보탤테니 염려말라는 말만 남기고 부모님은 포항을 떠났다. 포항에 남은 여동생과 나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 졌다. 쌀값은 보내겠다는 어머니는 매달 돈을 부쳐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돈은 충분하지 않았다. 말이 밥이지 후르룩 마셔야 할 정도로 묽게 죽을 쑤지 않으면 한 달을 먹을 수 없었다. 늘 허기에 시달렸다. . . 폐종이를 구해서 봉투 30개를 만들었다. 거기에 양식을 똑같이 나누어 담아 두고 동생에게 하루에 봉투 한 개씩만 죽을 쑤도록 했다.”(자서전 56쪽)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팔기도 하고 행상도 틈틈이 했으나 가난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1959년12월,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나는 동생과 함께 서울 가는 기차에 올랐다. (중략). .서울행 기차에서 나는 망막했다. 포항에서의 19년이 힘에 겨운 것이었지만, 서울에 간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부모님도 아직 기반이 튼튼한 것 같지 않았다.”(자서전 57쪽)
이명박은 고려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은 후 시장통 사람들이 마련해준리어카 일거리로 대학교 등록금을 댔다고 합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등록금을 내기까지는 통상 1개월, 길어야 2개월입니다. 그런데 새벽의 짧은 시간(리어카 6회 왕복시간)에 걸쳐 ‘리어카’를 끈 대가의 돈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낼 정도로 대학교 등록금이 쌌다면 당시 누군들 등록금 걱정을 했겠습니까? 시골에서 등록금은 소 팔고 논 팔아 대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지금은 옛날 그 시절보다 등록금이 싼 편입니다. 지금도 2개월간 날품을 팔아 대학등록금을 벌었다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되는 데 하물며 옛날에 그랬다는 것은 더욱 황당한 거짓말로 이해됩니다.
또한 1964.10.3일자 고대신문(갑제6호증)에 의하면 이명박은 1964.10.1. 보석으로 석방됐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에도 이태원동 시장통에서 리어카로 돈을 벌어 학비를 댔다던 이명박에 무슨 돈이 있어서 보석금을 냈다는 것인지, 이 역시 황당합니다.
이명박의 자서전에는 이명박의 가문이 왜곡-미화돼 있지만, 미화할 수 없는 사실들이 더 있습니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55세에 별세했고, 당시 이충우씨는 57세였습니다. 그 때 첫딸 귀선은 35세, 상은은 32세, 상득이 30세 그리고 명박은 24세였습니다.
새 호적을 보면 채태원씨는 1964.12.15일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에서 사망했고, 사망신고는 1972년 2,22일, 이귀선의 남편 김갑원씨가 했습니다. 사망신고가 만 8년이나 지연된 것입니다. 사망신고가 이렇게 상식을 초월할 만큼 지연된 것도 이해되지 않고, 사망신고를 아버지가 하지 않고 맏사위가 한 것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충우씨는 1982년9월 21일, 75세로 경기 이천군 호법면에서 사망했습니다(영일농장). 이 이상한 사실에서 많은 짐작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부인이 사망했어도 모를 만큼 혹시 이충우씨가 부인 채씨와 왕래하지 않고 별거하는 사이로 지낸 것이 아니었을까? 혹시 맏딸과 채씨가 충우씨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을까? 사망신고를 빨리 하면 재산이 이충우에게 빨리 갈 것이고, 그게 싫어서 사망신고를 질질 끈 것은 아니었을까. . . .만일 별거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세간의 루머처럼 배다른 형제 문제로 이충우와 채씨 사이에 사이가 벌어진 것은 아닐까 . . .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 비정상적인 일에는 의혹과 상상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원인은 이명박이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질문자들에게 신경질을 내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고소하는 등의 이상 반응을 보이며 신뢰를 잃은 데에 있습니다. 이명박이 바로 의혹을 부른 장본인인 것입니다.
