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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2.정간이 말썽인 까닭은? 3.이론과 실천의 가려운 관계 |
4.정간을 떼다 5.청주 무심정의 정간 6.맺음말 |
1.머리말
국궁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란 국궁이 특정 민족의 소유가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국궁이 우리 민족의 것이고 또 내가 거기에 몸담고서 활을 쏘고 있기 때문에 제 논에 물대기 식의 해석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기능의 객관성이 있다. 그것에 의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활은 사거리가 세계에서 가장 멀다. 일본 활 60미터, 몽골 활 70미터, 개량된 양궁 90미터인데 반해 우리 활은 과녁 거리가 145미터이며 멀리쏘기를 하면 300미터는 나간다. 그리고 활을 쏘는 방식이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서 꿇내기, 연전띠 내기, 전내기[錢射], 편사 같은 다양한 방법이 있다. 기능으로 보나 풍속으로 보나 세계 어디에다 내놓아도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능이 그렇다고 해서 현실 속에 모든 가능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훌륭한 가능성을 두고서도 구성원들의 인식과 풍속의 낙후성 내지는 고질성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실현의 가능성을 더디게 하는 수도 있다. 국궁계에는 그런 문제점들이 여러 가지가 도사리고 있다.
예를 들면, 이미 스포츠로 굳어버린 활쏘기를 스포츠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도(道)로 규정을 한다거나, 활터를 전 국민의 것으로 열어두지 않고 동네 사랑방이나 친목회 수준의 모임으로 만들어서 외부세계에 대해 배타성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사례 같은 것이 그런 경우들이다. 그러한 병폐는 국궁 세계화의 걸림돌이 될 뿐이며 더 멀리는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중의 또 한 가지가 바로 정간이다. 정간은 그 기원도 모호하고 특별한 의미도 없다. 주먹구구식 개념만 너절하게 들붙어 있는 것이 정간이다. 따라서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경우 정간은 그 성격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대상이다.
청주시에는 현재 활터가 두 군데 있다. 그런데 정간과 관련하여 이 두 군데 활터는 아주 중요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곳이 되었다. 정간의 문제성을 일찍 파악한 청주 우암정에서는 2003년 1월에 사원들의 합의로 정간을 떼어냈고, 신생 정인 무심정에서는 정간을 아예 걸지 않았다. 이 글은 청주 지역 활터에서 발생한 이 같은 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2.정간이 말썽인 까닭은?
활터에 올라가면 맨 처음 배우는 것이 ‘正間’이라고 쓰인 판자때기에 대고 목례를 하는 것이다. 활터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암암리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정작 우스운 건 그 다음이다. 왜 거기에 대고 인사를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냥 국궁을 오늘까지 이끌어온 선배들에 대한 예의라는 정도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종교상의 정체성을 허물지 않는 선에서 애써 미신임을 믿으려 하지 않고 지나가거나, 보통 사람들은 그냥 터줏대감이나 성주신에 대고 예를 올리는 것이려니 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끝내 미심쩍은 구석은 가시지 않는다. 활을 배우는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 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그러한 기이한 의문에 답을 찾아나선 사람은 없다.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나는 정간에 대해서 오래 활을 쏜 분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그러나 기가 막힌 것은 30년을 넘게 활을 쏜 사람들조차도 정간이 언제 생긴 건지, 왜 하는 건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국어사전에는 정간이 건축용어로 건물의 중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정간이란 말을 써놓고서 인사를 하는 것은 활터만의 일이며, 그것은 언어사회의 합의와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활터에서 그런 행위가 오래 행해져왔다면, 그래서 그것이 여타 부문에서도 인정하는 행위가 되었다면 그것은 언어사회를 구성하는 언중(言衆)의 동의가 얻어졌을 것이며, 그러한 동의는 낱말을 통해서 정착하고, 그 낱말은 국어사전에 오름으로써 이제 사회 전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공공언어로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활터에서 말하는 정간의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활터의 정간은 사이비 개념이거나 아주 최근에 생기기 시작한 말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간에 대고 목례하는 사람들은 이런 뜻을 모른다. 그리고 목례만 하면서도 배례라고 말한다. 배례(拜禮)는 엎드려 절한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이 황당한 모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간에 대고 절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 같은 맹목과 부적절한 권위가 지배하는 세계의 장래는 결코 밝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암담한 현실에 한 가닥 빛을 던진 것은 성낙인 선생이었다. 성선생은 대한궁도협회의 전신인 조선궁술연구회장 성문영 공의 외동아들로 해방 전에 황학정에서 아버지의 활로 집궁한 분이다. 1995년 겨울에 나는 장창민, 이태호 접장과 함께 황학정을 방문했는데 우리가 정간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성선생은 정간이라는 말을 아예 알아듣지도 못했다.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 황학정에는 지금도 정간이 없다.
