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은 연관되어 있다'
-디
아워스-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는 버지니아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고교
때 외우다시피한 시에서 처음 만난 버지니아는 그저 관념적이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읽은 그녀의 소설은 평면적이고 지루했지요. 자신의 내면을 읊조린 것 외는 별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자처럼 무표정하고 길쭉하게 생긴 그녀의 냉소적인 얼굴만큼이나 실제 삶은 충격적이었지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하면 항상 '인식'을 중요시
여긴 우리의 '전혜린'같은 느낌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모든 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앞선 사람의 고통은 이후로도 되풀이된다'는
버지니아의 나레이션과 한 여인의 하루 동안의 삶이 모든 인간의 삶의 원형일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합니다.
영화는
세 여자가 각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는 걸로 시작합니다. 거울은 곧 자신의 투영, 즉 삶의 투영으로 이어지지요. 자신의 삶을 거짓없이
정직하게 받아내는 이들은 비록 일상이 고통스럽고 힘겨웁지만 고스란히 자기에게 주어진 몫의 삶들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지요. 용기있지 않은가요! 버지니아가 시도한 삶의 방식은 자살입니다. 로라는 가출이라는 방식, 그리고 로라의 아들, 리챠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시대적 운을 잘 타고난(?) 클라리사는 자기 식으로 삶을 영위하지요. 영화를 보면서 삶과 죽음이
별개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또 다른 삶의 방식에 다름아닐테지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자유의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내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에 내재하고 있는 동성애적 요소를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없습니다. 여인들이 나누는 키스, 사랑을 표현하기엔 키스는
가볍지만 영화에서 나누는 여인들의 짧고도 격렬한 키스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버지니아와 언니 바네사와의 키스, 로라와 이웃집 여자와의 키스,
그리고 클라리사와 동성애 동거녀인 샐리와의 키스는 넓게는 고통스런 여성의 삶을 나누는 교감의 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영화 뒷부분에서 보여지는
대사나 암시적인 장치들을 보면 분명 동성애적 요소를 안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영화 외적 부분이지만 작가 바이클 커닝햄과 감독 스티븐 달드리도
동성애자입니다.)
소박한 일상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비밀스럽다
그렇다고
세 여자 모두가 성적 정체성의 혼란만으로 삶이 고통스러웠다는건 아닙니다. 삶은 분명 권태롭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유없이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때가 있지 않던가요. 로라는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녀에겐 이런 삶이 견딜 수 없이 버겁고 힘들테지요. 그녀는 뒷 날,
아들이 죽은 후 클라리사를 만나 얘기합니다. 어떤 남자의 정자를 받아서 딸을 낳았다는 클라리사의 말에
'운이
좋았군요'라고 말합니다. 클라리사는 직감하지요.
'남모르게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고통스러워서 죽을려고 했다.'
'죽음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했다' 이
말에 클라리사는 자기와 같은 부류(동성애자)임을 눈치채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샐리와 격렬히 키스를 나눕니다. 그리고 남편의 생일날 욕실에서의
장면도 그녀의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침상에서 남편은 계속 아내를 부르지만 그녀는 슬픔에 겨워서 하염없이 울기만
하지요. 그리고 가출해 버립니다.
영화는
아리러니하게 그녀의 아들 리챠드를 에이즈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리챠드는 어릴 때 어머니로 인해 상처받고 그 후, 뒤엉켜버린 삶으로 인해 결국 또
다른 삶, 자유의 이름으로 몸을 던집니다. 시대를 잘못 탄 로라의 말처럼 클라리사는 운좋게도 시대를 잘 타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녀는 리챠드와
이성애를 나누면서도 동성애 연인인 샐리와 동거하고 있으며 정자를 받아 자식도 가졌습니다. 버지니아와 로라는 자신들의 동성애적 욕망을 억압할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았지만 클라리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 셈이지요. 시대에 따라 대응하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 각기 다릅니다. 시대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힘과 그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물론 버지니아와 로라가 가진 고통의 근본적 원인이 억압된 동성애는 아니지만 이로 인해
삶이 더 힘들어진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자기 존재감 마저 흔들린게 분명할테지요.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로 보여만 줍니다. 난 굳이 이 작품에다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우리가
모두 일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외쳤습니다. 버지니아가 직접 등장하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적 성격은 분명하게 있을테지요. 하지만 난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성적 정체성의 문제도 결국 실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기 실존적 물음은 곧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영화의 구심점은 세 여자가 아니라 버지니아인 것 같습니다. 로라와 클라리사는 버지니아의 삶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혹 각자 삶의 고유성을 가졌을지라도 세 여자의 삶은 동일선상에서 한 꾸러미에 꿰여져 있습니다.
아!
형형한 그 눈빛들.
세
여자의 삶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그 눈빛들로 인해 영화는 더욱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