당시의 한강맨션은 지금의 타워팰리스에 비견될 수 있는 호화 아파트였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누나가 잘 살았고, 이상득은 부모 등의 지원으로 서울대에 갔는데 이명박만은 그토록 눈물 나게 고생을 하고 자랐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울러 57세의 아버지와 32세의 맏형, 30세의 둘째 형은 무엇 때문에 부인 또는 어머니의 죽음을 호적에 기록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만 8년씩이나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것은 가족회의의 결과이지 몰라서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의 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을만한 고도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병역 조작-미화 부분>
자서전에 나타난 병역부분은 극도로 조작-미화돼 있습니다. 리어카를 끌다가 너무 힘이 들어 공백기를 갖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려고 자원입대하였으나 군의관으로부터‘이렇게 망가진 몸’은 군대에서 받아줄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병역이 면제되었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 다 동원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군대를 기피하는 마당에 이명박만은 군대에 가고 싶었어도 가지 못했다는 아름다운 줄거리로 쓰여진 것입니다. 이는 사실과는 너무나 다르게 미화돼 있습니다.
4. 자서전 내용#4
“아무리 젊은 나이라 해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나는 군 입대를 탈출구로 삼았다. 의식주 걱정은 안 해도 되고,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정신적 여유도 생길 것이었다. 재충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중략) . 2학년1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나는 자원입대했다. (중략) . 군의관은 내 몸 여기저기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네 몸이 어떤 상태라는 걸 모르고 여길 왔는가?’ (중략) . 쯧, 너 임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 도대체 나이 스물밖에 안 되는 놈이 몸을 어떻게 글렸기에 이 모양이야, 정밀검사 받아 봐.’ 정밀검사 결과 내 몸은 정말 엉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관지가 형편없이 늘어져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병명이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중략) . 군의관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관지 확장증은 근본적인 치유가 불가능하다. 과로하면 열이 심해서 훈련을 받을 수가 없다. 게다가 축농증도 악성이다. 그 몸을 끌고 지원하다니 군을 무슨 요양소로 알고 왔나?’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쫓겨나왔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을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중략) . 훈련소에서 쫓겨나온 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중략) . 어느 정도 회복되어 한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자서전 64-65쪽)
거짓내용 #5: “2학년1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나는 자원입대했다. (중략) 군의관은 내 몸 여기저기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네 몸이 어떤 상태라는 걸 모르고 여길 왔는가?’ . (중략) 쯧, 너 임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 도대체 나이 스물밖에 안 되는 놈이 몸을 어떻게 글렸기에 이 모양이야, 정밀검사 받아 봐.’ 정밀검사 결과 내 몸은 정말 엉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관지가 형편없이 늘어져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병명이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중략) . 군의관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관지 확장증은 근본적인 치유가 불가능하다. 과로하면 열이 심해서 훈련을 받을 수가 없다. 게다가 축농증도 악성이다. 그 몸을 끌고 지원하다니 군을 무슨 요양소로 알고 왔나?’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쫓겨나왔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을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중략) . 훈련소에서 쫓겨나온 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중략). . 어느 정도 회복되어 한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거짓이유: 위 글은 이명박의 병역사항에 관해 쓰여진 자서전에서의 유일한 글입니다. 이 글에는 이명박은 군대에 가고 싶어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생으로 인해 중병이 들었기 때문에 부득이 면제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사실과는 달리 이명박을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담당관 도장도 찍히지 않은 이명박의 병적기록표
그러나 사실들을 살펴보면 이명박의 병역부분은 ‘의혹’의 차원을 넘어 ‘확실한 병역부정’으로 생각될 만큼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2학년 1학기에 자원입대했다는 말은 거짓이며, 이는 의도된 거짓으로 보입니다. 이명박은 1962년(2학년)에 입대한 것이 아니라 1963.8.15에 입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명박이 스스로 밝힌 자료와 병무청자료에서 확실히 밝혀진 사실입니다. 갑9호증 제3쪽에는 1963.8.15에 논산훈련소에 자원입대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갑제10호증 1쪽에서도 1963.8.15로 되어 있습니다. 병무청 기록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돼 있습니다.(갑5, 131쪽).