국궁 1번지에 정간이 없다? 그렇다면 정간은 활터 구성원들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사이비 예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을 만나면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 분들의 고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간은 1970년대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전국으로 서서히 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갑자기 나타났을까? 이러한 의문에 처음 실마리를 던져준 분은 박병연(전주 천양정) 고문이다. 1960년대 중반에 집궁한 이 분은 정간에 대해 묻자 당연히 그때도 정간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물은 것은 정간에 대고 절하는 행위가 아니라 ‘正間’이라고 하는 현판의 등장이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박고문은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틀째 대화에서 세 번째 반복하여 질문한 끝에서야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서 시원한 대답을 했다. 현판은 젊은 사원들이 하도 질문을 해서 나중에 걸었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오래 전에 집궁한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정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나는 묻는다. 집궁 무렵에 천양정에 가보셨냐고? 그러면 백이면 백 가봤다고 장담하는데 그 대답에서는 모종의 자부심까지도 느껴진다. 그러면 그때 천양정에 정간이 있었느냐고 또 묻는다. 자신있게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당연한 걸 귀찮게시리 뭘 재삼 묻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다시 묻는다.
‘1986년까지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게도 위풍당당하던 기억을 수습하느라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갈팡질팡 한다. 나는 이 분들이 보이는 기억의 혼돈과 자기 기망을 아주 중요한 메카니즘으로 여긴다. 구사들은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정간을 내세워야 하는 어떤 절박함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그 절박함이란, 권위와 복종에 익숙하던 자신들과는 달리 새로 집궁한 신사들은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궁금증 많은 그들이 쉽게 복종할 수 있는 어떤 장치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의식의 해법을 정간에서 찾은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정간배례>는 퇴임 벼슬아치나 원로 구사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던 전라도 지역의 고유한 풍속이었노라고 나는 판단한다.
전라도 지역은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다. 갑부와 농사꾼이 선명히 구별된 지역이었다. 활쏘기는 당연히 지배층인 양반의 놀이이다. 조선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때로는 국방의 무기로, 때로는 예절과 신분 구별의 방법으로, 때로는 백성을 순치하는 수단으로, 수 백년 동안 그렇게 이 지역에 정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토 위에서 활쏘기가 진행되었다. 활터와 활쏘기는 그곳 지배층과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바라보고 접촉하는 창구 노릇을 한 것이다. 강경 덕유정의 경우에는 아예 관아 기능의 일부를 떠맡아서 외부 손님들의 접대를 대행하기까지도 했다. 활터에 드나드는 계층은 당연히 굉장한 신분이 아니고는 안 되었다.
이런 풍토에서 이른바 ‘정간’에 어른들을 모시고 활을 쏘는 것과 어른들이 계신 곳에 공손하게 절하는 풍속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예절이 정간에 절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활을 배운 구사들은 신사들의 당돌한 질문에 자신의 기억을 속이면서까지 정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탓할 것은 없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활터에서 정간에 앉아있는 어른들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것과, 그것이 정간이라는 판자때기에 글씨로 박혀서 전국으로 퍼져 가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전자가 정간에 앉은 ‘사람’에 대한 자발성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극도로 추상화된 관념물[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제성을 띤다. 활터 건물의 한 복판에 아무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저 소일거리로 활을 쏘거나 아니면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에서 활을 쏘던 사람들에게 판자때기에 대고 절을 하라면 그들이 그걸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려면 그들이 아무런 반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구성원들이 모두 합의할 때까지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정간에 대한 해석은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선 그 기원부터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그에 대한 해석조차도 중구난방이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의 억지 해석만이 난무한다. 국궁계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에는 정간은 너무 부실하다. 부실하다 못해 한심하다. 이미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 끝자락을 붙잡고 한물 간 철학으로 고리타분한 세계관을 설명해보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설명과 개똥철학은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경우 독약이 될 뿐이다. 양약을 처방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굳이 독약을 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간은 종교인들의 믿음과 일정 부분 상충되기까지 한다. 무엇 때문에, 왜 정간을 모셔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구사들이 무리를 해가면서도 신사들에게 자꾸 예절을 강조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은밀한 의도가 정간 뒤에 숨어있다. 한 마디로, 정간은 구사들이 신사들 군기를 잡으려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논리와 주먹구구식 설명에 고개 끄덕일 지성인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부적절한 권위와 강압 가지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설령 이룰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잠시 뿐이다. 합리와 이성에 기초한 대중은 불합리와 불필요한 권위에 대해서 늘 반발했다. 때로는 그것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화나 풍속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진정한 문화는 대중들의 동의에 의해서 살아남고, 또 세계로 뻗어 가는 생명력을 얻는다. 이와 같이 정간은 활터의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 그리고 세계화의 전망에 결부되어 있다. 결코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이 문제에 대해서 ‘디지털 국궁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 120명을 넘긴 현재(2003년 4월) 정간이 꼭 있어야 한다는 답은 25%로, 전체 응답자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들어 전국으로 퍼져간 정간이라는 망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활터 구성원들의 의지와 얼마나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선명한 증거이다. 정간배례라고 하는 것은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일 뿐이다. ‘그들의 정간’일 뿐인 것이다.
