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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선돌 마을은 일로읍 소재지에서 청계쪽으로 3㎞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일로에서 청계로 넘어가는 815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일로읍 감돈2리 선돌마을이다.
선돌의 의미
선돌(입석)은 길쭉하고 커다란 돌을 다듬어 마을입구 등에 세워 기념하거나 신앙의 대상물로 삼았던 돌을 이르며, 주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잡귀 잡신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며, 농사의 풍요를 기원 할 때 세워 두는 돌이다. 고인돌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 문화의 하나인 선돌은 선사 시대 특히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우리 지역에는 선돌 마을이 세 군데나 있다. 해제면 송석리 입석 마을과 청계면 도림리 선돌 마을 그리고 일로읍 감돈리의 선돌 마을이며 마을에 선돌이 있는 곳은 26개 마을의 41기가 있다.
마을회관 |
입향조
감돈리 입향조는 주민들이 뚜렷이 알고 있듯이 남양 홍씨 홍치선이다. 공은 1584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5세에 스승을 찾아 글을 배울 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고, 나이 9세에 사서삼경을 끝냈다고 한다. 또한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고 그 뜻을 어기지 안했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남하하여 일로읍 국사봉 아래에 자리를 잡으니 甘心 遯世(현실의 혼탁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상을 피해 은둔하여 생을 영위함 - 편집자 주)의 뜻을 취해 마을 이름도 감돈리라 했다. 이후 공은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중년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부 판관까지 지냈으며 손자는 성균관진사로 충청도 병마사를 지냈다.
마을이름 유래
마을 이름에 관해서 구전되어 오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전에 이 마을 주변에는 수풀로 우거져 있어서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울창한 수림이었다고 한다. 해서 난리가 났을 때 피할 수 있겠다 싶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1811년 홍경래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조정에서 남양 홍씨를 보는 대로 죽인다는 소문에 이 마을에 숨어서 세상을 피해 산다는 의미도 있다.
감돈1리인 감돈 마을과는 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며 입향조의 마을형성에서 보듯이 16세기 말에 감돈 마을이 형성되었고 선돌 마을은 19세기 초에 감돈에서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을은 현재도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실지로 호구총수에는 감돈리만 나오고 선돌 마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마을은 지방도로에서 남창천을 가로 지른 선돌교(2005년 준공)를 지나 들어오면 마주하게 되는 수산가공물 공장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수산가공물 공장 외에도 참나무 목초액 생산공장 그리고 주물 금속 공장이 들어 있어 마을 경관을 해치기는 하지만 공장들이 주민들의 농한기 주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선돌과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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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 공장 뒤에는 우리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잘 생긴(?) 선돌이 우뚝 서 있다. 끝이 뾰쪽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몸체는 각이 진 화강암 재질의 돌이다. 길이도 3ⅿ가 넘어 보이고 폭도 1.8ⅿ가량 되는 우람한 모습이다. 선돌 주변에 5기의 고인돌이 남아있으며 드문드문 굄돌도 그대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 선돌 주위에 3그루의 오래 된 당산나무가 있어서 새끼줄로 선돌에 옷을 입히면서 잡귀 잡신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남창천을 따라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석공들이 마을에 들어와 절구통을 만들거나 돼지 구시통을 만들기 위해 가져가 버리고 새마을 사업 때는 뒷산의 사방공사를 한다면서 돌을 가져다 써버렸다. 또한 논밭을 경작하면서 논 밭에 있는 돌을 묻어버리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현재는 선돌 주위를 비롯하여 10여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국사봉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뒷산인 국사봉(國師峰)에 일제 시대 중반까지 봉홧불을 올린 흔적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일제 말기 굴을 파면서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지역 역사 자료에는 국사봉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해서 봉수대가 정말 있었냐고 확인을 해도 확실히 봉수대였다고 한다. 또한 가물 때에는 이곳 무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으며 현재는 헬기장이 있다.
마을 지명
뒷산에는 계곡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나골, 고동골, 방덕골, 우녕골, 검적골, 각골 등이 그것이다. 이 골 중에서 방덕골과 사라골에는 일제시대 말 일본인들이 군사용으로 팠음직한 바위굴과 흙 굴 등이 남아 있다. 또 검적골에는 감씨바위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외에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말[馬]발자욱이 선명히 남아있는 독짐재라는 곳이 있는데 이 재는 옛날에 한 장군이 허울로 진을 치고 있었던 재였다고 한다.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이 재를 넘어 목포에 가서 물물교환을 했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는 굴과 붉은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는 뒷생이, 감돈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논에 대기 위하여 막아놓은 양달보, 함보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한때 이 마을의 풍광과 주변 환경이 좋아 군에서 도청 직원들을 위한 전원주택이 계획되기도 했다고 한다.
영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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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을인 소이안에는 남양 홍씨의 제각인 영성각이 있다. 영성각 안에는 상량문과 축문을 비롯한 5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제각 옆에는 마을의 입향조를 비롯한 남향 홍씨 조상들의 묘가 있는데 일반 사람이 보아도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는 폐교된 일로북초등학교가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공동행사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함께 한 마을 이장의 이야기로는 마을에 정자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60호에 12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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