오래 된 역사를 회상하는데 1년 정도는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숨기고 싶어 하는 의도가 개입됐을 것이라는 게 신청자의 판단입니다.
만일 이명박이 그가 3학년이었던 1963년에 훈련소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자서전에 쓰면 그 후의 이야기들이 뒤틀리게 됩니다. 저서전의 말대로 이명박이 논산훈련소에서 쫓겨난 후 곧장 1개월간 입원을 했다면 그날은 1963년 9월 15일 경이 됩니다. 그런데 갑제7호증으로 제시된 1963.9.21.자 고대신문을 보면 1963년 9월경, 이명박이 이미 상과대학 학생회장 후보자로 등록돼 있었습니다. 단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면 과대표에 먼저 당선돼야 합니다. 이는 이명박이 9월 중순 이전부터 이미 선거운동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자서전 제68쪽을 보면 “나는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은 채 등록부터 해놓은 뒤 고향친구들을 만났다. 이태원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막걸리 잔을 돌리면서 내가 출마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자(하략)”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963.8.15에 기관지 확장증 고도와 악성축농증을 앓아서 병역까지 면제받고 곧바로 병원에 가서 1개월간 있다가 동년 9.15.경에 나왔다는 사람이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대포를 마시고, 연일 소리를 질러가면서 선거연설을 한 후,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됐다는 것은 무협지보다 더 황당한 일입니다. 이런 왕성한 활동과 음주는‘기관지확장증 고도’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반 국민은 ‘기관지확장증고도’가 무슨 병인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 의사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니 당시 ‘기관지확장증 고도’라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확률이 매우 낮다고 말합니다. 숨이 가쁘고,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하고, 가래를 뱉어내기에 여념이 없으며, 심해지면 수술을 해서 목에 구멍을 내는 무서운 병이 바로 ‘기관지확장증 고도’라는 것입니다.
야후 백과사전(갑12)을 보면 이렇게 설명돼 있습니다.
“기관지가 원기둥 모양 또는 주머니 모양으로 확장됨에 따라 일어나는 호흡기 질환이다. (중략) 주요 증상으로는, 대량의 고름성 담(痰)이 나오고, 때로는 객혈(喀血)을 하며 국소성 폐렴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확장된 기관지 내에는 분비물이 고이기 쉬우며, 배출되기가 어렵다. 일어날 때나 자세를 바꿀 때 기침과 함께 대량의 객담을 하는데 1일 수백㏄가 될 때도 있다. 담의 저류는 세균감염의 원인이 되고, 발열·식욕부진·체중감소 등을 볼 수 있으며, 때로는 폐렴이나 흉막염(胸膜炎)·농흉(膿胸) 등을 불러일으킨다. 치료로는 담의 배출을 촉진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흡입요법이나 거담제(去痰劑)의 복용, 또 담이 배출되기 쉬운 자세를 취하는 체위배담법(體位排痰法)을 행한다. 그 밖에 병소가 국한되어 객담량이 많고 혈담(血痰)이나 객혈이 반복될 때에는 수술에 의한 절제가 행하여진다.”
이는 자연 치유될 수 있는 병이 아니며 술과는 상극이라 합니다.
‘기관지확장증 고도’가 되면 자각증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한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성 축농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한 ‘악성축농증’을 앓는 사람역시 나오는 누런 코를 주체할 수 없어 하고, 골이 쪼개질듯 아픈 등 고통에 시달립니다. 이 두 가지 병을 동시에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이 자각증서를 느끼지 못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상식입니다.