정간이 ‘그들의 것’이라면 전국의 활터에 두루 통하는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등정례(登亭禮)이다. 등정례는 “조선의 궁술”에 자세히 나오고, 현재도 전국의 활터에서 두루 지켜지고 있다. 먼저 와있는 사람들에게 ‘왔습니다’라고 하면, 먼저 와있던 사람들은 ‘오시오’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얼마나 정겨운 인사인가! 활터에서 이 이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3.이론과 실천의 가려운 관계
정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나자 답은 간단해졌다. 정간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정간에 대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정리해서 활터 풍속 전반에 관해서 “국궁논문집” 제2집에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는 정간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도 하고픈 말도 없었다 그저 사실만 확인하면 된 것이었다. 궁금했던 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논문집을 읽은 어느 정의 사두 한 분이 전화를 걸어서 내 글에 많이 공감한다고 하면서 국궁계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우암정에는 정간이 있습니까?”
내가 속한 활터의 정간이라!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대로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머리 한쪽이 휑하니 비었다. 그 대답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간은 나 혼자만의 궁금증이었고, 그 궁금증을 혼자서 푼 것이었으며, 그 과정을 글로 정리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질문으로 궁금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으로 비화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 이 경우 아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몸담은 활터에 내 생각을 전하지 않는다면 앎이란 있으나마나 한 것이며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알고서도 모른 체하는 것과 일단 건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일단 건의는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라 활터의 주체인 우암정 사원들 전체의 몫임이 분명해졌다.
2002년 9월 28일(토), 월례회 때 정간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한 정간무관심론자가 정간폐지론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한 우암정의 선택은 역사의 몫일 것이었다. 정간의 발생과정을 설명하고, 폐지하는 것이 국궁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우암정 사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나는 그렇게 제안하는 순간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다만, 정간에 대한 회원들의 인식이 정확하지 못하니, 정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정간의 모든 것을 글로 정리하여 다음 달에 다시 논의하자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10월 월례회 때(2002. 10. 19.) 다시 유인물을 만들어서 사원들에게 돌리고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때의 유인물은 아래 덧붙임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 논의는 충분히 검토하고 논의하여 석 달 뒤 정기총회에서 매듭을 짓기로 하였다. 총회 때까지 사원 중에서 내가 밝힌 정간에 대해서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2003년 1월 11일, 우암정 정기총회가 열렸다. 이런저런 문제를 상의하고 맨 끝으로 정간 문제를 상정했다. 그런데 9월, 10월에 정간에 대해 설명할 당시에 월례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총회 날 대거 참석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정간에 대해서는 이미 두 차례나 설명을 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자 9월과 10월 월례회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이 그때까지 해온 관행을 문제삼아 그대로 두자는 쪽으로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뜻밖의 상황으로 급전하는 순간이었다. 왈가왈부 하는 가운데 손들기로 표결에 부치자 찬성과 반대, 그리고 기권으로 엇비슷하게 나뉘었다. 이 황금분할을 보면서 나는 아득했다. 이미 암암리에 합의해 놓은 일이 이렇게 엉뚱하게 빗나갈 수도 있으며 한 번 잘못 들인 관습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결국은 떼자 두자 어느 쪽으로도 결말을 보지 못하고 총회를 마감했다.
