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주교회의 중국선교
Subject: 예수회 전문인 선교사들의 중국선교
예수회 전문인 선교사들의 중국선교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대다수 지역을 잃은 로마 카톨릭교회는 그 후 몇 세기 동안 선교활동을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신대륙 등지에서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활발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것은 1540년 스페인의 귀족 이냐시오 료욜라(Ignacio de Loyola)가 세운 예수회입니다.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1491년에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꿈은 '왕에게 봉사하고, 처는 왕가에서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혈기왕성한 그가 1521년 프랑스군과의 전투 중 오른쪽 다리를 대포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오랜 병상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루돌프 데 삭소니아(Rudolf de Saxonia)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의 생애를 영웅전 풍으로 묘사한 "성인 열전"을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세상의 왕이나 귀부인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일시적으로 즐거울지 모르나 결국 슬픔과 공허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영원한 기쁨과 깊은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살 것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1534년 8월 15일, 그는 여섯 명의 동료, 피에르 파브르(Pierrs Favre),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디에고 라이네츠(Diego Laines), 알퐁소 살메론(Alfonso Salmeron), 니콜라스 알퐁소 보바딜라(Nicolas Alfonso Bobadilla),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s)와 함께 7인 동지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헌신할 것을 결단하고, 청빈, 순결, 예루살렘 순례 및 구령 사업에 청원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몽마르트 서원"입니다. 이 서원을 기초로 1537년에 새롭게 클로오드 루 제이(Claude de Jay), 파스카제 브로에(Paschase Broet), 쟝 코듀르(Jean Codure)가 합세했고, 그 후 안드로시아의 디에고 오세스(Diego Hoces)가 들어와 총 11명이 되었습니다. 1539년 그들은 예수회의 기본정신이 집약된 5항목의 "포뮬러(Formula : 기본정신요강 : 예수회 기본법)"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회의 최초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역사상 로마 카톨릭의 최고의 선교사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는 1542년 5월 6일, 당시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포루투칼의 식민지였던 고아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는 남부 인도에서 3년간 바쁘게 활동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은 후, 말레이 반도와 부근의 섬들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 어느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1549년 그는 다른 두 명의 예수회 회원과 일본인 회심자 야지로를 통역관으로 데리고 출발하여 2년간 히라도(平戶), 쿄토(京都), 야마구찌(山口), 붕고(豊後) 등지를 돌면서 일본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551년 그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일단 고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1552년 그는 중국의 관문이라는 삼주도(三州島)에 도착했으나, 1552년 12월 3일 그곳에서 병들어 고독하게 하느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 사후, 1573년 예수회는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와 40명의 선교사들을 중국에 보냈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반석이여! 반석이여! 네가 언제야 깨지겠느냐?" 하며 비통해 했습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Mateo Ricci)는 승복을 입고 광동성 마카오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이때 한 중국 관리가 수학에 관한 것으로 리치에게 상담을 해왔으며, 예수회원에게 입국허가를 주었습니다. 그는 25년간 남경, 소주, 상해, 북경까지 선교구역을 넓혔습니다. 중국인 신자수가 증가하여 1585년에 20명, 마테오 리치가 죽은 1610년에는 중국 카톨릭 신자는 2,50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610년에 중국에 파송된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는 마태오 리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세 가지로 분석하였습니다. 첫째는, 그가 중국 조정의 학자 및 유명인들과 교류를 한 것입니다. 1594년 마태오 리치는 이른바 엘리트 계급이라 불리는 관리가 되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그가 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유학과 상통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천주(天主)는 가톨릭의 하느님에 상당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셋째는, 서양학술을 소개하여 중국인의 보수적인 사상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시계, 프리즘, 수학의 도구, 세계 지도 등을 보여 주며 중국인의 지적 호기심을 일으키고, 이들에게 자연과학을 가지고 복음전파에 힘썼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어로 기독교, 수학, 천문학에 관한 책을 20권이나 저술하여 중국인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선교전략을 계승하여 아담 샬(Adam Schall)은 1622년에 도착하여 명·청 양대에 걸쳐 선교사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래하였습니다. 그는 천문학 지식을 인정받아 관직에 올라 명나라를 위해 전쟁용 대포를 만들고, 청 시대에는 더욱 천문과 역법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중국어로 쓴 137편의 논문은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봉사는 전도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제공받을 수 있다면 어느 왕조에게라도 봉사한다는 열린 마음과 선교정신, 그리고 포용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상류관료를 대상으로 선교하여 1650년경에는 25만명 정도의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만들어 주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영적인 암흑기라고 말할 수 있던 때에도 하느님께서 선교신앙과 선교열정을 가졌던 소수의 자비량 사역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믿음을 줍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내의 신학적 논쟁으로 시작된 예의논쟁은 결국 로마교황과 중국황제와의 갈등으로 비화하여, 1706년 강희제가 내린 금교령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고, 1774년 북경 예수회에 해산령이 내려짐으로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중지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제도화되어 신학논쟁에 휘말릴 때, 죄악된 인간들은 하느님의 선교역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할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