또한 자서전 72쪽에는 63사태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이 계획의 수립과 전달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야 했으므로 은밀하게 추진되었고, 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 .고려대학교의 이명박, 이 경우, 박정훈 등을 이날 소요의 주동자로 지목해 수배령을 내렸다. 길고 어두운 도피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1963.3.28.자 고대신문(갑8)에 의하면 동년 3월26일 하오 7시에 한일외교 정상화 반대를 위한 좌담회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이는 6.3사태에 대한 준비가 3월에도 경찰을 피해 진행됐다는 뜻입니다. 63년 8월15일에 고도의 기관지확장증과 악성 축농증을 앓았다는 사람이 1964년 3월부터 6.3사태의 중심에 서서 사태를 주도했다는 것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2006.11.27. 이명박이 스스로 밝힌 병역자료(갑10, 2쪽 제2항)에서 이명박은 1963.8.15.에 “고도의 기관지 확장증”과 축농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해명했습니다. 2007.2월호 신동아(갑제5호증, 131쪽)에도 똑같은 병무청 기록이 있습니다. 위 자서전에는 그냥 축농증이 아니라 악성 축농증이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병무청 기록을 보면 1961년 갑종, 1963년 입대 후 귀가(질병), 1964년 징병처분 미필, 1965년 병종(활동성 폐결핵 및 기관지 확장증)(갑5,131쪽)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명박은 1961년에 갑종판정을 받은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이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자신은 군대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는데 리어카 노동 때문에 몸이 쇠약해진 것으로 미화했습니다. 그리고 갑종판정을 받은 지 2년 만인 1963년8월15일에 자원 입소했습니다. 2년 전에도 갑종합격판정을 받았을 만큼 건강했던 그가 1963년에 자진해서 입소를 했다면 그는 그 자신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 건강이라면 군대생활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입소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 임해보니, 기관지 확장증도 경도나 중도가 아니라 고도(최악)로 판정이 났고, 축농증도 매우 심하다는 ‘악성’으로 판정이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죽을병으로 알려진 ´고도의 기관지확장증과 공포의 대상인 ´악성충농증´을 동시에 앓고 있던 사람이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한 채 군대생활을 하겠다고 자원입대했다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과 같은 거짓으로 보입니다.
병역의혹에 대한 이명박 측의 변명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을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에 병역을 면제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사회분위기였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당시는 군을 면제시켜주는 브로커들이 흥성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2006.11.27. 기자회견에서‘병무청은 절대로 부정을 저지를 수 없는 기관’이라고 아래의 인용구에서처럼 항변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진단서를 제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징집 면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병무청에서 이틀간 실시한 공식적인 신체검사 절차 내에서 징집면제사유에 해당하는 질병이 발견되어 면제판정을 받았으므로 사적인 요소나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전혀 없었음”(갑10, 제2쪽 하단)
그렇다면 자서전에서 쓴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 다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서전에서는 당시에 병역비리가 있었는데 자기는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놓고, 갑10의 해명서에서는‘병무청에서 받았으니 부정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자서전에서 했던 자랑을 그 스스로 뒤집은 것입니다.
병무청 기록에는 “1964년 징병처분 미필”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에 대해 2006.11.27.자 기자회견 자료(갑10, 2쪽 중간)가 있습니다.
기자: “병적기록상 1964년에 ‘법 제35조 징병처분미필’로 기재된 것은 이 전 시장이 고의로 신체검사를 회피하였다는 의미가 아닌지”