이틀 뒤에 임원 편성을 위한 임시 이사회가 열렸다. 정간 얘기가 다시 나왔다. 총회가 끝난 다음날 활터에서 벌어진 상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간 존폐를 놓고 회원들은 이틀째 온종일 격론을 벌였고, 이것을 이대로 놔두다가는 정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주요 논제로 떠올랐다. 결국은 정간 문제를 어정쩡하게 이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간 껀은 의사 결정 정족수인 참석인원 과반수를 넘긴 쪽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논의해야 할 사안이었고, 오래 끌수록 정의 분위기만 험악해질 것이며, 결론이 떼는 쪽으로 나든 붙이는 쪽으로 나든 무언가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활터에서는 정간을 두고 일대 격론이 벌어졌다. 자칫하면 정에 내분이 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매일같이 그런 격론은 활터에서 반복되었다. 상황은 9월과 10월 이후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을 끌수록 정 분위기에 깊은 주름이 생겨날 뿐이다. 이런 상황의 위험성을 재빨리 간파한 신임 장영학 사두는 임원편성 승인 건 때문에 열리는 18일 임시총회에 정간 문제를 함께 올리기로 하고 총회 소집 공고를 냈다. 불필요한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18일 토요일. 월례대회가 끝나고 어둑해질 무렵 임시총회가 열렸다. 임원편성에 대한 승인이 끝나고 정간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먼저 정간을 떼자고 건의한 내가 정간이 왜 문제인가를 긴 시간 동안 설명을 했다. 정간이 발생한 기원부터 정간이 전국으로 퍼져간 시기, 그리고 그 의미와 작용까지 설명했다. 설명의 방법은 10월 월례회 때 나누어준 그 유인물을 토대로 그 동안 더 밝혀진 정간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정간은 1970년대 말에 전남 남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발생하여 전북을 거쳐서 서서히 전국으로 퍼져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임종남이 정리한 “한국의 궁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문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을 한 뒤 표결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떼자!”였다. 국궁계에 새로운 역사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4.정간을 떼다
2003년 1월 22일 수요일 오후 여섯 시. 우암정의 정간이 벽에서 떨어졌다. 장영학 사두와 박종만 부사두가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10년 넘게 무겁게 매달려있던 정간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태극기를 걸었다. 밖에는 흰 눈이 온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아래 글은 정간을 떼고 난 뒤에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게시판[응접실]에 장창민 접장이 올린 글이다.
우리가 가는 길(장창민, 2003/01/24 오전 4:02:25)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어야 할까? 왜 정간을 떼었을까?
우암정에서는 어제 정간을 떼었습니다 왜 고사는 지내지 못했을까 슬픈 현실입니다. 내가 속한 집단은 작지만 때로는 우주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옵니다.
우암정의 정간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활을 내는 모든 이들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우암정은 과감히 비켜 갈 수 없는 그곳에 칼을 꽂았습니다. 아쉽게도 고사는 지내지 못했습니다. 고사를 이긴 자의 잔치로 보는 일부 시각 때문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떼고자 하는 사람이나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나 마음은 같은데 고하고 풀고 뜻을 모아 한 길로 가자고 하는 일인데요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하는 일입니다. 모두 똑같아야 된다. 옳은 길을 추구하는 법은 오직 한 길이다 라고 하면 활은 왜 냅니까? 정간을 떼고자 하는 이들은 정간을 부정합니다. 정간의 의미를 새기는 사람이 있듯이 부정하는 이들도 활을 쏘아야 합니다. 정간은 신이 아닙니다. 정간을 모시고 나름대로 새운 뜻을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정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간을 가지고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진정 정간을 떼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뜻과는 어긋난다고 봅니다. 과거의 일에 반성할 것이 있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래를 위해 나는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정간의 문제는 우리 활을 내는 이들에게 풀리지 않은 숙제입니다. 정간은 우리 활의 역사의 한편을 자리잡고 있으며 진행 중입니다. 우암정은 용기를 내어 우리 활의 세계 속에서 과감히 정간을 밀어냈습니다. 이것은 정간이 계속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활을 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진정한 의미의 정간을 알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암정의 사범처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가 진정 우리 활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암정의 사원들은 용기를 냈습니다.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한 용기를 냈습니다. 아름다운 고사를 치르지는 못했습니다. 고사를 지내지 말자는 의견을 존중한 것 같습니다. 아직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그 날 이십 년이 넘게 활을 가슴에 품고 정간배례를 해오신 분이 그렇다면 정간을 떼자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분은 묵묵히 떼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저는 두 분을 모두 존경합니다. 제 눈에 두 분은 진정한 구사로 보였습니다.
이 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원래 정간을 떼기로 결정 난 뒤에 임원회가 열렸는데, 거기서는 간단한 고사를 지내고서 정간을 떼자고 합의하였고, 날짜는 총회 일주일 후인 토요일로 잡았다. 그런데 사원 중 일부가 임원회의 이같은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유인 즉슨 정간을 떼기로 하면 됐지 고사까지 지내서 생색을 낼 게 뭐 있느냐는 것이었다. 정간을 떼자고 한 사람들 중에서도 고사를 지내는 것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나왔다. 고사를 반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고사란 총회에서 승리한 자들의 잔치이며 정간을 그대로 두자고 한 사람들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고사가 정 분위기를 해치는 것으로 비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장사두의 판단에 따라 눈이 펄펄 내리던 수요일 저녁에 활터에 올라온 사람들끼리 조용히 내린 것이다.
