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지나간 인연들 중에
한양대 설립자 故 김 연준 박사
물과의 인연이라 할지 필자가 지난 80년도 중반에 보령시 청라면 동보탄광촌에서 교역자로 사역할 때에 여름장마에 홍수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탄광의 검은 흙탕물이 재방 둑에 넘쳐 붕괴되어 사택이 전부 수몰되어서 살림도구는 물론 천여 권의 책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덕분에 시련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는 삶을 체험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난 90년도 중반에 광명시 옥길동 군사보호지역에서 개척사역하다가 어려움이 많아서 광명6동 어느 지하 건물로 옮겨 사역할 때에도 여름장마에 재방이 범람하여 도시가 물바다가 되었으니 내가 살던 지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다시 모든 물건이 더러운 물에 잠겼으니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그런 시련 속에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위로와 인생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무렵 우연히 내가 사역하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평범한 옷차림을 한 노인 신사 한 분이 찾아 들어오셨다. 나는 그분에게 인사를 겸해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분은 권위적인 태도는 아무 것도 없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00님이 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저는 기독교신문사에 김연준 사장입니다.” 나는 뜻밖의 소개 말씀에 꼭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이 어찌 여기까지 오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지나가다가 그냥 들어왔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제가 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여 신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주소를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정말로 이 분이 기독교신문사 김연준사장님이라면 여기까지 오셔서 신문구독을 권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주소를 적어 드렸다. 그랬더니 참으로 겸손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수고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그분은 차도 없이 조용히 걸어서 가셨다. 그 후 그분이 약속하신 말씀 대로 지금 기억하기로는 한 6개월 동안 계속해서 신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시 2000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분이 우연히 한양대학교를 설립하시고 총장으로 오래 계셨던 분과 동일한 분인가? 아니면 동명이인(同名異人)인가하는 의문(疑問)을 품게 되었으나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가, 2009년 6월 7일 오늘에서야 바로 그분이 우리의 통일찬송가 92장을 작곡하신 음악가와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나와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때 일을 추정해 보니 벌서 그즈음에 김 연준 박사께서는 아마 공직에서 막 물러나셨던 만70세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고, 참으로 겸손한 분이었는데, 하는 깊은 인상만이 추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또한 참으로 아쉬운 것은 진작에 그분이 그렇게 유명하고 훌륭하신 김 연준 박사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면 얼마나 더 기뻤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음은 그분에 대한 인터넷 검색자료를 정리하였다. 김 연준 박사는 가곡 `청산에 살리라'의 작곡자이자 한양대 설립자인 백남(白南) 김연준(金蓮俊) 전 한양학원 이사장이다. 그분은 1914년 2월 20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서 1939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양대, 한양여대, 한양대 사범대학 부속 중ㆍ고교, 한양초등학교, 한양여대 부속 유치원, 한양대 의료원, 한양사이버대 등 교육 사업을 벌였고, 한양증권주식회사, 백남관광주식회사, 한양개발주식회사, 대한출판주식회사 등을 운영했다. 그분은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한양대 총장으로 지낸 분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학 총장으로 재임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음악가로서 연희전문학교 시절 현제명 교수를 사사했으며 ‘청산에 살리라’, ‘비가(悲歌)’, ‘시인의 죽음’ 등 가곡을 무려 1천 601곡을 작곡했다. 1979년 독일 보쿰대학의 초청으로 7개 도시에서 ‘한국 음악의 밤’ 연주회를 열었으며 1981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연주하는 등 해외에서 14차례, 국내에서 18차례 발표회를 열었다.
또한 김 연준 박사는 무엇보다 자택에서 명천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지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신앙인으로서 소명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서울로 올라와 학업에 매진하는 동안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을 키웠으며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장로직을 안수 받았다. 그리고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했으며 국제신문인협회(IPI) 이사, 기독교신문 발행인, 대한체육연맹 회장, 우정의 사절단 한국본부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평생을 교육과 음악 등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 교육공로 봉황장을 비롯해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금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다음은 한양대학교 영문학 교수셨던 신동춘 시인이 작사하고 김연준 박사께서 작곡한 비가(悲歌)이다. 신동춘 교수님도 필자와 우연한 관계로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