이명박 측 해명: “1964, 상반기에 병무청이 지정한 재신체검사 기일에 응하지 못한 것은, 귀향조치 이후 1963.4학년 2학기 연말에 실시된 상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1964,부터 학생회 활동을 주도하였고, (중략) 한일국교정상화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뿐 병역을 기피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하략)”
이명박 측의 해명을 보면 이명박이 1964년 상반기의 신체검사에 응하지 않은 것은 6.3시위의 중심인물로 시위 준비를 주도했기 때문이고, 이는 불가피한 사정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1964년도 2월의 매일신문을 보면 1964.2월, 경상북도병무청장 명의의‘징병검사실시공고’라는 광고문(갑11)이 있습니다. 영일군은 1964년 3.15-3.30 기간에 징병검사를 하도록 공시돼 있습니다(갑11.제1쪽). 1964.3.28.자 고대신문을 보면 이명박은 동년 3월26일에 한일회담반대를 위한 좌담회를 열고 있었습니다(갑8). 데모 준비를 위해 징병검사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데모를 위해 징병검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무슨 ‘불가피’한 일이고 ‘정당한 일’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해명이 이 정도라면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명박의 병무청 기록을 보면 1965년 병종(활동성 폐결핵 및 기관지 확장증)(갑5,131쪽)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병역의혹에 대해 이명박 측이 스스로 해명한 자료(갑10, 제2쪽)에는 이렇게 해명돼 있습니다. “1965.3.29. 재신체검사시 보건소에서 촬영한 X-ray상으로 이상이 발견되어 지정병원 포항영남병원에서 정밀촬영한 결과 ‘폐활동성결핵경도 양측’‘기관지 확장증 고도 양측’이 발견되어 3.30. 내과군의관이 3(병종) 판정을 하였고. 당시 시행되고 있던 ‘질병-신체검사기준표’ 상으로 ‘기관지 확장증 고도’는 3 즉 징집면제 사유로 규정하고 있어 판정관이 이를 근거로 병종 즉 징집면제로 최종판정 하였음”
1965년에 군의관으로부터 기관지 확장증 고도와 활동성 폐결핵 판정을 받은 사람이라면 곧바로 전격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기관지 확장증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 있습니다만 활동성 폐결핵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폐결핵은 감염성이 대단하므로 식구들까지도 접근하기를 피하는 병입니다. 가래를 수시로 뱉어내고, 얼굴이 노랗고, 기침을 하는 등의 증세를 보이는 병이기 때문에 타인들도 쉽게 알아보고 접근을 피하는 몹쓸 명이었습니다. 당연히 격리수용하여 치료를 하는 병이었으며 1960년대에는 죽음의 병이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의학 상식입니다.
어느 의학 전문가가 전해온 갑13에는 폐결핵 치료제의 발달사가 잘 요약돼 있고, 이 글들은 의학사전과 의학지 등으로부터 발췌한 것들입니다. 전문가의 요약분은 이러합니다.
“당시에 폐결핵은 불치병에 가까웠고 고친다 해도 (선진국에서도) 1년6개월이상 치료기간이 필요했던 질병이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선진국에서는 환자가 입원한 상태에서 스트렙토마이신과 아이나(이소니아지드) 그리고 pas( para-aminosalycilic acid )로 치료를 했는데 스트렙토마이신은 주사제로 써야 했으므로 환자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pas는 액체로 많은 양을 투여했으므로 환자가 구토를 하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당시 영미 선진국에서도 폐결핵은 이 3가지 약제를 사용하여 1년6개월이상 치료를 해야 치료가 가능했던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난한 후진국이었기에 폐결핵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여기까지를 보면 1965.3.30.에‘기관지확장증고도’와 ‘활동성폐결핵’진단을 받은 이명박은 병원 등에서 생과 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신체검사장을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정상인 이상의 건강을 자랑하며 같은 해 4월에는 대구의 모 섬유회사에 취직하여 사장으로부터 가정교사를 겸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가 한 달 만에 서울로 올라와 1965.7.1부터 현대건설에 출근했고, 그해 여름에는 정주영회장과 28명의 신입사원들이 벌인 술 마시기 대회에서 천하장사를 했고, 기관지확장증과 폐결핵에는 독약으로 알려진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를 마셔야 하는 건설현장에서 근무했고, 자서전 내용대로 섭씨 40도가 넘는 열사의 나라 태국과 중동 등 세계 각곳을 누비며 입사 11년만인 1977.1.1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약진한 신화를 이룩했습니다. ‘기관지확장 고도’와 폐결핵은 술, 먼지, 콘크리트 가루가 독약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은 ‘해외건설에 나가 일할 역군’을 모집한다는 광고 문안에 현혹되어 취업원서를 냈다고 합니다. 그는 폐병환자도 아니었으며, ‘기관지 확장증 고도’도 아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의 자서전 내용을 아래에 열거합니다.