물론 고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대단한 오해이다. 고사(告祀)란 장례 절차가 아니다. 고사란 신에게 예를 갖춰 어떤 일을 알린다는 뜻이다. 이 때의 신은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하는 잡신이 아니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할 때의 그 천명과 비슷한 것이다. 즉 인간이 최선을 다 해서 일을 추진할 때 그것의 진정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불가사의한 손길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을 미혹하는 귀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관장하는 분명한 세계에 대한 집단의 신념인 것이다. 공자가 귀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할 때의 귀신이 바로 잡신이다. 그러나 공자 역시 국가의 사직이나 자신의 조상을 섬기는 일에는 정성을 다했다. 공자가 받든 것은 인간의 이성을 흩트리는 잡신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당연한 명령, 인간이면 꼭 따라야 할 명명백백한 운명이었다. 잡신과 천명은 이와 같이 다르다.
고사란, 잡신에 대한 굴복이 아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여 결정한 일이 잘 이루어지고 그를 바탕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출되었던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서 결정하고 목표한 바를 이루어 달라는 자기 맹세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일이 결정되었으면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이 제안되며 그러한 의견들은 서로 충돌하여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초래된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을 통하여 각자 제안된 의견들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진정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어떤 합의에 이르면 그 합의에 이르기까지 제출되었던 여러 가지 색다른 의견들은 배제된다.
그렇다고 그 배제된 생각들을 제안했던 사람들을 그 합의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합의된 생각을 중심으로 뭉치기 위해서 그러한 사람들의 의견을 합의한 내용으로 유도하고 그 합의 내용에 반대자들의 동의를 구함으로써 합의된 내용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간 밖의 그 어떤 존재에게 의탁하여 구성원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화해를 유도하는 행위가 바로 하늘에 뜻을 알리는 고사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고사란 잡신에게 일을 해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천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봐 달라는 뜻이다. 고사(告祀)란 승리한 자들의 생색내기 잔치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의견이 다른 사람들까지 한 두레로 아우르는 대동단결의 잔치마당인 것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잔치는 고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오해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일을 만든 사람이 푼다는 뜻이다. 우암정의 정간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이다. 우암정은 1950년대 초창기부터 눈비만 피할 수 있는 가건물로 있다가 1990년도에 전국체육대회를 주최하게 되면서 정부의 지원으로 활터 건물을 짓고 정식으로 입주했다. 정간은 1980년대 중반 임시 건물 때 사대 가림막에 걸렸던 것을 새로 입주하면서 옮긴 것이다. 당시에 한상수(사두), 신재우(부사두), 김연문(부사두) 같은 분들이 그 일을 주관했다. 이 분들은 모두 30년 넘게 또는 가까이 활을 쏜 구사(舊射)들로 충북 국궁계의 산 증인들이다.
그런데 정간을 떼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주장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 분들이 바로 이분들이었고, 총회에 참석해서 투표를 했으며, 결과는 위와 같이 되었다. 정간을 걸었던 그분들의 합의와 지지로 정간이 다시 내려진 것이다. 이 결자해지야말로 우암정의 자랑이며 역사의 진보와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청주 무심정(無心亭)의 정간
청주 무심정은 2002년에 정 등록을 한 신생 활터이다. 청주 시내를 관통하는 내가 무심천인데, 이 하천은 청주시의 동남쪽에서 흘러 들어와서 북쪽으로 시내를 관통하여 거기서 다시 반대방향으로 꺾는 미호천으로 합류한다. 미호천은 금강의 지류이다. 무심정은 청주시내의 북쪽, 그러니까 무심천의 하류 둔치에 있는 활터이다.
이곳은 원래 흥덕정(興德亭)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흥덕정은 청주시청 직원들이 모여서 활을 쏘던 곳으로 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가 1998년에 우암정과 통합하였다. 그런데 활터 자리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곳은 충북궁도협회에서 도 대표선수들의 훈련장으로 계속 활용하였고 또 상당고등학교 국궁부의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놓고서 사무실로 썼고 청주시의 협조로 눈비를 막도록 비닐 차양막을 설치하였다.
원래 흥덕정 사범이던 류철수 접장이 우암정으로 합류하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활을 즐겼는데, 그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 새로 배우고 그곳으로 합류하면서 사원이 꽤 늘었다. 그래서 2002년도에 정식 활터로 등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무심정이다.
