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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성 및 유래 | ||
신선성당의 지역 특성과 유래
신선성당은 영도 소방서. 옛 구청. 그리고 영도대교를 경계로 남쪽이 해당지역이며 과거에는 "석말치" 라고 불렀으며 당시에는 어민들과 어구를 보관하는 어장막이 있었다,
1939년 영도대교가 가설되어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본당이 위치한 곳은 과거 보리. 콩, 고구마 등의 특용작물을 경작하는 소수 농민이 살았고 6.25 때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죠조 신부가 1890년 청학동에 머물다가 부산진(범일동)으로 이거한후 1906년경 초량에서 영세를 받은 서순익(안또니오)가 영도로 이주해 살게 되었고 1910년경에 곽 소시모. 장 안드레아 등이 모여 살았다,
1930년경 신자가 30여명정도였으나 정식 공소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김우태. 서세찬 등의 집을 택하여 공소예절을 치뤘고, 1935년에 정식공소가 성립되었다.
이후 6.25동란으로 서울 성신대학이 이곳에 가교사를 설립, 1951년에는 신학생들의 취사용 화목을 구해오다 서세찬(마지아)이 팔송에서 공비의 총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1955년 1월1일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를 위해 노력한 김기봉 필립보 신부님이 초대신부 이다, 김신부님은 당시 미군의 협조로 성당구내에 성모 건설원. 전쟁 고아원등을 건설하여 광안리방면으로 이주 할 때까지 여러 가지 공사와 고아들을 보살폈으며 현재 구 유치원으로 사용하는 강당이 그때 지은 성당이다,
1957년 1월 첫 레지오 "그리스당의 도움"이 창단 되고 현재 2.150차 주회를 돌파한 레지오가 3팀이고 꼬미시움 1개, 꾸리아 2개, 레지오 팀이 36개로 발전하였다, 20개의 심신단체가 성직자 한 분 수도자 3분의 지도아래 활발한 신앙생활을 함은, 과거 당시 전쟁의 참화로 주민의 생활이 매우 궁핍하여 N.C.W.C 의 구호양곡에 의한 전교활동도 일조 하였다고들 생각한다, 당시 양곡 배급 시 그 행열이 몇 백미터나 되었다고 어른들은 회상한다,
1962년 5월 성모신협(초대이사장 신철호 고스마)이 생기고 1964년 3월 4일 준공 축성된 현재의 성전은 이병만 신부님 재임 때 이루어 졌으며 당시 노력 봉사한 교우들의 노고도 컸다고 전한다.
1973년 4월 김남수 신부님 재임 때 성모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전교사업의 미비점을 보완하였으며 웅장하고 아름다운 본당의 자랑거리인 성모동굴은 송기인 신부님 재임 때 만들어지고 주교님 축성 미사가 봉헌되었다,
2008년 현재까지 16분의 사제가 바뀌면서 4개 본당 합동 야외미사. 지구 체육대회. 본당의 날 운동회, 성지순례. 가두선교. 혼인 갱신식. 각종 신앙강연회. 가나세미나. 성전수리. 마당 포장공사. 교육관 건립 등 많은 전교 사업으로 활기찬 성당이 되어 현재 신자가 53개 반에다 3.00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6분의 사제(김만수 요한보스꼬. 이병주 시 몬. 김정호 분도. 정승환 배드로, 제춘홍 베드로마리애. 윤준원 미카엘)와 여러분의 수녀가 배출되었다.
첫댓글 본당의 유래 잘 일고 갑니다.....감사합니다...
곽소시모 곽라파앨 회장님 부친 이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