1) “대학을 졸업하고 몇 군데 학교에 입사시험을 치렀지만 번번이 2차 사루전형이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 . .입사시험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던 나에게 대학교에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대구에 있는 작은 섬유업체였다. . . 이군, 회사일을 하면서 내 자식 공부 좀 가르쳐 주게.” 출근한지 나흘째인가 되는 날, 사장은 나를 불러 가정교사도 겸해 달라고 부탁했다. . . 나는 내려온지 한달 만에 대구를 떠났다. . . 신문 한 구석에 내 눈길을 끄는 작은 광고가 하나 있었다.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가 일할 역군 모집’. . . 그 광고가 눈에 들어온 까닭은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가 현대건설에 원서를 낸 것은 1965년5월, . . 우여곡절 끝에 1965년6월에 면접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7월1일부터 출근할 것. 1주일 뒤에야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내가 배치된 부서는 본사 공사관리부였다. 여기서 9월까지 3개월 근무했다.“(저서전 87-92쪽)
2) “그해 여름 강릉에서 열린 신입사원 연수회에서였다. . .우리 때에는 28명의 대졸 신입사원을 뽑았다. . .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씨름도 하는 ‘통과의례’였다. ‘자, 우리 이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자. 남자는 풍류가 있어야 해. 저 달이 질 때까지 마시는 거야.’ 정사장은 소주잔을 높이 들었다. ‘취한 놈들은 뒤로 빠져라. 계속 술을 돌리며 마시는 거다.’ . . 이 모와 나 둘만 남았으나 이 모는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달이 지도록 마시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 혼자 잔을 들고 있었다.”(자서전 94-95)
3) “10월 초에 나는 처음으로 현장관리를 맡아 나갔다. 진해 제4비료 공장 건설현장이었다,”(자서전 96쪽)
4) “ ‘이군은 타이 현장으로 간다. 즉시 본사로 올라와야겠어‘ 진해 현장에서 근무하던 12월초, 본사에서 정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자서전 98쪽)
5) “서른다섯 살짜리 사장” (자서전 129쪽 제목)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명박은 1961년 병역 신체검사에서 갑종을 받았고, 1963년도에는 치열한 학생회장 선거전을 치르고 당선되었으며, 1964년 봄에는 가장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6.3데모를 주동했고,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고,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현대에 들어가 술의 천하장사가 됐고, 수많은 외국 땅에서 기염을 토하며 일한 결과 승승장구 하여 자신이 어째서 유독 신체검사만 하면(1963년 및 1965) “고도의 기관지 확장증”이 나오고, “악성 축농증”이 나오고 “폐결핵”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의혹덩어리의 사실을 숨겨놓고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이명박은 스스로를 병역에서 깨끗한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미화시켰습니다. 그의 자서전과 객관적 사실들을 연결해 보면 이는 만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 실화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믿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자서전의 병역부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거짓으로 미화돼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1965.3.30. 정밀검사 결과 ‘폐활동성결핵경도 양측’‘기관지 확장증 고도 양측’이라는 진단을 내렸다는 ‘포항영남병원’은 어떤 병원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글을 첨부합니다. 1960년대 ‘극동방송 체험수기 당선작’“사모이야기”“이것이 나의 간증이요”(이옥희지음)를 보면 ‘포항영남병원’이 어떤 병원이었나를 대체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병원(포항영남병원)에 주사를 놔주는 남자간호사가 있었어요. 입원환자들은 약 10여명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간호사도 구원을 받고 홍 현제가 되었어요. 그때에는 병원이 옛날 집으로 빙 둘러 있어서 환자들이 서로 내다볼 수 있었어요. 그 형제가 아침마다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하면서 주사기를 들고 다녔어요.”(갑14).
당시의 포항영남병원은 입원환자 10여명, 마당을 가운데 두고, 문을 열면 반대편 환자를 마주 볼 수 있을 정도, 남자간호사가 찬송가를 부르며 주사를 놓고 다녔던 정도의 그야말로 목가적인 시골 병원이었습니다.