그런데 출범 당시 정간이 문제가 되었다. 초대사두로 선임된 김정만 사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정간에 대고 절하는 것이 종교상의 믿음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피력한 것이다. 이것은 사두 자신의 개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충북 국궁계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폐정을 하느냐 정간을 걸지 않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인 것이다. 여러 번 논의한 끝에 결국 정간은 걸지 않기로 잠정 합의하고 정간을 걸지 않은 채 개정(開亭)을 했다. 정간이 종교상의 믿음과 배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 사례이다.
그리고 활을 배우려다가도 정간의 문제 때문에 활을 그만둔 경우도 주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이미 정간배례에 길든 구사들의 강압 때문에 하기 싫은 절을 억지로 하거나 활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 나곤 했다. 그러나 이 무심정의 경우에는 신생 정이기 때문에 또 다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궁계의 관행과는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무심정에 대해서 정간을 내걸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곧 폐정하라는 강요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가 과연 국궁계의 장래에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민족으로 태어나 활을 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활을 쏘지 말라고 할 자격은 그 누구한테도 없다. 그런데도 정간은 함부로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정간 뒤에 은밀히 숨어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런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간이 없어도 무심정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 사원들은 열심히 활을 쏘며 상화하목(上和下睦) 또한 아주 잘 된다. 어느 것 하나 문제될 것이 없는 훌륭한 정이다. 정간이 없다고 해서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6.맺음말
모든 풍속이나 문화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뀐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사회 구성원들 누구나 합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반 상식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특수한 구조나 특별한 권위에 의존하는 풍속은 그 특수함과 특별함이 사라지면 함께 사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 활쏘기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활쏘기는 스포츠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 토대 위에 서 있지만, 활터의 문화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럴 경우 활터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불합리한 것들을 정리하기 위한 논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합리한 모순은 구성원들의 갈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궁계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정간은 국궁의 미래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활터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는 관습이 뿌리깊게 남아있다. 이것은 미풍양속을 보존하는 좋은 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활터의 현재 모습이 완벽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대도시에서는 옛날 시골의 인간미 넘치는 풍속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도시의 활터에서는 아직도 옛날의 시골 사랑방 같은 아늑한 분위기가 남아있어서 옛날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나 낙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낙원이나 천국이 활을 스포츠로 접근하려는 젊은 세대와 여타 사회에 대해 배타성을 드러내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러한 배타성 때문에 활터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물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다 결국 활터를 떠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같은 활터 풍경은 거기에 몸담은 사람에게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궁의 발전과 세계화를 저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궁의 발전에 장애로 작용한다면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다정다감한 옛날 사랑방 분위기에 안주하는 것이 많은 활터의 분위기이다. 이것이 국궁계의 한 자화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거기에다 국궁의 장래를 내맡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이다. 미래는 현재와는 또 다른 논리과 세계관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미 지나간 세월에 기대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저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활터 풍속에 대한 가치판단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기준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활터 풍속은 많은 부분 재고되어야 하며 정간은 그러한 것들 중 한 가지이다.
정간은 국궁계에서 논의를 거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활쏘는 사람들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정간에 대해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정간 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다. 모든 예절은 구성원들의 합의에서 나와야 하며, 최소한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정간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공개된 장소에서 논의된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어떤 합의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정간은 구성원들의 합의 사항일 뿐 강요사항이 아니다.
그런데도 활터 중앙에 현판으로 나붙은 두 글자는 활량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호령하는 것이다. 합의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아주 몹쓸 인간으로 취급하거나 마치 패륜아라도 되는 듯이 나무란다. 그리고 그런 불필요한 권위의 희생양은 대부분 신사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사들이 마음으로 승복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 정간에 절대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구사들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래가지고는 활량들 간의 불신과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정간이라는 현판은 그러한 갈등의 근원이다.
청주 우암정은 신중한 논의를 거쳐서 국궁의 장래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정간을 떼어 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사건에 불과한 것 같지만, 불합리한 권위로 세계화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많은 조건 하나를 국궁계에서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와 결정은 활쏘기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국궁인들 모두가 노력해야 할 몫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지금도 바람직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청주 우암정은 그러한 노력에 동참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심정은 처음부터 정간을 걸지 않았다.
현재 청주지역의 활터에서는 정간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정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른 결과로 앞으로 국궁계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실천은 청주 지역의 활터에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도 활터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고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례이다.
그리고 국궁의 장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이러한 노력들이 활터 구성원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다가올 미래사회에 바람직한 풍속으로 정착하여, 그를 바탕으로 국궁의 세계화라는 커다란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청주 지역의 활터는 정간을 과감하게 없앰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한 발 더 앞당겼다는 점에서 적극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임1: 우암정 10월 월례회 배포 자료
정간, 꼭 필요한가?
정진명(청주 우암정)
1. 정간의 뜻
․정간(正間)은 건축용어이다. 옛날부터 목수들이 건물의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로 써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말이 10여 차례 나오는데, 건축물의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이지 다른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건물의 왼쪽칸(左間)과 오른쪽칸(右間)이 있고 그 가운데는 정간(正間)이라고 하는 식이다. 또는 동간(東間)과 서간(西間)의 중간을 정간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제수를 배열할 때 정간에다 무엇을 놓고 좌간에 무엇을 놓고 우간에 무엇을 놓고 하는 식으로 쓴다.
․정간은 건축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2.정간에 대한 억지해석
․인간을 신과 대비해서, 신이 특별하고 인간은 평범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을 평간(平間)이라고 하고, 신을 정간이라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평간이라는 말 자체가 없을뿐더러 신을 정간이라고 표현하는 사례도 없다. 정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놓고 그것을 인간과 신의 관계로 억지 해석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 무과를 볼 때 시험관들이 앉았던 자리였고, 거기에 대고 인사를 하던 관례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무과는 중앙에서 전관을 파견하여 그들이 감독하고 지방 수령의 지휘로 실시했다. 관아에서 하는 행사에 굳이 전관에 대고 인사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이 관례로 정착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 그렇다면 일제시대에는 왜 정간이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정간은 해방이 되고도 한 참 뒤에 생긴 현상이다.
․선생안이 있던 자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산 사람이 매일 같이 죽은 자들에게 절하는 경우는 우리 사회에는 없다. 그건 절이나 서낭당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현상이다. 또 선생안을 꺼내는 것은 그 정의 창립기념일 때 제사지내는 경우이다. 그건 활터의 제삿날이지, 지금 광범위하게 실시되는 정간배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3.정간의 유래
․정간은 건축물의 중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퇴임한 원로 구사들이 활을 쏘지 못하면서도 활터에 나와서 소일을 했다. 그들이 앉던 자리가 정 건물의 중앙이고 그것이 옛 건축용어로 정간이다. 강경 덕유정을 보면 ‘덕유양로회관’이라고 써서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신사들이 정에 올라오면 의례히 그곳에 가서 인사를 했다. 그때는 ‘정간’이라는 현판은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원로 구사들이 죽고 그 자리가 비었다.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인사하는 관행을 계속했고,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 인사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의문에 답을 해준 것이 ‘정간’이라는 현판을 걸고 그것을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간이라는 현판이 정에 내걸렸다. 1970년대에 전라도에서 생긴 일이다.
․이 정간은 1970~80년대 들어 급속히 퍼졌다. 전라도에서 시행된 활쏘기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정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흉내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버릇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경건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
․한 마디로, 정간은 구사들이 신사들 군기 잡으려고 만든 것이다.
4.구사들의 혼동과 정간의 실체
․정간에 대해서 물으면 많은 구사들이 해방 전부터 있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은 대부분 정간이 없었다고 답하는 반면, 해방 직후에 집궁한 분들이 정간은 해방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방 전부터 정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그러면 그 당시에 전주 천양정에도 정간이 있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1986년까지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었다고 말을 해주면 그제서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기억을 다시 더듬는다. 이것은 정간이 구사들의 위기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궁도협회 공식규범인 “한국의 궁도”라는 책은 광주 활량 임종남의 편집으로 1986년에 찍어냈다. 거기에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다고 나온다. 정간에 대한 대한궁도협회의 공식 공증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간이 전국에 두루 퍼진 것은 기껏해야 10~15년 상간의 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정간에 관해서 고증해준 분들은 다음과 같다. 해방 전후에 집궁한 분들이다.
성낙인(서울 황학정), 고익환(서울 석호정), 안석흥(인천 연무정), 하상덕, 김현원(인천 무덕정), 윤준혁(부산 오륙도정), 이종수(고흥 문무정), 박경규(금산 흥관정), 이용달(평창 대관정), 김복만(울산 청학정), 이상엽(강화도 거주), 김병세(수원 연무정), 김향촌(진주 창림정), 박병연(전주 천양정), 강현승(서울 수락정)
5. 정간과 정간배례가 불필요한 이유
․건축 용어 밖의 다른 용례는 없다. 국궁계만 이상한 뜻으로 쓰고 있다.