5. 자서전 내용 #5
거짓내용#6: “1964년 6월말에 들어간 서대문 형무소 생활은 그해 10월 말에 끝났다.”(자서전 72쪽)
거짓이유: 갑제6호증 고대신문에 의하면 이명박은 자서전에서처럼 10월말에 형무소를 나온 것이 아니라 10.1일에 나왔습니다. 실제 감옥생활은 3개월간 했는데 4개월간 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습니다. 당시의 운동권 출신들은 감옥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평가가 올라갔습니다. 이는 작아보이지만 그가 자서전을 함부로 썼다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대선주자가 자서전을 부정확하게 쓴 것도 선거전에서는 충분한 흠결사항입니다.
<호적 세탁 부분>
이충우에 대한 새로운 호적등본이 나왔습니다. 1960년대에 ‘가로’(횡)체로 새롭게 작성된 등본이었습니다. 이게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청인은 ‘단기’ 시대에 태어났고, ‘서기’ 시대에 결혼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 신청인의 제적등본을 떼어보니 1961년 이전에는 ‘단기’ 연호로, 1961년 이후에는 ‘서기’ 연호로 표기돼 있었고, 횡서체가 아니라 종서체로 작성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충우의 새 등본은 횡서체로 작성돼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 등 모든 가족들의 기록들이 ‘서기’연호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청인은 이충우의 호적이 1960년대에 새로 제작됐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구 호적과 새 호적이 틀리게 기록돼 있습니다. 호적세탁인 것입니다.
그런데 호적을 다시 기록하려면 옛날 호적상에 나타난 변경사항들을 그대로 사진 찍듯 옮겨놓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구 호적에는 이덕쇠가 이충우로 개명됐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는데 새 호적에는 이 개명사항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개명을 했다는 사항이 호적에 필수 기록항목인지의 여부를 알아보니 위해 신청인은 2007년 4월 6일, 가정법원의 호적과와 동사무소를 찾아 물어 보았습니다. 개명은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사항’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구 호적에는 이덕쇠가 채태원과 결혼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귀선, 상은, 상득, 귀애가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 생산된 자손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새 호적에는 이충우가 채태원과 결혼을 했고, 귀선, 상은, 상득, 귀애가 모두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 탄생된 자손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새 호적에는 왜 이 중요한 개명 기록이 빠져 있으며,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모두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로 세탁되어 기록되어 있을까요? 신청인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옛날에는 ‘개똥이’를 한문으로 ‘개동’이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양반으로 묘사한 이명박에게는 ‘덕쇠’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이지 단위로 호적 갈아끼우기 의혹까지새 호적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또 이상한 사실들이 발견됐습니다. 아래 사진들과 같이 이충우씨의 새 호적등본을 보니 이충우, 채태원 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의 이름 옆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습니다. 아마도 주민등록법이 시행됐던 1968년도에 찍혔을 것입니다.
이전 호적에는 이명박의 부친의 개명전 이름이 덕쇠라고 표기되어 있다.
1974년 새로만든 호적에는 이전 이름인 덕쇠가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보는 새 호적에는 모든 식구들 중에, 유독 이상득과 이명박이 기록돼 있는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1968년에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던 어느 날, 서기는 모든 식구에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고무도장을 찍었을 터인데 유독 정치인 형제가 들어 있는 2개 페이지에 들어 있는 4명의 식구들에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그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호적 서기가 한 가정에 속한 다른 가족들에게는 모두 고무인을 찍으면서 유독 정치인이 돼 버린 이상득과 이명박이 등재돼 있는 2개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래 인용구와 같은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던 1968년, 이충우 가문의 호적을 담당했던 서기는 모든 식구들에게 일괄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기 위해 고무도장을 다 찍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는 호적에는 유독 이상득과 이명박이 들어가 있는 2개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이 빠져 있다. 고무도장을 찍은 후의 그 어느 날, 호적 서기는 고무도장이 찍혀 있던 2개 페이지를 뽑아서 파기하고, 새로운 2개의 페이지를 만들어 대신 끼워 넣었을 것이다" 이는 호적세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명박은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어이가 없습니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합니다.
호적세탁 자체도 대통령 할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호적세탁의 이유에 대해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서 재기록했다고 변명하는 것은 더욱더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