․기원과 뜻이 모호하다. 현재 정간에 대고 절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는 ‘초시례’와 ‘등정례’에 다 들어있다. 게다가 대회 때마다 ‘순국선열과 먼저 가신 궁도인을 위한 묵념’을 해준다. 굳이 중복해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종교상의 믿음과 부딪힌다.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비친다. 왜정 때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다를 것이 없다. 왜정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신사참배를 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정간도 마찬가지이다. 정간 때문에 활을 사고서도 배우기를 포기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정간배례란 국궁사 5천년 동안 없던 일이다.
․국궁인들이 동의한 적이 없다. 국궁계에서 논의를 거친 적이 없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퍼진 것이다.
․서울 황학정에는 지금도 정간이 없다.
․정간은 국궁계 전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간은 옛날 관리들이 활을 쏘던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이다. 정간은 그런 활터들만의 풍속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을 다른 활터에서 따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두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은 예절 상 권장할 사항이지 강요사항이 아니다. 게다가 정간이라는 현판까지 걸어서 그 자리를 강조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활터의 예절이 이미 결단났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밖에 안 된다.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경우 외국인들에게 정간은 장애물일 뿐이다.
6.우암정의 정간을 떼어야 하는 이유
․정간의 근거가 없다.
․미신화한 대상을 모실 필요가 없다.
․정간은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일 뿐이다. 굳이 우리가 따라할 필요가 없다. 청주 우암정은 옛날 관리들이 활을 쏘던 곳도 아니고, 무과를 치른 곳도 아니며, 원로 구사들이 나와서 소일하던 곳도 아니고 선생안도 없다. 정간이라는 현판이 있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다.
․우암정은 충북국궁의 수사정이다. 충북궁도협회가 계속 같이 존재해왔고, 그런 까닭에 국궁사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전국 최초로 “충북국궁사”가 나왔고, 협회 홈페이지도 처음 개설했으며, 온깍지궁사회가 이곳에서 출범했다. 국궁사에서 중요한 많은 변화가 알게 모르게 이곳에서 생겼다. 우암정은 전국 활터의 풍속을 선도하는 셈이다. 이런 정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앉은 정간을 그냥 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간은 반드시 떼어내야 한다.
․오 천 년의 역사를 지녔고, 앞으로도 무궁하게 이어갈 국궁에 뜻도 모호하고 15년 안팎 정도밖에 안 된 정간을 계속 놔둘 수는 없다. 국궁계의 역사를 새로 쓰는 우암정에서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못한다.
․우암정에서 정간을 내리면 국궁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이로써 우암정은 국궁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며 그 역사의 중심에 선다.
․반성 없이 진행된 국궁계의 관행에 쐐기를 박고 새로운 흐름을 열게 된다.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토대를 마련한다.
덧붙임2: 우암정 방문객을 위한 안내문
우암정에 정간이 없는 이유
아름답고 유서 깊은 활터 우암정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우암정에는 ‘正間’이라는 현판이 없습니다. 국궁 1번지인 서울 황학정에도 없고, 정 안에 그것을 걸어두어야 할 필요성이 없기에 2003년 1월에 뗐습니다.
정간이란 말은 전통 건축에서 건물의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정간’이라는 명찰을 달아주는 것은 ‘역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역전 앞’이라고 하거나 ‘모찌’라고 해도 될 것을 ‘모찌 떡’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고, 젖먹이 아기들에게 글씨를 깨우쳐주려고 집안의 각종 물건에다가 이름을 써서 붙여두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아이들이 다 자랐는데도 명찰을 그대로 두는 집안은 없을 것입니다. 정간이란 현판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정간이 건축물의 중앙을 뜻한다는 것과, 옛날에 어른들이 앉았던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고 인사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이 ‘正間’이라는 현판이 없어도 그곳이 정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고, 따라서 뱀 그림에 다리를 더 그려넣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우암정에서는 그 현판을 떼어낸 것입니다.
정간에 대고 어떤 뜻으로 목례를 하든 그것은 그렇게 하는 분의 선택입니다. 정간이란 현판이 없다고 해서 배례를 못할 것도 없고, 현판이 붙어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더 생기지도 않습니다. 정간이라는 명찰이 있건 없건 간에 우암정 건물의 한 복판은 건축용어로 ‘正間’입니다. 정간배례라는 절차가 꼭 필요하다 싶은 분께서는 활터 건물의 중앙인 정간에 대고 하시면 될 일입니다. 거기에다 명찰을 붙이고 안 붙이고는 우암정 내부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현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봅니다. 우암정의 정간 현판은 우암정 내부에서 결정한 일입니다. 손님 여러분의 생각과 다소 다른 바가 있더라도 우암정 내부에서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인 만큼 그것에 대해서는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즐겁게 활 내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청주 우암정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